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알뛰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0. 7. 28. 11:16

알뛰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연구

Althusser on Ideology: a study

 

成均館大學校

 

姜 範 碩

 

 

 

Ⅰ. 머리말

 

1. 문제설정

 

마르크스주의는 전능한가? 마르크주의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이 질문형식의 단순성처럼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위상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전능하다면 마르크스 이론의 내적인 타당성과 진리치는 의당 변화무쌍한 현실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과정들 중 하나를 이루듯이 마르크스주의 철학 또한 현실의 한 과정을 이룬다면 마르크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란 “현실의 운동”, 즉 계급적 세력균형의 부차적인 표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인 실천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레닌의 주장은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1) 실용주의와 여타의 경험론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려 한 레닌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의 주장을 분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때, 그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러저러한 현실들을 장악하고 있는 위치들을 표현하는” 상이한 “주제”들인 이론-이데올로기-현실을 서로간에 일정한 위계질서에 의해서 종속되거나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오류에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지위에 대한 소박한 이해에 기반한다. 이론의 이중적인 지위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잘 확인된다. 그는 자신의 저작 - ?군주론? -을 현실에 대한 정치적 이론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정세 속에 각인된 하나의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중적인 지위를 부여한다.2)

알뛰세는 이를 마르크스에게도 적용한다. 알뛰세에 따르면,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과 ?공산당 선언?3)에서 사회구성체의 구조와 전반적인 정세와 관련해서 자신의 이론을 현실을 설명하는 설명수단으로서 제시한다. 즉 이론형태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위치지운다. 한편, 마르크스는 ?1859년 서문?에서 자신의 사상을 이데올로기 투쟁 안에 위치짓기도 한다. 그 이데올로기 투쟁 안에서 사람들은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투쟁하게 되는데”, 마르크스주의 철학내지 이론 또한 더 이상 주어진 전체의 설명원리로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투쟁에서 그것의 가능한 효과로서만 고려케 된다. 따라서 알뛰세는 관념은 이중적인 위치를 가지며, 현실에서의 실천적 가능성은 이데올로기적 맥락 안에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즉 관념의 “이론적 형태”가 실천적 유효성과 효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로 변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의 평가 척도는 그의 이론의 유물론적인 내용 자체라기 보다는 “그 곳에서 이런 사상들이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과 형태와 한계”4)에 의존한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평가척도는 그 이론의 유물론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그 속에서 이런 사상들이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과 형태와 한계에 대한 날카롭고 actue 실천적인 의식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상들은 토픽에 in the topography 이중적으로 각인된다. 따라서 사상이 - 아무리 그것이 진리이고 공식적으로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 역사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은 결코 개인 속에서 아니라, 오직 계급투쟁에서 채택된 대중 이데올로기의 형태로서일 뿐이라는 본질적인 테제가 제기되는 것이다.(SPS, 275)

 

알뛰세는 철학이 만일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구체성과 효과를 획득하고자 한다면 “전반적 현실의 한정되고 제한된 장소에 위치를 설정시킴으로써” 대중속으로 전화되는 이론적 존재양식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르크스에게서 무엇이 공백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그렇게 경계해 마지 않았던 “이념의 전능성”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든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이론에 공백이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뛰세는 그러한 공백의 효과이기도 하고 그러한 공백을 “위기”라는 형태로 가시화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및 전세계적 차원에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적 전통 안에 있는 계급투쟁의 혁명적 조직들이 처해 있는 여러 곤란과 난국에 관한 현상이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성이 그것에 의해 저해되고 있고, 또 그 운동의 역사 자체가, 고로 그 전통적 전략과 실천 형태가 의문시되고 있다. 제국주의가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순간에, 또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투쟁이 전례없이 고조된 순간에, 역설적이게도 각국 공산당들은 각자 별개의 길을 걷고 있다. 상이한 전략과 실천형태들 사이의 모순이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심각한 위기의 단지 이차적인 측면일 뿐이다.5)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은 마르크스주의가 기원에서는 올바랐는데 사후에 그 적용이 잘못된다는 식으로, 혹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역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투쟁과 그 결과들에 대한 가혹한 시련을 겪지 않은 순수한 이론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역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사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닌이 “일괴암”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순적인 것, 난점과 모순과 공백을 가지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알뛰세에게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과 공백 그리고 난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해서 아는 것은 과학이 발전하는 한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새로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되풀이하기만 하는 과학은 죽은 과학이며,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고정된 도그마이다. 과학은 그것의 발전 안에서만, 즉 그 발견으로부터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바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결된 과학을 completed science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또 어떤 새로운 발견이라는 원리를 의심하게 되는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6)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임을 스스로 자임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초기 조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문시해야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최초의 형태와 끊임없는 단절을 이루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가 “순수하고” 완결된 것이라는 가정은 마르크스주의가 그 탄생부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중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벗어남은 하나의 단절이지만 이것은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이다.

이러한 투쟁의 하나가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가지는 난점과 공백을 확인하는 것이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주의에 두 가지 난점과 공백이 존재한다고 본다.

첫번째 난점은, ?자본?에서 잉여가치를 양화시키려는 마르크스의 서술을 착취에 대한 완전한 이론으로 간주할 위험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자본주의적 착취는 잉여가치의 착취로 나타나는데, 잉여가치는 총생산물에서 이전된 가치보존 부분을 빼고, 남은 부분인 산노동의 산물에서 노동력 상품의 값인 가변자본을 빼서 계산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착취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자본?의 과학적인 성격을 자연과학적인 실증, 즉 양화(계량화)에 입각하여 구성하려 한다. 착취와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상품가치(임금)를 둘러싸고 벌어지며 착취와 노동자의 투쟁은 임금의 결정을 위한 경제적이고 자생적인 영역에 제한되며, 그 결과 노동임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제투쟁과 자본주의적 관계를 철폐하기 위한 정치투쟁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의 산술화에 대한 그릇된 기대는 “노동조건과 재생산 조건”을 추상화한다고 본다. 알뛰세는 “재생산 조건”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와 달리 단지 경제적인 임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라고 본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에 적합한 노동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에게 계급투쟁의 영역은 확장된다. 하지만 그 확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의 발전이 요구된다. 그 발전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가지고 있는 환원주의적인 요소와의 단절할 것을 강제하며, 경제 이외의 것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의 발전을 요구한다.

 

착취와, 노동력에 대한 이런 류의 제한된 관념(전자는 간단한 산수문제로, 후자는 간단한 상품으로)이, 계급투쟁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라는, 과제의 고전적인 분화에 부분적으로 기여하고, 따라서 각각의 투쟁형태에 대한 제한된 관념을 가져와서,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노동자계급 및 인민대중의 투쟁의 확장을 가로막기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것이다.(Crisis of Marxism, 국역, p.69.)

 

첫번째 난점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알뛰세는 그러한 난점의 이유를 마르크스주의 방법의 부재로 본다. 즉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환원주의 내지 실증주의에 오염되어온 긴 역사에 비교해 볼때, 마르크스주의 철학 특히 변증법에 관한 고찰은 중요하다. 마르크스 자신의 방법의 특수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과 헤겔의 변증법의 차이를 “신비한 껍질을 벗겨내서 합리적 알맹이를 꺼내는 것”, “거꾸로 선 변증법을 바로 세우는 것 Umstüpen”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헤겔 체계에서 형식/내용, 체계/방법을 구분해서 그 합리적 핵심을 추출한다는 것은 그러한 선언적인 주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알뛰세는 이러한 점에 착목해서 “헤겔 변증법이 헤겔적이기를 그치고 ‘추출’이라는 단순한 기적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FM.91) 따라서 그에게는 헤겔의 방법(변증법)과 마르크스의 그것은 그 구조에 있어서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글자 그대로 취하기에는 너무 도식적이고, 철저히 숙고하기에는 너무 애매 모호한 몇 개의 공식”에 머무르고 있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다른 구조에 입각한 방법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전자와 후자의 난점들은 서로가 각각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작용한다. 현실의 영역에서 계급투쟁과 착취가 경제적 실천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여러 실천들과 더불어 복잡하게 결정된다는 알뛰세의 주장은 이론적인 반-환원주의와 반-본질주의를 함축한다. 알뛰세는 전자를 그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밝히려고 하며, 후자를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종별성 문제를 통해서 해결하려 한다.

본 논문의 주제는 후자인 그의 이데올로기론이다. 알뛰세는 실재를 “그릇되게” 반영하는 관념체계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전적인 주장을 벗어나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실천, 그것도 고유한 물질성을 가지는 “사회적인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그의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허위 의식”으로 지칭하는 고전적인 정의를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되나, 지식과정 내부의 이데올로기와 지식과정 외부의 이데올로기, 대중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로서의 이데올로기의 관계의 모호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2. 논문의 구성

 

본 논문은 순서와 내용상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1. 알뛰세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과학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지식 일반 중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구획짓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의 개입방식의 차이는 그의 저작에서의 철학의 지위와 관련해서 전기와 -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 후기 - ?레닌과 철학? 으로 나누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구분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획하는 방식의 변화와 연관되는데, 전기에서 그러한 작업는 실증주의와 진화주의로 채색되어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차이”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후기에서 그의 작업은 전기에 지식과정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철학을 구성하려고 한 시도가 실상 기존에 존재했던 변증법적 유물론의 연장이었음을 자기비판하고, 철학은 그 본성상 과학이나 정치로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철학이 고유의 과학적인 대상과 (논증 가능 한)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개념과는 상이한 철학적인 범주를 제시하고 그 범주의 역할과 더불어 소멸하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2. 알뛰세는 이데올로기가 두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데, 하나는 지식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외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둘의 차이와 더불어 기능의 동일성인데, 그것은 우선 주체범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목적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방법의 인식론적인 기초로서 “주체”라는 범주를 비판하는 알뛰세는 그러한 인식론적인 “구성적” 주체에 기반한 이론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식과정 외부에서 이러한 주체범주는 오히려 다양하고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개인들을 사회적인 생산에 적합하도록 “자유로운”주체로 구성한다. 이처럼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알뛰세에게서 “이데올로기적인 실천” 즉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이다.

이러한 기능적인 동일성과 더불어서 폐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둘은 동형적이다. 외적인 보증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주체 구성작업은 언제나 지배적인 관계의 자명한 “진리 Truth”라는 가상하에 유지하려 하고, 그 지배적인 관계의 “자명성”이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통일성”으로부터 주체의 구성은 확보된다.

3. 이러한 그의 논의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의 함의를 일정 정도 고수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한 알뛰세의 논의인데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관념”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구체적인 “실행”, “제도”, “장치”들 속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있어왔던 대중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긍정적이고 경험적인 연구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Ⅱ.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의 인식론적인 기초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이론을 고찰하기 이전에 그의 인식론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의 기초에는 사회를 분석하는 도구로서의 변증법에 대한 알뛰세의 독창적인 시도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전도”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의 과학적 성격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알뛰세가 보기에 “헤겔을 전도한다.”라는 마르크스의 기획은 그다지 과학적인 문제 설정은 아니다. 알뛰세는 마르크스가 헤겔을 “전도 inversion” 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인 문제 설정의 지위로 격상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실지로는 헤겔의 영향하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그 이유를 전도개념의 모호성에서 찾는다.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이 전도된 채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전도 umstülpen 시켜야 한다.(MEW.23.S,26) 그러나 알뛰세는 이러한 “전도”라는 개념으로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특수성을 개념화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의 대상을 뒤집는다고 그 대상의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헤겔의 변증법의 구조를 변형시키지 않은 채로 마르크스주의의 특수성을 진술하는 전도개념은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며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가치”(PH.172)를 지니지 못하는 단지 세계관적인 차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7) 따라서 마르크스의 방법이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이상 “마르크스가 리카르도에 헤겔을 적용”8)했다는 식이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에 “작용을 가해서 work on” , 전화 transformation 시켜야 된다.

마르크스는 고전 경제학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범주들에 대해 비역사적, 영구적인 범주들로 표현한 반면, 자신은 이 범주들의 성질, 상대성을 폭로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역사적으로 규정한다고 주장한다.9) 알뛰세는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이것을 개념화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는 범주의 역사성의 중요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헤겔은 “운동하는 스피노자”가 될 것이고, 마르크스 자신은 “운동하는 리카르도”로 정의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전도” 개념 대신 “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가를 알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내적 구조의 차이가 지적되어야 한다. 알뛰세는 그러기 위해서 헤겔의 “총체성” Totalität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헤겔의 “총체성” 개념은 하나의 중심 혹은 본질을 갖는 원환적 구조이기에 이 원안에 있는 모든 현상을 포괄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이 포괄된 부분들은 총체성을 표현하고 총체성은 부분들로 자신들을 표현한다. 따라서 단순한 원리의 통일성을 중심에 두는 헤겔의 총체성 개념에서 존재하는 차이란 곧 부정될 성질의 것이다. “헤겔적인 총체성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구체적인 차이들은 - 이러한 총체성 속에서 가시적인 영역(시민사회, 국가, 종교, 철학)들을 포함하는, 그것들이 긍정 affirmed 되자마자 부정된다.(FM.203)” 이처럼 헤겔의 체계 속에서 모든 차이들은 부정되며 그것들은 서로간에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무차별적으로 간주된다. 알뛰세는 헤겔적인 총체성 개념을 그런 이유로 “표현적 총체성(FM.202-204, RC.248-249)”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도된 관념변증법의 형태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선형적인” 경제주의와 진화주의이다. 이 이론들에서 “전도”개념이 개입함으로써 달라지는 유일한 차이는 이념의 연속적 계기 대신에 내적인 동일률로서 경제 또는 물질의 전개와 발전이 전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본질적 원리의 외부에 현존하는 요소들은 전체의 부분이며 결국 그것으로 환원 가능하다.

알뛰세는 이에 반대하여 마르크스의 총체성 개념은 하나의 기원이나 전체를 상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에 존재하는 각각의 심급들은 모두 하나의 본질적인 심급instance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구조는 단일한 본질로 환원할 수 없고 여러 심급, 실천들이 서로간에 결합하는 양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이미 주어진 tou jours-déja-donné 복잡한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를 이루는 것은 “인간 실천(경제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 이론적 실천)의 서로 구별되는 수준들”이다. 이러한 각각의 수준들은 “동일한 유형의 역사적인 시간”을 갖지 않는다.

 

전체의 상이한 각각의 수준들은 동일한 유형의 역사적 존재10)를 가지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이들 각각의 수준에 대해 하나의 독자적인 시간, 즉 상호의존 속에서도 다른 수준들의 “시간”에 대해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하나의 고유한 시간 a percular time 을 지정해야 한다.(RC.p.99.)

 

“각각의 수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시간”을 가진다고 해서, 이 “각각의 수준들이 전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다양한 영역들로 분할”되는 상대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성을 복합성으로 대치함으로써 빠지기 쉬운 다원주의로부터 알뛰세가 벗어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개념이 각각의 모순들의 “불균등 발전”이다. 다양한 모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 모순들의 구조에 대한 지식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구조에 대해서 지식을 주는 것은 그 모순들의 불균등을 이루는 그 모순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domination - surbodination 의 관계이다.

 

하나의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모순이 특징지워지는 그러한 복합성이 구조화된 통일성이며, 이러한 구조는 모순들 간의 지시된 지배-종속관계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하나의 모순의 다른 모순들에 대한 지배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수집물 속에서 다양한 모순들의 우연적 분포의 결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지배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복합성의 본질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복합성이 그 본질적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지배를 함축하는 까닭이다.(FM,p.201)

지배의 관계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결정의 문제에 대해서 사고케 한다. 만약에 알뛰세에게서도 결정의 문제가 결과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의 결정으로 사고된다면 그의 결정은 기존의 “선형적 인과성11)”의 범주에로 되돌아오고 만다. 선형적 인과성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사물을 그 내적인 부분과 외적인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고 외적인 부분을 결과나 현상으로 내적인 부분을 원인이나 본질로 설정한다.12) 이것은 기간의 토대-상부구조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토대-상부구조론은 토대를 원인이나 본질로 설정하고 그 외적인 현상들 - 이데올로기, 법, 정치 등을 - 이 그것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이는 경제를 주요한 모순으로 보고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부차적인 모순으로 설정하여 그 주요 모순의 현상으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FM,p.205) 하지만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순수한 현상이 아니라 생산력의 존재조건이듯이, 상부구조는 구조의 순수한 현상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조건이다. 따라서 모순의 복수성을 승인한다는 것은 그 중의 하나를 본질로 보고 나머지를 현상으로 보거나 균등한 요소들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총체는 그러한 모순들의 “중층결정 surdetermination”에 의해서 규정되어 진다. 중층결정이란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이 상호 독립적임과 동시에 상호 의존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조건이 모순 자체 내에 반영된다는 것, 복잡한 전체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분절된 지배 내 구조가 각각의 모순 내에 반영된다는 것, 바로 거기에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심오한 특징이 있으며, 최근 내가 “중층결정”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FM.p.206)

 

따라서 이제 “고유한 시간을” 가진 상이한 실천들 중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위치를 선험적으로 부여받을 수는 없다. 또한 어느 한 실천이 지배적인 실천이 된다하더라도 이 지배적인 실천은 다른 실천들과 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천들을 그 안에 반영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이론은 더이상 경제적 수준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경제적 실천의 위치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알뛰세는 여러 수준들 가운데 어떤 수준이 지배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경제적 수준 혹은 실천이라고 본다. 따라서 혁명적 변화는 경제적 수준 안에서 발생하는 생산력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 간의 모순으로부터 파생되는 단순한 형태의 경제적 결정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적 변화란 사회구성체의 각 수준에 고유한 상이한 모순들이 응축condensation 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여러 수준들 가운데 한 수준의 지배 속에서 표출된다.

 

 

 

 

 

Ⅲ. 알뛰세의 이데올로기 개념.

 

이데올로기론은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분석에서 가장 간과되어 온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중요성과 역할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이론이 형성되지 못하게 한 장애요인들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샹탈 무프는 알뛰세야말로 기간에 “경제주의”에 의해서 제공되어 온 “환원주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넘어설 “반환원주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의 원리들을 제공한다고 말한다.13)

 

모순들의 과잉결정으로서의 구체적인 것 The concrete 에 관한 개념. 나는 각각의 국면을 단일한 모순의 자동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환원시키고 그 결과 현재적인 것을 단선적이면서 미리 규정된 발전에 있어서의 하나의 추상적이고 필연적인 계기로 환원시키는 헤겔주의적 유형의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것에 대한 분석에서 국면 개념의 우위성을 두고, 추상적으로는 모든 국면을 그 각각의 모순들이 다른 모순들과 개념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사고될 수 있는, 모순들의 과잉결정으로 생각하는 알뛰세의 개념을 수긍한다.14)

 

 

하지만 모든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를 단지 경제에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특히 “상부구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인 루카치와 코르쉬는 “부수현상주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 해석들에서는 여전히 계급환원주의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경제주의와 완전한 단절을 하지는 못했다. 이제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해석”의 자원을 제공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 그의 해석을 검토하고 알뛰세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1.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에, 사상이 역사에 미치는 힘을 조금도 부정한 적이 없다. 그가 부정한 것은 다만 그런 의식이나 사상이 물질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채로 실재하거나 세계를 지배한다는 관념론이었으며, 또한 물질적 변이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실재가 될 수 없다고 보는 낡은 유물론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런 양자를 허구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로 본다.(관념론 비판) 이런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를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이나 프랑스 유물론의 어떤 교설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의 정상적인 확립 과정에 별다른 역할을 못했으며 단지 뒤늦은 해석에 연연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조소로 대신 표현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상들의 관계가 독립적인 힘을 발휘할 때도 마르크스는 이를 일컬어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따라서 이런 이데올로기적 관계는 현실의 단순한 은폐나 오도 이상이다. 알뛰세가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상 이런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후자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은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15) 따라서 알뛰세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이해하면서 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주목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1-1.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원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마르크스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립적이지 않은, 물적 관계의 반영으로서 이해된다. 사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마르크스 자신에게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반영 Reflexe, 반향 Echos, 환영 Nebelbildungen, 승화물 Sublimate”등과 같은 전혀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은유(MEW.3.s,26)로 종종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의식일반을 이러한 은유로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념, 표상, 의식의 생산은 우선 인간들의 물질적 활동과 교류, 현실적인 삶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얽혀있다. 인간들의 표상, 사유, 정신적인 교류는 여기서는 아직 그것들의 물질적인 행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타난다. 한 민족의 정치, 법률,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과 같은 정신적인 생산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MEW.3.s,31)

 

 

삶의 맥락에 직접적으로 얽혀있는 의식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지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인간들의 활동을 구성한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물질적 규정을 받는다. 의식은 언제나 언어라는 형태를 띄고 나타날 수 밖에 없으며, 이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물질적 교류 Verkehr 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들은 인간의 사회적 실천에 내재적인 것이지 그것의 파생물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은 이러한 관념들 없이는 단지 물리적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예로, “관계가 존재할 경우, 그 관계는 (인간의 경우에는) 나에 대해 für mich 존재한다. 동물은 스스로는 아무것과도 관계맺지 않으며, 관계를 결코 맺지 않는다.(MEW.3.s,30)” 따라서 마르크스가 “실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가 행위와 의식이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그의 주변의 관계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즉, 그가 실천을 수행해 나가는 방식이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나의 환경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나의 의식이다. Mein Verhältnis zu meiner Umgebung ist mein Bewusßtsein (MEW.3.s,30)” 그런데 실천과 불가분하게 얽혀있는 관념들이 왜 “자립성의 가상”을 Schein der Selbständigkeit 띄고 나타나는가? 어떤 조건하에서 그러한 관념의 자립화가 이루어지는가? 그 조건의 출현은 “물질적 노동과 정신노동의 분업이 Teilung der materiellen und geistigen Arbeit 나타나면서부터 (MEW.3.s,31)”이다. 경제적 잉여가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소수의 직업적인 사상가를 출현시키는 단계가 되면,

 

이 순간부터 - 정신노동과 물질적 노동이 분할되는(역자) - 의식은 자기를 현존하는 실천에 대한 의식과 다른 그 무엇으로, 현실적인 그 무엇을 표상하지 않고서도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의식은 자기를 세계로부터 해방시켜 ”순수한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MEW.3.s,31)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필연적인 노동분업은 각 개인들에게 배타적인 활동영역 ausschließlichen Kreis der Tätigkeit(MEW.3.s,33)을 부여하고, 강요한다. 따라서 물질적인 실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활동하게 되는 정신적 노동의 경우에는 자신의 노동의 산물이 물질적인 실천들과 무관한 것으로 현상케 된다. 따라서 인간들의 사회적인 활동은 고착화 sich festsetzen 되며, 이러한 인간노동의 고착화는 정신노동의 결과물인 “이론, 신학, 철학, 도덕”이 자립적인 외관을 띄고 나타나게 해준다. 이 때, 이러한 관념들이 자립성의 가상을 부여받는 메카니즘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소외의 과정 중 하나인 의식의 소외인 이데올로기를 마르크스가 어떻게 개념화 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독일 이데올로기? 중 「이데올로기 일반,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 Die Ideologie überhaupt, namentlich die deutsche (MEW.3.S,18-27) 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리고 그밖의 이데올로기와 이에 상응하는 의식형태”(MEW.3.S,26)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며 발전도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데올로기는 자립적인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자체 안에 있지 않고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다. 따라서 자립성의 외양을 띄는 철학과 도덕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발전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되는 이유는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추동하는 힘은 실상 이데올로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역사는 삶의 역사 속으로 해소된다. 마르크스는 이념으로부터 현실의 삶을 도출하는 독일철학을 비판하면서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신들은

 

생활과정에서 이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인 반영과 반향을 서술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두뇌 안에서 형성된 환영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물질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전제들에 연결된 생활과정의 필연적인 승화물이다. 이리하여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리고 그밖의 이데올로기 및 그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MEW.3.s,26-27)

 

 

 

1-2. 이데올로기의 인식적 기능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들은 그 기원과 기능을 현실 속에서 가지며, 일단 그 기원과 기능이 현실 속에서 확인될 수 만 있다면 이데올로기는 자립적이지 않고 물적관계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전체 이데올로기에서 인간과 그들의 관계가 사진기의 어둠상자에서처럼 전도되어 나타난다면, 마치 망막 위의 전도된 영상이 망막의 직접적인 육체적 구조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역사적 생활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MEW.3.s,26)

 

 

따라서 인간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전도 시키는 이데올로기는 거울에 대상이 거꾸로 비추이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거울에서 대상의 모습이 뒤집혀 보이는 것 처럼 이데올로기에서 대상은 자신의 기원과 기능이 뒤집혀 보인다. 물질적 조건은 현실적인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지만 이데올로기에서 이러한 조건들은 전도에 의해서 신비화 된다. 따라서 소위 허위의식이란 물질적 조건에 기반해야 하는 의식의 내용의 거울상(mirror-image)이다.16)

 

이데올로기는 소위 사상가라는 사람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지만 허위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를 강제하는 동기가 되는 힘은 그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거짓되거나 그럴듯한 동기가 되는 힘을 상상해 낸다. 그는 검토하지 않고 사유의 산물로 받아들인 사유의 소재들을 가지고 작업을 하며 사유로부터 독립하여 떨어져 있는 더 근본적인 근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탐구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행위가 사유에 의해서 매개되어 있는 것처럼, 행위가 사유에 궁극적으로 기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17)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1) 허위의식이며, 2) 사유자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동기의 산물이며, 3) 순수사유의 산물로 잘못 상정되는 것이다.”18) 사실 이러한 엥겔스의 정의 또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의 함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기원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과 그 인식적 지위에 대한 설명은 역설을 지니고 있다.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의식형태는 허위임과 동시에 이러한 허위성은 어느 정도 구조적이며 특수한 사회질서에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소위, 관념들의 허위성은 물질적 조건 전반의 “진리”의 부분이다. 허나 이 허위성의 정체를 밝히는 이론은, 이론으로서는 해소하기가 무력한 상황을 폭로하면서, 결국 (자기의 기초- 삽입한 구절임) 스스로를 훼손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하나의 의미에서 이러한 비판은 합리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 또는 이론은 허위의식에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허위의식을 해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판이 제시하는 바가 참된 관념의 집합이 아니라 모든 관념들이 - 참되거나 그릇된 - 실천적인 사회적 활동, 그리고 더욱 특수하게는 이러한 활동이 창출하는 모순에 뿌리를 둔다는 주장을 제시하는 한에서는 합리주의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Terry Eagleton. 1991. Ideology An Introduction. P, 72)

 

이처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함축한다. 하나는 사회적인 기원을 가지는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지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으로서의 지위 곧 인식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데올로기의 실재성을 거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의식적인 기만으로 본 “속류 유물론”자들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에 여러가지의 이론적 곤란을 제공한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앞에서 지적된 대로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에 직접적으로 얽혀있는 의식형태와 자립성의 가상을 띄는 의식형태를 구분했다. 이 후자의 단계에서 사회는 계급으로 분화되고 물질적 생산수단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산수단”까지 소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분파적 이해를 보편적인 이해로 은폐한다. 그런데 만약에 이데올로기가 이처럼 사회계급간의 정치적 권력투쟁의 무기라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거짓현상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의 유지나 타도에 기여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실천의 비물질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 물질적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된다.19)

b)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물질적 삶에 얽혀있는 의식형태와 그렇치 않은 의식형태를 역사적 발전의 한 특색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에 a)의 주장이 승인된다면, 이데올로기가 나중 단계에서 물질적 생산과 직접 얽히지 않는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c) 마르크스는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인 힘인 지배계급이 동시에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세력”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물질적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산수단”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통제에 기인한다. 이러한 설명은 무엇보다도 피지배 이데올로기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배이데올로기가 생산의 지배관계의 이념적 표현이라면 생산수단을 생산의 영역에서 가지지 못한 피지배 계급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가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2. 알뛰세의 문제틀과 이데올로기.

 

알뛰세가 마르크스 변증법의 종별성을 밝혀내기 위한 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던 기존의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시도는 크게 두 가지로 준별된다. 하나는 ?자본?에서 ?1844년 수고?를 읽고자하는 인간주의적 독해이고, 다른 하나는 ?1844년 수고?에서 ?자본?을 읽고자 하는 과학주의적인 독해이다. 알뛰세는 이러한 해석들은 각각 그 결론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을 주장하지만 그러한 독해의 방법론적인 전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본다. 즉, 분석적인 것, 목적론적인 것 téléologique 20) 이다. 첫번째 전제인 분석적인 전제는 모든 이론체계가 그 요소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즉, 고유한 하나의 체계의 요소들을 다른 체계의 이와 유사한 요소들과 비교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목적론적인 전제는 “원천의 이론 la théorie des sources”과 “예측의 이론 la théorie des anticipations”으로 응용되는데, 원천의 이론에서 한 이론의 위치는 그 이론을 기원으로 환원함으로써 가늠되어 지고 measure, 예측의 이론에서 그 과정의 각각의 계기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목적 fin 이다. 따라서 목적론적인 전제도 분석적인 전제와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그는 이러한 기존의 마르크스 해석에 깔린 전제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독해의 종교적 신화”와 “직접적인 독해에 대한 환상”이라고 본다. “독해의 종교적 신화”는 진리를 로고스의 현전으로 파악하고, 성서를 읽는 것 처럼 직접적인 시각에 의해 구체적 실존이 직접성에 놓여져 있는 “추상적 본질”의 현존을 투명하게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허나 이러한 직접적인 독해는 환상이다. 단지 순수한 문자적인 독해는 텍스트의 연속성만 볼 뿐 그것의 결함과 괴리, 말해지지 않은 침묵의 담론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념론 철학에 오염되어 있는 “초기” 마르크스의 글들과 “자본”등의 성숙한 저작들을 구분해 내는 징후적 독해21)를 통해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경제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부르주아적 편향으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저작의 연대기가 곧 마르크스의 사상의 일련의 진화론적인 발전이라는 도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는 곧 마르크스의 저작들 간에는 일종의 단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단절은 정치적이기도, 이론적이기도 하다. 단절 이전과 단절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인식론적 단절”(FM.34)이다. 인식론적 단절은 마르크스의 사유를 크게 두 개의 본질적으로는 두개의 시기로 나누는데, 그 하나는 1845년 단절 이전의 “이데올로기적인” 시기이고, 나머지 하나는 1845년 단절 이후 “과학적인” 시기이다. 이 두 개의 근본적인 시기는 다시 세분화되는데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FM.33-38)

 

1. 1840-1845년, 이데올로기적 저작들의 시기

a) 1840 -1844: 청년기 저작 the early Works

a)-1 1840-42: 라인신문 Die Rheinische 논설들의 합리주의적-자유주의적 시기 (칸트-피히테적 유형의 문제의식)

a)-2 1842-45: 합리주의적 공동체주의적인 시기

(포이에르바하의 인류학적인 문제틀, 특히 44년 수고)

* 1845년, 단절기 저작 the Works of the Break

(포이에르바하의 테제, 독일이데올로기)

2. 1845-1883년, 과학적 저작

b) 1845-1857: 이행기 저작 (선언, 철학의 빈곤, 자본에 관한 초고)

the transitional Work, OEures de muturation theoretique

c) 1857-1883: 완숙기 저작 (자본)

the Mature Work, OEures de muturite

 

이러한 알뛰세의 시기 구분이 의미하는 바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불연속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생했고 더욱이 바로 그 지점에서 인식론적인 단절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59년 서문에서 동일한 언급을 한다.

 

1845년 봄에 엥겔스가 브뤼셀에 정착함으로써, 우리는 독일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대한 우리의 견해의 대립적 입장을 공동으로 완성하고 사실상 우리들의 지난날의 철학적 의식 philosophischen Gewissen 을 청산 abrechnen liquidation 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계획은 헤겔 이후의 철학을 비판하는 형태로 실행되었다.(MEW.13.s,10)

 

 

1845년 이전의 마르크스가 가졌던 철학적 의식은 휴머니즘이다. 알뛰세는 이 당시의 마르크스는 “윤리적 문제틀을 인간 역사를 이해하는데 응용하는 전위적 avant-garde 포이에르바하주의자”였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한테서 빌리는 방식이다. 그는 포이에르의 개념을 “하나하나 고립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한데 묶인, 하나의 집합으로서”(FM.46) 빌린다. 고립된 개념을 빌리는 것은 그 개념을 솎아낸 맥락에 빌린이를 묶어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상호연관적인 개념의 집합을 빌린다는 것, 실재적인 문제틀을 빌린다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그 개념을 빌린 이를 속박한다.(FM.46)”

따라서 마르크스가 1845년에 “우리들의 지난날의 철학적 의식”과 청산한다는 주장은 단지 그들이 새로운 개념이나 새로운 대상을 자신들의 연구의 목표로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인데, 그들이 “이전의 몇몇 개념들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전체 속으로 그 개념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제틀을 채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FM.47)” 따라서 분석적이고 목적론적인 전제를 가진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으로는 이들의 철학적인 청산의 종별성을 개념화 할 수 없다. 알뛰세는 그 질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킨 문제틀이 담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1.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에 기초를 둔 역사이론 및 정치이론의 형성:

이 새로운 개념들이란 사회구성체, 생산력, 생산관계, 상부구조,

이데올로기, 최종심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 기타 수준들의 특수한

결정 등이다.

2. 일체의 철학적 휴머니즘 이론적 주장에 대한 근본적 비판.

3.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의한 것.(FM.227)

 

이전의 관념론적 철학은 그 모든 영역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틀에 근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그 휴머니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직면한 인간주의는 포이에르바하로 대표된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6번(MEW.3.s,6)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은 “역사의 과정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을 “다수의 개인을 자연적으로 결합시키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 파악하는 이론으로 본다. 알뛰세는 마르크스가 이미 포이에르바하가 가지고 있는 인간학의 관념론적인 전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알뛰세가 보기에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은 - 1.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있다는 것. 2. 그 본질은 본질의 실제 주체들인 “개별적으로 파악된 개인들”의 속성이라는 것.(FM.228) - 동어반복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정의상 인간의 본질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구체적인 주체들이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던가, 구체적인 개별자들이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그들 각자가 유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뛰세는 포이에르바하가 회피할 수 없는 이 동어반복은 그의 “경험론적-관념론적인 세계관”(FM.228)에 의존한다고 본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이러한 인간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종전의 개념들을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제 마르크스는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

 

역사유물론 안에서 작용할 떄, 마르크스의 이론적 반휴머니즘이 뜻하는 바는, 몇가지 이론적인 주장을 가지는 인간 개념에 사회구성체와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설명하는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개념이란 말하자면 근원적 주체 originating subject로서의 인간을 뜻하는 것이다. 근원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란, 스스로의 필요의 발원처로서의 인간 (homo oeconomicus), 스스로의 사고의 발원처로서의 인간 (homo rationalis) 스스로의 행위와 투쟁의 발원처로서의 인간을 말한다.22)

 

 

알뛰세는 휴머니즘의 “이론적” 지위와 가치와 그것의 실천에서의 지위와 가치를 분명히 구분한다. 휴머니즘의 이론적 주장을 거부한다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한 개념으로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적 반-휴머니즘은 이데올로기의 성립조건, 구조, 그것의 특수한 논리, 해당 사회에서의 실천적 역할등을 인식하려고 시도한다. 필연적인 귀결은 휴머니즘 그 자체에 대한 인정과 지식이다.”(FM.230)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인식적 지위와 실재적 지위를 혼동하고 실재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알뛰세는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기능을 밝힘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인식적 영역을 넘어서는 실재적인 것으로 확장시키고자 한다.

 

3.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구조

 

알뛰세는 자신의 이론적 실천론은 자신이 처한 이론적인 정세에 대한 이중적인 개입이라고 주장한다.(FM.13) “첫번째 개입 the first intervention”의 목적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그것을 손상시키거나 위협하고 있는 철학적 주관주의와의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이 때, 그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관주의의 형태가 실용주의, 주의주의 voluntarism, 역사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경험론”이다. 이 “첫번째 개입”의 효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지위에 대한 강조이다. “두번째 개입”은 휴머니즘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와 차별성을 긋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청년기 저작과 자본론의 이해를 단절시킴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적 발견의 특수성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입의 형태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개입이 지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측면이다. 따라서 알뛰세의 이론적인 개입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지식에 대한 관점을 알아야 한다.

 

3-1. 생산으로서의 지식.

 

알뛰세는 지식은 “보는 것 Vision23)이 아니라 생산이며, 추상화가 아니라 영유 Aneignung 라고 본다. 지식이 “보는 것”이라는 은유는 지식에 대한 경험주의적 입장을 표현한다. 알뛰세의 경험주의적 지식 개념은 매우 논쟁적인데, 왜냐하면 보통 철학사상에서 비경험주의로 내지 반경험주의로 분류되는 경향에도 대부분 그 이름이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경험주의는 인식주체와 피인식 대상이 조우하여 대상의 추상적 본질이 경험, 반영에 의하건, 주체의 구성에 의한건 간에 대상으로부터 추상될 수 있다는 지식이론을 의미한다.24) 알뛰세는 경험주의를 “추상이라는 주체의 작용”(RC.35)에 의거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러한 추상작용에서는 의미를 안다는 to Know 것은 실재적 대상으로부터 본질을 추상하는 것이며, 주체는 본질의 소유 possesion 를 지식이라 부른다.(RC.36)” 그런데 지식이 추상이라는 말은 현실이 이미 그 자체 속에 포함하고 있는 본질을 주체가 추출하는 것이며 이는 현실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이미 현실 속에 현실의 일부분으로서 포함되 있는 것이며, 그 지식과정이 지니는 유일한 기능은 현실로부터 본질적인 부분을 추출하기 위해서 비본질적인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사유 내에서 물질적 실재가 재현되며, 사유와 실재간의 일치를 참이라고 보는 것이다. “경험론적인 지식의 개념화에서 지식 전체는 실재 내부에 위탁되고, 지식은 그 실재적 대상 내부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각 부분 간의 관계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RC.39)

이러한 경험주의적 지식과정은 주체와 대상사이에 연속성을 상정하며, 그것의 가장 원초적인 양상을 주관과 객관과의 접촉과정인 경험이라 한다. 그리고 경험의 결과는 모든 인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다. 따라서 과학이란 이러한 자료들을 단지 “경제적으로 기술”(에른스트 마하)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생기기도 한다.

알뛰세에 따르면, 경험주의적 지식개념에서 인식의 과정은 그 현실적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여 주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지식과정은 현실적 지식에 대한 생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식과정은 현실적 대상을 단지 바라보면 안 되고 거기에다 지식이라는 새로운 대상을 부가 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과학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이 사용하는 기계장치들은 우리에게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실험적인 결과들은 우리가 상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는 기자재에 의해서 의미가 부가되어져서 형성된 것이며 우리가 해석해야할 기호의 체계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잉여가치 개념을 둘러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 이전의 고전 경제학자들과의 관계를 산소 개념을 둘러싼 화학자들의 관계와 유비시키고 있다.(MEW.s,24-26) 18세기 후반에는 연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플로지스톤 Phlogiston 이론에서 산소이론으로 전환이 일어났다. 프리스틀리 Priestley는 수은의 적색 산화물을 가열할 때 나오는 “공기”를 조사하여 그것이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라고 보았다. 라브와지에 Lavoisier 는 그와 상당히 다른 이론적 가정에 서서 그것이 새로운 종류의 기체, 곧 공기의 2대원소 가운데 하나인 산소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이론적 업적이라고 평가하는 잉여가치는, 마르크스 자신이 인정하듯이, “이미 고전 경제학이 “생산”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RC.149)” 하지만 새롭기도 하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가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올바르게 정식화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 올바른 정식화는 우연한 결과 effect 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정확한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체계인 새로운 이론이 갖는 효과, 즉 새로운 문제틀의 효과 The effect of a new Problematic (RC.15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뛰세는 “실재 대상에 대한 지식의 심화는 지식의 대상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론적 변형이라는 노동에 의해 성취된다”고 한다.

 

3-2.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

 

경험론적으로 지식을 이해하는데 반대한다는 것은 경험론이 가진 근본적인 전제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알뛰세가 보기에 이러한 경험주의적인 전제는 크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학을 형성하는 인식론적인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론을 일상적 경험 및 실천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SPS,p.14)”이다. 알뛰세에게 전자는 지식과정의 사유내적인 성격을, 후자는 “이론적 변형이라는 노동”에서, 즉 “이론적 실천”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가지는 “문제틀”이라는 개념을 표현한다.

이 두 가지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알뛰세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알뛰세는 실천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천 일반이란 특수한 원자료를 특수한 생산물로 전화시키는 일체의 과정이며, 이 전화는 특수한 인간노동이 특수한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이런 실천에서 결정적 계기 혹은 요소는 협의의 실천 바로 전화(transformation)라는 노동 그 자체라는 계기인데, 이 계기는 하나의 특수한 구조 속에서, 인간과 수단 그리고 수단을 활용하는 기술적 방법을 작동시킨다.(FM.166)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실천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실재로 구분되는 상이한 실천 diffrent practice which are distinct(FM.167)”만이 존재할 뿐이다. 만약 실천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흔히들 이론은 더이상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주체의 작용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론은 그 자체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실천이다.

 

이론이란 실천의 종별적 형태이며 그 자체 특정한 인간사회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복합적 통일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론적 실천은 실천의 일반적 정의내에서 설명된다. 이론적 실천은 .. 다른 여타의 실천들이 제공한 원자료(표상, 개념, 사실)에 기초하여 작동한다.(FM.167)

 

 

알뛰세가 “이론은 실천이다.”라는 주장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여타의 다른 마르크스주의적인 실천에 대한 이해와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실천에 대한 종별적인 이해에 실패하는 “실용주의”. 2.“순수한 이론의 관념론”.25) 이와 반대로 알뛰세는 이론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정당화하고 “전술적인 정치적 결단과 다른 실천들의 노예로서 취급되지 않을 마르크스주의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론적 실천”의 구체성과 “이론적 실천의 타당성의 기준의 이론내적인 성격”26)을 제시한다.

그럼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에 이론이 원재료, 생산수단에 의한 변형,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실천과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면 이론의 종별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었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이 사유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어떤 실재적 대상, 현실적 구체, 현실적 총체성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사유-대상 thoght-object 으로서 그것에 대한 지식은 사유구체, 사유총체성 등에 의해서만 획득된다.”(RC.41) 두번쨰로는 이러한 구별이 이 두개의 대상과 함꼐 그들의 독자적인 생산과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구체적 총체성의 생산과정은 전적으로 현실 내부에서 발생하고, 현실적 생성의 현실적 순서에 따라서 실현되지만 지식의 대상의 생산과정은 전적으로 지식의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상이한 순서에 따라서 실현된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과정에서 “현실적 범주를 재생산하는 사유의 범주가 현실의 역사적 생성의 순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하지 않고 지식의 대상의 생산과정 내부에서의 그들의 기능에 의하여 할당된 전혀 별도의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다.(RC.41)”

그런데 인식과정이 전적으로 사유내적인 과정이라는 것은 이전에 알뛰세가 비판했던 “순수한 이론의 관념론”을 다시 불러오는 것 같다. 그러나 알뛰세는 지식과정을 구성하는 “사유”는 “초월적 주체의 능력 faculty”이나 “절대의식의 능력”도 아니며 “심리적 주체의 능력”과 같은 것을 내세우는 사유의 관념론에 빠지지는 않고 오히려 특정 개인의 “사유”에 대한 역할과 기능을 정의해주는 “자연적 및 사회적 현실에 기초하면서 그것에 접합되어 있는 사유 장치 an apparatus of thought 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체계(RC.41)'이다.

알뛰세는 이론적 실천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일반성 Généralité Ⅰ(원재료),Ⅱ(생산수단), Ⅲ (생산물) 이라고 부른다. 일반성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이론적 실천의 과정은 경험론적 이데올로기처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일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일반성Ⅰ은 경험론이 상정하고 있는 순수한 개별성과 집적성을 그 본질로하는 실재가 아니다. 경험론은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알뛰세는 지식을 구체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에게 과학은 “일상경험과 실천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을 반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SPS,p.15) 오히려 “이것들을 문제시하고 이것들과 단절 breaking with 하는 조건위에서만 구성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과학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론이 경험적 대상이나 현상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제공한 표상체계나 과학적 개념들을 변형시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적 실천의 원재료인 일반성Ⅰ은 막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이데올로기적-이론적 실천에 의해서” 이미 “가공된 elaborate” “항상 존재하는 개념들, 표상들(FM.184)”이다.

하지만 이 이론들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론”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FM.p.168) a) 이탤릭체 이론 theory (과학적 성격을 지닌 이론적 실천 전체). b) 따옴표 이론 “theory' (그 기본개념이 주어진 시기에 다소간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현실과학의 규정된 이론체계(cf. 만유인력 이론, 파동역학, 사적유물론...). c) 대문자 이론(Theory): 존재하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에 입각하여 성립된, 실천 일반에 대한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이며 유물변증법.2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재과학의 규정된 이론적 체계”로서의 “이론”과 “실천일반에 대한 이론, 과학의 이론적 체계”로서의 이론”으로서의 대문자 이론간의 구분이다. 즉 과학(역사 유물론)과 철학(유물변증법)의 구분이다. 알뛰세는 유물변증법으로서의 대문자 이론 Theory 을 실천 일반의 이론, 현존하는 경험적 실천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산물들을 지식으로 전화시키는 현존하는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 즉 철학으로 본다. 따라서 철학의 관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론적 실천일반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표현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실천일이반의 본질을 표현하며 또 그것을 통해서 변형의 본질, 사물일반의 발전의 본질을 포함하는 이론(FM.p. 168-169)

 

그러한 일반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역할은 이데올로기와 철학을 구분하는 원리를 제공하는데 있다. 알뛰세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철학의 전화”에 중요한 시사를 준다고 본다. 레닌은 ?유경?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존재이유는 이데올로기를 과학으로부터 구별지을 원리들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알뛰세는 철학을 “이데올로기의 폐쇠성으로부터 과학의 개방성을 보호하는 이론적 “경계심 vigilance”28)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이론적 경계심이 마르크스주의에 필수적인 이유는 과학이 구성되는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과학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이 발전되는 조건한에서만 구성되는 것이며, 그 조건은 끊임없이 과학을 둘러싸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이중적인 개입은 두개념 사이의 중요한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상세한 논지, 텍스트 분석과 이론적 논의 뒤에서 이 두 가지 개입은 주요한 대립을 드러내는데, 그 대립은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을 분리하는 것, 더욱 정확히 하자면 전과학적 이론적 이데올로기들로부터 자기구축 과정에 -있는 새로운 과학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때 이론적 이데올로기는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영역을 차지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과학/이데올로기들이라는 대립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이론적”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절”관계에 관한 것인데, 그 이론적 이데올로기가 알려준 대상은 과학 이전의 “사유”였다. 이 “단절”은 이데올로기들(종교, 도덕, 법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들 등등)에 의해서 점유된 객관적인 사회적인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 이런 비이론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영역에서 “절단 rupture”들과 “단절 break”들이 또한 있지만, 그것들은 “정치적”인 것(정치적 실천과 혁명적 사건들의 영향)이지 “인식론적인”것이 아니다. (FM.13)

 

 

과학/이데올로기라는 대립은 순전히 지식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이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비이론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과학에 의한 비판 이후에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알뛰세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그 인식적 지위의 차이를 설정하는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지식효과”라는 개념을 통해서이다. “지식효과 knowledge effect (RC.62)”는 지식이라는 생산물의 고유성을 의미하는데, 특정한 지식의 인식적 지위 -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 과학적인 것인지를 판별하는 - 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원인이 되고 있는 메카니즘을 분석해야 한다.

 

이 지식효과라는 표현은 최소한 이데올로기적 지식효과와 과학적 지식효과라는 두개의 부차적인 대상을 구성한다. 이데올로기적 지식효과는 그 특성 (그것은 거울연관 mirror connexion 을 통한 인식-오인의 효과이다)에 의해 과학적 지식효과와 구분된다.(RC.67)

 

 

이데올로기적인 지식효과는 지식(주체)과 그 실재적 대상사이의 보증을 요구한다. 이러한 보증의 문제는 “고전적 관념론이 사실상(de facto)의 보증에 만족하지 않고 법적(de jure) 보증”을 그리고 “실용주의가 사실상의 보증”을 요구하는 형태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일 관념론의 경우에는 주체와 대상사이의 동일성에 의거해서 인식을 현실과 사유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로 정의한다. 반영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엥겔스 또한 현실의 반영이자 현실전체를 지배하는 특정 법칙에 의거해서 변증법의 정당성을 보장받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시도는 과학에 과학 외적인 토대를 부여 함으로써 정당화 하려는 시도들이다. 예로,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지식의 문제”가 “권리의 문제”와 관련을 맺는 것은 중요한 점을 지시한다. 그것은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은 그 이론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론적 생산도구의 끊임없는 정교화와 발전에 의해서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과 이론의 실재대상사이의 예정된 관계에 의존하려 한다는 점을 표현한다. 알뛰세는 고전적 관념론의 고유한 테마인 “권리문제”는 특정 이론 과학적 성격을 구명해 주기 보다는 과학에 외적인 “실천적 이데올로기, 특히 법률적 이데올로기”에 특권적 자격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리의 문제”와 관련해서 고전적 인식이론이 주체범주(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에서 칸트의 초월적 주체, 그리고 후설의 구체적인 초월적 주체)와 같은 하나의 범주를 작동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범주는 법률적인 범주인 '법률적 주체 legal subject'로부터 이끌어내서 취해진 이데올로기적인 주체개념을 철학영역에서 재생산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주체-대상, 주체와 그것의 대상이라는 짝은 철학 영역, 철학의 고유한 양식 안에서 법적 주체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물건의 소유자라는 법률적 범주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은 자기 자신의(자기의식 self - consciousness) 그리고 자신의 물건(자신의 대상에 대한 의식, 자신의 대상)의 소유자이다. 비판적 관념론 철학은 권리의 이러한 이원성을 구성적(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상을) 의식이라는 철학적 이론을 통해서 해소하려 한다. 후설의 지향적 의식이론은 이러한 구성적 의식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SPS.128)

 

이처럼 관념론 철학에서 제기되는 “인식 주체”는 과학내적인 기준에 의해서 요청되는 범주가 아니라 과학외적인 것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아 현실을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으로 나누고 그것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 형태로 실재와 인식간의 예정된 조화를 구성한다. 그러면 그 이데올로기의 예정된 관계, 기성사실 fait assompli 을 보증하는 법적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에 불과한 이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 “폐쇄된” 원환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단순히 그 외부 - 그것의 밖 또는 깊이 - 에 위치를 잡기만 한다고 해서 이 폐쇠된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 외부 또는 깊이자 그것의 외부나 깊이로 남아있는 한 여전히 그 공간의 자기 이외의 타자 속에서의 ‘반복’으로서의 그 원환, 즉 폐쇠된 공간에 속하는 것이다.”(FM.63)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이 폐쇄적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이전의 관념을 전면적으로 정정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개방화된 공간과 문제틀을 확립해야 한다. 그것은 지식을 존재의 현전이나 대상의 반영, 혹은 주어진 진리의 확인작업으로 보는데 있지 않고 이론들, 개념들, 방법들과 상이한 요소들이 내적 관계로 구성된 복합적인 요소에 지배받는 독자적인 유형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시간 속에 각인된 “생산”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의 원재료는 결코 그 원환으로부터 단절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성 Ⅰ”은 이론적 실천의 원재료이자, 과학이전에 항상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원료, 즉 고유한 결합 속에 감각적, 기술적 및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묶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적 실천의 특수한 ‘“직관들”과 “표상”들의 구조이다. 따라서 지식의 과정은 경험론이 주장하듯이 순수한 대상의 직관 내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복합적 원료인 “이론적 이데올로기”에서 시작하며, 그래서 모든 과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이다.

과학의 비판 이후에도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데올로기가 “지칭하는 designate (FM.223)' 현존하는 관계가 이론적 실천으로 환원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전통을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결정하는 요인은 지식과정 바깥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을 “인식할 개념적 도구를 제공(FM.223)”하는 과학적 비판의 끊임없는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의 노동은 이데올로기가 전화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지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변형될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요약하자. 알뛰세는 상이한 영역들 속에서 이데올로기들은 일정한 구조를 가지는데 그것은 다소간 흩어져 diffuse 있기도 하며, 모순적이기도 하며, 의식되지 못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체계적인 형태로 - 이론적인 형태(이론적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 도 있다.

 

“우리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체계적인 신학을 가지지 않고서도 규칙 rules, 의례 rites 등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신학의 탄생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의 이론적인 체계지움이다. 동일하게 도덕적, 정치적,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적용될 수 있다.; 그것들은 이론화되지 않은 채로, 비체계적인 형식을 띄고, 관례 customs, 경향 trends 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또는 체계화되고 반성된 형식으로 이데올로기적 도덕이론, 이데올로기적 정치이론으로 존재할 수 있다.(SPS.27)

 

이데올로기에 체계를 부여하고 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여 진리 Truth 라는 이름아래 통일시키는, 이론화의 최고의 형태는 철학이다. 철학은 그것을 “인식론적인 주체범주”를 상정해서 가능케 한다. 알뛰세는 기존의 철학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 막연한 믿음과 신념의 모순적인 결합으로 존재하던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는 철학적인 체계의 힘을 얻어 내적인 체계와 통일성을 부여 받는다. 종교철학에 의해 종교의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과학의 곤란들, 개념들”을 그것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 다른 관념론 철학들 또한 과학을 종교철학처럼 공공연하게 이용하지만은 않을 뿐이지 다른 범주와 개념을 가지고 과학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기능을 한다. 여기서는 과학자들이 철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철학이 과학을 변호론적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지식외적인 이해관계를 위해서 이용 내지 착취한다는 점이 중요하다.(SPS.121-3)29)

이때 관념론 철학이 과학을 착취하는 것은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이익, 즉 실천적 이데올로기가 역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착취는 어떤 매개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곤란”과 “위기”에 기인한다.30) 이상에서 우리는 이론적 이데올로기는 실천적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지만 다시 이론적 이데올로기를 개념적 도구로 해서 실천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실천의 역할은 끊임없이 이론적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밝히고 이를 과학적인 부분과 구분짓는 작업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31) 즉,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외피를 벗기고 이것의 실천적 기능, 다시 말해서 이론적 이데올로기가 기반하고 있는 실천적 이데올로기 형태를 분석해내는 것이다.

 

4. 이론적 반휴머니즘과 주체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분석은 탈인간화된, 인간성이 부재한 노동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으로 쭈어진 시기”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사회구성체를 전반적으로 구조지우는 생산관계를 강조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개인들을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화, 특수한 계급관계와 이해의 구현”으로 다룬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방법은 이처럼 이론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고 논증한다. 물론 알뛰세도 마르크스가 생상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을 사상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생산과정에서 개인의 능동적인 측면을 사상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생산과정 속에서 개인의 구체적인 활동과 개성을 사상하는 자본주의적인 관계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개인을 이론적인 환원을 통해서 익명의 교환가능한 대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가 인간들을 이러한 경우에 생산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관계의 “수행자 supports”, 생산과정에서 “기능의 담지자 bearer”로만 간주했는 가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인간들을 단순한 기능의 담지자로 환원시키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그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고려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그들을 하부구조 속에서, 생산 속에서, 따라서 착취 속에서의 이러한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중략) 만일 여러분이 프롤레타리아들이나 자본가들의 구체적인 개인적 결정들, 즉 그들의 자유나 그들의 개성을 이러한 이론적 “환원”(épochè, reduction)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실천적 “환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SPS, p.236)

알뛰세의 이론적 반휴머니즘이 반대하는 것은 우선 근원적 주체 originating subject 로서의 인간개념을 설정하는 휴머니즘이다. 알뛰세가 이러한 경향을 가진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존 루이스 John Lewis 에 대해서 비판하는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그의 이론적 반휴머니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다음의 세 가지의 테제로 나누어 요약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시 세 가지의 테제로 제시한다.32)

 

(존 루이스) 제1테제 : “역사를 만드는 자는 인간이다.”

제2테제 : “인간은 역사를 초월함으로써 역사를 만든다.”

제3테제 : “인간은 오로지 그 자신이 행한 것만을 알 뿐이다.”

 

(알뛰세) 제1테제 : “역사를 만드는 자는 대중이다.”

제2테제 : “계급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이다.”

제3테제 : “우리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을 알 수 있다.”

 

알뛰세가 인간 대신에 대중을 역사를 만드는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그 주체가 “어떤 개성의 통일에 의해서 동일시되는 identifiable 되는 하나의 주체 (Reply.p.47)”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개인들은 역사에서 복수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상태로 서로 모여 있는 사회적인 제계급이 제계층”인 대중이다. 알뛰세는 자문한다. “존 루이스에게서 주체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또 다른 주체로서 “대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사회적 개인들이 “주체형태 forme-sujet33)를 띌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이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주체는 더이상 구성적인 자유로운 주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더 이상 대문자로서의 철학적인 주체는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알뛰세는 피착취계급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 효과로 대중을 구성하는 계급투쟁을 내세운다. 그 이유는 계급과 계급투쟁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일한 하나의 것이기 때문이다.34)

 

개량주의자들은, 두 축구팀이 경기전에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 처럼, 계급투쟁 이전에 두 계급이 존재하는 것 처럼 생각한다.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존재조건에 따라 각자의 거주지에 살고 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지만 걔량주의자들은 이를 계급투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날 두계급은 서로 적대하게되고 급기야 서로 싸우게 된다.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것은 오직 그 때 뿐이다. 그들은 서로 주먹질을 하고 점점 싸움은 첨예해 진다. 결국 피착취자가 이기거나(이것이 혁명이다), 아니면 지거나 (이것이 반혁명이다)한다. 사태를 아무리 이모저모 띁어봐도 여기에서는 같은 생각밖에는 없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오직 그 이후에 존재할 뿐이다.(Reply,p.49)

 

따라서 계급투쟁을 “인간”의 “자유”나 “초월”과 같은 개념과 연결시키는 이들은 상품가치라는 사회적 관계를 상품과 화폐의 자연적 속성과 동일시하는 것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이라는 생산과 그 분배에 뿌리밖은 사회적 관계인 계급투쟁을 인간의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35) 마찬가지로 “구성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의 중심에 놓는 것은 역사를 인간본질의 실현이라고 보는 역사주의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에 들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뛰세는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체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계급투쟁이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의 관계, 토대, 즉 하부구조와 분리될 수 없는 생산관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연사의 일부로서 사회의 구조는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고, “인간집단들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인간집단들간의 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는 인간들만을 문제삼지 않고 사물들, 즉 물질적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생산수단들도 문제삼기에, 그 생산수단을 한 계급에 할당함과 동시에 인간들을 계급을 분할한다. 따라서 개인이 이러한 관계에 참여하는 능동성은 개인이 이러한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한에서이다.

따라서 사회를 설명하는 원리를 순전히 인간들간의 관계로 환원시킬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출발점으로 상정되는 구체적인 개인 또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분석의 결과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1857년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것은 다양한 규정들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구체적인 개인은 인간들이 사로잡혀 있고, 그들이 참여하는 관계들의 다양한 규정들의 종합에 의해서 규정된다.(SPS.239)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규정들이 종합되는 곳은 어디에서 인가? 알뛰세에게서 이러한 다양한 규정들이 접합되는 곳은 바로 “주체” 안에서이다. 인간들은 다양한 규정들을 반영하는 상이한 개인들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산관계에 일정한 의미와 역할을 가진 주체로서 참여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상이한 개인들을 사회의 일정한 조직들과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요약하자.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저작이 내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진화해온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의 내적인 문제틀은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틀을 벗어나서 과학적인 문제틀로 “자신의 지반을 변경”했다고 주장한다. 알뛰세가 보기에 마르크스가 포이에르 바하의 “이론적 인간주의”를 벗어나서 구성하려고 했던 과학적인 이론은 그의 “이론적 반인간주의 였다”.

알뛰세에 따르면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실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인간을 이론적으로 “환원”한다. 즉 역사를 “주체없는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이론적 “환원”이 실천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을 사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론의 대상인 상이한 사회적인 실천들이 대중들로 구성되는 인간을 구성하는 메카니즘에 대한 문제가 알뛰세에게서 제기된다.

그러한 작업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개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개인들은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데올로기 안”에서, 착취와 투쟁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개인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회”를 거쳐야 한다. 그 우회작업은 이론의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낯선 것으로 보였던 여러 이론들의 우회를 거쳐 기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지배적이었던 인식론적인 모델을 거부하는 기획을 포함한다. 그와 동시에 이 기획은 이론적인 “환원”을 통해서 거부했던 기원으로서의 주체개념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알뛰세는 이 때의 주체는 기원으로서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구성된 것이며, 이 구성작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Ⅳ. 이론 밖의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기능

 

1. 철학의 새로운 실천

 

과학의 역할은 스스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피지배 이데올로기를 과학의 도움을 통해 단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은 알뛰세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전에 알뛰세는 과학은 자신의 내적인 기준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외적인 보증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와 관련된 모든 지식을 과학적인 인식에 기초해서 수립하려고 했던 근세 과학주의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뛰세는 비록 과학적 지식 자체는 다른 사회적 실천에 의존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회적인 실천, 특히 정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 exploitation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SPS.p.120-131) 다시 말해서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해서 이론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카톨릭 신학과 결합시켜 만든 중세 후기의 우주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론적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36) 이처럼 비록 과학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 관념들이 사회 속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할때, 그 관념들은 오직 -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와 여타의 종속적 이데올로기라는 - 사회적 세력관계의 물질성과 결합되어 실존한다 (SPS.p.210) 따라서 과학은 사회 속에서 나약하다. 과학은 스스로는 다른 실재적인 생산적인 심급에 의해서 착취당할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 내부의 지식의 생산 구조를 지니고 지식을 생산하지만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순전히 지식과정 안에서 머무는 것이지 현실의 세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은 다른 경제적 실천이나 정치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세력관계를 이루는 실재의 실천활동 자체이며 이는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철학의 범주를 통해서 과학을 착취한다.

이제 알뛰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존관념을 변혁하려면 진리 그 자체에 호소하거나 계몽된 명료한 정신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부리고 있는 세력을 인식하고 그 힘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작동시켜 막대기를 반대방향으로 구부려야 한다.(SPS,p.210)” 따라서 이론이 인식하고 그것이 현실적인 힘으로 전화되려면 그와 달라야 할 세력의 조건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이 기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순전히 지식과정 안에서 머무는 것, 외부로 나아갈 수단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 외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학이 아니면서도 이론과 관련되고 또 이러한 힘, 즉 이데올로기와 관련될 수 있는 제 3항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알뛰세의 지금 까지으 철학에 대한 정의는 무언가 부족하다. 철학은 알뛰세에게는 이론적 실천에 관한 이론이면서 동시에 비이론에 관한 이론, 실천일반에 관한 대문자의 이론이었다.(FM.168)

 

철학을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하는 것은(?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주어진) 일면적이고 부정확하다. 이러한 개념구성은 용어의 모호함과 개념화 그 자체에서도 오류가 있다. 그리고 이론적 실천에 관한 이론이라는 일면적 정의(즉 실천들의 차별성에 관한 이론으로 정의하는 것)는 “사변적”이며 “실증주의적”인 효과와 반향을 초래할 수 있다.(RC.p.8)

그는 과학은 그 내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과학이 과학외적인 것을 “전유”하기 위해서는 지식과정 외부로 나와야 하는데 알뛰세는 그것을 경험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실천간의 “상동성”을 선험적으로 상정함으로써 과학외적인 실재의 전유를 보장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알뛰세가 비난해왔던 반영론을 다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과 과학외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철학을 새롭게 재정의 한다.37)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대상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철학에게는 대상이 없다.”38)

 

엄밀하게 말해서 철학은 과학적 논증과 증명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 칸트는 이론철학의 대상을 사물자체, 즉 자연, 세계, 인간이 아니라 인식활동을 연구하고 이성의 법칙과 한계를 세운다는 의미에서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 학문으로 설정하였으며, 또한 “대상없는 학문들”(합리적 신학, 합리적 우주론, 합리적 심리학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알뛰세는 그러한 견해를 수용하고 모든 철학은 현실 대상을 갖지 않고 철학내적으로 생산된 고유한 “이론적 대상”과 그 이론적 효과 속에서 스스로를 사유한다고 하는 주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철학은 “진리의 관계”(지식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자신의 대상과 관계를 맺고 진리와 오류일 수 있는 증명적, 논증적인 명제에 의해 생산된 과학적인 지식효과와는 달리, 철학은 다른 효과들을 실현한다.

테제들을 내세우는 철학은 사실 “총체성”과 관련되는 문제에 민감하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도 전체에 대한 과학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에 해결을 주지 못한다. 철학은 테제들을 진술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대한 올바른 juste, correct 입장을 취하여 그 길을 열어놓는데 기여한다.(SPS,p.245)

 

그에게는 참/거짓 (truth/falsity)이라는 속성이 이론과의 관계를 함축하는데 반하여 올바름/올바르지 않음 (correctness/incorrectness)라는 속성은 기본적으로 실천과의 관계 - 올바른 노선, 올바른 결정 - 를 함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올바름”과 관계맺는 다는 것은 그것의 속성상 “실천”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철학이 실천과 관계 맺는 방식은 “구획선(레닌)과 “분할(플라톤)”이라는 방식으로 현실과 실천에 개입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이떄 이 개입과 동시에 철학은 철학적 범주들39)을 생산한다. 이 철학적 범주들은 과학적 지식의 개별적 제단계의 출현과 발전을 촉진 내지 방해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그러한 지식을 구성하지 못하는, 개념화, 유비, 특히 구별과 경계선 demarcation line 들로 나타난다. 철학이 개입하는 장은 이중적이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특수한 영역에 개입한다. 계급투쟁이라는 정치적 영역과 과학적 실천이라는 이론 영역이 바로 그곳이다.(LP,p.107-108)

 

따라서 알뛰세는 “철학은 이론의 영역에서는 정치를 표상하고 .. 역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한 제계급들과 함께 정치에서는 과학성을 표상한다”(LP.65)고 주장한다. 철학이 “이론의 영역에서 정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범주인 “물질”이라는 개념의 사용과 더불어서 잘 이해될 수 있다. 레닌은 존재의 테제이자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테제인 “물질”이라는 “철학적 범주”를 통해 이론의 영역에서 과학을 위협하는 관념론 철학 및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방어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사이에 구획선을 긋는다. 철학은 또한 과학과 달리, “최종심에서 실천적이며 이론에 속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들의 계급적 경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ESC,p.37)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철학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

알뛰세는 철학에 과학과 정치를 매개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하지만 여기서 방점은 분명하게 정치에 놓여진다. 왜냐하면 “철학의 새로운 실천”은 이데올로기로서 일반성Ⅰ을 가공해서 과학을 생산해내는 “이론적 실천”인 인식론에 입각해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것 the scientific 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the ideological의 구별을 생산하며, 후자의 구별은 과학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철학에 속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이 경계선이 과학의 지식효과와 다른 철학의 철학효과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뛰세에게 중요한 “지반의 변경”이 있음을 발견한다. 알뛰세는 초기의 합리주의적인 과학관에 경도되어 사적유물론이라는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의 탄생을 “과학 일반과 이데올로기일반”사이의 단절로 파악했던 입장과는 달리, 마르크스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전사 사이에 한정된 “특수한” 단절로 파악한다.40) 전자가 진리와 오류, 지식과 무지라는 관념론적인 반정립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후자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없다.

 

만일 마르크스에 의해 성립된 과학이 과학의 전사의 이론적 개념화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면 단지 그것을 거짓으로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진리임을 주장하며 진리로서 받아 들여졌고 계속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왜 그런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단절한 이론적 개념화(즉 역사철학들)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불리워진다면 그것이 주어진 계급사회에서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필연적 기능르 수행하는 현실적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파견대 Détachment 였기 때문이다. (ESC, pp.155-156 )

 

따라서 새로운 철학에 대한 정의가 이전의 철학에 대한 정의와 달리 의미가 새롭게 규정되는 부분은 그 구획의 정치적 성격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이 계급적 정치적 요구와 직접 연결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그것이 이론의 영역에서 이론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알뛰세는 이데올로기를 이론의 영역에서 구분짓는 작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데올로기와 대비되는 진리 그 자체에 호소하지 않고 그것을 구부리고 있는 세력을 인식하고 그 힘을 파괴할 수 있는 반대의 힘을 작동시켜 막대기를 반대 방향으로 구부리려 한다.

 

관념을 변화시킬 필요 때문에 우리는 최초의 힘을 무화시키는 반대 힘을 통해, 구부러진 관념들 위에 그것들을 정정하기 위한 반대로 구부리기를 행함으로써, 관념들을 구부린 채로 지탱하고 있는 힘을 인식해야 한다.(ESC,p 147)

 

 

 

 

 

2. 실천적 이데올로기

 

2-1. 이데올로기들 ideologies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는 지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와 이중적인 관계(SPS,p.23)”를 맺는다. 알뛰세는 전자를 실천적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표현인 이론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후자를 실천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전자는 이론적 실천과정의 일부이다. 그리고 전자를 인식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와 스스로를 구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라는 과학적인 이론에 기반한 대중운동이 사회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존재와 직면할 수 밖에 없는데(SPS,p.23.)” 이때의 이데올로기는 주로 대중의 실천적 이데올로기이다.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일상적 실천 속에 직접 깃든다. 따라서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사적 유물론의 연구대상이 된다.

실천적 이데올로기와 이론적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우선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상이한 영역 region 들에 대한 이해이다.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과학과 관련되는 영역을 넘어서 사회전반에 걸쳐서 존재한다.(이는 과학의 수립이후에도 이데올로기가 살아남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경제적인 생산관계와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또한 이와는 다른 활동 -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 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의식적인 실천으로 능동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반성들, 판단들 또는 태도들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들이 이데올로기적인 활동들을 구성한다. 이러한 활동은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유지되며,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이루는 표상들과 신념들 - 종교적, 철학적, 미학적 - 의 총체와 관련된다. 특히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은 중요하다.

 

첫째, 철학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서 일어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둘째, 이데올로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계급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SPS,p.256)

 

철학은 외형적으로는 현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철학적 추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지배 이데올로기들이 “철학의 진리 아래 체계적으로 통일되도록 사회적 실천과 관념을 재조직하고 정연하게 배열”함으로써 그것의 통일성과 방향을 부여하고 그것을 진리로 보증한다. 따라서 철학은 곧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라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추상 속에서 완성되는 이론적 실험실”이다.

이처럼 그는 이데올로기의 존재하는 종별적인 영역들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이데올로기, 도덕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데올로기, 미학적 이데올로기, 철학적 이데올로기(SPS,p.26)”로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종별적인 영역들은 그 자체로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개인이나 집단의 존재조건에 대한 체험을 기초로 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없이는 어떠한 실천도 없다고, 그리고 과학적 실천을 포함한 모든 실천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 생산영역에 속하는 실천이든, 과학, 예술, 또는 법, 윤리 또는 정치 영역에 속하는 실천이든) 사회적 실천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보통 사태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각각의 실천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들에 종속해 있다.(SPS,p.256)

 

이데올로기는 개인이나 집단의 존재조건에 대한 체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의 생산은 인간 노동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타의 제도적인 장치들과 결부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제도적인 장치의 변형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영역과 성격이 달라진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적인 적대에 의해서도 구분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할을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도 반영한다. (지배이데올로기. 피지배이데올로기) 이것을 알뛰세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들 diffrent ideological tendencies”이라고 부른다.(SPS, p.30)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종속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이 종속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비록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와 갈등을 겪을 지라도 그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바로 그 구조내에서 착취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2-2. 이데올로기 일반 ideology in general에 대한 이론.

 

마르크스의 문제틀을 이해하는 알뛰세의 기본 방침은 “생산”으로서의 “실천”이라는 관점을 경제영역만이 아닌 사회의 모든 주요한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등의 영역41)이 각각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는 실천영역으로 설정된다.

알뛰세는 이 각각의 실천 영역을 그의 독특한 용어인 심급 instance 42) 이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각각의 실천 영역이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는 이 여러 심급들 중 한 심급을 본질적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문제를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가 이 심급들에 “생산”이라는 동형적인 구조를 설정한 것 또한 이러한 까닭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의 “복잡성”을 환원주의나 본질주의를 통해서 사상하려 하지말고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사회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 심급들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그의 “접합 articulation”개념이다.(RC, 41-3, 227 참조.)43) 이 심급들의 접합을 통해서 구성된 사회적 전체의 구조는 각 심급들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구조는 그 심급들 중 어떠한 하나의 심급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도 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심급들에 전체의 구조는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효과 effect”로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비환원론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은 알뛰세에게서 어떻게 제시되는가? 알뛰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을 생산하는 실천으로 볼 수 있다.(LP,160-165) 그에게 주체는 의식의 원천, 즉 객관적인 역사과정들 속에 주관적 원리를 개입시키는 것의 표출이 아니라, 호명 interpellation 메카니즘을 통해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의 산물이다.

알뛰세는 우선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을 분석하기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영역적, 계급적 이데올로기들과 이데올로기 일반 ideology in general 을 구분한다.(LP,160) 영역적이고,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들은 앞에서 지적 했듯이 역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발전과 분화를 거듭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이데올로기 일반은 역사를 지니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알뛰세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회적인 심급으로 궁극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에 역사는 없다는 명제는 순전히 부정적인 명제이다. 그 명제는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 이데올로기가 순수한 꿈인 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2. 이데올로기에게 역사는 없다는 말이 단호하게 의미하는 바는 이데올로기 안에 역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그와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실제 역사의 어슴프레하고 텅 빈, 그리고 전도된 반영이기 때문이다.)는 게 아니고 이데올로기에 이데올로기 자체의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LP.160)

 

 

알뛰세는 이와 달리 이데올로기는 그 “구조와 기능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전체를 통해 똑같은 형태로 머무르며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즉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환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비 non -역사적 실재, 전 omni - 역사적 실재”인 것, 즉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영원하다”와 같은 이미에서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때 알뛰세는 이데올로기의 영원성 etenerty 역사를 초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며 역사를 관통하기에 역사의 범위 전체를 통해 형식에서 불변 immutable 이라는 뜻이다”(LP,161).

3.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알뛰세는 단호하게 이데올로기는 실재에 대한 (그릇되건 옳건간에) 의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 인간들에 작용(FM.233)”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고 알뛰세는 주장한다. 만약에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를 상정한다면 이는 다시 허위의식 개념을 끌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알뛰세는 사이비 지식의 해결자로서 인식주체를 상정하는 것을 비판하듯이 “주체” 대신 의식을 결정하는 무의식을 경유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 그 이유는 주체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내에서의 구조적 효과가 주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진실된 “주체”는 이러한 점유자 occupants 나 기능자 functinaries 가 아니며,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류학이 갖는 “주어진 것”의 “명증성 obviousness” 즉 구체적인 개인들 또는 진실된 인간도 아니며, 이들 장소와 기능에 대한 정의와 분배인 것이다. 진실된 “주체”는 이들 정의자 definers 및 분배자 distributors, 즉 생산관계들(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이기 때문에 주체라는 범주 속에서는 고찰될 수 없다.(RC.180)

 

따라서 주체는 구성적인 주체가 아니라 구성된 주체이다. 하지만 구성된 주체라는 것이 그 주체가 스스로를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자율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

 

너와 내가 주체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어가 사물을 이름하거나 의미를 가지게 하는 자명성(언어의 투명성이라는 자명성)을 포함한 모든 자명성과 마찬가지로, 너와 내가 주체들이라는 자명성-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명성- 은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LP.171-172)

 

그는 인간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신에게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실재적인 존재조건이나,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런 존재조건에 대한 인간의 관계(LP.163)” 게다가 “상상적”인 관계이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은 실상 그들의 존재 조건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그들이 그 관계를 살아가는44) lived 방식을 표현한다. 이것은 실제적 관계와 살아진 lived 상상적인imaginary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표현, 다시 말해 인간이 그들의 실제적 존재조건들과 맺는 실제적 관계와 상상적 관계와의 (중층결정된) 통일성이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실제적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상상적 관계, 현실을 묘사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의지(보수주의적인, 순응주의적인, 개혁주의적인 혹은 혁명적인), 희망 또는 노스텔지아를 표현하는 관계에 의해 포위된다.(FM.233-234)

 

우리는 “상상적 인것”에 대한 모델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하의 노동자의 “자유”개념을 따라가 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한다. 하나는 봉건적인 신분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법률적, 인식적으로 자유로운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집중을 통해서 잉여가치의 새로운 전유방식을 창출하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임금노동자군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 Sachen 으로부터도 해방되어 frei 있다는 의미이다.(MEW.S.23,183)

 

 

노동자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주체로 사고하는 것은 상상적인 것/현실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적인 관계가 가능케되는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처분할 권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알뛰세는 “인간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존재조건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끔”하는 이데올로기는 단지 계급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끊임없는 “인간의 존재조건의 변형”(FM,235)인 한에서 이러한 존재조건과 인간들을 묶고 조정하는 접착제와 bond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그 자체로 지각되지 않고 언제나 표상이나 이미지를 경유해서 드러난다. 그것들은 “자명한 표상들”, “일상적인 사유방식”, “상식”등으로 드러난다. 일상적인 사유방식, 실재에 대한 표상체계(비록 그것들이 체계, “자연적” 체계로, 예를 들어 법전과 같은 체계로 가공될 수 있다하더 라도)로 지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규범적으로 행위하는 방식, 개인으로서 그들에 대한 그들의 느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실천적 이데올로기들은 ‘통념 notions - 표상 representations - 이미지들 images 을 행동 behaviour - 품행 conduct - 태도 atitude - 거동 gesture 의 모습으로 만드는 shape 복합적인 구성체이다. 그 총체는 인간들이 그 사회적, 개별적 실존의 현실대상과 현실문제들 및 그 역사에 대하여 채택하는 태도와 구체적 입장을 지배하는 실천적 규준들로 기능한다.(SPS.83)

 

이처럼 이데올로기의 실천은 이러한 “자연적인 태도 natural attitude”를 생산해냈을 때만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권력관계가 지배적인 개인들을 지배하는 관계로 되는 것은 그것이 개인들에게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는 바의 자명한 모습으로 체험될 때만 실현되는 것이다.

알뛰세는 이러한 인간과 그의 존재조건을 묶는 이련의 과정들은 모두 주체범주와 관련하여 생겨난다고 본다. “주체에 의하지 않고 주체들을 위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없다”(LP,170)

즉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주체들에 대해서만 존재하며, 이데올로기의 사명은 주체(주체라는 범주와 그 기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록 주체라는 범주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특히 법 이데올로기)의 출현 이후에야 등장하지만, 역사적 시기에 상관없이(이데올로기에는 역사가 없으므로) 다른 이름(가령, 플라톤의 영혼․신 등)으로 존재하면서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범주라고 알뛰세는 바라본다. 그러나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이것이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을 갖는 한에서만, 주체의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물질적 관계가 개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한에서만 그들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형태를 통해 기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은 이러한 이중적인 구성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알뛰세는 이데올로기의 주체구성을 “호명 interpellation”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불림을 받을때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성, 가족, 사회계급, 민족, 인종의 한 성원으로 혹은 심미적인 감상가 등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알뛰세는 이러한 과정에 선행해서 주체의 “자기동일시”가 일어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문을 두드릴 때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나”라고 대답한다(자명하니까). 그 대답을 들은 이도 그가 누군지 알아차린다. 또 거리에서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말을 나누며 적절한 제스쳐를 통해 서로 알아보았음을 표시한다. 이러한 예들은 일상적 삶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인지의 물질적․관습적 실천이다. 개인들은 상이한 “주체위치”로 자신을 위치짓기 이전에 항상 - 이미 주체들이고, 이데올로기적 인지의 관습들을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혼동될 수 없는 주체임을 확증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특정한 주체로 불러내어 구성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는 신비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알뛰세에게서 이 호명의 과정은 직접적인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실천과 실행 그리고 제도에 의해서 매개된 과정이다.

알뛰세에게서 그 매개를 담당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국가장치의 역할이다. 알뛰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내가 그람시를 따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체계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도덕적, 가족적, 법적, 정치적, 미적 등등의 제도를, 곧 그것을 통해 권력을 쥔 계급이 자신을 통일하면서 동시에 피착취 대중에게 지배계급 자신의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부과하는 데 성공하게 되는 그런 제도들을 뜻한다.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인민대중은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진리에 빠져들어 그 가치를 승인하게 되며, 필수적인 폭력은 없어도 되거나 또는 최후수단으로서만 사용하게 된다.(SPS,p.258)

 

이처럼 알뛰세는 이데올로기는 실재의 존재조건이 나니라 인간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표현한다고 본다. 실재는 직접 드러나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념적 틀을 경유해서만 표현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라는 실재는 노동자의 의식에 직접 반영되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그것을 착취로서 느끼게 하는 개념(넓은 의미의)을 경유해서만 착취로서 인식될 만큼 불투명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동자의 의식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는 착취관계에 대한 그릇된 방영으로서의 허위의식이거나 환상이라기 보다는 착취라는 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의 한 측면이다.

따라서 알뛰세에게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존재”로 파악된다. (LP,p.165) 이때 그가 이데올로기를 물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표상들과 관념들이 다른 것들로 환원되고 다른 심급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이러한 관념들과 표상들이 언제나 구체적인 대중의 실행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뛰세는 이러한 분석과정을 “재생산”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사회적인 힘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의 건축학적 몯델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나는 마르크스가 모든 사회의 구조를 특수한 결정에 의해 접합된 ‘수준들’ 또는 ‘심급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부구조, 또는 경제적 토대(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그리고 두 ‘수준들’ 또는 ‘심급들’을 포함하는 상부구조, 즉 정치적, 법적인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등이다.(LP,p.134)

 

알뛰세가 보기에 이러한 구도는 사회에 대한 선명함은 주지만 - 기술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 이론적인 발전이 요구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건축학적 비유가 주는 역학적 이미지는 마치 하부의 구조가 무너지면 상부구조는 자동적으로 붕괴할 것 같은 다른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하부구조는 서로 솎아내어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순수한 경제, 순수한 상부구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전술한 바대로 각각의 사회적인 심급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접착되며,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한다. 따라서 기술적인 서술 대신에 “재생산의 관점에 입각해서” 사회를 파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