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결여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요구로 / J. Lacan

나뭇잎숨결 2020. 6. 11. 11:38

결여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요구로 / J. Lacan

 

라캉의 이론은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조차 할 만큼 난해하지만 그의 이론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이해하고 수정하는데 유의미한 길잡이이다. 그는 여전히 프로이트를 발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과학에 입각해 분명한 입장을 유도한 프로이트에 비해 라캉의 이론은 가치명제로 기울어져 모순에 차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와 대립하고 있기조차 하다. 라캉의 이론에서 중요한 사항을 들자면1)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을 믿는다는 사실,2) 언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3) 라캉의 말은 단순하고 분명하면서 동시에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사실 등이다. 라캉은 언어학을 모형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재정립하였다. 즉, 프로이트가 개인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탈정치화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한다면, 그는 정치적 문제와 함께 개인적 문제의 해결을 통한 인간 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프랑스 68 학생혁명과 함께 독일에서는 마르쿠제, 프롬 등이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의 통합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 정치적 환경 속에서 라캉의 이론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고틀로서 프로이트가 결여하고 있던 철학적, 인간학적 측면을 보완하는 것으로써 20세기 후반 지식인 세계에 폭넓은 주목을 끌었고 또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캉은 정신분석 이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이론이 유비적(analogical)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언어학적 개념을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적용, 프로이트가 어둠에 잠겨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라캉은 무의식이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어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다고 파악 즉,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어린 아이의 사회화과정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공통점과 차이를 보자면, 정신분석은 꿈 혹은 정신병 등에서 왜곡되어 나타난 무의식의 의미를 언어로 드러내거나, 인간의 일상적 행동과 언어 속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 잔재를 추적하는 것이란 점에서 자연(본능, 리비도)과 문화(사회, 규범)의 접점 속에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역할 수행. 라캉은 프로이트에게 중요한 심적 에너지 혹은 리비도라는 자연주의적 가설을 거부하고 있으나, 정신분석학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 즉, 문화는 '본능의 억압'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프로이트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문화 자체보다 문화를 구성하는 언어에 집중. 따라서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로 번역가능하다'고 본다.

 

1. 라캉은 결여의 시작을 유아기로부터 도출한다.  출생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태아는 어머니를 상실했다는 불유쾌한 경험 즉 어머니와 한 몸이었으나 출산으로 어머니 몸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최초의 좌절 경험하고 근원적 결핍감을 갖게 된다-욕망의 근원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욕구는 만족되었으므로 우리는 어머니와 분리되기 이전에 느낀 평화롭고 목가적인 상태를 기억하며 욕구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본질적 특성을 갖기 위해 상상계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로고스(언어, 이성)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은 상상계로부터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해야 비로소 인간답게 된다. 즉, 어쩔 수 없이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인 남성의 기관으로서 페니스(음경)를 상징적 의미의 팔루스(Phallus; 남근)란 상징적 언어로 대체시켜 프로이트의 전통을 발전하는 한편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프로이트가 외디프스 콤플렉스에서 말하는 '음경선호'(penis envy)에 대해 라캉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남근은 허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다. 또한 남근은 그 자체로 현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대상도 아니다. 남근이 남성 성기나 음핵같은 신체기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진실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는 바 팔루스는 신체기관인 페니스가 아니라 곧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팔루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 즉, 남성 중심 사회의 법, 곧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아버지에 의한 거세를 두렵게 생각하는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므로 생물학적 결정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팔루스는 권위, 권력, 질서를 상징하는 한편 상실, 결여, 욕망을 상징하는데 어린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이러한 '결여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언어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린 아이가 무엇인가 결여되었거나 상실된 사물의 개념을 가져야 비로소 파악될 수 있다.
인간의 욕망(désir)은 매우 불안정하고 모순적이어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충족될 수 있는 욕구(besoin)와는 다르다.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를 말하며 식욕, 성욕의 충족처럼 특정 대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의 달성을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욕구의 충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잔여물이 있고 그것이 욕망의 형태로 남는다.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구는 대부분의 경우 요구(demande)의 형태로 나타난다. 라캉에 의하면 요구는 특정한 대상으로 만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그러하다. 사랑에 대한 요구는 타자가 만족시켜 줄 것을 기대하지만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이것을 만족시켜 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결핍감이 욕망을 구성한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은 순수한 결핍이 갖는 힘"이라고 한다. "욕망은 만족을 위한 욕구도 사랑에 대한 요구도 아닌, 요구에서 욕구를 뺀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동시에 양자 분열의 현상 그 자체이다."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랑의 요구는 서로의 요구를 완전히 채워주기는커녕 오히려 주체를 욕망의 회로 속으로 몰아넣는다."

 

  

2. 언어는 무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결여에서 욕망으로 옮겨갈 때 주체는 언어체계에 진입하게 된다. 욕망에서 요구로 옮겨갈 때 주체는 언어 속에서 소외된다.

 

에크리

 라캉의 논문 “Position of the Unconscious” 은 원래 1960년에 어떤 학회에서 발표된 것인데 1964년에 라캉이 압축한 형태로 어떤 잡지에 실렸다. 그리고 1966년 [에크리]에 다시 실렸다. 제목이 드러내고 있듯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이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코마에 빠진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의식이 없다. 그렇다면 그는 전체로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가? 오히려 의식과 더불어 무의식도 잠들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의식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무의식도 함께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라캉의 사유를 빌면, 의식과 무의식은 주체가 말하고 있는 경우에’만’ 작용한다. 코마에 빠진 사람에게 의식도 무의식도 없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죽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라캉에게 “말하는 주체(speaking subject)” 는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동식물의 경우에도 분명 소통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한다. 그들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라캉이 주로 기호(sign)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기호의 기능은 대개 실용적(pragmatic)이다. 철학자S. 랑거(Langer)에 따르면, 동물들은 거의 압도적으로 실용적이다. 비판이론가들이 “도구 이성”이라고 명명한 것이 동물의 관계를 지배한다. 목적이 미리 주어진 경우에, 도구 이성의 세계에 오류는 (거의) 없다. (파블로프의 실험은 개에게도 상징이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도구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류와 광기는 매우 인간적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언어학은 필수적이다. 어떤 면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언어학이기도 하다. 또는 언어의 운용은 정신분석학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무의식/의식은 언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없다. 그렇지만 언어에 대해 너무나도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탓에 언어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 내용들은 사변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언어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을 넘어서서 작용한다. 라캉은 기호(sign)과 상징(symbol)을 구별한다. 기호는 인간과 동식물에게 나타나는 데 비해, 상징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자크라캉 2



“기호는 다의적(polyvalent)” (E. 712; F. 840) 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문득 멈춘다.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는 기호가 이미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를 F. 소쉬르의 언어학에 기대어 생각해 보자. 소쉬르가 기호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이라고 했을 때, 기호학의 영역을 확정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의라고 할 수 있다. 기의가 있는 후에야 기표가 있다. 소쉬르가 말하는 자의성이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말’이라는 소리로 의미하는 ‘어떤 동물’은 영어로는 horse라고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어떤 동물”은 일정하다. 이 “어떤 동물”은,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초월적 기표(transcendental signified)라고 하겠다. 그의 입장에서 “어떤 동물”은 적어도 명확히 알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동물”이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언어 공동체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름으로 귀일된다. 경제학의 일물일가의 원칙처럼 어떤 기의에 대한 기표는 귀일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 강고한 결합을 소쉬르는 언어의 기본 단위인 기호라고 부른다. 기호는 아무리 다의성을 갖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사전적 의미들로 환원될 수 있다.

자크라캉의 이론에 대한 다섯 편의 강의

라캉은 일반 언어학 내지는 기호학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보다 제한적인 것인데, 그는 언어에 사용되는 기호들이 정신의 작용과 관련하여 무엇을 하는가를 문제삼고 있다. 이 점은 다시 프로이트의 18개월 주체로 돌아가면, 독일어에서 fort와 da라는 기초적인 단어들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프로이트 또는 라캉에 중요한 것은 fort와 da가 18개월된 아이에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아이는 엄마 (Mother) 의 부재/결여에 의해 환기되는 욕망/충동들을 다룬다. 사람들마다 이를 다루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라캉이 언어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는 정신분석학의 의미에서 마음의 등장과 긴밀하게 엮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충동들을 다루기 위하여 언어가 기원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는 매우 핵심적인 영역이다. 라캉은 ‘상징’으로서의 언어에 초점을 맞춘다. 언어가 상징이라고 할 때, 이는 언어와 관련하여 주체(subject)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말한다,’ 는 사실에 의해서만 해명된다. 이 점에 있어서 적어도 초기 라캉에 있어서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라캉이나 프로이트가 의미하는 상호주관성은 말하기 (speaking)에 의해 매개되는 나-너/그의 관계’ (대상관계)와’ 나-나의 관계 (나르시시즘) 이다. 일기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 보자. 일기에서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fort-da를 놀고 있는 18개월의 아이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그는 적어도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전제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는 대타자(the Other)를 상정하는 경우에만 fort-da를 통해서 어떤 만족을 얻지 않을까? 우리는 아이의 놀이에서 여전히 순수 언어 게임과는 달리 행위가 연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가 던졌다가 회수하는 물건은 아이 자신이나 엄마를 대체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 특별한 대상의 출현은 주관적 해석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 특별한 대상이 ‘기표’가 된다. 이 경우에 ‘기표’는 소쉬르의 기표와는 구별된다.

자크라캉


라캉의 기표는 ‘초월적 기의’의 부재와 관련해서만 작동한다. 그렇다고 기표를 움직이게 하는 무엇이 전연 없다고 할 수 없다. 무엇인가가 엄마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한에서 주체의 기표가 된다. 그래서 기표는, 부재안에 있는 현존인 동시에 현존 안에 있는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기이한 수행에서 가끔 나타나는 ‘불상 소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불상의 소각은 불상이 정확하게 부처 자신인 동시에 부처가 아니라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불상이 단순히 하나의 조잡한 조각품으로 인지되는 경우에, 선을 닦고 있는 이가 불상을 태운다면 이는 사소한 일일 따름이다. 불상은 부처이어야만 한다! 불상은 부처인 동시에 조각된 상이다.

18개월 아이에게, fort-da에 연루된 물건은 엄마인 동시에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엄마라고 한다면 이 놀이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우울을 환기시킨다. 다른 사람들에게 – 프로이트와 엄마 – 에게 이 의미가 거의 ‘즉각적으로’ 알려졌다고 하지만, 아이 자신에게 있어서 이 현존과 부재는 하나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즉, 놀이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아이는 주관적 쾌락을 얻는다. 그 아이에게 그 물건이 ‘엄마’라고 말한다면, 이 아이는 더 이상 그 놀이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무의식의 의식화가 행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아이는 이 점을 부인할 것이다. 요컨대, 무의식은, 이 엄마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의미하는 기표가 움직이는 자리/기능이다.

라캉과 정신의학


프로이트-라캉의 무의식은 ‘바다’의 상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융의 무의식이 갖는 숨겨진 보물창고의 이미지는 프로이트와 라캉에게는 낯선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의식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이것에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따름이다. 인간의 행위는 – 감정을 담고 있는 한에 있어서- 두 가지 상충하는 힘의 종합 (overdetermination)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언어 현상이다.

라캉은 기표에 의해 이루어지는 놀이를 분석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가설들을 설정한다. 우선, 기표가 언어 게임인 한에 있어서 기표는 일반 언어학의 규칙을 따른다. 따라서 라캉은 야콥슨이 말하는 은유와 환유를 도입한다. 다시 말하면, 기표는 은유의 방법과 환유의 방법을 통해 엄마의 부재/현존을 동시에 다루게 된다. 은유와 환유는 흔적이다. 완전히 지움이란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하여 완전한 표명도 불가능하다. 이 두 불가능 사이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된다.

주체(S)는 자신이 모르는 영역 – 즉, 무의식- 에서 자신의 의미를 획득한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이면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은 동시에 작동한다. 어떤 사람의 무의식은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자명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측면에서 무의식은 없다. 무의식은 문제되고 있는 주체의 측면에서 나타난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는 소위 ‘일상생활의 병리’를 너무나도 쉽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있다. 착오 등등. 라캉: 재현과 그 불만

삶은 원초적 대상의 현존과 부재를 둘러싼 놀이를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과정이지 않을까? 18개월 아이는 곧 fort와 da가 너무나도 (스스로에게도) 명백하게 엄마의 현재와 관련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 때, 아이는 좀더 정교한 방식으로 엄마의 부재-현존을 가려야 한다. 현존과 부재의 드라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는 가장 결정적인 형태이다. 부처 ¹ 불상의 비유에서 부처는 다시 아버지의 이름이 되고, 이는 엄마와 연결된다. 다른 논문에 있는 내용이지만, 라캉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남자가 엄마의 성적 서비스에 종속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But Freud reveals to us that it is thanks to the Name-of-the-Father that man does not remain bound [attaché] to the sexual service of his mother…)” (E. 723; F.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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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시각의 분열에서 기인한다. 시각의 영역에 충동(drive)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다.

 

 

고흐가 1888년에 그린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를 보자. 파이프가 있는 고흐의 의자는 아버지가 물려준 담배 파이프와 담배쌈지를 올려놓은 매우 소박한 의자다.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고자했던 고흐의 욕망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타는 초와 책이 놓인 화려한 고갱의 의자는 고갱에 대한 강한 애착, 고흐의 양성애적 욕망을 그러낸다. 정신분석학자 나게라도는 고흐가 자기의 귀를 잘라 창녀에게 주기전에 고갱을 찌르려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흐 내부에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고파는 욕망과 고갱이라는 타자에게 인정을 받고자하는 욕망은 대척적인 욕망이다. 전자는 자기지향적이고 후자는 타자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고흐의 욕망은 극단적 분열을 경험하고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자르게 한다. 자헤에 그쳤기에 고흐는 욕망의 과잉상태인 우리의 현주소가 된다. 만약 고갱을 찔렀다면 고흐는 <결여- 욕망- 요구>의 트라이앵글을 제어하지 못한 사이코패스가 된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란? '반복'(repetation)의 어원은 '지치게 하고 소모시킨다'는 의미의 'holen'(to haul) 즉, 끌어당긴다란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라캉이 이 반복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제5권의 한 에피소드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즉, 아들의 병상에서 밤낮으로 간호했던 한 아버지가 아들이 죽은 후 잠시 옆 방으로 가면서 그 아들의 시체를 보기 위해 병실에 큰 촛불을 켜놓고 문을 조금 열어둔 채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면서 비난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 제가 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아들의 병실로 다가가니 촛대가 넘어져 불이 났고 그 불로 아들의 팔이 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 꿈을 일종의 '소망충족'으로 해석한다. 죽은 아들은 꿈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는 상태로 있도록 잠에서 바로 깨어나지 않고 이 꿈을 연장한다. 아버지가 꿈에서 깨어나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면 그만큼 아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실재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발생하는 주체의 분열이 반복의 토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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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이란 경험에서 발견되는 주된 특징은 분열이며, 이 분열의 변증법적 효과 속에서 실재계가 파악된다.그러나 실재계와의 만남이 처음에는 달갑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이 때문에 실재계와 충동이 주체에게서 비슷하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 역시 우리를 보여지는 존재로 만드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현상학의 한계를 헤쳐나갔다. 시선이란 보는 사람의 시선에 선행하는 발아라는 것의 은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가 가르쳐 준 대로 우리가 규정해야 할 것은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분열이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접하게 되는 한계성을 의미한다. 응시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 즉 거세공포를 형성하는 결여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시선과 응시. 시각의 영역에 충동(drive)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다. 응시(gaze) :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것-모방을 통해 응시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는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에게 응시를 촉발시키지 않는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strangeness) 역시 시작된다. 이 말은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응시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응시가 볼 뿐만 아니라 '보여준다'는 사실도 사라져 버린다. 반면 꿈의 영역에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응시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경험하는 응시는 거세공포에 의해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던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 게 하는 동인 즉 실재계에 난 구멍이 바로 응시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사르트르가 말한 바대로 열쇠구멍을 통해 보는 남자가 어느 순간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의해 또는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깨닫고 놀라고 당황하여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지점이다. 메를로 퐁티 역시 장갑을 예로 들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갑의 표면은 매끈하지만 그 속은 털이 있다. 인간의 손 또한 피부는 매끈하지만 그 위에 털이 나 있으므로 장갑과 손은 서로 반대이지만 장갑을 끼었을 때 장갑과 피부는 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본다. 이것을 시선과 응시의 관계를 비유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의 영역이 욕망의 영역에 연관될 때 비로소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게 되는 특권이 이해될 수 있다. 주체의 기능이 데카르트적 사유에 의해 가장 순수한 형태를 띠게 된 바로 그때 원근법에 반대되는 '평면광학(geometral or flat optics)'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시각이란 일반적으로 이미지의 기능에 따라 배열된다는 사실 즉, 이미지의 기능이란 공간 속에 있는 두 물체의 점대점 대응(point-to-point correspondence)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라캉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작품에서 주체의 소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외교관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책상 위에는 당대과학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다. 그 당시 아그리파(Cornelius Agrippa)는 과학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목적으로 <지식의 공허함>을 썼다. 평면시각으로 볼 수 없는 물체, 공간과 욕망이 개입되어야 드러나는 이 물체는 그 위에 놓여진 과학의 상징물들을 허영이라고 비웃는 듯 하다. 이 책에 의하면 그림 속의 물체들은 그 당시 세 학문(trivium; 세 학문의 집합)과 네 학문(quadrivium;대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으로 분류되어 과학과 예술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밑에 길쭉하게 누워있는 것은 정면에서 볼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으나 몸을 왼쪽으로 옮기며 돌아나가려다 힐끗 보면 그것이 해골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 물체가 처음부터 해골의 모습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발트루쇄티스는 그것을 오징어 뼈에 비유한다. 그러나 라캉은 그것을 노파의 비참하고 더러운 모습을 잘 나타내기 위해 달리(S. Dali)가 고의적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빵덩어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노파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녀는 더욱 비참하고 더러워 보인다. 또 이 그림을 보면 전경에서 날고 있는 상태로 묘사된 물체의 의미보다 덜 성적이긴 하지만 달리가 그린 녹아내리는 시계(라캉에게 있어서 이 녹아내리는 시계는 '거세'를 상징하는 이미지이다)들을 연상시킨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기억의 고집> 역시 홀바인의 <대사들>처럼 이 공간개념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인다. 주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평면광학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당시에 홀바인은 주체의 소멸을 보여준다. 주체는 이미지로 구체화된 거세의 형태로 소멸되고 이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충동들을 통해 욕망을 전체적으로 조직할 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시각의 기능을 따라가 보면 기이하게 왜곡된 길쭉한 형상(해골)은 남근의 상징인 변형된 유령이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살아 맥이 뛰는 듯한, 아찔한, 확장된 응시의 기능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그림들처럼 응시를 유혹하는 덫이다. 어느 그림에서나 응시의 각 점에서 응시를 찾는 바로 그 순간 응시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평면적인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단순한 시선(eye)을 넘어서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욕망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왜 타자의 응시가 인식의 영역을 해체시키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욕망의 변증법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시각은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gaze)이 함께 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보여짐을 강조하는 것이 라캉의 욕망의 주체이다. 상상계 못지 않게 상징계를 강조하듯 그의 보여짐, 즉 '응시'가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욕망의 동인(오브제 a)임을 보여준다.


 

4. 라캉(Jacques Lacan;1901~1981) 은 파리의 유복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1919년 의과 대학에 다녔으나 철학, 문학, 초현실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조르쥬 바타이유, 클로스포스키 등과 교류하였다. 1932년 의학 박사 학위 논문인 "인성과 관련된 편집증적 정신이상"을 출판하였으며 이때부터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36년에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 단계'를 발표하였으며, 1968년 학생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라캉의 욕망이론을 이해하는 세 가지 개념은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이다.

 


실재계(le réel) :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이자 경험의 대상을 구성하는 세계 전체로 생물학적 욕구와 외적 사물로 구성되며 상징화되기 이전의 세계의미. 실재계는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아기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누리던 일체감과 안락감을 맛볼 수 없으므로 결핍 또한 시작한다. 즉 출산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체를 이루고 있던 자신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탯줄을 자르는 것은 이러한 분리를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욕망의 죄절을 겪게 되며 이러한 결핍이 성적 욕망을 앞선 것이므로 성적 만족이 이것을 결코 완전하게 채워주지는 못한다. 결국 실재계란 인간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이 욕망의 존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분열과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계(거울단계)
: 6~18개월의 어린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다른 사람으로 알다가 점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울 앞에 선 어린 아이, 이것은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산만한 유아가 갑자기 전체적이고 일관되며 멋진 것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아가 하나의 정체성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에 이르게 되는 길이며, 유아는 자신을 거울에 보이는 것과 일관된 존재로서 상상한다.

즉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통해 아이는 '조각난 몸'(le corps moecelé)의 환상을 갖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과 자아를 동일시(상상적 자기동일성)하는 순간 조각난 몸의 환상이 가져온 고뇌에서 벗어나 '신체의 통일적 형태'(gestalt)를 파악 : 만족감과 자아도취의 감정 획득하지만 자기도취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자기소외 수반이 단계가 인간의 자아의식의 허구성, 기만성을 노출하는 시기이다.

거울단계가 있다는 것은 유아가 외부로부터 자아에 대한 느낌을 얻게 된다는 뜻인데, 이 자아는 그 자체의 반영물에 불과하다. 자아에 대한 거짓된 감각 즉 잘못 인식된 정체성을 라캉은 그 개인에게 계속 남아있게 되는 분열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 가공의 세계에서 거울 이미지는 시니피에(기의)이고, 아이 자체는 시니피앙(기표)이 된다.

상징계(아버지의 이름)
: 어린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언어를 획득하게 되고 상상계로부터 분리 즉,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거울단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이 상징계로의 진입을 통해 진정한 자기동일성으로 변형가능(언어의 주체가 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되는 것) 실재계와 상상계를 억압함으로써 욕망의 끊임없는 순환이 야기된다.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는 인성발달의 단계에 상응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세 종류의 질서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