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박병기(전주교대, 윤리학)
1. 놀이와 공부, 그리고 일
우리들은 누구나 공부나 일 보다는 노는 것을 더 좋아하고 즐긴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본래 태어날 때는 놀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였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그리스도교의 성경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놀기만 하면서 살 수만은 없는 존재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극히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덜 일하거나 거의 일하지 않으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도되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가끔씩 발견되기도 한다. 놀고서도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누구나 그런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우리는 일하는 것 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이 질문들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화두(話頭)이다.
1) 놀이하는 인간, 일하는 인간
사람들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과 통한다. 물론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시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의 의미가 늘 분명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 평생 매달렸고 더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신앙체계에 바탕을 두고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였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묻고 또 묻는다.
‘살아있음’이 갖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관한 몇 가지 사유들을 공유하면서 답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살아 있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흔히 일컫는 쇼펜하우어는 그럼에도 자신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가 행복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론화된 삶의 지혜란 다름 아닌 행복론이라고 강조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행복의 지혜를 찾아주고자 노력했다.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극단적인 체념과 결핍의 길도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행복을 이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결국 행복론의 영역은 금욕의 스토아주의와 극단적인 현실주의인 마키아벨리주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통이면서 최근에는 많은 서구인들도 관심을 보이는 불교철학에서는 삶을 고통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한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잠시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들은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 고통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것에 끌려가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을 통하여 온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한 사람의 삶이 늘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은 때로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감내해 내야만 한다.
삶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은 즐거움을 그렇게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일을 하면서 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대체로 일은 그저 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일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더 클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그 어떤 누구도 일을 하면서 늘 즐거울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가끔 원시인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환경파괴와 삭막한 인간관계를 감내해 내야 하는 우리들보다도 그들의 삶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놀이와 일이 서로 통합되어 있었고 이러한 통합은 우리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안이라고 판단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실제 생활은 고달프고 위험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맹수의 위협에 시달리고 겨울철과 같은 때에는 굶어죽을 수도 있는 처절한 상황에 직면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삶을 떠올려보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삶이 놀이와 일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있다. 일주일에 닷새 일하고 나머지 이틀을 쉬게 하는 이 제도가 우리 상황에 맞게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놀고 쉬는 것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한 달의 휴가를 위해서 일년을 일한다는 유럽인들의 삶이 우리 주변에서도 점차 현실이 되어갈 것이고, 주말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 이후에 일하는 것을 삶의 주된 영역으로 삼아야만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진전임에 틀림없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노동을 넘어서서 한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을 위협할 정도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소위 후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에서는 아직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어린이들이 엄청난 시간의 노동에 노출되어 있다는 보고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주당 노동 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제도는 바람직한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일하는 것과 쉬는 것, 노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들 사이의 관련을 밝혀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2) 쉬는 것과 노는 것
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만일 일하지 않는다면 쉰다는 표현을 굳이 쓸 필요도 없어진다. 진정한 휴식, 즉 쉬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우선 쉬고 싶어진다. 그 때 친구가 무언가를 함께 하면서 놀자고 유혹해도 너무 피곤할 때는 거절하고 싶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쉬는 것은 노는 것보다도 더 강한 욕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쉬는 시간이 길어질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는 중요한 감정의 하나가 지루함이다. 오래 쉬다보면 지루함이 내면으로부터 몰려나와 무언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일어난다. 이 상황이 되면 이제 더 이상 쉬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고, 무언가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 지루함을 해소하고 싶은 충동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육체를 편하게 놓아두지 않고 움직이는 활동에는 대체로 노동과 놀이가 모두 포함된다. 전자는 어떤 구체적인 활동 결과를 염두에 두고서 행해지는 것이고, 후자는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경우라는 전제를 한다면 노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장에서 자발적으로 조기축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진지함과 활력은 다른 목표로 건강을 설정하고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충분한 목표를 껴안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의 직업이 축구인 프로 선수들에게 축구는 놀이가 아니라 일이다. 그들이 축구를 시작할 때는 그저 놀이로서의 축구를 즐겼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제 그것이 돈벌이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놀이가 아닌 일, 즉 노동이 된다. 아마도 그들은 축구화를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고통을 감내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축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이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이가 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프로축구 선수도 쉬는 날 자신의 가족과 함께 놀이로서의 축구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놀이와 일은 서로 상당 부분 구분되는 분명한 선이 있어 보인다.
쉬면서 놀 수 있다는 주장도 물론 가능하고, 쉬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놀이도 가능하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면 놀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쉬는 것이 곧 노는 것은 아니다. 쉬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이완시키면서 특별히 어떤 것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이와 대응되는 상태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된다. 후자에서도 노는 것은 활동이라는 점은 제외하면 쉬는 것과 상당 부분 일치하게 되고, 그 결과 대체로 일하는 것과 대비시켜 쉬는 것과 노는 것을 묶기도 한다.
인간에게 왜 쉬고자 하는 본능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늘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매우 어렵거나 때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정 시간 이상의 긴장은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역으로 이완시키는 촉매 작용을 한다. 오랜 긴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모두가 그 긴장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누구도 그런 긴장에 대해 유의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긴장으로서의 특성을 상실한 셈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쉬고자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 휴식을 통해 사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싶어 하는 존재임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기도 하다. 만일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더 이상 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 특별한 정신 질환이 없는 한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 생각하는 것이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쉴 수 있는 시간적․공간적 여유를 갖고 있을 때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한편 쉬는 것은 숨을 고르는 일과도 통한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확실한 징표 중의 하나가 바로 숨쉬는 것인데, 이 숨이 가빠지거나 고르지 못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곧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의미한다. 일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우리들의 숨은 고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숨을 다시 고르게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쉬는 것, 즉 진정한 의미의 휴식은 다음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충전 장치이기도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본질적으로는 숨을 고르는 일이기도 하다. 이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왜 이렇게 밖에 살고 있지 못한가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그 여유를 바탕으로 자신이 즐기고 싶은 것을 찾아서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쉰다는 것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중요한 변수임에 틀림없다.
3) 일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
공부(工夫)는 일과 놀이 중에서 어떤 쪽에 속할까? 가끔씩 공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람도 발견할 수 있고, 공부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공부가 꼭 일에만 속한다고 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공부는 대체로 일 쪽으로 분류된다. 특히 자신이 선택해서 별도의 목표 없이 즐기면서 하는 공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고통의 순간을 감내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하곤 한다.
우리는 숨막히던 고교 시절 대학에 가서 하게 될 공부는 최소한 고등학교 때까지 해온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곤 한다. 아마도 한편으로는 그런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되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학기말이 되면 수행해내야 하는 보고서가 쌓이고 기말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이 고생이 언제나 끝날까 하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라는 공자님 말씀은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일 뿐이고 현실 속의 공부는 늘 그렇게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공부는 분명 놀이가 아니라 일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공부가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일과는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흔히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온전한 노동이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공부를 일이라기보다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왔던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관에서 비롯된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의 본성을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으로 전제하는 원시유교의 인간관에서 성선설을 택하든지 아니면 성악설을 택하든지 공부는 인간에게 선함을 키워주고 그것에 기반한 예(禮)를 가르치는 과정을 의미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하다고 규정한 순자(筍子)의 경우에는 오히려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보장될 수 있었고, 선함의 단서를 타고난다고 믿었던 맹자(孟子)에게서도 그 선함이 늘 욕심에 가리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부는 선함을 온전하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절대적 중요성을 가졌다.
우리들에게 물론 이러한 전통적인 공부관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식 교과목 체제를 택하고 있는 현재 상황 속에서 공부는 대체로 특정 교과목에 대한 공부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고, 결국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란 이 교과목들에 대한 평가 점수가 높은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유교적 교육관이 통용되던 조선시대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과거급제 여부를 공부의 성패를 판단하는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사림파 등의 일부 성리학자들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온전한 인간, 즉 군자(君子)가 되는 것을 공부의 최종 목적으로 설정하고 살아내기도 했다. 그 결과 공부하는 것의 근원적 목표가 최소한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이상은 보존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명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 하고, 교육의 목표도 이것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는 없다. 가정교육은 이미 이 목표에 의해 점령당했고, 학교 교육도 상당 부분 침해받고 있으며 사회교육은 특히 사교육과 맞물리면서 온전히 자본주의적 교육관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하는 것은 곧 생존 능력을 기르는 것과 동일시되고, 그러다 보니 공부는 전혀 재미없는 의무로 다가온다.
‘생존능력 기르기로서의 공부’ 는 기본적으로 직업으로서의 일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삶의 심연에 자리한 인간다움을 향한 열망으로서의 공부와 교육은 이제 이미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논변이 된 지 오래이다. 이런 현실을 일단 냉정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농촌공동체와 신분을 전제로 했던 전통 사회에 살고 있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 상황 속에서의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물어야만 한다. 공부는 진정 미래의 일 또는 직업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일 뿐인가?
주로 학교 ‘공부’를 통해서 미래의 튼튼한 직업을 예약하고자 하는 우리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열망은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다가온다. 하나는 미래의 일을 온전히 담보할 수 있는 그런 온전한 교육이 가능한가 하는 현실적 차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 공부가 완성되는 것인가 하는 본질적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현재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을 할지 종잡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이상으로 불투명해질 수 있고 그것이 교육 수요자들에게는 불안과 공포로 다가온다. 현재 우리 사교육 열풍은 바로 이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공부는 두 차원의 의미를 모두 갖는다. 하나는 나에게 맞는 미래의 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서 보다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로서의 의미이다. 두 차원이 서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그 중에서 전자에만, 그것도 피상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미래의 일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공부는 단순한 어떤 특정한 직업을 위한 직전교육(職前敎育)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사 직전교육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직업을 가질 경우 활용해야 하는 전문기술의 교육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직업교육일 경우 인격완성을 위한 내적 공부의 영역을 보다 강화해야만 바람직한 의미의 전문직업인이 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요청을 어떤 의사, 어떤 변호사가 진정으로 좋은 전문인들인가를 묻게된 현실 속에서 확인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놀이와 일, 공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공유해 왔다. 노는 것은 쉬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고, 쉬는 것은 일하는 것에 대응해서 성립한다는 것이 우리가 공유한 핵심적인 논리 구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 중심의 생각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만 규정해 버리는 노동결정론적 한계 상황과 직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고 그 일을 통해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마르크스적 노동관으로 회귀하거나, 자칫하면 부속품으로서의 위상밖에 지니지 못했던 산업사회의 유물을 계승하는데 앞장서는 보수적 노동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서 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물을 필요성을 느낀다. 삶의 과정에서 쉰다는 것은 일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은 급속한 변화의 시대 속에서는 가끔 일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침잠의 시간이 더욱 요구된다.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소비하면서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 이상의 것을 소비하기 위해 끝없이 일해야 한다거나, 자본주의의 소비 중심 체제에 구속되어 외적인 목표에 함몰되는 삶은 이제 극복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하는 것도 없으면서 휴식과 놀이에 몰두하는 삶이 바람직한 것으로 묘사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일과 휴식, 놀이의 의미가 삶의 본질적 목표와 과정 속에서 긴장감있게 연계될 수 있게 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연계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기로 하자.
2.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1) 미래 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미래란 늘 우리에게 기대와 불안감을 함께 가져다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예비하는 설레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현대 문명의 한계와 연결지어지면서 지구의 종말 또는 인류의 종말과 같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재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측에 깔려 있는 기본 전제 중의 하나가 미래가 현재와는 동떨어진 전혀 새로운 시대라는 것이다. 과연 미래는 현재와 현격한 거리를 유지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인가?
시간의 흐름을 순간순간의 연속이라고 보는 불교적 사유 속에서는 미래란 현재의 연장선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다양한 원인들이 서로 섞이면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인연(因緣)의 산물일 뿐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미래는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할 대상만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새로운 것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예측의 대상일 수만도 없다.
미래는 굳이 미래학자들의 예측을 빌리지 않더라도 낙관적인 전망과 비관적인 전망 모두가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이다. 우리들이 현재의 문명을 어느 정도 통제하면서 그 방향을 잡을 수 있느냐에 따라 밝은 미래가 보장될 수도 있고, 환경파괴나 핵전쟁으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시대가 다가올 수도 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거시적 관점에서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 틀과의 연계성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 청년기의 발달과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현대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축을 바탕으로 하여 그 저항으로서의 사회주의와 경쟁하면서 정착했고, 이제 현실 사회주의가 상당 부분 자본주의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견제의 축을 상실한 채 그 기세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과학기술 발달, 그리고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정보통신 기술의 급속한 확대와 발전으로 말미암아 소위 세계화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다. 이러한 추세와 함께 미국 중심의 일방적인 자본주의화를 의미하는 세계화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반세계화의 물결이 동시에 출렁이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넷 매체의 발달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우리 삶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물결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환경을 보존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빠른 시간 안에 모여져서 행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매체도 인터넷이고, 자본주의의 첨단 상품 정보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통로도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기반한 가상공간을 보는 시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상공간 자체의 확대와 그 영향력의 증가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세계화와 반세계화 논의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특수한 관계를 형성해 온 우리들에게 이러한 세계의 변화는 매우 역동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자칫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흐름에 휩쓸려 단지 수동적이고 노예적인 삶을 살다가 우리 민족의 최소한의 주체성마저 상실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응시하면서 그 좌표축을 분명하게 헤아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일일 것이다.
미래사회는 현재의 연속선상에서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에 다양하게 원인과 결과로 얽혀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결과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는 것들이 구체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인간 복제나 인간의 두뇌를 닮은 로봇의 출현 등이 그러한 현상의 한 예일 수 있고, 환경의 총체적인 붕괴나 전쟁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 등도 비관적으로만 강화될 경우에 예측할 수 있는 현상들의 예이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 인간들이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약화 또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당한 직업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자본주의의 상품들을 만들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판매하는 생산직과 세일즈맨 등이 그런 전통적인 직업군으로 유지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래사회는 인간의 삶의 양상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직업 또는 변형된 다양한 직업군들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다양한 직업들이 더 나타날 것이고, 문화가 삶의 중심축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산업을 창조하거나 관리하는 직업들이 더 많아지면서 각광받게 될 가능성도 높다. 또한 이미 활발해지고 있는 휴식 또는 휴가 관련 직업들이 다양하게 등장할 것이고, 애완동물이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로봇 관련 직업도 보다 활성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확실한 사실은 이러한 예측들도 모두 한계 안에서의 예측일 뿐, 우리들이 미래 사회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 것인가에 관한 정확한 예측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면서 직업의 본질적 의미와 함께 바람직한 직업관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직업은 행복을 담보하는가?
우리는 꼭 어떤 특정한 직업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 라고 대답할 것이지만,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으면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인간들이 모여 군집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각 구성원들이 맡게 되는 일정한 유형의 일이 있었다. 크게 나누면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이 있었고, 어른들의 일과 아이들의 일이 각각 다르기도 했다. 계층 또는 신분의 구분이 엄격해지면서부터 그것에 따라 각각 다른 일을 하는 직업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직업(職業)이란 대체로 보수를 받으면서 그것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는 일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각각 다른 직업들과 연계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직업 개념은 갈등론자들에 의해서 기존의 차별을 강화하면서 현재의 문제들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직업 자체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매개고리이고 이것을 통로로 하여 일을 하면서 다만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에서 차별화될 수 있을 뿐이다.
직업을 이와 같이 한 개인이 그 공동체와 맺고 있는 연결고리이자 개인적 차원에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보수의 원천으로 정의해놓고 나면, 각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유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직업 자체에 이미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이 포함되게 되고 그 결과 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직업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이 상당 부분 결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는 사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행복에 직업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 행복이 마음에 있다고 보는 동양적 사유를 빌려온다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는 그 마음과의 관련 속에서 제한적인 영향을 발휘할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라.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마음 다스리기는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조건의 직업을 갖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지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간에게 적극적이고 완벽한 행복은 불가능하고, 대신 비교적 덜 고통스러운 상태만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서양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소극적인 행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 즉 행복한 활기이고 둘째는 몸의 건강이며, 셋째는 정신적인 평온이고 마지막이 외부의 자산이다. 아마도 직업이 가지는 보수에 초점을 맞춘다면 네 번째 요건 정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바탕 위에서 정신적인 평온과 건강을 추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행복한 활기까지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우선 당사자가 갖고 있는 직업의 특성을 묻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본다. 그럴 경우 그 개인과 직업은 서로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의 삶 속으로 직업이 통합되어 있지 못하고 각각 다른 별개의 차원으로 나뉘어 전개됨으로써 직업은 단지 생계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직업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결코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역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과 삶이 서로 통합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직업에 충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직업 자체가 상당 부분 행복을 보장해주는 장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직업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 바탕이 될 수 있는 생존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행복을 향해 다가설 수 있다. 그런 직업을 찾고자 노력하는 일이 현재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중요한 과업임을 다시 강조한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특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그가 어떤 일을 꼭 해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이 훼손될 수는 없다는 칸트적 정언명령은 그러한 가능성과 당위의 초석이 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일을 할 수 있고, 그럴 경우에 그 일, 즉 직업이 행복과 밀접한 친화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3) 대학에서의 공부와 우리들의 직업
대학에 들어오면 우리들은 차츰 ‘전공(專攻)’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지게 된다. 대학 교육과정이 크게 교양 과정과 전공 과정이라는 두 과정으로 나뉘는 것은 대학의 목표가 ‘교양(敎養)을 갖춘 전문인의 양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목표가 주로 목적대학의 경우에 더 두드러지고 일반대학의 기초학문 과정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한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일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대학의 목표를 단순히 교양교육으로만 제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공의 성격과 특성이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대학에 들어오면 자신의 전공이 어떤 형태로든 정해진다. 때로 그것이 복수로 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구분이 분명치 않은 폭넓은 전공으로 될 수도 있겠지만, 전공별로 나뉘어 대학 공부가 전개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그 전공의 배경 학문의 세계에 보다 깊이 있게 다가서는 것이다. 그 학문이 추구하는 목표를 분명히 알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하나씩 탐구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관을 지니게 될 수도 있고, 보다 확고하게 정립된 가치관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 그 자체가 직업을 위한 준비 기관이 아님은 분명하다. 일부 특정 직업을 전제로 설립된 목적 대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학(大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울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최소한의 요건이 필요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사회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직시할 수 있는 교양 교육의 장으로서의 요건이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세계를 보다 심도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할 의무가 있고,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의무도 있다.
우리가 중시하고 있는 직업관은 바로 이와 같은 교양인으로서의 깊은 통찰에서 시작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이 ‘돈벌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이 돈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임을 중요하게 인식해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차 강조한 바 있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만 직업의 의미가 한정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데서 바른 직업관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돈벌이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직업(職業)은 ‘맡는다’, ‘떳떳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직(職)과 ‘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업(業)을 합한 말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풀이한다면 ‘자신이 맡은 일’ 정도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업의 경우에는 불교에서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개념과 동일시하면서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에 유념해 보면, 그 일로 인해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채워지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수용해야 한다는 무거운 의미로 확장되기도 하는 셈이다. 결국 직업이란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떠맡은 일로서 그 일을 통해 생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직업을 위한 준비로서의 대학 공부는 이러한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여 지향할 수 있어야 하고, 특히 후자에 초점을 맞출 경우에 교양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점과 전공 공부를 단지 그와 관련된 지식을 획득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공부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왜 사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윤리학적 사색, 그리고 종교적 결단 등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것 자체가 대학 공부의 핵심적인 목표임을 우선 인식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전공을 공부하고, 그 전공과 관련될 수 있는 현재의 직업들과 미래의 직업들을 탐색하면서 삶의 지혜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될 때 대학에서의 공부는 말 그대로 진정한 공부(工夫)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1) 과정 지향적 삶과 결과 지향적 삶
대학 시절은 일종의 유예기간이다. 사회에 진출하기 이전에 실제적인 책무를 유예받으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주어지는 시기라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 시절은 한편으로 자유를 부여받은 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상의 책임을 부여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고교 시절 우리는 입시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대학생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상상 속에는 마음껏 잠을 자보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술과 담배를 마음껏 즐기겠다는 것도 있을 것이며 애인을 사귀면서 멋진 연애와 사랑을 해보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들 중의 일부는 억지로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신입생 시절에는 이런 상상들을 한번쯤 실천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잠도 실컷 자보고 사랑할 만한 짝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대학의 자유와 낭만을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대체로 오래 지속되기 힘들거나, 잘못 길들여지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나락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는 것은 윤리학에서 흔히 ‘쾌락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원리와도 통한다. 사람들은 쾌락에 쉽게 익숙해지고 그렇게 되면 이미 익숙해진 쾌락보다는 더 강한 쾌락을 지속적으로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방식의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을 늘 평정심을 추구하거나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수는 없다. 인간이 본능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이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는 충족시켜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대학생 시절에 적절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나름대로의 원칙과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이 선을 넘어서서 중독증의 형태를 보이게 된다거나, 일상화되어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젊음을 낭비하는 선까지는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학생 시절은 인생에서 다시 맛볼 수 없는 젊음의 나날들이다. 이 젊음이 우리들에게 늘 밝은 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갖고 있는 불안정함과 불투명함 때문에 젊음에는 일정한 어두움과 우울함이 내포될 수밖에는 없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모든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잠재력, 주체하기 어려운 힘과 에너지, 그리고 사회와 세상의 개혁을 원하는 강한 열망들, 이런 것들이 젊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사례들이다.
젊음이 다시 올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과정 지향적 속성을 내포한다. 과정 지향적이라는 개념은 과정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목표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은 대하는 태도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과정 지향적 삶과 결과 지향적 삶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후자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과정을 목표 달성을 위한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다. 늘 미래에 달성될 수 있는 어떤 목표를 설정해 놓고 현재를 그 과정으로서 간주하는 시각이다. 그에 비해 전자는 삶의 과정 그 자체가 목표라고 보는 시각이다.
우리가 그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정 지향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 안에 일정한 목표를 설정할 수도 있고, 결과 지향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삶의 지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이 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그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들은 젊음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저학년 때부터 취업이라는 외적 목표로 내몰리고 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의 결과 지향적 삶이라고 평가된다.
우리들의 삶은 과정과 결과를 늘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보아도 이 두 요소는 늘 함께 있다는 말이다. 아동기는 아동기 나름의 의미와 독자성이 있고, 노년기도 노년기 나름의 의미와 독자성이 있다. 다만 그 비중에 있어서 차이를 둘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청년기는 과정 쪽에 약간의 가중치를 둘 수 있을 뿐이다. 청년기를 대학생으로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런 과정 지향적 삶을 즐길 수 있는 많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고, 그런 점에서 축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 부분에서는 그런 여건을 갖추기 못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학생 시절이 결코 직업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일 수만은 없다. 외적인 상황이 우리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록 중심을 잡고 젊음의 과정 자체에 충실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커진다. 이 과정을 제대로 보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직업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 지에 대해서 개략적인 예측은 가능하다. 몇몇 특정 직업을 준비하는 전공을 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그 확실성이 높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일반 전공자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심지어 직업 자체도 바뀔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보다 폭넓은 공부에 힘을 쏟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시간을 쏟으면서 때로는 마음껏 젊음을 발산하기도 하는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직업을 위한 준비임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그 구체적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기로 하자.
2)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우리 자신과 시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생 시절을 단순히 특정 직장을 얻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서의 의미에도 초점을 맞춰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의 본질과 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교 시절 윤리 시간에 인간의 본성에 관련된 몇 가지 관점을 소개받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차원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경우에 직접 적용시켜보는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 더 나아가 삶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는 일이 대학생의 첫 번째 발달 과업이다. 이 일을 해 가는 과정에서 상업적으로 오염되었거나 피상적인 상대기준 비교를 통해서 잘못 형성된 우월감과 열등감을 해소시킬 수 있고 결과적으로 건강하고 유연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는 자본주의적 생활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이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상품광고와 소비에 의해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소비는 이제 단순한 물건의 사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의식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소비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고 있는 우리들도 그 소비의 경험과 소비를 부추키는 광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당한 소비욕구는 광고에 의해 조장된 불필요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삶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자신의 외모와 배경, 학교 등 외적인 요소와 성격 등 내적인 요소를 일단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난 후에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하나씩 실천에 옮겨감으로써 보다 나은 삶 자체를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미래의 보다 나은 직업과 삶을 위한 준비가 되기도 한다. 직장을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 직장 안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일이 더 중요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요소들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자신에 관한 정확한 인식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시대와 사회에 관한 주체적인 분석 능력이다. 대학은 말 그대로 큰 학문을 하는 것이라는 우리의 전통적 관념을 굳이 수용하지 않더라도, 대학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시대 정신과 사회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요청은 당위이다. 이 시대와 사회를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고, 그런 관점들을 공부를 통해서 우선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관점을 확립해 가고 그 관점에 근거해서 나름대로의 분석틀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자 하는가, 그 직업은 미래 사회 속에서 어떤 비중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 시대를 ‘접속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것은 리프킨(J. Rifkin)이 유행시킨 개념인데, 자본주의의 중심체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이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 접속의 시대를 말하는 그의 논거들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기업들도 물적 재산과 지적 재산을 시장을 통해 교환하기보다는 접속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그 동안의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는 공급자와 사용자로 바뀌면서 모든 영역에 접속이 자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리프킨은 이런 접속의 시대에는 산업생산이 차지하던 비중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대신 그 자리를 문화 생산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문화의 비중이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노동 중심의 의식이 놀이와 유희 중심의 의식으로 바뀌게 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상황 인식에 대해서 우리들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인식이 인터넷망의 확산으로 새로운 의미의 가상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해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보다 강고하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 반성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리프킨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모든 이론들이 이와 같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다. 그 이론 자체의 적절성과 함께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는 비판적 수용과 거부의 과정을 통해서 이 시대와 사회를 볼 수 있는 자신의 주체적인 관점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 사회를 예측하고,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재의 생활 일정 부분을 직업을 위한 준비로 활용해 간다면 취업 자체에 매달리는 차원을 넘어서는 진정한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것이다.
(2) 왜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편찬한 국어사전에 따르면,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간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준엄한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의 통로가 바로 직업이라는 의미이다. 직업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그렇게 본다면 직업은 최소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벌이의 수단이다. 즉 우리는 직업을 통해서 나와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직업이 구체화되는 시간과 장소가 바로 직장(職場)이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직장이다. 크게 보면 직장은 스스로 어떤 일을 만들어서 해나가는 창업과 특정 직장에 소속되는 취업으로 나뉠 수 있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후자이다. 그것도 가능하면 안정되고 오래 근무할 수 있으며 보수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 한다. 당연한 바램이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들어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은 늘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20세기를 마무리하던 1997년에 우리에게 닥쳐왔던 구제금융사태(IMF) 이후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이 보다 확실해진 우리들에게 경제는 보다 불확실해지고 의존적인 것으로 다가왔고, 현재의 시점까지도 그 불황의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는 규모가 큰 대기업들도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줄여갈 수밖에 없고 그만큼 취업의 기회도 줄어들 것은 당연하다. 시대 상황의 우울함이 대학 캠퍼스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서 취업 준비가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물론 우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유럽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공교육을 받고 그것에 근거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은퇴 후에는 연금 등으로 살아가는 산업사회적 일상 모형이 깨어지고 있다. 우선 대량 실업으로 더 이상 학교 교육이 직장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고, 연금의 고갈로 노후 보장이 제대로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일상 모형의 변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명령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미래사회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이제 대학은 더 이상 직장을 보장하는 장치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문제는 분명하게 다가오는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파고들면서 진정으로 직업이 왜 필요하고 그것에 왜 그렇게 매달려야 하는지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단지 걱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대학생들의 취업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대학 생활 전부를 취업 준비에 바친다고 해서 쉽사리 우리가 바라는 직장이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가 왜 취업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직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지 특정 기업에 취직하는 것과 같은 취업 자체를 꼭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직업에는 비록 돈벌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환경운동가나 종교인 등도 포함되고, 가능하면 적게 소비하면서 스스로 먹을 것을 스스로 경작하는 새로운 농민도 포함된다.
직업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돈벌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직업을 통해서 우리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구현하기도 하고 참아낼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모순들을 하나씩 개선해 나가는 통로로 삼기도 한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직장들은 취업 자체에서 많은 경쟁을 거쳐야 할뿐만 아니라, 취업 이후에도 그 직장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나는 경쟁을 거쳐야 하고 문제는 누군가는 반드시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더구나 승자는 늘 소수이고 패자는 다수라는 사실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들은 젊음의 패기를 바탕으로 그 경쟁의 칼날이 번득이는 현장에 뛰어들어 한번쯤 몰두하고 싶은 욕구도 갖고 있고, 그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거나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남들이 이미 이루어놓은 자리에 가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리도 충분히 의미 있고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낮은 자리에 임해서 생계 문제 자체보다는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직장들도 필요충분하게 좋은 직장들이다. 시야를 좀 더 넓고 깊게 갖고 직업과 직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가 요청되는 시대이다.
(3)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도대체 어떤 준비를 지금 해야 하는가 이다. 우리들은 이미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일반적인 준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세계인의 교통어처럼 되어버린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든지, 학점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한다든지 등이 선배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취업 준비의 과정이다. 모두 틀린 말들은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에 취업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임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일단은 우리들도 이러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직업을 준비하기 위한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어 공부의 경우 기업에서 주로 회화 능력을 요구한다고 해서 영어회화 학원이나 영어 시험 점수에만 매달려서는 그 이상의 것을 놓치기 쉽다. 한 언어는 그 나름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고, 특히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소위 제국의 언어라는 영어의 경우에는 단순한 언어 이상의 어떤 것들이 담겨져 있다. 그런 요소들을 균형있게 보면서 영어로 된 자료들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쓰거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 이렇게 영어 공부를 해 둘 경우 그 과정에서 공부의 지루함을 훨씬 덜 수 있고, 후에 자신감 있고 당당한 직업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공 공부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학점 관리의 경우는 성적 평점을 잘 받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강의를 보다 자기 주도적으로 이끄는 노력이 요구된다. 강의는 본래 교수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함께 이끌어 가는 공동 강의의 본질을 지닌다. 그런데 교수나 수강생 중의 하나가 수동적인 자세로 단지 시간을 떼우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야말로 학점을 이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어떤 과목들은 함량 이하의 강의일 수도 있고, 어떤 과목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 삶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부분은 교육과정 구성과 교수들의 노력이 합해지면서, 그리고 공정한 강의 평가를 통해서 개선될 수 있는데 강의 평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수업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다.
강의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우선 왜 자신이 그 과목을 듣고자 하는지, 또 들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정리한 후에 수강 신청을 해야만 한다. 수강 신청을 한 후에는 강의계획서를 자세하게 읽어보고 자신이 준비해야 할 과제물들은 없는지, 또 미리 읽어야할 자료들은 없는지 검토해서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강의가 진행될 때에는 가능하면 빠지지 말고 참석해서 보다 적극적인 반응과 의사 표시를 통해 강의공동체가 활력을 지닐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하고, 필요한 부분에서는 강의자들에게 요구도 하면서 본래 자신이 설정했던 목표를 함께 달성해 가는데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구체화되는 대학 생활은 그 자체로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최근 취업 준비에서 중시되는 면접 등의 요소는 따로 준비하기보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교수나 선배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와 분명한 의사 표시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길러질 수 있고, 또한 동료 학우들이나 후배들과의 인간 관계, 동아리 안에서의 역할과 책임 훈련 등을 통해서도 길러진다. 학과의 일에 일정한 영역에서 기여하는 것도 그 순간순간에는 시간 낭비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취업을 위한 장기적인 준비 과정이 될 수 있다. 미래의 직업은 단순한 능력을 요구하기보다는 종합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능력을 요구하고, 이런 능력들을 기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인간관계의 미학을 느끼고 보다 나은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실제 경험을 갖는 것이다.
대학 시절은 삶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시기를 잘 살아내는 일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뿐만 아니라, 청년기의 특수성과 맞물리면서 미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준비를 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외적으로는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정확하게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내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자신의 답을 주체적으로 마련해 가면서 때로 고민하고 방황도 할 수 있 시기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을 정신적 방황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목표가 세워지고 나면 방황을 끝내고 일상에의 성실로 복귀해야 한다. 복귀한 후에는 지루하게 보이는 일상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강의에 충실하고 보다 구체적인 차원의 목표, 즉 어떤 직업을 택해서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목표가 세워지면 그 직업과 관련된 정보들을 모으고 자신의 적성이 그것과 맞는지, 그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는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벌이가 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할 경우 생존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선택해야 한다.
직업은 생계 해결의 수단임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장의 하나이다. 대학생 시절에 주어지는 핵심적인 발달 과업의 하나인 직업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전혀 관심을 갖기 않는 것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고 또 그다지 가능하지도 않다. 정당한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본질과 목표와의 관련을 잃어버리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과 실천이 마련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직업은 단순한 직장의 차원을 넘어서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구현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들
1. 우리들은 왜 일을 해야만 하는가? 만약 일을 하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일은 필요 없는 것인가?
2.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라고 느끼는가? 우리들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만한 사회인가, 아니면 도저히 희망이 없는 사회인가? 또 이 사회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가?
3. 대학은 꼭 가야만 하는가? 대학이 단순히 직업을 위한 준비 기관일 뿐인가? 아니면 그것과는 구별되는 어떤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
4. 삶의 과정에서 청년기에 준비해야만 하는 일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세 가지 정도만 생각해 보면서 왜 그런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 정리해 보자.
5.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과정 지향적 삶과 결과 지향적 삶을 비교해 가면서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를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더 읽을 만한 책들
1. 김용준 외, 『문명, 그리고 화두』, 열린사회아카데미, 2003
우리 사회와 문명은 총체적인 시각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이 책은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대안을 담고 있다.
2. 박병기,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인간사랑, 2003
우리 시대의 문화는 가상공간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분석될 수 있다. 가상공간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사회윤리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3. 롤란트 시몬 셰퍼, 안상원 옮김, 『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철학』, 동문사, 2002.
지식의 근원은 무엇이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철학자가 자신의 딸에게 우리가 쓰는 낱말이 어디서 왔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무엇을 알 수 있고 해야 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4. 리처드 번스타인, 정동현 옮김, 『뉴욕 타임즈 기자의 대당서역기』, 2003.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왜 일을 해야 하고, 그토록 간절히 휴식을 꿈꾸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비교적 성공한 한 중년 남자가 자신의 일상을 탈출하여 당나라 현장 스님의 구도의 과정을 뒤따라가는 여행을 의미 있게 묘사하고 있다.
5. 칙센트 미하이 외, 이희재 옮김,『어른이 된다는 것은』, 해냄, 2003.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행복한 직업을 위해 10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고교 시절과 20대 초반에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탐구해 가는 과정과 함께 정책적 대안이 필요함을 실증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6. 김재준 외, 「언어사중주-읽기, 영어, 생각하기, 글짓기」, 박영사, 2004
언어와 창의성을 주제로 삼아 고등학생의 눈높이 맞춘 대학 교양과목 수준의 언어에 대한 에세이이다. 바르게 읽는 것을 바탕으로 언어를 통한 사색과 글짓기 뿐만 아니라, 영어를 어떻게 보고 배울 것인가에 관한 의미 있는 주장들을 담고 있다.
7. 스코트 니어링, 이수영 옮김,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보리, 2004
젊은 시절 패기 넘치는 사회과학자이기도 했던 스코트 니어링이 자본주의적 일상이 지닌 근원적 한계를 제대로 지적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실천적 삶의 모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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