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개인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뭇잎숨결 2020. 10. 4. 12:14

개인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김형철 교수(연세대학교)

 

 



들어가는 말

1.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2.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의무가 존재하는가?
3.자유와 질서가 모순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4.의무를 위해 다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정당화되는가?
5.개인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도 되는가?
6.개인의 자유에 대한 적절한 간섭은 필요한가?
7.지역이기주의는 극복될 수 있는가?
8.수인의 딜레마는 극복될 수 있는가?

맺음말


 

 

들어가는 말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간다는 점을 제외하고 바라볼 때 여타의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정글에 떨어진 소년이 늑대의 젖을 먹고 동물들과 살아가면서 인간의 사회적 성격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을 인갑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회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개인이 마치 사회에 속한 작은 일부로 평가절하될 수 있다. 개인은 가장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지능을 갖춘 인간은 외로움을 자각하고 동시에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리고 사회를 구성한 이후에 있을 성과들을 생각하며 인간은 사회를 구성한다. 그 사회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 대접받을 권리와 함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규칙과 의무를 갖는다.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때때로 사회적 질서와 평화를 위해 양보되어야 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상호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사회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개인과 사회의 입장이 대립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있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얼마전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지내던 딸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경제난에 지쳐 딸의 인공호홉기를 떼어버린 사건이 보도되었다.1) 아버지는 딸이 7년여 전 경추(목등뼈) 일부가 탈골돼 신경을 눌러 온몸에 마비가 오는 희귀병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한 데다 병원측으로부터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절망한 끝에 호홉기를 떼어냈다고 진술하였다. 택시운전을 하다 6개월여 전 그만둔 뒤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딸 치료비로 그간 2억여원 정도를 사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거주지를 처분하고 병원측에 1500여만원․카드빚 2000여만원 등 5000여만원의 부채를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중국의 원로 문인 바진 (巴金)은 오래 사는 것은 징벌이니 제발 자신을 안락사시켜 달라고 몇차례 호소한 바 있다. 중국내 유명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 바진은 자신이 더 이상 글쓰기 작업을 할 수 없고 병세가 악화되면서 치료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인간에게는 살 권리와 더불어 잘 살 권리, 행복하게 살 권리도 있다. 우리는 뉴스나 신문을 통해 주변에서 삶을 비관하고 자실 소동을 벌인다는 기사들을 접한다. 물론 그 중 상당수는 자신의 억울함이나 처지를 사회에 알리고 인정받으려는 연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럴 때마다 구조대가 그러한 개인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종종 보게된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개인적 연출들이 아니라 진정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끝맺음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경우도 있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온전한 삶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의지를 잃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병상에서 극심한 고통에 지친 나머지 안락사를 요구하는 사례는 의료기관에서 실제로 빈번히 발생하는 상황들이다.

 

개인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안락사를 의료진에게 요청할 경우 그것을 정당한 권리를 행사로 간주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한 첫 번째의 경우처럼 본인이 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식물인간이라면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이 대신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더군다나 남은 가족들의 삶이 아무런 대책없이 궁핍해져만 간다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심장이 멈출때까지 개인 빚을 내서라도 연명시켜야 하는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에 그 자유와 권리가 어느 정도까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답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특히 군대와 같은 특수 집단에서는 하루 세끼 식사를 하는 것 조차도 일종의 명령으로 처리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그 개인이 처한 상황과 주변의 여건을 고려하여 존중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회복의 가능성이 5%도 안된다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몇 년을 보내야 한다면 안락사를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위의 사례에서처럼 딸의 산소호홉기를 눈물을 머금고 떼어내는 아버지를 법은 관대히 처분해야 하는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넘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의무가 존재하는가?

 

한국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수색 중이던 남북의 병사들이 GP(guard point)에서 조우하는 장면이 있다. 마주하게 된 병사들 사이에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지만 격렬한 총격 없이 제 갈길을 가게 된다. 비록 영화 속의 이야기이지만 지나친 허구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왜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던 것일까? 물론 이는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자고 수색작전에 투입된 것일텐데 마치 사전에 서로 약속하기라도 한 듯 피해가는 것이다. 국가는 그들을 소환하여 의무를 소흘히 했다는 이유로 처벌해야 하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전면 대치상황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때가 있었다. 당시 사령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속결하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수행자인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개별제대와 병사들 간에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군의 진영과 프랑스군의 진영에서 서로를 향해 의도적인 오발탄을 남발하는 것이었다. 간혹 한 측에서 다른 측에 조준사격을 한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즉각적으로 상대편에게 자신들이 악의가 없었다는 점을 밝히는 의사표현을 하곤 하였다. 전쟁은 당연히 지속될 수 밖에 없었지만 희생자가 늘어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였다.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생명과 소유한 재산이다. 그와 같은 생명과 재산을 국가는 강력한 힘으로 보호한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국가의 명령에 따르도록 되어 있으면 그것이 곧 준법이다. 국가의 법은 개인으로 하여금 준수할 의무를 부과하고 개인들은 그 법을 기꺼이 따르게 된다. 국가는 전시에 개인의 소중한 청년기와 생명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국방의 의무는 법적으로 개인에게 적용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개인이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나 연예인 해외 도피 등은 그 이유가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 특정 방식으로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대가로 제재를 받게 되지만 이는 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적절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위의 영화나 역사적 사례처럼 실전에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행위도 엄히 다스려야만 하는가?

 

홉스는 국가가 없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이리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권리 일부를 양도하여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받도록 한다고 하였다. 국가는 일탈한 개인을 막강한 힘으로 처단한다. 개인은 국가에 속하여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지만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그런 개인도 단 한 가지만큼은 국가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국가가 자신의 생명을 요구할 경우라고 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전쟁터로 파견한 것은 국가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각 개인들은 또다시 생명을 보존할 확률을 높이려고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생명은 국가의 명령 이상으로 자신들에게 소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전쟁터에서 적과의 적극적인 공방을 수행하지 않은 군인들을 색출하여 처벌해야만 하는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려는 행위는 전략이나 계획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본능에 가깝다. 리차드 도킨스는 세계대전의 사례에서 살펴본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행동을 놓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 유전자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의무가 있는 것인가?

 

연예인 병역기피현상은 개인의 편익과 사적인 이유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생명을 국방의 의무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엄살로 보인다. 어느 정도 고생은 될 수 있어도 군대에 죽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과 직접 마주치게 된 상황에서 적극대응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병역기피행위와 질적으로 구별된다. 생존욕구를 반영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국가의 사활을 걸고 전쟁을 지시한 통수권자라면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지 않은 군인들을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처단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허용할 것인가?

 

 

3.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 중 무엇이 우선인가?

 

이야기1) 버스한대 안 다니는 철이네 시골마을 사람들은 어쩌다가 읍내에 다녀오려면 반나절이 소요된다.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건의로 작은 버스운영 업체가 버스 1대를 운행하기로 하였다. 하루에 1대가 운행되기 때문에 버스는 운행할 때마다 만원이었다. 요금을 내는 것도 승객의 양심에 맡기기로 하고 운전기사는 운전에 전념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든 승객들이 스스로 정상요금을 지불하고 버스회사도 운영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느날 철이네 아버지는 급하게 버스를 잡아타느라고 요금을 준비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했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나중에 지불하겠노라고 마음먹었지만 지나고 난 후에는 요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상습적으로 요금을 내지 않고 탑승하게 되었다. 한 사람정도 요금을 안 낸다고 해서 만원버스를 이루는 버스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은 철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고 무임 승차자는 날로 늘어갔다. 물론 버스는 그 마을사람 모두에게 전에 없던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무임 승객들로 인하여 적자 난에 시달리던 버스회사는 결국 운행을 중단하였다. 늙은 버스기사와 허술한 요금접수 체계로 회사를 운영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을 사라들은 또다시 반나절을 들여 읍내까지 걸어 나가게 되는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철이네 집은 읍내에서 가장 멀다. 처음 무임승차를 시작한 철이 아버지는 그것의 더없는 유익함을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철이에게 알려주었고 자신이 매우 똑똑하고 앞서나간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철이 아버지는 읍내를 걸어가면서 자신의 판단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

 

이야기2) 신촌의 Y대학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답게 동아리 행사도 다양하고 활기차다. 각 동아리 대표들은 연중행사를 통해 오랜기간 자신들이 준비해온 일들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내부적으로도 그 성과를 확인해 왔다. 동아리들의 행사비용은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학교주변의 노점상들이 제공하는 스폰서에 의존해 왔다. 2003년 초 A동아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스폰서를 따내기 위해 다른 동아리보다 먼저 평소 자주 가던 몇몇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게 넉넉한 지원금을 모았다. 그러나 행사준비에 여념 없던 Z동아리가 정작 행사에 임박하여 학교주변 가게들을 돌며 스폰서를 의뢰하니 한결같이 외면당했다. 이유인 즉 스폰서를 초기에 부지런히 모집했던 일부 동아리들 외에 다소 늦게 가게를 찾은 동아리들은 금전적 부담을 느낀 상인들로부터 거절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아리 수와 행사가 늘어가는 와중에 발생한 스폰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학생회는 개별 스폰서를 하지 말자고 전체 동아리를 대상으로 제안하였고 학생회가 스폰서를 일괄적으로 따내어 분할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A 동아리는 행사규모와 횟수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동아리를 동일하게 지원하는 학생회의 정책에 응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별 스폰서에 착수하여 오히려 경쟁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스폰서를 따내게 된다. A 동아리의 반론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학생회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학생회는 자유롭게 로비하여 능력만큼 행사를 치르도록 허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실은 있으나 로비에 능하지 못한 동아리들을 위해 기꺼이 동아리 사회에 교통정리를 자처하고 나서야만 하는가? 만일 여러분이 학생회 임원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이야기3) 비료공장을 운영하는 Y씨는 월간 5톤에 가까운 폐수를 인근 강물에 방류한다. 처음 몇 달간은 자연정화가 이루어져 수질오염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주변에 공장이 늘어남에 따라 국가에서는 수질오염을 예측하여 정화시설 설치 내지는 생산량의 제한을 내용으로 하는 시정조치를 내렸다. 만일 Y씨가 국가의 시정조치를 무시하고 방류를 한다고 해도 적발될 가능성은 적을 뿐만 아니라 설령 적발된다고 하더라도 국가로부터의 벌금이 생산량 감소로부터 발생하는 손실에 비해 훨씬 적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공장들이 국가의 정책을 무시하고 생산량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면 수질이 오염되어 공장을 가동하기 어려운 지경이 될 것도 명백한 사실인 듯 하다. Y씨의 공장을 포함하여 인근의 모든 공장들 중 반수만 생산량을 줄이더라도 심각한 수질오염을 겪지 않고 모두가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공장주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산량을 감소하고자 자처하기 싫어한다. 어차피 모든 공장주가 순진하게 생산량을 줄이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생산량을 줄이지 않으면 결국 모든 공장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공장을 운영한다면 국가의 결정에 기꺼이 따르겠는가? 아니면 다른 윤리적인(?) 공장주들의 솔선수범을 기대하고 배짱있게 공장을 풀가동 시키겠는가?

 

우리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의 이익 추구행위는 대부분 사회 전체의 이익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다. 건전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극소수의 무임승차행위는 사회복지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 무임승차를 할 경우 그들을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문제는 모두가 무임승차를 하려고 한다면 사회 전체가 몰락하여 회생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무임승차는 유난히 지혜롭고 계산에 능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편법이다.

 

그렇다면 개인은 기회를 봐서 사회에 큰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적절히 무임승차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무임승차하더라도 사회의 이익과 존속을 위해 나 하나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모든 요금을 지불해야만 하는가?

 

 

4. 하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정당화되는가?

 

올 1월 31일 7년간의 수감생활을 하던 한국인 로버트 김은 7년간의 수감생활을 한 미국 펜실베니아 앨런우드교도소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동하였다. 그는 윈체스터에서 6개월 수감생활을 한 후 석방되도록 예정되었다. 그는 1970년 미국에 유학을 떠나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했다. 김은 94년 만난 한국의 대령으로부터 정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에게 기밀이 아닌 수준에서 북한 군 관련 첩보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이 대령에게 전해준 정보는 북한 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등 한국으로서는 필요한 정보이지만 미국의 국익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그는 50여 차례에 걸쳐 정보 제공을 하다가 96년 9월 미 당국에 체포됐다. 이감되면서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말은 결국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됐지만 석방을 앞둔 지금도 후회 는 없다는 것이며 특별한 이유는 없고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개인이 직면한 선택상황들은 수없이 다양하겠지만 그 중에는 개인이 지켜야 할 의무들 중 택일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더 나아가 한 가지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다른 의무를 어기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에 개인은 적지 않은 갈등을 겪는다. 로버트 김의 사건은 한국인으로서 자국의 안위를 위해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가 속한 집단의 직업적 의무를 위반하게 되는 경우이다. 의료기관에도 이와 유사한 일은 발생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한 개그우먼의 다이어트가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다이어트 성공을 토대로 비디오 테잎을 제작하여 판매하려다 사실상 다이어트가 아닌 지방 흡입술의 결과임이 밝혀졌다. 문제는 진실이 밝혀지게된 경로인데 당시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다이어트비디오 발매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 지분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유일하게 갖고 있던 환자에 관한 정보를 이용하여 보복한 사건이다. 보도를 접한 우리는 우선 한배를 타고 모의한 자들 간에 불협화음이 그들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 내부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것을 조금 다른 시각을 본다면 환자의 비밀을 어떤 경우에건 지켜야 할 의사의 의무와 다른 한편으로는 범국민을 상대로 일종의 사기극을 벌이려는 그릇된 상술을 저지해야 할 의무간의 경중을 따지는데 초점을 두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의사가 비밀을 폭로한 이유가 비디오를 사게 될 다수인들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실을 정확히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물론 실제로 그 의사의 비밀 폭로의 의도는 이와 달랐지만 사태의 내용을 볼 적에는 환자에 대한 의무와 국민에 대한 의무로 귀착될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2001년 의사윤리지침을 발표하였는데 31조 환자의 비밀 보호 조항에는 의사는 직무를 통하여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인생을 좌우할 만한 일급 비밀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관련되었다면 그 이익들을 위하여 환자의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만일 정당화된다면 환자의 이익과 다수의 이익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대로 환자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기극을 방관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는지도 함께 논의해 볼 문제다.

 

 

5.개인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도 되는가?

 

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가 이끄는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을 목표로 서울에 침투했다. 침투한 공비 29명 사살, 1명 자폭, 그리고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하여 보복을 위해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여기에서 공군은 3년여간 인간병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지옥훈련 프로그램은 진행시켰으나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하극상, 청와대행, 자폭과 함께 훈련원 31명은 모두 죽게 된다. 최근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출신성분은 대부분 중형을 선고받은 죄수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영화 후반부에 작전이 취소되면서 청와대로 돌진하던 그들은 사살되었고 무장공비의 난동으로 보도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대립 때문에 발생한 남북 대립 상황 중 상호 보복을 위해 희생된 소수 개인들의 인권문제를 부각시킨다. 정부 입장에서는 작전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사회에 방치하면 국가안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하였다. 만일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이 죄수가 아닌 일반인들이었어도 국가의 결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언도받은 죄수였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도구적으로 사용되다가 무참히 버려져도 되는 것인가?

 

미국의 자유지상주의자인 노직은 개인이 희생해가면서까지 봉사해야할 사회나 국가는 그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치과에 가는 환자의 예를 들고 있다. 즉, 우리가 치과에 갈 때에는 충치를 뽑고 남은 치아를 보존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비록 고통이 극심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몸을 위해 유익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이와 마찬가지의 관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에게 자신을 희생시켜 보존하고자 할 사회적 실체(social entity)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권리가 개인보다 큰 집단이나 전체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어떤 경우에도 희생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해 온 숭고한 개인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가 건재할 수 있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가? 개인의 가치가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의 가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을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생각처럼 그런 사회는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만들어낸 추상물에 불과한 것인가? 이 모든 물음은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가치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반드시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집단의 존속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존중되고 어디까지 희생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6.개인의 자유에 대한 적절한 간섭은 필요한가?

 

우리사회에는 수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있다. 최근 들어 정부는 그들의 높은 이자와 빚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의도적으로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발생하기도 하고 기존에 성실하게 채무를 이행하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필요이상으로 성실하게 빚을 갚아나가는 것 같아서 손해보는 느낌이 들게 된다. 더군다나 개인 워크아웃 이후 채무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 일반이 느슨해져 빚을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건전한 거래행위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 즉, 애써 갚으려고 하지 않아도 방법은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렵거나 가족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지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삶의 희망을 주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신용 불량자 모두를 구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로 인해 초래될 도덕적 헤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 말아야 하는가?

 

지금은 흔하지 않지만 전염의 위험이 높은 결핵환자들이 많았던 시대가 있었다. 어느 병원에서 가난한 결핵환자가 입원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가려하자 진료를 담당한 의사가 이를 만류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의사가 만류하는 이유는 결핵균이 전염되어 집안 어린아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핵균은 폐 이외에 장이나 피부를 통해서도 침입할 수 있으나 대부분 폐를 통하여 감염되므로 한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에게 전염되기 쉽다. 그러나 환자는 유치하려는 의사의 상술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생활의 여유가 없어서였는지 치료를 거부하고 즉각 퇴원하고자 하였다. 이 경우 의사는 그 환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강하게 설득해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이상의 사례들은 국가나 사회가 개인에게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들이다. 간섭주의(Paternalism)의 대표적인 예는 자율성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알콜중독자나 생활비관자, 각종 약물중독자, 나아가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특정 사례에 관하여 사회가 그들을 위해 판단하고 조처하자는 사상이다. 노사의 경우는 양자의 관계를 대등한 인격자 상호간의 계약에 의한 권리 ․의무 관계로 보지 않고, 사용자의 온정에 따른 노동자 보호와, 이에 보답하고자 노동자가 더욱 노력하는 협조관계로 보는 것이며, 합리적인 계약 관계 대신에 서로의 정감(情感)에 호소함으로써 노사관계를 원활하게 하려는 노무관리 방법이다.2)

그러나 약한 간섭주의(soft paternalism)나 간섭주의를 아예 반대하는 측은 어떤 형태로든 개인을 위한다는 명분을 들어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간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비록 그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고 후회스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남에게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자유가 개인에게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안락사나 자기학대를 포함한 다양한 문제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국가정책 입안자라면 신용불량자를 적극적으로 구제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경제질서에 맡길 것인가?

 

7.지역이기주의는 극복될 수 있는가?

 

어느 동화에서 쥐들이 고양이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회의를 열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그 소리를 듣고 경계하자고 제안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장일치로 찬성한 쥐들은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편안하게 살아갈 방법을 발견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잠시후 고양이 목에 어떻게 방울을 달 것이며 누가 나서서 그 일을 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기 시작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다는 것은 쥐들의 사회에서 분명 매우 유익한 방안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소수의 쥐들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 문제시되었던 전남 부안군의 핵폐기물 유치건은 우리 사회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처리장 건설문제를 놓고 지역주민과 정부의 대립이 첨예해지자 이를 보다 못한 서울대 몇몇 교수진들이 서울대에 폐기장을 유치하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지식인이자 과학자로서 그것의 안전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국가의 중요사안을 처리하려고 시도한바 있다. 물론 이 또한 서울대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지만 본 사태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였다. 모두가 필요로 하는 방폐장 유치는 중요한 사안임과 동시에 시급한 사안이기도 하다. 핵폐기물을 외국에 돈주고 수출하거나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국내 어느 지역엔가는 유치하여야 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지역이기주의를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이 평생 살아갈 터전이 지목된다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님비와 마찬가지로 지역이기주의를 표현하는 핌피(Pimfy:please in my front yard)라는 것도 있다. 최근의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유치한다는 소식에 지역주민들이 반길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대전지역 부동산 매매 의뢰를 해오고 있다. 앞서 생각해 보면 신 행정수도를 자신의 집 앞에 건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많은 지역주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도 아니고 법을 위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성과 더불어 양보와 타협을 할 줄 아는 지혜마저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이때의 지혜라는 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의 일부를 기꺼이 포기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뒷뜰에 원하지 않는 폐기장이 들어오는 것이나 자신의 앞뜰에 간절히 염원하는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개인적으로 유익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이 들어서야 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일인 셈이다.

 

평생을 살아가려고 투자한 우리들의 터전에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이 유치된다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관철 될 때까지 결사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환영까지는 아니지만 정해진 정책에 기꺼이 따라야 하겠는가?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반성해 볼 문제다.

 

8.수인의 딜레마는 극복될 수 있는가?

 

공동으로 범행을 저지른 A와 B는 각각 격리된 방에서 심문을 받게된다. 형사는 각각에게 두사람 모두 고백하면 5년형을 받게되고, 한사람만 고백하면 고백한자는 무죄로 석방되나 다른 한사람은 20년을 선고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 침묵하면 1년형을 각각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은 고민에 빠진다. 상대를 신뢰하고 끝내 자백하지 않으면 함께 1년만 고생하면 되지만 상대가 자백하면 자신만 손해가 아닌가? 비록 두사람 모두에게 좋은 것은 1년씩 똑같이 형을 받는 것이나 각자의 생각에는 20년을 살수도 있다는 최악의 경우가 두려운 것이다. 각자는 상대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관계없이 자백을 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위해 좋은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할 경우 사회전체적인 이익은 극대화될 수 없다는 것이 수인의 딜레마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대표적인 수인의 딜레마 사례는 각국의 군비확충 전략이다. 냉전시대에 소련과 미국은 서로를 의식하여 군비확충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소요되는 비용이 국가 경제발전에 심각한 부담이 될 정도다. 한쪽이 군사력을 감축한다면 다른 한쪽의 침략에 무너질 것이므로 양국은 최대한 무기를 개발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함께 무기를 철수한다면 생산적인 방향으로 국가가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각국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략은 수인의 딜레마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군비를 확충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5개의 정유업체가 리터당 유가를 1000원 이하로 내리지 말기로 담합하였지만 첫 번째 정유업체가 기습적으로 900원에 시장출하 한다면 대박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나머지 4개 업체는 매출이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시장에서 영원한 담합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상인들간의 판매전략 때문이다. 5개의 정유업체가 모두 살아남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은 1000원에 합의한 유가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이는 개별업체의 이익보다 업체전체의 공존을 염두한 그들간의 상호 신뢰에 기초한다.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수인의 딜레마 사례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신뢰도에 기초한다. 보다 쉽게 표현하면 합리적인 약속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대박은 어렵겠지만 그만큼 어느 특정인이 크게 망할 위험도 줄어들게 되며 사회적 안정도가 높아지게 된다. 가장 합리적인 개인들로 이루진 사회는 비합리적일 수 밖에 없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덜 추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져야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맺음말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은 전체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공동체의 특정 가치를 옹호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해당 공동체의 특수한 가치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개인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과 사회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공동체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도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해 주는 사회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와 사회의 공동선을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자들도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면 개인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다루던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자유를 위해 평등이 무자비하게 무시되어도 된다거나 그 역이 정당화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가 양립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만을 유일한 실체로 인정하고 사회를 그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만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를 실재하는 거대한 유기체로서 인정하고 개인은 조직의 일부로 다루어야 하는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떤 관점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문제해결의 방법이 크게 달라진다. 이 관계를 숙고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 속의 개인으로 실존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제 3자가 아닌 당사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