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종교적 담론의 도덕 언어적 이해

나뭇잎숨결 2020. 10. 4. 12:01

종교적 담론의 도덕 언어적 이해
--『논고』의 경우--

신 상 형(안동대)

I. 들어가며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모름지기 인간은 덕스러워야 한다’는 명제와 다른 것으로 구분한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도덕철학의 참된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논의는 현대까지도 이어져 왔다. 쉬니윈드에 따르면, 현대도덕철학의 발전방향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실제적인 사회정치적 문제들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임신중절, 환경문제, 공정한 전쟁, 의료취급, 경영실무, 동물의 권리나 부녀자의 지위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주로 덕의 문제로서 도덕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로의 환원을 들 수 있다. 도덕적 인간성과 도덕성의 기능에 대한 공동체적 견해를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셋째는 효율적 행동이 취해지려면 여러 개인들의 행동이 조정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에 관심이 증대되는 경향이다. 예컨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동시에 하나의 자연휴양림을 찾는다면 아무도 편안함을 향유할 수 없는데, 어느 한 사람의 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대도덕철학의 문제 접근도 전체적으로 규범적인 색채를 띠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을 학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 언명의 의미론 문제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도덕철학은 사회정치적 현실 문제이든, 인간의 도덕성에 관한 정의이든, 자연환경 문제이든 간에, 그 모든 논의가 ‘윤리 혹은 도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메타적 물음에 대한 정확한 해결을 근거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철학의 메타적 질문은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기, 답변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현대 철학적 담론의 제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도덕언어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비트겐슈타인의 주저에서는 규범적이든 메타적이든 윤리학에 대한 직설적 논의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전기 저작에서는 윤리와 종교가 동일하게 ‘신비적인 것’으로, 후기 저작에서는 종교적 진술 속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의 전기 저작인 『논고』에 나타난 ‘신비적인 것’에 대한 진술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의 해석의 지평을 확립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 분야에서 대표적 저술을 남긴 도날드 허드슨의 저작을 분석하여 이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려고 한다.

II. 문제 해결의 방법

본고에서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논의를 끌어가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성글기는 하나 두 가지의 틀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 하나는,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있어서 종교와 윤리는 같은 종류의 진술이라는 것이다. 진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진술의 형식에 있어서 양자가 갖는 진술의 차원이 같음을 이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적’인 것은 흔히 『논고』의 해석자들이 쉽게 단정짓는 무의미한 무엇에 해당하며, 이는 곧 유의미한 것과 대비되는, 버려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의미는 버려야 할 폐기처분의 기준이 아니라, 언급하지 않아야 할, 아니 오히려 언급할 수 없는, 대상에 해당하는 행위의 표시로서, 윤리 및 종교에 관한 한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논의를 신존재 증명의 정당화가 아니라 한계로 인식하여 실천이성을 설정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있는 것’이 곧 ‘신비적인 것’의 보조기제로서 작동한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표현하였다.

1) 종교와 윤리의 동일성


먼저, 제목이 시사하듯이, 윤리와 종교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양자는 진술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서양에서) 윤리는 종교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관계의 필연성은 확실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적어도 메타언어적 의미론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둘째, 행위를 통해 그 양자는 드러나며, 이런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첫째, 종교가 윤리와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가를 명료화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관계가 탐색되어 그것의 유관성이 밝혀진다면 종교의 윤리적 해석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유관성에 대한 외관상 상황적 증거는 비교적 풍부하다. 예컨대 대부분의 종교적 가르침에는 윤리적 규범들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종교의 요구는 결국 모든 사람이 종교를 통해 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는 종교에 의존되어 있다 라고 주장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윤리는 어떤 이유로 종교에 의존하고 있는가?


우선, 도덕 혹은 윤리가 종교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소위 창조신앙에 근거해 있다. 즉,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데, 이 경우 모든 것 중에는 <선>도 속해있다. 따라서 <선>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곳에 없었다면, <선함>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선>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존재는 곧바로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다. 최소한의 논증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에의 의존은 종교에의 의존을 갖고 오는 형태를 취하므로, 윤리는 종교에 의존해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좀더 재미있는 방법은 윤리학의 <신적 명령 이론> Divine Command Theory으로, 도덕적 선과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과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과 선한 것이 잘 일치할 뿐 아니라, 하나이면서 동일한 것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바로 그 정의에 의해 하나님이 의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신적 명령 이론의 축자적인 해석은 여러 문제점을 만나게 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명백한 사실과 이 이론은 배치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믿음이 전혀 결핍되지 않는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축자적인 신적 명령 이론의 옹호자들은 뒷조사를 해서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지도 모른다. 도덕적 마음을 가진 무신론자들처럼 보이는 자들은 실제로는 무신론자들도 아니고, 도덕적 선에 대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든지 간에, 분명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공표 하는데는 명백한 일상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일상적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그 이론을 약간 사실이 되게 할 수 있다. 즉 정의에 의해 의미 있는 내용이 공허하게 될 수 있다.


그 문제를 향한 도덕적 비신론자들의 존재로 야기된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이론의 개정된 해석 영역을 유대 기독교적 담화로 한정하여, 유신론자와 비신론자들이 도덕적 용어들의 의미는 당연히 부분적으로는 같고 부분적으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로버트 아담스의 입장이다. 즉, 도덕적 마음을 가진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아담스는 신적 명령 이론이 우리 모두가 도덕적 용어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래서 신적 명령 이론자들을 위한 더 쉬운 길은 더 온당한 외연적 해석에 호의적으로 대하면서, 그 이론의 언어적 해석을 버리고, <선한 것>과 <하나님의 뜻>이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들이 같은 곳에 ‘다다른다.’, 즉, 하나님은 무엇이든 선한 것을 의도하고, 하나님이 의도하는 것은 선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곤혹스런 의미론적 주장을 요청하지 않으면서 의도상 등가적이 된다.


둘째, 신비적인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허드슨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신비적인 것이 자체를 보여주는 상황을 발견하고 심지어 창조까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과 엥겔만과의 서신에서 분명해진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측면은 두 가지인데, 예술과 행동이다. 엥겔만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낸 서신에 울란트의 <에버하르트의 산사나무를 헤아려라>라는 시를 보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한 논평을 썼다. 엥겔만은 이 평을 취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이 시를 『논고』에서 의미하는 것의 한 예라고 생각했음을 지시했다. 엥겔만은 자기 자신이 이 시를 시인들이 심오한 예술적 영향을 그 언어의 직접적 효과 너머까지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가의 한 예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칼 크라우스에게서 이것이 가능성 일반임을 배웠고, 울란트의 시에서는 그 실현의 특정한 예를 찾아내었다. 엥겔만은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대해, 한 명제는 그것이 그 안에서 명백하므로 명시할 수 없는 것의 발견은 이 편지에서 계속되는 표현을 찾았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분명히 한 명제 안에서 ‘분명한 것’을 취해, 그 시의 명제들이 윤리적이고 종교적 실재에 관해 전달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엥겔만은 아마도 언어가 그 논리적 구조를 보여주고 시가 절대적 미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그 문제에 대한 견해라고 취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예술이란 말할 수 없는 최고의 것 자체를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분명히 보았다 라고 허드슨은 말한다.

2) 행동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행위이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생각을 실천했던 철학자이다. 자신의 전기 철학의 입장에서 정의한 철학에 대해 종언을 고하고 새롭게 착수했던 초등학교 교사 활동은 보여주기 이론의 적용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결심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교사 생활 속에서 신비한 것이 자체를 드러내도록 애를 썼다. 바틀리는 1965년 8월부터 1971년 9월까지 비트겐슈타인의 오스트리아 활동을 탐색했다. 특히 그는 오스트리아 학교 개혁 계획으로 알려진 것을 증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실제적인 의도를 갖고 학교 교육에 임했다. 내용상 암기 위주의 배움을 실험과 실습에 적극적 참여를 통한 배움으로 바꾸려는 이 정책을 비트겐슈타인은 근본적으로 동의했지만, 구체적인 개혁자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교육의 두 중심 원리는 자율활동과 통합적 구성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과 더불어 사전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방식 즉 자율활동에 의해 제작되었다. 즉 아이들이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용례를 썼지만, 사전에 사용된 단어들은 그 지역 아이들의 사용 방언과 비교하는 식으로 배열되었다. 이런 방식의 편집은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기계 장치의 모델도 그 지역의 공장 설비를 끌어들였다. 말하자면 연구자나 사상가 개인의 구체적인 참여를 통한 행동 가능성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는 학생들의 경험을 넓혀주기 위해 자비를 들여 아이들을 비엔나로 여행을 데리고 갔다. 트라텐바흐 학생들을 수풀을 가로질러 클롴니츠에 있는 기차역으로 안내하고, 다른 양식의 건축, 건물, 기계 등등을 보여주려고 박물관 견학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향한 이와 같은 열정은 엄숙하고도 검소했던 자신의 삶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육에 뛰어든 일차적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때 복음서를 읽고 있었으므로 이따금씩 ‘두엄 무더기’에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의도를 추구하기 위해 수행한 행동들 가운데 어떤 의미에서 윤리와 종교를 언어로 표현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그런 이야기에서 걸러내어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언어 행위란 신비한 것이 자체를 보여주는 도구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허드슨은 그 예로 정직에 관한 것과 하나님에 관한 것 두 가지를 들면서 이것들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언술 자체보다는 행동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형이상학적인 윤리 및 종교에 관한 언술보다는 그 행동을 통해 그것을 파악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III. 의미론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자체를 보여주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이것을 ‘신비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허드슨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선험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은 두 가지 형식 혹은 예화가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인 것’과 ‘윤리-종교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둘은 명료한 기술을 통해 드러날 수 없다는 뜻에서 신비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세계의 사태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 자체를 그릴 수 없다는 뜻에서 선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둘은 공통적이다. 우선, 이 선험적인 것이 경험가능한 것과 다른 것을 밝히기 위해 이것을 통해 그려지는 것의 특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그려지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관련된 언급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 발견되는데, 이렇게 쓰고 있다. “명제 내에서 세계는 말하자면 실험적으로 배열된다. (마치 파리의 법정에서 자동차 사고가 장난감들에 의해 재연되듯이.)” 이런 생각은 오스트리아 군인으로 참전한 전장의 참호 속에서 그에게 떠올랐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것이 개입되어 있다. 첫째, 연관된 차, 사람 등을 상징하는 장난감 차, 사람 등과 같은 대상들. 둘째, 모델이 된 상황 가운데 있는 차, 사람 등과 같은 배열을 재연하는 상징물들의 어떤 배열 내지 배치. 셋째, 그 모델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해되고 수용된 규약. 그런데 이 모델들의 법정에서 사용되는 이유는 일어난 실제 사건의 축소판으로서 그것은 실제 사건에 나타난 사실들을 그려주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변호사나 판사는 언어를 사용한 문장을 통해 기록하고 또 사태를 알려준다. 이때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 사태는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태를 논리적으로 알려주는 논리적 그림이다. 말하자면 명제는 상황의 논리적 그림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에 관한 논리적 그림에서 모든 의미 있는 언어는 요소명제들로 분석될 수 있다. 여기서 요소명제란 이름들의 연쇄이다. 또 이름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기호를 의미하며, 이것은 이름이 지시하는 바의 것을 지칭하는 단순 기호를 말하므로, 이름들은 언어의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실제상의 각 요소는 하나의 이름에 의해 지시(refer)된다. 따라서 명제는 최후의 분석에서 단순한 기호인 이름으로 나뉜다. 즉 각 단순 기호와 실제의 어떤 요소 사이에는 일 대 일 대응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런 지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명제의 의미를 알기 이전에 있게 될 논리적 필연성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단순 기호들이 가능해야 할 요구는 의미가 결정되어야 하는 요구이다.” 라고 말한다. 언어는 한 마디로 단순기호인 이름으로 구성되는 요소명제들로 구성되어진다. 이 요소명제들은 그것을 요소로 갖는 더 큰 범위의 명제들로 확장되며, 여기에는 복합적인 사실들이 대응된다. 이 모든 것은 말해질 수 있으며, 그 의미는 그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는 진리함수적 구조를 갖게 된다. 이에 비해 이것과는 다른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를테면 말할 수 없는 것 곧 보여지기만 하는 것이 있다.

2) 보여지는 것


허드슨은 선험적인 것으로서 논리적 형식과 윤리․종교적인 것을 말했다. 그는 이것을 차별화하려고 한다. 우선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말해질 수는 없지만 논리적 문법과 구문론을 통해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허드슨은 생각한다. 또 『논고』의 말미(6.4에서 7까지)에서 신비한 것을 도덕적 선, 미적 심대함, 신, 삶의 의미, 영원 및 종교와 같은 문제와 관련을 갖는 것으로 말한다. 이런 것들은 말로서보다는 보여지는 예술 작품이나 행동을 통해 그 의미가 전달된다. 그것이 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그런지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논리적 문법이나 구문에서 드러난다. 사실 이 두 가지 즉 논리와 윤리 사이의 선험성의 차별성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목적을 사고표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고표현은 바로 명제가 되고, 사고란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므로 『논고』의 의도는 결국 명제들이 구성하는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 한계 설정은 논리의 법칙에 의해 부과된다. 어떤 명제도 논리적 그림이라는 사태는 명백히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태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좌표에 의해 공간 법칙에 모순되는 도형이 재현되는 것이 기하학에서 불가능하듯이, 논리에 모순되는 어떤 것도 언어에서 재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말한다. 이런 한 예로서 그는 하나님은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게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비논리적인 세계란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에 부과된 제한이 곧 무엇을 자기 뜻에 반하는 물질을 적응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X가 논리의 법칙으로부터 출발을 구성하는 경우 하나님이 X를 했다고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한 명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더 세부적인 제한은 논리적 그림(명제)와 그것의 논리적 그림 간의 구분이라고 허드슨은 본다. 명제가 논리적 그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형식 혹은 그림 형식을 필요로 한다. 언어의 어떤 일부가 세계의 어떤 부분의 그림이라면 그 사이에는 틀림없이 어떤 논리적 대응이 있다. 즉 그리는 것과 그려지는 것을 연결시켜주는 어떤 기초가 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재현(그리는) 형식으로서 재현을 통해서 드러난다. 예컨대 모든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그림 그리는 방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 주위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으로 그 방식은 완결된 작품에서 명시될 것이다. 전문가는 그것을 자기의 일로서 그것이 그려진 방식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와 종교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말해진다.

IV. 윤리․종교적 언어

『논고』의 말미에 나오는 침묵은 단순히 논리적 형식에 관련된 침묵이 아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윤리, 종교 및 미학이라는 총체적 주제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끝에서 문제삼은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신비적인 것[윤리적 예화에서 선험적인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은 보여줄 수는 있어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했는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세계를 영원의 상 하에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총체 즉, 하나의 제한된 총체로서 보는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제한된 총체로 느끼는 것 -- 신비적인 것은 이것이다.

여기서 ‘신비적인 것’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관계를 갖는다. 예컨대, 세계의 의미, 윤리/학, 윤리적 속성의 주제에 관한 한에서의 의지, 죽음, 영생, 하나님, 삶의 문제, 그 문제의 해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문제 모두를 어떤 세계관의 관점 혹은 거기에 대한 어떤 느낌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사람의 언어의 한계란 사람의 의도하는 세계의 한계이다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에 맞추어 읽어야 한다. 언어의 한계를 구성하는 것은 의미의 규칙이 아닌가. 다시 말해, 무엇이 언어가 되기를 의도한다면, 그것은 의미와 유의미를 결정하는 규칙의 영역 내에 머무른다. 『논고』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이고, 언어는 세계를 그리고 비춘다. 언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규칙들은 언어의 어떤 부분이 세계의 어떤 부분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런 지시를 하는지를 지적한다. 그래서 의미 있는 언어는 세계 혹은 실재 즉 경우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경우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하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다. 후자 역시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의미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에 관련된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는 “가치가 있는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나타나 경우인 것의 총체적 영역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세계의 의미에 관련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우리를 세계 너머로 데려 간다. 어떤 X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단순히 X와는 다른 혹은 더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또, 경우인 바의 가치에 관련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우리를 경우인 바를 넘어서게 한다. 경우인 바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경우이지 않으면 안되는 바의 어떤 개념을 기준으로 가져야 한다. 그리고 경우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의 문제로서 경우인 바와 구분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가치를 가진 어떤 가치가 있다면, 즉 경우인 바의 가치를 판단할 어떤 적절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나타나 경우인 바의 총체적 영역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윤리학과 미학은 동일하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만일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의미론이 주어진다면, 경우인 바의 가치나 의미에 관련된 질문은 대답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 의미론에서는 언어가 경우인 바를 그리고, 비추고, 재현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경우인 바의 의미나 가치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우인 바를 넘어설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대답들은 의미상 말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제한된 총체로서 세계를 보거나 느끼는 것은 의미 규칙들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부과하는 한계를 의식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구조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믿었듯이, 사물의 의미나 가치는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은 가끔 자신들이 표현 불가능한 것들을 종교나 윤리적 용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려는 강요당하고 있음을 발견했노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윤리적이고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경험의 두 가지 예를 제공한다. 『논고』가 출간되고 난 10년 경 뒤, 그는 캠브리지에서 <윤리학>이라고 불린 강의를 했다. 이 강의는 1965년 『철학리뷰』에 인쇄되어 나타났다. 한 예는 세계의 존재에 놀라는 경험이었다. 세계 내에 있는 어떤 특별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반증에 대한 것이었다. 즉, 어떤 것의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정이 가능할 때 놀라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고, 어떤 집이 아직 건재한데도 그것의 붕괴를 상상하기 때문에 놀랄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적 상황이 상상 불가능한데도 놀란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가 제공한 둘째 예는 무엇이 일어나든지 간에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험이다. 여기서도 현실적인 조건과 어떤 다른 인지 가능한 조건을 대조시킬 수 있을 때 안전하다는 느낌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두 경우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언어를 오용하고 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런 감정을 표현할 때 마치 이 표현들이 유사나 비유인 것처럼 묘사하려고 그런 표현들을 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것들을 사용하는 맥락과 일상언어의 맥락을 다른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쓴다면 우리는 직유나 은유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종교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지적한다.

모든 종교적 용어들은 이런 의미에서 직유나 은유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가 모든 것을 안다라고 할 때 그리고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우리의 모든 용어와 행동은 하나님을 위대한 힘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를 대표하는 크고도 정교한 은유의 일부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은유는 또한 내가 막 지시한 경험을 기술한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나는 믿는다. 절대적 안전의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말하는 것으로 기술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강의에서 강조하듯이, 윤리적 용어는 종교적 용어와 똑 같은 한계에 묶여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와 ‘그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이다.’를 대조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것을 지적한다면, 그는 “아, 나는 신경쓰지 않소.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그의 말은 비난받을 것이 없다. 그는 다만 건강을 위해 혹은 취미로 테니스를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지적을 받을 때, “아, 나는 신경 쓰지 않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한다면,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칸트의 설명을 빌면 이해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은 정언적이어서 단순히 선언적인 것과는 구분된다. 만일 그가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되어서 가져 올 어떤 것들, 예컨대 돈과 명성을 원한다면 그는 그렇게 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만이다. 반면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어떤 것을 목표로 하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신경 써야 할 무엇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칸트의 구분에 똑바로 일치되게 절대적 가치(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와 상대적 가치(훌륭한 테니스 선수)를 구분하면서, 윤리를 절대적 가치라 생각한다.

V. 윤리․종교적 진술의 의미

칸트에 따르면, 상대적 가치에 대한 모든 판단은 사실에 대한 단순 언명이고 따라서 그것이 가치판단의 모든 외양을 상실하는 형식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이다.’는 의미의 상실이나 변경 없이 재진술되는데, 예를 들면, ‘그는 서브를 잘 넣는다.’, ‘그는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백핸드는 강력하다.’ 등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절대 가치의 경우에는 ‘어떤 사실의 진술도 절대 가치 판단이 될 수도 함축할 수도 없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하고자 한다. 그는 슐릭의 윤리를 논평하면서, 훌륭함의 본성은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자기의 신념을 좀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선이 좋기 때문에 그것을 의도한다는 견해는, 하나님이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선은 선하다는 견해에 배치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더 심원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부인한다. 그는 선이란 하나님이 더 예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이론을 취한다. 이 견해는 왜 선이 선한가에 관한 설명을 배제하는 반면, 다른 견해는 선은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라는 형태를 취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애호하는 견해는 자연주의적 오류의 분명한 예라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암암리에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은 전혀 사실로서 간주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비적인 것에 대한 일반적 설명과도 드러 맞다. 즉, 무엇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를 언어의 한계 너머로 이끌며, 결국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윤리적이 것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의 한계인 언어의 한계를 맞서 가는 것이다. 우리의 말은 오직 사실들을 표현할 것이기 때문에, 정언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기술하는 언어란 없다. 절대적 가치는 사실로 분석될 수 없으므로 단어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반대 입장을 밝힌다. 우선 윤리적 언어에 대해 그는 상대적이고 선언적 가치 판단은 단순 사실 판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사실에 대한 많은 언명은 훌륭한 테니스 선수인 김갑돌에 대해 성립된다. 예컨대, 그는 월요일에만 테니스를 친다, 게임 후에 샤워를 늘 한다, 낫소 공과 라켓을 쓴다, 등등. 그런데 이 중 어느 하나도 그가 훌륭한 선수임과 무관하다. 왜 그런 어떤 사실들, 이를 테면, 서브가 정확하다, 백핸드가 강하다, 등등이 그를 훌륭한 선수로 만드는가? 상대적 가치 판단이 들어간 사실에 대한 진술들 내에는 암암리에 어떤 사실들이 상대적 가치들을 구성하여 그것을 구성하지 않는 것과 구분되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평가 기준 내지 원리들을 갖고 있다. 절대적 가치에 대해 ‘아무 사실에 대한 진술도 절대 가치 판단이 될 수도 그것을 가질 수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체로서 상대 가치와 절대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실에 관한 진술도 자체로서 상대적 가치를 함축할 수 없다. ‘그는 강력한 서브를 넣는다.’는 다만 부가적 전제 ‘강력한 서브를 넣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한 테니스 선수이다.’라는 것이 제시될 때라야만 ‘그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이다.’를 함의한다.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이 몸소 제공한 종류의 이유는 사람이란 진실을 말한다면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 가치가 그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런 기준의 성취를 함의하고 있다.


종교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을 살펴보자. 허드슨은 비트겐슈타인이 종교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을 단지 은유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간주한다는 견해는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한 기독교인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사랑이 은유인 태도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말하는 것을 의도한다고 허드슨은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라고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은 전능성이 하나의 직유인 특징을 가짐을 의미한다고 허드슨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양자의 경우에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축자적으로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악의 문제가 아주 잘 통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완벽하게 일상적인 ‘사랑한다’는 의미로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완벽하게 통상적 의미로 전능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고통과 상실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지? 하는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 혹은 종교가 만들어 내는 차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이성보다는 의지의 실천 영역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의지를 도덕적으로 실천하는가를 완전히 바꾸지만, 그러나 이것은 말로 표현되는 차이는 아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세계에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진․위가 결정되는 명제로 표현될 수 없다. 이것은 의지의 실천을 덧없게 만들거나, 그것을 공으로나 헛된 망상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반면에 언어에 의해 부과된 한계로부터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의지뿐이다. 그러나 경우의 본질에 있어서, 의지는 이 도피를 언어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

의지의 좋고 나쁜 실천이 세계를 바꾸지 않으면, 세계의 한계만을 바꾸지, 사실들은 아니다 --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 결과는 그것이 전체가 다른 세계가 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총체로서 증감이어야 한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그것과 판이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언어나 세계의 한계가 어떤 사람이 의도하기 때문에 단순히 축자적 의미가 제거되거나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계는 내 의지와 독립적이다. 의지의 실천으로 우리는 세계를 변경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의지의 실천이 행복한 사람의 세계를 불행한 사람의 그것과 어떤 은유적 의미에서 구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의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지의 좋고 나쁜 실천이 만들어 내는 차이는 사실의 차이일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종류의 차이는 있을 수 없는가?


자기의 의지를 도덕적으로 옳거나 선한 무엇을 행하는데서 실천하려는 사람은 이 행동 자체와 다른 어떤 것 즉, 자기의 세계를 다르게 의도하는 사람의 그것과 다른 세계로 만드는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없다. 윤리는 보상이나 징벌로 인지된 경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이란 행동 그 자체 안에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윤리는 용어의 일상적 사용에 있어서 징벌이나 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행동의 결과에 대한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 적어도 그 결과들은 사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어떤 종류의 윤리적 보응이나 징벌이 틀림없이 있겠지만, 그것들은 행동 그 자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

바로 뒤따르는 단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대하여도 비슷한 말을 한다. 종교 신자는 자기 신앙의 성취나 확증을 시공간적 사건의 형식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은 세계의 일부일 것이므로, 반드시 세계의 감각의 일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후의 삶’에 대한 신앙이 핵심적 경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기를, 죽음은 삶 중의 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글자를 먼저 썼고, 그 다음 <가>자를 보았다.’에서와 같이, ‘나는 죽었고, 그 다음 <가>자를 보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즉 앞의 글자 쓰기는 시공간의 한 계기인데 반해, 뒤의 죽는 것은 그런 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영원에 대한 신앙을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앙이 무엇인가, 아니 오히려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를 명백히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들은 죽음 후에 사람에게 계속해서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는 것은 삶이나 세계의 의미의 일부로서 그것에 대한 신앙을 지나치는 것이다. 죽음에서 살아남는 것이 삶의 한 계기이고 세계의 한 사실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의미가 주어질 필요가 있는 일부이지, 그 의미의 일부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의 시간적 불멸 즉 그것의 사후의 영원한 생존은 보장이 없다. 뿐더라 어떤 경우도, 이 추측은 그것이 늘 의도되어졌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완벽히 실패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수수께끼가 나의 영원한 생존으로 풀렸는가? 이 영원한 삶 그 자체가 우리의 현재 삶만큼 많은 수수께끼가 아닌가? 시공간의 삶의 수수께끼의 해결은 시공의 바깥에 놓여있다.

영혼불멸은 ‘무한한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해야 하며, ‘그때 영생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속한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보았듯이, 도덕성과 종교는 말하자면 정당성이 그 자체 내에 있는 행위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차이란 특수한 것이 아니다. 차이란 단지 윤리적 행동 그 자체이지 거기에 근거한 귀결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신앙 그 자체이지 그것이 결정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행동하거나 종교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상이한 세계 내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총체적으로 이지러지고 펴지는 세계인 것이다.


VI. 나오는 말

지금까지 『논고』에 있어서 윤리․종교적 담론이 어떤 특징을 갖는가를 논의했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은 그 담론 즉 <신비적 인 것>이 논리적 형식을 갖추어 의미를 생산하는 진술들과는 구별되는 ‘보여주는 것’에 속하는 담론임을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논리적 형식과도 같은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윤리․종교적 진술은 그것이 담아내는 것의 소위 무의미성 때문에 논리적 형식과는 구분된다. 허드슨의 주장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윤리적 진술과 종교적 진술이 모두 행위 자체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일하다고 본다. 여기에 본논문의 논의는 집중되었다. 그러나 신비적 영역 내에서 양 진술 자체는 행위를 목적으로만 여긴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왜 그런 주장이 가능한지를 밝혀내는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것을 밝힐 때 윤리와 종교의 구분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진다. 이에 대한 후속적인 논의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