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츠베탕 토도로프, 문학의 환상성

나뭇잎숨결 2020. 6. 10. 11:29

 

 

The Luncheon. 1873. Oil on canvas. Mus�e d'Orsay, Paris, France

 

 

 

 

토도로프와 베시에르의 환상성 이론

오스카르 한(Oscar Hahn)/박 병 규 옮김



     환상문학을 정의하고 주제를 분류한 이론가들은 많다. 프랑스에서는 카스테, 카이유와, 브리옹, 슈네데르, 자크망, 제노, 박스, 벨망-노엘이 커다란 공헌을 했다. 영어권에서는 펜졸트, 러브크래프트, 오스드로프스키, 스카보로를 꼽을 수 있으며, 스페인어권에서는 보르헤스, 비오이 카사레스, 코르타사르, 바레네체아, 벨레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엄밀한 경계도 없고, 정확한 개념도 없으며,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도 없다.

     환상성 이론은 토도로프의 『환상문학 입문』(1970)과 베시에르의 『환상 담론』(1974)이 출판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사람의 개념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겠다.


1. 토도로프의 이론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문학은 장르를 형성하며, 이 장르의 규칙들을 확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토도로프는 모든 이야기문학(narrative)을 다음과 같은 국면으로 구별한다. 1) 언어적 국면: (화자와 청자의) 발화행위(enunciation)와 발화를 다룬다. 2) 통사적 국면: 상이한 이야기 단위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3) 의미론적 국면: 주제를 다룬다. 환상성(the fantastic)은 이 세 가지 국면에서 표현되어야 하며, 이상한 ―명백하게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모호한 지각이 특징이다. 화자와 등장인물과 내포독자는 이러한 사건에 직면했을 때, 객관 세계 법칙의 단절을 드러내는 사건인지 아니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인지 구별할 수 없다. 만약 객관 세계 법칙의 단절이라면 경이성(the marvelous)에 속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괴이성(the uncanny)에 속한다. 오로지 미결정, 망설임만이 환상성에 속한다. 따라서 환상성은 다음 네 가지 장르 한가운데 위치한 분할선으로 표현된다.

순수한 환상
순수한 괴이 | 환상적 괴이 | 환상적 경이 | 순수한 경이


     한편, 이상한 사건이 전개되는 세계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처럼 제시되어야 한다. 환상문학은 또 하나의 조건을 요구한다. 즉, 시(詩)나 알레고리 문학이 아니어야 한다. 독자는 텍스트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토도로프는 허구와 시를 대립시킨다. 시는 무엇보다도 발화를 강조하므로 대상을 환기하고 재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사건을 지각하기도 어렵다. 이 점 때문에 시 텍스트는 “순수한 의미의 조합”(76)으로 읽힌다. 반면에, 알레고리는 비유적 의미의 전개가 특징이다. 사건을 축어적으로 해석할 수 없으면 환상성은 표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상성이 출발할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허구나 모든 축어적 의미가 환상성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환상성은 허구나 축어적 의미와 관련이 있다.”(92)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의 문제를 고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차원을 분석한다.

     1) 발화의 차원. 초자연성은 비유적 표현이 축어적 의미를 취할 때 종종 나타난다. 환상적인 요소의 출현은 흔히 비유적 표현으로 예고되다가 나중에 사건으로 발생한다.

     2) 발화 행위의 차원. 대부분의 초자연적인 이야기에서 화자는 1인칭을 사용한다. 이로써 환상적 망설임의 출현이 용이해진다. 왜냐하면 화자-주인공의 말은, 다른 등장인물의 말처럼, 진실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현되지 않은 화자’는, 문학적 유희의 법칙에 따르면, 진실을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재현된 화자가 환상성에 적합한데, 그 이유는 독자가 쉽게 등장인물과 동일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105) 모호한 화자의 언어는 자연성과 초자연성 사이의 망설임을 조장한다.

     3) 통사론적(구성) 차원. 환상문학에서 독서의 관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첫줄부터 마지막까지 순서를 변경하지 않고 읽는 관례는― 다른 문학 장르보다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하다. 이를 “전도불가능한 시간성”이라고 한다. “[환상 문학의 경우, 독자가 미리 결말을 알고 있다면 일체의 장치가 부질없게 된다. 독자의 점진적인 동일시의 과정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상문학을 처음 읽을 때와 두번째 읽을 때의 인상은 사뭇 다르다.”(108)

     4) 의미론적 차원. 토도로프가 얘기하는 환상문학의 주제는 두 종류이다. ‘나’에 대한 주제와 ‘너’에 대한 주제이다. ‘나’에 대한 주제는 물질과 정신의 한계를 문제삼는다. 이 원리에서 특수한 인과관계, 범결정론, 다중인격,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 소멸, 시간과 공간의 변형이 유래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감각, 즉 시각의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주제는 모두 ‘시선(視線)의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145) ‘너’에 대한 주제는 성적 욕망에서 연유한다. 환상문학은 성적 남용 즉 성도착과 변태를 다룬다. 잔인한 사건이나 폭력과 관계가 있다. 이는 죽음과 저승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거나, 시체와 흡혈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된다. “인간과 욕망, 다시 말해서 인간과 무의식의 관계”이다.(166) 그리고 이 주제에서는 “주변 세계에 대한 강력한 작용”을 인식할 수 있는데, 토도로프는 이를 “담론의 주제”라고 부른다. 토도로프에 따르면, 언어는 “무엇보다도 형식이며, 인간과 타인을 연결시키는 구조적 요인이다”.(166)

     토도로프는 고전(19세기) 환상문학은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변했으며, 이제 이상한 사건은 점진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처음부터 등장하며 갈수록 자연스러워진다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환상문학의 예는 카프카의 『변신』이다. 이 작품에서는 망설임 대신에 독자가 초자연적인 사건마저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이른바 자연화 과정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작품과 고전 환상문학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면, 고전 환상문학 세계에서는 예외였던 것이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규칙이 된다”.(206)

     토도로프에 따르면, ‘너’에 대한 주제는 타부에서 파생했고, ‘나’에 대한 주제는 광기와 관계가 있다. 타부를 위반한 사람은 정신병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처벌을 받는다. 이에 기초하여 토도로프는 “초자연성의 [사회적] 기능은 법망을 피하는 것이며, 따라서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다.”(189)


2. 베시에르의 이론

     베시에르가 보기에, 환상성은 문학적 범주나 장르가 아니라 “형식적이면서 동시에 주제적인 이야기 논리를 가정한다. 독자가 보기에, 이러한 이야기 논리는 놀랍거나 자의적이며, 또 겉보기에는 순수한 창작이라는 놀이 같으나 실제로는 공동체 상상력의 문화적 변형과 이성의 문화적 변형을 반영하고 있다.”(10) 환상성은 주체와 초감각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려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지적 논의가 미학적 공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환상성은 비개연성의 현존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개연성의 병존과 그들 사이의 모순이 특징이다.

     베시에르에 따르면, 환상문학은 안드레 욜레스(Andrè Jolles)가 얘기한 두 가지 단순한 형태가 중첩된다. 하나는 “예화”(kasus)이고 다른 하나는 “수수께끼”이다. “예화”는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규범의 타당성과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짧은 이야기이다. “예화”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또 해답을 갖고 있지도 않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몫이다. “수수께끼” 또한 질문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과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 사이의 동등성 확보에 있다. 만약 수수께끼를 풀면 비밀단체의 일원이 된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은 분명히 답을 알고 있으나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답을 숨긴다.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은 숨겨진 것(in absentia)을 밝혀내야 한다. 베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예화과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사건은 결정을 요구하지만 사건 자체에는 결정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사건은 정의할 수 없는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20)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환상문학은 결정 형식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문제점에 예화의 문제점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22) 따라서 숨겨진 것은 풀어야할 대상으로 제시되지만 해답은, 비록 임박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제시되지 않는다. “예화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는 주인공의 무능력 때문에 존재한다.”(24) 이러한 두가지 “단순한 형태”의 중첩에서 환상문학을 특징짓는 모호성이 유래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환상성이란 일상성의 단절은 물론 초자연성의 단절로 정의할 수 있다. 이성/믿음, 신앙/회의 사이의 양극적 대립은 비현실이 뒤섞인 현실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자연성과 초자연성의 질서(economy) 또한 문제가 된다. 환상문학은 무모순의 원리를 위반한다. 환상문학에서 어떤 것은 “-이며” 동시에 “-이 아니다”. 반면에 경이성은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베시에르에 의하면, 환상문학은 현실적인 것과 비개연적인 것에, 경험적인 것과 메타경험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말하면, 수긍할 수 있으면서(tético) 동시에 “수긍할 수 없는”(no-tético) 이야기다. 여기서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란 현실(realia)의 재현을 추구하는 문학을 지칭하며,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란 현실의 재현(mimesis)으로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이 첫 번째에 속하는데, 이른바 사실주의 문학이 대표적이다. 경이 문학과 동화는 두 번째에 속한다. 베시에르에 따르면, 환상문학은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와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의 접점이다. 그리고 의미화 체계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이론에 기초하여, 환상성은 내포의미(connotation) 체계라고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모든 의미작용(signification) 체계는 표현 차원(E)과 의미 차원(C)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차원은 모종의 관계(R)를 맺고 있다. 이 ERC체계가 제2 체계의 요소가 될 때, 제1 체계는 외연의미(denotation)가 되고, 제2 체계는 내포의미가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내포의미 체계의 표현 차원은 의미작용 체계로 구성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도표1


     환상문학의 경우, 주인공-화자의 담론은 이중적 상태(주인공은 사건을 드러내며, 사건을 반성적으로 숙고한다)가 특징이며, 내포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이 내포의미 체계는 제2체계의 기표(비정상적이고 개연성이 없는 현상에 대한 기술)이 되는데, 제2체계의 의미는 미지 상태로 남는다. 베시에르의 공식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그릴 수 있다.

도표2




     반면에, 설명된 초자연성에서 주인공의 담론은 하나의 체계로서, 이 체계의 기표는 지각(percepts)과 자극(affects)이 형성하며, 기의는 이상한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이 전체 체계는 초자연성을 환기하는 제2 체계의 기의가 되며, 이 경우 기표는 이상한 사건이다.

도표3


     토도로프에 따르면, 이성과 객관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의 단절은 모두 초자연적 현상이다. 베시에르는 이러한 사고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건을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건을 특정 질서(economy) 속에 위치시키며, 모든 문제점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베시에르에 따르면, 초자연성은 제2의 가능한 질서를 도입하지만 자연 질서만큼이나 부적절하다. “환상성은 이 두 질서 사이에서 발생하는 망설임의 결과가 아니라 상호적이고 함축적인 기피의 결과이다.”(57)

     토도로프는 자연적/초자연적, 이성/환영, 제정신/광기와 같이 대립하는 짝에 기초하여 환상문학을 조명한다. 이와 반대로, 베시에르는 환상성이란 바로 이러한 이중성의 중립화가 특징이라고 한다.

     두 이론가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또 다른 핵심점은 공포이다.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에 종종 공포가 나타나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베시에르는 공포는 전체를 아우르는 기능을 수행하므로 기본적인 조건이다. 미결정상태, 불확실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공포를 야기한다. “공포와 불안의 효과에 의한 전체성은 감각의 부재에 상응한다.”(198)

     토도로프와 베시에르의 주요 차이점은 상이한 문학관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기술적인 차원에서 보면, 두 사람은 환상문학의 결정적인 측면을 지적할 때 일치한다. 예를 들어, 베시에르는 토도로프가 지적한 망설임에 커다란 역할을 부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망설임은 부차적 차원에서 흔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환상성의 정의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 박병규 옮김



카조트의 작품 『사랑에 빠진 악마』를 보면 주인공 알바로는 두 달 전부터 어떤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주인공은 이 여자가 악령, 다시 말해서 악마가 아니면 악마의 신봉자라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은 등장 방식은 처음부터 이 여자가 다른 세계의 인물이라는 분명한 암시이다. 그러나 이 여자의 행위가 인간적이고(게다가 여성적이고) 실제로 몸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이 여자가 단순히 여자, 사랑에 빠진 여자라는 증거처럼 보인다. 알바로가 이 여자, 비온데타(Biondetta)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공기의 요정(sylphide)입니다. 요정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요정입니다.” 하지만 요정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알바로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이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그 모두를 꿈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이상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 도대체 무엇이 가능하며, 무엇이 불가능한가?”)

따라서 알바로는(독자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사실인지, 또 주변의 일들이 정말로 사실인지(즉, 요정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환영(이 작품에서는 꿈)에 불과한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망설인다. 나중에 알바로는 이 여자와 관계를 갖지만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깜짝놀라 다시 한번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정말 잠이 들었을까? 모두가 꿈에 불과하다는 게 정말 다행한 일일까?” 알바로 어머니의 사고방식도 동일하다. “너는 이 농장(農場)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 꿈을 꾸었단다.” 이러한 모호성은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된다. 즉 현실인가, 꿈인가? 진실인가, 환영인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환상성(the fantastic)의 핵심에 도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에서, 악마도 요정도 흡혈귀도 없는 이 낯익은 세계에서,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다음 두 가지 설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사건은 감각의 환영이고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여기든지―이 경우 세계의 법칙은 원상을 유지한다―, 아니면 그 사건은 실제로 발생했으며, 현실의 일부라고 여겨야 한다―이 현실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바꿔 말해서, 악마는 환영이고 상상적 존재라고 생각하든가 아니면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실재로 존재한다고, 여간해서는 만날 수조차 없지만, 생각해야 한다.

환상성은 이러한 불확실한 순간을 점유한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두 가지 설명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자마자 그 즉시 환상성의 영역은 사라지고 인접한 장르 즉 괴기성(the uncanny)과 경이성(the marvelous)으로 옮아간다. 환상성은 자연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명백하게 초자연적인 사건에 직면할 때 경험하는 망설임이다.

따라서 환상성의 개념은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관계로 정의되는데,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좀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책 마지막 장[10장]으로 미루기로 한다.

아무튼 이러한 정의가 독창적인 것일까?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19세기 이래로 이런 식의 정의는 흔히 볼 수 있다. 처음으로 환상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오프였다. “진정한 환상성에는 현상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형식적이고 외적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설명은 내적 개연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괴이한 현상은 자연적인 인과관계와 초자연적인 인과관계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일 때 환상적인 효과가 창조된다.

몇 년 뒤, 영국 작가이며 유령 이야기의 대가인 제임스는 실제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적인 설명의 여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여지는 너무 좁아서 이용할 수 없어야 한다.” 다시 한번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이보다 후세의 독일 작가, 올가 리만은 이렇게 말한다. “주인공은 두 세계, 현실세계와 환상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명료하게 모순을 지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상한 현상 앞에서 깜짝 놀란다.” 이런 식의 정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렇지만 처음 두 정의와 세 번째 정의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처음 두 정의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 망설이는 사람이 독자라면, 세 번째 정의에서는 등장인물이다. 나중에 이 점은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해 둘 것은, 최근 프랑스 비평서에서 볼 수 있는 환상성 정의는 우리의 정의와 동일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모순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정의를 장황하게 열거하느니 이른바 ‘고전’에서 몇 가지 예를 들기로 한다. 카스텍스는 『프랑스 환상단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환상성은 [...] 현실 삶의 맥락 속으로 갑자기 침입하는 미스터리가 [...] 특징이다.” 루이 박스의 『예술과 환상문학』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환상적인 이야기는 [...] 현실 세계에 거주하는 우리들과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설명 불가능한 것에 직면하는 이야기를 기술한다”. 로제 카이유와는 『환상의 핵심』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환상성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질서의 단절이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불변의 일상법칙 한복판에서 분출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비평가의 정의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서로의 정의를 단어만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정의를 보면 ‘미스터리’, ‘설명 불가능한 것’, ‘납득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삶’이나 ‘현실세계’나 ‘불변의 일상법칙’에 침입한다. 이러한 정의는 넓게 보아 우리가 처음에 인용한 작가들이 제시한 정의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자연세계의 사건과 초자연세계의 사건이라는 두 가지 사건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비오프, 제임스 등의 정의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과 더불어 ‘누군가는’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는 사실까지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훨씬 더 시사적이고 포괄적이며, 우리가 앞서 제시한 정의도 여기서 유래했다. 또한 솔로비오프 등의 정의는 환상성을 실체로 보는(카스텍스, 카이유와 등이 그렇지만) 대신에, (괴기성과 경이성 사이에 놓인 경계선으로서) 환상성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 장르는 항상 인접 장르와 관계에서 정의된다.

하지만 이 정의는 여전히 변별력이 없으므로 우리는 선구자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망설이는 사람이 독자인지 등장인물인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망설임의 뉘앙스가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랑에 빠진 악마』는 자세한 분석을 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자료이다. 우리가 의심하고 망설이는 때는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보다 20년 후에 쓰여진 작품으로서 환상문학 시대를 열었으며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얀 포토츠키(Jan Potocki)의『사라고사에 발견된 원고』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개별적으로 보면 어느 사건도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자연법칙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건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문제가 생긴다.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알폰소(Alfonso van Worden)는 시에라모레나 산맥을 넘어간다. 갑자기 종자(從者) 모스키토가 사라지고, 몇 시간 뒤에는 하인 로페스마저도 행방불명이 된다. 그 지방 주민들 얘기에 따르면, 그곳에는 유령이 자주 출몰한다. 최근에 산적 두 명을 교수형에 처했던 것이다. 알폰소는 아무도 살지 않는 여관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반라의 아름다운 흑인 여자가 양손에 횃불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흑인 여자를 따라서 지하실에 있는 거실로 들어가 보니, 젊고 아름답고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자매가 기다리고 있다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준다. 알폰소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저 사람들이 여자인지 아니면 여자로 변장한 악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어 자매는 알폰소에게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고 그의 사촌이라고 신분을 밝힌다. 그러나 이야기는 첫닭 울음소리와 함께 중단된다. 그리고 알폰소는 이렇게 회상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유령은 자정부터 첫닭이 울 때까지만 활동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법칙을 초월한 사건이 아니다. 이상한 사건, 뜻하지 않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다음 이야기는 결정적이다. 즉, 이성(理性)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알폰소는 사촌 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아니면 알폰소가 그런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알폰소가 깨어나 보니 침대도 없고, 지하 거실도 없었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야외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교수형 올가미 밑에 있었다. 소토 형제의 시체는 올가미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 내 옆에 누워있었다.” 이것이 첫 번째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사촌 누이들은 악취를 풍기는 시체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알폰소는 초자연적 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을 것이다(그리고 환상성도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알폰소는 잠잘 곳을 찾아 마침내 은자(隱者)의 오두막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악마에 들씌운 파체코를 만나게 되고, 이상하게도 자신이 겪은 일과 유사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파체코도 바로 그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지하실에 있는 거실로 내려가 자매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깨어나 보니 올가미 밑에, 시체 두 구와 함께 누어있었다. 알폰소는 이러한 유사성을 깨닫고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은자에게 자신은 유령을 믿지 않는다면서 파체코가 경험한 사건에 자연적인 설명을 가한다. 자신의 경험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나는 사촌 누이들이 피와 살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악마의 권능에 대해서 무어라고 얘기하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잠이 들자 사촌 누이들이 나를 올가미 밑에서 놓아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런 몹쓸 장난에 분개했다.



그렇지만 알폰소가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면서 의심은 되살아난다. 알폰소는 동굴에서 사촌 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밤 알폰소의 침대로 찾아온 누이들은 정조대를 벗기 전에 알폰소가 목에 걸고 다니는 그리스도 유물을 벗기고 그 대신에 길게 땋은 머리칼을 둘러주었다. 성욕을 잠재우자마자 한밤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그때 어떤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와 누이들을 쫓아내고 알폰소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억지로 음료를 마시게 한다. 다음날 아침, 알폰소는 이미 예상한 대로 올가미 밑에 시체 두 구와 함께 누워있었고, 목에는 땋은 머리 대신에 교수형 밧줄이 놓여있었다. 알폰소는 처음에 밤을 지낸 여관으로 돌아갔을 때 마루 판자 사이에서 동굴에서 빼앗긴 그리스도 유물을 발견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나는 한번도 이 빌어먹을 여관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은자와 종교재판관과 소토 형제 모두 마술사의 주문으로 생겨난 환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알폰소가 파체코를 다시 만나면서 저울은 한 쪽으로 더욱 기운다. 파체코는 그날 밤의 일을 엿보았는데,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 처녀들은 젊은이를 애무한 다음 목에 걸고 다니는 유물을 벗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후 아름다운 처녀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요. 사실은 형제 계곡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매혹적인 여자로 착각하고 은근한 말을 퍼부었지요. 교수형을 당한 사람이 목에서 밧줄을 풀어 젊은이의 목에 걸자 젊은이는 감사의 표시로 다시 애무를 했습니다. 마침내 침상의 커튼이 닫혔는데,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알폰소는 자신이 두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올가미 밑에서 깨어난 일, 목에 밧줄이 둘러진 일, 여관에서 발견한 유물, 그리고 파체코가 들려준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른 등장인물들도 알폰소에게 사건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암시하기 때문에 불확실성, 망설임은 절정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종교재판관은 알폰소를 체포하여 고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이렇게 묻는다. “너는 튀니스의 공주들을 알고 있겠지? 공주가 아니라 추잡한 마녀, 저주받을 흡혈귀, 육화한 악마라고 해야겠지만.” 그리고 나중에는 알폰소의 보호자 레베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기로 그 처녀들이 악마란다. 이름은 에미나와 지베데라고 하지.”

알폰소는 며칠을 혼자 지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냉철한 이성을 회복하고 일련의 사건에 ‘사실적’인 설명을 가한다.


그때 돈엠마누엘 시장(市長)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말 때문에 시장 또한 신비한 고멜레스 집안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종자 모스키토와 로페스를 준 사람도 바로 시장이었다. 그들은 시장의 명령을 받고 형제 계곡 초입에서 나를 버리고 떠남으로써 갈피를 못 잡게 만들었다. 사촌 누이들과 레베카는 누차에 걸쳐 내가 시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여관에서 나에게 잠자는 약을 먹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잠든 나를 그 빌어먹을 올가미 밑으로 데려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파체코는 사고를 당해 장님이 된 것이지 교수형을 당한 두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파체코가 들려준 오싹한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끊임없이 내 비밀을 파헤치려고 한 은자는 틀림없이 고멜레스 집안의 대리인으로, 내 신중함을 시험하고 있었다. 결국 레베카, 레베카의 오빠, 소토 형제 그리고 집시의 우두머리는 내 용기를 시험해보기로 담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사건 때문에 알폰소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받아들인다. 알폰소는 창문 너머로 사촌 누이들을 닮은 두 여자를 본다. 그러나 막상 다가갔을 때 낯선 얼굴임을 깨닫는다. 이윽고 알폰소는 자신이 경험과 유사한 악마 얘기를 읽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악마들이 나를 속이려고 교수형을 당한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믿을 지경이었다.”

“나는 [...] 믿을 지경이었다”. 바로 이것이 환상성의 정신을 요약하는 공식이다. 우리가 완전한 불신이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면 환상성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환상성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망설임이다.

이 작품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에서 누가 망설이는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망설이는 사람은 주인공 알폰소, 다시 말해서 등장인물이다. 이야기 내내 두 가지 설명 가운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바로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독자가 ‘진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즉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상황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환상성은 서술된 사건에 대한 독자의 모호한 지각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 때 독자는 등장인물의 세계에 통합되어야 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독자란 일반 독자가 아니라 독자의 ‘기능’, 즉 텍스트에 내포된 독자이다(마찬가지로 화자의 기능도 텍스트에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내포 독자의 지각은 등장인물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독자의 망설임은 환상성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러나 독자가 『사랑에 빠진 악마』나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에서 보듯이 특정 등장인물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을까? 바꿔 말해서, 망설임이 작품 내에 재현될 필요가 있을까? 첫 번째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부분의 작품은 두 번째 조건도 만족시킨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빌리에 드 릴라당의 「베라」(Vera) 같은 경우다. 이 경우 독자는 공작 부인의 부활이라는 자연법칙과 모순되는 현상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일련의 이차적 징후 때문에 이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어떤 등장인물도 이러한 망설임을 공유하지 않는다. 베라의 제2 삶을 굳건하게 믿고 있는 아톨(Athol)도, 늙은 종 레이몽(Raymond)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는 등장인물 가운데 그 누구와도 동일시하지 않으며, 망설임 또한 작품 내에 재현되지 않는다. 이처럼 동일시 법칙은 환상성의 부대(附帶) 조건이므로 이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환상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상문학 작품은 동일시 법칙을 따른다.

독자가 등장인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활 세계(독자의 세계)로 되돌아갈 때 새로운 위험이 환상성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험은 작품 해석의 차원에서 나타난다.

초자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독자가 이야기의 자연성을 결코 문제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말을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동물이 말을 한다는 사실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을 알레고리라고 부른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가 재현적이라고 가정하면 시 텍스트는 종종 환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적 자아”는 허공으로 비상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언어 연쇄(verbal sequence)에 불과하므로 언어를 넘어선 이미지로 해석하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따라서 환상성은, 독자와 주인공에게 망설임을 야기하는 괴이한 사건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독서 방법을 ―부정적으로 정의하자면, 시적이지도 않고 알레고리적이지도 않은 독서 방법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라고사에 발견된 원고』는 이 조건 또한 충족시킨다. 우선, 서술된 초자연적인 사건을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다음으로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제시되며, 우리는 이를 재현된 사건으로 인식하지 순수한 언어 단위의 조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로제 카이유와는 환상 텍스트의 이러한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가 환성성의 핵심에 놓여있다. 내가 앞서 얘기한 무한한 이미지와 유한한 이미지의 중간에 위치하는 이미지이다. [...] 무한한 이미지는 원칙적으로 무일관성(incoherence)을 추구하며, 어떠한 의미 작용도 거부한다. 유한한 이미지는 특정 텍스트를 상징으로 옮길 수 있으며, 적절한 사전(辭典)을 이용하면 각각의 상징을 그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정의한 환상성을 완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환상성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독자는 등장인물의 세계를 현실적인 인물의 세계로 생각해야 하며, 기술된 사건에 대한 초자연적 설명과 자연적 설명 사이에서 망설여야 한다. 둘째, 등장인물 또한 이러한 망설임을 느껴야 한다. 독자의 역할이란, 이를테면, 등장인물을 믿는 데 있다. 이와 동시에 망설임은 재현되어 있어야 하며, 작품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일상적인 독서에서 현실 독자는 자신을 등장인물과 동일시해야 한다. 셋째, 독자가 특정한 태도를 취하고 작품을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는 알레고리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시적인 해석도 거부해야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은 동일한 가치를 갖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진정으로 하나의 장르[환상문학]를 구성하지만, 두 번째 조건은 충족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예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

이러한 세 가지 특성은 우리가 1장에서 언급한 작품 모델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첫 번째 조건은 텍스트의 언어적(verbal) 양상,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비전’과 관계가 있다. 환상성은 ‘모호한 비전’의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두 번째 조건은 한층 복잡하다. 우선 통사적 양상과 관계가 있다. 등장인물이 사건을 평가하는 형식적 단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형식적 단위는 관습적으로 이야기의 플롯을 구성하는 ‘행동’과 대조되므로 우리는 ‘반응’이라고 부른다. 한편, 두 번째 조건은 의미론적 양상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재현된 주제를 ―지각과 지각에 대한 해석을― 다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은 훨씬 일반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양상 구분을 뛰어넘는다. 다양한 독서 방법(독서 수준)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제 우리의 정의는 아주 명백해졌다. 다시 한번 다른 정의와 비교함으로써 우리 정의를 완벽하게 입증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하겠다. 체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환상적’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부터 고려해야 한다.

우선, 첫 번째 떠오르는 의미부터(사전적 의미부터) ―언급하는 일이 드물지만― 살펴보자. 어떤 일의 발생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식에 따라 다르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환상문학에서 작가가 서술하는 사건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라루스(Larousse) 소사전은 환상적이라는 말을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하는 환상적인 단편”으로 정의한다. 사실 어떤 사건을 초자연적이라고 분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초자연성은 문학적 범주이므로 여기서는 적합하지 않다. 한 장르가 초자연성이 개입하는 작품 모두를 아우른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에 그렇다면 환상문학은 호머 작품은 물론,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괴테 작품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초자연성은 만족할 만큼 정확하게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지 못한다. 외연(外延)이 너무 넓다.

환상성을 규정하려는 다른 시도는, 이론가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독자의 반응에서 환상성을 찾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내포 독자가 아니라 실제 독자이다. 이러한 경향의 본보기로, 환상문학 작가이며 『문학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공포』라는 이론서를 남긴 러브크래프트를 들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가 보기에 환상성의 판단기준은 작품이 아니라 독자의 특별한 경험인데, 이 경험이란 공포이다.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독창성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매끄러운 구성이 아니라 특수한 감각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의도나 구성의 메커니즘으로만 공포 이야기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초자연성이 야기하는 정서적 수준으로 공포 이야기를 평가해야 한다. [...] 진정한 초자연적인 작품인지 알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독자의 마음에 심각한 두려움을 야기하는지, 미지의 힘이나 영역을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환상문학 이론가들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방식의 설명, 즉 자연적인 설명과 초자연적인 설명이 이 장르의 필요조건임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두려움이나 당혹감을 거론한다. 피터 펜졸트는 이렇게 얘기한다. “요정이야기를 제외하면 초자연적 이야기는 모두 공포 이야기로, 상상에 불과한 것은 절대로 현실이 아니라는 우리의 관념을 의심하게 만든다.” 카이유와 또한 “환상성의 시금석”으로 “다른 방식으로는 어떻게 옮길 수 없는 이상한 인상”을 든다.

놀랍지만 아직도 진지한 비평가들이 이런 주장을 편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즉, 독자가 공포감을 느껴야 한다면― 한 작품의 장르는 독자의 냉철함에 좌우된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어쩌면 이것이 비평가들의 생각이 아닐까?) 등장인물이 느끼는 공포감으로 장르를 정의할 수 없다. 첫째, 요정이야기는 공포이야기일 수 있다. 예컨대 페로의 작품이 그렇다(펜졸트의 말과는 정반대이다). 한편, 아무런 공포감도 유발하지 않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호프만의 『브람빌라 공주』와 릴라당의 「베라」와 같은 작품이 그렇다. 공포는 종종 환상성과 관련이 있으나 필요조건은 아니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작가에게서 환상성의 본질을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 예로 카이유와를 들 수 있는데, 틀림없이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론가이다. 아래 인용을 보면 카이유와는 영감을 받은 시인이라는 낭만주의 관념을 재탕하고 있다. “환상성은 [작가가] 본의 아니게 이끌려갈 수 밖에 없는 그 무엇, 즉 불안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불안하게 생각하는 물음을 요구한다. 이러한 물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심연에서 갑자기 솟아나기 때문에 작가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 이렇게 얘기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환상문학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작품은 고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작품이다.” 이러한 ‘의도론의 오류’는 오늘날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환상성을 정의하려는 다른 시도가 있으나, 이러한 정의는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으므로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환상성을 현실의 충실한 재현에 대립되는 것으로, 자연주의에 대립되는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마르셀 슈네데르가 『프랑스 환상문학』에서 밝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정의 또한 불가능하다. “환상성은 내면의 영역을 탐구하는 것으로 상상력, 삶의 고뇌, 구원의 희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는 현실적인 것과 이를테면 환영적인 것(the illusory) 사이의 망설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눈으로 본 것이 속임수인지 아니면 지각의 착오인지 의심했다. 다시 말해서, 지각한 사건에 부여한 해석을 의심했다. 다른 종류의 환상성에서 망설임은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the imagery) 사이에 위치한다. 첫 번째 경우, 우리가 불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사건의 발생 여부가 아니라 정확한 이해의 여부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우리가 지각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나는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상상력으로 보고 있는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라고 아르님 작품의 등장인물은 말한다. 이러한 ‘착란’은, 앞으로 고찰하겠지만, 여러 가지 원인에서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착란을 광기 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예로 호프만의 『브람빌라 공주』를 살펴보기로 한다.

로마의 사육제 기간에 불쌍한 배우 질리오 파바의 인생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다. 질리오는 왕자로 변해 공주를 사랑했으며 믿을 수 없는 모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런 일은 전혀 없었으며 질리오가 미쳤다고 확신한다. 파스쿠알레도 같은 생각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질리오 씨,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연극은 그만 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머리가 혼란스러워 [...].” 질리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의심하기도 한다. “파스쿠알레 씨와 베스카피 선생이 나를 조금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여길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질리오는(그리고 내포독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상상력의 산물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의심에 휩싸인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하고 또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좀처럼 볼 수 없는 다른 기법도 있다. 이 기법도 광기를 이용하여 ―하지만 방식은 다르다― 모호성을 창출한다. 네르발의 『오렐리아』를 보자. 주지하듯이,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미쳐 있는 동안에 본 환각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1인칭으로 서술되지만,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즉 낯선 세계를 지각하는 (과거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과 이 인물이 경험한 인상을 옮겨 쓰는 (현재에 살고 있는) 화자이다. 언뜻 보아 환상성은 등장인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자신이 본 환각을 광기의 산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에 대한 가장 명쾌한 이미지로 (따라서 경이성에 위치한다) 간주한다. 이러한 환각은 광기나 꿈에서 유래한 것이지 현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화자에게도(화자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지 괴기성과 관계한다) 환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는 이렇게 기능하지 않는다. 네르발은 다른 차원에서, 모호성을 기대할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서 모호성을 창조한다. 이리하여 『오렐리아』는 결과적으로 환상적인 이야기가 된다.

우선, 등장인물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종종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정신병자들 사이에 있는 자신을 보고서야 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이 단지 환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시스 여신에게 한 약속은 내게 운명처럼 부과된 일련의 시련을 통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화자는 등장인물이 겪은 일이 환영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일부 사건에 대해서는 그 진실성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웃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고함소리가 실제로 울렸으며, 산 자들 세계의 공기는 그 고함소리 때문에 전율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또한 모호성은 어느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두 가지 문체 장치에 의존하고 있다. 네르발은 보통 이 두 장치를 한꺼번에 사용하는데, 그것은 양태서술(modalization)과 불완료과거이다. 양태 서술은 몇 가지 도입 어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어구의 의미 변화 없이 발화 주체와 발화 사이의 관계를 수정한다. 예를 들어, “밖에 비가 내린다”와 “아마도 밖에 비가 내리는 것 같다”는 동일한 사실을 지시하지만, 두 번째 어구에서 발화 주체는 발화된 말의 진위를 확신하지 못한다. 불완료과거도 이와 유사하다. “나는 오렐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할 때 내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럴 개연성은 적다.

아무튼, 『오렐리아』의 작품 전반에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이 침투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을 입증하려면 몇 페이지를 통째로 인용해야 할 것이다. 닥치는 대로 골라본 몇 가지 예를 들기로 한다.

나는 낯익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 마그리트라는 이름의 늙은 하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 그리고 나는 내 조상의 영혼이 저 새에 실려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지구를 통과하는 심연에 떨어졌다고 느꼈다 [...] 그 흐름은 분자의 상태로 있는 산 자의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 내 생각으로는 조상들이 어떤 동물의 형상을 취하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는 게 분명했다.(강조는 토도로프)



만일 이러한 어구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경이성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세계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구 덕분에 우리는 이제 동시적으로 두 세계에 있게 된다. 게다가 불완료과거는 등장인물과 화자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자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일련의 삽입 어구를 사용하여 화자는 다른 사람들, 즉 ‘정상적인 사람’과 거리를 둔다. 한층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의 일상적 용법과 거리를 둔다(이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오렐리아』의 주요 테마이다). 어느 곳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회복함으로써”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른 곳에서는 “하지만 환각의 문제였던 것처럼 보인다”라고 하거나 “겉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위는, 인간의 이성에 따르면, 환각이라고 말하는 것에 속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자연적인 것을 언급) 것이지만, 단지 “겉보기”만(초자연적인 것을 언급) 그렇다는 것이다. 이 행위는 환각에(자연적인 것을 언급), 그보다는 “환각이라는 것”에(초자연적인 것을 언급) 속한다. 게다가 불완료과거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현재의 화자가 아니라 과거의 등장인물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련의 환각, 어쩌면 미치광이의 환각”이라는 문장은 『오렐리아』의 모든 모호성을 요약하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정상적인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등장인물을 편들기 때문에 광기라는 확신하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화자는 한참 더 나아가 등장인물에 대한 주제, 다시 말해서 광기와 꿈은 상위의 이성이라는 명제를 공개적으로 다시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등장인물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동안 나를 관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보기에는 논리적인 사건의 여러 단계에 해당하는 말과 행위를 정신착란으로 간주하는 것 같아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포우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아직도 광기가 지성의 숭고함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가 없다.”) 그리고 “꿈은 인간이 영적 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얘기하는데, 화자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나는 기나긴 질병―신비한 내 정신속에서 일어난 일이다―에서 경험한 인상을 옮기려고 한다. 사실 내가 왜 질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질병은 나와 무관하고, 또 예전보다 건강해졌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때때로 내 힘과 원기는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으며, 상상력 또한 나에게 무한한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아무튼, 나는 인간의 상상력은 이 세계나 저 세계에서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내가 분명히 본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이 두 인용문에서 화자는 등장인물이 미쳐있을 때 본 것은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등장인물은 결코 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 문장이 현재로 시작하지만 최종적인 명제는 불완료과거로 환원되고 있으므로, 독자는 다시 한번 모호성을 지각한다. 이와 반대의 예는 『오렐리아』의 마지막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한동안 경험했던 세계는 환각의 세계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그때 경험한 확신 때문에 행복하다.” 첫 번째 명제는 이전의 모든 것을 광기의 세계로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한 확신에 때문에 행복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처럼 『오렐리아』는 독창적이고 완벽한 환상적 모호성의 예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광기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는 호프만의 『브람빌라 공주』에서 등장인물의 광기 여부를 물었으나, 네르발의 『오렐리아』에서 등장인물은 자신의 행위를 광기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광기가 실제로 상위의 이성인지 아닌지 여부이다(여기서부터 다시 망설이게 된다). 호프만 작품의 경우, 망설임은 지각과 관련이 있으나 방금 우리가 논한 네르발의 작품은 언어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호프만의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명명하는 문제를 놓고 망설이지만, 네르발의 작품에서 망설임은 명명의 내부로, 다시 말해서 그 의미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