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밀란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나뭇잎숨결 2020. 6. 9. 12:23

 

 

 

 By: Don Paulson  'A Study in Browns'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여유, 여백, 유모와 관련된 생의 느슨함이다. 게으름과 구별되는 생에 대한 관조, 소요유, 지복직관이다. 생의 갈피를 보는 이 비결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소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대한 확답을 찾는 데서 오고, 소설의 지혜는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찾는 데서 온다. 소설가는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하나의 질문으로 파악하도록 한다. 이러한 태도는 지혜와 관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확실들 위에 건설된 세계는 죽음의 세계이다. 전체주의 세계는--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도그마이건 이슬람주의 교리이건 혹은 그 무엇에 기초를 두고 있건--질문의 세계이라기보다는 대답들의 세계이고, 거기에는 소설 따위가 설 자리가 없다. 사유의 여백이 전무하다.

 

  

소설의 역사는 근세와 함께 시작된다. 즉 중세를 지배해 왔던 하늘의 유일한 진리가 인간들이 나누어 갖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실들로 흩어져 버리기 시작했던 시대에 탄생한 것이다. 그는 지고의 심판관을 잃어버린 이 세계의 무시무시한 애매성을 직시해 보려는 노력이 곧 소설이라는 양식의 예술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소설 본연의 정신이란 그러므로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무더기와 맞서야 하며 따라서 ’불확실함의 지혜‘를 유일한 확실성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다. 애매성과 상대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계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적 문제들을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인물을 통하여 관찰해 보려는 노력이 곧 소설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노력의 반대편에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대개 애매성과 상대성을 감당하거나 직시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이 갖게 되는 무력감의 표출로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은 복잡한 이해보다는 단순한 심판을 선호한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중에서

 

 

 

 

 밀란 쿤데라의 <사유하는 존재의 즐거움>은 바로 소설 <느림>에서 구체화된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실은 사유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은 빛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질주하는 정신이 권태(어둠)로 그 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서 찰라의 행복들을 직관하고 그것을 영원 속에 합류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된다.

 

선택되었다는 것은 신학적 개념이다. 아무런 공덕 없이, 어떤 초자연적인 평결에 의해, 신의 자유로운, 또는 변덕스런 의지에 의해, 예외적이고 범상치 않은 뭔가로 뽑혔다는 것, 바로 이러한 확신 안에서 성자들은 더할 수 없이 잔혹한 형벌들을 견뎌내는 힘을 길렀다. 이 같은 신학적 개념들은 각기 나름대로 모방되어, 우리 인생의 사소한 일들에 반영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너무나 평범한 삶의 저열함을(다소간) 괴로워하며 이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고양시키고자 한다. 우리 모두가 제각기 그 같은 고양에 합당하다는, 이를 위해 선택되었고 예정되었다는(다소 강렬한) 환상을 경험했다.

 

선택되었다는 감정은, 예를 들면, 모든 연애관계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정의상, 공덕없이 받은 선물인 까닭이다. 공덕없이 사랑받는 다는 것, 이는 진정한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다. 만약 어떤 여인이 내게, 네가 똑똑하기 때문에, 네가 정직하기 때문에, 네가 선물들을 많이 사주기 때문에,  네가 외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설겆이를 해주기 때문에 너를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실망한다. 이 사랑은 뭔가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인 듯하다. 한편 이런 말들은 얼마나 듣기 좋은가. 비록 네가 똑똑하지도 정직하지도 않고, 비록 네가 거짓말쟁이고, 이기적이고, 개자식이라도 난 널 미치도록 사랑해. 아마 인간이 선택받았다는 환상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젖먹이 때, 공덕없이 받으면서 기세도 좋게 요구하던 어머니의 보살핌 덕택일 것이다.

 

나는 실존 수학 교본 맨 첫번째 장들 가운데 하나에 드는 이 유명한 방정식을 상기한 바 있다.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이 방정식에서 우리는 여러 필연적 귀결들을 연역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를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더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 밀란 쿤데라의 <느림> 중에서

 

생에 대해서 명명백백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풍경을 구경하며 질문하는 자, 깊은 시선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자만이 속도의 망각속에서 자기 영혼을 지켜낼 수 있다.  행복은 너무나 단순한 공식 속에 있다. <사유하는 존재의 즐거움>을 체화하는 것은 질주와 속도 속에서 순간에 머무를 수 있는 느림과 동행하는 것이리라. 그 동행은 생의 곳곳에 숨겨진 유머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누가 내게 독자들과 나 사이에 생기는 오해들의 가장 빈번한 동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 유머라고. 내가 프랑스에 온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아 무엇에나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저명한 의학 교수 한 분이 <이별의 왈츠>를 좋아한다며 나를 만나 보길 청했는데, 나는 매우 흐뭇했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나의 소설은 예언적이다 ; 물의 도시에서, 특별한 주사기로 자기 자신의 정액을 주입하면서 표면상 불임인 여성들을 치료하는 의사 스크레타라는 등장 인물과 더불어, 나는 미래라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인공 수정에 관한 한 토론회에 나를 초대한다. 그가 주머니에서 종이 쪽지를 하나 꺼내더니 자기 발언의 초고를 내게 읽어준다. 정자 증여는 익명이고 무료여야하며, (이 때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본다) 다음의 세 가지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 자신의 사명을 수행코자 하는 미지의 난자에 대한 사랑 ; 이 증여에 의해 연장될 자기 자신의 개체성에 대한 증여자의 사람, 그리고 세 번째로는, 고통받는, 욕구 불만인 어느 커플에 대한 사랑.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금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 그의 그 모든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나에게 비판을 가한다 : 내가 정자 증여의 도덕적 아름다움을 충분히 강력하게 표현해 내지 못했다고. 나는 나를 변론한다 : 소설은 희극적인 것이다! 나의 의사는 환상가다! 모든 것을 그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자 그가 의심스러운 듯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소설들, 그것들을 진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제 4의 책>에, 해상 폭풍우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모든 사람이 갑판 위로 나와 배를 구하려고 애를 쓴다. 단지 파뉘르쥬만이, 두려움에 질려, 신음만을 토하고 있다 : 그의 멋들어진 탄식들이 수페이지에 걸쳐 펼쳐진다. 폭풍우가 가라앉자마자, 용기를 되찾은 그는 사람들 모두를 게으르다며 혼내 준다. 바로 이 점이 재미있다 : 이 비겁자, 게으름뱅이, 거짓말쟁이, 엉터리 배우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는커녕,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하는 때는 이처럼 그가 허풍을 떨 때라는 것. 라블레의 책이 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즉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들에서이다.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그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판단하는, 이해하기 이전에 이해함이 없이 판단하는 그 뿌리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이 맹렬한 판단에의 자유, 이는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혐오스런 어리석음, 가장 해로운 악이다. 소설가가 도덕적 판단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반대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는 그 판단을 소설 저 너머로 보내 버린다. 거기서야, 여러분이 원한다면, 파뉘르쥬를 비겁하다고 비난하든, 엠마 보바리를 비난하든, 라스티냑을 비난하든, 그건 여러분의 일이다 ; 그것까지야 소설가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상상적 장(場)의 창조는 무한한 영향을 끼친 공적이었다 : 오직 여기서만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다시 말해서 예정된 진리에 따라 구상된 개별자들, 선과 악의 예들로서나 혹은 서로 적대하는 객관적 법칙들의 대표로서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도덕, 그들 고유의 법칙을 토대로 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물들이 피어날 수 있다. 서구 사회는 의례 인권사회로 자처한다 ; 하지만 인간은 권리를 가질 수 있기 전에, 자신을 개체로 구성할 수 있어야하고, 자신을 어떤 자로 간주하고 또 그런 자로 간주될 수 있어야 한다 ; 이는 유구한 여러 유럽 예술이 없고서는, 특히, 독자로 하여금 타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자기 것과는 다른 진실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소설 행위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오랑이 유럽 사회를 『소설 사회』라 부른 것, 그리고 유럽인들을 『소설의 아들들』이라 말한 것은 옳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중에서

 

 

 

쿤데라는 말한다. "소설의 존재 이유가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덧붙여,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 후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특히 나는 파리에서 자유와 유머와 느림을 보았습니다. 어떤 도그마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사유하는 영혼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