후설의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에 대하여*
홍 성 하(우석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후설 현상학과 관련된 논의는 의식의 지향적 구조라는 특징을 통해 다루어지며, 이 구조를 해명할 때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자아다. 왜냐하면 지향성이라는 구조는 자아의 의식작용이나 체험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아개념은 고대나 중세철학에서는 직접 다루어지지 않고 영혼, 신체 또는 의식과 같은 개념을 통해 해명된다. 비로소 근대철학에서 자아문제가 철학의 중심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자아를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으로, 라이프니츠는 사유작용의 주체를 존재하는 실체로 규정하고 있는 점들이 좋은 예가 된다. 특히 로크는 자아를 자기(Self)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인격(person)을 지칭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기로서 자아는 “지각할 수 있거나 쾌락과 고통을 의식하거나 행복, 또는 불행할 수 있는 의식적 사유존재다.” 여기서 의식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을 동일한 인격으로 결합하며, 자아는 이러한 의식의 동일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버클리가 자아를 영혼이나 정신적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자아는 사유작용의 주체거나 영혼, 실체 등으로 다루어지면서 근세철학의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칸트에 이르러 자아는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로 구분되며, 이러한 구분은 재차 독일 관념론에 의해 자아와 비아(Nicht-Ich)라는 관계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철학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근대적 자아개념과는 달리 후설은 자아를 세계와의 지향적 관계 속에서 해명하고 있다. 후설의 의식현상학에 의하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자아와 지향적 상관관계 속에 주어져 있고, 이 자아는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로 구분되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논리연구』 이후의 후설 현상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심도 있게 다루어지게 된다. 물론 후설은 초기『논리연구』시기에는 순수자아를 일종의 허구적인 것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인격적 자아개념을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다. 그후 『이념들』을 통해 순수자아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적 작업의 과제로 삼고 이를 체계적으로 다루게 된다. 무엇보다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 이끌어낸 순수체험의 영역에서 순수자아는 현상학적 명증성을 확보하게 된다. 소위 괴팅겐 시기(1901-1916)에 후설은 순수자아와 대조적으로 인격적 자아개념을 다루면서, 그 특성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에서 자아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과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후설의 프라이부르크 시기라 일컬어지는 1916년 이후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연구를 통하여 자아와 관련된 문제를 크게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로 구분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미 고전적인 주제가 된 것처럼 여겨지는 후설의 자아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한번 제기함으로써 후설 현상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특히 사태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일상적이며 자연적인 ‘나’를 지칭하는 용어 속에 숨겨진 자아 개념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이러한 자아의 해명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후설의 저서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2. 순수자아
2. 1. 후설과 데카르트의 순수자아
우리는 누구나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태도 속에서 자아를 특별히 해명하거나 분석하지 않고서도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자연적인 태도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직접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부분까지도 마치 주어진 양 믿는 태도를 말한다. 지각되지도 않은 부분을 마치 지각한 것처럼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대상이 의식과 무관한 의식초월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것이고, 어떤 명증성도 갖지 못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대상은 우리의 의식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의식작용에 의해 구성된 의미구성체다. 이러한 자연적 태도의 극복을 위해 의식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고, 이러한 의식의 통일적 원리로서 사유작용의 개념을 규정하고자 시도한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 초기에는 자아와 체험과의 관계를 통해 다루어지고 있다. 후설에 따르면 ‘-에 대한 의식’으로서 체험은 “체험류 속에서 특정한 코기토의 형식으로 의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자아로서 순수자아를 의미한다. 순수자아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드러난 순수체험의 주체며, 다양한 의식작용들에서 동일성을 지닌 자아다. 예를 들면 자아는 지각작용에서 지각된 것, 기억작용에서 기억된 것, 상상작용에서 상상된 것을 지향하고 있는 존재로서 자아는 의식작용과 그 대상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는 순수한 존재다.
이러한 순수자아에 대한 후설의 논의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나타난 순순의식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확실성의 영역인 ego cogito나 순수의식과 같은 순수자아에서 학문의 절대적인 터전을 찾고자 하였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순수하게 사유하는 자아로 되돌아가며, 성찰하는 자아로서 순수자아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존재의 터전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이 순수자아로부터 절대적으로 확실한 명증적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입장을 “제 2의, 그리고 보다 깊은 의미로 철학하는 자아, 순수의식작용의 자아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선험적인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후설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주관의 의식체험으로 되돌아가고자 시도한다. 이는 모든 체험이 코기토의 형식으로 수행될 때, 그 지향적 체험의 주관이 지향적 대상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와 후설이 유사하게 순수자아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는 “소박한 객관주의로부터 선험적 주관주의로 철저하게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설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세계를 근본적으로 괄호에 넣지 못하여 아직도 심리학주의에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을 선험적 주관성을 이끌어내는 최초의 방법으로 평가하지만, ‘나는 사유한다’라는 명제 속에 근거하고 있는 선험적인 인식과 학문의 정초라는 참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일체의 선입견을 제거코자 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첫째, 수학적 이념에 집착함으로써 자아를 세계에 대한 연역적인 학문의 전제로 삼고 있다. 즉 순수자아로부터 세계를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판단중지에서 얻어낸 순수자아를 심리학주의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순수자아는 사유하는 마음, 영혼으로 이해되고, 이는 세계 속에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세계의 소단편(ein kleines Endchen)이라 부른다. 반면에 후설의 순수의식은 세계를 규정하는 근거며 원리다. 또한 선험적 환원에 의해 밝혀진 선험적 주관으로 이 환원을 통해 주관이 구성하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후설의 선험적인 정초는 세계까지도 선험적인 주관 속에서 확정하며, 주관은 세계의 소단편이 아니라 세계에 선행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 속에 명증적 체험으로 나타난 것이 어떻게 객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후설에게 무의미해진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2. 2. 지향적 변양(Modifikation)으로서 주의집중
후설은 세계의 근거가 되는 의식체험의 본질적인 특성을 무엇보다 순수자아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작용, 행위는 자아의 행위이며, 모든 행위는 자아로부터 생기고, 자아는 그 행위 안에서 현실적으로(aktuell) 살아가기” 때문이다. 후설은 이러한 자아개념을 먼저 행위개념에 있어서 구성적인 주의집중(Aufmerksamkeit)과 연관하여 다루면서, 이를 “지향적 변양의 근본유형으로” 파악하고 있다. 체험의 대상적인 것에 대한 현실적인 주의집중작용은 “지향적 체험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서, 자아가 심적인 삶의 중심이라는 소위 뮌헨의 현상학자라 지칭되는 립스(Th. Lipps)와 팬더(A. Pfänder)의 심리학주의적인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후설이 이들의 철학을 심리학주의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현상학이라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후설 입장으로 보면 현상학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개념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이들 뮌헨의 현상학자들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철학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무엇보다 후설은 팬더의 저술에서 다루어지는 주의집중에 대한 구절과 관련하여, 근대심리학에서 주의집중이 지향적 변양의 근본유형으로서 주의집중과의 본질적인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후설은 사태에 대해 주의집중을 하는 현상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순수의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순수의식 또는 순수체험은 현상학적 환원을 거친 후에 남게 되는 현상학적 잔여를 의미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태도에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대상으로 향하고 있던 우리의 시선을 의식작용이나 체험으로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객관적인 대상세계로 향하고 있는 한, 우리의 체험이나 의식작용은 그 자체로 의식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아는 주의집중을 하는 체험에서 지속적으로 대상과 지향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때 체험은 자아에 속하며 자아의 의식 이면을 드러내고 자아의 구조를 지닌다. 그러므로 체험은 의식작용을 꿰뚫어보는 자아에 관계하며 자아는 체험에 관계하게 된다.
자아는 자극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섬광이 나가고 들어오는 중심이며, 자극을 발생시키는 중심이며, 행위의 중심이다. 여기서 섬광이 우리의 주의집중을 환기시키게 된다. 자아가 지향적 작용으로서 주의집중을 한다는 것은 섬광이 자아로부터 나가는 것과 같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섬광은 지향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지향성의 특수한 양태인 현실성(Aktualität)이다. 현실성과 구별되는 비현실성의 양태는 무엇보다 지향적 체험의 본질적 구조와 관련하여 해명되어진다. 후설에 의하면 주의집중을 할 때 섬광을 포함하고 있는 지향적 체험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아의 의식작용이다. 그러나 주의집중을 하지 못하는 체험은 자아에 대한 지향적 관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 즉 체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서 자아은폐성과 자아이탈(Ichverlassenheit)을 의미한다. 이는 순수자아와 의식이 아무런 연관 없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음 장에서 자의식과 관련해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불명확하게 의식되는 것에 대해서 주의집중을 하는 시선을 던진다. 이는 주의집중이 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체험을 현실적인 체험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행위로부터 결코 사라질 수 없고 항상 행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작용이 비현실적이 된다면, 이때는 순수자아도 비현실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순수자아는 명증적인 의식작용을 수행할 때 파악된 자아며, 순수하게 의식작용을 수행한다는 것은 순수자아를 현상학적으로 순수체험의 주체로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순수자아는 다양한 표상작용의 주관적인 통일성이나 원리가 아니라, 각각의 지향적 체험이나 의식에서 드러나는 주의집중의 근원점(Quellpunkt)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현실성의 양태로 특징지을 수 있는 순수자아는 의식의 다양한 수행방식일 뿐, 완전히 비어 있으며 기술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설은 주의집중을 하는 지향적 체험의 구조계기를 대상극에 대립되는 의식의 자아극이라 부른다. “모든 의식작용이 의식대상을 요구하고, 행위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의식작용이 순수자아에 관계하는 한, 우리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현저한 양극성, 즉 한편으로 자아극, 다른 한편으로 대상극을 발견하게 된다.” 의식체험의 종합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자아극과 대상극과의 상관관계는 ‘자아, 의식작용 그리고 의식대상’(ego-cogito-cogitatum)이라는 의식의 지향성 구조로 해명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순수자아와 세계현상과의 상관적 관계를 밝히는 틀이 된다. 여기서 자아극으로서 순수자아는 앞으로 다룰 지향적 체험의 자의식과는 무관하다. 즉 순수자아는 지향적 체험의 원리도 아니고, 자의식의 구조도 아니다. 자아가 지향적 체험을 수행한다는 것은 지향적 체험이 자아의 구조에 근원적으로 비대상적으로 의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3. 순수자아의 동일성
후설에 의하면 순수자아는 의식류(Bewußtseinsstrom)에 있어서 개별적인 의식작용의 반복된 구조형식이 아니라, 수적으로 동일하며 유일한 것이다. 즉, 순수자아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판단한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느낀다’ 등과 같은 다양한 의식작용들이 변화할 때도 동일한 자아로 파악되며, 이러한 의식작용들의 주체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서 행위 자체를 기능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기능을 수행하는 자아로서 순수자아는 한편으로 행위 자체와 구분되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순수자아도 역시 삶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파악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삶의 매체로서 추상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양태의 의식작용들이나 체험에 있어서 순수자아는 이에 상응하는 각각의 대상들에 관계하면서도 그 동일성을 유지한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의식작용과 의식대상과의 상관적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동일한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자아가 각각의 의식작용에 독립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한 행위로부터 다른 행위로 영속적으로 관계한다는 점은 자아가 체험의 내실적(reell)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영속적으로 관계하는 동안에도 체험은 그 내실적 구성요소와 함께 생기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와 이 세계에 속한 경험적 주관성을 현상학적으로 배제한 잔여로서 순수자아가 남는다면, 이와 함께 구성되지 않은 고유한 양식의 초월성, 즉, 내재성에서 초월성이 생기게 된다.” 후설에게 있어서 의식대상과 실제적인 사물은 그 주어지는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지각에 있어서 내재적 지각은 그 지향적 대상이 지각작용에 내실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며, 초월적 지각은 그 대상이 지각작용을 초월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재성에서의 초월성은 자아가 변화하는 체험의 흐름으로부터 영속적으로 동일하게 머물면서 그 체험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설이 자아를 내재성에서 구성된 초월성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후설은 1929년에 쓴 유고에서 ‘구성되지 않은’이라는 구절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자아가 결코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는 실제적으로 초월하고 있는 사물처럼 공간적인 음영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의식류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수적으로 동일한 자아중심(Ichzentrum)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후설에 따르면 자아중심은 신체적으로 지향된 중심으로 개별적인 지향적 체험의 자의식이나 근원적 의식에서 주어질 수 없다. 자의식은 개별적인 의식에 놓여 있는 자아의 양극화(Ichpolarisierung)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자아의 동일성과 영속성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오히려 지향적 체험에 대한 반성에서 자아의 동일성이 파악된다. “우리가 자아 반성이라 부르는 새로운 종류의 의식작용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모든 의식작용의 본질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반성작용은 행위 자체를 대상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이제까지 대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지향하는 것이다. ‘이 멜로디를 들은 적이 있다’ 등과 같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반성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미리 주어진 세계의 토대 위에 서 있다. 반면에 선험적 또는 현상학적 반성에서 우리는 세계의 존재나 비존재에 관해 보편적 판단중지를 통해 이러한 토대로부터 벗어나 의식작용에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반성과 관련하여 자아는 의식작용과 같이 일차적으로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된 자아, 혹은 반성 속에서 드러나는 자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수행하는 의식작용을 두 단계로 나누어 현상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반성되지 않은 근원적인 순수자아의 의식작용과 새로운 행위로서 반성된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를 통해 수행하는 자아가 지난 행위의 수행작용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자아는 이질적인 자아가 아니고 더 높은 단계의 반성에 의하면 동일한 자아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처럼 상이한 단계의 반성적 행위에 있어서 자아는 주목하는 시선을 다양한 체험으로 향하며, 이 체험은 동일한 자아의 상이한 체험으로 드러나게 된다.
후설에게 있어서 근원적 의식과는 달리 반성은 반성된 체험을 정립하고 대상화한다. 여기서 정립은 지향적인 체험을 의미하고 지향적인 체험을 수행한다는 것은 “정립작용을 행하는 것이고, 정립된 것으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성작용에서 파악된 동일하게 지속하는 자아는 구성된 내재적 시간에 속하게 된다. 이 내재적 시간은 대상적 시간으로 객관적 자연의 실제적 시간은 아니다. 자아는 체험을 반성하는 행위에서 동일한 자아로서 대상적으로 구성된다. 왜냐하면 “반성행위는 방금이라는 양태로 반성되지 않은 체험과 그 자아극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반성적인 행위에서 동일한 것으로 구성된 자아는 다양한 체험의 통일성이다. 그러나 이는 통일적 자아가 체험의 통일성을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통일성을 수행하는 주체는 경험적인 주체가 아니라, 어떤 신체성과 인격성에 있어서 순수한 자아로서 지칭되는 주체다.
3. 자아와 자의식
3. 1. 근원적 자의식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수자아는 지각, 기억, 기대, 인식, 상상 또는 평가 등등과 같은 다양한 의식작용에 따라 다양한 양태의 대상들과 지향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적 체험들이 코기토 형식으로 수행될 때, 그 지향적 체험의 주관이 지향적 대상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서 주관에 내재하는 “대상을 향한 시선, 결코 없어서는 안될 자아로부터 튀어나오는 대상을 향한 시선은 코기토 자체에 속한다.” 지각에 있어서 지각하는 시선, 기억에 있어서 기억하는 시선, 기대에 있어서 기대하는 시선 등과 같이 이런 의식작용에 있어서 시선은 ‘-을 향한 시선’이다. 자아가 대상을 향한다고 할 때, 이 지향적 대상은 파악된 대상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파악작용(das Erfassen)은 어떤 것을 주목하거나 주의집중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파악작용과 주의작용에서는 “코기토 일반의 양태, 즉 현실태의 양태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주시해 보면 아직은 코기토의 양태를 지니지 못한 의식이나 행위가 취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양태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는 때때로 순수자아로부터 튀어나오는 자아의 시선이 대상을 향하고, 이 대상으로부터 흡사 역광이 마주쳐 나오는 것과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갈망함에 있어서 갈망하고 있는 대상에 매력을 느껴 그 대상을 향하지만,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히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사랑함에 있어서도 사랑의 대상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사랑의 대상에 애착을 느끼고 헌신적으로 몰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수자아는 행위에서 순수한 기능을 행하는데, 이때 자아는 기능을 수행하며 대상에 관계하는 자아로서 행위 자체와 구분된다.
후설의 의식현상학에 있어서 순수자아는 자의식을 지닌 자아로서 다양한 의식작용들을 수행한다. 자의식이란 무엇인가? 자의식은 근원의식(Urbewußtsein)으로 정의되며, 이는 파악하는 의식행위와 구분해야만 한다. 자의식은 재차 자아 없는 근원적 의식과 자아가 있는 근원적 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주의집중하는 체험에 관계하면서 그 체험에서 자아가 현실적으로 의식작용을 수행하고 있다. 반면에 전자의 자아 없는 의식이란 자아가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은폐된 체험을 말한다. 후설에 따르면 무의식적이나 은폐 상태로 있는 자아는 무(Nichts)가 아닐 뿐만 아니라, 현실성으로 공허하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닌 지향적 체험의 구조계기(Strukturmoment)를 의미한다.
후설에 의하면 모든 의식행위들이 자아가 있거나 또는 자아 없이 이루어지든지, 또는 자아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근원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후설의 자의식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기에 대한 의식이나 자기중심적인 의식으로서의 자의식개념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모든 자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수행한 행위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의식을 수행한다는 것은 곧 근원적으로 의식된 행위나 자연적인 행위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의식에서 자아는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의미에서 나타나는 주객관계에서의 주체도 아니고, 또한 객체도 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의식은 의식변양에서도 나타난다. 후설에 따르면 “순수자아의 본질에 원본적인 자기파악, 자기지각, 또는 이에 상응하는 자기파악의 변양들인 자기기억과 자기상상(Selbst-Phantasie) 등의 가능성이 속하게 된다.” 이처럼 순수자아에 원본적인 또는 근원적 자의식과 그 변양들이 속한다 할지라도 이 둘은 동일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지각한다’ 또는 ‘내가 기억한다’와 같은 의식작용을 의식한 것으로서 의식변양의 의미는 근원적 의식으로서 자의식과는 같을 수 없다. 시간성과 연관된 의식변양은 자아 뿐만 아니라 의식작용도 동시에 의식되는 것을 말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의식은 본래 체험의 흐름을 의미하는데, 이런 체험의 흐름에 있어서 시간적 통일성은 동일성이 아니라 흐름의 연속이다. 다양하게 흘러가는 체험들은 바로 자아의 체험으로 통일적으로 의식되어진다. 여기서 체험은 자의식되고, 파지적이며 재생적이고 근원적으로 의식된 것으로서 일종의 통일성을 이룬다. 이때 자아는 통일성을 야기하지도 않고, 결정하지도 않는 상관자로서, 이런 통일성의 부수적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수자아와 체험류는 필연적인 상관자가 된다. 체험류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적 차원을 지니고 있는 의식의 지평으로 이해되는데, 후설은 시간적으로 통일된 체험이 체험자의 유일한 체험이라는 점을 순수하게 현상학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체험류에 있어서 다양한 체험들을 하나로 결합하고 통일시키는 원리가 시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험의 흐름은 결코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으로 의식되며, 이는 “회고(Wiedererinnerung)의 형식으로 그리고 회고에서 뒤에 따르는 반성의 형식으로 주어지게 된다.”
회고에 있어서 과거의 체험을 현전화할 때, 자아는 이중적 자아로 분류하여 생각할 수 있다. 후설에 따르면 모든 현전화하는 체험은 현전화된 것으로서 자아극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기억하고 있는 현재의 자아와 기억된 과거의 자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두 자아는 동일한 자아다. 왜냐하면 자아는 지속하는 것이고 현재의 자아는 과거의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후설은 『이념들』 I권에서는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순수경험류의 내재성에서 초월성이라는 개념과 연관하여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순수자아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사유작용에 대해 동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들』 I권 이후에는 순수자아를 내재적인 시간의 흐름 자체에 속하는 통일성이 아니라, 비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인, 그러나 내재적인 시간성과 관련된 이념적 (비내실적인) 통일성으로 규정한다. 현전화하고 현전화된 행위에서 동일시된 자아는 시간적인 지속을 지닌다. 이러한 지속적인 의식의 통일성은 능동적인 현전화된 의식에서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유작용의 현전화를 자아의 현전화에 부과함으로써 동일화하는 자아의 확산은 기억과 기대 또는 공허한 가능성의 형식으로만 가능하다.”
3. 2. 자의식의 수동성과 능동성
이 장에서 우리는 의식의 통일성에 관련하여 자의식의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양태를 밝혀 보고자 한다. 후설에 따르면 자아표상에 기초하는 자아의식은 자의식으로서 모든 지향적 체험에 내적으로 속하는 근원적 의식 또는 내적 의식을 전제하게 된다. 지향적 체험으로서 시각, 후각, 촉각과 같은 단순한 감각적인 지각작용은 내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의식된다. 그러나 내적 의식이 자의식의 필연적 조건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과거의 경험내용이나 행위들을 기억하거나, 미래의 경험이나 행위, 또는 가능한 행위를 예견할 때 자의식은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내적으로 의식된 지향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의식된 체험에서 다른 내적으로 의식된 체험인 과거나 미래, 또는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체험이 현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의식은 나의 과거, 미래, 또는 가능한 행위의 현전화하는 의식에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자의식은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두 가지 양태로 기능하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각작용에 있어서 지각영역 전체는 순수한 수동성에서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나타난다면, 능동적 지각은 지각영역에서 드러나는 대상들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다. 자아는 감각의 영역에 의해 촉발될 때 수동적 지향작용을 수행한다면, 감각의 영역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능동적 지향작용을 통해 대상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양태로 행해지는 자의식은 직접적인 단순한 의식도 아니고, 내적 의식의 단순한 계기도 아니다. 오히려 자의식은 일종의 일치(Einigung)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일치는 과거, 미래 그리고 가능한 체험작용의 현전화에서 수행된다. 그렇지만 이런 현전화는 다른 지향적 행위나 체험을 논제의 대상으로 삼는 특수한 지향적 행위라는 의미로 의식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우리는 자의식으로서 일반적인 현전화인 기억작용을 예로 들 수 있다. 어제 들었던 곡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지향적 체험인 곡에 대한 어제의 청각작용이 의식되지만, 이 청각작용이 지금의 내 기억작용의 필연적인 논제적(thematisch) 대상은 아니다. 기억작용의 논제적 대상은 일반적으로 내가 들었던 곡이다. 물론 나는 어제의 내 청각작용을 지금의 내 관심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체험작용을 대상화하는 반성작용은 자의식의 전제는 아니다. 자아는 필연적으로 자아의식에서 대상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표상된 작용이 직접적인 체험작용(Durchleben)이 아니라면, 이는 내 과거의 삶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미래의 삶으로 표상하고 미래에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으로 표상하는 미래의 삶에 있어서도 유사하다.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Durchlebtsein)은 후설의 의미로 근원적 의식 또는 내적 의식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체험작용이 자의식의 필연적 전제가 아니라, 자의식이 직접적인 체험작용으로서 근원적 의식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작용의 현전화에도 전제되어 있다. 후설은 이러한 자의식을 일치, 종합 또는 동일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후설에 따르면 자의식에서 현전화 작용은 필연적으로 자의식의 내용에 속한다. 이 내용에 근원적으로 현전화된 것으로서 체험작용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현전화 작용도 속하게 된다. 일치로서의 자의식은 근원적으로 의식된 현전화하는 체험작용과 근원적으로 의식된 것으로서 현전화된 체험작용 사이의 결합이다. 후설은 『논리연구』 I권에 대한 주석에서 ‘나’(ich)라는 단어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라고 지칭함(Sich-ich-Nennen)과 고유명사를 통해 명명함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지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자기명명 그 자체를 의식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런 의식은 본질적으로 ‘나’라는 단어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에 속하게 한다.” 자의식의 일치로서 이런 통일성은 결합된 것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내가 과거의 체험과 지금의 기억작용 사이에 연속적인 체험연관성을 상정하지 않은 채, 나는 과거의 체험들을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으로서 결합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 이 두 체험 사이에 무의식이나 수면의 상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설은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후기에 와서는 타자 문제로 확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자아는 사유작용에서 타자의 현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아는 보편적 세계경험의 상관자로서 보편적 세계현상과 연관하여 타자의 경험이나 의식을 지니게 된다. 타자를 경험한다는 것은 타자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타자를 이 세계의 주체로서 동시에 경험하는데, 내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자로서, 더구나 이 경우 내가 그 세계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타자들을 경험하는 나 자신도 경험하고 있는 자로서 타자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과 반성에서 근원적으로 주어진 나의 의식과 타자에 대한 의식과의 상호주관적인 문제를 다루게 된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근원적으로 고유한 영역은 모든 타자의 삶의 영역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나의 자아와 나에게 있어서 고유한 의식방식, 행위, 의식대상들과 같은 나의 것(das Meine)은 현전화에서 지속적으로 일치되며 침화(Sedimentierung)를 통해 그 고유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나의 본질(Meinheit)을 지니게 된다.
4. 인격적 자아
4. 1. 인격적 자아의 습득성
주지하다시피 후설은 객관적 세계를 명증적으로 정초하기 위해 객관적 세계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세계의 정립 근거가 되는 선험적 주관성으로 돌려 그 상관적인 관계를 되묻는 현상학적 환원을 시도한다. 그러나 선험적 주관성에 대한 논의가 유아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후설은 후기에 공동체(Gemeinschaft)와 상호주관성 개념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는 전기 현상학이 주로 의식작용과 의식대상의 지향적 관계를 통해 자아의 자기 구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다고 한다면, 후기에 이르러 공동체 속에서 현실적이거나 가능한 다양한 의식들을 동일한 것으로 직접 체험하는 인격적 자아를 중심논제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후설의 자아공동체 개념을 밝히기 위해 먼저 해명되어져야 하는 부분이 타자며, 이 타자에 대한 문제는 무엇보다 통각과 관계하여 다루어진다. 통각은 아무런 작용도 주어지지 않는 본래대로의 감각(Empfindung)과는 달리, 그 감각에 혼을 넣어주는 것과 같은 특성을 지닌 행위다. 다양한 감각들은 통각작용에 의해 통일되고 파악되면서 지향적 대상으로서 드러나게 된다.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지향적 대상과의 관계에서 표상이라 불리는 것은 행위에 내실적으로 속하는 감각과의 관계에서 파악, 해석, 그리고 통각이라 불린다.” 이는 대상을 파악하거나 통각한다는 것이 감각내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적인 통각작용과 다양한 감각내용이라는 도식에 의해 대상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자아와 의식적 관계를 맺게 된다.
앞에서 다루었던 자의식개념이 체험작용에 국한하여 논의되었다고 한다면, 인격적 자아는 성격, 능력, 습관, 그리고 확신 등과 같이 다양한 요소들과 관련하여 해명되어진다. 인격적 자아는 무엇보다 실천적인 면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때 신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앉거나 만지는 행위들에 있어서 하나의 능력체계인 신체가 인격적 자아의 주관적인 경험에 속하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신체는 무엇보다 키네스테제와 관계하며, 이것은 신체의 수용적 감각과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발적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용적 감각은 자발적인 키네스테제적인 의식을 기초로 해서 가능하며,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발적 감각은 자유로운 신체운동과 관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물을 나타나게 한다. 그러므로 신체는 자발성이라는 능동성과 수용성이라는 수동성의 양태를 지니며, 키네스테제적인 자유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에서 신체적 태도와 사물의 나타남을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이처럼 수용적이고 습관적인 키네스테제는 궁극적으로 ‘나는 할 수 있다’의 자율적인 의지영역에 예속되어 있다.
자아는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의식에서 능력과 확신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자아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아가 확신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자아의 근원성에서 스스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확신과 능력에서 세계는 가능한 지평으로 자아에게 미리 주어지며, 이 확신과 능력은 이전의 경험과 정립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갈 수 있는 자아에 의해 획득된 습득성이다. 후설은 습득성이라는 개념을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적인 습관과는 달리 대상극에 대립되는 자아극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자아는 본래적인 의미로 삶과 입장표명으로부터 자신의 것이 된 습득성을 지니고 있는 자아극”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보자면 습득성은 순수자아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인격적 자아는 신체적 토대 위에서 수많은 습득성을 자아 내에 형성함으로써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습득성에 의해 구성된 인격적 자아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주위세계 속에서 경험적인 자기 통각과 함께 지속적으로 구성되어 나가는 존재다. 만약에 내가 객관적인 세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확신을 하고, 이를 좀더 근접하게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내 “동일한 자아, 즉 관념적인 오성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확신을 바꿀 때에 자아는 지속하는 자아로서 시간적으로 확대되며, 이때 자아는 이런 “변화의 공허한 무대와 같은 방식으로, 좀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변화의 단순한 기초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본래적인 의미로 인격적 개체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후설은 인격적 자아의 본질을 다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격적 자아는 개체성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연상적이고 귀납적으로 구성된 통일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격적 자아는 개별적인 특성들이 동일한 통일성을 지닌 유형으로 이루어진다. 인격성, 개체, 그리고 개별적 특성이라는 개념은 자아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때 확신은 습관과 관계한다. 개별적인 특성은 그의 입장표명이나 관심, 동기, 확고한 의견, 결단력, 확신에서 밝혀진다. 이미 언급했듯이 습관과 능력의 자아는 자아극과 구별되는 인격적 자아로서 규정된다. 인격적 자아개념이 자의식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이 자아개념을 자의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적 존재로서 나는 습관, 능력, 그리고 확신에 있어서 변화한다는 점에서 더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에 따르면 인격적 자아는 이런 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통일적인 동일성을 지속하는데, 이는 인격적인 자아를 표상할 때, 내 개인적인 특성이 변화됨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자아는 지속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 확신에 머물러 있는 한, 이견이 있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확신이 변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자아는 극으로서 동일하다.” 인격적 존재로서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다시 말하면 본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을 것은 내 자신의 자기 평가, 자기해석, 내 자신에 대한 확신에 의존하고, 그 자체로 어떤 뚜렷한 경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내 현재와 과거의 체험으로서 행동과 수난의 역사는 나에게 보다 더 확연하게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체험했던 것으로서 행동하였고 당했던 많은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마치 사라진 것으로 여기지만, 갑자기 재차 이를 기억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체험은 나에게 속하게 된다.
4. 2. 인격적 자아와 주위세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드러난 순수의식에 있어서 자아는 통각을 토대로 밝혀지는 타자, 특히 다른 자아와 함께 세계를 경험한다. 이 세계에서 만나는 타자의 육체(Körper)는 나의 신체(Leib)와의 유사성을 통해 통각적으로 전이되는데, 이는 타자를 나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각에서 타자의 육체가 지각된 육체인 신체로서 파악된다는 것을 유비적 통각이라 부를 수 있지만, 통각이 유사성에 근거한다고 해서 바로 “유비추리(Analogieschluß)는 아니다. 통각은 결코 추리가 아니며, 사유행위도 아니다. 우리는 통각에서 미리 주어져 있는 대상들, 가령 미리 주어져 있는 일상세계를 한눈에, 그리고 확증적으로 파악하면서, 즉시 그 의미를 그 지평들과 함께 이해하게 된다.” 후설은 이러한 통각의 발생에 있어서 자아는 통각 자체의 주체로서 규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체는 “추상적인 자아점(Ichpunkt)이며 사물의 주위세계와 관계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위세계를 지니고 있는 주체이며 능력의 주체다.” 인격적 개체로서 자아는 신체적 자아를 의미하며, 순수자아처럼 대상극에 상응하는 자아극으로서 공허한 동일성의 극이 아니라, 선험적 발생의 법칙에 따라 새롭게 지속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자아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 자신의 능동적 발생에 근거하여 지속하는 자아 특성들의 동일한 기체로서 구성되기 때문에, 자아는 머무르면서 지속하는 인격적 자아로서 구성된다.”
후설에 의하면 의식에 대한 담지자로서 신체를 지닌 인격적 자아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위하여 후설은 무엇보다 주위세계와의 상관관계에서 변화하면서도 일관성 있게 통일성을 유지하는 인격적 자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체를 지니고 있는 인격적 자아는 자유롭게 움직임으로써 주위에 대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인격적 자아는 주위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하고 이를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아다.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고 목표를 위해 행동하거나 행위하는 주체로서의 인격적 자아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세속적 자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적 자아는 변화하는 주위세계와 지속적인 상관관계를 맺게 되며 이 세계와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격적 자아와 주위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후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그 가능성에 따라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선험적 통각과 선험적 연역법에 대한 칸트 주장과 관련하여 일관성 있는 자아의 이념은 후설에게 있어서 형식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선험적 통각을 통한 자아의 통일성은 자아의 자기유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데 불충분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자기유지는 보편적인 경험구조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물음과 연관하여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계가 실제적인 세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세계가 진리의 왕국 그 자체에 대한 칭호라고 한다면 자아는 자아로서 세계를 통한 통일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구조를 지녀야만 하고 자아는 획득해야 할 습득성을 잠재적으로 내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계라는 이름 아래 나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자는 나의 지향성으로만 자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선험적 통각의 자아와 상관관계에 있는 세계의 해체와 관련하여 후설은 인격적 자아의 해체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즉 우리는 왜 인격적 자아가 보편성을 지니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자아로서 세계 또는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하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 자신(Selbst)을 상정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대해 자아가 연상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인격적인 자살을 꾀할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 무의미하고 자아극이 인격적으로 습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자아극과 대상극이라는 양극화 속에서 세계와의 지속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후설은 상이한 종류의 인격적 주체와 상관관계에 있는 통일적 주위세계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의 주위세계와 구분되는 인간의 주위세계로서 유년시절의 주위세계, 성인의 주위세계, 원시인의 주위세계, 병자의 주위세계 등을 현상학적으로 다루게 된다. 현재의 자아(Gegenwarts-Ich)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삶의 보편성과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역사에 대한 자기관계를 강조한다. 인격적 존재는 단순히 현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지속과 관련된 삶 안에서 살아간다. 동물에게 있어서 순수하게 충동적인 지향성은 파지성(Retentionalität)으로서만 과거를 지니고 일차적인 재인식의 형식으로 사물의 자기고유성(Selbigkeit)을 지닌다. 이처럼 동물은 회고를 통해 과거로 소급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개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장소의 위치를 동일시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동물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지속하는 시간을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 해명되어지는 세계를 알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본능적인 지향성, 즉 순수하게 충동적인 지향성을 주위세계를 구성하는 지향성으로서 해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본능이나 충동과 같은 수동적 지향성을 반복함으로써 능동성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후설 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자아를 분석하였다. 특히 순수의식의 영역에서 중심테마가 되는 지향성 구조를 통하여 의식작용과 의식대상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자아문제를 제기하였다. 후설에 따르면 모든 지향적 체험 안에서 대상들이 구성되는데, 지향적 체험의 일반적인 특성은 깨어있는 자아로서 자아가 체험 안에서 대상으로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향적 대상과 자아라고 하는 양극화 이론은 지향적 행위로 확대된다. 내가 어떤 것을 본다면, 보는 작용에서 대상뿐만 아니라 보는 작용과 이 작용의 주체, 즉 지향적 체험의 원천으로서 자아 자체가 의식되어야만 한다. 지향적 체험의 근원으로서 자아에 관련하여 우리는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에 대해 다루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편으로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차이를 뚜렷하게 조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순수자아가 인격적 자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인격적 자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순수자아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격적 자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변화에서의 통일성이 순수자아에서 정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자의식은 의식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의식행위를 동시적으로 의식하는 근원의식을 말한다. 즉 내가 사물을 지각하면서 동시에 지각작용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의식현상학에 있어서 순수자아는 자의식을 지닌 자아로서 다양한 의식행위들을 수행한다.
이 논문에서 후설 사상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로서 자아를 연대기적이며 텍스트 내재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 주제에 접근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면서 후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접근방식이 후설사상 내부에 머무른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한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텍스트를 자유롭게 접근하면서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방식으로는 텍스트의 충실한 이해를 통해 그 사상의 깊이를 헤아리는 방식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후자의 접근방식을 통해 연구하였으며, 연구과정에서 주제를 제한하는 부분이 어려운 점으로 부각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문제와 관련된 많은 개념들을 이 논문에서 모두 주제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라는 주제를 매우 한정적인 의미로 이 논문에서 다루었으며,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이후에 제기되는 많은 논쟁들은 다음 연구과제로 미루고 후설 현상학에서 자아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고찰하는데 주력하였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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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 XIII: Zur Phänomenologie der Intersubjektivität, Erster Teil, hrsg. v. I. Kern, Den Haag 1973.
Bd. XIV: Zur Phänomenologie der Intersubjektivität, Zweiter Teil, hrsg. v. I. Kern, Den Haag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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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 XIX/1: Logische Untersuchungen, hrsg. v. U. Panzer, The Hague/Boston/Lancaster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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