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김경주

나뭇잎숨결 2020. 8. 9. 21:24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김경주

-1 바다로 가는 길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때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이스트에 부풀린 빵처럼 비 오는 날이면 휘파람은 방안 가득 부풀어올라 천장을 꽉 채웠다

휘파람이 데리고 가는 길로 끝까지 가지 마라 절벽은 휘파람의 성지이다 벼랑끝에서 다친 말을 버리면 말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간다

갈매기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날아간다
등대가 부는 휘파람은 절해고도의 음역이라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래나 물고기들은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그물을 피하고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내내 이 등대의 휘파람을 들으며 잔다 바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의 옛날 휘파람소리를 듣곤 했다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운사에서/최영미  (0) 2020.08.16
나는 너의 일곱시다 외/ 이준규  (0) 2020.08.16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0) 2020.08.09
유리의 존재/ 김행숙  (0) 2020.08.09
언급되고 있다/김성호  (0) 2020.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