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슐라이어마허의 언어해석학

나뭇잎숨결 2020. 9. 17. 15:34

슐라이어마허의 언어해석학*


김 용 일 (계명대)


Ⅰ 들어가는 말

해석학은 오늘날 현대 독일철학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전체가 관심을 갖는 중요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며, 이성이 아닌 욕망을 조명하려는 현대 철학에서 해석의 문제가 중심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환경과, 자기 자신, 그리고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학문인 철학과 문학이 인간과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론의 정립을 요청하고 더 나아가서 이 방법론을 통한 올바른 세계 해석에 중요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학의 관심은 언어에 대한 이해와 이해된 언어를 통한 세계 이해에 집중된다. 분석과 종합이라는 해석학적 순환론에 따라서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밝혀내고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 은유와 비유, 환유를 통하여 드러나는 언어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올바른 해석의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올바른 해석의 기술을 통하여 해석자는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와, 세계를 이해하는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
해석학의 중심 주제인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언어가 드러내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현대 문학과 철학에서 시도하는 언어에 대한 정확하면서도 다양한 이해에의 욕구와 일치한다. 언어의 명료화와 다양한 의미 이해는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와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에 대한 명확하면서도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언어가 현대 문학과 철학에서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언어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세계 자체의 의미이기도 하며 인간의 인간됨의 의미가 언어로 표현되는 인간의 규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에서 언어가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언어자체에 대한 이해는 해석자가 주어진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의 직설적 의미와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두 번째 이유가 당연히 따라나오는데, 정확한 언어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자는 저자보다 더 잘 저자를 이해하면서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해된 언어는 대화 상대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면서 언어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형성하게 하고, 형성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과정은 언어가 지향하는, 담론을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 당사자가 언어 속에 담겨진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해석자가 세계에 대하여 갖는 자신의 선입견을 수정하면서 동시에 비판적 이해를 통한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담론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의견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담론은 그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될 때 비로소 진행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담론을 통하여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언어의 바른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언어를 통하여 드러나는 세계를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담론이 필요한 이유는 대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보편적 의미를 찾아내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되는 다양한 의미를 정확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보편적으로 혹은 다양하게 이해된다는 말은 언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살아있는 언어에 대한 이해는 사용된 언어에 대한 정확한 문법적 이해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의 환경적이고 심리적인 이해의 종합에서 가능하다. 언어를 바탕으로 주고받는 대화 역시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저자의 사상은 저자가 구사하는 말의 문법적인 이해 기술과 저자의 인격을 구성하는 심리적․역사적 상황을 읽어내는 심리적 기술의 결합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다. 대화 역시 대화 상대자의 문법적 언어 구사 능력과 심리적인 상황의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될 수 있다면 이 두 가지 이해의 기술은 이해라는 공통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언어를 해석하는 해석 역시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언어는 해석의 다양성을 요구하고 해석 역시 언어가 갖는 다양한 기능과 의미들에 생명성을 부여한다. 문장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문장의 표면적인 이해를 통하여 문장의 의미를 규정한다면, 비유와 은유, 환유 등을 통하여 드러나는 간접적인 이해는 글읽기와 글쓰기의 변증법적 역동성 내지는 해석의 관계를 통하여 문장 사이의 의미를 규정한다.
가다머가 언급하였듯이 언어의 지평은 세계의 지평이다. 세계를 기술하는 언어는 언어로 표현된 세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들을 드러낸다. 세계를 드러내는 언어는 세계 자체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의미체이다. 현대 해석학을 정립하고 독일철학의 새로운 정신을 확립한 슐라이어마허는 언어의 중요성에 착안하여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언어에 대한 이해 가능성에서 찾는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언어는 언어를 통하여 전달되어지는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하여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사상을 통하여 언어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언어는 화자가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는 매개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화자가 의도하는 사상 그 자체를 설명하고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내용에 따라서 규정되고,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의 내용만큼 자기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언어는 말과 글로서 표현된다. 말과 글은 말을 하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의 사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인격과 사상은 말과 글을 통하여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는 말과 글을 바르게 읽어서 말과 글의 의미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정립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텍스트가 전하려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해석의 방법 내지는 해석의 기술로서의 현대 해석학을 정립하였다. 슐라이어마허 이래 정립된 현대 해석학은 의식의 주체와 의식의 대상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인식의 대상과 인식 주체가 맺는 의식적 관계를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의 인격적이고 환경적인 관계로 확장시키면서 방법적 언어 이해를 통하여 인식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극복한다. 해석의 결과로 제기되는 윤리 문제 역시 인간의 자기 이해와 사회 이해,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이해로 환원시켜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행위규범을 모색한다.
이렇게 볼 때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이해의 방법론은 단순히 텍스트를 해석하는 이론적 작업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해석을 통하여 인간의 자기이해와 세계이해, 그리고 이해된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실천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슐라이어마허는 언어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석학에서 언어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언어와 사유의 변증법적 관계를 해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해석학이 추구하는 텍스트 이해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모색한다. 해석의 가능성들은 그가 제시한 언어 이해의 두 가지 방법인 문법적 이해와 심리적 이해를 분석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해석의 방법은 변증법적인 상호 순환작용을 통하여 해석의 영역을 넓혀 가며 동시에 올바른 해석에 도달할 수 있는 해석학적 순환론으로 연결되면서 해석학의 방법론으로 정립된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러한 해석의 방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였던 목표는 바로 “자기의식”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특징을 밝히면서 이러한 특징들이 그 이후 어떻게 독일정신으로 발전되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의 해석학은 변증법적인 사유의 유동성과 해석의 보편성 정립을 바탕으로 신앙중심의 해석학적인 원리에서 이성중심의 보편적인 해석학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 보편적인 해석학은 그 이후 딜타이의 역사적인 해석학의 경향을 거쳐 가다머에 이르러 변증법과 해석학의 종합이라는 차원으로 승화되는데, 가다머는 슐라이어마허의 언어의 변증법과 헤겔의 운동의 변증법을 수용하여 변증법적 해석학 내지는 해석학적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해석학을 정립하여 현대 해석학의 정점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볼 때 언어 자체에 대한 해명을 통하여 보편 해석학을 정초하려고 하였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다양성을 시대적 특성으로 삼는 오늘날 전체 독일철학의 특성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Ⅱ 언어와 사유의 해석학적 순환론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로 규정된다. 다양성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는 저자가 독자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독자도 항상 읽는 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써 내려가고 저자의 생각에 대한 가장 예리한 비판을 제시하면서 또 하나의 저자로서 자신의 사상을 산출한다. 독자 또한 저자의 글을 저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고 이해하며 독자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하고, 저자는 독자의 입장에서 글쓰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쓰여진 글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읽히기도 하고 저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글쓰기 능력보다 독자의 해석능력 역시 더 다양해졌고 해석자의 글읽기는 저자가 의도하는 정해진 의도와는 관계없이 진행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슐라이어마허가 의도했었던 “저자를 저자보다도 더 잘 이해하는” 글읽기의 방식, 즉 다양한 해석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새로운 글읽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 저자와 독자가 고정된 틀에 따라서 더 이상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상호 정해진 규정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개방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현대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인식론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적인 철학이 추구하던 주관과 대상의 일치에 관한 이론을 극복하면서 철학의 본령을 해석의 영역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오늘날 독일적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해석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현대 해석학을 정립한 철학자는 슐라이어마허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전 해석학자들이 주장하였던 텍스트의 형태와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던 해석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이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편적 해석의 기술을 정립한다. 말로 표현되거나 글로 쓰여진 텍스트를 "방법론적인 틀"에 따라서 이해를 분석하는 “이해의 기술”인 해석학의 목표는 텍스트를 저술한 저자의 원래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때 정확한 해석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가 의도하지 못했거나 혹은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을 저자보다도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를 이해의 기초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면 후자를 이해의 고차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철학적 사유의 전형으로 삼았던 플라톤은 언어가 갖는 본성에 주목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이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는 언어가 갖는 단순한 전달의 기능을 초월해 있다. 플라톤에게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기준으로 이념 자체가 갖는 순수성이 중요하다면 이러한 순수성은 경험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유의 세계 내지는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 변증법이고 변증법을 통하여 도달한 세계가 상기의 세계라면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는 자기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잊혀진 지식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도 이 점에 착안하여 언어 자체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언어를 통하여 드러난 세계는 언어 자체의 세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어가 드러내는 경험적 세계이기도 하다. 언어의 세계가 그 자체로순수한 이념의 세계를 구성한다면, 언어가 지시하는 세계는 저자와 독자들이 경험하는 구체적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양 측면을 드러내는 방법이 문법적 이해와 심리적 이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양자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문장이 지시하는 의미, 즉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드러낸다.
이해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해석의 방법은 표현된 텍스트를 문법적으로 분석하여 이해를 시도하는 문법적 이해와 저자의 심리상태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적(혹은 기술적) 이해이다. 이 두 가지 이해의 방법은 서로 독립적인 해석의 방법으로서 적용이 되지만 동시에 상호 순환적인 관점에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문법적 이해가 문장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문장이 드러내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이해의 방법이라면, 심리적 이해는 저자의 시대적인 상황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상황을 저자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읽어내야 하는 이해의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문법적 이해는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사실 해석을 강조하는 객관적인 해석이고 심리적인 해석은 숨겨진 상황들을 재해석하는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이해는 문법적 이해가 범하기 쉬운 표면적 이해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며, 문법적 이해는 심리적 이해가 갖는 주관성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이 두 가지 해석방식은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하여 전체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드러난 문장의 표면적인 이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문법적 이해는 이해의 기본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 해석을 위하여 단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문장에 대한 문법적 지식, 그리고 사용되는 문장의 정확한 의미 이해는 일차적으로 저자가 자신의 텍스트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해석자는 가장 먼저 텍스트에 쓰여진 단어를 정확히 이해(여기에서의 이해는 통용되고 있는 단어에 대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 단어에 대한 역사적 이해도 포함한다) 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 문법적 구조에 맞게 쓰여진 문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문맥에 따라서 이해할 때 해석하는 단어 해석의 오해를 피할 수 있다.
문법적인 이해는 쓰여진 문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저자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해의 부분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비유나 은유적 표현 뒤에 숨겨져 있는 저자의 주관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는 약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문장은 드러나는 표면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저자의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는 필연적으로 저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심리적 이해는 일차적인 이해를 다시 한번 반성하여 미처 해석되지 못하였던 내용들을 전치와 재구성의 방법을 통하여 철저하게 해석하는 메타해석의 방법을 제공한다. 글을 쓰는 저자의 심리적인 상태와 지적 수준, 그리고 자기이해와 세계관의 이해는 저자가 저서를 통하여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이를 위하여 독자는 먼저 저자가 어떤 시대의 사람이고 사상의 내용과 삶의 환경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자는 저자의 의도 속으로 자신을 전이시킬 수 있고, 저자가 생각하는 바대로 텍스트를 재구성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해석자의 유리한 위치를 살려 그 텍스트가 해석되는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게 텍스트를 재해석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해석의 본질은 해석자가 자기중심의 이해방식에서 벗어나서 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타자의 시선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다. 그러나 문장의 형식적 구조에 주목하는 문법적 이해는 복잡한 저자의 의식상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심리적 이해보다 저차원적인 이해의 방법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심리적인 이해가 없는 문법적 이해는 공허하고 단어와 문법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이해는 맹목적이라고 할 때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가 배제된 텍스트 이해는 이해가 아니라 오히려 오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두 가지 이해의 방법이 서로 교차하면서 합일점을 찾는 부분이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1. 문법적 이해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이해의 출발점은 문법적 해석이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쓰여진다. 따라서 언어의 기본적인 의미와 사용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어떠한 해석도 불가능하다. 해석자가 텍스트에 쓰여진 언어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한 후 비로소 해석자는 컨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
해석이 객관적인 이해에 치중하면 할수록 문법적인 이해에 가까워진다. 이에 반하여 저자의 주관적인 입장에 해석의 초점을 맞출수록 이해의 방법은 심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법적 해석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하여 제목과 목차가 드러내는 사실적인 요소들과 관계하며, 심리적 해석은 텍스트 뒤에 숨겨져 있는 컨텍스트 읽기, 즉 문장과 해석의 일반적인 결합 법칙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심리적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문장들 상호 관계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텍스트 전체를 통독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에 반해 “문법적 해석은 언어로부터, 그리고 언어의 도움으로 확실한 담화의 정해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문장 속에 사용되는 단어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고 문장들 역시 다른 문장과 논리적인 연관성 속에서 상호 밀접한 연관관계를 형성하면서 텍스트가 드러내고자 하는 지시체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문법적 해석은 단순히 단어의 의미분석이나 혹은 문장의 문법적 구조분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법적 해석은 쓰여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일과 사용되는 문장의 의미분석을 통하여 아직 전달되지 않은,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문장의 사용방법과 해석방법을 찾아내는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그것은 문법적 이해가 표현된 단어와 문장의 단순한 의미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문장이 갖는 종합적인 의미를 텍스트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말은 언어의 총체성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문법적 이해의 해석학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문법적 해석에서 모든 해석학적인 규칙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형식은 해석기술이 표현된 말에 대한 역사적이고, 예감적이며,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추가적 구성 속에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2. 심리적 이해

심리적 해석의 중요한 방법은 예감의 방법이다. 그러나 예감의 방법은 비교의 방법과 동시적으로 적용된다. 비교의 방법이 배제된 예감의 방법이나 예감의 방법이 제외된 비교의 방법은 전체를 이해한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부분적인 이해 내지는 전체 문맥에 대한 오해를 파생시킬 수 있다. 비교의 방법이 일반적인 상황하에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을 비교하면서 비교되는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내어 이해하는 일반적인 이해라면 예감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속으로 이입시켜 다른 사람이 갖는 주관적인 특성을 예언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감적 이해는 논리적인 추론에 의하여 저자의 사상적 내용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저자의 전체 사상을 직관하는 직관적 방법이다. 예감적 이해를 통하여 해석자는 저자의 생활환경을 통하여 드러나는 저자의 전체적 삶의 양태를 직관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비교의 방법은 여러 가지 다른 문맥들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이해된 내용을 수정할 수 있고 올바른 논리적인 추론을 통하여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자체를 드러내는 “살아있는 행위”라면 비교의 방법과 긴밀하게 작용하는 예감의 방법은 해석자의 직관을 통하여 언어의 보편적인 전제와 “사유와 말 사이의 동일성을 확보하게 한다.

3. 말

말은 말하는 사람의 사상을 언어로 전달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사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상 그 자체이다. 더 나아가서 말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어지는 생각들을 교환하고 변화시키며,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말에 대한 해석은 단순히 언어가 드러내는 사상만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피하면서 말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텍스트 해석 시에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을 이끌어 내는 변증법적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슐라이어마허는 말과 해석기술의 이중성에 주목하게 되고 플라톤이 제기하였던 대화의 변증법을 해석의 기술로 수용한다.
“말은 확실히 개별자를 위한 사유의 중재이다. 사유는 내적인 담화를 통해 완성되어진다. 그런 한에서 담화는 단지 완성된 사상 자체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가가 사상을 자기 스스로 고정시킬 필요성을 발견하는 곳에서 담화의 기술, 즉 가장 근원적인 담화의 변화가 성립하고 여기에 따라서 역시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말하는 기술은 말하는 사람의 언어 능력과 말을 이해하는 사람의 듣는 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가 혹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화 당사자들은 어떠한 공통적인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수사학적인 기법이며 이 기법에 따라서 대화 당사자는 사용하고 사용되는 말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강조하는 말의 의미와 그 말을 통해서 전달되어지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듣는 사람 역시 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전달하려는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말하는 기술과 이해하는 기술”은 분리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 속에 밀접하게 서로 관련된 언어의 두 가지 다른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말은 내면적 사유의 내용을 드러내는 외면적 표현의 기술이고, 말에 대한 해석의 기술은 바르게 생각하고 생각된 내용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전달의 기술이며, 동시에 이 기술을 매개로 화자의 사상을 읽어내는,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이해하는 근원적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는 말과 말속에 담긴 오해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동의된 내용들을 대화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화의 과정이 해석의 과정이라면 해석은 대화를 나누는 말의 전체적인 맥락의 이해에서만 가능하다.

4. 이해의 기술

“기술이란 원래의 독자와 우리들 사이의 차이에 기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어 지식과 역사 지식을 통해서 그 애매 모호한 것은 제거되어지고, 또 원 저자와 우리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지적된 후에 해석은 비로소 시작된다.” 해석의 기술은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공간을 좁히는 작업이다. 이 차이의 공간을 좁히는 작업은 상호간에 존재하는 차이의 인정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차이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이해의 차이이며, 문장이 드러내는 의미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해석은 이러한 차이에서 이해의 동질적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텍스트에 대한 상호이해가 가능하다.
차이의 극복은 해석자가 텍스트의 저자와 주관적, 객관적인 차원에서 동등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해석자가 텍스트에 쓰여진 단어와 문장의 의미체계를 저자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쓰여진 문장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해석자가 저자의 주관적인 감정 속으로 이입하지 못한다면 해석자가 그 글을 쓰게된 동기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확한 해석은 해석자가 텍스트 저자와 동일한 수준을 유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저자와 동등한 수준을 확보한 해석자는 해석을 위한 방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 하나의 방법은 데카르트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방법과 유사하다.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4가지의 규칙을 필요로 하는데 그 중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세 번째 규칙이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주제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차례로 이해의 정도를 높여가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방법도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 것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해석의 방법이다.
슐라이어마허가 두 번째로 수용한 방법은 비교의 방법이다. “타자와 나 자신과의 비교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 속에 있는 개별적인 것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제시된 비교의 방법은 해석하려는 문장에 대하여 해석의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각 단어와 문장이 갖는 의미를 검토하는 다양한 비교는 비교되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 줄뿐만 아니라 단어와 문장이 갖는 경험의 의미까지 명확하게 전달한다.

5. 해석학적 순환론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이러한 방법들은 해석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인 해석학적 순환의 논리로 발전된다. 해석의 기준점을 쉬운 부분에 둠으로서 해석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파악한 이해의 내용을 이해해야 할 내용들과 비교함으로써 이해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 해석학의 본질은 언어 이해와 인간 이해, 즉 외면적인 것의 이해와 내면적인 것의 이해, 보편의 이해와 개별의 이해가 교호작용 하면서 공동으로 좀 더 분명한 하나의 이해에 접근하는 순환구조에 있으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사유의 교호규정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때 쉬운 부분에 대한 이해는 복잡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 이유는 쉬운 부분에 대한 이해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선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선이해는 그 부분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을 추상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비교의 방법이다. 비교의 방법은 제목과 목차를 분석하며 그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을 내용을 추론하여 선이해를 갖게 하며 선이해를 바탕으로 읽어 가는 텍스트의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읽어가면서 이해하는 부분적인 이해는 완전한 이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부분들의 불확실한 이해는 해석자가 텍스트를 다 읽고 난 다음 전체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해된 부분들을 재구성하며 이해할 때 비로소 확실한 이해로 바뀌며 이때 비로소 해석자는 전체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시 한 개별 저서의 내부에서 개별적인 부분들은 전체로부터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책 전체에 대한 개요를 얻기 위하여는 정독에 선행하여 개괄적인 책읽기를 먼저 시도하여야 한다.” 부분은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며 전체는 부분의 이해를 명확히 보증해 준다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순환론은 전체에 대하여 부분이 가지는 역할과 부분에 대하여 전체가 갖는 의미를 상호관계 속에서 극대화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수용된다. 부분적인 이해가 아니라 전체를 통하여 드러나는 부분의 의미와 부분에 대한 추론을 통하여 밝혀지는 전체의 의미의 순환관계를 통하여 전체에 대하여 부분이 갖는 의미와 부분에 대하여 전체가 갖는 의미가 분명해 진다. 그러나 이 순환론은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부분의 명확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단순한 내용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이해에서 확실한 이해에로 그리고 확실한 이해에서 불확실한 이해에로, 해석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입장으로 그리고 저자의 입장에서 해석자의 입장으로, 단일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그리고 복잡한 것에서 단일한 것으로의 순환운동과 연결되면서 표면적인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며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 경험에 관한 이해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새로운 이해의 차원을 개방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했듯이 모든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에 관한 상들을 보존하고, 언어가 드러내는 상들 속에서 이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때 단어는 단순히 대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나 혹은 독립된 하나의 문자적인 역할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에서 문맥들의 의미를 지정하고 문장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생동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단어는 고정된 의미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전체 텍스트에서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변화가능하고 해석이 필요한 다의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술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단어 역시 독립적인 하나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구를 통하여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단어들의 의미는 그 단어와 연관되는 문맥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고착시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해석자가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려면, 단어 자체와 단어가 갖는 역사적인 맥락, 그리고 문장에서 사용되는 사용례와의 관계 하에서 단어 의미를 결정할 수 있고 이렇게 이해된 단어를 바탕으로 문장의 문맥을 읽어낼 수 있다.

Ⅲ 해석의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언어

언어는 해석되기 위해서 표현된다. 그러나 언어의 해석은 해석자가 그 언어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와 그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선행을 요청한다. 그러나 모든 언어를 다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언어를 다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해석의 기술은 해석할 필요가 있는, 그리고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대상을 먼저 구별하는 기술의 습득에서 개발된다. 해석의 기술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파생되는 긴장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앎으로 이행하는 자기이해의 기술이고 동시에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기술이다.
“해석에 있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언어이다. 그리고 발견되어야 할 모든 것도 언어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전제나 주관적인 전제들에 속해야만 하는 것들도 모두 언어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해석의 대상은 언어이고 언어를 해석하는 매개 역시 언어이다. 따라서 해석의 작업은 텍스트 속에 표현된 언어를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하며, 해석되고 이해된 내용이 다시 언어로 표현된 그 언어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가 드러내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해와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내면적인 이해, 그리고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와 해석될 당시 통용되고 있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텍스트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언어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와 현재 통용되는 본질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언어의 전체적인 의미와 발전과정을 모른다면 우리는 언어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이해의 가장 근원적인 목표는 저자의 사상이 표현된 텍스트의 언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언어는 단순히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만을 갖지는 않는다. 언어가 생동적이고,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면 언어는 고정된 의미체가 될 수도 없고 언어가 드러내는 사상 역시 항상 동일할 수 없다.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속에 많은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인식하고 예감하며, 설명하고 분석하며 파악하고 전달해야 하는 해석은 그 말 자체 속에 이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처음부터 다양한 이해의 기술들을 필요로 한다. 단순한 문법적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어 언어의 숨겨진 의미체를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의 또 다른 기능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단어와 문장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이처럼 언어 자체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중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매개한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전체적인 삶과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의 삶을 담고 있는 내용이며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직설적인 방법으로 언어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은유와 환유 등의 비유법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표현된 문장에 대한 의미는 직설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가려지거나 숨겨진 의미들의 베일을 벗겨서 탈은폐(entbergen)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언어로 표현된 문장의 해석을 위하여 해석학적 상황을 재구성하고 드러나는 말의 의미를 반성하며 숨겨져 있는 의미를 해명하려는 비판적 이해의 기술이다.
이 이해의 기술은 문장의 유형과 그 유형을 통하여 드러내려는 의미의 완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해석자를 저자의 심리상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해석자가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저자의 신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 해석은 문법적 이해와 심리적 이해의 교차점을 확보하여 독자의 입장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이며 동시에 저자 자신을 읽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문법적 이해와 저자의 복잡한 상황들을 꿰뚫고 그 속에서 가장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심리적 해석을 통하여 해석자는 저자의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저자의 내면성 속으로의 이행은 저자보다 해석자에게 내용이해의 우선성과 우월성을 부여한다. 해석자는 저자의 사상을 저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비판적 관점에서 교정하며 저자와 자신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제 3의 합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독자가 저자의 자기이해보다 더 저자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해석의 궁극적 목표는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저자의 생각을 추가적으로 구성하고 저자를 이해하는 목적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저자를 저자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저자가 갖는 주관적인 한계를 넘어서 표현된 언어에 대한 보편타당한 해석의 가능성을 개방한다. 해석은 비판을 전제로 한다. 비판 없는 맹목적인 해석은 해석된 내용에 대한 동어반복의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Ⅳ 나가는 말

슐라이어마허는 현대 철학의 핵심을 이해라고 보고 이해를 철학적 탐구의 핵심개념으로 정립한다. 이해의 내용은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사유내용과 세계의 존재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동일하다. 언어를 이해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해석해야 하는 언어의 다의성과 생동성 때문에 언어는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 바로 텍스트 해석의 기술인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기술을 문법적 이해와 심리적 이해로 세분한다. 이 양자는 각각 독립된 해석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지만 동시에 상호 순환적인 구조에 의하여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며 텍스트 해석을 주도한다. 오해는 어떤 하나의 이해방법에 의존하던가 혹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무시할 때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 정신이 현대 독일정신에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전통을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그대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심리적 이해가 갖는 한계를 비판하여 삶의 해석학을 정립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이해의 기술로서의 해석학을 역사와 삶을 이해하는 해석의 기술로 도입하였고 해석해야 할 텍스트를 역사의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해석은 문자로 표현되어 “지속적으로 고정된 삶의 외적 표현에 관한 기술적인 이해”이다. 텍스트를 통하여 드러나는 삶을 기술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은 “저서 속에 포함된 바 인간 현존재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기술이다. 딜타이는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이 표현한 삶의 나머지 부분 즉 즉 문학적 편린들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역사 내지는 삶의 내용으로 수용하여 해석의 영역을 삶과 역사로 전치(轉置)시킨다.
하이데거 이후 해석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존재방식을 이해에다 설정하고 이해자체를 해명하려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 때 이해는 텍스트 해석을 위한 매개 개념이거나 혹은 해석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존재자체의 존재방식으로서 전환된다. 동시에 하이데거는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해석학적 순환론을 존재이해의 결정적인 방법으로 수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순환론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순환논증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되지 못한 존재의 나머지 부분들을 순환의 관계 속에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존재해석과 이해의 방법으로 수용된다. 따라서 그의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가 제시한 이해의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을 극복하며 이해를 존재의 존재방식으로 변형시켜 현상학적 해석학 내지는 해석학적 존재론을 정립한다.
가다머는 슐라이어마허의 언어적 관점을 수용하여 언어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사적 지평의 이해를 시도하면서 철학적 해석학을 정립한다. 동시에 이러한 입장을 언어와 역사와의 관계 개념으로 연결시키고 역사진행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언어와 세계이해의 가능성을 개방하여 철학적 해석학의 틀을 정립한다.
이에 반하여 하버마스는 해석학을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의 차원으로 전이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왜곡된 의식구조와 사회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왜곡된 언어구조를 비판적 관점에서 바로 세우며 해방된 의식과 사회를 지향하는 비판적 해석학을 제시한다. 왜곡된 언어를 수정하여 왜곡된 의식을 수정하며 올바른 언어구조의 정립을 통하여 억압된 사회구조를 바로잡으려는 그의 작업은 정확한 해석과 이해를 통하여 왜곡된 의식과 사회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비판적 해석학을 낳게 된다. 이를 위하여 하버마스는 해석의 대상을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전이시키며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를 사회로 확장하여 해석의 영역을 사회구조 전체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해석학의 최후 목적은 단순한 텍스트 해석이 아니라 해석을 통한 “해석의 공동체”와 “상호 의사소통의 공동체”를 구축하여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딜타이의 해석학을 계승한 딜타이 학파는 텍스트의 영역을 삶과 역사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총체적인 삶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논리학을 정초하려고 시도한다. 딜타이의 입장은 미쉬(G. Misch)와 립스(H. Lipps), 그리고 볼노(O.F. Bollnow)로 이어지면서 삶의 연관성에 착안하여 인간학적 논리학을 정립하여 인간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해석학적 논리학을 구축하게 된다. 그 이후 해석학은 더 이상 저서로서의 텍스트만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삶이 표현된 역사를 읽는 기술로서 전환된다.
현대에서 가장 요청되는 또 하나의 해석의 형태는 실존 해석이다. 해석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라면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적인 자아와 실존의 근거인 세계에 대한 해석은 나의 의미와 세계의 의미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를 구성한다. 실존 해석 역시 해석이라는 의미에서 실존이라는 텍스트를 갖는다. 실존은 주체적인 경험과 결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실존은 그때마다 주체적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순간적인 결단이기 때문에 경험의 내용을 이해하며 이해된 사실들을 통하여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기대하기에는 많은 난점이 따른다.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사실에 대한 선이해를 구성하여 경험된 내용의 해석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고 확보하는 것이라면 주체적인 자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기술은 이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는 다시 슐라이어마허의 언어해석학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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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Schleiermachers Hermeneutik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ie Sprache

Yongil Kim (Keimyung Univ.)


Da Schleiermacher Verstehen als einen zentralen Punkt in moderner Philosophie betrachtet, macht er das Verstehen zum Kernbegriff seiner philosophischen Untersuchung. Der Inhalt des Verstehens ist Sprache. Aber die Sprache ist nicht bloß als ein Verständigungsmittel da. Sie enthält vielmehr den Sinn von der Existenz der Welt sowie den Ideengehalt oder gedanklichen Inhalt des Menschen, der sie gebraucht. Insofern wird das Verstehen der Sprache mit dem Welt- und Menschenverständnis gleichgesetzt. Aus diesem Grund empfiehlt sich eine höhere Kunst, die Sprache richtig zu begreifen. Diese sprachliche Auslegungskunst heißt wie gewöhnlich Hermeneutik.
Die Einwirkung von Schleichermachers Hermeneutik auf den modernen deutschen Geist gilt beinahe als Absolutes. Vor allem hat Dilthey die Methodik von Schleiermachers sprachlicher Hermeneutik weitgehend aufgenommen, nur daß er sie durch die Kritik an den Grenzen des psychologischen Verstehens bei Schleiermacher in eine Hermeneutik des Lebens umwandelt. Dabei gelingt es Dilthey, die Hermeneutik als Verstehenskunst durch die Auslegunskunst in Beziehung auf Geschichte und Leben zu ersetzen. Bei Schleiermacher läuft Auslegung oder Interpretation hinaus auf “solches kunstmäßige Verstehen von dauernd fixierten Lebensäußerungen” und die Sichtbarmachung “der in der Schrift enthaltenen Reste menschlichen Daseins”. Diese in der Geschichte ausgedrückten Reste menschlichen Daseins transponiert Dilthey in konkrete Erlebnisse von Leben und Geschichte, so daß der neue Bereich der Interpretation um so mehr exponiert wird.
Mit Heidegger erfährt die Hermeneutik einen neuen Wendepunkt. Heidegger ist bestrebt, die wesentliche Seinsweise des Menschen im Verstehen zu begründen und das Verstehen selbst zu erläutern. Dabei wird es nicht mehr als eine Vermitttelung oder ein Weg zur Textauslegung geltend gemacht, sondern zur Seinsweise des Seienden selbst umfunktioniert. In dieser Hinsicht stellt der hermeneutische Zirkel Schleiermachers vom Einzelnen zum Ganzen und umgekehrt für Heidegger keineswegs einen logischen Fehler dar, sondern ein Vorverstehen der zeitlichen Situation, in dem die Seinsweise des Daseins zu begreifen ist. Heidegger strebt eine phänomenologische Hermeneutik oder, was dasselbe ist, eine heumeneutische Ontologie an.
Schleiermachers Position in Bezug auf die Sprache wird einerseits insbesondere von Gadamer rezipiert, der eine philosophische Hermeneutik etabliert, indem er den durch die Sprache und deren ständige Erweiterung gebildeten geschichtlichen Horizont verstehen will.
Andererseits rezipiert Habermas zwar den Primat der Sprache ins Schleiermacherschen Sinne, aber transponiert es von der theoretischen auf die praktische Ebene. Er entwickelt eine kritische Hermeneutik, indem er die oftmals verdrehte Struktur der Sprache wie die Verzerrung des gesellschaftlichen Bewußtseins kritisch betrachtet, um dadurch die Gesellschaft von jedweder Unterdrückung sprachlicher Manipulation zu befreien. So ist Habermas bestrebt, den Begriff des Textes bis zur Einschließung der gesellschatlchen Ebene zu erweitern und eine Gemeinschaft für gegenseitige Kommunikation zu bilden, indem er für die kommunikative Vernunft plädiert.
Zum Schluß ist jedenfalls zu konstatieren, daß die Hauptströmungen der Hermeneutik direkt oder indirekt auf Schleiermachers Hermeneutik mit besonderer Beziehung der Sprache zurückzuführen s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