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게서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관계
[박 서 현 - 자율평론 19호]
분명 여기서 차이의 철학은 아름다운 영혼의 담론으로 빠져 들 위험성을 걱정해야 한다. 그 담론에 따르면, 어떤 차이들이 있고 또 오직 차이들밖에 없지만 사회적 장소와 기능들의 이념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 하지만 이런 위험에서 차이의 철학을 지켜내기에는 마르크스의 이름만으로도 족하다.1)
1.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문제틀
들뢰즈는 1994년에 출판된 『차이와 반복』영어본의 저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나를 열정적으로 흥분시켰던) 흄, 스피노자, 니체 그리고 프로스트를 연구한 이후에, 『차이와 반복』은 내가 ‘철학을 하고자’했던 첫 번째 저술이다. 내가 이후에 한 모든 것들은, 가따리와 함께 저술한 것까지 포함하여(물론, 나는 나 자신의 관점에서만 말할 뿐이다)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2)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빼어난 철학사가로서의 들뢰즈가 아닌, 특이하고도(singular) 반-시대적인(a-temporal), 별종적인(a-normal) 철학자로서의 들뢰즈를 만나자마자,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펼쳐진 존재론으로부터 『앙티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의 정치철학으로 이행한다.3) 존재론에서 정치철학으로의 이행. 우리는 이러한 이행이 가타리와의 만남으로부터 촉발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들뢰즈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차이와 반복』 이후에 이루어진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은,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전향이 아니라 연속이었으며, 존재론의 심화와 발전이었다.
따라서 필요한 일은『차이와 반복』에서 이후의 정치철학으로의 발전을 향한 사유의 ‘선’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에 대한 탐구는 바로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가 해명될 때에만 파악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들뢰즈에게 정치적인 것은 우리가 소위 알고 있는 정치적인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미 정치적인 것으로 구획되어져 있는 것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의미에서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들뢰즈에게서 어떠한 정치철학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정치적인 것의 지평이, 들뢰즈에게는, 우리의 ‘양식(bon sens)’이나 ‘상식(sens commun)’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들뢰즈에게서 정치적인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원리가 된다. 즉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것이 아니라, 있어 왔지만 있지 않았으며 있어야만 하는 것,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gewesend-gegenwärtigende Zukunft)’4)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에게 정치적인 것의 단초는 인식론적 토대로부터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특정한 존재론을 기반으로하여 인식론으로부터 가치론으로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함의를 다시금 『차이와 반복』의 영어본 저자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 - 혹은, 고전적 사유의 이미지의 감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유의 이미지. 이것은 내가 이미 프로스트에게서 발견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 『차이와 반복』에서, 이러한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의] 탐구는 자율성을 가지며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개념의 발견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의] 3장 「사유의 이미지」가 이제는 나에게 가장 필수적이며 가장 구체적이고 그래서 (가따리와 수행한 연구까지 포함하는) 후속하는 저술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5)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고전적 사유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6)를 제기한 것의 중요성과 이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와 가타리와 함께한 후속작업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적으로 독해하는 단초가 되는지를 파악하기 이전에, 왜, 들뢰즈가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단초는 역설적이게도 들뢰즈의(그리고 들뢰즈를 포함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비록 암묵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유일한 논적, 들뢰즈가 극복하고자 한 당대 최고의 실천적 지성, 사트르르와의 적대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2) 구조주의와 실천의 문제들
『차이와 반복』은 1968년에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되었다. 1968. 『차이와 반복』을 68혁명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차이와 반복』이 68혁명의 선전도구라거나, 『차이와 반복』이 68혁명의 영감속에 쓰여 졌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설적으로 설정해볼 수 있는 것은, 68혁명 이후에 ‘구조는 거리에 내려오지 않았다’라는 구조주의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 아마도 철학자의 사유속에서 선취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싹은 이미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을 통해 배태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구조주의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실천을 탈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르트르의 눈에 비친 구조주의를 통해서는, 즉 실재하는 모든 것을 구조로 환원하려는 이론에서는, 역사를 건설해가는 주체의 의지적인 행위가 문제시 될 수 없으며,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이 단지 당시 프랑스 사상계의 헤게모니 다툼이 아니라, 각각의 이론에 내포된 본질적인 정향성에 대한 반발에서부터 점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7) 구조주의에 대한 실존주의의 반발은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이론으로부터 과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레비스트로스 이후에 후기구조주의자들이 기존의 구조를 넘어서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구조에 어떻게 실천의 숨결을 불어 넣을 것인가.
『차이와 반복』은 다른 모든 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해, 구조를(그렇지만 변형된 구조를) 그리고 실천을(그렇지만 구조주의로부터 구성되는), 옹호하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실제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조주의의 실천은 공존의 공간에 분배된 변별적 특성들(caracteres differntiels)에 기초한다.8)
물론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다만 구조와 실천에 대한 최소한의 함의일 뿐이다. 하지만 이 문장으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 어떻게 구조와 실천을 연결시키는지 알 수 있다. ‘변별적 특성들’이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바로 ‘차이’(différence)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구조가 차이를 포섭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임을 알고 있다.9) 그런데 어떻게 ‘차이 포섭적 구조’가 아닌 ‘차이 생산적 구조’를 사유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구조를 정태적인 틀이 아닌 동태적인 틀로써, ‘역동적인 차이 생산적 체계’로써 사유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구조를 역동적인 차이 생산적 체계로 사유하는 것은 구조와 발생을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 발생과 구조를 화해시키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구조주의’야말로 발생론적인 방법이 자신의 야망들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 발생은 다만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발생은 구조가 구현되어 몸을 얻는 과정, 문제의 조건들이 해의 경우들로 나아가는 과정, 미분적 요소들(éléments différentiels)과 이 요소들의 이상적 연관들이 매 국면 시간의 현실성을 구성하는(constituent à chaque moment l'actualité du temps) 현실적인 항들과 상이한 실재적 결합관계들로 변화되는 과정이다.10)
그러나 구조와 발생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밝혀졌지만) 역설적으로 구조를 존재론을 통해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발생이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라면, 이제 구조주의는 잠재에서 현실로의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 존재론이 될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존재론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운동속에서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 현실적인 것만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만큼, 잠재적인 것을 순수 잠재성의 영역에 놓아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를 드러내기 위해 들뢰즈는 초험적 경험론(Transcendental Empricism)을 필요로 한다.
2. 『차이와 반복』의 존재의 논리학 : 인식론을 중심으로
1) 초험적 경험론
초험적 경험론은 『차이와 반복』전체를 꿰뚫고 있는 철학함의 원리이다. 그것이 단순한 경험론이 아닌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양식’과 ‘상식’에 바탕을 둔 ‘개념적 차이’를 통해서는 ‘즉자적 차이(différence en elle-même)’를 드러낼 수 없으며, 이러한 ‘즉자적 차이’의 ‘대자적 반복(répétition pour elle-même)'을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자적 차이와 대자적 반복은 상식적 실재론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하며,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운동으로부터, 오직 초험적 경험론을 통해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독해의 어려움이 생겨난다. 들뢰즈는 독자에게 양식과 상식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양식과 상식이 고장나는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 바로 초험적 경험론의 원리, 즉 존재자에 대한 지칭(désignation)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sens)를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11)
그러나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이는 개념이 아닌 이념을 사유 안에서 포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의 이념과 개념의 차이이다.
의미는 명제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되는 것이란 무엇인가? 표현되는 것은 지칭되는 대상으로도, 표현하는 자의 체험 상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의미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구별하기까지 해야 한다. 먼저 의미작용이 가리키는 것은 개념이자 이 개념이 재현의 장 속에서 조건화되는 어떤 대상들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반면 의미는 재현 이하의 규정들 안에서 개봉되는 이념과 같다.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보다는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결코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의 의미를 동시에 정식화할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말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진정 말해져야 할 것이고, 경험적 사용 안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 단지 초월적 사용 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식능력들을 주파하는 이념은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념은 또한 무-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념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어떤 구조적인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이념 그 자체는 그 자신이 생산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구성하며(구조와 발생), 이런 이중적 측면을 화해시키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12)
우리는 개념과는 다른 이념을 의미와의 관계로부터 확인하였다. 개념은 경험적으로 포착될 수 있지만 이념은 단순한 경험론을 통해서는 포착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경험론을 통해서 포착될 수 없는 이념이 오히려 개념을 가능하게 한다. 이념이 의미를 구성하는 원리라면, 개념은 구성된 의미의 ‘소여’이며, ‘의미작용’으로서, 대상을 재현하는 원리이다. 물론 우리의 건전한 상식은 대상을 재현하는 개념을 통해서만 작동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건전한 상식을 통해서 구조-발생적 삶을 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구조주의의 실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래서 구조를 초험적 경험의 장에 위치시키는 것을 요구하며, 이는 바로 개념적 사유가 아닌 이념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들뢰즈는 대상을 재현할 뿐인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를 파괴(destruction)해야만 했으며, 이러한 파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론을 건설(construction)해야만 했다.
2)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를 정식화한 사람은(그리하여 서양철학을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끌어간 사람)은 플라톤이다.13)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시인이 추방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시인들의 작업이 이데아를 모방한 복사물(copie)들을 다시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오직 장시간의 교육과정을 거친 철학자만이 관조할 수 있으며, 시인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시인의 작업은 시민들을 호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다른 면에서 보면 플라톤이야말로 시인이 갖는 힘을 누구보다도 근본적으로 깨달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이야말로 이데아도 다르며, 모상과도 다른 차이,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사유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시뮬라크르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의 관계로부터 복사물과 시뮬라크르를 구별하고 복사물을 이데아와 유사한 이미지, 좋은 이미지로, 시뮬라크르를 나쁜 이미지로 구분하며, 나아가 이들을 가치판단을 통해 선별하고자 한다. 여기서 ‘차이 그 자체’는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항상 이데아와의 관계에서 ‘같음’과 ‘다름’이 판단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엄밀하게 확립한 첫 번째 구별은 원형(modèle)과 복사물의 구분이다. 그런데 복사물은 결코 어떤 단순한 외양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사물은 원형에 해당하는 이데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내면적 관계, 정신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보다 훨씬 심층적인 구별은 복사물 그 자체와 환각(Phantasme)의 구분이다. 플라톤이 원형과 모상을 구분하고 심지어 대립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오로지 복사물과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어떤 선별적 기준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때 모상들은 원형과의 관계에서 근거를 얻고, 환각들은 복사물의 시험도 원형의 요구도 견뎌내지 못하므로 실격당한다. … 플라톤이 어떤 창시와 출범의 지점에 서 있다면, 이는 이후 재현의 전개를 가능케 할 이데아론(이념론) 안에서 어떤 진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플라톤에게서 선언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순정한 어떤 도덕적 동기이다. 즉 시뮬라크르나 환각들을 추방하려는 그 의지 배후에는 도덕적 동기 말고는 아무런 다른 동기가 없다.14)
플라톤이 드러낸 것은 이념의 차원이다. 책상의 이데아는 책상이라는 개념과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지만, 개념-대상의 쌍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책상의 이데아는 대상으로서의 책상을 재현하는 개념으로서의 ‘책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개념과는 다른 무엇이다. 이는 결국 이념 자체는 재현될 수 없는 무엇이라는 것,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며 ‘잠재적인 것’으로서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개념적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이데아라는 진리에 최소한이나마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심급이 될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잠재성의 영역이 발견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 것들에 대한 진리의 기준으로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시뮬라크르들을 추방하는 원리가 된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 잠재적인 것은 순수 잠재성으로 머물러 있으며, 진리의 독단적인 영역으로 남아있게 된다.
플라톤의 이념론은, 대상의 재현이 고장나는 지점까지 우리의 사유를 끌어올리지 않고, 대상의 재현을 보증하는 원리로서 남아있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증은 사유 안에서 차이가 동일성의 원리에 종속되어 버렸음을 말한다.15) 사유가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사유함에 있어서 사유되는 대상의 이미지와, 그 대상의 개념간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동일성 원리가 사유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객체의 동일성과 주체의 동일성은 분리되지 않으며, 오직 양자의 통일만이 존재와 사유를 동일률에 포섭시킬 수 있다.
사유하는 주체에 의해 차이가 개념의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을 때(이런 동일성이 종합적인 것이라 해도) 자취를 감추는 것은 바로 사유 안의 차이다. … 사유 안에 차이를 복원한다는 것은, 차이를 개념과 사유하는 주체의 동일성 아래에서 재현하는 바로 이 첫 번째 매듭을 푼다는 것과 같다.16)
여기서 우리는 동일성에 우선하는 차이를 주장하는 들뢰즈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때 동일성에 앞선 차이는 ‘사유 안의 차이’(différence dans la pensée)17)이며, 그래서 객관-개념-주관의 동일성을 넘어서 사유하기를 요구한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고 칸트에 의해서 첨예화된 이념론을, 들뢰즈가 어떻게 재전유하는지 확인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념론을 확인하기 전에, 개념적 사유가 갖는 한계가 분명해져야 한다.
3) 개념의 문제
차이가 재현될 수 있다면, 이러한 재현은 오직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개념은 사유 주체의 건전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 차이의 재현 배후에는 원리에 해당하는 개념의 동일성이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재현들은 의식의 명제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명제들은 일반적 관점에서 취한 개념과 관련하여 해의 경우들을 지칭한다.18)
사유 주체의 건전한 의식은 무-의미(non-sens)한 것들을 의미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그러나 사실은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 생산 기계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러하다.19) 사유 주체의 건전한 의식은 이러한 의미 생산 기계의 외부에서 개념을 통해 사유 활동을 한다. 이러한 사유 주체의 건전한 의식이 상식이며, 상식은 실재적인 것의 영역에서 잠재적인 것을 삭제해 버린다. 상식은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을 사유 안에서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상식은 경험론을 고수하지만 경험론을 경험적인 것 자체가 문제되는 영역까지 끌고 가지 않는다. 흄에게서 인과율이 회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가 경험론의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론의 원리에 충실할 때에만, 우리는 경험론의 타당성이 의심되는 영역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상식적 실재론은 사이비 경험론이다.
상식은 똑같은 것으로 전제된 대상과 관련된 모든 다른 인식능력들의 경험적 실행을 포섭하는 능력이다. 가령 사유 안에는 사유 자체로서는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 하지만 사유 불가능한 동시에 사유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 사유 불가능하지만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 - 이런 사실은 상식의 관점이나 경험적인 것을 기초로 전사된(décalqué) 인식능력 사용의 관점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20)
이 사이비 경험론에서는 차이가 개념 안의 동일성에서 파악되며 따라서 ‘즉자적 차이’를 사유속에서 포섭할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된다. 그래서 사유 안에는 사유 불가능하지만, 사유 밖에 될 수 없으며, 사유 되어야만 하는 차이, 즉 존재의 차이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에 선행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존재의 차이를 정식화하는 차이의 개념은, 사이비 경험론을 통해 개념적 차이로 전락하는 것이다.
모든 차이의 철학을 파멸로 몰고 간 혼동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21)
그러나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언제가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념을 통해 동일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현대분석철학의 작업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프레게에게서는, 동일률이 초기에는(『개념 표기법』) 개념과 대상의 관계로 설정되었으며, 후기에는(「뜻과 지시체에 대하여」) 하나의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두 개념 사이의 관계(예를 들어, 새벽별과 저녁별)로 설정되었다. 한편 러셀은 한정 기술구를 통해 고유 명사들만이 대상-개념의 동일성을 보증할 수 토대가 된다고 분석하였다. 콰인은 존재 양화사를 통해 동일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22) 이들의 작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의 동일성에 대한 문제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다시금 제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23) 우리는 이들의 작업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다만 이들에게서 제기된 개념의 동일성에 대한 문제가, 존재와 차이에 대한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들뢰즈의 작업은 개념과 동일성에 대한 문제를 존재론의 영역에서 차이의 논리학으로 풀어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개념적 차이가 아닌 차이의 개념을 사유 안에 가져오는 것, 그것은 개념이 아닌 이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이제 이념의 특성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4) 이념의 특성
『차이와 반복』에서 독해가 가장 어려운 장은 아마도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일 것이다. 「차이의 이념적 종합」에서 들뢰즈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용어들을 토대로 차이와 이념을 설명한다. 만약 이념에 해당하는 사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은 순수 잠재적인 것으로부터,24) 잠재적인 것이 규정되는 과정을 통해서25), 잠재적이 것이 현실화26)되는 존재 운동에서, 잠재적인 것을 규정하는 심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존재의 운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들뢰즈가 사용하는 용어는 수학과 생물학에서 가져온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의 이념적 종합」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러한 용어 사용법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념 전체는 미/분화(different/ciation)의 수리-생물학적 체계 속에 붙들려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개입하는 수학과 생물학은 단지 차이의 두 반쪽 - 변증론적 반쪽과 감성론적 반쪽, 잠재적인 것의 해명과 현실화의 과정 - 을 탐구하기 위한 어떤 기술적 모델들에 불과하다.27)
미분화와 분화의 운동은 잠재적인 것을 순수 잠재성 속에 놔두지 않고, 잠재적인 것의 규정을 통해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잠재적인 것을 순수 잠재성의 영역에 놔두지 않는 것, 이는 무규정적인 즉자적 차이가 일차적 긍정의 대상임을 의미함과 동시에,28) 그것 자체로 이념-체계 전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은 미분적 요소들(elements differentiels), 이 요소들 간의 미분적 관계들(rapports differentiels), 그리고 이 관계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singularites)로 구성된 어떤 다양체(multiplicité)이다.29)
특이성으로서의 즉자적 차이들은 이념적 종합으로부터 다양체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때 즉자적 차이들의 관계맺음은 즉자적 차이들이 매개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계맺음은 언제나 상호 간의 변별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미분적 요소들간의 미분적 관계(rapports différentiels entre l'éléments différentiels)와 매개의 차이는, 이념 안에서 즉자적 차이들의 종합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차이들이 결코 지양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념들이라는 이름은 … 감성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감성으로 가는 어떤 심급들을 지칭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이때 이 심급들은 이 두 경우 모두 자신들에 속하는 어떤 질서에 따라 각각의 인식능력의 한계-대상이나 초월적 대상을 분만할 수 있다. 이념들은 문제들이지만, 문제들은 단지 인식능력들의 우월하거나 월등한 실행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념들은 어떤 양식이나 상식을 매체로 하지 않는다.30)
그런데 문제는 이념에 해당하는 사태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상식이 고장 나는 지점까지 우리의 사유를 끌어올린다는 것,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사실 인식능력들의 우월한 실행은 우리의 사유 안에서 매순간 태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가 개념을 사용하여 논증하는 한에 있어서, 이념적 사태는 ‘사태 자체에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태 자체로부터 표현되지도 않는다. 다만 가능한 것은 유비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둥근 사각형’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둥근 사각형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각이 둥근, 사각형을 이미지화한다. 그러나 이 개념에 해당하는 대상은 사실 이미지화될 수 없다. 이때 둥근 사각형은 실재하는가? (혹은 역으로 원과 사각형이라는 개념에 합당한 방식으로 실재하는 사태는 있는가?) 우리의 인식능력들은 결코 재현 가능한 개념을 통해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개념의 재현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재현되지 않는 이념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매순간의 마주침들로부터 태어나는 사유의 생식성(génitalité), 인식능력들을 우월한 실행으로 고양시키는 본연의 문제들이다.
이념적인 것은 의미만이 아니다. 문제들은 이미 이념들 자체이다. 문제와 명제들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본성상의 차이, 어떤 본질적인 간격이 있다. 하나의 명제 그 자체는 특수하고, 또 어떤 규정된 대답을 대신한다. 한 무리의 명제들은, ‘자신들이 대리하는 대답들이 어떤 일반적인 해의 경우들을 형성하게끔(가령 대수방정식의 값들을 위해) 분배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명제들은 일반적인 것이든 특수한 것이든 오로지 자신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배후의 문제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보편적인 것은 일반적인 명제의 저편에 있고, 특이성은 그에 못지않게 특수한 명제들의 저편에 있다. 문제제기적 이념들은 어떤 단순한 본질들이 아니라 오히려 비율적 관계와 그에 상응하는 특이성들로 이루어진 어떤 복합체, 어떤 다양체들이다.31)
차이들은 이념안에 있다. 이는 차이가 개념 바깥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차이가 개념 바깥에 있다는 것은, 차이가 (재현하는) 개념이나 (재현되는) 대상 양자를 통해서는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가 이념안에 있으면서 개념 바깥에 있는 이유는,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존재의 차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여기 책상이 있고 저기 연필이 있다. 이 책상과 저 연필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것들은 있음의 방식에 있어서는 분명히 같은 것이다.(그것들은 없음의 방식으로 있지 않다.) 이 책상과 저 연필이 다르다고 할 때, 이 다름은 개념을 통해서 규정되는 다름을 의미한다. 개념을 통해서 규정되는 한에 있어서 양자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책상의 있음과 연필의 있음은 책상과 연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는 규정되지 않는다.32) 차이가 이념안에 있다는 것은 존재의 차이는 오직 이념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상을 재현하기에 앞서 이념을 극화(dramatisation)하는 어떤 내적 차이들이 있다. 여기서 차이는 대상의 재현인 개념에 대해서는 외부적일지라도 이념에는 내부적이다.33)
개념이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이차적이다. 그것이 이차적인 이유는 대상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히드라’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고전적인 실재론 논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어떠한 개념에 해당하는 대상이 실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는 다만 ‘히드라’라는 개념이 우리의 사유에 낳는 효과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히드라’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개념이 대상을 재현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이 실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은, 그래서 무의미한 질문이다. 재현하는 것은 개념이 사유에 낳는 효과를 통해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일 뿐, 그 대상이 실재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대상을 재현하는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미지 없는 사유는 이념을 극화하는 이념 내적 차이로부터 가능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 플라톤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무엇이고, 플라톤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주의의 전복. 이것이 현대 철학의 과제를 정의한다. 이 전복은 플라톤적 성격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왜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고 하며, 이 전복은 불가피하게(그리고 동시에 이는 바람직한 것인데) 플라톤적 성격들을 많이 보존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들뢰즈가 이념(플라톤에게는 이데아)을 존재론에서 보존하면서 플라톤과 결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이데아-복사물-시뮬라크르로 이어지는 이념-체계의 최상위 심급으로 설정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동일성과 유사성을 보증하는 원형이 된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이념은 (원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생산적 체계에서 즉자적 차이를 규정하는 심급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통해서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될 때, 차이는 동일성과 유사성 보다 우선하게 된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선적으로 차이이며, 차이가 바로 본질이고, 동일성과 유사성은 이차적인 자격을 가질 뿐이다.
중간 논평 1. 헤겔 존재론과 들뢰즈의 존재론 : 개념과 차이를 중심으로
들뢰즈의 이념론은 존재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들뢰즈가 매개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니체과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들(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모든 저작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운동이다. 이들이 헤겔을 비난하는 것은 그가 거짓 운동, 추상적이고 논리적 운동, 다시 말해서 ‘매개’에 머물러 있다는 점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형이상학이 운동성과 활동성을 띠게 되기를 원한다. 이들은 형이상학이 어떤 동작으로, 게다가 무매개적인 동작들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운동을 새롭게 재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재현은 이미 매개이다. 이와는 달리 이제는 모든 재현을 넘어 정신을 뒤흔들 수 있는 어떤 운동을 작품 안에 생산해야 한다.35)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입을 빌리기는 하지만) 헤겔에게서 무엇을 비판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헤겔의 존재론에서 운동이 탈각되어 있다는 점이 아니라, 헤겔의 존재는 이미 항상 생성이지만, 그 생성이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헤겔이 말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은 즉자적 차이의 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헤겔에게서 즉자적 차이는 비-존재와 존재의 절대적 차이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운동에서 매개는 비-존재와 존재의 절대적 차이를 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비-존재를 부정하고 이 부정을 통해서 보다 큰 총체성으로 고양된다. 헤겔의 존재는 비-존재와의 절대적 차이로부터 비-존재를 지양하면서 생성하는 것이다.
무한히 - 부정의 부정이라고 가정된 것처럼 무한히 - 자기와 관련된 것으로서의 일자는 매개이다. 이 매개 속에서 일자는 자신의 절대적(즉 추상적) 타자성(여럿many)으로서의 자신의 자기(self)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밀어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러한 비-존재와 부정적으로 관련시킴에 있어서, 즉 그것은 지양함에 있어서 단지 자기-관계일 뿐이다. 그리고 일자는 오로지 이러한 생성일 뿐 …36)
헤겔에게서 비-존재의 지양은 부정, 보존, 고양의 세 계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헤겔 변증법에서는 이미 항상 부정이 상존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존하는 부정은, 바로 즉자적 차이를 개념을 통해 재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하면서 ‘재현은 이미 매개이다’(la représentation est déjà médiation)라고 말할 때, 이 말을, 매개는 항상 재현일 뿐이며 따라서 헤겔은 존재의 차이를 개념 안에 기입하고 있을 뿐이다!로 읽어야 한다. 헤겔은 차이의 개념을 개념적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라이프니츠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차이의 철학이 저지른 과오는,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만족한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차이의 개념을 단순한 개념적 차이와 혼동하는 것이다. 사실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한, 우리는 도무지 차이의 특이한 이념을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이미 재현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어떤 차이의 요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37)
그러나 역설적으로 헤겔에 대한 비판을 통해 분명해 진 것은 개념적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 이 차이를 헤겔 변증법에서와 같이 부정의 운동으로부터 드러낼 때에는, 결코 그것의 ‘특이한 이념’을 사유 안에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들뢰즈가 플라톤으로부터 수용한 것과 거부한 것이 있는 것처럼, 헤겔에게서 수용한 것과 거부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수용은 헤겔의 직접적인 영향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러한 수용은 헤겔 이후의 모든 서양 형이상학이 헤겔에게서 빚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존재를 시간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이다. 이정우는 『의미의 논리』역자 후기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세계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꺼지지 않는 한 형이상학이라는 담론이 소멸될 수는 없었다. 헤겔과 멘 드 비랑은 각자 새로운 양태로 형이상학을 재건하고자 했다. 헤겔은 공간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서구 형이상학을 시간축으로 돌림으로써 새로운 종합 철학으로의 길을 열었으며, 멘 드 비랑은 …38)
헤겔로부터 존재(Being)를 생성(Becoming)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헤겔의 위대한 업적이다.(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헤겔에 행한 비판은 결코 러셀이 헤겔에 행한 비판과는 같지 않다.)39) 그러나 헤겔의 있음(존재)은 존재의 차이를 개념적 차이로 환원하는 되기(생성)이다. 이러한 환원으로부터 차이는 다시금 동일성의 원리에 종속되며 생성으로서의 존재는 공허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변신론은 모든 윤리학적 근거를 상실했다. 그것은 공허함의, 공허한 생성의 찬양이다.40)
여기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념적 차이가 아닌 차이의 개념은 오직 생성으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헤겔의 생성이 공허한 생성이며, 이러한 공허한 생성에서 차이가 동일성에 종속되는 것이라면, 이는 존재의 차이는 생성으로부터 비개념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헤겔의 존재론은, 시간이 존재의 한 구성 계기라는 것을 밝혔다는 데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존재의 차이를 개념적 차이로 환원하면서 생성으로서의 존재를 동일성을 중심으로 파악하였다는 것, 그래서 존재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로부터 개념적 차이가 아닌 차이의 개념은, 헤겔적 존재의 공허한 반복 운동과는 다른, 존재의 차이나는 반복 운동으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개념적 차이와 차이의 개념은, 반복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관련되어 있다.
[개념적 차이에 해당하는] 개념을 정지 상태에 빠뜨리거나 재현의 요구들을 전복하는 것, 그런 가운데 월등한 실증성을 구성하는 것은 [차이의 개념에 해당하는] 이념의 과잉이다. 또 차이가 단지 개념적일 뿐인 어떤 차이로 환원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반복이 차이와 가장 심층에서 연계되어 있고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이 연계성에 대해서도 어떤 실증적인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이자 동일한 관점에서 성립하는 사태이다.41)
5) 이념과 문제
들뢰즈에게서 있음(존재)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되기(생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존재와 생성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뢰즈는 존재의 차이를 개념 안에 기입하지 않으며, 따라서 들뢰즈의 존재론에서는 차이에 대한 어떠한 동일성의 우위도 확인할 수 없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선행하는 동일성이 모두 파열된 곳에서 태어난다. 즉 사유하는 주체의 동일성과 사유되는 객체의 동일성이 파괴되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사유는 사유 안에서 태어난다. 사유하기의 활동은 본유성 안에 주어지는 것도, 상기 안에서 가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활동은 다만 사유의 생식성 안에서 분만될 뿐이다. 이런 사유는 이미지 없는 사유이다.42)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의 존재 사유가 이미 항상 반복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를 생성을 통해서 사유하는 한, 존재론에서 시간을 배제하지 않는 한, 반복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유의 생식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와 같은 식으로 존재와 생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적어도 들뢰즈의 반복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잘못된 문제제기라는 점이다. 들뢰즈가 개념이 아닌 이념의 수리/생물학적 체계를 통해 존재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상식적 경험론을 넘어서 우월한 경험론을 통해서, 초험적 경험론을 통해서 존재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를 생성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조차도, 통속적인 시간론(과거-현재-미래가 연속적으로 진행된다는 시간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시간론을 적극적으로 극복한 다음에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존재의 차이는 다만 다음과 같이 탐구될 수 있을 뿐이다.
이념을 탐험한다는 것과 인식능력들 각각을 초월적 실행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일이다.43)
반복되는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사유안에 가져오는 것, 이는 의식을 통해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그것을 자신의 존재론의 중요한 주제로 삼은 것은, 단지 의식의 차원 이전에 무의식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들뢰즈가 목표로 하는 것은 존재의 규정이 반드시 부정은 아니라는 것, 문제제기적인 이념은 바로 이러한 부정으로서의 규정을 분쇄할 수 있는 힘이며,(그래서 바로 규정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 들뢰즈는, 존재의 규정은 부정이 아니며 따라서 헤겔의 존재는 거짓된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존재론을 순수한 긍정으로부터 정립할 수 있는 심급이기 때문이다.
이념-문제는 본성상 무의식적 … 이념-문제는 명제 외적이고, 재현 이하의 것이며, 또 자신이 낳는 명제들 - 긍정들을 재현하는 명제들 - 과 유사하지 않다. 만일 문제가 의식의 명제들을 본(本)으로 삼고 또 그 명제들과 유사하게 재구성된다면, 가상은 즉시 몸을 얻고, 그림자는 살아 움직이게 되며, 또 마치 어떤 자율적인 삶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각각의 긍정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의존하고, 오로지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만 어떤 ‘의미’를 얻으며, … 변증법이 겪어온 어떤 긴 변질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헤겔에게서 마지막 국면에 이르는 이 변질의 역사는 차이와 미분적인 것 등의 유희를 부정적인 것의 노동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44)
6) 이념과 다양체
우리는 이념을 개념과의 차이에서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이미지 없는 사유, 존재의 차이에 대한 사유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플라톤에게서는 원형의 자리를 차지했던 이념이 들뢰즈에게서는 시뮬라크르와 같은 위치에 놓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념에 대해 비시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사실 들뢰즈가 이념을 미분화/분화의 수리/생물학적 체계를 통해 접근했다는 점에 있어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가 들뢰즈 존재의 논리학으로부터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되는 사항은 이념이 다양체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다양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양체는 다자와 일자 사이의 어떤 조합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본연의 다자 그 자체에 고유한 어떤 조직화를 지칭해야 한다. 이 조직화는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만 이를 위해 결코 어떤 통일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45)
이때 우리는 조직화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들뢰즈는 조직화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만 그 체계에는 어떤 통일성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형성된 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들뢰즈의 다양체를 비시간적으로 독해한다면, 위의 말은 모순적일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에게서 차이는 반복과 분리될 수 없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체계는 오직 차이 생산적 체계일 뿐이며, 차이의 생산은 시간에 따른 존재의 차이들의 변주라는 점을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시간에 따른 차이의 반복은 차이 생산적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소통과 공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선행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차이 생산적 체계에 대해 말하며, 동시에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특이성들 간의 소통에 대해 말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들뢰즈가 차이로서의 차이만을 강조한다거나 차이들간의 소통과 공명만을 강조한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문제를 던지는 한, 우리는 여전히 들뢰즈의 존재론을 비시간적으로 독해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차이 생산적 체계는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소통과 공명 없이는 체계 전체의 운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잠재성의 영역이 폐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념-다양체 출현의 세 계기를 통해서 즉자적 차이와, 차이들의 소통, 그리고 차이들이 변주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들에서 다양체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조건들은 세 가지이고 이념이 출현하는 계기는 - 다음과 같은 - 세 가지 조건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1) 다양체의 요소들은 …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도 아니도, 다만 어떤 포텐셜이나 잠재성과 분리될 수 없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요소들은 그 어떤 선행의 동일성도 함축하지 않고, 하나이거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위치의 어떤 것도 함축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꾸로 이 요소들의 미규정성 덕분에 차이는 모든 종속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출현할 수 있게 된다. 2) 이 요소들은 물론 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호적으로, 어떤 상호적 관계나 비율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이 상호적 관계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독립성을 띨 수 없다. 그와 같은 비율적 관계들은 정확히 어떤 이상적 연관들(liaisons idéales)이다. 이 이상적 연관들은 다양체를 개괄적으로 특징짓고 또 근방들의 병렬을 통해 진행되지만, 어떤 경우든 정위 불가능하다. … 3) 이상적인 다양체적 연관, 미분적 비율 관계는 상이한 시공간적인 결합관계들 속에서 현실화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 미분적 관계의 요소들은 어떤 항들과 변이된 형식들 속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46)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이념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자의 결합이 철학하는 사유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점이다. 존재에 대한 설명은 존재가 어떻게 인식되는가에 대한 탐구와 배타적으로 논구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존재론이 인식론에 대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는 차이와 반복이 존재의 차이와 시간에 따른 차이의 변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념론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모델로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 존재론-인식론으로부터 그것이 어떻게 윤리학으로(그러나 역시 이 윤리학은 상식적인 의미에서 ‘개체’에 관련되는 도덕법칙에 대한 탐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아가 정치철학으로 연결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3. 존재의 논리학에서 존재의 윤리학으로
1) 들뢰즈의 인식론을 가치론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단초들
우리는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가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47) 분명 들뢰즈는 존재론적 사변의 최고 수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아마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형이상학을 직접적으로 실천의 영역에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것을 강요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단지 사유의 이미지를 전복해버릴 새로운 정치적 역량(puissance d'une nouvelle politique)만이 없는 것이다.48)
물론 여기서 어떠한 정치학이 직접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것이 어떠한 정치적 역량에 관련되고, 나아가 그것이 어떠한 도덕적인 관심을 넘어서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 (존재론적 사변속에서) 무리 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때 도덕적인 관심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관련된다. 즉, 플라톤이 시뮬라크르를 비난하는 단 하나의 이유, 플라톤의 존재론의 바탕에 놓여 있는 도덕적 동기를 비판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 즉 인식론을 혁명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낳기에, 들뢰즈는 그것에 정치적 색조를 입히는가? 만약 들뢰즈의 이념론이 순수 인식 능력 이론에 한정될 경우, 우리는 들뢰즈의 인식론이 목표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들뢰즈의 인식론은 어떠한 새로운 인식 능력에 대한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이념은 개념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식론을 혁명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정치, 미래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 개념적 사유가 아닌 이념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를 넘어 이미지 없는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 그저 현상을 ‘사태 자체’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49) 역량의 적극적인 사용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람들은 의미나 문제가 명제 외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또 의미나 문제가 본성상 모든 명제와 다르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본질적인 것을 놓칠 뿐 아니라 사유 행위의 발생, 인식능력들의 사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변증법은 문제와 물음들의 기술이고 본연의 문제들을 다루는 계산법(calcul)이자 조합법(combinatoire)이다. 하지만 변증법이 어떤 명제들을 기초로 문제들을 전사하는 것에 만족할 때 자신의 고유한 힘을 상실하고, 이로써 변증법을 부정적인 것의 역량 아래 복속시키는 기나긴 변질의 역사가 시작된다.50)
우리는 앞에서 문제제기적인 이념의 특성을 살펴보았고, 이것이 사유의 생식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유의 생식성은 명제 외적으로,(마찬가지로 개념 외적으로) 문제들을 사유 안으로 가져올 때, 그래서 사유가 다시금 사유 안에서 태어날 때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변증법을 헤겔식의 개념적인 존재 정립 원리로 만드는 대신에, 사유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유를 다루는 ‘계산법’이자 ‘조합법’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를 통해 변증법을 능동적인(actif) 규정의 원리로, 부정이 일소된 긍정의 존재 규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변증법은 존재를 순수한 긍정을 통해서 정립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서 변증법은 존재를 비-존재와의 대립으로부터 규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존재를 ‘즉자적 차이’로 규정하는 원리이다. 즉자적 차이가 명제 외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문제가 명제와는 다른, 고유한 심급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바로 사유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유를 다루는 계산법이자 조합법으로서의 (헤겔의 그것이 아닌 들뢰즈의) 변증법이, 우리의 역량과 관련되며, (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역량의 활용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문제들은 언제나 변증법적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변증법은 자신이 이념들로서의 문제들과 긴밀히 맺고 있는 관계를 ‘망각’하고 명제들을 기초로 문제들을 전사하는 것으로 만족할 때, 자신의 참된 역량을 상실하고 결국 부정적인 것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또 필연적으로 문제제기적인 것의 이념적 대상성의 자리에 대립 명제들, 상반적이거나 모순적인 명제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단순한 대결 상황을 설정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법 자체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헤겔주의에서 극단적 형식이 발견되는 그 오래된 변질과 타락의 역사이다.51)
이제 들뢰즈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은 바로 문제제기로서의 이념의 참된 역량이 된다. 그러나 이때 역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지 명제 외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에 정치적 색조를 입히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단지 수사적으로 ‘정치적 역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닌가?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지평으로 가져오는 것은 무리한 요구는 아닌가? 우리는 『차이와 반복』을 독해하면서 ‘우리의 등을 떠미는 기류의 효과를, 우리를 태우는 마녀의 빗자루의 효과’를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차이와 반복』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실천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것, 문제제기적인 이념의 차원이 있다는 것, 이제 변증법은 존재를 비-존재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규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즉자적 차이로서의 존재를 긍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원리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특정한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여 탐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일견 우리에게 지극히 인식론적인 차원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가치론의 영역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인식론으로부터 가치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념들이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적 세계가 생산되는 여기저기에 있다 … ‘독특하고 특이한 점들’, ‘부가체들’, ‘특이성들의 응축’ 등과 같은 표현들에서 우리는 어떤 수학적 은유들을 찾지 말아야 한다. ‘용해점, 응결점…’ 등의 표현에서도 어떤 서정적이거나 신비적인 은유들을 보는 것도 금물이다. 이 표현들은 변증법적 이념의 범주들, 미분법(calcul différentiel)의 외연들(보편수학뿐 아니라 보편물리학, 보편심리학, 보편사회학)이다. 이 범주와 외연들은 다양성을 띤 모든 영역들에서 이념에 응답하고 있다. 그것들이 바로 이념들 안에 있는 혁명적인 어떤 것, 사랑을 가져오는 어떤 것이다.52)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들뢰즈가 이념을 순수한 인식론적인 차원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적 세계가 생산되는 여기저기에 있다.’ 그리고 이념의 규정 원리인 미분법의 외연에는 보편수학이 속할 뿐만 아니라, 보편사회학도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들뢰즈가 결코 어떤 순수한 인식 능력 이론을 『차이와 반복』의 중심주제로 설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변증법적 이념과 그것이 구현하는 긍정적인 존재 규정은, 니체적 의미에서의 긍정성과 관련된다. 이때 니체적 의미에서의 긍정은 헤겔의 ‘부정은 규정이다’는 존재 규정의 원리를 극복하는 원리일 뿐만 아니라, 힘의 의지의 긍정성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념론은 윤리학의 원리가 된다.
2) 들뢰즈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존재 규정과 긍정의 윤리학
우리는 분명『차이와 반복』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 ‘선’은 존재의 윤리학으로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그 이유는 들뢰즈의 존재 규정이 니체적 의미에서의 긍정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니체적 의미에서의 긍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존재의 논리학과 존재의 윤리학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을 통해 존재의 차이를 부정 없는 긍정으로 규정하는 것과 그것을 윤리학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오직 사유의 역량과 힘의 의지(volonté de puissance)가 연결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가 니체적 의미에서의 긍정을 설명하고, 그것으로부터 가치론을 도출하는 대목으로 직접 들어가도록 하자.
… 긍정이 일차적이다. …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만을 산출한다. 긍정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요.”이다. 이것은 다시 그림자이지만, 그러나 차라리 귀결이라는 의미의 그림자이다. 후속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것, 그것은 부대 현상이다. … 부정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차이나는 긍정의 효과이다. … 그것은 “아니요.”로부터 긍정의 환영을 끌어내는 노예의 관점, 그리고 “예”로부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귀결을 끌어내는 ‘주인’의 관점 - 오래된 가치를 지키는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창조자들의 관점 - 사이의 대립이다. 니체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분명 역량(puissance)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권력(pouvoir)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현행 가치들의 귀속 관계에 의해 판정되기 때문이다.53)
우리는 여기에서 긍정과 부정이, 역량과 권력에 각각 대응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때 권력을 단순히 어떤 정치권력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보수주의자’로, 그리고 권력을 ‘현행 가치들의 귀속’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는 그 말에 대응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권력에 대응하는 말은 역량이며, 역량을 갖는 사람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창조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을 지닌 사람은 ‘주인’으로서, 긍정으로부터(“예”로부터) 노예의 낡은 가치를 부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 역량, 주인, 창조라는 가치론적인 개념들이, 그 자체로 가치론의 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결코 ‘긍정의 힘’을 설교하지 않는다. 위의 글은 전적으로 그의 사유 속에서 재구성된 니체철학으로 읽혀야 한다. 그런데 들뢰즈가 긍정의 힘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면, 들뢰즈가 논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김정현의 들뢰즈 해석을 통해서 그 단초를 파악할 수 있다.
들뢰즈 또한 니체에 의존해 지금까지 서양 철학사에서 적자로 여겨져 온 거대한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총체적, 보편적, 객관적, 재현적 진리관을 전복하고 차이의 철학을 내세운다. 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개념에 주목하며, 힘들 사이의 차이와 관계에서 가치의 가치, 즉 가치들의 발생 과정에 관한 징후학과 기호학, 계보학을 이끌어낸다.54)
김정현은 들뢰즈의 니체 독해를 힘들 사이의 차이와 관계로부터 가치들의 발생 과정에 대한 탐구로 독해하는데, 이는 긍정, 역량, 주인, 창조라는 개념들을 어떠한 특정한 가치로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 역량, 주인, 창조라는 개념들은 어떠한 가치론의 원리가 아니라, 가치의 가치, 즉 메타가치이다. 메타가치로서의 긍정의 윤리학은 그것이 가치의 발생 과정이라는 데에서, 오직 존재론을 통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55) 그리고 들뢰즈의 존재론이 인식론과 맺고 있는 분리불가능한 결합 관계는, 다시금 『차이와 반복』의 가치론을 존재론-인식론으로부터 탐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적극적인 미분적 요소들이 있을 뿐이며, 바로 이것들이 긍정의 발생과 긍정된 차이의 발생을 동시에 규정한다. 우리는 그런 긍정의 엄연한 발생을 놓치기 쉽다. 긍정을 규정되지 않은 것 속에 방치한다든가 규정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구할 때마다 우리는 그 발생을 간과하게 된다. 부정은 긍정의 결과이다. 이는 부정이 긍정에 뒤이어 나오거나 긍정의 옆쪽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정은 보다 심층적인 발생적 요소의 그림자로서만 출현할 뿐이다. 부정은, 긍정을 분만하고 긍정 안에 차이를 분만하는 역량이나 ‘의지’(volonté)의 그림자이다.56)
들뢰즈에게서 구조와 발생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긍정과 발생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긍정을 분만하는 것은 사유의 역량임과 동시에 ‘의지’이기도 하다. 이때 의지는 ‘힘의 의지’이다. 그런데 힘의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가 해석하는 니체의 힘의 의지는 무엇보다도 반복과 관련된다. 그것은 긍정과 발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이미 예정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힘의 의지는, 문제제기적인 이념의 활동, 사유의 우월한 실행과 분리될 수 없다.
반복 안에서, 그리고 반복을 통해 비로소 망각은 어떤 긍정적 역량이 되고 무의식은 어떤 긍정적이고 월등한 무의식이 된다.(가령 힘으로서의 망각은 영원회귀의 체험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모든 것은 역량 안에서 하나로 집약된다. … 니체가 영원회귀를 힘의 의지에 대한 무매개적인 표현으로 제시했을 때, 이 의지는 결코 ‘역량을 의욕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을 의지하든지 간에 의지하는 바의 것을 ‘거듭제곱’의 역량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역량의 우월한 형식을 끌어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원회귀를 통해 실행되는 사유의 선별적 작용에, 그리고 영원회귀 자체가 보여주는 반복의 특이성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식, 바로 여기에 영원회귀와 초인의 직접적 동일성이 있다.57)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 힘의 의지를 반복과 관련시키며, 특히 영원회귀와 관련시킨다. 그리고 영원회귀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식을 사유하며, 이를 통해 다시금 반복을 특이성으로 만든다. 영원회귀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이 특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영원회귀에서 긍정의 역량은, 힘의 의지와 연결되는데, 이때 힘의 의지는 역량을 의욕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역량의 우월한 형식’을 끌어내는 것, 그것은 사유의 초험적 실행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영원회귀의 반복에서 사유의 초험적 실행이 ‘사유의 선별적 작용’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이 연결될 수 있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그것은 영원회귀에서 사유의 초험적 실행과 사유의 선별적 작용이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영원회귀가 힘의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라는 것, 그것은 존재의 논리학이 이미 항상 시간과 관련되어 있는 한,(다시 말하면, (존재의) 차이가 이미 항상 (존재의) 반복과 관련되어 있는 한) 존재의 윤리학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들뢰즈가 ‘영원회귀’와 ‘초인’이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식’이라고 말할 때, 이는 결국 ‘존재-시간’의 우월한 형식이라는 것을(다시 말하면, ‘차이-반복’의 우월한 형식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학이라는 명칭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들뢰즈의 윤리학에는 어떠한 도덕적인 함의도 들어있지 않다. 들뢰즈의 윤리학은 사유의 선별적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선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선별을 거친 것만이 영원회귀의 반복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이라면(그래서 ‘특이한 것’이라면), 선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3) 존재, 비-존재, (비)-존재
우리는 영원회귀를 중심으로 존재의 논리학과 존재의 윤리학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역설적으로 분명해진 것은, 『차이와 반복』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이 연결되는 것은, (존재의) 차이와 (존재의) 반복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들뢰즈에게서 인식론과 가치론이 배타적인 영역으로 설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들뢰즈의 인식론과 가치론은 오직 존재론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들뢰즈 존재론의 토대를 이루는 두 원리, 즉 차이와 반복이 인식론과 가치론을 분리시켜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역으로, 사유의 초험적 실행과 사유의 선별적 작용으로부터 들뢰즈의 존재론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논구된 들뢰즈의 인식론과 가치론의 특성을 바탕으로 들뢰즈의 존재론을 보다 분명히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비)-존재라는 개념이 (존재의)차이-(존재의)반복을 특징짓는 표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에서 사유의 초험적 실행인 문제제기로서의 이념과 사유의 선별적 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물론 인용문에는 ‘이념’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여기서 각각의 고유한 긍정성의 등급에 도달한 문제가, 이념-문제임을 알고 있다.)
… 문제들은 각각의 고유한 긍정성의 등급에 도달할 때, 그리고 차이가 그에 상응하는 긍정의 대상이 될 때, 어떤 공격과 선별의 역량을 분비한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이것들에 비추어 보면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은 외양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영혼들의 경건한 소망들도 마찬가지로 겉모습에 사로잡힌 신비화에 지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는 복사물이 아니다. 시뮬라크르는 원형들마저 전복하는 가운데 모든 복사물들을 전복한다. 즉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58)
우리는 어떻게 들뢰즈가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존재를 규정할 수 있었는지 확인하였다. 그것은 메타가치로서의 긍정의 윤리학이 긍정의 발생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의문에 빠지게 된다. 왜 들뢰즈는 긍정을 존재론의 원리로 삼으면서, 공격과 선별에 대해서 말하는가. 차이가 긍정의 대상이 될 때, 차이는 왜 공격하고 선별해야 하는가. 공격과 선별은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공격과 선별은 분명히 무언가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부정은 헤겔의 존재 규정에 있어서 부정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들뢰즈의 긍정의 윤리학이 긍정의 발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통해, 긍정의 윤리학에 내포된 부정의 계기를 헤겔의 변증법에 있어서의 부정의 계기와의 대조로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하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가 들뢰즈의 총체적 비판에서 발견하는 비변증법적 부정 개념은 분명 변증법의 마법적 효과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변증법적 부정은 언제나 부활의 기적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폐기된 것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폐기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이 폐기된 뒤에도 살아남는” 부정이다. 비변증법적 부정은 더 단순하고 더 절대적이다. … 비변증법적 부정은 현재적인 일체의 것이 부정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되어지는 것이 완전하고도 무제약적인 힘에 의해 공격받는다는 점에서 절대적이다.59)
들뢰즈의 존재론에서는 긍정이 일차적이다. 긍정은 존재의 차이를 긍정하며, 차이의 반복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부정의 계기가 탈락되어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결코 ‘아름다운 영혼의 담론’에 빠지지 않는다. 들뢰즈의 존재론을 우리 영혼의 쉼터로 생각하는 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을 철저히 오독할 때에만 가능하다.(그리고 아마도 이는 철학을 순수한 지적 유희로 생각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부정의 계기는 헤겔의 존재론에서 부정의 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헤겔의 부정은 존재의 규정과 함께 하며, 존재의 운동에 이미 항상 상존한다. 들뢰즈의 부정은 상존적이 아니라 절대적인데, 이는 들뢰즈의 공격과 선별이 부정적인 모든 것에 대한 투쟁과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의 긍정이 니체적 주인의 긍정임을, 노예를 부정하며 자신을 긍정하는 주인의 윤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Je suis bon, donc tu es méchant.60)
그런데 긍정의 윤리학에 있는 부정의 계기가 들뢰즈의 존재론을 어떻게 특성화하는가. 즉 들뢰즈의 존재는 긍정과 부정을 어떻게 자신의 운동원리로 만드는가.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을 비시간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였다. 그래서 긍정과 부정은 차이와 반복으로부터(그래서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 긍정은 분명 차이의 긍정이지만, 부정이 반복의 부정인 것은 아니다. 부정은 단순히 반복의 부정이 아니라 동일자의 반복에 대한 부정이다. 오직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한다. 반복은 이미 항상 차이이다. 들뢰즈의 존재의 차이가 이미 항상 존재의 반복이라면, 이때 들뢰즈의 존재는 동일성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차이로 만드는 차이의 차이이며, 오직 차이나는 것의 반복일 뿐이다.
… 아니요는 물론 부정적인 것의 비-존재가 아니라 끈덕지게 항존하는 어떤 물음의 (비)-존재이다.61)
이제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의 차이와 존재의 반복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개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반복하는 것에서는 일체의 동일성이 폐기되었다는 것, 선별과 공격은 동일한 것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행해진다는 것, 그래서 들뢰즈의 존재는 오직 긍정의 윤리학을 토대로 하지만, 이 윤리학은 모든 부정적인 것을 일소해버리는, 절대적 부정을 자신의 운동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아니요’는 존재 운동에서 상존하는 부정이 아니라, 다만 (비)로서, 긍정의 윤리학을 보증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아니요’는 헤겔의 ‘아니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존재는 본연의 차이 그 자체이다. 존재는 또한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다. … 본연의 차이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비-존재이고, 이 비-존재는 본연의 차이, 곧 반대가 아닌 다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존재는 차라리 (비)-존재라 적어야 하고, 그보다는 ?-존재라고 적는 편이 훨씬 낫다.62)
4. 존재의 윤리학에서 존재의 정치학으로
1)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
우리는 긍정의 윤리학을 통해서 『차이와 반복』의 존재론으로부터 인식론과 가치론이 연결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차이와 반복』의 긍정의 윤리학이 정치철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가『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직접적인 정치철학을 도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앞으로 할 작업은 어쩌면 우리가 들뢰즈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면, 우리가 들뢰즈에게 선언적으로 요구하는 것, 우리가 스스로 규정한 들뢰즈 독해의 원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작업은 하트가 들뢰즈에게 던졌던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 철학사상과 정치사상의 새로운 지반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영역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그[들뢰즈]의 사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들뢰즈에게 요청하는 것은 철학이 갖는 현재의 가능성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63)
우리가 존재론으로부터 정치철학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 이는 사실 분산된 개인으로 남아있지 않으려는 우리 욕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날카롭게 그어진 경계를 무너뜨릴 것을 요구한다.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구분은 개체(개인)와 사회를 분리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개체의 심급이 있다.’ 윤리학자의 독백은 위와 같다. 그렇다. 그 심급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심급이 철학자의 사유에서만큼 날카롭게 분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들뢰즈의 긍정의 윤리학이 정치철학으로 연결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단적인 자아의 고매한(그렇지만 동시에 배타적인) 유아론에 맞서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우리는 관조하는 자아의 유아론에 맞서 정치철학을 사유할 것인가.
우리는 오직 들뢰즈의 존재를 통해서 정치철학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들뢰즈의 일의적 존재, 존재의 일의성에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존재의 일의성의 두 구성계기인 특이성과 보편성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해야 된다.64)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들뢰즈가 존재의 일의성으로부터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구분하는 원리를, ‘매개’를 통하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매개’에 맞선다는 것, 이는 ‘재현’을 넘어서는 특이성들의 표현을 긍정하는 것인데, 재현을 넘어서는 특이성의 표현은 결코 보편성과 배타적이지 않다. 그리고 특이성의 표현이 보편성과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 이는 특이성들의 표현을 ‘아름다운 영혼의 담론’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차이들이 있고 또 오직 차이들밖에 없지만 사회적 장소와 기능들의 이념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아름다운 영혼의 담론’은, 들뢰즈의 긍정의 윤리학에서 운동하는 절대적 부정의 계기, 선별과 공격과는 맞지 않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표현들이 구성하는 보편성은, 결코 어떤 매개된 전체가 되지 않으며,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선별과 공격, 특이성들의 표현과 이 표현들이 구성하는 보편성은 긍정의 윤리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직 반복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윤리학과 존재의 정치학을 연결하는 ‘선’ 조차도, 『차이와 반복』의 존재론을 비시간적으로 독해할 때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는 특이성과 보편성을 반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복은 본성상 위반이고 예외이다. 반복은 언제나 법칙에 종속된 특수자들(particuliers)에 반하여 어떤 특이성(singularité)을 드러내며, 법칙을 만드는 일반성들(généralités)에 반하여 항상 어떤 보편자(universel)를 드러낸다.65)
반복에서 분리되고 있는 것은 특수성과 특이성, 일반성과 보편성이다. 특수성과 일반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법칙인데, 이로부터 역으로 알려지는 것은 특이성과 보편성이 법칙에는 예외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특이성과 보편성을 모순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들뢰즈는 특이성과 보편성을 반복의 핵심적인 원리로 만들며, 양자를 분리불가능하게 결합시킨다.
영원회귀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형식, 그것은 무매개성의 난폭한 형식이며 보편성과 특이성을 하나로 엮는 형식이다. 이 형식을 통해 모든 일반적 법칙은 특권적 지위를 빼앗기고 매개들은 용해되며 법칙에 예속된 특수성들은 사라지게 된다.66)
영원회귀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형식에서는 보편성과 특이성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게 특이성은 특이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특이한 것들의 공통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특이한 것들이 어떠한 공통성도 갖지 않는다면, 특이한 것들이 보편적이 된다는 것은 모순적이 될 것이다. 물론 마찬가지로 이때의 공통성은 어떠한 법칙과도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 들뢰즈가 일반성과 특수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일반성이 ‘법칙을 만드는 것’이며, 특수성이 ‘법칙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법칙’을 넘어선 공통성은 영원회귀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형식으로서, 오직 시간을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성은 들뢰즈의 존재가 이미 항상 차이이자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서의 (비)-존재라는 점에서,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존재는 비-존재가 아니지만, 존재이다. (비)-존재는 있음이면서 이미 항상 차이이며, 오직 차이나는 것의 반복인 있음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을 토대로 존재를 표현하는 개념이 (비)-존재라면, (비)-존재는 역으로 존재의 공통성을 즉자적 차이와 대자적 반복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원회귀(eternel retour), 되돌아오기(revenir)는 모든 변신들(toutes les métamorphoses)에 대해 공통의 존재(être commun)를 표현한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모든 극단적인 것, 역량의 모든 실현 등급들에 공통되는 척도와 존재이다. 그것은 동등하지 않은 모든 것의 동등-함(être-égal), 자신의 비동등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줄 알았던 모든 것의 동등-함이다. 같은 것으로 생성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모든 것은 동등하고 공통적인 존재 안에서 서로 소통한다. 회귀를 규정하는 것은 그런 존재이다.67)
들뢰즈의 존재-시간론에서 우리는 차이와 반복이 공통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통의 존재를 차이와 반복이 표현하기 때문에, 특이성과 보편성은 모든 법칙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공통성이 바로 들뢰즈에게서 존재의 윤리학과 존재의 정치학을 연결할 수 있는 ‘선’이라고 주장한다.
2) 공통의 존재와 공명의 정치학
여기서 다시 정치적인 것이 문제가 된다.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글의 서두에서 들뢰즈에게 정치적인 것은 소위 정치적인 것으로 이미 구획되어진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서 정치적인 것을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로 정식화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들뢰즈에게 정치적인 것의 도출이 오직 반복으로부터(다른 말로하면, 시간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이 표현에서는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들뢰즈의 긍정의 윤리학은 그것이 반복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점에 있어서 분명히 시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나아가 들뢰즈의 존재의 정치학이 존재의 윤리학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점 때문에, 위의 표현은 일면적으로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도출되는 가치론이 존재-시간론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치론의 두 심급인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구분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존재의 윤리학을 이미 우리는 긍정의 윤리학이라고 파악하였고, 이 긍정의 윤리학을 움직이는 원리가 비변증법적 부정, 절대적 부정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의 윤리학과 존재의 정치학을 연결할 수 있는 ‘선’을 공통의 존재로 파악하였는데, 이는 결국 우리가 들뢰즈의 존재-시간론에서 특이성과 보편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 존재의 공통성을, 들뢰즈의 존재의 정치학의 원리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존재의 정치학은, 긍정의 윤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이념론으로부터 도출되어야만 한다. 존재의 정치학은 다양체로서의 이념과 관련된다.(이는 긍정의 윤리학이 문제제기로서의 이념과 관련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들뢰즈에게 정치학을 이념론으로부터 도출할 때에도 (이미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들뢰즈에게 이념론이 결코 어떤 배타적인 인식능력이론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이념은 (비)-존재를 표현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들뢰즈에게서 확인하려는 존재의 정치학은 오직 존재론으로부터 구성되는 정치학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이 정치학을 구체화하기 위해 들뢰즈의 존재 운동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을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가(그래서 차이가) 분명 차이 생산적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체계 전체의 운동은 오직 차이나는 것들의 공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는 그와 같은 장[개체화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불과하다. 즉 자아는 그와 같은 장의 개체화 요인들을 수축하고 응시하며, 또 이 장의 계열들이 공명하는 지점에서 구성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균열된 나에 해당하는 나는 특이성들에 의해 정의되는 이념들, 개체화의 장에 선행하는 모든 이념들을 지나가도록 허락한다. 개체화하는 차이는 물론이고 개체화는 어떤 나-선행자, 어떤 자아-선행자이고, 미분적 규정(détermination différentielle)과 특이성은 그에 못지않게 전-개체적(préindividuelle)이다. 어떤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와 어떤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 그것이 곧 익명인 아무개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일상의 진부함으로 귀착되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마주침과 공명이 조성되는 세계,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얼굴이 나타나는 세계, 재현을 넘어서고 시뮬라크르들을 불러들이는 깊이와 무-토대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나는 세계이다.68)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비)-존재를 표현하는 이념은 어떠한 지시적 대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인용문에서 설명되고 있는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와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존재 운동에서 차이들의 규정에 해당하는 ‘미분화(differéntiation)’를 의미한다고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미분화에서 역설적으로 중요한 것은, 차이들간의 공명이다.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와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는 특이성으로서의 특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익명의 아무개의 세계’, ‘그들의 세계’이다. 차이 생산적 체계는 차이들 간의 소통이 없이는 체계 전체의 운동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 생산적 체계는 오직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 존재를 표현한다. 하지만 또한 이때 표현되는 것은 공통의 존재, 존재의 공통성이다. 이는 모순적인 것인가? 아니면 역설적인 것인가?
이념들, 이 이념들의 구별들은 이것들이 각기 취하는 변이성들의 유형들과 분리될 수 없고, 각각의 유형이 다른 유형들 속으로 침투하는 방식과도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념이 보여주는 이런 구별과 공존의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막-주름운동이란 이름을 제안한다.69)
들뢰즈는 구별과 공존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는 이미 항상 시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들뢰즈가 구별과 공존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다만 역설적이라고 파악한다. 이념들은 시간에서 변이한다. 그래서 존재는 이미 항상 차이이다. 그러나 이미 항상 차이인 존재는, 차이들이 상호 침투하는 공통의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차이들이 상호 침투 한다는 것이 결코 차이들의 대립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오히려 상호 침투는 차이나는 것들의 소통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들뢰즈가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에서는, 차이들 간의 대립이 허구적이며 오히려 차이들 간의 소통이 보다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립들은 언제나 평면적이다. 대립들은 다만 어떤 평면 위에서 어떤 원천적인 깊이의 타락한 효과만을 표현한다. … 모든 대립은 훨씬 심층적인 어떤 ‘불균등화’에 의존한다. 대립은 시간과 연장 속에서 해소된다. 하지만 이런 해소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불균등한 것들이 질화된 연장 위쪽의 세계에서는 식별해내기 어려운 어떤 강도적 여정들의 윤곽을 드러내야 하고, 그런 가운데 깊이 안에서 자신들의 소통 질서를 창안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봉인되는 바로 그 차원을 재발견해야 한다.70)
이로부터 우리는 특이성은 서로 구별되지만 소통을 통해 보편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때 소통이 대립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립은 특이성들을 부정하는 것이며, 불균등한 것들을 균등하게 만드는 힘, ‘매개’를 원리로 한다. 소통은 결코 매개로 환원되지 않는다. 소통은 불균등한 것들을 균등화하는 게 아니다. 소통은 불균등한 것들을 불균등한 것들로서 공존하게 하는, 공명을 원리로 한다. 특수한 것은 매개를 통해 일반적인 것이 된다. 특이한 것은 매개되지 않으며, 매개는 그것의 타락을 의미할 뿐이다. 특이한 것은 공통성을 통해 보편적인 것이 된다. 특이성은 이미 항상 특이한 것이지만, 이미 항상 공명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미 항상 보편적인 것, 보편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의 정치학을 공명의 정치학으로 지칭한다.71)
중간 논평 2. 공명의 정치학과 들뢰즈의 예술론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공명의 정치학이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도출은 들뢰즈의 존재론에 대한 어쩌면 지나친 요구인지도 모른다.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정치철학을 읽어내려는 우리의 작업은, 또한 특이성이 개체로, 보편성이 사회로 결코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작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이와 반복』의 존재론을 정치적으로 독해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존재론이 바로 시뮬라크르가 들끓는 오늘에서야 가능했기 때문이며, 오늘에서야 유의미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차이와 반복』은 어제의 존재론이 아니라 오늘의 존재론이다.『차이와 반복』은 오늘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미래의 정치학이다. 그래서 우리는『차이와 반복』이 놓여 있는 오늘의 성격으로부터, 『차이와 반복』의 정치적 독해의 유의미함을 도출해야 한다.72)
예술은 모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먼저 예술이 반복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어떤 내면적 역량(puissance intérieure)을 통해 반복하기 때문이다.(모방은 어떤 복사물이다. 하지만 예술은 시뮬라크르이고, 복사물들을 시뮬라크르들로 뒤바꾼다.) … 미학의 모든 문제는 예술을 일상적 삶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표준화되고 천편일률화되면 될수록, 또 점점 더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 재생산에 굴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만큼 예술은 더욱더 일상적 삶에 집착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욱더 이 일상적 삶에서 어떤 작은 차이를 끌어내어 반복의 다른 수준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유희하게 만들어주어야 하고, 심지어 소비의 습관과 습관의 계열들의 두 극단을 파괴와 죽음의 본능적 계열들과 더불어 공명하도록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로써 잔혹성의 장면을 어리석음의 장면과 결합하고, 소비 아래에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어금니를 가는 소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전쟁이 가져오는 지극히 비열한 파괴들 아래에서도 여전히 어떤 소비의 과정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해야만 하며, 이 문명의 실질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그 가상과 신비화들을 미학적으로 재생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본연의 차이가 가장 기이한 선별을 끌어들일 수 있는 어떤 힘, 그 자체가 어떤 반복적인 분노에 찬 힘과 함께 표현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73)
여기서 들뢰즈는 분명 예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미 간파하였듯이. 예술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들뢰즈가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으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 현대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예술이 복사물로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뮬라크르로서 반복한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예술은 ‘본연의 차이가 가장 기이한 선별을 끌어들일 수 있는 어떤 힘, 그 자체가 어떤 반복적인 분노에 찬 힘’으로 무엇을 표현한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예술이 갖는 힘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시뮬라크르들이 어떤 똑같은 역량을 통해 본질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무의식 안의 대상 = x, 언어 안의 단어 = x, 역사안의 행위 = x 등이다. 시뮬라크르들은 차이나는 것이 차이 그 자체를 통해 차이나는 것과 관계 맺는 그 체계들이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이 체계들 안에서는 어떠한 선행의 동일성도, 어떠한 내면적 유사성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74)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차이 생산적 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차이 생산적 체계는 오직 특이성들의 소통을 통해서만 체계 전체의 운동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로서의 예술이 갖는 힘에 대해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금 공명의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다. 이때 공명은 예술에 있어서의 특이성과 보편성의 관계로부터 사유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술이 삶을 표현하며, 예술이 표현하는 삶은 시뮬라크르임을 알고 있다. ‘미학의 모든 문제는 예술을 일상적 삶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75) 예술은 ‘일상적 삶에서 어떤 작은 차이들을 끌어내어 반복의 다른 수준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유희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예술은 ‘이 문명의 실질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그 가상과 신비화들을 미학적으로 재생산해야 한다.’ 예술의 ‘내면적 역량’은 삶을 미학적으로 재생산하는 힘이다. 예술은 내면적 역량을 통해서 일상적 삶에서 어떤 작은 차이들을 끌어내어 반복한다. 이때 반복되는 것, 즉 예술에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된 삶은 이미 ‘정치적’인 것이 아닐까? 예술이 무-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술이 무-의미한 것으로서 실재하기 때문에, 예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충만한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의미는 이미 항상 우리에게 정치적인 어떤 것이 아닐까? 예술이 수행하는 반복의 힘, 그것은 특이한 것을 특이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것이 되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예술이 표현하는 것은 재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술은 특이한 삶을 표현하며, 이 표현을 통해 특이한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술적 표현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이때 정치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와 만난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우리 스스로 밝혔던 것을 통해 정립하고자 한다. 정치적인 것은 우선적으로 반복과 분리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과 분리되는 핵심은 ‘공통성’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들뢰즈 독해를 통해 들뢰즈에게 정치적인 것을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정식화한다. 들뢰즈에게 정치성은 시간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공통성과 분리될 수 없다.76)
정치성이 시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현대 예술은 이미 항상 정치적이다.77) 예술적 표현으로부터 우리의 특이한 삶이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삶이 되는데, 이는 우리의 특이한 삶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공통성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성을 시간성과 공통성으로 사유하는 한, 예술은 이미 항상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예술이 행하는 반복은 공통성을 통해 특이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보편성은 오직 특이성들 사이의 공통성을 기초한다. 물론 이때 공통성은 결코 특이성을 폐기하지 않는다. 공통성은 차이나는 것을 동일자의 반복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공통성은 차이나는 것의 차이나는 반복의 구성계기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차이나는 것이 차이나는 것으로서 반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차이나는 것들이 공명해야만 한다. 공명이 없는 차이 생산적 체계에서는 차이의 생산이 불가능하다.
삶을 표현하는 예술은 우리의 특이한 삶을 특이한 것으로서 표현하며, 이 표현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보편성은 우리의 공통의 삶속에서만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통의 삶속에서 보편적인 것이 됨으로써, 우리의 특이한 삶에 특이한 의미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과 예술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삶을 표현하는 예술은 삶을 반복하면서 삶을 정치화한다.
4) 존재의 일의성과 공명의 정치학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의 정치학, 공명의 정치학의 두 원리가 시간성과 공통성임을 확인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시간성과 공통성이 들뢰즈의 존재(보다 정확하게는 (비)-존재)를 얼마나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작업은 우리가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도출한 정치철학이 들뢰즈가 강조하는 일의적 존재에 합치하는 것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미 특이성과 보편성과의 관계에서 공통성을 도출하면서, 특이성과 보편성이 일의성의 두 구성계기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공통성을 특이성과 보편성과의 관계로부터만 도출하였기 때문에, 양자를 존재의 일의성과의 관련속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존재의 일의성을 시간성과 공통성이라는 공명의 정치학의 두 원리를 통해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이미 항상 정치철학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78)
들뢰즈는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의성이 의미하는 것은, 일의적인 것은 존재 자체이고 이런 일의적 존재가 다의적인 존재자를 통해 언명된다는 사실이다. … 존재는 자신의 모든 형식들을 통해 언명되지만, 하나의 똑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79)
우리는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에 접하게 된다. ‘일의적인 것은 존재 자체’라는 것은 있음의 의미는 하나라는 것이다. 분명 있음은 하나이다. 있음은 없음의 방식으로 있지 않다. 그런데 존재는 모든 형식들을 통해 언명된다. 그래서 존재는 다의적인 존재자를 통해 언명된다. 이 책상과 저 책상은 분명 다른 존재자이고, 그래서 존재는 다른 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일의성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단지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일의성의 본질은 존재가 단 하나의 똑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하지만 자신의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toutes ses différences individuantes)나 내생적 양상(modalités intrinsèques)들을 통해 언명된다는 점에 있다. 존재는 이 모든 양상들에 대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양상들은 서로 같은 것들이 아니다.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동등’하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 동등하지 않다.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에서 언명된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80)
우리는 들뢰즈가 개체화하는 차이와 내생적 양상들을 통해 존재가 언명된다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념론은 개체화하는 차이와 내생적 양상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개체화하는 차이와 내생적 양상들은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의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가 ‘있다’라는 단 하나의 의미로 표현되지만, 비인격적 개체화의 세계, 전-개체적 특이성의 세계, 즉 이념의 영역에서는, 존재를 표현하는 양상들이 이미 항상 차이라는 것을, 들뢰즈가 주장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다의적인 존재자를 통해서 언명되는 존재의 같음은, 존재자를 통해서는 결코 차이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적인 존재자로부터는 존재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존재의 차이는, 오직 잠재성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이념의 대상, 그것은 현실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적 존재이다. 잠재성은 현실화되지만,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81)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의 이념론을 통해 잠재성의 영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잠재성의 영역은 우선적으로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통한 대상의 재현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을 의미한다. 개체화하는 차이와 내생적 양상들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운동속에서 존재의 차이를 개별 존재자들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드러난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의미는 같다. 그래서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운동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즉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게 되면, 존재의 의미를 차이와 반복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된다. 우리가 이로부터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간성과 공통성이 존재의 일의성을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더욱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이미 존재를 시간으로부터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로부터 존재가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는 것은, 일의적 존재가 이미 항상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일의적 존재는 … 확실히 공통적이다.82)
물론 우리는 같음과 차이의 문제가 결코 쉽게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시간성과 공통성을 통해 존재의 일의성을 분명히 할 수 있었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공통성이 차이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존재가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언명되지만(그래서 일의적 존재는 공통적이지만), 개체화하는 차이나 내생적 양상들을 통해 언명된다고 할 때, 들뢰즈가 무엇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존재가 이미 항상 차이라는 것, 존재는 차이나는 것의 차이나는 반복이라는 것, 그래서 존재의 의미가 같다는 것에 결코 (존재의) 차이가 포섭되지는 않는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들뢰즈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통성을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정치철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선’으로 설정한 이유는, 공통성이 일의적 존재에 갖는 함의를 들뢰즈 스스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83)
우리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존재는 공통적이라는 것, 그래서 존재론에서 탐구된 존재의 공통성이 역설적으로 특이한 것이 보편적인 것 안에서 지양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토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존재의 공통성을 통해 특이한 것들은 특이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것이 되는데, 이는 공통성이 특이성들의 ‘왕관을 쓴 무정부상태’에 평등을, ‘존재의 동등성’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왕관을 쓴 무정부상태에서의 평등을, 특이한 것의 보편성을, 혹은 동등한 존재의 유목적 분배를, 보편적인 것의 특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과연 특이성들을 연결하고 접속하는 구성적 실천을 사유할 수 있는가? 들뢰즈에게서 존재론으로부터 정치철학으로의 발전을 향한 ‘선’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식화한 정치철학의 두 원리인 시간성과 공통성이, 과연 구성적 실천을 함축하고 있는가? 매개와 재현의 너머에서 특이한 것이 보편적인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 특이한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 특이성으로서의 특이성을 극복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극복 속에서 매개와 재현을 넘어선 구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이 문제가 (존재의) 차이의 공통성과 (존재의) 차이의 공명으로부터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은 과제는 공통성과 공명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5) 조직화의 문제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공통의 존재와 차이의 공명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조직화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직화라는 개념은 다만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되는 존재운동의 특정 국면을 지칭한다. 물론 이때 조직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임의로 설정한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가 조직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개념을 차이 생산적 체계의 첫 번째 특성으로 설정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체계의 첫 번째 특성은 계열들을 이루어내는 조직화(organisation)에 있는 듯하다. 하나의 체계는 둘이나 그 이상의 복수적인 계열들을 기저로 삼아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각 계열은 자신을 이루는 항들 사이의 차이들에 의해 정의된다. 만일 우리가 계열들이 이러저러한 힘의 활동에 따라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소통을 통해 일군의 차이들은 다른 일군의 차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체계 안에서 차이들의 차이들이 구성되는 것이다.(constitue dans le système des différences de différences)84)
들뢰즈는 차이 생산적 체계에서 차이들이 구성되는 것을 조직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물론 차이들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복수의 차이들이 있어야 한다. ‘하나의 체계는 둘이나 그 이상의 복수적인 계열들을 기저로 삼아 구성되어야 한다.’ 차이 생산적 체계는 복수의 계열들로 구성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체계와 계열에 대해 판단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자를 공간적인 것으로서 사유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체계가 복수적인 계열들을 기저로 삼아 구성된다는 것이, 어떤 공간적인 체계가 있고, 그 공간의 부분들이 계열들을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85) 우리는 차이 생산적 체계와 체계를 구성하는 계열을, (우리가 앞에서 탐구했던 것처럼) 시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 그것은 분기하고 발산하는 계열들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동시성(simultanéité), 동시간성(contemporanéité), 공존성(coexistence)이다. … 계열들은 언제나 분화소(différenciant)를 통해 공존한다. … 현실적으로 매순간 계속 이어지는 현재나 계열들은 또한 어떤 공존 관계에 있다. 순수 과거(passé pur)나 잠재적 대상에 비추어 보면 상징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86)
들뢰즈가 계열들이 동시성, 동시간성, 공존성을 유지한다고 말할 때, 이는 공시적인 체계에서 그 체계를 구성하는 공간적 부분들의 계열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들뢰즈는 통시적인 체계에서 동시성, 동시간성, 공존성을 유지하는 계열이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 순수 과거와 잠재적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라는 존재운동으로부터 체계를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성으로부터 차이 생산적 체계를 파악할 때에만, 차이 생산적 체계의 조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체계의 계열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차이 생산적 체계에서 현재와 소통하고 있는 과거와 미래를 의미한다.
현재는 반복을 일으키는 어떤 것에 해당한다. 과거는 반복 자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래는 반복되는 것에 해당한다.87)
그래서 들뢰즈에게 조직화는 반복되는 차이들의 구성, ‘차이들의 차이들의 구성’이다. 역으로 구성은 반복을 차이들로 조직하는 것, 반복을 차이들의 차이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개체화하는 차이나 내생적 양상이 공통의 존재를 차이로 표현한다면, 들뢰즈에게서 구성은 공통의 존재를 차이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 구성하라는 유기체의 명법(impératifs d'un organisme à construire)에 비한다면 생명 안의 대립이나 모순, 그리고 장애와 욕구 등과 같은 부정적 형식은 … 이차적이거나 파생적이다.88)
우리는 이로부터 공통성과 공명에 대해 물어야 한다. 공통성은 분명히 일의적 존재의 토대이다. 그러나 공통성은 단지 토대일 뿐이다. 공통의 존재는 차이들간의 공명으로부터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으로부터 구성적 실천의 정치철학을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들뢰즈의 조직화 개념을 반복되는 차이들의 구성으로 판단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구성 개념이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의 공명의 정치학을 ‘기존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에서 공통적인 것을 차이나는 것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정식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우리가 들뢰즈의 긍정의 윤리학에서 공명의 정치철학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이 갖고 있었던 욕망, 즉 고립된 개체(개인)로 남아 있지 않으려는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까? 우리는 들뢰즈에게서 특정한 존재론을 토대로 하여 인식론으로부터 가치론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실천은 공통체를 이루어나가려는 실천과는 다르지 않을까? 이는 우리 독해의 한계인가? 아니면 우리의 욕망과는 달리, 들뢰즈의 실천은 우리가 추구하는 실천과는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차이와 반복』과 정치철학, 철학의 특이성
우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존재론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구해왔다. 우리가 이러한 탐구를 수행했던 이유는 『차이와 반복』에서 양자가 연결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이, 오늘날의 실천들에게도 많은 것을 밝혀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점은, 우리가 그 ‘선’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서 실천의 원리들을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역으로, 실천의 원리들을 직접적으로 도출할 수는 없더라도, 들뢰즈의 존재론이 어떠한 정치철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정치철학을 정식화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을 공명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기존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에서 공통적인 것을 차이나는 것으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공명’이라는 개념을 고집한 이유는, 그것이 공통적인 것을 차이나는 것으로 구성하려는 차이들 사이의 소통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의 그것과 과연 합치할 수 있을 것인가?89)
다만 우리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정치철학을 읽어낼 수 없다는 주장은 분명 옳지 않다는 점만을 확인하고,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역사의 철학도 영원성의 철학도 아니다. 철학은 반시대적이며, 그리고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철학이다.90)
물론 우리는, 오히려 들뢰즈 본인에게는 존재론과 정치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불필요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들뢰즈에게서 세계를 ‘해석’하는 것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되지는 않을까. 우리는 철학의 특이성이 철학을 다른 학문에 배타적인 영역으로 설정할 때 보증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철학의 특이성이 우리 삶의 아픈 부분을 밝혀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의 특이성은 그것이 ‘반시대적’이라는 데에 있다. 철학이 반시대적이라는 것은, 철학이 시대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오늘날의 실천들에 풍부한 지반을 형성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서울: 민음사, 2004), 447~448쪽.
2)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 Patton(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 xv,
3) 들뢰즈를 읽는 사람들에게, 들뢰즈의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는 경우에 따라서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사회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왜 굳이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와 관련된다. 아니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정치’라는 용어를, 왜 굳이 고집하는가와 관련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철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나아가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결코 소위 정치적인 것과 배제된 학문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모든 학문 활동을 정치적인 것과 연결시켜 여러 빼어난 탐구활동들을 폄하하려는 경향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에 함축된 정향성에 대한 판단이며, 한 존재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독자-연구자 개개인의 판단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철학이 관조활동으로 비춰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관조를 행하는 철학자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자신이 놓여 있는 역사를 결코 추상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추상적으로 표현된다고 느끼며, 스스로 관조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후대의 주석가들은, 선대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고민이 치열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는 이상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한 토대는 아닌가. 칸트의 이념(idea)은 실천이성의 자유를 보증하는 토대는 아닌가. 그렇다면 (앞으로 설명될) 들뢰즈의 이념(idea)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이정우는 『의미의 논리』역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한 논리와 해박한 철학사적 소양을 바탕으로 독특한 존재론의 세계를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 이해 가장 인상 깊은 사회-역사철학을 펼친 들뢰즈에게는 오늘날 ’철학자들 중의 철학자라‘는 최상의 찬사가 던져지고 있다 …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에 집약되어 있다.’(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서울: 한길사, 1999), 558쪽,).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정우는 들뢰즈의 존재론으로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를, 들뢰즈의 사회-역사철학으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를 배정한다. 아마 이러한 배정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정우가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를 설명하는 용어로 설정한 사회-역사철학이 그것에 대해 적절한 것이라면, 양자를 정치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할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들뢰즈의 존재론을 정치철학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삶’자체가 ‘정치’적인 것이 되고 있는 오늘, 들뢰즈의 사회-역사철학은 바로 정치철학일 수밖에 없다.
4) 오토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이기상 외 역(서울: 문예출판사, 1996), 69쪽, Heidegger, M., Sein und Zeit, p.326 재인용
5) Gilles, Deleuze, op. cit., p. xvi~xvii,
6) 이는 ‘이미지 없는 사유’인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논의가 진행되면서 밝혀질 것이다.
7) 그래서 만약 까뮈와 사르트르 이후에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대체했다고 하더라도, 실존주의자가 구조주의자에게 제기하는 반박들이, 그렇게 쉽게 논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들뢰즈, 위의 책, 17쪽.
9) 하나의 자동차에 백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고 하자. 부품 하나가 고장이 나서 다른 부품으로 그 부품을 대체 했다. 이때 원래의 자동차는 새로워진 자동차와 같은 자동차인가 다른 자동차인가. 다시 다른 하나의 부품이 고장이 나서 다른 부품으로 대체를 했다고 하자. 이제 부품 두 개가 바뀌어진 자동차는 원래의 자동차와 같은 자동차인가 다른 자동차인가. 백 개의 부품이 모두 고장이 나서 모두 새 부품으로 바꾸었다고 하자. 이때 부품이 모두 바뀐 자동차는 원래의 자동차와 같은 자동차인가 다른 자동차인가.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의 부품이 고장났을 때에는, 오직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부품만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래의 자동차는 부품이 모두 바뀐 자동차와 ‘다른 것’이지만 동시에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주어지고, 고정되어 있는 구조를 전제할 경우에, 우리는 바로 구조주의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차이를 포섭하는 가장 강력한 경향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존재에 앞서는 실존’이 제기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지극히 오래된 주체론의 망령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체’ 이후의 ‘주체성’은,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낳은 지적 효과를 빼놓고서는 얘기될 수 없을 것이다.
10) 들뢰즈, 같은 책, 400~401쪽,
11) 들뢰즈는 존재자의 지칭을 넘어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우선적으로 명제의 두 차원을 구분한다.(질 들뢰즈, 같은 책, 339쪽) 여기서 들뢰즈는 ‘표현’의 차원과 ‘지칭’의 차원을 나누고 표현의 차원에서는 명제가 이념적인 사태를 언표하고 표현한다고 말하며, 지칭의 차원에서는 명제가 언표되거나 표현된 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시하고 지칭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표현의 차원은 의미의 차원이며, 지칭의 차원은 참과 거짓의 차원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구분이 프레게의 의미의 두평면 이론과는 이질적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양평면 이론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표현 이름 술어 문장
뜻 개념 속성 명제
지시체 사물 이 속성을 지닌 사물들의 집합 진리치
(마이클, 코라도, 『분석철학 : 그 전통과 쟁점들』, 곽강제 역, (서울:서광사, 1985), 178쪽.)
들뢰즈는 ‘지칭 관계는 재인의 논리적 형식에 불과하다’(질 들뢰즈, 같은 책, 340쪽)고 말한다. 프레게의 두평면 이론은 이런 의미에서 첨예화된 재인의 논리적 형식으로 사유될 수 있을 것 같다.
12) 들뢰즈, 위의 책, 342~344쪽. 들뢰즈의 이념은 의미이자 동시에 무-의미이기 때문에, 들뢰즈의 존재는 ‘(비)-존재’이기도 하다. 인식론의 무-의미는 존재론의 (비)-존재와 연결된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양자의 관계가 분명해질 것이며, 이러한 인식론-존재론이 어떠한 가치론으로 연결되는지가 설명될 것이다.
13) 플라톤이 이상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아론을 도입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것이 플라톤의 『국가』의 논지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동인이 된다. 『국가』에서 플라톤이 논증하는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사실은 이차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즉 정의의 본질에 대한 질문, 正義의 定義에 대한 물음은 논의의 시작에서부터 과제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얘기하는 플라톤에 의해 이차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로부터 플라톤은 올바름의 이데아로 수직상승하며 이 올바름의 이데아로부터 개인-유기체와 국가-조직체 사이의 유비를 통해 이상국가의 신분편제가 정당화된다.
14) 들뢰즈, 위의 책, 558~559쪽,
15) 이는 아마도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일 것이다. 파리메니데스 이후 서양 존재론의 최고의 원리는, ‘동일률’이었다.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For it is the same thing to think and to be’이에 대한 번역으로는 또한 다음이 가능하다고 한다.‘that which it is possible to think is identical with that which can Be'(Ancilla to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trans. K. Freeman, (Oxford: OUP, 1956), p.42) ‘동일률’에 대한 논의로부터 하이데거는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존재와 존재론의 차이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사유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이 어디로부터 연유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철학하는 사유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경향인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로부터 시작된다. ‘대상은 알려져야 하며, 인식의 대상이어야 하며 그래서 의미함의 양상이 존재함의 양상에서부터 파악될 수 있기 위해 대상은 인식함의 양태 내에 있어야 한다. 인식함의 양태 위에서 비로소 존재함의 양태는 의미함의 양태를 규정할 수 있다.’(오토 페겔러, 위의 책, 22쪽., Heidegger, M., Die Kategorien-und Bedeutungslehre des Duns Scotust, p.136 재인용, 강조는 논자가 함.) 현대의 관념론적 존재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은 아마도 각각『존재와 시간』,『차이와 반복』에 의해 대표될 것이다. 차이-반복과 존재-시간은 같은 사태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용어 선정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에게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다음 강좌의 목표이다.
16) 들뢰즈, 위의 책, 560쪽,
17) 들뢰즈, 같은 곳,
18) 들뢰즈, 같은 책, 390쪽,
19) 들뢰즈도 지적하고 있듯이(질 들뢰즈, 같은 책, 618쪽) 앤디 워홀의 통조림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느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현대의 대중 소비 사회를 가장 통렬히 비판하는 예술이 된다. 그러나 위의 예는 단지 예술 작품을 통해서 유비적으로 무-의미와 의미의 관계를 생각해 본 것에 불과 하다. 무-의미와 의미의 관계를 차이 생산적 사유 체계 안에서 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이념의 구성 활동을 통해서 밝혀질 것이다.
20) 들뢰즈, 같은 책, 418쪽,
21) 들뢰즈, 같은 책, 94쪽,
22) 이들의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M.K. 뮤니츠, 『현대분석철학』, 박영태 역(서울: 서광사, 1997)에 설명되어 있다.
23) 이는 프레게와 러셀에게서는 그렇지 않지만, 콰인에게는 직접적인 탐구의 주제가 된다고 한다. ‘…논리 계산의 사용에서 포함되어진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양화가 적용되는 영역들의 성격과 내용, 존재와 동일성 같은 용어들의 의미, 양화된 문장들의 진리값에 관한 결정 가능성과 미결정 가능성의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많은 다른 주제들에 관하여 다양한 물음들을 제기하도록 직접 유도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철학의 어떤 전통적인 관심들, 특히 형이상학(존재론)과 명확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뮤니츠, 『현대분석철학』, 663쪽,)
24) 순수 잠재성은 미규정성된 것으로서, 규정가능성과 양화가능성에 상응한다.(질 들뢰즈, 위의 책, 375~378쪽 참조)
25) 이러한 규정의 절차가 미분화(differétiation)이며, 미분화는 상호적 규정과 질화 가능성에 상응한다.(질 들뢰즈, 같은 책, 378~382쪽 참조) 우리는 잠재적인 것을 규정하는 원리로서의 미분법이,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헤겔의 논리학을 극복하는 원리임을 확인할 것이며, 이를 통해 들뢰즈가 존재 규정에 있어서 부정이 상존하는 헤겔식의 변증법을 미분법을 통해서 극복함을 확인할 것이다, 이러한 극복은 헤겔식의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부정의 운동을 통한 가치 정립 대신에, 니체적 초인의 자기 긍정을 통한 가치 정립과 연결된다.
26) 이 절차가 (분화differéciation)이며, 이는 완결된 규정에 나아가 잠재력potentialité)상응한다.(질 들뢰즈, 같은 책, 382~386쪽 참조)
27) 들뢰즈, 위의 책, 473쪽.
28) 이때 무규정적인 즉자적 차이가 일차적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실천과 연결시켜보면, 차이에 주목하지 않고, 차이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어떠한 형태의 운동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는 없음을 말한다. 우리는 오늘날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해 말한다. 그 위기는 단지 가시적인 적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의 획득이라는 가시적인 목표가 있었을 때에는, 운동은 당위가 되어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을 대의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의가 달성되고 난 후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이 어떠한 식으로 나타났는지는, 노무현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민주화투쟁이 그 시대의 요구였으며, 따라서 그것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학생운동에 대해 더욱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날의 학생 운동의 위기는 운동 속에서 자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스스로를 종속시킬 수 있는 대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조직의 운영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위기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실천들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의 정치적 삶에서부터,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날의 학생 운동의 위기는 조직화의 문제에서부터 풀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무규정적인 ‘차이 그 자체’가 일차적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 이는 결코 차이들의 구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 우리가 들뢰즈에게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현실에서 차이들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문제는 결코 이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철학이 밝혀줄 수 없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특이성으로서의 특이성, 분산된 개인으로서 남아있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고립이 결국 우리의 정치적 투쟁을 폐기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적이고자 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조직화의 문제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조직화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는 이론을 실천에 종속시킬 때에는 결코 논구될 수 없을 것이다. 조직화는 실천의 지평에 따라 상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자발성을 전제한다. 실천은 단순히 이론의 수단이 아니다. 이론은 실천을 여는 무기이지만, 실천은 사회의 상이한 영역에서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실천을 이론의 그림자로부터 끄집어내라, 그것의 모든 자율성과 존엄성을 다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라.’(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 외 역(서울: 갈무리, 2004), 288쪽)
29) 들뢰즈, 위의 책, 583쪽.
30) 들뢰즈, 같은 책, 325쪽,
31) 들뢰즈, 위의 책, 356~358쪽.
32) 아울러 개념을 통한 규정을 통해서는 존재 규정에 있어서의 시간적 성격이 탈락되고 만다. 존재의 차이는 오직 시간적으로만 표현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시간을 중심에 놓고 전개되는 존재론이며, 이런 의미에서 『차이와 반복』은 『존재와 시간』의 구도와 일치한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작업하는 일이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잠정적인 목표이다.’(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서울: 까치출판사, 1998), 13쪽, 강조는 저자가 함)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시간론은 하이데거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된다. 논자는 그것이 훗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음 강좌의 중심 주제이다.
33) 들뢰즈, 같은 책, 80쪽,들뢰즈는 미분화-개체화(individiation)-극화-분화의 존재 운동을 설명한다.(질 들뢰즈, 같은 책, 533쪽) 『차이와 반복』533~534쪽, 543~544쪽, 588쪽을 중심으로 미분화-개체화-극화-분화의 도식화를 시도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 운동의 전체계 : 온-주름운동(complication)
존재 운동의 명칭 미분화 개체화 극화 화
존재 운동의 영역 이념 강도개체 시간공간 질연장
존재 운동의 성격 전-개체적 강도적 시공간적역동성 종적부분적
존재 운동의 특징 막-주름운동 안-주름운동 겹-주름운동 밖-주름운동
34) 들뢰즈, 같은 책, 150쪽,
35) 들뢰즈, 같은 책, 41쪽,
36) 마이클 하트, 앞의 책, p.71, G.W.F. Hegel, Science of Logic, trans. A.V. Miller(Oxford: OUP, 1977), p.177, 재인용,
37) 들뢰즈, 위의 책, 82쪽,
38) 들뢰즈, 『의미의 논리』, p.557.
39)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과 공간은 비실재적이고, 물질은 허상이며, 세계는 실제적으로 오직 정신으로만 구성되었다고 스스로 믿게 될 경우에 이상한 쾌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설픈 기간 동안에 나는 도제에서 장인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헤겔 철학 자체에서 혼동과 익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철학을 포기하게 되었다.’(M.K. 뮤니츠, 앞의 책, p.226, B. Russel, Portraits from Memory, p.22, 재인용) 우리는 주류 영미철학에서 헤겔이 어떻게 평가되었는지(그리고 평가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죽은 개’가 아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하는 것은, 헤겔이 (쇼펜하우어가 비난하는 것처럼) ‘허풍선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헤겔의 존재론이 갖는 필연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드러내고 그 문제들을 넘어서는 것은 헤겔과 같은 정도의 존재론적 사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결코 헤겔이 오늘날 밝혀주는 것이 없다고 얘기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들뢰즈를 따라서 헤겔을 비판한다면, 이는 철학의 고유성이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논구되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 헤겔을 부정하고 니체를 긍정하는 이유를 참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 재인(récognition)을 위해 벌이는 자발적인 싸움들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여기서 싸움은 오로지 어떤 상식 아래에서 확립된 가치들을 둘러싸고만 벌어질 뿐이며, 통용되는 가치들(명예, 부, 권력 등)을 차지하거나 주무르기 위해 벌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의식들이 벌이는 싸움이자 보편적 본성의 사유(Cogitatio natura universalis)에 의해 구성된 우승컵을 획득하고 재인의 우승컵과 재현의 우승컵을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이상한 싸움이다. 니체는 자신이 힘의 의지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런 싸움이 거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헤겔뿐 아니라 칸트까지도 “철학의 노동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의 철학이 이 지울 수 없는 재인의 모델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질 들뢰즈, 위의 책, 304쪽)
40)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이기웅 역(서울: 그린비, 2005), 18쪽.
41) 들뢰즈, 위의 책, 603쪽,
42) 들뢰즈, 같은 책, 368쪽,
43) 들뢰즈, 같은 책, 362쪽.
44) 들뢰즈, 같은 책, 563~564쪽.
45) 들뢰즈, 같은 책, 398쪽,
46) 들뢰즈, 같은 책, 399~400쪽, 강조는 논자가 함.
47) 『대담』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한다. ‘내가 철학사의 규범들을 따라 가장 엄격하게 연구한 대상은 스피노자이다. 그러나 당신이 스피노자를 읽을 때마다 당신의 등을 떠미는 기류의 효과를, 당신을 태우는 마녀의 빗자루의 효과를 나에게 가장 많이 낸 것 또한 스피노자이다. 사람들을 스피노자를 이해하기 시작하지조차 못했으며,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 외 역(서울: 인간사랑 출판사, 2002), p.8, Gilles Deleuze, Dialogues(Paris: Flammation, 1977), p.22 재인용, 이 글은 역자 서문에서 인용했다.)
48) 들뢰즈, 『차이와 반복』, 307쪽, 강조는 논자가 함.
49) 훗설에게서 시작하는 20세기 철학 사조 중 하나인 ‘현상학’은, 철학적 사변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20세기 철학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초월주의에 대해서 말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몇몇 칸트주의, 특히 마르부르크 학파에서 발전된 칸트주의와 더불어 훗설과 구성적 사고의 커다란 발전, 즉 현상학적인 초월적 상상에 관한 이론들 속에 존재하는 구성에 대한 향수이다. 예를 들면, 어떤 시기에 나는 메를로-퐁티의 사고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다. 내가 매개의 사고를 대신하는 가능한 대안들 중 하나로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칸트주의와 그 방향으로의 발전들이다.’(안토니오 네그리, 앞의 책, 214쪽, 강조는 저자가 함.) 들뢰즈의 작업은 후설에서 시작하여, 메를로-퐁티와 하이데거에 의해서 각각 상이한 형태로 발전하는 현상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후설은 상식적인 ‘존재정립’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경험, 사유 등의) 존재 정립은 오류일 수 있고, 사물들은 실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서 자아의 후속하는 비판적 판단이거나 혹은 타자의 판단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때리는 것도, 춤추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닐 수 있다. … 세계는 나의 환경세계이다. 이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나의 그리고 우리의 지향적인 주제적 삶의 세계이다.’(E., Husserl,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zweites Buch Phanomenologische Untersuchungen zur Konstitutino(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52), p.218,) 훗설의 현상학이 상식적 실재론과 (로크에 의해 대표되는) 대상에 대한 ‘재현’이론을 반박하고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점은 부정될 수 없으며, 20세기 철학에 훗설이 미친 영향도 부정될 수 없다.(심지어 사르트르의『존재와 무』역시, 그 부재는 ‘현상학적 존재론 에세이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이다.) 어떤 의미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분명히 ‘현상학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들뢰즈가 훗설적 의미에서 ‘초험적 현상학적 환원’을 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물론 ‘초험적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서는 더욱 상세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다만 다음과 같은 논점만을 밝혀두고자 한다. 과연 존재론적 사변을 펼치면서, ‘초험적 현상학적 환원’을 거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상학적 환원을 거치지 않고서 상식적 실재론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할까? 현상학적 환원을 거치지 않고서 이념론이 구성될 수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환원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선입견’을 버린다면, 이 주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과 훗설 후기의 ‘발생적 현상학’은 어떤 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이는 훗설 초기의 ‘정적 현상학’은 그것의 객관화 지향성으로 인해 훗설 본인이 새롭게 탐구를 수행하도록 하는 계기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비판 대상으로서, 하이데거가 훗설과 결별하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남인,『현상학과 해석학 ; 후썰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지금의 논의와 관련하여) 들뢰즈에게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한, 사태 자체의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를 훗설적 의미에서 ‘현상학자’라고 하더라도, 바로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들뢰즈는 현상학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들뢰즈가 훗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한 부인은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가 흄에게서, 니체에게서, 스피노자에게서, 푸르스트에게서, 아니 심지어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부인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선대의 철학자를 선별할 때(따라서 이 선별은 어떤 한 철학자의 작업 전부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선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일 뿐이다. (아울러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도 들뢰즈가 행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다시금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의 선별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들뢰즈를 선별할 것인가?...’)
50) 들뢰즈, 위의 책, 348쪽,
51) 들뢰즈, 같은 책, 361쪽,
52) 들뢰즈, 같은 책, 414쪽,
53) 들뢰즈, 같은 책, 140쪽,
54) 김정현,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서울: 책세상, 2006), 46쪽,
55) 이는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성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가치법칙이 법칙으로써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는 그것의 발생을 탐구할 것이 요구된다. 가치의 가치로서의 메타가치는 가치론을 형이상학과 분리시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한다.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자본론』으로부터 존재론을 제거할 때에만 가능한데, 이러한 제거는 『자본론』의 정치적 독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러한 독해는 바로 경제학을 문제제기적인 것으로서 파악하지 않고, 주어져 있는 틀로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 고유한 의미의 경제학적인 것은 결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해석을 요구하는 어떤 미분적 잠재성을 지칭하고, 이 잠재성을 언제나 자신의 현실화 형식들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해의 경우들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어떤 테마, 어떤 문제제기적인 것이다.’(들뢰즈, 위의 책, 406쪽,)
56) 들뢰즈, 위의 책, 143쪽,
57) 들뢰즈, 같은 책, 40쪽,
58) 들뢰즈, 같은 책, 20쪽,
59) 마이클 하트, 앞의 책, 22~23쪽, 위의 인용문 가운데 부분(“ ” 부분)은 G.W.F. Hegel, op. cit., p.188 재인용,
60)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이경신 역(서울: 민음사, 1998), 214쪽.
61) 들뢰즈, 『차이와 반복』, 273쪽.
62) 들뢰즈, 같은 책, 159쪽
63) 하트, 위의 책, 32쪽,
64)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는 결코 특이성이 개체(개인)로, 보편성이 사회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작업은 들뢰즈에게서 존재론과 정치철학을 연결하기 위한 ‘선’을 찾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65) 들뢰즈, 위의 책, 34쪽.
66) 들뢰즈, 같은 책, 39쪽,
67) 들뢰즈, 같은 책, 113~114쪽.
68) 들뢰즈, 같은 책, 580~581쪽,
69) 들뢰즈, 같은 책, 408쪽,
70) 들뢰즈, 같은 책, 504쪽,
71)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근본적인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들뢰즈에게서 공명을 공통의 존재를 구성하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같은 것으로 생성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모든 것은 동등하고 공통적인 존재 안에서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능동적인 구성력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능동적인 구성력을 공통의 존재를 구성하려는 힘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이 과제는 <조직화의 문제>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72) 여기서는 들뢰즈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예술이 가장 대표적인 시뮬라크르임은 분명하다. 위의 인용문에서 밝히고 들뢰즈도 밝히고 있듯이, ‘예술은 시뮬라크르이고, 복사물들을 시뮬라크르들로 뒤바꾼다.’ 물론 이 두 번째 <중간 논평>에서는 (예술 일반과는 다른) 현대 예술의 특이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들뢰즈가 예술이 시뮬라크르라고 했을 때, 들뢰즈는 무엇보다도 현대 예술(들뢰즈가 구체적으로 들고 있는 예는 ‘팝아트’이다. 들뢰즈는 현대 예술의 하나인 팝아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화 부분에서 팝아트가 모사, 모사의 모사 등등을 밀고 나가 결국 복사물이 전복되고 시뮬라크르로 변하게 되는 그 극단의 지점에까지 이르는 방식을 보라.’ 들뢰즈,, 같은 책, 613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73) 들뢰즈, 같은 책, 612~613쪽,
74) 들뢰즈, 같은 책, 624쪽, 강조는 논자. 우리는 이러한 차이 생산적 체계가 시뮬라크르라고 하여 우리의 실재적 삶이 거짓이라는 것을 들뢰즈가 주장한다고서는 안된다. 들뢰즈가 개념적 차이에 대해 차이의 개념을 주장할 때, 들뢰즈가 목표로 삼는 것은 분명 헤겔에 대한 적대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 반-헤겔주의 … 차이와 반복이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차이는 동일자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마침내 모순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파악하든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한다. 그러나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들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현대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이다.’(질 들뢰즈, 같은 책, 17~18쪽), 들뢰즈가 헤겔과의 적대를 공공연히 표방하면서, 우리에게 현대가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말할 때, 들뢰즈는 비록 재현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사유속에서 그것을 폐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75)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야 한다. 철학의 모든 문제는 이념을 우리의 일상적 삶으로 끌어들이는데 있다! 우리가 철학을 위와 같이 정식화하는 한에서, 철학은 실천이 된다. 철학은 실천이 되지만, 이때의 실천은 철학을 삶에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지 이론 내에서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는 이론의 투쟁이 불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가장 엄밀한 논증과 가장 첨예한 반박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토록 엄밀했었고, 그토록 첨예했었다면, 그것은 텍스트와 삶을 분리시켰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적을 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을 성숙함이라고 얘기하는 것, 이는 엄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가? 첨예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가? 철학은 관조로부터 발전하지 않는다. 철학은 오직 적대로부터 발전한다. 그러나 철학이 적대를 표방하는 것은 결코 이론안에서의 헤게모니 다툼이 아니다. 철학을 삶에 위치시키는 것, 이념론을 뜬구름잡는 얘기라고 폐기처분하지 않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을 투쟁속에 위치시키는 것, 그래서 바로 철학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76)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77)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야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은 (예술을 포함한) 삶 자체이고, 우리의 삶은 이미 항상 정치적이다. 우리는 공통성을 통해 우리의 특이한 삶과 인류의 보편적인 삶을 매개하지 않고서 사유한다. 그러나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우리의 특이한 삶을 지양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다만 이 공통성은 오직 전지구화된 자본을 가능하게 하고, 전지구화된 자본이 가능하게 하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임을 밝혀둔다. 이 주제는 독립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특이한 삶의 공통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결코 인간 ‘유’의 공통성과 같은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특이한 삶이 이미 항상 보편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특이성을 보편성에서 폐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기가 불가능하게 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특이한 존재의 잠재성을 갖기 때문이다. 특수성은 매개를 통해 일반성에서 지양된다. 물론 매개를 통한 지양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재성의 영역에 대해 더욱 탐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78) 그러나 우리는 이때 우리가 정식화한 정치철학의 의미를 사용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의 정식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의 정식,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에서 공통적인 것’에서는 구성적 실천이 탈각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의 정식에서는 실천이 탈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실천이 탈각되어 있는 정치철학이 가치론일 수 있는가? 공통성을 구성하려는 것이 실천이라면, 우리의 정식은 분명 결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조직화의 문제>에서 살펴볼 것이다.
79) 들뢰즈, 같은 책, 633쪽.
80) 들뢰즈, 같은 책, 102쪽,
81)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가 가능성과 실재성 대신에 잠재성과 현실성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들뢰즈가 가능성과 실재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마이농(A. Meinong)의 탐구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마이농에 따르면, 실존하는 켄타우로스(existent Kentauros)가 이외에 또 한 종류의 켄타우로스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가능한 켄타우로스(possible Kentauros)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켄타우로스는 단 한가지 점, 즉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말고는 실존하는 켄타우로스와 완전히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실존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것들은 실존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가능한 것들이다. 이 말이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could be)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마이농에 따르면 그러한 것들은 정말 있되, 가능세계(realm of the possible)에 있는 것이다. 이 가능세계는 실존하는 것과 순전히 가능할 뿐인 것 두 가지를 다 포괄한다.’(마이클 코라도, 『분석철학 : 그 전통과 쟁점들』, 곽강제 역(서울: 서광사, 1986), 49쪽.)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직접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을 중심으로 문제를 설정할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존을 어떤 급작스러운 출현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실존을 ‘전부 아니면 무(無)’라는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또 실존을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어떤 순수한 활동, 도약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실존하지 않는 것이 이미 가능하고 개념 속에 자리한다면, 또 개념이 가능성으로 부여한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면, 실존하는 것과 실존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들뢰즈, 위의 책, 455쪽.)
82) 들뢰즈, 같은 책, 108쪽.
83) 들뢰즈, 같은 책, 106쪽.
84) 들뢰즈, 같은 책, 264~265쪽,
85) 예를 들어, 불가사리를 체계라고 생각하고 불가사리의 다섯 개의 다리를 그 체계의 계열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단지 공간적인 체계만을 가정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다.
86) 들뢰즈, 같은 책, 278쪽,
87) 들뢰즈, 같은 책, 216쪽.
88) 들뢰즈, 같은 책, 454쪽.
89) 이 자리에서 논자의 부족함을 고백해야만 될 것 같다. 위의 물음은 논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만 했다. 들뢰즈에게서 존재론과 정치철학의 관계를 물으면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를 독해하지 않은 채 이 글을 작성했기 때문에, 이 글은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논자는 이 글에서 논자가 밝힌 들뢰즈의 정치철학에 대한 (나름의) 정식이,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마루』를 독해하지 않은 채 『차이와 반복』만을 주목하여 나름대로 구성한 정식으로서, 그 자체로 반쪽짜리 정식이고, 더군다나 논자가『차이와 반복』을 오독했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자는 『차이와 반복』에서 이후의 정치철학으로의 발전을 향한 ‘선’들을 읽어낼 수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논자는 그 ‘선’에 대한 판단이 논자와 다를 수 있으며, 논자의 독해와는 다른 독해(예를 들어, 『차이와 반복』에 대한 비정치적 독해)도 유의미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울러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논자는 이 글을 작성하면서 책임감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의무와 무엇을 향한 자유는 역설적이지만,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글을 작성할 기회를 주신 다중네트워크센터의 모든 구성넷터에게,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논평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90) 들뢰즈, 같은 책,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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