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러(M. Scheler)의 가치윤리학에 나타난 가치감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Wertf hlen in M. Scheler's Wertethik)
- 이 인 재 (광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1. 서 론
인간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며, 의지하고, 원하고, 행위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보고, 듣고, 사고하는 지성적인 것과 쾌·불쾌, 선·악 및 미·추를 느끼는 감정적인 것, 그리고 추구하고, 원하고, 의지하며, 행위하는 의지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신의 3대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지성), 감정, 그리고 의지의 각각의 단계는 뚜렷하고 명료한 의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애매모호하고 아직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비의식적, 무의식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정신을 통상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보면, 그것은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는 합리적 이성과 이성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비논리적, 비개념적인(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서양 윤리학사에서 보면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 작용으로서 이성과 감정 사이에는 주인과 노예라는 이분법적 메타포가 전형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주인-노예 메타포는 오늘날까지도 감정에 관한 대부분의 철학적 견해를 지배하는 두 가지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바로 감정이 이성에 비해 더 원시적이고, 덜 지적이며, 더 야만적이며, 의존할 수 없으며,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감정은 인간의 영혼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적대적인 측면을 갖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성과 감정을 통합하여 어느 한 가지로 환원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조차도--이들은 대체로 감정은 "혼란스런 인식" 내지 "왜곡된 판단"으로서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여전히 이 양자를 구분하고자 노력했고, 계속하여 이성의 우위성을 주장해 왔던 것이다.
윤리학사에서 이러한 이성 우위의 이분법, 즉 감정은 이성의 지혜로써 확고하게 통제되어야 하고, 감정이 지닌 위험한 충동들이 안전하게 억제되어야 하며, 이상적으로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타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첫째,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지,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셸러(M. Scheler 1874-1928)도 인정하고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파스칼 같은 사람은 비록 감정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독특한 역할을 인정했던 선구자들이다. 둘째, 이성을 중시한 사람들도 감정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것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감정과 육성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고, 전자가 적절히 통제되고 후자도 과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아래 이 양자를 모두 도덕철학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점은 감정의 윤리학의 기초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과연 감정은 언제나 이성보다 열등한 것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통제되거나 거부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만일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동안 윤리학사에서 지배적인 이성-감정의 주인-노예의 메타포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배격할 근거를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역시 교육적 차원에서도 지닐 수밖에 없었던 많은 폐해를 근절할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덕의 규정 근거 내지 도덕적 행동의 동기로서 감정이 지닌 위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작업이 다시 내려져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감정에 대한 잘못된 인식 내지 편견을 불식하고, 감정에 관한 균형있는 시각을 정립할 수 있는 수 있는 근거와 그 의의를 셸러의 감정이론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셸러는 감정이 오류나 악의 근원이 아니라 진정한 인식과 가치 내지 선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감정에 관한 전통적 편견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감정윤리학자이기 때문이다. 셸러의 인격주의 가치윤리학은 가치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윤리학이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가치란 자립적이고, 선천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가치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실현하는가? 인데,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그는 이제까지 어떤 윤리학자도 거론하지 않은 감정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그의 독특한 감정윤리학이 성립한다. 따라서 셀러의 감정윤리학은 어떤 내용과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감정윤리학의 의의는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셸러가 말하는 감정의 의미, 종류, 작용은 무엇이며, 특히 칸트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논의해 보고, 그의 감정론의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2. 전통적 철학에서의 감정 논의와 셸러의 관점
서양윤리학사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인간의 정신구조를 이성(Vernunft)과 감성(Sinnlichkeit)으로 구분한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한 것은 정신의 구조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성(질서, 법칙 혹은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 아닌 모든 것을 감성에 귀속시킴으로써 우리의 모든 정서생활(unser gesamtes emotionales Leben, 사랑과 미움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근세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노력 생활도 포함됨)을 이 감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구분에 의하면, 정신 내의 일체의 비논리적인 것, 즉 직관작용, 감지작용, 노력작용, 사랑함과 미워함 등이 인간의 심신적 유기체(der psychophysischen Organisation)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그것은 삶과 역사의 발전가운데 현실적으로 변화하는 조직의 기능에 의해 완성되며, 결과적으로 환경의 특수성과 그 작용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한다.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인간 정신의 논리적 측면을 비논리적 측면보다 우위에 두는 근세의 합리론자들은 경험적, 정서주의적 윤리학이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하고, 오직 합리주의적 방법의 선천성에 의해서만 윤리학의 절대적인 정초를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인간의 경험적, 심리적 생활규칙으로 환원되지 않고 또한 심신조직으로부터 독립되고, 절대적인 근원성과 합법칙성을 가진 정서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비논리적인 작용들이 지향하는 대상들이나 질들(Qualit ten) 간에 선천적 연관과 충돌이 있는지, 또 이와 대응하여 이들 작용 자체의 선천적 법칙성이 존재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윤리학은 과연 절대적이고, 선천적이며, 이성적인 윤리학으로 형성되든가, 아니면 상대적이고 경험적이며, 정서적인 윤리학으로 형성되는가 그 둘 중의 하나였고, 절대적이고 또한 정서적인 윤리학(emotionale Ethik)이 존재할 수 있는지, 나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묻지 않았다. 이들은 감정이란 단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상태감정일 뿐이라고 보고 감정의 고유한 작용들과 그 작용의 근원적인 법칙들이 있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 중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과 파스칼(Blaise Pascal)만이, 비록 이러한 물음에 대해 체계적인 사상을 수립하지는 못했지만,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파스칼은 "심정의 질서(ordre du coeur)", 혹은 "심정의 논리(logique du coeur)"에 대해 말하면서 "심정도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Le coeur a ses raisons)"고 주장한다. 이것은 순수논리학과 같이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지성적 법칙에로 환원될 수 없는 느끼는 것,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법칙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파스칼이 말한 바의 요지를 간추리면, 자신의 "이유"와 "자신"의 이유라는데 있는 바, 오성에는 그 대상이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경험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스칼의 감정에 관한 견해를 계승한 셸러는 철학적 전통에서 보여준 감정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희랍인이 이성 혹은 합리성이라는 말을 감성과 대립시켜 사용한 이래로 철학의 전통은 정신의 논리적 측면에만 주목하고 정신의 <비논리적, 선천적> 측면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예컨대, 칸트는 순수의욕을 실천이성 혹은 이성일반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의지작용의 근원성을 오해하고 말했다. 의욕은 사고와 동일한 근원성을 가진 합법칙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중략) 칸트는 모든 감지작용을 아니 그 밖의 사랑과 미움까지도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해 버렸고 따라서 윤리학에서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이성과 감성의 대립으로 다 설명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 혹은 일체가 이성 아니면 감성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보는 편견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선천적으로 실질적인 윤리학(a priori materialen Ethik)이 성립하게 된다".
여기서 셸러가 말하는 비논리적, 선천적 측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다시 셸러의 견해를 살펴보자.
"우리의 정신생활 전체는 본질적, 내용적으로 인간의 유기체적 조직에서 독립한 순수한 작용과 작용법칙을 가지고 있다. 정신의 정서적인 것(das emotionale des Geistes), 감지(das F hlen), 선취(Vorziehen), 후취(Nachziehen), 사랑(Lieben), 미움(Hassen) 그리고 의욕(Wollen)은 근원적으로 선천적인 내용(ein urspr nglicher apriorischer Gehalt)을 가지고 있다. 이 내용은 사유(Denken)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다".
"도덕적 근본작용으로서 감지, 사랑, 미움, 그것들 간의 실질적 합법칙성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모든 심리학과 다르다. 정신의 층으로서 이러한 작용영역은 감성적인 영역과도 관련이 없으며, 생명적인 것 혹은 신체적인 것의 작용영역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이 내적인 합법칙성은 생명적인 것과 혹은 신체적인 것의 합법칙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합리적 윤리학과 구별되는 정서적 윤리학은 도덕적 평가를 반드시 관찰과 귀납으로부터 획득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경험주의가 아니다. 감지, 선취, 후취, 사랑과 미움과 같은 정신적 작용은 순수한 사고 법칙과 귀납적 경험과 독립적인 그 자체의 고유한 선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유와 마찬가지로 그 실질, 그것의 정초와 그것의 연관에는 본질직관이 존재하며, 이 모두에 현상학적인 확정의 명증성과 가장 엄밀한 정밀성이 존재한다.
이렇게 셸러는 "정서적인 것의 선천주의"(an Apriorismus des Emotionalen)를 주장하고 선천주의와 이성주의를 통합시켜 온 잘못에서 벗어나 양자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한다. 근원적 정서작용은 감성의 지각작용과도 오성의 논리적인 인식작용과도 다른 것으로, 비이성적인 그러나 단순히 감각에 귀속시킬 수 없는 선천적, 실질적인 것으로 그것만이 가치를 직관할 수 있다고 셸러는 주장한다.
셸러에 의하면, 가치란 귀와 청각이 색깔에 맹목이듯이 이성 혹은 오성에 대해 완전히 맹목이며, 가치의 세계는 우리의 정서적 생활속에서만 주어진다고 말한다. 즉, 가치란 인간의 정서적 삶에 나란히 세워진 체계이므로, 인간의 심신조직과 독립한 독자적인 근원성과 합법칙성을 가진 순수한 정서작용에 의해 가치의 존재는 선천적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하여 셸러가 말하는 정서적 작용은 가치에 직접적 근원적으로 관계하는 지향적 작용으로서 이성적 사유와 함께 정신속에 공존한다. 이러한 정서현상은 오직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만 제시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경험과학적 설명으로 해소되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셸러의 윤리학을 정서적 직관주의(emotionaler Intuitivismus) 혹은 실질적 선천주의(materialer Apriorismus)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셸러는 감정에 관한 전통적 견해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 되는 바 그것의 구체적 내용과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전통적으로 많은 철학자들은 감정이 불분명하고 혼란스런 파악작용으로 보았으나, 셸러는 이성적 사고가 절대로 획득할 수 없는 대상경험이 있으며, 이러한 경험 속에서 감정은 상호간의 영원한 질서와 서열과 관계를 맺고 있는 진정한 객관적 대상인 가치를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감정을 능동적 활동이 아니라 어떤 외부적 원인에 의해 침투당하는 수동적 혹은 피동적 상태라고 보거나, 쾌·불쾌의 상태적 감정 혹은 느껴진 상태라고 보는 것에 대해, 셸러는 감정이 수동적, 피동적 감정상태인 것도 있으나 작용으로서의 지향적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 작용으로서의 감정은 어떤 목표를 향한 움직임, 다시 말해 감정작용을 통해 어떤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자아의 움직임으로 본다. 이를 통해 가치가 직관된다. 지향적 감정에는 이외에도 가치선취 작용과 가치후치 작용, 최고 단계 감정인 사랑과 미움이 있다고 보았다.
셋째, 전통적으로 많은 철학자들은 감정은 이성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재료에 불과하고 감정 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 지배하면 악이 초래될 위험이 있다고 봄으로써, 인식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이성이 감정보다 우월하다고 본 반면, 셸러는 선천적 진리와 윤리적 선의 원천이 감정이며, 이성적 사고와 판단 그리고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감정이라고 봄으로써 이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셸러가 감정이 인식론적으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감정은 가치 본질에 대한 직관이며, 이성적 사고에 앞서 작용하지만, 사고는 직관된 것을 추후적으로 개념화하고 체계화하는 기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감정은 선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것은 인식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고,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직접 직관된 것이다. 셋째, 감정은 인식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셸러에게서 감정은 일종의 비합리적인 인식인 동시에 합리적 인식을 인도하는 것이다. 최고 단계의 사랑이 그 아래 단계에 있는 감정뿐만 아니라 모든 사고와 의지와 행동을 인도하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가치 세계가 인식범위를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감정의 범위와 방향이 인식의 범위를 정해 준다.
또 셸러가 감정이 윤리학적으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셸러에 의하면, 선이란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치 인식(가치 감지)이 필수적 전제인 바, 사물이나 사태의 가치와 가치 높낮이를 인식하는 가치감정, 가치선취(가치선호)와 가치후치(가치배척), 사랑과 미움은 도덕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감각적 지각과 판단 및 사고는 가치세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셸러에 의하면, 도덕법칙은 선 혹은 악이 일차적으로 감정을 통해 감지되고 선천적으로 직관된 것을 이차적으로 사고를 통해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선악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모든 의지와 행위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지향하는 것이라면, 올바른 가치 인식없이는 올바른 행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 감정이 주어질 때 비로소 의지는 도덕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선을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때, 사랑은 대상의 가치를 발굴해 내고 보다 높은 가치를 발견해 내며, 대상의 최고 이상적 가치상에까지 도달하는 가치상향 운동이므로 사랑은 최고선이 된다.
3. 셸러의 감정이론
1) 감정의 작용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해 정서주의와 지성주의의 관점이 있는데, 셸러는 전자의 견해를 대표한다. 칸트의 일면적인 지성주의에 반대하여, 셸러는 도덕적 지식과 행동에서의 감정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셸러에 따르면, 우리가 주로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은 지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가치감(정)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가치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관계는 지적인 작용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셸러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와 세계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그것이 외부세계이든, 내부 세계이든, 타인과의 관계이든, 자신과의 관계이든, 개념적이고 인지적인 관계가 아니라 항상 주로 정서적이고 가치감지적인 관계이다(emotionales und wertnehmendes Verhalten). 현실 세계는 그것의 가치 차원 속에서 그리고 역동적인 지향적 감정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셸러는 가치를 파악하는 감정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으며, 귀납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가치에 다가갈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셸러가 말하는 감정의 독특한 작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셸러는 감정을 기능으로서의 감정(F hlen), 즉 지향적 감정(intentionales F hlen)과 상태로서의 감정(Gef hl), 즉 감정상태(Gef hlszustand)를 구분한다. 전자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수용하는) 것, 즉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고, 후자는 수용된 내용과 그것이 나타난 현상, 즉 직접 체험한 내용을 의미한다. 지향적 감정은 지향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감정상태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고통과 같은 감각적 감정상태는 이러한 감정상태를 지향하는 여러 가지 감정과 함께 발생할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고통을 참고 견딘다', '나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그것을 즐길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통 그 자체에 대한 감정상태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정상태에는 본질적으로 대상과의 관련성이 없다. 이를테면, 무엇이 고통을 일으키는가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그 고통이 느껴진 순간을 지성적으로 성찰하여 체계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지향적 감정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대상과 관련된다. 지향적 감정은 대상에 관하여 본래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성적인 것은 아니다. 지향적 감정은 사고, 정신적 표상이나 이미지에 의해 외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 그 자체의 지향성 속에서 즉시 자명하다. 셸러는 가치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향적 감정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향적 감정 속에는 감지작용(가치를 받아들이는 감정작용), 가치선취 작용과 가치후치 작용 그리고 사랑과 미움의 작용이 있다. 지향적인 가치감지를 통해 본래 선천적이고 현상계에는 가치질로서만 나타나는 가치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의 감지작용이 없이는 가치를 만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 감지작용은 다른 어떤 매개체도 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립적으로 가치를 직접 감지 혹은 느낀다. 가치감지는 죽은 상태가 아닌 목표가 확실한 움직임인 동시에 자아로부터 나와서 대상으로 향하는 자아에 귀속된 움직임이기도 하다. 만약 감지작용이 표상, 판단과 같은 객관화 작용의 기초 위에서 수행된다면 그 감지작용은 가치를 감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는 원래 선천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가치감지 작용보다 위의 단계에 있는 지향적 체험이 바로 가치선취작용과 가치후취작용이다. 이 작용은 지향적 감지작용 후에 성립하는 것으로서 일차적으로 감지작용을 통해 가치를 감지하고 난 후 그 가치들 사이에 본질적으로 존재해 있는 연관관계 내지 위계관계를 선취작용, 후취작용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에 귀속된 감정작용으로서 일종의 의미 부여적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선취, 후취작용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치들 가운데서 더 높은 가치를 선취하고 더 낮은 가치를 후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취작용 혹은 후취작용은 선택(W hlen)과 같은 노력활동이 아니다. 즉, 선취와 후취활동 이후에 선택활동이 일어난다. 선택활동은 우리의 행위들 사이에 있을 수 있지만 선취작용 내지 후취작용은 감정작용의 하나로서 가치들의 위계서열을 상대로 해서 일어난다.
지향적 감정 중에서 가장 최고의 감정작용은 사랑과 미움의 작용이다. 셸러는 사랑이 증오(미움)에 비해 우선성을 가지며, 사랑은 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랑과 미움은 우리의 지향적 정서생활의 최고 단계를 이루는 바, 이것은 일체의 상태적 감정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을 분노, 격분 등과 함께 상태적 감정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정서적인 것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내린 결론이다. 또한 사랑과 미움은 가치 선취 작용 내지 가치 후취 작용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가치 선취 작용과 가치 후취 작용이 감지된 다수의 가치들을 지향한다면, 사랑과 미움은 오직 하나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의 작용은 가치 선취 작용에 의해서 주어진 감지된 가치의 보다 높음과 보다 낮음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 아니다. 사랑과 미움은 자발적 작용(spontane Akte)으로서, 사랑과 미움에 있어 우리의 정신은 이미 감지된, 때로는 선취된 가치에 반응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일을 한다. 즉, 사랑과 미움은 어떤 존재자의 감지작용에 그때그때 접근되는 가치영역이 확장되고 또 축소되는 것을 경험하는 그러한 작용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사랑과 미움에 의해 가치가 창조, 형성,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치란 창조되지도 않고, 폐기되기도 않고, 특정한 정신적 존재자의 모든 유기적 구조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사랑과 미움은 먼저 가치가 감지되고, 혹은 선취 내지 후취된 후 그것에 추후적으로 응답하면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 파악에 있어 고유한 발견적 역할(die eigentlich entdeckerische Rolle)을 하고, 움직임(Bewegung)을 표현하는데, 이 움직임이 진행되면서 그때 그때마다 새롭고 보다 높은 즉, 이제까지 그 존재자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가치가 밝게 비쳐진다. 따라서 사랑의 작용은 가치의 감지작용과 선취작용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선구자, 안내자로서 그에 선행한다.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그것이 원초적, 불명의 가치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할지라도 실제로 창조적이며, 인식가능한 것이다. 셸러는 가치 선취의 법칙들보다 훨씬 절대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법칙을 탐구함으로써 모든 윤리학의 철학적, 인식론적 토대와 존재론적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그의 발견적 태도로 인하여 더 저급한 가치로부터 더 높은 가치로 나아가는 활동이고, 때때로 대상과 인격의 더 높은 가치를 문득 떠오르게 하는 활동이지만 미움은 그 반대의 활동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더 높은 가치의 정립과 보존에 향해 있고, 더 낮은 가치의 지양에 향해 있으며, 미움은 더 저급한 가치의 존립에 향해 있고, 더 높은 가치의 가능한 존립을 배제하는 데로 향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 가지 지향적 감정작용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가치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일단 가치를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치를 지향하는 감정이 발동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다 높은 가치를 그보다 낮은 가치에 비해 선취해야만 한다. 가치에 대한 감지를 통해 가치에 다가설 수 있어도 가치의 위계서열에서 보다 낮은 가치를 높은 가치에 비해 선취하는 가치전도의 현상을 유발한다면 올바른 가치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세계(wert welt)의 풍부함과 가치위계서열을 폭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주는 것은 바로 사랑의 감정작용이다. 사랑의 감정이 발로하면 더 많은 가치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미움의 감정이 발로하면 더 적은 가치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에 의해 그 가치가 확대되거나 축소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활발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감정 작용이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존재층에 따른 감정의 분류
셸러는 감정과 정서의 경험에 관한 숙고를 통해 이러한 감정과 정서는 가치 영역으로 향하는 지향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서로 다른 가치 수준에 대응하는 4가지 수준의 "정서적 삶의 층위"를 말한다. 정서적 삶이란 감각적 감정, 생명 감정, 심리적 정서와 정신적 정서에 따라 층화되어 있다.
첫째, 감각적 감정(das sinnliche Gef hl):
이것은 생명감정과는 다르게 신체의 특정부위에 연장되어 있고, 국소화되어 있다. 피부의 접촉을 통해서 느끼는 아픔, 혀를 통해서 느끼는 음식의 쾌적함, 귀를 통해서 감지하는 음률의 아름다움 등에서 이러한 감정을 명백하게 알 수 있으며, 대체로 상태감정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으나 쾌적, 감미로움, 달콤함 등 감각적 가치를 지향하여 감지작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감정은 본질적으로 연장성(길이나 부피)을 갖지만 대상이 없는 채로 있으며, 기능이나 작용이 아닌 상태로 주어진다. 이 감정은, 가장 낮은 가치를 기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고, 공간에서 나누어지지도 않고 생명과 근본적인 기질에도 의존하지 않고, 보다 깊은 만족 수준을 갖지 못하며, 신체의 특정한 부분에 국한된다. 셸러가 감각적 감정과 가장 낮은 수준의 가치를 유사하다고 본 것은 신체적 감각과 가장 낮은 가치간에는 "원초적인 관련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감각은 신체의 기능에 의해 중재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실제로 다른 사람의 신체적 기쁨이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신체적 감각을 경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감각을 근접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 속에서 그 감각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단지 신체적으로 반응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내면적, 공감적 정서를 경험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 생명감정(das Lebensgef hl):
감각감정보다 신체전체에 걸쳐 있는 생명적 통일의식의 감정이다. 이것은 감각적 감정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감각적 감정의 종합으로 성립하지도 않는다. 감각적 감정과는 반대로, 생명 감정은 신체 속에 한정된 공간적 확장을 지니지 않는다. 생명감정은 유기체의 전체에서 경험된다. 피곤함이나 활력, 편안함이나 불편함, 생동감이나 쇠퇴 등은 신체의 부분적 감각에 관련되지 않고 유기체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생명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결합된 신체의 감각과는 무관하다. 이를테면 인간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 특별한 쾌감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건강함 혹은 질병을 느낄 수 있다. 생명감정은 감각적 감정에 비해 상태적 측면이 약하지만 지향적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감정이 단순히 일으켜진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작용의 주체가 되어 감지작용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셋째, 순수한 심적 감정(die rein seelische gef hle):
이 감정은 신체의 소여성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존재구조 중 마음 혹은 자아성질(Ichqualit t)를 통해 획득된다. 이 감정은 신체의 어느 한 부분과도, 생명적 통일체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깊은 기쁨 혹은 깊은 슬픔의 심적감정은 건강 혹은 고통에 막연히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정감정은 감각감정이나 생명감정보다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이는 강력한 심적감정의 지향성 내지는 적극성에 있다. 심적감정은 그 작용의 법칙에 따라 적극적으로 그 무엇을 느끼고 감지하고자 한다.
넷째, 정신적 감정(die geisten Gef hle):
인간 존재 구조 중 인격자체에 대응해 있는 감정이다. 인격은 본질상 결코 대상화될 수 없고 사물 그 자체 존재로서 사고될 수 없다. 인격은 작용의 구체적이고 그 자체 본질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고유한 작용을 하는 가운데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존재에 대응해 있는 정신적 감정도 그 본질상 대상화될 수 없고 무엇에 관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격이 작용을 수행할 때 성립하는 감정인 것이다. 또 인격은 신체의 각 기관, 생명적 통일체뿐만 아니라 심적 자아보다도 그 위계질서 상 더 높은 것이므로 인격에 대응해 있는 이 감정은 그 본질상 가장 높은 감정이다. 정신적 감정은 대상화될 수 없으므로 상태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인격 내부로부터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이므로 인격존재와 인격가치 이외의 그 무엇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 무엇을 그 감정의 고유법칙에 따라 지향하고 감지한다.
각 단계의 감정에는 그 감정의 양태와 상태, 대응 반응이 있다. 상태나 대응반응은 대부분 대상 영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비지향적이며 상태적 특성이지만 정신적 감정의 단계에서는 그것의 상태인 지극한 행복과 절망까지도 상태일 수가 없다. 우리는 행복이나 절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거나 절망적으로 존재한다. 행복의 경우, 우리 인격 자체의 존재와 자기 가치가 행복을 느끼도록 촉발한 것이다.
4. 칸트의 감정이론에 관한 셸러의 비판
셸러와 칸트에 있어서, 도덕적 선과 실질적 가치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셸러는 칸트의 견해를 지성주의(intellectualism)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 선을 분별하는데(discernment) 정서적 능력의 적절한 역할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 도덕적 선의 식별은 항상 궁극적으로 이성적 통찰의 문제, 즉 이성의 사실로 남는 바, 보편화 가능한 이성의 자기 입법을 통해 정언명령의 형식을 파악하는 문제와 상통한다. 그러한 구별은 일종의 판단처럼, 즉 이성의 기능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는 발생될 수 없다.
그러나 셸러에게 있어 이러한 식별은 정서적 통찰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 바, 우리가 실현하고자 노력(추구)하는 그러한 가치의 상대적 우위성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문제와 관련된다. 셸러는 이러한 통찰을 독특하게 비이성적인 능력, 즉 가치 파악 내지 가치감지(wertnehmung)의 능력에서 찾는다. 이러한 능력은 이성적 인식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감지 혹은 현상학적인 인식 내지 감지(wahrnehmung)와도 다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이러한 능력을 '가치감정 value-feeling' 혹은 '가치의 인식 perception of values'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칸트도 역시 도덕적 경험에서 '감정'(feeling)', 즉 그가 존경의 감정(achtung)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독특한 역할을 부여한다. 셸러도 칸트가 비 감각적으로 결정된 도덕적 존경심에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셸러는 칸트의 윤리학에서 도덕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적 감정은 인간 주체의 정서적 구성에 도덕적 원리가 작용한 결과로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 도덕적 식별의 결정적 원리 혹은 도덕적 의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1) 도덕적 감정에 관한 칸트의 이론
칸트 윤리학에 있어서 감정의 문제가 직접 관련이 되는 것은 바로 불완전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이다. 경험만이 쾌락과 고통의 감정이 어떤 대상을 현존하게 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은 실천적 쾌락의 실현을 위한 준칙에 그 토대를 둘 수가 없다. 만일 우리의 행동이 개인적 만족의 감정에 의해 동기부여된다면, 아무리 우리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해도 그것은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 행위는 적법성(legalit t)은 가질 수 있어도 도덕성(moralit t)은 갖지 못한다. 감정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그 행동이 옳게 될 것이라는 점을 보증할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가 자연적인 자기이익에 의해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보증할 뿐이다. 우리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도덕법 자체가 직접 의지를 결정할 때이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에 의해 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감정에 두 가지 결과를 가져다주는데, 부정적인 결과와 긍정적인 결과가 그것이다. 자부심을 끊어버리고 경향성의 훼방함으로써 나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병리적인 고통의 감정이다. 고통의 감정에 의해 보여지게 되는 도덕법의 초감각적인 본질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긍정적인 결과는 존중이라는 도덕적 감정이다. 도덕법은 그 자체가 자유롭고 지성적인 인과성의 원천으로서 자연적 경향성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나타남으로써 존중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발생시킨다. 칸트는 이러한 도덕적 감정을 그것이 초감각적 기원을 가지기 때문에 "쾌락"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도덕법칙 그 자체를 위한 어떤 감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칸트의 주장이다. 존중의 감정은 오직 욕구적 힘에 의해 나타난 것을 제거하고 그리고 거부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발생한다. 이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존중의 감정을 부정적인 쾌락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이것이 감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칸트는 이것을 도덕적 감정이라고 부름으로써 "병리적" 감정과는 대비시키고 있다.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는가? 존중이라는 감정이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는가? 칸트의 견해를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칸트는 "법칙에 대한 존중은 도덕의 동기가 될 수 없고, 인간 의지의 도덕적 동기는 도덕법 말고 그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초감각적인 도덕법이 인간 의지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 칸트가 감정이란 욕구적 행위의 원인이나 결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천적 쾌락은 원인으로서 그 욕구적 행동보다 앞서고, 감각적 쾌락을 발생시키는 대상은 그 결과로서 선행하는 욕구적 행동을 따르게 된다.
칸트는 지적 사고 및 인식과 감정적 느낌의 영역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칸트에게 있어 선악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지적인 인식적 판단이다. 선악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칙은 이성적 사고에서 나오는 실천적, 선천적 종합판단이다. 도덕법칙의 도출에는 어떤 감정적 요소도 개입될 수 없다. 그러나 도덕법칙의 실행에서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바로 그 때의 감정이란 존경심이다. 여기서 칸트는 예외적으로 존경심의 감정을 도덕적 행위의 감정적 측면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칸트에게 있어 존경심의 감정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나의 의지가 어떤 감각 대상의 간섭도 받지 않고 법칙에 복종한다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다. 칸트가 이성의 개념을 통해 스스로 산출된 느낌이라고 말한 이 존경심의 감정은 도덕법칙이 나의 경향성을 저지하고, 나의 자부심을 깨뜨림으로써 느끼는 고통인 자기비하감과 욕구에서 해방되어 신성한 도덕법칙을 바라보는 쾌감인 정신적 고양감 모두를 포괄한다. 존경심의 감정은 도덕법칙의 파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법칙은 우리가 존경심을 가지게 만들며, 존경심은 법칙이 구속력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게 만든다.
칸트에게 있어 감정은 그것이 감각적으로 결정되든 초감각적으로 결정되든, 근본적으로 감각적으로 조건화된다. 그 감정이 욕망적 원인(그래서 병리적이 됨)에서 오든, 이성적 의지의 결과(그래서 도덕이 됨)에서 오든 본질적으로 감각에 속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감정은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객관적 근거로서 기능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은 도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도덕법 자체에 관한 의식은 도덕적 감정과 일치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감정은 적어도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도덕의 근거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능력을 생각해 보면, 도덕적 감정은 도덕법의 의식, 도덕적 통찰, 도덕가치의 인식과 같은 것인데, 법칙에 복종하는 고통속에서 감정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 주고, 도덕적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지성적으로 느끼는데서 감정의 긍정적 측면을 본다.
2) 쉘러의 칸트 비판
셸러는 칸트의 윤리학에서 존경심의 도덕적 감정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결정된 감정과는 달리, 존경심은 비감각적으로 결정된 감정, 즉 도덕법에 의해 영향을 받은 지성적 감정이다. 결국 존경심이 도덕법칙의 결과이고 도덕법만이 의지를 결정하는 도덕적 근거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셸러는 칸트 윤리학을 보면, 어떤 감정도 도덕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칸트가 그의 윤리학에서 존경심의 감정에 대해 일정한 지위를 부여했지만, "이성적 윤리학으로서 정서적 삶에 대한 어떤 언급도 회피했던 형식적 윤리학만이 오로지 모든 형태의 행복주의가 만들어 내는 잘못을 회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셸러는 말한다. 칸트 윤리학에서 보면, 어떤 유형의 감정도 윤리학에서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셸러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셸러는 칸트의 감정이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고 있는가? 첫째, 칸트는 인간의 정서를 이해함에 있어 인간의 정서를 행복적인 것, 혹은 더 기본적으로는 쾌락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모든 행복과 쾌락은 이것들이 감각적인 측면을 갖는 한,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셋째, 비감각적으로 결정된 존경심의 감정을 포함한 모든 감정을 감각적인 감정이라고 본 것이다. 넷째, 칸트가 지향적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정을 쾌와 불쾌와 같은 감정적 상태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다섯째, 의욕과 욕망은 목표로서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점과 이러한 가치들은 감각적 쾌락이외에도 다른 것들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욕망과 의욕의 동기는 이것의 목표가 나타내 주는 이끌림뿐만 아니라 감정상태에 의해 실행된 추진력에도 있다는 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어떤 추구나 의지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가장 깊은 개인적 감정상태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 인간의 모든 추구나 의욕이 꼭 쾌락주의적 요소만이 아니라는 점을 살피지 못했다. 셸러는 쾌락주의적 요소도 종종 보다 깊은 생명적, 정신적 감정의 유일한 징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학에 대해 셸러의 감정이론은 어떻게 비판적일 수 있는가? 칸트는 이론철학에서 오성이 감각적 소여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고 인식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처럼, 실천철학에서 이성이 감성적 욕구, 욕망에 그의 고유 법칙에 따라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윤리적 영역에서 이성은 자발적이고 객관적인 활동을 하지만, 감정은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다만 상태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선천적인 실질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윤리적 명제를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의 법칙 내지 의지의 형식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이 규정해 주는 의지의 형식이 윤리적 근본원리가 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식이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알려져 있지 않다면, 얼마나 도덕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가? 경험적인 것은 결코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고에 근거하여, 일체의 실질적인 규정을 도덕률에서 물리치고 형식적인 규정만을 도덕률에 승인할 때, 다시 말해 의지가 지향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무시하고 오직 의지의 준칙만이 도덕률에 합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것이 아닌가? 선천적 실질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의지의 내용을 도외시하고 진정한 윤리적 실행이 가능할까? 필자가 보기에 아무리 예지계에 있는 도덕률을 의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의지의 형식만 취급하는 도덕률에 의거해서 진정한 윤리적 실행을 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5. 결 론: 셸러 감정이론의 의의
지금까지 셸러의 감정이론을 통해 감정은 단일한 유형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4가지 종류의 감정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위계 질서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감정의 위계질서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점은 위계 질서에 따라 어떤 감정은 다른 감정에 비해 고급하거나 저급하고, 더 지속적이거나 덜 지속적이고, 의미통일성이 강하거나 약하고, 지향하는 가치도 높거나 낮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감정들은 종류에 따라 질적, 기능적 차이를 보이며, 그것들 각자의 작용, 기능적 대상의 차이도 나타낸다. 만약 이러한 감정의 다층적이고 고유한 작용과 이러한 작용의 근원적인 법칙과 질서정연함을 알지 못하면 전통적인 견해나 칸트와 같은 합리론자들의 주장처럼, 감정은 감각들의 복합체 혹은 무질서하고 저급한 마음의 상태이며, 상태감정으로서 단일한 형태를 띠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셸러가 파악한 감정의 특성, 종류와 그 작용이 함축하는 바를 볼 때, 방금 언급한 감정에 관한 부정적 시각을 제거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감정이 지향적 감지작용, 선취와 후취작용 그리고 사랑과 미움의 적극적 작용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일단 가치를 지향한 정서적 정신 생활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감정을 단지 상태감정으로 파악하고 지향적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감정이 단순히 생명활동과 그것의 통제에 대해 합목적적 성격을 갖고 촉진되어야 할 혹은 피해야 할 어떤 상태에 대한 지표로만 기능(이를테면, 통증, 피로감, 공복감, 공포감 등)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높고 낮은 위계질서를 가진 감정들이 우리 인간의 심정에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심정에 공존하고 있는 감정들은 경우에 따라 다른 감정보다 더 강하게 표출되고, 비슷하게 발로되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감성적 감정이 다른 감정에 비해 보다 강렬하게 발로해 있다면 우리들의 주의는 신체적 고통에 집중될 수 있고, 심적 감정이 보다 강렬하게 발로해 있을 때는 행복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단순히 감정이 발로함으로써 우리가 신체의 고통을 느낀다거나 유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발하여 그에 상응하는 특정한 가치를 감지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 발해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그때에 없거나 우리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으면, 그 감정은 지향적 감지작용을 하지 못한다. 또한 어떤 가치가 가치질로서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거나, 가치계로부터 우리에게 개방되어 있을지라도 그 가치에 대응하는 감정이 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가치를 감지하지 못한다. 이는 감정이 그 기능에 있어서 고유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감정은 그의 고유한 법칙성을 통해서 혹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그에 대응하는 가치를 지향하여 감지한다. 그러므로 심정감정은 심적가치를, 정신적 감정은 정신적 가치를, 감각적 가치는 감성가치를 지향하여 감지한다.
감각적 감정이 활동하여 감성적 가치를 지향할 때 우리는 물질적 가치, 관능적 가치를 주로 추구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생명감정이 발동하여 생명가치를 지향하면, 건강을 위한 신체단련이나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음식 등을 먹게 되고, 이보다 더 높은 심정감정이 활동하면, 심적가치(마음의 안락을 위해 참선을 하는 것 등)를 추구하게 되고, 정신적 감정이 활동하면 정신적 가치, 내지 성스런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본질 작용은 우리에게 보다 높은 단계의 감정을 발로시켜, 보다 고귀하고 가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급한 가치는 항상 나쁘고 그래서 억제되고 거부되어야 할 것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낮은 단계의 가치가 보다 높은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계속해서 추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이 낮은 단계의 감정보다 더 강렬하게 발하도록 적절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가치와의 관계가 함축하는 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랑은 가치에 대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바, 사랑이 작용하는 가운데 가치있음의 현상이 증가하고 미움이 작용하는 가운데 반가치(umwert)의 있음이 증가하게 된다. 사랑은 대상이 출현하는 더 높은 가치들에게 우리의 시야를 항상 열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만이 그런 가치를 보게 된다. 결국 사랑은 가장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정신작용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정서적 정신활동으로서 이것의 중심체인 심정에서 나온다. 즉 심정은 정서적 정신의 근본 태도로서 항상 그 무엇을 발동시키려고 한다. 이때 심정은 아무렇게나 발동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어야 한다. 좋은 심성에서 좋은 심성의 정서적 활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심정을 발동시킨다는 말은 셸러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을 발동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성을 가꾸는 모든 활동은 인간이 사랑을 발동하도록 하는 일련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발동됨으로써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의식한다거나 우리에게 보다 더 넓은 가치영역이 주어진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미움이 발동되면,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가치 영역을 좁혀 보게 될 것이다. 사랑이 발동하여 대상 세계로 향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도덕 내지 가치와 관련을 지어볼 때, 인간에게 객관적이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가치계가 우리에게로 좀더 가까이 오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치감지, 선취 및 후취작용, 가치판단 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기초지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셸러는 감정에 관하여 그의 윤리학 전반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독창적이고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셸러의 윤리학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는 정서적 삶에 관한 층화(성층)이론은 어떤 의의를 갖는가? 한마디로 칸트의 주장, 즉 어떤 실질적 가치 윤리학도 행복과 쾌락을 윤리적 가치의 최고기준을 삼고 있다는 점을 셸러가 비판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셸러는 행복과 도덕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층화이론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셸러의 감정에 관한 층화이론에도 어느 정도 모호함이 있지만, 여기서 보여주고자 한 중요한 사항은 칸트가 사후에 신의 심판을 윤리적으로 요청한 것(선을 행한 사람은 행복해져야 하고, 악을 행한 사람은 불행해져야 한다는 모든 사적인 요구에 만족을 줄 것으로 봄)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선함이나 악함은 정신적 감정 속에 그것들의 원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인격을 의미하고 그것은 반드시 보상될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층화이론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감정과 정서의 풍부함과 다양함에 대해 우리가 보다 잘 볼 수 있게 했으며,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의 구조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셸러의 감정이론은 전통적으로 견지해온 감정에 대한 부당한 편견, 즉 감정적으로 동기화된 행동은 신뢰할 수 없고 비일관적이며, 무분별하고 심지어는 불합리하다는 점, 선과 악을 파악할 때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 감정에 사로잡힐 때 수동적이 되며, 책임을지지 못하고, 이성의 도덕만큼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등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감정이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적절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셸러는 감정은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어 저급의 감정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데 비해, 고급한 정신적 감정은 인간의 내적인 삶을 통해 경험하는 만족의 정도가 높다고 말한다. 이 정신적 감정은 인간의 모든 감정상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정신적 감정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파악되고 실천되는데 특히 공감과 같은 감정은 타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가치통찰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른바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가치통찰을 얻는 능력은 가치 통찰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또한 셸러의 감정이론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감정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는 바, 인간의 올바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적절한 감정을 지녀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감정적 미숙함, 감정의 황폐화, 감정결핍, 정서적 냉정함, 제멋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서 벗어나 공감, 정서적 온화함, 타인배려 등의 감정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감정교육의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참 고 문 헌
금교영(1995), 막스 셸러의 가치철학, 대구: 이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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