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데이비슨의 심신 수반에 관하여

나뭇잎숨결 2020. 6. 11. 17:26

데이비슨(Donald Davidson)의 심신 수반에 관하여


백도형(서울대)



철학에서 심신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많이 논의되어 온 것이 바로 で수반(supervenience)と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심신 관계로서의 で수반と에 관해 검토하고자 한다. 심신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수반 개념이 갖는 매력은, 심신 수반 개념을 통해 심신 환원 그리고 심신 법칙이 성립함은 부정하면서도 심신 간에 결정내지 의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반 개념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에게 이론적 뒷받침을 해 주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이러한 생각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중 가장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데이비슨(Donald Davidson)이 심신 문제를 다루는 그의 입장인 で무법칙적 1원론(Anomalous Monism)と에서 심신 수반을 표방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났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비환원적 물리주의 - 심신 수반>이라는 연결을 고정 관념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고정 관념이 잘못된 것임을 보이려고 한다. 데이비슨이 속성의 존재론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명론의 입장을 취하는 한, 그의 입장과 수반 개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환원주의와 속성 실재론을 동시에 표방하면 심신 수반은 주장할 수 있겠지만, 비환원적 물리주의로서의 자신의 입장은 유지될 수 없고 환원주의의 입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속성의 존재론적 지위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수반 개념은 이 두 경우 각각을 옹호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비환원적 물리주의와 심신 수반 간에 지속되었던 연결 고리가 기대만큼 견고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환원주의를 뒷받침해주는 수반 개념인 김재권의 で강수반(strong supervenience)と 개념 역시 심신 간의 관계를 드러내 주는 데에 적합하지 못하다. 이러한 나의 주장이 옳다면, 결국 수반 개념은 여러 가지 다른 차원 간의 논의를 진행시키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심신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 효과적인 개념은 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1장에서는 데이비슨의 입장과 수반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그의 で무법칙적 1원론と과 그것의 토대가 되는 그의 사건 이론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로서, 그의 이 두 가지 이론이 그 자체로써 충분히 일관성과 완결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심신 수반을 덧붙여 주장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심신 수반을 주장함은 그의 입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で긁어 부스럼と일 뿐임이 밝혀질 것이다.

데이비슨의 유명론적 입장이 수반과 잘 어울릴 수 없다면 속성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면 수반 개념을 잘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속성의 존재론적 지위를 인정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은 그 자체로 유지될 수 없다. 2장에서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김재권의 논변을 소개하면서 그 결과가 갖는 함축을 생각해 보겠다. 결국 심신 수반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그것이 속성 실재론을 인정하는 것이든, 부정하는 것이든)을 강화시켜주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3장에서는 데이비슨과 함께 심신 수반 개념의 유력한 사용자인 김재권의 (심신 관계로서의) 수반 개념을 살펴보고 비판하겠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신의 입장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수반 이론을 전개하곤 한다. 데이비슨에 대한 그의 비판의 핵심은,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심신 간에 내재하는 결정ㅗ의존 관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장에서의 나의 주장이 옳다면, 김재권의 그와 같은 비판은 핵심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김재권이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으로 제시하는 で약수반(weak supervenience)と 개념은 사실상 데이비슨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수반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더라도 데이비슨의 기본 입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김재권의 수반 개념인 で강수반(strong supervenience)と도 심신 관계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강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그의 수반 이론도 비판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본다면 수반 개념은 심신 관계를 나타내 주는 데에는 그리 적절한 개념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러한 결론과 그것이 갖는 함의를 살펴 보고 심신 수반 대신에 심신 관계를 제대로 조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본다.



1.


데이비슨의 존재론에서 사건은 가장 기본적인 존재자이다. 그의 사건은 구체적인 개별자(token)이다. 그것은 시간ㅗ공간 내에서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되풀이되지 않고 1회적이며, 그 수가 세어질 수 있는 개별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서는 사건은 외연적인 개별자이며, 거기에는 속성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김재권의 사건 개념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해진다. 김재권은 사건을 <어떤 개체가 어떤 시각에 어떤 속성을 예화함(exemplifying)>으로 본다. 즉 그의 사건 개념은 개체(object, Substance), 속성, 시간의 3가지 요소로 되어있으며, 개체 그리고 시간과 함께 속성은 중요한 구성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김재권은 속성 실재론자로, 그리고 데이비슨은 유명론자로 이해할 수 있다.

데이비슨은 사건을 그 기술(記述, description)과 구분한다. 전자가 존재 차원에 속한다면 후자는 언어 차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기술은 항상 그 기술 주체의 보는 관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술만으로 그 사건의 전모에 관해 완전히 기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관해 기술하는 주체의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상이한 기술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데이비슨의 경우에는, 정신 사건과 물리 사건의 구분(모든 사건들은 물리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신 사건인 물리 사건과 정신 사건이 아닌 물리 사건의 구분)은 전적으로 기술에 적용되는 언어적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ぢ어떤 사건이 정신 사건이라는 것은 그 사건이 정신 기술(mental description)을 가질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그러하다.っ 이렇게 데이비슨에서는 ぢ정신적인 것은 존재론적 범주가 아닌 개념적 범주일 뿐っ이다.

여기서 동일한 한 사건에 대한 여러 상이한 기술들이란 점에서, 사건 동일성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데이비슨은 ぢ사건들이 정확하게 동일한 원인들과 결과들을 갖는다면,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그 사건들은 동일하다っ고 말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두 사건들은 설사 그 기술들이 서로 다르더라도 동일한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과 인과 관계는 사건이 어떻게 기술되느냐에 상관없이 개별적인 사건들 간의 외연적인 관계이고, 반면에 인과적 설명ㅗ법칙의 경우에는 내포적인 사건 기술과 관계된다. 그래서 구체자인 사건들 간에 성립하는 외연적인 관계들인 동일성 관계와 인과관계에는 속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아무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 즉 그의 존재론에서는 속성에 부여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굳이 속성이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で있음と은 개념적 범주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존재론적으로 의미있게 で실재と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데이비슨은 속성을 단지 언어적인 술어로만 볼 뿐 그 이상으로는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명론의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건 존재론을 바탕으로, 그의 심신 이론인 で무법칙적 1원론と도 외형상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충분히 일관되이 유지될 수 있다. 무법칙적 1원론의 3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어도 어떤) 정신 사건은 물리 사건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

둘째 사건들이 원인과 결과로 관계될 때, 이러한 사건들이 적절히 기술되어서 적용되는 닫혀있고(closed) 결정론적 체계의 법칙들이 있다. (인과성이 있으면 법칙이 반드시 있다. 즉 원인과 결과로 관계되는 사건들은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에 지배된다.)

셋째 어떠한 엄격한 심신 법칙도 없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정신 사건들이 설명되고 예측될 수 있는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첫째 원칙에서 정신 사건과 물리 사건 간의 인과적 상호작용은 외연적이고 구체적인 사건-개별자들 사이에서(존재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둘째 원칙에서 법칙성은 내포적인 사건 기술들에서(언어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で적절히 기술되어서 적용되는と이란 의미는 물리적 용어로 기술될 때에만 법칙에 포섭될 수 있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물리적 폐쇄성의 원칙(the causal closure of the physical domain)을 인정함을 뜻하며 물리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 사건의 경우는 정신 용어로 기술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신 사건이라 볼 수 있으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그것이 어떻게 기술되건 상관없이 인과관계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갖고 있는 물리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물리 용어로 기술된 물리 사건만이 법칙에 부합할 수 있다는 바로 이 점이 셋째 원칙과 연결되는 점이다.

데이비슨이 정신 사건은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유는 물리적인 것은 인과적으로 닫혀 있으나, 정신적인 것은 닫혀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도 물리주의자로서 물리적 폐쇄성의 원칙을 인정한다. 첫째 원칙에서 물리 사건과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정신 사건은 결국 정신적 기술을 지닌 물리 사건이며(즉 물리 사건들끼리의 인과 관계이며), 정신 속성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정신적이게끔은 해주지만, 인과적으로는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결국 그는 정신 속성이 아무런 인과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점에서 김재권 등이 주장하는 で정신 실재론(mental realism)と을 거부한다.

이렇게 데이비슨의 사건 이론에 토대를 두면, 정신 사건과 물리 사건 간의 동일성과 인과적 상호작용을 인정하면서도 심신 법칙 또는 심리 법칙의 존재는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무법칙적 1원론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충분히 일관되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그는 심신 수반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역시 심신 수반을 주장하는 김재권에 비해서 볼 때 두드러지지 않고 소극적이다. 다음의 귀절은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용하는 것으로, 데이비슨이 자신의 수반 개념을 언급한 흔치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기술하는 입장이 심신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 입장은 정신적 특성들이 어떤 뜻에서 물리적 특성들에 의존하거나 수반한다는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한 수반은 모든 물리적 측면들에서는 동일하면서도(alike) 어떤 정신적 측면들에서는 상이한 두 사건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혹은 어떤 대상은 그것의 어떤 물리적 측면에서 변화함이 없이는 어떤 정신적 측면에서도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데이비슨의 수반에 관한 이 정도의 충분치 못한 언급만으로는 그가 수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주장하려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내가 데이비슨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전제로 삼고 있는 유명론의 입장도 그는 분명하게 표명한 적이 없다.

데이비슨이 수반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흔히 수반 개념, 그 중에서도 심신 수반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데카르트적인 심신 실체 2원론을 거부하고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의 입장에 섬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두번째, 심신 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수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심신 간에 환원 가능성은 부정하지만 심리 속성과 물리 속성 간에 모종의 결정ㅗ의존 관계가 있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이 데이비슨에게도 해당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번째 의도는 데이비슨도 지지함에 틀림없겠지만, 그의 경우에는 굳이 수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족될 수 있다. 그의 존재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들은 결국 물리적인데, 단지 어떻게 기술되느냐에 따라 정신 사건인 물리 사건과 정신 사건이 아닌 물리 사건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신 사건들은 물리 사건들의 집합에 대한 부분 집합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정신 사건들은 결국은 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흔히 で개별자 동일론(token identity theory)と이라고 불리운다.

두번째 의도는 데이비슨의 입장에 관한 나의 해석이 틀리지 않다면 명백히 데이비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속성의 존재론적 의의를 인정치 않는 그가 두번째의 의도를 지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가 실제로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그의 입장의 일관성은 심하게 훼손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 점을 비판할 수 있다.) 사실 수반은 속성 간에, 혹은 속성의 집합들(classes of properties) 간에 성립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그러한 수반 개념은 데이비슨의 유명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두번째의 의도를 유명론적 입장에 합당하게 재기술할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즉 수반을 속성이 아닌 술어 혹은 기술들 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데이비슨도 이러한 수반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그러나 존재 차원이 아닌 언어 차원에 속하는 이러한 것들 간에 어떠한 의존ㅗ결정 관계를 부여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개념적 혹은 논리적 필연성의 관계일텐데, 환원주의를 명백히 거부하는 데이비슨은 이러한 가능성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의 수반은 개별자 동일론 이상의 어떠한 것도 아니다. ぢ모든 물리적 측면들에서는 동일하면서도(alike) 어떤 정신적 측면들에서는 상이한 두 사건은 존재할 수 없다っ는 그의 말을 살펴 보자. 어떤 사건과 모든 물리적 측면에서 동일하면서 다른 사건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선뜻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데이비슨의 사건 개념에 따르면 그의 사건은 구체적인 개별자(token)로서, 속성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되풀이되지 않고 1회적인 외연적인 개별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사건 개념을 감안한다면, 결국은 그의 수반 개념은 개별자 동일론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나중의 다른 글에서 데이비슨 자신도 한편으로는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정의한 대로의 수반이 분명히 ぢ정신 사건들(Mental Events)っ의 논변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논했던 것은 단지 정신 사건들과 물리 사건들과의 동일성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반 개념으로 이러한 개별자 동일론 이상의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최근 논문인 ぢ생각하는 원인들(Thinking Causes)っ에서 그는 자신의 무법칙적 1원론에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의 혐의를 씌우는 비판자들에게 수반 개념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펴고 있다.

...내가 정의한 대로의 수반이 함축하는 바는 만일 두 사건이 서로의 심리 속성들에서 다르다면, 서로의 물리 속성들(우리가 인과적 힘이 있다고 보는)에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수반이 성립한다면, 심리 속성들은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에 변화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심리 속성들은 물리 속성들에 영향을 끼치고(matter to), 물리 속성들은 인과 관계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ぢ하지만 정신 속성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정신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물리 속성들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때문일 뿐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논변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 정신 속성들은 변화를 일으키거나 아니거나일텐데, 만일 수반이 참이라면, 변화를 일으킨다.

요컨대 앞에서 데이비슨이 제시한 수반 내용에서 ぢ어떤 물리적 측면에서 변화함이 없이는 어떤 정신적 측면에서도 변화할 수 없다っ는 말을 뒤집어 보면 ぢ정신적 측면에서의 변화는 항상 물리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동반한다っ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이 정신 속성이 인과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반에 관한 이러한 데이비슨의 견해는 자신의 본래 생각과 모순되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예컨대 그는 같은 글에서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인과 관계와 인과적 힘이 구체적인 사건들과 대상들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면, 그 사건들과 대상들이 기술되는 방식과 우리가 그것들을 지적하기 위해 부과하여 그것들을 특징지우는 속성들은 그것들이 야기시키는 것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물론 먼저의 인용문에서 수반을 통해 심리 속성의 인과적 힘을 주장한 것을 김재권과 같은 속성 실재론의 주장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주장이 개별자 동일론의 입장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그가 이 싯점에서 이렇게 구차하게 대응해야 하는 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간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부수현상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적절한 해명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ぢ만약 수반이 성립한다면, 심리 속성들은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에 변화를 일으킨다っ라고 말하고 있지만, 설사 수반이 성립한다 하더라도, 사건들 간의 인과 관계는 심리 속성의 변화가 없이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속성 실재론자의 입장에서라면 분명히 심리 속성의 인과적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들이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면 얼마든지 재논박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유명론의 입장을 굳세게 고수하는 것이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명론의 입장에서는 정신 속성 뿐만이 아닌 속성 자체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 (혹은 심리) 속성의 인과적 힘을 부정한다고 해서 부수현상론에 빠지지 않는다. 개별 사건으로서의 정신 사건의 인과적 힘은 물리 사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사실상 모든 정신 사건은 물리 사건이기도 하지만) 인정되고 정신 속성의 인과적 힘이 부정되는 것처럼 물리 속성의 인과적 힘 역시 부정되기(속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때문이다. 따라서 수반을 통한 데이비슨의 해명은 적절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일관성만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명론이든, 김재권과 같은 속성 실재론이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유지하는 경우에만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은 동어반복에 불과한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수반 개념은 데이비슨의 입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수반 개념은 김재권과 같이 존재론적 관계로서 도입하거나 언어 차원의 경우에는 개념적 혹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 것들 간에 성립할 수 있을 뿐이다. 수반 개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사건 이론과 무법칙적 1원론은 충분히 일관성과 완결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오히려 어설픈 수반 개념의 사용이 그의 입장을 석연챦은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한 마디로 심신 수반은 그에게는 で긁어 부스럼と일 뿐이다.



2.


1장에서 데이비슨의 입장이 수반 개념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속성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인정치 않는 유명론의 입장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유명론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은 어떠할까? 그러한 입장이라면 데이비슨이 수반 개념과 어울릴 수 없었던 장애물도 무시할 수 있겠고 수반 개념이 갖는 매력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최근 김재권에 의해서 이러한 입장이 그 자체로 제대로 유지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우선 그의 논변을 살펴보자.

1)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제거주의를 인정치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론에 정신 속성들을 갖는 사건들이 존재함을 믿는 것이다.

2) 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는 정신 실재론자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정신 실재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신 속성은 인과적 속성(causal properties), 즉 그 속성에 의해 사건이 인과 관계에 개입하게 되고 만일 그러한 속성이 없다면 개입하지 않게되는 그러한 속성이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3) 하여간 심신 인과는 일어난다. 즉 어떤 정신 사건들은 물리 사건들을 야기한다.

4)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이 귀결된다. 어떤 정신 사건이 물리 사건을 야기시키는 경우, 원인이 되는 정신 사건은 그것의 정신 속성에 의해(in virtue of its mental property) 물리적 속성을 갖고 있는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이다.

5) 어떠한 물리주의자들도 ぢ물리 영역의 폐쇄성 원칙っ을 인정할 것이다. 즉 이 원칙에 따르면 어떤 특정한 시각에 어떤 원인을 갖는 어떠한 물리 사건도 물리적 원인을 갖는 것이다(any physical event that has a cause at time t has a physical cause at t).

6) 이 때의 물리적 원인은 그것의 물리 속성에 의해 물리 사건을 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7)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도대체 각각 하나의 물리적 결과의 원인이라 주장되는 이러한 두 원인들(정신적 원인과 물리적 원인)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8)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 만일 그 두 원인들이 각각 부분적 원인(a partial cause)들일 뿐이라면, 그 둘이 합해져서야 충분한 원인을 구성하는 것이며, 결국 정신 사건을 물리 사건에 대한 완전한 원인에 필요한 구성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인과적 폐쇄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물리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완전한 인과 설명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물리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b) 만일 그 두 원인들이 각각 물리적 결과의 서로 독립적으로 충분한(independent sufficient) 원인이라면, 그 때의 물리적 결과는 과잉결정되어(overdetermined) 버린다. 즉 정신적 원인은 물리적 원인이 없이도 그 자체로 결과를 야기시키게 된다. 이 경우에도 인과적 폐쇄 원칙이 위배된다.

9) 물론 정신적 원인과 물리적 원인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동일성은 존재론을 단순하게 해 주며, 불필요한 문제꺼리들을 제거해 준다.

10)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건들의 물리 속성들에 대한 정신 속성들의 인과적 효력(causal efficacy)이다. 즉 동일시될 필요가 있는 것은 정신 속성들과 물리 속성들이다.

11) 그러나 바로 이 길이 비환원적 물리주의자에게는 봉쇄된 길이다. 정신 속성과 물리 속성 간의 동일성은 환원주의자의 ぢ유형 물리주의(type physicalism)っ의 근간이 되는 주장이다. 제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이번에는 환원주의가 되어 버린다.

12) 만일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이 물리 영역의 인과적 폐쇄성 원칙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는 심신 인과를 설명해 줄 어떠한 전망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반환원주의나 심신 인과 관계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

13) 비환원적 물리주의자가 심신 인과를 부정한다면 두 가지 길이 열린다. 제거주의를 옹호하거나 데카르트적인 2원론적 상호작용론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후자는 명백한 물리주의의 부정이다.

14) 결론적으로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확고한 입장이 아니다. 비환원적 물리주의에는 그것을 환원주의ㅗ제거주의의 방향으로, 또 2원론의 방향으로 몰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압력들이 있다.

나는 이상과 같은 김재권의 논변이 속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상 언어 차원인 기술이나 술어의 경우에는 그 언어 주체의 보는 관점에 따라 한 존재자에 대해 여러가지의 표현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속성이란 엄연히 존재 차원의 것이다. 물리주의라는 1원론의 입장에 있으면서, 존재 자체가 2중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2중적이라면 그것은 그것의 기술이 2중(물론 언어 차원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다중적임도 가능하겠지만)적 이라는 의미이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존재 차원이 아닌 언어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정신 실재론자(혹은 보다 넓게 속성 실재론자)들이 실재한다고 보는 (속성으로서의) 정신은 분명히 언어 차원아닌 존재 차원의 문제이고, 그들은 그 점을 겨냥하고 있다. 김재권의 주장은 이러한 2중적인 존재관은 필연적으로 1원론이 아닌 2원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고 물리주의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신처럼 환원주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신 속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말로가 이러하다면, 그 입장이 설사 데이비슨과는 달리 수반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일지라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고, 그들에겐 보다 더 잘 어울릴 수반 개념도 그들의 사활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수반 개념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을 성립시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우리는 속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처음 것에 관해서는 지금 살펴 본 바대로 그 자체 유지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수반 개념은 (설사 원리상으로는 잘 어울릴 수 있으나) 그 소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나중 것은 1장에서 살펴 본 데이비슨의 입장인데, 수반 개념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따라서 심신 수반 개념이 비환원적 물리주의자에게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3.


데이비슨과 함께 심신 이론에 수반 논의를 도입한 사람은 바로 김재권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이 심신 수반을 그리 많이는 언급하지 않은 데에 반해, 김재권은 수반 이론의 정립이 그의 심신 이론의 중심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왔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러한 점은 수반 개념이 데이비슨에게보다는 김재권의 입장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김재권은 자신의 수반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에 데이비슨의 수반에 관해 언급한 후, 그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수반 개념을 등장시키곤 했다. 즉 그는 데이비슨이 수반 개념에 관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을 で약수반と이라고 명명하여 자신의 で강수반と과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수반 개념의 특징을 부각시킨다.

김재권은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그것을 で약수반と이라 부른다.:

A와 B를 두 개의 속성(properties) 집합들이라고 하자. 그러면 A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B에 약수반된다.

(Ⅰ) 필연적으로, 어떠한 x와 y에 관해서도, 만일 x와 y가 B의 모든 속성들을 공유한다면, x와 y는 A의 모든 속성들도 공유한다. 즉 B에서의 무차별성은 A에서의 무차별성을 함축(entails)한다.

그리고 김재권에 의하면, (Ⅰ)은 다음의 (Ⅱ)와 동치이다.

(Ⅱ) 필연적으로, 어떠한 대상 x 그리고 A의 어떠한 속성 F에 관해서도, 만일 x가 F를 가지면, B에는 x가 가지게 되는 속성 G가 존재하며, 이 속성 G를 갖는 어떠한 대상 y도 F를 갖는다.

그러나 김재권은 이러한 약수반은 속성(혹은 사실, 상태따위) 집합들 간의(즉 위의 (Ⅰ)에서의 A와 B 간의) 직관적인 ぢ결정っ 또는 ぢ의존っ관계를 충실히 포착하기에는 너무 약해 보인다고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컨대 약수반은 다음의 상황들과 양립할 수 있다.

(1) 물리 속성들이 이 세계와 똑 같이 분배되어 있는 다른 세계에서, 정신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

(2) 모든 물리적인 세부 사항이 이 세계와 똑 같은 다른 세계에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는 정신성을 보이지 않는데 반해, 단세포 유기체는 완전히 의식을 지니는 상황

(3) 모든 물리적인 세부 사항이 이 세계와 똑 같은 다른 세계에서, 모든 것들이 동일한 정도의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정신성을 보이는 상황

요컨대 약수반은 모든 물리적 세부 사항이 실제 세계와 완전히 동일하지만 어떠한 정신성도 드러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은 애초에 심신 문제에 수반 개념을 도입한 목적, 즉 심신 간의 의존ㅗ결정 관계를 해명하려는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김재권은 생각한다. 그는 그 이유로 약수반은 심리 속성과 물리 속성들 간의 통세계적 안정성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수반에 의하면, B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A에 있어서는 다른 두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이 주어진 동일한 세계 내에서는 요구되지만, 다른 가능 세계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 즉 토대 속성이 고정된다고 해서 수반 속성이 고정된다는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 혹은 의존 관계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는 변하는 사실상의 일치(de facto coincidence)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김재권은 다음과 같이 보다 강한 수반 관계를 도입한다. :

A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B에 강수반된다.

(Ⅲ) 필연적으로, 어떠한 대상 x 그리고 A의 어떠한 속성 F에 관해서도, 만일 x가 F를 가지면, B에는 x가 가지게 되는 속성 G가 존재하며, 필연적으로 이 속성 G를 갖는 어떠한 대상 y도 F를 갖는다.

(Ⅲ)에서 보여지는 김재권의 강수반은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이라는 약수반과는 달리 양상 표현인 ぢ필연적으로っ를 갖는다. 이런 양상 표현이 삽입됨으로써 수반하는 속성들과 그것들의 수반 토대 속성들 간의 관계에 통세계적 안정성이 확보되는데, 이 점은 명백히 약수반에서는 결여되어있는 강수반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세계적 안정성과 함께, 강수반은 환원을 위한 교량 법칙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존 관계를 심신 간에 제공하기 때문에, 김재권은 이러한 강수반 개념을 바탕으로 환원주의를 주장한다.

나는 이제 지금까지 제시된 수반 개념을 바탕으로한 김재권의 환원주의를 검토하고 비판할 것이다.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을 비판하는 김재권의 논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심신 간에 의존ㅗ결정 관계가 있음은 모든 물리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직관적 사실이며, 많은 물리주의자들이 수반 개념을 통하여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2]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은 で약수반と이다.

3] 그러나 이러한 で약수반と은 심신 간의 의존ㅗ결정 관계를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

4] 따라서 보다 강한 수반 개념인 で강수반と이 요구된다.

5] 이러한 で강수반と 개념은 심신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개념이다.

6] 그리고 で강수반と은 심신 간에 환원이 성립할 수 있도록 법칙적인 관계를 성립시킨다.

7] 그러므로 나(김재권)는 환원주의를 옹호한다. 수반 개념은 결코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상의 재구성에 따르면, 그의 논변은 1], 2], 5], 6]의 4가지 기본 전제로 부터 출발한다. 나는 이제 그 4가지 전제들중, 1], 2], 5]에 관해 검토하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러한 검토를 통해 전제들중, 적어도 2]와 5]는 그 자체로 그릇되거나 아니면 그 기저에 특정한 전제를 더하여 줄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약한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환원주의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이 지지되지 못함을 밝히겠다.

김재권이 속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속성 실재론자인데 반해, 데이비슨은 속성의 존재론적 역할을 부정하는 유명론자라는 나의 해석이 옳다면, 수반 개념에 관한 둘의 입장 차이를 분석할 경우에도 그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김재권이 제시한 약수반과 강수반의 구별은 양상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가능 세계 개념이 도입된다. 그러나 데이비슨을 유명론자이며, 외연론자로 간주할 때, 그의 이론에 가능 세계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따라 김재권이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이라고 보았던 약수반도 데이비슨의 생각과는 차이가 생긴다.

앞에서 제시한 약수반의 정의 (Ⅰ),(Ⅱ)도 강수반의 정의 (Ⅲ)과 마찬가지로 가능 세계 개념에 의거하고 있다. 즉 약수반에 의하면, 속성 집합 B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속성 집합 A에 있어서는 다른 두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이 주어진 동일한 세계 내에서는 요구되지만, 다른 가능 세계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 で주어진 동일한 세계と란 실제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어떤 세계가 주어진다면 그것과 동일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현실 세계일 필요가 없다. 이러한 약수반 개념에는 가능 세계 개념이 이미 내재해 있다.

하지만 데이비슨은 속성의 존재론적 역할을 부인함으로써 그 실재함을 인정치 않는다. 따라서 가능 세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성립하는 김재권의 で약수반と은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과는 다르다. 데이비슨이 문제삼는 것은 속성과는 상관없는 개별자들 간의 동일성뿐으로, 단지 현실 세계에서의 사실상의 일치(de facto coincidence) 뿐이다.

김재권이 요구한 의존 관계는 속성들 간의 의존 관계이며, 이러한 속성은 언어 차원아닌 존재 차원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속성들 간의 관계란 인과적 역할을 가진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의미있는 것들 간에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존 관계를 보이려는 그의 수반 개념도 형이상학적 논제이며, 가능 세계 개념을 통해 형성되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반 개념은 데이비슨의 입장에선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김재권과 같은 속성 실재론자의 경우는 수반이 속성들 간의 관계이겠지만, 그에 반해 유명론자인 데이비슨의 수반은, 설사 수반이 데이비슨의 입장과 어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술어나 기술들 간의 관계이어야 할 것이다. 술어는 존재 차원인 속성과는 달리 언어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항상 기술 주체의 관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관해서도 상이하게 기술될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언어 차원에 속하는 술어나 기술들 간의 관계인 데이비슨의 수반을 형이상학적 필연성과 연관되는 가능 세계 개념을 통해 정의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즉 데이비슨의 수반은 김재권의 で약수반と과는 다르다. 따라서 김재권의 전제들중, 2]는 우선 그 자체로 옳지 못하다.

설사 김재권이 제시한 약수반이 데이비슨의 수반 개념과 일치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과연 그보다 강한 강수반이 심신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합한 도구일까? 김재권의 강수반처럼 (그의 말마따나) 정말 강한 의존 관계가 심신 간에 반드시 성립해야 하는 것인 지 의문이다. 정신 속성을 언어적인 것으로 보는 유명론의 입장에 서는 한, 정신과 물질 간에 의존 관계를 굳이 보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김재권이 말하는 수반은 속성과 속성 간의 관계인데, 데이비슨에 있어서는 정신은 실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개념적으로만 실재하는 것이므로) 정신 속성과 물리 속성 간의 의존 관계라는 것은 원래 없기 때문이며, 심신 간에 존재하는 의존 관계란 단지 개별 사건 간의 동일성 관계 또는 외연적인 사건들 간의 우연적인 포함 관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데이비슨의 입장도 앞에서 살펴본 그의 존재론을 토대로 삼을 때에만 주장될 수 있는 것이지, 김재권의 존재론을 토대로 삼을 때에는 결코 귀결될 수 없는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김재권의 논변중 전제 5]는 속성 실재론, 그중에서도 정신 실재론의 입장을 취할 경우에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신 이론 또는 수반 이론에서의 이러한 둘의 입장 차이는 그 자체로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다고 보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속성ㅗ사건 개념에 관한 둘의 근본적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입장의 보다 근본적인 토대는 속성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철학의 오랜 쟁점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심신 수반을 촛점으로 하는 이 글에서는 굳이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속성 실재론중 특수한 경우인 김재권의 정신 실재론에 관해서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의 정신 실재론이란 속성 실재론을 모태로 하는 정신 속성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권은 정신 실재론을 물리주의와 함께 주장하기 위해 환원주의를 주장한다. 정신이 실재한다는 것을 정신 속성이 인과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이라고 본다면, 물리주의 속에서 정신 속성이 그러한 인과적 힘을 가지려면 (그래서 부수현상론을 벗어나려면) 물리 속성과 동일한 것이거나 최소한 환원되는 것이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의 で강수반と도 이러한 환원주의의 입장과 동일선 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환원주의가 과연 성립하는가 하는 것은 지극히 사변적인 문제로 경험적인 자료로써만 판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여기서는 마침 김재권이 정신 실재론과 で강수반と을 옹호하는 동기와 근거가 우리의 건전한 상식과 직관에 있다는 것인 만큼, 그 때의 상식을 검토함으로써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 바로 전제 1]이다. 1]에서 보여지듯이 수반이 표현하고자 하는 직관적 사실이 바로 심신 간의 의존ㅗ결정 관계이다. 물리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심신 간에 이러한 관계가 성립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와 수반 개념이 나타내려는 관계와의 차이이다. 수반 개념이 나타내려는 관계는 단순히 심신 간의 의존ㅗ결정 관계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각각의 심리 속성이 어떤 특정한 물리 속성들과 의존ㅗ결정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직관이 과연 이 정도까지 포함하는 것일까? 예컨대 특정한 심리 속성의 하나인 식욕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넘어서, 어떤 특정한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과학이 설명해 주기 전엔 모를 수도 있겠지만) 물리적 속성과 의존ㅗ결정 관계에 놓여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건전한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때의 식욕이 과학적으로 의의있는 참 속성이란 보증은 없다. 참 속성은 경험 과학에서 정할 수 있지, 그것의 결정이 철학자의 몫은 아니다. 하여간 미래의 경험 과학자(환원주의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당연히 미래의 심리학자를 말함)가 정할(정말 정할 수 있는 것인 지는 인식론의 영역에서 또 다른 문제꺼리가 될 수 있겠지만) 각각의 심리 속성이 역시 미래의 물리학자가 정할 어떤 물리 속성들과 의존ㅗ결정 관계에 있다는 것이 과연 우리의 직관에 포함되어 있을까? 환원주의자들의 직관에만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 실재성과 심신 간의 의존ㅗ결정 관계라는 상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김재권은 환원주의를 선택한 것이지, 환원주의가 애초에 그가 생각하는 직관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설사 속성 실재론의 입장을 인정하여 속성의 실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물리 속성과 동일한 또는 그에 환원되는 정신 속성도 바로 그 물리 속성과 함께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렇다면 결국 물리 속성만이 존재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즉 그의 で정신 실재론と과 상반되는 제거주의의 입장과 무슨 중요한 차이가 있는가?



4.


우리는 수반 개념이 심신 관계를 잘 드러내 주는 효과적인 개념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심신 문제에 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에게라도 수반은 그의 입장 강화에 도움을 주는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1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데이비슨과 같이 속성의 실재를 인정치 않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에게는 수반 개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2장에서 본대로 속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수반 개념과 상관없이 그 자체 성립할 수가 없다. 수반 개념은 그것의 소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제거주의와 2원론은 애초부터 수반 개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입장들이다. 제거주의란 아예 정신적인 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는 입장이라, 수반 개념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장에서 논한 바대로 수반 개념을 도입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물리주의의 표명을 통한 2원론의 봉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반 개념은 2원론자들에겐 아예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수반 개념은 김재권과 같은 환원주의자들에게만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환원주의에서 수반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과연 남아 있을까? 이미 で환원と이란 개념으로 심신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 아닌가? 수반은 단지 불필요한 잉여 개념에 불과하다. 이 점은 애초에 수반 개념이 비환원주의자들에게 매력적인 개념이었다는 데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수반이 비환원주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될 때, 그것이 가진 매력은 그대로 소멸해 버릴 뿐, 결코 환원주의의 차지가 되지 못한다. 결국 수반 개념은 여러 가지 다른 차원 간의 논의를 진행시키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심신 문제에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개념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반없는 심신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신적인 것은 현실 세계에서 한 부분 영역을 차지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상식과 직관이 지지하는 바도 바로 거기까지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상식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 영역은 존재론적으로는 전 현실 세계와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단지 그 영역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존재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이다. 인간이 자신들을 기타 삼라만상으로부터 차별지우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으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산물이 바로 정신계이다. 따라서 그 내부에서 그 부분을 특징지우고 있는 여러 술어들은 인간이 그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만들어내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영역 내에 한정된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밖의 영역을 표현하는 언어와 결코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개념 체계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정신계는 비록 존재론적으로는 여타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구별될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고유한 관심 영역이 되어왔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심리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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