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을 통한 실존개명

나뭇잎숨결 2020. 6. 10. 09:04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을 통한 실존개명

강 갑 회(동아대)

 




[한글 요약]

야스퍼스에 있어서 철학함(Philosophieren)은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을 깨닫고 좌절(Scheitern)하고 동시에 그 좌절을 계기로 하여 초월자로부터 걸어오는 언어로서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실존이 되는 데 있다.

한계상황은 상황일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면서 - 상황일반이 인간의 현존재나 의식일반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으나 한계상황은 절대적으로 변경 불가능하고 오히려 인간의 현존재를 압도한다는 사실에서 - 인간의 현존재의 내면에 좌절과 절망을 야기시키는 근본 상황이다.

한계상황의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국면으로서 죽음, 고통, 투쟁, 죄책은 인간의 현존재를 좌절시킴과 동시에 실존적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이 실존적 초월은 초월자의 암호에 대한 해독의 가능성을 구현시킨다. 따라서 초월자의 암호해독은 곧 인간의 본래적 자기로서의 실존의 획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계상황의 경험은 이와 같이 초월자의 암호해독과 본래적 자기로서의 실존개명(Existenzerhellung)을 현실화시킨다.

야스퍼스의 초월자는 비대상적이기 때문에 언어로 언표되거나 전달될 수 없고 그리고 오성에 의해서는 더욱 인식될 수도 없다. 초월자는 오직 실존에게만 암호로서 나타날 뿐이다.


초월자의 암호는 비신체적, 비형상적이고 多義的이다. 그러므로 초월자의 암호에 대한 다의적인 해독에 의해서 비로소 초월자의 현실성이 감지되고 동시에 실존이 개명된다.


주제분야 : 실존철학, 야스퍼스 철학, 한계상황과 실존개명
주 제 어 : 한계상황, 실존개명, 본래적 자기, 암호 해독, 초월자


1. 서언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는 현존재에서 실존으로 비약함과 동시에 超越者 앞의 실존이라는 線上에로의 志向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따라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초월자를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곳에서 나는 현실적으로 본래적 자기로서 實存이 된다.

본래적 존재 자체인 초월자는 세계를 초월해 있다. 초월자의 이해는 항상 자기를 초극하면서 본래적 자기로 되어 가는, 즉 가능적 실존으로의 현실화에서만 가능하다. 존재 자체를 문제로 삼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가능적 실존이며, 가능적 실존의 존재에의 이해가 바로 철학함 이다.

철학함의 근본으로서 실존의 존재 이해는 한계상황(Grenzsituation)의 경험에서 가능하다. 한계상황의 경험은 일상적 삶에서는 숨겨져 있는 현존재의 無基盤性(Bodenlosigkeit)을 감지 가능하게 한다. 한계상황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모든 유한한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인간은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이 좌절은 인간 자신으로 하여금 실존에의 비약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의 비약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초월자 앞에 서게 된다.

한계상황 앞에서 경험하는 좌절 또는 난파는 인간존재로 하여금 초월자로부터의 본래적 자기의 贈與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야스퍼스에 있어서 초월은 변증법적 사유나 인식 비판적인 의미에서의 순수한 관조적인 입장으로서의 초월과는 다르다. 그것은 내적 행위로서의 초월이다. 이 실존적인 초월은 한계상황 앞에서 난파되고 좌절하는 경우에만 실현된다. 이와 같이 한계상황은 인간존재로 하여금 가능적 실존으로서 철학함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내적 행위를 통해서 초월자 앞에 나서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초월자는 결코 형상화되거나 신체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언어로 초월자와 의사 소통할 수 없다. 인간은 초월자의 암호 해독을 통해서만 그 앞에 설 수 있다. 초월자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인간은 본래적 자기인 실존으로의 비약을 시도할 수 있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인간만이 타자의 존재, 즉 초월자를 인정하고 초월자 앞에 설 수 있고 그 순간 인간은 현실적 실존이 된다. 이 현실적인 실존은 이 경우에 존재탐구의 주체인 동시에 존재자체를 覺知하는 주체가 된다. 야스퍼스가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철학함의 맥락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가령 한계상황을 隱蔽시킬 경우 인간은 본래적 자기가 되지 못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하여 무엇으로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한계상황에 처해서 취하는 태도에 따라서 인간의 본질적 존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계상황에 처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실존을 개명하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상황일반의 규정을 통한 한계상황의 이해

인간은 항상 일정한 處地(die Lage), 다시 말해서 자기 주위의 일정한 제 사물 즉, 환경으로서의 자연 내에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을 상황내 존재(In der Situation Sein)라고 한다. 야스퍼스는 상황을 철학적 물음이 시작되는 근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상황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곧 철학함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볼로브(O. F. Bollnow)가 야스퍼스의 상황을 삶의 철학에 있어서의 處地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 상황이다.

인간의 삶과 관련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삶에 주는 영향에 따라 우호적인 것과 비우호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상황은 공간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삶과 관련된 일체의 것에 의해서도 의미·규정된다. 상황은 어떤 의미 연관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상황은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상황은 이 양자가 동시에 나의 현존재에 대하여 利益 혹은 損害, 幸運 혹은 制限을 뜻하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현실적 존재 방식이 상황 내 존재인 한 인간의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 상황의 意義도 달라진다. 상황이라는 개념은 외적인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특수한 품성, 즉 육체적·정신적인 상태까지도 의미한다.

상황은 언제나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그런 유동적인 것이다. 인간 주변의 제 사물들, 즉 환경이 인간의 의사와 관계없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의 변화에는 현존재인 인간의 능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은 실존의 능동적 결단과 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새로운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상황을 구상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키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상황을 확실히 주어진 것으로서 감수해야하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다음에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행위하기 위하여 계산하면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기술적, 법률적, 정치적 행위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창조적인 상황을 만들어나간다. 인간은 하나의 목표만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은 상황내 존재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상황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기의 삶의 순간 순간마다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인간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황은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방해하면서 짓누르기도 한다. 상황은 그것이 위기의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현존재는 자신이 항상 어떤 상황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지라도 자기를 구속하는 상황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경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현존재는 상황을 변경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황은 현실적으로 항상 변한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상황을 변경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현존재가 구속되어 있는 그때 그때의 상황이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사실도 분명하지만, 상황이 변할지라도 현존재는 항상 어떤 상황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도 명확하다. 야스퍼스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존재는 상황 내의 존재인 까닭에 나는 결코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상황은 인간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무엇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따로 따로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상호관련 되어 있다. 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지라도 인간은 즉시로 다른 하나의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상황적 관련성 때문에 근원적으로 인간은 상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대부분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일반에 대해서는 능동적인 구상 등의 노력을 통하여 상황을 피하거나 부담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나 현존재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보다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다른 상황이 있다. 야스퍼스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상황을 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규정한다.

내가 항상 상황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 나는 투쟁이나 고통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나는 불가피하게 부채를 안고 있다는 사실, 나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限界狀況이라고 한다.

한계상황은 변경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계상황은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현존재에게는 겉모습만 변화하여 나타난다. 한계상황은 현존재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하나의 구속이다. 한계상황은 변경 가능한 상황일반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들은 비록 그때 그때마다 다르지만 현존재가 그것에 놓여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과 현존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계상황은 그 자체가 변하지 않고, 오직 그것들이 나타남에 있어서만 변화한다. 한계상황이 인간의 현존재에 관계하는 한 궁극적이고 근본적이다. 그것들은 展望될 수 없다. 인간은 그 배경에서 이미 그것 이외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한계상황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는 하나의 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설명되거나 연역되지 않고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한계상황의 개념에서 '한계'라는 말은 야스퍼스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한계상황에 있어서 '한계'라는 개념은 他者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는 현존재의 의식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은 이미 의식일반에 있어서의 상황이 아니다. 현존재의 의식일반은 한계상황의 참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경 가능한 상황일반과 변경 불가능한 한계상황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상황일반과 한계상황의 차이점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한계상황의 체험이 필수적이며, 한계상황의 의의도 여기에서 성립된다.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이 한계상황에서의 체험을 본래적 자기로, 즉 가능적 실존에서 현실적 실존으로 비약하는 계기로 삼느냐 아니면 한계상황에서의 체험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여 현존재로 계속 머무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한계상황을 받아들이는 현존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서의 체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한계상황에 반응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이나 타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별개의 능동성, 즉 우리 내부의 가능적 실존의 생성에 있다.

그러므로 한계는 아직 내재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이미 초월자를 가리킬 만한 그 본래의 기능을 시작한다. 개별적인 한계상황, 즉 죽음·고통·투쟁·죄책 등을 체험함으로써 초월이 일어난다.

실존 철학 이외에서는 현재의 질서가 불충분한 데서 한계상황이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기 때문에 단지 이 질서를 개선하려고만 하였다. 질서로서 인식한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제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것들과 대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은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그것이 아니면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것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한계상황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로써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다. 현존재는 한계상황이 억압하는 현실에 부딪히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행동의 근거에 회의를 느낀다. 현존재는 삶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에서부터 불안을 감지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좌절은 가능적 실존을 현실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1) 죽음 (Tod)

현존재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객관적 사실이며 인간은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시간적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은 삶과 더불어 있다. 죽음은 삶 자체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삶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이 아무리 회피하려 해도 회피할 수 없는 근본상황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극복하기 어려운 불안과 좌절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죽음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죽음은 전형적인 한계상황이다.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에게 있어서 한계상황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 이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에게 있어서도 죽음은 한계상황이 아니다. 현존재의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은 그것만으로는 아직 한계상황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은 역사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가능적 실존의 현상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에 있어서만 모든 사물에 대한 종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죽음의 필연성과 無常性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거나 하나의 지식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현존재인 나는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는 죽음을 내면적으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이 아닌 나의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때 죽음은 한계상황이 된다.

죽음은 한계상황에서 역사적으로 되며,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에는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나의 죽음'이 있다. 야스퍼스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와 얽혀있는 가까운 이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현실적인 생활 속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斷絶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보다 더욱 결정적인 한계상황은 나의 죽음이다. [결정적인 한계상황은 나의 것으로서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은 유일하고 완전히 非客觀的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
나의 죽음이 아무리 결정적인 한계상황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할지라도 내가 객관적으로 실제로 죽는 삶의 최후의 죽음으로서의 '나의 죽음'은 의미가 없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 경험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으로서의 나의 죽음은 가능적인 죽음을 말한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죽음의 관계에서 죽음의 의미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로 귀결되는 질병의 직접적 고통이나 치유의 불확실성에 따르는 절망감, 예측 가능성의 범위에서 벗어나 불쑥 내 앞에 나타나게 될 돌연사(突然死) 등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함으로써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의 죽음이 시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존재는 자기에게는 죽음이 닥치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망각한 채 살려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망각되거나 회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개 인간들은 죽음의 의미를 변형시켜는 것을 통해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현존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존재할 때는 나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죽음이 존재할 때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과 나는 하등 상관이 없다.] 인간들은 죽음을 한계상황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현존재가 가능적 실존에서 현실적 실존으로 되기 위해서는 죽음의 한계상황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는 죽음에 직면하여 현존재로부터 가능적 실존에로 비약하는 결단을 감행해야 한다. 인간이 죽음을 불가피한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또 죽음에 직면해서도 본래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은 실존에 대해서 모든 현존재의 경험의 이중성을 요구하고 있다. ·····죽음에 직면해서 본래적으로 남는 것은 실존적으로 행해진 것이고 무상한 것은 단순한 현존재이다.

죽음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은 현상이지 존재자체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죽음에의 불안과 고통은 실존에의 확신으로 전환된다.

인간은 실존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다른 불안을 느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단순한 생존에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대면하여 아직 실존하지 못한, 즉 아직 본래적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 점 때문에 불안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불안을 '실존적 非存在의 불안'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이 가능적 실존이 현실적 실존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본래적 존재에로의 비약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즉 실존으로의 비약이 가능해진다. 야스퍼스는 [죽음의 고통은 되풀이해서 경험되어야만 하고, 실존적 확신은 늘 새롭게 획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계상황의 진정한 체험은 이러한 긴장이 반복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은 인간의 현존재에게는 결정적인 종말이 되고 실존에게는 '초월자 앞의 본래적 자기'에게로 비약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 고통 (Leiden)

인간은 매 순간 무수한 고통의 위협을 받고 있다. 현존재인 인간은 육체적 고통, 신체적·정신적 질환, 노쇠, 타자의 권력에의 복종, 기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고통은 현존재의 제한이며, 부분적 파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양과 성질은 각기 다를지라도 누구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통을 한계상황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현존재는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거나 회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야스퍼스는 현존재와 고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고통을 마치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회피할 수 있는 것처럼 태도를 취한다면, 나는 아직 한계상황 내에 있지 않다. 나는 고통을 數에 있어서는 무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현존재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으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이 경우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고, 현존재 전체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한계상황으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실존을 실현하는 본질적인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현존재가 불가피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서 그것과 싸우는 현실적 태도에 있어서 고통은 한계상황으로서의 의의를 가지며 인간에게는 본래적 존재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나의 고통을 나에게 주어진 몫으로 파악하여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것과 싸우는 태도에서 가능적 실존은 하나의 근원에서 자신을 자기의 초월자와 함께 있는 존재로 비약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 동반하는 모든 고통 때문에 체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실존개명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실존으로의 비약이 가능하다.

3) 투쟁 (Kampf)

현존재는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투쟁을 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은 불가피한 한계상황이다. 투쟁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행동에 의해 만든 한계상황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며, 투쟁은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형식이다.] 야스퍼스에 있어서 삶 자체는 투쟁임을 뜻한다.

투쟁에는 '현존재를 위한 폭력적 투쟁'과 '실존을 위한 사랑의 투쟁'이 있다. 현존재를 위한 폭력적 투쟁은 물질적 투쟁으로서 인간 자신의 생활권과 물질적 조건을 위한 투쟁이다. 모든 현존재는 他者보다는 더 풍요한 依·食·住를 갖추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보다는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도처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투쟁이 '현존재를 위한 폭력적 투쟁' 이다.
야스퍼스는 폭력적 투쟁이라는 한계상황에 대처하는 것으로 [인간은 투쟁을 원하지 않고 투쟁이 없는 현존재를 실현할 길을 걷던가, 아니면 인간은 투쟁을 위한 투쟁을 긍정 하든가]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제시한 이 두 가지 투쟁은 모두 피상적 방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투쟁 없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방어의 수단으로서의 폭력도 단념하거나 포기해야 하고,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경우에는 투쟁의 목적이나 내용보다는 투쟁하고 승리하는데 만족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는 투쟁이라는 한계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실존을 위한 사랑의 투쟁은 자신과 타자 모두의 실존을 위한 투쟁으로서, 이것은 실존 상호간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실존적 사귐'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타자와 나 자신을 함께 문제의 중심에 두어 나 자신과 타자의 실존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실존의 현실화가 불가능하게 되면 사랑의 투쟁은 한계상황으로서 무의미하다. 실존의 현실화를 위한 사랑의 투쟁에 있어서는 타자와 자신의 존재자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고 폭력과 상대적 우월성도 배제되어야 한다.

사랑의 투쟁은 단독자로서의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대체 불가능한 단독자로서의 자신과 타자를 수준의 동등성에서 사랑의 사귐을 가능하게 만든다. 타자의 근원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근원이 한계상황과 실존의 사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투쟁을 통하여 나와 너는 자기를 가장 깊이 있게 자각하고 본래적 자기에 이르게 된다.

4) 죄책 (Schuld)

모든 행위는 그 행위자가 알지 못했던 모든 결과를 세계 내에 초래한다.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놀란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의 결과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의 이 말에서 본바와 같이 죄책은 불가피하다. 즉 인간은 예상했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간에 인간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죄책에 빠지게 된다. 비록 내가 파멸하거나 혹은 대가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나의 쟁취는 남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나는 죄책에 빠진다. 결국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죄책을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죄책을 피할 수 없고 그로 말미암아 운명적인 고뇌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불가피한 죄책을 한계상황으로 파악함으로써 가능적 실존은 죄책을 자신의 것으로 감수한다. 불가피한 죄책을 짊어진 가능적 실존은 이제는 다만 비약을 추구하는 긴장 속에서 살 수 있을 뿐이다. 죄책이라는 한계상황을 통하여 인간은 본래적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한계상황은 그 속에서 인간을 현존재의 한계에로 이끌어 가는 그런 상황이다. 한계상황의 체험은 '고기 속에 있는 가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인간의 눈앞에 자기 현존재의 불완전성이 절실하게 반영된다. 즉 한계상황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형식으로 인간의 유한성이 경험된다.

야스퍼스는 상황일반의 규정을 통하여 인간이 상황 내 존재라는 점과 여기서 드러나는 현존재의 유한성을 전제로 하여 한계 상황을 규정하고, 그리고 이 한계 상황을 통하여 비약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3. 한계상황의 체험과 실존개명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상황을 야스퍼스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것에 직면하여 좌절하는 벽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이 좌절을 어떻게 경험하는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한계상황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실존 개명의 요체로 보고 있다.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인간이 단순히 좌절만 한다면 한계상황은 현존재에게는 의의가 없다. 현존재를 압도하는 한계상황은 인간 자신에게 좌절이라는 깊은 아픔을 가져다 주는 한편 좌절하는 가운데 초월자(Transzendenz)를 감지케 하는, 즉 본래적 자기로 되려는 충동을 일으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야스퍼스가 [한계상황에 있어서의 근원은 좌절 가운데서 존재에의 길을 얻을 수 있는 근본 충동을 가져온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점에서 한계상황에 반응하는 양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현존재가 취하는 태도에는 좌절하는 것과 본래적 자기로 되는 것이 있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 직면한 현존재의 태도에 대하여 [현존재로서의 우리는 한계상황 앞에서 우리의 눈을 감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회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현존재가 한계상황에서 도피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간파한 말이다. 인간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압도하는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결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계상황은 결코 소멸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존재 자체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상황을 외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계상황을 회피하려는 현존재는 한계상황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한계상황이라고 할 때의 한계는 의식일반(das ewu tsein berhaupt)에 의해서 지적으로 인식되는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계는 어떤 他者가 존재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他者는 현존재내의 意識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계상황은 더 이상 意識一般에 대한 상황이 아니다.

의식일반은 단지 객관적 사실로서 그런 상황이 있다는 객관적 서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계의 근원을 지향하여 그 근원에로 접근해 들어가지는 못한다. 일반의식으로서의 인간 역시 한계상황에 직면해서 좌절할 뿐이다.

한계상황에 있어서 근원은 '가능적 실존'일 때만 인간에게 경험된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계상황은 어떤 오성적 개념도 아니고 또한 對象的 범주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규정된 제상황이 개념적으로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 나에 대하여 특수한 깊이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신호(Signum), 또는 단순한 指示者이다. 한계상황 내에 잠겨져 있는 깊이는 본래적으로 나 자신일수 있는, 진정하게 實存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나 자신 속에 고유한 깊이에서만 경험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계상황은 본래적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가능적 실존에게만 의미가 있다. 가능적 실존이 한계상황을 주체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본래적 자기로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야스퍼스는 [우리는 눈을 뜨고 한계상황에 들어감으로써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계상황을 회피하지도 않고 망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체험하는 실존적 태도에서 비로소 인간은 본래적 자기를 실현한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실존한다는 것은 초월자로부터 贈與된 자기를 覺知 한다는 것으로서 초월자 앞에 선다는 뜻이다. 한계상황의 경험은 초월하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실존의 특성은 초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초월하려는 행위를 통하여 본래적 자기로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한계상황에서 현존재의 초월 문제, [내가 하나의 과거로부터 하나의 미래로 발을 디디는 의식적인 내적 행위]로서의 비약의 문제가 제기된다.

현존재에게 있어서는 한계상황에서의 주체적 체험을 하는 가운데 세 가지의 비약이 일어난다. 그것은 첫째로 현존재로부터 실존으로의 飛躍, 둘째로 자기 자신을 가능적 실존으로서 개명하는 실존으로의 飛躍, 셋째로 현실적인 실존으로의 飛躍이다.

첫째의 비약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보편적으로 인식해 가는 고독한 자기에로의 비약이다. 야스퍼스는 고독한 자기에로의 비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세계 밖에 있어 마치 내가 해양의 한 가운데의 안전한 孤島에 있는 듯이, 나 자신의 앞에 서서 거기에서 나는 저쪽으로 꺼져가는 파도치는 대기권을 주시하듯이, 목적도 없이 세계 속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는 내 知의 의식으로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올바른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의 입장이다. 모든 상황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자의 실체적인 고독은 세계를 넓게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내부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자기존재의 고독에 안주하며, 마치 点이 되어 사라지고, 자신이 인식한 것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고독은 현실적으로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세계 내에로의 새로운 한 걸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밖으로 나아가려는 첫 번째 비약을 한 후에도 역시 인간은 현실적인 것에 관계하고 있는 가능적 실존으로서 여러 상황 속에 있는 현존재로서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독은 그 내부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야스퍼스는 [고독한 자기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한계상황을 본래적으로 감지하게 만드는 지식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할수록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객관적 대상으로서만 인식한 세계는 기반이 없다. 이 점을 명확하게 알았을 때 비로소 실존의 자유를 위한 공간이 열리고, 실존에게는 세계로부터 초월자에게로 비약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無狀況的인 고독 속에 숨어 있는 자기존재는 자기 개명을 위한 제2의 비약을 시도하게 된다.
두 번째의 비약은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서 개명하는 실존으로의 비약이다.

인식 활동을 하는 자기존재로부터 그의 가능적 존재의 의식으로의 비약은 타당하게 인식하는 것 대신에 꿰뚫어 볼 수 없는 한계상황의 개명에로 나아간다.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고독한 자기 존재는 무상황적인 인식활동을 시도함으로써 한계상황을 자기와 관계없는 것으로 분리시켰으나 이제 한계상황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고 가능적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는 자기의 숨겨진 가능성을 음미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개명하는 고찰에 의해 한계상황 내에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명백히 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개명하는 고찰에 아무리 열중하여도 그것은 아직 실존적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존의 실현은 그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 개명의 사유는 그의 역사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로 초월하는 것인 실존하는 것의 실현을 준비하기 위한 것] 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개명하는 고찰은 실존의 실현을 위한 본래적 비약을 준비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비약은 가능적 실존으로부터 현실적 실존에로의 비약이다. 한계상황이 상황 일반과 같이 객관적으로 인식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하여 현존재의 내부에 비약이 가능해 짐으로서 진정한 한계상황이 된다. 이러한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비약을 통해서 실존이 자기를 확신하고 그 특징을 나타낸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비약을 본래적인 비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비약의 각 형태는 한계상황에 있어서 현존재로부터 실존에게로 인도한다. 이러한 비약의 각 형태는 [서로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 방향에서 일어나는 상승적인 계열이 아니라 서로 촉진하면서 향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약의 각 형태가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상실한다면 일탈이 된다.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비로소 비약이 일어나는 바, 첫 번째의 비약에서는 많은 세계현상 속에서 철학하는 것으로 이끌고, 두 번째의 비약에서는 실존개명으로서 철학하는 것으로, 세 번째의 비약은 실존의 철학적 생활로 이끈다.


4. 실존에 대한 존재자체로서의 초월자 이해

야스퍼스는 [과학적으로 인식되는 세계는 지반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완결된 전체자, 조화 있는 총체적 구조, 명확한 인과의 틀 속에서 일관하고 있는 합목적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그 자체에 의거해서 이해되지 않는다. 만일 세계가 총체적인 통일체라고 한다면 그 세계야말로 존재 자체가 되며, 그 외부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찰함으로써 비로소 사유에는 실존의 자유를 위한 공간이 열려지고, 실존에게는 세계에서 초월자에게로 비약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난다. 초월자에 대한 관계없이 실존은 있을 수 없다. 현존재는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서만 초월자로 눈을 돌리고 비약할 수 있다.

야스퍼스에 있어서 철학은 초월적 방법을 지니는 것이며 이 초월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참 모습을 밝혀낼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것, 인간을 넘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존재까지도 해명한다. 인간 이상의 것, 인간을 넘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존재가 바로 존재 자체인 포괄자로서의 초월자이다.

초월자는 무엇에 의하여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고, 표상에 의하여 대상화 될 수도, 어떤 추론에 의하여서도 도달될 수 없다. 그러나 초월적인 것은 量, 質, 그밖에 一者도 아니며, 他者도 아니다. 존재도 아니고, 無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모든 범주가 사용되기도 한다.

초월자는 우리의 경험이나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존재론적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초월자는 地平 뒤에 숨겨져 있어 우리에게 직접적인 명백한 말이나 행위로써 나타나지 않는 절대자로서 묵묵히 존재할 뿐이다. 초월자가 실존에게 나타나는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초월자가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은 비대상적이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초월자 자체는 현상하지 않는다. 반면에 세계 내의 일체의 것은 대상적이다. 세계의 대상적인 것과 초월자를 비교하면 초월자는 결코 일정한 대상이 될 수 없다.

둘째로 초월자는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지식이라는 것은 대상, 즉 어떤 사물의 본질이나 특성 등을 파악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초월자는 대상이 아니므로, 즉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현존재가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서 초월자를 대면하려 할 경우에는 어떠한 지식도 소용이 없다.

셋째로 초월자는 강제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지적 지식은 보편 타당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엄밀성과 강제성을 띤다. 그러나 초월자는 비대상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강제성을 요구할 수도 없다.

넷째로 초월자는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이 아니다. 인간의 현존재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 고독하게 한계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초월자의 끝없는 침묵에 나를 맡겨야 한다. 초월자와의 대면은 결코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일 수 없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초월자는 직접적 타자 또는 身體性(Leibhaftigkeit)의 절대자로서 나타날 수 없다. 초월자는 오직 실존에게만 비대상적 존재로서 나타난다. 초월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暗號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암호는 초월자가 실존에게 말을 걸어올 때의 그 언어이다. 야스퍼스는 [암호는 실존과 관계될 때 진실한 것이 된다. 실존을 사로잡는 초월적인 힘은 암호로서 말한다.] 라고 하여 암호가 실존의 근거를 개명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암호는 현존재로서는 알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지평 저 너머에 있는 근본존재 또는 존재자체를 지시하고 개명해 주는 언어이다. 그러나 암호는 보편 타당한 것으로 경험되거나 검증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존재의 현실적인 언어가 아니다.

오성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자는 오직 암호라는 언어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실존은 이 암호를 해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는 암호의 해독이 결정적인 것이다.

초월자가 실존에게 스스로를 알리는 방법이 암호이다. 모든 형상, 표상, 사상 등이 초월자의 암호로 될 수 있다. 초월자의 암호는 자연, 역사, 예술, 신비주의, 형이상학, 종교 등 어디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어떠한 암호도 초월자 또는 神 그 자신일 수는 없다.

야스퍼스가 [어떤 암호도 충분한 것이 못된다.]라고 한 것은 암호의 難解性과 多義性을 지적한 말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암호는 초월자 자신이 아니라 초월자의 현실성을 지시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보편 타당한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多義的인 언어이다. 암호는 인간의 오성(Ver- stand)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직 가능적 실존(m gliche Existenz)으로서의 인간 자신에 의해서만 청취 될 수 있다.

초월자는 한계상황에 직면한 가능적 실존에게 암호로서만 나타나는 존재이지 논증되는 존재자가 아니다. 따라서 초월자에의 체험은 인식이 아니라 암호 해독이다.

초월자의 암호해독을 통해서 실존을 개명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적 신앙이고, 철학적 신앙은 隱蔽된 神에 대한 信仰이다. 지적 인식에 대해서는 무한히 먼 곳에 숨어 있는 神이 자기를 실존으로서 실현해 가는 인간에게는 그 암호를 통해서 감득된다는 의미에서 철학적 신앙은 실존에 의한 신앙이다.

초월자는, 인간이 초월자에 대해서 태도를 취하는 방식에 쫓아서,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들의 태도의 방식에 따른 초월자의 나타남 그 자체가 암호이다.

암호는 실존이 되려고 하는 인간에 의해서만, 그 존재방식에 따라서 암호로서 해독될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각자의 실존에 따라서 해독하는 암호를 선취한다는 형식으로 암호와 암호의 대결이 일어난다. 실존은 자기가 암호를 해독하는 방식에 쫓아서 특정의 자기로 되어 가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여하한 神을 자기 앞에 갖는가에 따라서 그 자신이 된다. 그가 그 자신으로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가 해독한 암호의 神觀念에 따라서 개명되고 인도된다.

그리하여 초월자의 암호와 인간의 실존이 서로 상응하고, 암호 해독에의 의지는 세계 내에서의 실존에의 의지와 같은 것이다. 야스퍼스는 결코 추상적 일반적인 것으로서, 은폐된 唯一神에의 신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래적 자기를 증여하는, 본래적 현실성으로서의 초월자의 확신은, 그것이 비록 지적 개념적으로는 아득히 먼 곳에 있지만 한계상황에서 무제약적으로 행동하는 자유인 실존적 자유를 매개로 해서, 각자의 방식에 쫓아서 감득되는 것이다. 철학적 신앙은 결코 궁극적 一義的인 특정의 神에의 신앙이 아니며, 숨어있는 神의 나타남으로서의 암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이다.

암호는 초월자의 암호로 받아들여지는 한, 암호 해독의 순간에 있어서 그것은 각인에게 바꾸어 치울 수 없는 확신을 부여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무제약적이다. 그 순간에 인간은 굉장한 안정을 느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정의 무시간적 계속은 실존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동요해 마지않고 불안해 마지않는 이 세계 내의 암호를 넘어서 피안의 안정을 동경하지만, 그때 역시 신비주의적으로 이 세계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를 통해서 존재자를 경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多義的이고 불안정한, 따라서 고정된 내용을 가지지 못한, 그리고 보편 타당성이 없는 암호, 비록 무제약적이긴 하나, 절대성이 없는 암호, 이와 같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초월자의 현실성을 감득하고 실존이 개명된다.


5. 결언

야스퍼스의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의 하나는 세계와 인간이 이율배반적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에 전제된 이율배반적 구조는 모든 현존재에게도 적용된다.

가능적 및 현실적인 악을 수반하지 않는 선도 존재하지 않고, 거짓을 수반하지 않는 진리도 존재하지 않고, 죽음을 수반하지 않는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의 이율배반적 구조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 전체에서 전제된 것이지만 특히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에서 전제된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생명 본능을 가진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 앞에서 좌절한다. 세계의 인식에 있어서도 知의 한계 때문에 세계를 전체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오성적 사유의 노력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이율배반인 것이다. 경험적 및 합리적으로 자기를 성찰하고자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도 좌절한다. 그리고 실존개명과 실존적인 자기실현 역시 원칙상의 한계를 체험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것과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이율배반적 구조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통하여, 즉 현존재의 유한성과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을 긍정적이고 주체적으로 해결함을 통하여 실존을 개명하고 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의 근본 지향점은 좌절을 통하여 초월하는 것이며 그의 철학 사상이 세계에서 실존으로, 실존에서 초월자로, 즉 근원적인 것에게로 초월하는 것도 처절한 좌절의 체험 그리고 그 좌절에서의 비약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을 상황 내 존재라고 한다. 인간이 상황 내 존재이기 때문에 좌절에 빠져야 하고 그래서 실존의 개명이 요청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상황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상황 가운데서도 인간의 가능한 모든 능동적인 노력으로써도 변경하거나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상황인 한계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한계상황에는 죽음, 고통, 투쟁, 죄책 등이 있으며, 현존재는 자기를 압도하는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서 처절하게 좌절한다. 한계상황은 인간존재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계상황은 현존재로부터 실존으로 비약하게 하고 또 초월자의 암호를 청취할 수 있게 한다. 한계상황은 가능적 실존이 현실적 실존으로 되는 결정적 기회와 계기이다. 모든 현존재는 한계상황에 직면하지만 모두가 좌절하거나 난파당하지는 않는다.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서 한계상황은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계상황의 체험에서, 즉 자신의 이율배반을 깊은 심도에서 체험한 현존재는 他者, 즉 초월자를 만난다. 다시 말하면 좌절과 절망 때문에 난파 당하는 순간에 초월자의 암호를 만난다.

야스퍼스는 초월이란 대상적인 것에서 비대상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초월자란 대상적인 현존재와 비대상적인 실재의 존재근거가 되는 궁극적 포괄자라 말한다. 초월자는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가능적 실존을 체험함으로써 계시되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지 논증되는 존재자가 아니다. 초월자는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암호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낼 뿐이다. 그래서 초월자는 실존이 그 근원에 접촉함으로써 이른바 암호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숨은 神(ver- borgener Gott)인 것이다.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에 대한 긍정은 철학적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의 순간에 대면하는 초월자 앞에 서서 존재 자체를 개명하고자 하는 염원인 철학적 신앙이 인간을 본래적 자기로 만들어 준다. 철학적 신앙은 계시 종교의 배타성을 배제하고 무제한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에의 신앙이다. 한계상황을 체험하는 것은 초월자의 顯現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계상황이 없다면 실존 개명도 불가능하다. 실존은 인간의 현존재가 한계상황 앞에서 난파하고 좌절함으로써 현현하는 초월자의 암호 해독을 통해서 비로소 개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