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로티의 철학관
엄 정 식
서강대
I. 머리말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대 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물론 철학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항상 철학의 과제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늘날처럼 중요한 쟁점이 되어 있던 시대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현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되어 온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적 존재론에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 전환되어 있던 서양 철학의 패러다임을 다시 의미론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철학은 존재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전제가 되는 의미의 명료화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한편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란 표현을 만들어 낸 적이 있는 로티(Richard Rorty)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서 매우 파격적인 철학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객관성과 합리성과 실재성을 부정하고, 유대성과 실용성과 반실재성을 근거로 해서 새롭게 철학을 정립하려는 이른바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철학관이다. 물론 그는 이러한 철학관에 도달하기 위하여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의 해석과 그러한 입장의 적용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적 우상으로서 하이데거(M. Heidegger)와 듀이(J. Dewey)를 빼놓을 수 없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수인 데리다(J. Derrida)와 파격적인 과학 혁명의 구조를 제시한 쿤(T. Kuhn), 그리고 후기 분석철학에 계기를 마련한 콰인(W. V. Quine), 셀라스(W. Sellars)와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데이빗슨(D. Davidson)과 퍼트남(H. Putnam)으로부터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독창성에 있어서나 영향력의 심도와 증폭에 있어서 로티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는 역시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인식론 중심의 철학 체계를 해체하도록 자극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철학의 패러다임이 어떠한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을 먼저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로티가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 점검한 다음 퍼트남과 비교하여 이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잠정적으로 얻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철학을 많이 닮았는데, 그러한 의미로 그는 언어의 궁극적 명료화를 추구한 비판철학자이다. 둘째, 그의 비판철학에는 구성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면과 해체적이고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인식론 및 존재론 중심의 철학에는 후자가 해당되지만 새로운 철학의 창출에는 전자가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 로티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중에서 후자의 측면을 강조하고 확대 해석함으로써 상대주의적이고 해체주의적인 철학관을 제시한다. 넷째, 퍼트남은 전자의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철학적 가치, 즉 객관성과 합리성과 실재성을 옹호하려 하지만 실천이성의 우위를 담보로 하고 있다. 다섯째, 현대 철학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확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로티와 퍼트남의 입장이 서로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보완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제 이러한 점들은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Ⅱ.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원래 비트겐슈타인은 연날리기에 흥미를 가졌던 공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곧 물리학에 관심을 나타내었고 이어 이것을 가능하게 한 수학으로, 그리고 다시 수학의 기초로 자기의 관심분야를 바꾸었다. 그가 언어의 본질이라고 간주했던 논리의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논고』에서 그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의 세계를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해명의 한계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영역도 그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존재나 인식보다 의미의 규명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 계기를 우리는 여기서 추적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자기의 언어관과 철학관을 많이 바꾼다. 언어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논리 형식(logical form)이 존재의 형식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게 여전히 언어가 철학의 과제이고 ‘언어비판’이 곧 철학의 임무이지만 여기서 ‘언어’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이며 생동하는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철학의 역할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언어의 실제적 활동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그것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근거를 마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철학의 임무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혼란을 제거함으로써 마치 ‘사상누각’을 철거하듯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들을 없애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정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의 과제로 다루어졌던 문제들, 가령 심신 문제, 회의주의의 도전, 외계의 존재, 보편과 개물의 논쟁 등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철학관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종래의 철학관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그러한 구성 자체를 거부하므로 구조에 대해서 해체적(deconstructive)이고 이론에 대해서는 파괴적(destructive)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언어에 의해서 우리의 지성이 매혹되는 것에 대적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제시하는 철학관의 전부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대해서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역할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가령 그가 ‘어법(grammar)’이나 ‘본질’에 관해서 언급할 때 철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어법은 그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 말해 준다(어법으로서의 신학)”고 주장하며 “본질은 어법에 의해 표현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어법을 연구함으로써 철학은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의 본질이나 심성의 본질 같은 것을 규명할 수도 있는데 신에 관한 이야기가 어떠한 어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정신에 관한 어휘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면면히 검토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기술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나 어휘의 활동에 관해서 언급할 때에도 철학의 적극적인 기능을 강조한다. 가령 “문장을 도구로, 그리고 그 의미를 적용으로 간주하라”든지 “물론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미’란 말을,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 언어에서의 활용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실행이 어휘에 의미를 부여한다”와 같은 표현에서 그러한 측면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언어 속에서 쓰이지 않거나 실행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지 않는다면 전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이러한 식으로 철학적 의미론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철학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수우터(Ronald Suter)가 지적하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는 분명히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권유하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하는 측면이다. 수우터는 철학이 만들어 낸 혼란을 제거하는 철학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자는 우리를 혼란으로 몰아가고 후자는 거기서 우리를 헤어나게 한다. 그것이 그가 자기의 철학 하는 방식을 치료와 비교하고 ‘어떤 의미로 정신분석과 같은 것’처럼 말하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방법은 체계적 설명이 아니라 순수한 기술이며 철학의 임무는 개념적 명료화인 동시에 철학적 문제의 해소이다. 존재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에 대한 체계적 설명만을 철학이라고 한다면 그의 철학관은 해체적이지만, 개념적 명료화를 통해서 철학적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면 이 철학관에 분명히 구성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사실 철학에는 출발점이 있다. 비록 그것은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이데아의 존재나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와 같이 자아의 인식은 아닐지라도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전제로 삼는 생태형식(form of life)이 곧 철학의 출발점인 것이다. 바로 이 형식 때문에 인간적인 생태가 규정되고 무엇보다 언어라는 현상 혹은 언어게임이 가능한 것이다. 그가 『논고』에서 강조하던 논리형식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이 생태형식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생태형식은 칸트의 “선험적 형식(a priori form)”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본체의 세계(noumena)”와 같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이러한 개념들을 약간 변형된 형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비트겐슈타인의 생태형식에도 경험적 내용이나 자연적 요소를 넘어서는 선험적이고도 초월적인 특성이 있고 바로 이러한 특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철학관은 해체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으로부터 구성적이고 건설적인 국면으로 전환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전개하는 확실성의 추구는 이러한 점에서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추구와 구분되는 것이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확실성의 근거는 생태의 내용이나 형식과 일치함으로써 확인된다. 이러한 경우 그는 어떤 명제의 진위를 규정하는 기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가 작동하는 조건을 제시할 기본적 명제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명제들이 다른 명제들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준다. 그것은 곧 생태의 내용을 담은 명제들이며 더 이상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명제들인 것이다. 가령 “동물적인 어떤 것”으로서 “아주 일반적인 자연의 사실들”에 관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거의 언급된 적이 없는 그런 사실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의 분석과 개념의 명료화가 논리형식의 차원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의미의 생태형식을 확인할 때 비로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비판으로서의 철학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비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철학함(doing philosophy)’의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적 의미로 자기를 발견한다는 뜻이며 새롭게 태어난 그 자기가 세계를 변형된 모습으로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와 자기 자신이 인간적 생태형식의 맥락에서 이해될 때 당연히 찾아오는 침묵의 체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노바(Judith Jenova)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은 활동(action),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이라는 4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하나의 활동이다. 그것은 교설의 체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는 ‘철학을 한다(doing philosophy)’는 점에서 예술이나 과학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철학은 각종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여기서 활용된 언어의 의미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명료화의 작업이다. 과학언어 뿐만 아니라 예술, 윤리, 종교에 관계되는 언어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분명히 기술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러한 명료화 작업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과 존재의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실제로 철학을 통해서 세계를 변모시킬 수는 없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 자신의 관점을 개선함으로써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마치 선사(禪師)들과도 같이 마침내 우리는 명료화 작업을 끝내고 침묵의 세계로 침잠하지 않으면 안된다. 철학은 언어와의 유희가 아니라 언어를 관통해서 어디에로든지 도달해야 하는 ‘여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제노바가 적절하게 표현해 주었듯이 “우리들 자신의 세계관을 변형시켜 침묵으로 마무리할 목적으로 언어의 명료화에 관여하는 활동”인 것이다.
Ⅲ. 로티의 철학관
로티에 의하면 현대의 철학적 탐구를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철학이고 둘째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시상적이고 예술적인 철학이며 셋째는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에게 뚜렷한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철학이다. 그런데 예술적인 철학과 실천적인 철학은 과학적인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토대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이며 관상적 태도에 대한 거부가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사실 현대 철학에서 언어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 것 못지 않게 현저한 특징으로 나타난 것이 과학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에서 철학의 모델을 찾고 그 확대된 형태로서의 철학이나 그것을 뛰어넘어서 완전한 의미로 “엄밀한 과학”을 정립하려는 철학들이 있는가 하면, 과학을 비판하고 예술이나, 윤리 혹은 종교 같은 데서 전형을 찾아보려는 철학이 있다. 그 어느 경우이든 과학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철학관이 현저하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초기에는 과학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과학 언어에서 유의미성의 전형을 찾았지만 후기에는 과학 언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특히 이것이 종교 언어나 윤리 언어 혹은 예술 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여러 언어 게임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 게임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또 환원이나 번역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이러한 언어게임들 상호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가령 서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리더라도 전혀 중복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로티의 우선적인 관심도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처럼 ‘메타철학적(meta-philosophical)’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철학의 모델이 과학적인 것으로부터 그 외에 어떤 것, 가령 실용적이고 교화적인, 혹은 해석학적이며 문예 비평적인 형태로 바뀌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인식론 중심의 과학적인 철학에 대해서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티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계승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이러한 점들을 주로 그의 과학관과 언어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로티는 무엇보다도 과학을 일종의 언어활동으로 보고 더구나 다른 언어 활동, 가령 종교나 예술에 비해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활동은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과학에서의 새로운 사고나 이론들을 일종의 비유로 간주한다. 따라서 과학은 진리나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행을 통해 변화되는 것으로서 자문화주의(ethnocenticism)의 입장에 서서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을 통해 유대성을 이루어 가는 활동으로 인식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쿤(Thomas Kuhn)의 “과학 혁명의 구조”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비록 그러한 정도의 열린 사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쿤의 과학적 공동체와 유사한 상대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롤즈(J. Rawls)가 정의 사회를 설명하듯 과학자들의 사회를 과학적 설명과 진리의 탐구보다는 합의를 도출하는 특수 집단으로 본다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로티의 과학관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칸트의 입장에 관한 해석이다. 비록 칸트가 과학적 진리와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지만 이것은 실천이성과의 연계 속에서 도덕적 판단과 같은 맥락에서 취급했다는 것이다. 로티에 의하면 칸트는 우리에게 “과학적 진리를, 결론이나 정당화, 말하자면 당위에 관한 도덕적 결단이 세계의 본성에 관한 ‘인식’에 근거해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서는 결코 대답이 있을 수 없다는 그 무엇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칸트의 위대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유감스럽게도 칸트는 과학에 관한 자기의 진단을 ‘불가피한 주관적 조건들’의 발견에 국한하며 과학적 발견에 관한 성찰에 노출시켰다. 이에 못지 않게 유감스러운 것은, 정언명법을 파악하는 것이 ‘인지(cognition)’가 아니기 때문에 ‘인식(knowledge)’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덕적 딜레마를 위한 결정의 절차가 정말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티의 과학관에 관한 면모를 추적할 수 있다. 과학은 그에게 물질계 혹은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의 체계이며 화술을 위한 언어 활동일 뿐이다. 이러한 과학관은 과학과 철학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든지 상관없이 그의 철학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실 김동식 교수가 잘 지적해준 바와 같이 과학에 관한 “그의 논의 차원은 직접적으로 과학 활동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의 철학적 문화적 의의에 대한 것이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과학이 문화 전반에 걸쳐서 차지하는 위상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과의 관계에서도 비교적 낮은 비중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가 과학 대신 문예활동을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채택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김동식 교수가 지적해 준 바와 같이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로티의 경우 과학은 “문예 비평의 한 장르”가 되며 “과학자들이 자연을 대하는 것은 예컨대 역사가들이 사료를 대하거나 일반 독자들이 어떤 텍스트를 대하는 것과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하나의 언어 활동 즉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티의 경우 철학관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의 언어관이 된다.
로티는 그의 과학관에서 보다 오히려 언어관에서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좀더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자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해석함으로써 자기 자신 및 데이빗슨의 언어관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특히 “?논고?에서 논의되었던 ‘단순 명칭’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관계적이 아닌 언어적 요소는 없다”는 점에서 자기들이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티는 근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그의 의견을 좀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서 결국 의미의 형성에 근거를 마련하는 생태형식 자체를 부정한다. 가령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어서 마치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과 유사하게 낡은 건물과 거리와 광장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면서 부단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로 변모되듯이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달리 단순히 고정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결국 언어는 ‘소음들(noises)’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로티는 이것을 ‘다윈적(Darwinian)’ 입장이라고 선언하며, “특별한 기관과 능력을 지닌 동물로서의 인간, 인간의 목과 손, 두뇌의 어떤 특징이 앞뒤로 복잡해지는 것을 점차로 균형을 잡아감에 의해서 어떻게 복잡한 사회적 실행을 개발해 나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로티의 다윈적 언어관은 실용주의적 특징을 나타내기 이전의 입장과 사뭇 다르다. 가령 그는 과거에 “제거적 유물론(eliminative materialism)”의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마귀’나 ‘플로지스톤’과 같은 표현들이 언어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이제는 ‘진리’, ‘의미’, ‘이성’ 뿐만 아니라 ‘철학’이라는 어휘들도 인류의 지성적 담화에서 사라질 것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철학관을 견지할 것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분석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시도해 왔던 철학적 작업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무엇이 어떤 문장을 참인 것으로 만들고 또 어떤 행위나 태도를 선한 것 혹은 합리적인 것으로 ‘어떻게 언어가 세계에 연결되는지’를 기술하려는 시도로서 인식되는 한 철학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시도는 우리가 피부 밖으로 나가서 우리 자신과 불가능한 목표인 어떤 절대적인 것을 비교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로티에게 철학은, “인간이 고안해 낸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들에 관한 이로운 점과 이롭지 않은 점들을 비교하는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김재권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로티의 철학관은 대체로 문화적이며 지성적 활동이지만 철학적 진리의 획득과는 거리가 먼 문예적 담화의 일종인 것이다.
로티의 철학관은 그 동안 강단 철학에 몰두해 왔던 철학 교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철학관을 지니고 있으면 철학자들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또 대학의 철학과가 어떠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 모호해 지기 때문이다. “대화(dialog)”에의 소크라테스적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담화(conversation)”을 통한 교화의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철학이 될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로티 자신은 이러한 점에서 철학자는 일종의 “훈수꾼(kibitzer)”, 말하자면 자의식적으로 비전문가적인 문화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번슈타인(Richard J. Bernstein)은 그가 지난 10여년간 훈수꾼으로서 수행한 철학적 임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준다.
첫째, 그는 특히 여러 형태의 ‘실재론’에 매료되어서 철학에서 반역사적 충동을 나타내는 ‘악성’ 토대주의자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둘째, 그는 점점 더 ‘심미적’ 해석을 강화하면서 이른바 “백화만발”의 기치아래 서로 다른 ‘어휘’들이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진지성의 정신”을 버리고 대문자로 시작되는 “진리”의 “객관성”, “합리성”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도록 역설한 것이다. 셋째, 그는 관용의 원칙을 수용하고 실행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서구 문화가 성취한 사상적 은유의 충동을 고무시켜 왔다. 번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세 가지 특색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어서 보완 관계를 이루며 작동해 온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끔 로티는 우리가 잘못된 주제에 대해서 고심하기를 멈추고 철학자들을 너무도 오랫동안 사로잡아 왔던 낡은 ‘어휘’들을 치워버린 다음 자유 민주주의의 혜택과 도덕적 진보를 절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시상화(詩想化)된 삶의 즐거운 임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로티는 비트겐슈타인이 전통적인 형태의 인식론 즉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응하는 인식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환기시키고 자기가 이러한 접근 방식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사실 세계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어휘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그러한 선택은 우리의 관심과 능력을 반영하고, 이러한 것들은 항상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에 대해 좀더 바람직하게 해석하고 이해하며 예측하고 또 제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술하는 언어와 이론의 개발과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실용주의자들은 언어를 도구적이고 역사적이며 거래적인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로티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서 전통적인 인식론 중심의 철학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은 우리가 탐구를 하도록 유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지닌 관심의 표현이고 또 그 방향을 조종해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킹(Ian Hacking)이 잘 지적해 주었듯이 비트겐슈타인을 순전히 실용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제외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Ⅳ. 비트겐슈타인의 이해와 퍼트남
로티가 개별과 변화와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영원과 필연을 추구하는 전통 철학계에 반기를 든 것은 바람직하고 또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찬양하고 또 계승하려는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철학관을 지니고 있든지 상관없이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외면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로티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는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이 있고 동시에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요소와 건설적이고 구성적인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그런데 로티는 이중에서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요소를 주로 부각시키고 소극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점을 좀더 잘 이해하려면 이와 대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메타철학적인 문제로 고심하는 퍼트남의 입장을 검토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퍼트남에 의하면 현대 철학이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철학 그 자체를 재정립(Renewing Philosophy)”하는 일이다. 그가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물론 오늘날 철학이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그 행방이 모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현대 철학에서 객관성이나 실재성 혹은 합리성 같은 가치들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람직한 철학이 형성되려면 상대성, 비실재성 및 비합리성의 요소가 개입될 수 없도록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퍼트남은 이른바 ‘신의 관점’을 자처하는 독단적 형이상학이나 과학주의뿐만 아니라 지적 탐구 자체를 거부하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배격하고 중도적 관점에서 초월성과 일상성을 근거로 하여 철학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로운 철학을 위해 청사진을 그리거나 심지어 새로운 선언문 같은 것을 채택해서 그러한 것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사진이나 선언문은 아무래도 상당한 환상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며, 최근에 철학에서 그러한 환상을, 가령 과학적임을 자처하는 환상이거나 진리와 이성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환상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환상을 제거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활로를 찾을 것인가? 퍼트남은 놀라웁게도 그 가능성을 로티와 마찬가지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전통적인 미국의 실용주의에서 찾는다. 그러한 철학은 다소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망스럽게 회의주의적이지도 않고 불합리하게 형이상학적이지도 않은, 초과학적이거나 초정치적이지도 않으며,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진솔한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퍼트남과 로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그것은 이들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지점에서 문제의식을 같이 나누고 출발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로티와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과학관과 언어관을 받아들이고 있고 따라서 철학이 전통적인 인식론 중심의 경직된 진리 탐구의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서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 로티는 해체적이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반면 퍼트남은 구성적이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로티는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차이점을 더 언급하지만 퍼트남은 유사점과 연계성을 자주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퍼트남은 근대 철학의 중심개념인 ‘합리성’, ‘객관성’ 및 ‘실재성’ 같은 것을 비트겐슈타인적 철학관 안에서 재해석하고 그것을 실용주의적 실재론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대체로 칸트적 요소를 나타내었다고 하더라도 형이상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혹은 가치론적으로 체계를 세우지는 않았고, 따라서 본체성이나 선험성, 혹은 자율성 같은 것을 부각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로티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이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입장을 ‘자연화(naturalize)’ 하였다고 해석하며 흔히 그를 ‘자연주의자’로 낙인찍을 뿐 아니라 심지어 환원적 물리주의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퍼트남이 잘 지적해주었듯이 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및 가치론적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고 기껏해야 그것은 ‘비의미적(non-sencial)’인 명제를 산출할 뿐이라고 했음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사이비 명제의 부정은 사이비 명제이며 비의미의 부정은 비의미일 뿐이다. 우리가 “가끔 실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납득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실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는 없다”는 것은 (기이한 철학적 ‘불가능’을 도입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퍼트남은 철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머물러 있거나 표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퍼트남에 의하면 간주간적으로 타당한 지식에 대한 요구나 관용에 대한 요구,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실존적 결단의 생태형식에 대한 요구 등은 모두 진정한 요구들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포스트 모던한 철학에 관하여 이렇게 비판한다.
이러한 요구들은 탐색함에 있어서 철학이 해야 할 일은 많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든지 우리의 사유는 별로 지칭할 방도가 없는 맹목적 물질계에 의해 “야기된” 단순한 “흔적과 소음”일 뿐이라고 거듭 주장하는 것은 탐색이 아니며, 널리 유행하는 허구로서의 언어적 관념론과 자기 파괴적 과학주의 사이를 오가는 헛된 진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어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좀더 탐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로티의 철학관은 분명히 상대주의의 혐의를 받을 만하다. 객관성 대신에 유대성을, 합리성 대신에 정합성을, 그리고 진리의 발견 대신에 합의의 모색을 옹호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철학관이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하나의 ‘철학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로티는 상대주의의 혐의를 벗기 위해 그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어떠한 신념도 다른 신념 못지 않게 좋다는 견해이다. 둘째, ‘진리’란 애매한 용어로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만큼이나 여러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우리들의 사회’와 같은 특정한 사회에서 탐구의 분야에 따라 달리 쓰이는 친숙한 정당화의 절차에 의거한 서술과 동떨어진 진리나 합리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다는 견해이다.
이중에서 로티는 첫째 견해에 대하여 자가당착적이라고 비판하며, 둘째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괴상한 견해이기 때문에 결국 세 번째 즉 ‘자문화주의(ethnocentrism)’를 택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각자 자기들 자신의 공동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흥미 있는 질문은 어떤 주장이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이 우리의 신념과 욕구에 충분히 정합될 수 있는지의 문제인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비록 초문화적(transcultural) 타당성의 추구를 강조하더라도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결국 ‘정합적’이라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상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것은 구태의연한 작태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퍼트남은 그러나 여전히 로티의 철학관이 문화적 상대주의를 함축한다고 지적하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공공연한 표현들이 상대주의적이며 (가령 진리를 문화적 동료들의 기준에 의거하여 타당하게 주장 가능한 것과 동일시한다든지), 전통 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성과 표상의 본성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발상에 근거해 있으며, 추구할 가치를 지닌 진리는 오직 문화적 동료를 납득시키는 것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티의 언어관이다. 언어를 일종의 ‘소음’으로 취급하여 다윈적인 해석을 시도하면 합리성, 선악, 사유 등과 같은 규범적 어휘들이 의미를 잃고 자연주의적 및 인과적 접근만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신적 자살 행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퍼트남에게 ‘합리성’이란 개념은 (구체적인 언어 게임과 관행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내재적이고 모든 활동과 관행의 전개를 비판하는데 활용하는 규제적 이념이라는 점에서 초월적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이성의 내재성을 중시하는 점에 있어서 로티와 의견을 같이하며, 그것이 곧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의 초월성을 외면하면 로티처럼 상대주의자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런데 정작 로티 자신은 퍼트남의 비판에 대해서 별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퍼트남과 상대주의 혐의」에서 퍼트남의 입장을 5가지로 요약한 다음 여기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선언하면서, “우리들은 나에게나 우리들의 견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에게 결국 같은 일에 종사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퍼트남은 우리가 전혀 다른 짓을 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불평한다. 아마 철학적 주제에 관한 견해 못지 않게, 굿맨(Russell Goodman)이 지적하듯이 그들의 “지성적 기질의 차이”에서 이러한 이견이 근거해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러한 기질이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달리 해석하게 하고 그러한 해석을 근거로 해서 자기 자신의 철학관을 정립해 나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철학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석은 현대 철학의 행방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로티와 퍼트남의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은 무엇이고 누구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들의 입장이 서로 양립될 뿐만 아니라 보완관계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문제는 반드시 여기서 다루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의 논쟁이 계속되는 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도 어렵다. 김동식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로티와 퍼트남의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각기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로티의 입장은 퍼트남의 지적처럼 문화제국주의를 함축하는 문화상대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적절히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자기 비판의 준거가 미약한 것이다. 퍼트남의 입장은 로티가 지적한 것처럼 내재주의에 철저한 자문화 중심적 실용주의와 준별될 수 있는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초월적 규범성에 대한 해명이 미흡한 것이다.
그는 이어, “한편으로는 정초주의나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정초주의나 상대주의를 효과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퍼트남과 로티를 비롯한 후기 분석철학자들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포괄적으로 접근하려면 현대 철학의 핵심적 인물인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칸트와의 관계를 동시에 설득력 있게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Ⅴ. 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과 로티의 철학관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적 평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분명히 로티적 해석의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소가 비트겐슈타인이 지닌 철학관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지만 퍼트남이 그러한 점을 잘 부각시켜 주었고 그 배경에는 그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칸트의 비판철학이 지닌 유사점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칸트의 유산이 무엇인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칸트에 의하면 자기의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을 지닌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사변이성을 통해서 경험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판은 “사변이성에 제한을 가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측면을 보인다. 한편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이 비판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제한하거나 전혀 없애 버리려고 하는 방해를 제거하는 까닭에 순수이성의 절대 필연적인 실천적(도덕적) 사용이 있음을 믿게 되자마자, 우리의 비판은 사실 적극적이고 또 매우 중요한 효용을 지니는 것이다.
칸트의 비판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의 이념에 따라 재구성하고자 했던 퍼트남은 바로 이 “적극적이고 또 매우 중요한 효용”을 지닌 실천 이성의 우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성임을 지적한다. 진리인 가치 판단이 있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증명해 도덕적 세계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전략은 이런 것이다. 가치판단을 일상적으로 하는 존재로서 ‘물론’ 나는 진리인 가치판단이 있다는, 즉 “진리인 가치판단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인지”의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세계에서 진리인 가치 판단이 있을 수 있는지 말이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유사점을 강조하여 퍼트남이 구성하는 철학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진리를 획득하려는 체계적이고 이지적인 탐구인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도 퍼트남이 해석한 칸트의 입장처럼 실천이성의 우위를 나타내는 실용주의적 특징을 지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체적이고 부정적인 요소 못지 않게 구성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이 그에게 있으며, 이것이 철학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출발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승종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일종의 ‘자연주의’로 이해하고 이것이 지닌 해체주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믿음이나 지식 체계가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논리적 형식이 해체된다면 과연 그런 믿음이나 언어 체계를 작동케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들이 더 이상 인식론적 정당화나 논리적 탐구로 답변될 수 없다는 반성을 통하여 그는 언어 행위에 있어 일종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적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독단적인 본질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이러한 의미로 “전통철학에 대해 수행된 해체주의의 작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주의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구성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함축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특히 칸트의 선험철학과 비교하고 그 유사점을 강조할 때 구태여 일종의 자연주의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철학의 재건을 위해서 반드시 그것을 전제할 필요가 있는지, 더구나 그것이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을 단순히 상대주의자나 해체주의자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데는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수우터가 잘 지적해 주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 철학을 제거하고 탈-철학적 (post-philosophical) 문화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철학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약에 대해 생각할 경우, 지금 앓고 있는 모든 사람을, 혹은 지금 알려진 질병을 모두 치유하게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일반화하고 단순화하려는 경향 때문에 언어가 끊임없이 새로운 철학적 문제들을 만들어 내거나 낡은 문제들을 새로운 형태로 접근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각은 칸트가 순수이성의 한계를 지적할 때도 공유했던 문제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현대 철학에 물려준 진정한 유산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항상 주체적 학문이었고 그 특징은 존재의 세계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철학이 당면한 정체성 위기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특성을 확인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된다.
Abstract
Rorty on Wittgenstein's
Conception of Philosophy
Jungsik Um
According to Richard Rorty, Wittgenstein is a great edifying, peripheral thinker; he makes fun of the classic picture of man, the picture which contains systematic philosophy, the search for universal commensuration in a final vocabulary. Rorty also seeks to "undermine", "deconstruct", and "transcend" the philosophical tradition that originated with the Greeks and was sharped by Descartes, Locke, and Kant. For him, this tradition is constitutive of our conception of philosophy itself as an area of cognitive inquiry. In its place would put hermeneutics, that is, philosophy as an activity whose aim is edification, not the discovery of truth. Thus the whole idea of it emerges out of the distrust of philosophy as an art of inquiry with its own problem and methods. There are no "philosophical problems," and there is no need for philosophical theories to solve them.
Rorty's neohistoricist emphasis on the particular, changeable, and contingent is an understandable reaction to the traditional preoccupation with the universal, timeless, necessary. But it is no less onesided for desirable for a philosopher to dispense with the ideal in the name of the among others, are also pragmatic presuppositions of communicative our shared world and the motor force behind the expansion of its horizons through learning, criticism, and self-criticism. In this respect, it may be important to understand what Wittgenstein's way of philosophizing is intended to do.
If this is the case, it may be important to pay attention to rather conservative aspects of Wittgenstein's remarks about knowing as well as his positive view of philosophy, in which there are strong suggestions of a distinctly Kantian posture with respect to justificatory regresses. In this respect, Putnam would be justified in saying that our reaction to the failure of a philosophical project should not be to abandon ways of talking and thinking which have practical and spiritual weight. In other words, we may not accept Rorty's proposal to turn philosophy into a radically noncollective activity, or "conversation", partly because it is founded on his misunderstanding of Wildenstein's conception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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