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나는 너의 일곱시다 외/ 이준규

나뭇잎숨결 2020. 8. 16. 22:14

 

나는 너의 일곱시다

 

-이준규

 

나는 너의 일곱시다. 너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너의 잠으로 들어간다. 너의 일곱시는 잠 속에 있다. 나는 너를 잡으러 너의 잠에 들어간다. 나는 너의 일곱시다.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시를 쓰며 너를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네가 마실 수도 있는 커피를 마시고 네가 피울 수도 있는 담배를 피운다.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는 지금 내 앞에 없다.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상상한 네가 좋아하는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에 있다.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시를 쓰며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너의 잠 속으로 들어가 너를 가지고 있다. 너는 나의 소유다. 너는 나의 일곱시가 되었다. 너는 나의 일곱시다.

 

나는 걸었다

 

ㅡ이준규


나는 걷고 있다. 나는 합정에서 망원 쪽으로 걷고 있다. 나는 걸으면서 본다. 나는 걸으며 사람들과 자동차들과 건물들과 불빛을 본다. 나는 바람을 본다. 나는 기억을 본다. 나는 나를 보고 너를 본다. 너는 멀리 있다. 너는 언제나 떨어져 있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앉아 있다. 나는 앉아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개가 짖는다. 나는 멀리서 개가 짖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밤이다. 여름밤이다. 나는 앉아서 이것을 쓰고 있다. 바람이 분다. 책들은 자신의 몸을 열지 않는다. 오늘은 좀처럼 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감나무의 잎은 흔들리고 어떤 비유는 망설이고 있다. 나는 그 어떤 비유도 불러내지 않는다. 다시 개가 짖는다. 골목의 그림자는 크다. 멀리서 바람은 불어온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걸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나는 걸으며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자카야 노을의 한자리에 앉아 너를 기다린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너는 온다. 나와 너는 잔을 맞댄다. 소리가 난다. 너는 웃는다. 너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환하게 웃는다. 너는 빠르게 말한다. 너는 느리게 말한다. 너는 힘없이 말한다. 너는 농담한다. 나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이자카야 노을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나는 하늘을 본다. 나는 쓰레기더미를 본다. 나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바람이 분다. 나는 앉아서 이것을 쓴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도 걷고 있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바람을 보았다. 나는 걷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밤이었다. 나는 걸었다.


얼굴

- 이준규


너의 얼굴이 흐른다. 너의 얼굴이 비낀다. 너의 거울. 너의 얼굴. 나는 너의 얼굴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낙엽이 흐를 때. 새가 솟을 때.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을 만졌다. 나는 어디에서나 너의 얼굴 안에 있었다. 아무것도 지우지 못했다. 너는 언제나 잊히는 얼굴 하나였다. 나는 그날 너의 얼굴을 걸었다. 바람은 같았다.


있다

- 이준규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나무에 앉아 있다. 그것은 파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그럴듯하게 가고 있다.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을 빼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건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지하철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것은 개수대 앞에 서서 커피가 담긴 잔을 작은 숟가락으로 그럴듯하게 젓고 있다. 그것은 젓가락으로 참치 회를 집어 입으로 그럴듯하게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절 앞에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그것은 북극에서 남극으로 그럴듯하게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머리를 긁으며 그럴듯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럴듯하게 낙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꼬았던 다리를 몇 번 바꾸며 그럴듯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병상에 누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관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의심 없는 책장을 그럴듯하게 넘기고 있다. 그것은 묵묵히 그럴듯하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성기를 성기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이 비

- 이준규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빗살무늬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하고 있다. 이 비는 지금 좋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너를 향해 내리고 있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탄천에 내린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다리를 꼬고 있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순록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겨울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위해 세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중랑천을 때린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관사를 버리고.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허기를 향한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향기인가.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지금 울고 있는가.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그치지 않는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한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너를 향했을 뿐이다. 이 비는 좋다. 이 비는 좋다.



너무

- 이준규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노트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한숨 너무 적은 너의 웃음 너무 적은 나의 기찻길 너무 적은 나의 묘비명 너무 적은 너의 무릎 너무 적은 너의 부츠 너무 적은 너의 단두대 너무 적은 너의 말 너무 적은 너의 매 너무 적은 나의 숲 너무 적은 나의 손가락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술 너무 적은 나의 시 너무 적은 나의 호흡 너무 적은 나의 산책 너무 적은 나의 축구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나 너무 적은 나의 한옥 너무 적은 나의 언덕 너무 적은 나의 초당 너무 적은 나의 적지 너무 적은 나의 연못 너무 적은 나의 나무 너무 적은 나의 네모 너무 적은 나의 동그라미 너무 적은 나의 물고기 너무 적은 나의 장소 너무 적은 나의 책 너무 적은 나의 섹스 너무 적은 나의 차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너 너무 적은 나의 우리 너무 적은 나의 길 너무 적은 나의 책상 너무 적은 나의 서재 너무 적은 나의 서재 너무 적은 나의 주전자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해 너무 적은 나의 달 너무 적은 나의 별 너무 적은 나의 대지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관념


-이준규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 모든 관념은 딱딱한 모서리를 가진다. 바람은 불었다. 언덕은 부드럽게 무너진다.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 언덕 위를 바라보는 하나의 뚜렷한 관념이었다. 관념은 두부 같고 관념은 두부를 찍어 먹는 간장 같아서 나는 조랑말을 끌고 산을 넘었다. 만두가 있을 것이다. 관념적인 만두. 봄이다. 강은 향기롭다. 봄이고 강은 향기롭고 홍머리오리는 아직 강을 떠나지 않는다. 흰죽지도 그렇다. 물 위엔 거룻배. 하늘엔 헬리콥터. 그것은 모두 사라진다. 관념적인 동그라미와 함께. 어떤 연인들처럼. 비처럼. 눈물처럼. 봄은 향기롭다. 나는 길을 갔다. 어려운 네모와 함께. 아네모네를 물고. 너를 향하여. 언제나 그윽한 너를 향하여. 너의 잔을 마시러. 나는 길을 떠난다. 마른 것. 떨어지는 것. 그것처럼. 더는 없었다. 네모는 구름.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 닳고 있다.






네모

- 이준규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하나의 네모처럼. 전축 앞에 거울이었다. 전축 옆에 서 있었다. 전축은 네모. 음악은 없었다. 물과 바람은 없었다. 나귀도 없었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너는 네모. 어떤 전축도 없었다. 아무 전축도 없었다.

나는 네모 앞에 있다.



문장

-이준규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그것

- 이준규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정교한 까치 소리.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금강석 같은 논리.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너의 참혹과 나의 비참.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너의 하얀 치마.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겨울의 개똥.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앰뷸런스에서 나오는 들것.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겨울의 나뭇가지.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사이시옷.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잊힌 말.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상투적인 연상.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자폐아의 눈물과 침.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너의 얼굴.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잘 차려 입은 남성.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폭력.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너의 전략과 전술.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포기.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너의 잠.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오열.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갇힌 자.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시계탑.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교각의 가마우지.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스프링클러.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수술도구.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잔디 위를 느리게 구르는 공.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아이의 천진한 웃음.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적개심으로 타오르는 눈동자.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외국에서 온 물건.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재앙.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죽어가는 사람.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정의로운 엉덩이.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쏟아지는 술. 나는 그것에 흥분한다. 그리고 너. 나. 우리. 기약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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