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필립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

나뭇잎숨결 2020. 3. 17. 11:39

필립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 종교철학적 인식론 -

신 상 형(안동대)


[한글 요약]

이 연구는 필립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을 밝혀보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필립스의 비트겐슈타인 연구는 종교철학의 인식론에 집중되어 있다. 즉,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시각을 통해 신앙적 언술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업으로 삼고 있다.

필립스의 전략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역할>을 정의하여, 이것을 토대로 종교적 진술들의 의미 즉, 상실한 그것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복권되는 것은 종교의 일상 언어의 사용처인 예식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예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의미가 훼손되어 있다. 이런 훼손은 일상적 용법의 배경을 도외시한 각각의 작위적 설명에 의해 야기된 것들로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역할 - 비판적 거울 - 이 제대로 수행되기만 하면 충분히 교정될 수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많은 종교적 예식들은 실증주의적, 신자 중심적, 미신적,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무의미한 활동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종교 신앙의 단면을 극대화시켜 본 편협한 해석이다. 만약 우리가 거울인 철학을 통해서 그것을 보면, 유연한 생명력을 가진 살아있는 말놀이이다. 그러나 이 견해도 곧 다른 반대에 부딪힌다. 말하자면, 종교 신앙을 그렇게 볼 때, 그것은 결국 객관적 기준을 결여한 '밀교적' 말놀이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반대에는 말놀이가 가치 기준이 애매하며, 따라서 객관성이 없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선입견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필립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절대적/상대적 가치 기준이 있는데 종교적 가치기준은 후자이며, 신앙은 신앙인을 통해 규칙성으로 드러나는 객관적 측면이 주목되어야 하며, 기준의 애매성도 종교신앙의 세속적 의미의 관련성의 일상화로 극복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로써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을 한층 더 이해가능한 철학자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하는 것 같다.

주제분야 : 종교철학
주 제 어 : 비트겐슈타인, 필립스, 종교 신앙, 말놀이



들어가는 말

비트겐슈타인은 수많은 20세기의 철학적 거장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던진 폭넓은 화두는 많은 석학들로 하여금 평생의 과업으로서 고유한 철학적 주제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여러 제자들을 통해 펼쳐진 그의 이론은 기존의 방법론을 재고시켜 각 방면의 새로운 장을 열게 했다. 종교철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취하여 읽어낸 종교적 진술은 '말놀이로서의 유의미한 담론'이었다. 일찍이 논리실증주의를 통해 무의미한 진술이라고 낙인찍힌 종교 신앙의 표현은 필립스를 통해 의미 있는 진술의 지위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 신앙의 진술에 대해서 자격시비가 끝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신앙에 대한 견해가 바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그렇게 수월하게 이해될 정도로 종교 신앙의 속성이나 특성을 진술해 놓고 있지도 않고, 또 많은 언급을 해놓고 있지도 않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신앙에 관한 해석이 여러 사람에 의해 행해지고 있지만, 유독 필립스 D. Z. Phillips는 종교철학에만 몰두하면서 많은 저작들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후자의 입장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필립스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말놀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는 언술이나 그림의 의미란 주어진 맥락에서 고유하게 결정되는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일 종교 신앙도 말놀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된다면, 종교 신앙의 그림이나 언술의 의미는 그것이 행해지는 특정 집단에서만 통하는, 그래서 보편적인 의미란 없고 단절된 자체만의 유의미성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교적 맥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말놀이로서의 종교신앙의 맥락이 펼쳐진다면, 그것은 단절된 배타적 자기 고유성만을 주장하는 게토 그룹이 종교단체이고, 그런 종교가 과연 종교인가? 본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필립스의 대답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것이다.


1. 필립스의 전략: 철학의 기능 분석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기능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는 것을 모든 이해의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표현을 즐겨 인용한다:

철학은 어떤 방법으로도 언어의 실제적 용법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그것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에 어떤 토대도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다.

여기서 필립스가 주목하는 것은 철학과 (일상)언어와의 관계이다. 철학은 어떤 면에서든 언어 용법과 맞물려 돌아간다. 철학이 언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의도가 눈앞에 보이는 사태와 다른 무엇이라면, 그 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정의하는 새로운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기도들은 종교 내에서 수많은 형이상학적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물론 각 경우에 있어서 그런 사태들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설명을 통해 토대화의 작업을 벌였다. 결국 철학은 소위 신학의 포로가 되어 언어의 실제적 용법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는 다른 한편으로 논리실증주의와 같은 반대편을 불러왔다. 논리실증주의가 주장한 인공언어의 문법은 명료성을 구실로 수리·논리적 문법의 보편화를 토대로 요구했다. 주지하듯이,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언어의 표현을 무의미한 것으로 잘라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종교 신앙의 표현은 그 형이상학적·논리적 가감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통용되는 삶의 기제라는 것이다. 만일 이 삶의 형식이 명료성의 대상이라면 그리고 철학이 이것을 이루어야 한다면, 철학의 기능은 새롭게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보여주는 것은 철학의 기능이 모든 사태를 그대로 두며, 일상언어의 문법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철학의 유일하게 적극적인 역할은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사를 그대로 두면서 그것을 그대로 기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에서 그것을 거울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자가 모든 손상을 가진 자기의 사고를 볼 수 있고, 그래서 이런 방식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거울에 비춰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 신앙의 명료성을 밝히기 위해 즉 종교 신앙이 말놀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 말이 쓰여지는 맥락이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필립스는 이 맥락을 예식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는 이 예식이 제대로 이해될 때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바로 드러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종교철학자들은 이 예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것을 주장하는 자신의 논의를 무시함으로써 많은 난점을 야기하고 있다고 필립스는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필립스가 중시하여 분석하는 예식에 관해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2. 종교 신앙의 오해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집에서 종교적 진술들이 그 맥락인 예식을 곡해함으로써 받게 되는 의미의 훼손을 복권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1) 실증주의적 오해

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필립스는 여러 맥락을 예로 들면서 제시해 보인다. 그가 드는 첫 번째 맥락은 종교적 표현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런 입장이 종교적 예식에 공정한 대우를 못하는 것은 종교적 진술에서 낱말들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게나 러셀에게서 보듯, 모든 낱말은 이름으로 작동되며, 그래서 대상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종교적 진술은 혼동되었다 라는 이해이다. 이런 점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다. 예컨대, 미켈란젤로의 '아담을 창조하는 하나님' 이나 '최후의 심판'의 그림에서 우리는 <사람>이나 <하나님>이라는 낱말 혹은 그림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담을 창조하는' 그 노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맥키 J. L. Mackie와 같은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명백히 오류라고 생각한 방식으로 그 그림을 사용했다고 필립스는 지적한다. 말하자면, 그림의 세부 사항들이 경험적 사건의 기술에 근사치이며, 최후 심판의 개념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맥키는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자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문제이다. '문자적으로' 혹은 '축자적으로'하는 말이 경험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라고 이해되는 것은 너무 편의적이다. 문제는 맥키에게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경험적인 정밀성에 너무 근접한 시도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사실 그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은유적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도 지시하고 있듯이, 그가 그림을 사용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부조리하다. 그렇다면 그림은 작위적으로 해석되어도 좋은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가장 일찍 배우는 것 ― 그림과 교리문답 등 ― 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머니의 그림 혹은 단어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림이 그리는 것은 무엇인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종교에 호의적인 사람조차도 비참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필립스는 지적한다. 즉 그 그림에는 결함이 있어서 하나님을 지시하는데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는데,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 그림이 해당하는 그런 그림의 종류를 명료화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고정되는 용법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초월적'이라는 의미가 그 용법을 초월할 수는 없다. 즉, 종교적 개념의 의미는 그 개념을 사용하는 우리의 예식을 넘어서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필립스가 제시하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필립스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으로 그 인물들의 나체를 지시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에서 벌거벗고 나왔으니 벌거벗고 돌아가리라.'라는 의미를 상기시키며, 또 소크라테스의 종교재판에서 피고와 재판관들이 벌거벗었음도 예시로서 덧붙인다. 출생시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방법으로 벌거벗으며, 사망시에 순수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영혼의 상태로 사람들은 벌거벗는다. 반면에, 이런 영혼의 실재를 가리우는 세속적 사태는 피복이다. 그러나 이 이상의 설명이 없기 때문에 필립스의 설명도 더 이상의 정치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지금까지 논의된 이런 오해는 종교 신앙의 표현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데서 빚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식의 참여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온당한 이해가 되지 않을까?

2) 예배자의 해석

종교 신앙인으로, 혹은 그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으로서 종교 예식에 참여한 자는 신앙의 표현을 유의미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개념적으로 혼동되는 경우가 있음을 필립스는 지적한다. 한 사태를 예시해 보자.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이 둘러보면서 묻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는 이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은 야훼에게서 온다."라고 한다. 이때 그는 하나의 (인과적) 설명을 갈구하고 있지 않고, 모든 설명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신자의 태도는 어떤 문제를 심각하게 간주하다가, 어느 지점을 지나서는 그것을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대신,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간주하여 주장하고 있다.

필립스에 따라 이것을 분석해 보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종교적 반성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반성에 대해 철학을 할 때, 그는 초설명 a super-explanation으로 그것을 할지 모른다.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종교 신앙에 공정을 기할 수 없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자는 숙고해야 하는 것에 어떤 것을 가감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 펼쳐진 것에 대한 통찰력을 취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는 예식을 자신의 이론으로 대치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필립스는 서더랜드 Sutherland의 오해를 통해 이런 오류를 지적하려고 한다.

자신을 개혁신학자로 자처하는 서더랜드는 자신이 종교 신앙을 기술하는 자이기보다는 그 사태의 처방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점에서 그는 필립스와 입장이 전혀 다르다. 즉, 필립스가 문제삼는 것은 그가 관심을 갖는 철학적 반성을 통해 종교적 예식이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는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명백히 이런 종류의 토의와 예식을 개혁하려는 욕구를 대비시키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철학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사유해야만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실이나 개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더랜드가 이점을 오해하고 있음을 필립스는, "서더랜드는 예식들을 개혁하기를 원할지 모르나,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문법을 비추기를 원한다."라는 표현으로 지적한다.

서덜랜드의 오해와는 다른 측면에서도 철학적 오해들이 야기됨을 필립스는 지적한다. 종교 예식의 특징이 단 한번만에 설명되는 어떤 방법을 철학자들은 원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필립스의 작업에 대응하면서 신자들이 필립스가 제시하는 신앙에 대한 설명을 배척할 경우, 그 문제에 대해 그들의 배척이 최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기독교는 인간 영혼에 나타났거나 나타날 것에 관한 교의나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실제로 나타나는 무엇에 관한 기술이다. 왜냐하면 죄의 의식은 실제 사건이며, 좌절과 신앙을 통한 구원 또한 그러하다.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무슨 해석을 거기에 붙이든 간에.' 라는 진술을 예로 들면서 필립스는 위에서 말한 철학자의 입장이라면 우리가 신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 만일 모든 해석이 수용되어야 한다면 비추어질 결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철학자도 자기의 철학적 거울에서 사고의 결점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필립스는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감춰져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당신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을 이 단어로 바꿔준다. 요점은 정확히 당신이 이 재현에서조차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명백히 보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라는 것이다."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를 이런 방식의 신념들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시금석은 예식에서 보여지는 것, 즉 신자들의 예식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그들의 철학 내지 해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종교 신앙을 가진 예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에서 갖는 그 의미를 절대화 할 때 우리는 모든 종교적 의식은 곧 동일한 것이 된다. 이때 우리는 미신과 종교 사이를 갈라 줄 어떤 기준을 철학은 알려주는가?

3) 미신과 종교의 차이

필립스는 종교적 예식 내에서도 철학적 반성이 혼동을 드러내는 예를 지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신앙의 의미의 마지막 호소로서 종교적 예식을 지적하자 이 예식을 곧바로 의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즉 그들은 모든 종교 의식이 바로 의미를 결정하는 최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식 practice이 의식 ritual 과 같은 형식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필립스는 예식을 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거나 편협한 방식의 사고이며, 차라리 비트겐슈타인은 예식이란 우리가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혼동된 의식과 예식의 가능성을 인지했을 것임을 주지시킨다. '물론 한번의 입맞춤은 하나의 의식이고 그것은 부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그것이 입맞춤만큼 순수한 범위에서만 허용 가능하다.' 즉 하나의 의식이 미신인가 여부는 그것의 예식에서 발견된다고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와 미신을 명백히 구분한다. '종교적 신앙과 미신은 판이하다. 하나는 두려움의 결과이고 일종의 거짓 과학이다. 다른 하나는 신뢰하는 것이다.' 필립스는 이것을 예를 통해 해석하는데, 예컨대 죄와 세속적 벌 사이에 이상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죄와 자만심 혹은 시기는 단지 그것이 있는 곳에서 거리를 만든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려고 기도하는 것은 결과를 피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인간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기도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미친 자연 재해를 벌로 간주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는, "내가 이런 보응을 받을 만한 짓을 했는가?"라고 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은 벌받을 짓이다."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응보로 보는 앞의 것을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뒤의 것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필립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와 미신의 구별과 고급단계 및 저급단계의 표현이라고 부르는 것의 구별과를 동일시한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종교에서 매 헌신의 단계는 더 저급한 단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적절한 표현 형식을 갖는다. 더 고급 단계에서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교리는 아직 저급한 단계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무이고 공허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잘못되게 이해할 뿐, 이 단어들은 그런 사람에게는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특정한 종교적 그림이 속하는 단계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종교와 미신의 구분은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필립스는 동일한 종교적 그림 즉 동일한 형식의 말이 어떤 실제적 맥락에서는 미신이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만일 어떤 주어진 종교 그림이 혼동된다면, 그것은 그 신자의 삶 내에서만 명백해 질 힘을 통해 미신적인지 종교적인지가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가 일반적 이론의 대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 종교 신앙이 미신적인가 여부는 관련된 개인이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필립스에 따르면, 오히려 자기는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가 미신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부를 만한 고급 단계의 진술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고급 단계의 진술이나 그림을 제외한 모든 경우는 종교적이지 않고, 따라서 모두를 미신적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필립스에 따르면,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말하자면 그 중에도 믿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경신성 혹은 맹목적 믿음의 단계라 할 수 있다.

4) 맹목적 믿음

필립스는 위에서 말한 저급한 믿음과 고급 믿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우와는 다른, 저급하나 미신으로 돌릴 수 없는 믿음이 있으며, 이것은 개인의 반응으로만 분류될 수 있는 신앙의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예를 몇 가지로 들고 있다.

우선, 기적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이 있다. 한 성도 혹은 신자가 '내 주위의 나무들이 마치 존경을 하듯 내게 절을 하더라.'라고 말했다면, 이것이 일어났다고 믿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아니라고 한다.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성도가 말하고 난 뒤 그 성도의 말과 나무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이상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지는 않으면서 나무의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대응했으리라: 내가 이런 의미에서 기적을 믿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난 한 계기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어들과 성도의 삶의 단순 보고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나무들이 절했다는 것을 믿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애매한, 그러나 감동은 받지 않은 신앙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자신에 앞서 두 아들을 떠나보낸 노파 과부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답변을 신앙적으로 준비한 경우이다. 그녀는 자기가 정원에 꽃을 꺾으러 갔다면, 자기는 잡초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었을 것이며, 이와 같이, 하나님도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으셨다는 믿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자기가 더 오래 사는 것이 욕이라고 하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다만 자기의 아이들에 대해 작별하는 예식이고, 또 그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녀의 예식은 결정적이다. 이것은 혼동스러운 것도 미신도 아니라고 필립스는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그림이 종교 신앙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앞에서도 보았듯이, 욥의 경우에도, '주님이 주셨고, 주님이 거두어 가셨으니, 주님의 이름만 찬양 받을지어다.'라는 입장도 있다. 즉, 위로가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다니엘의 신앙도 이와 같다. 환란이 닥치는 순간에도 그들은 '종교적 낭만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신앙이 있다.

이 모든 예들을 취급하는 밑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질문이 깔려 있다고 필립스는 보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신앙들을 비교하여야 하는가?', 그것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믿음의 강도는 고통의 강도와 비교할 수 없다.' 동시에 그는 신앙의 강도는 부분적으로는 한 사람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의해, 즉 신앙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고려가 그 신앙의 특성에 대해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필립스에 따르면,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이중성이 연루된 경우에까지 확장되는데, 예컨대 '나는 그 해 아무아무 날 피를 흘리는 성상을 갖고 있다. 당신은 속이나, 하나님은 당신을 이용하신다. 어떤 의미로는 붉은 잉크이고, 어떤 의미로는 붉은 잉크가 아니다.' 말하자면 전혀 사실이 아닌 사태도 도움이 된다는 신앙은 전혀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경신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감동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신앙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필립스는 보는 것 같다. 비록 조야하지만 이것이 종교적 형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철학자들은 이해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종교는 어떤 맥락에 의한 고유한 의미를 갖는 무엇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효용성을 달아봐야 할 무엇이리라는 논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신앙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많은 논란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필립스의 주장인 종교 신앙의 말놀이에로 들어가 보자.


3. 말놀이로서의 종교적 진술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종교 신앙은 판명한 말놀이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필립스의 해석은 여러 철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왔다. 이들의 비판을 요약하면 종교적 담화란 고립적이면서 자기 충족적인 무엇이 아니며, 특정한 주장의 진리 혹은 신빙성의 검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맥락인 활동에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또 활동은 그만큼 고립된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필립스에 따르면, 이들의 비판은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점에서 느끼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필립스처럼 종교 신앙을 판명한 말놀이라고 간주할 경우, 그것은 다른 것과의 공통성은 전혀 없고 다만 자체적인 기준으로만 판단되는 불합리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 혹은 염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필립스의 대답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종교 가치의 기준

여러 곳으로부터 종교 신앙을 말놀이로 보는 자신의 견해가 우려를 일으킨다는 점을 필립스는 인정하면서도 이런 우려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종교 신앙의 논리적 문법에 관한 혼동에 도달된다는 점을 그는 주지시키고 있다. 판명한 말놀이로서 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독립적인 밀교적 놀이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하면서 어떤 철학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확립되어야 할 것은 종교 신앙의 요지이지, 이런 배경적 사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왜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라는 이유가 주어져야 하며, 이런 방식을 통해 종교 신앙은 토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의에 대해 필립스는 그들이 전혀 자신의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자세를 그 논거로 든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치의 절대적 판단과 상대적 판단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좋은', '중요한', '바른'등의 단어는 상대적 용법도 갖고 절대적 용법도 갖는다. 예를 들어, "이것은 좋은 자전거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절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방법이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내가 그것을 따른다면 내가 원하는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런 예들 중에서 판단을 뒤집을 수 있는 사례를 필립스는 제시한다. '이것은 좋은 자전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여가를 즐기지 않고 업무에 복귀하고 싶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결과를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도달하게 될 곳에 더 이상 이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체는 그런 가치 개념들이 상대적 판단의 용도로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경우는 어떤가? '나는 테니스를 잘 칠 수 있는데 당신이 내가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그런데, 당신은 아주 형편없이 치는군요.>라고 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고 내가 <나는 잘못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더 잘 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제3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 그러면 됐어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전혀 엉뚱하게 상식에 벗어난 거짓말을 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짐승처럼 행동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나서, 내가, <나는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더 낫게 행동하기를 원치 않아요.>라고 하는데 그가 <아, 그러면 됐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데, 당신은 더 낫게 행동하기를 원해야만 해.>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가치의 절대적 판단을 가지는 반면, 첫 번 째 예는 상대적 판단에 해당된다.

가치에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종교 옹호론자들은 종교 신앙이 밀교적 놀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옹호론자들이 종교의 요점은 확립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쓰는 그 '중요한'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말하자면 가치의 절대적 판단으로 쓰이는가, 아니면 상대적인 것으로 쓰이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강력한 존재이므로 믿는다고 한다. 혹은 결국 역사의 주관자이므로 그를 믿는다고 한다. 이런 모든 주장들은 그러나 가치의 상대적 판단에 기초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판단은 뒤집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마귀가 가장 강력하다든가, 역사적 방향이 다른 식으로 틀어지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초점을 잃는다.
그런데 종교 신앙이 이런 식으로 생각되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외부 요인들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왜 그가 착해야 하는가의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오도록 촉구하는데, 그가 '안하면 어떻게 되죠?'라고 묻는다면, 더 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에게 만약 믿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라고 그에게 확실히 말함으로써 그를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다. 이때 그는 정책을 갖지,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만약 종교 신앙이 상대적 가치만을 갖는다면, 어느 누구도 세계성과 다른 세계성 사이의 구분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구분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인데, 종교 신앙의 가치가 그것들을 더 광범위한 공통 기준에 적용함으로써 평가될 수 있다면 그 구분은 설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그가 모든 존재 중에 가장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를 한 가지 개념 즉 세속적 힘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정상적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실제로 종교 신앙의 맥락은 이와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 즉,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 중요한 것으로 고려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므로, 신자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세상의 눈에는 실패가 되고,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이 슬픔처럼 보이고, '승리'라고 부르는 것이 분명한 실패와 같이 보이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실 그러했다. 말하자면, 두 관점 사이의 긴장은 그런 긴장이 존재함을 부인하는 것 같아 보이는 종교 신앙에 대한 설명이 문제가 되는 신앙의 본질의 반증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필립스가 말해 주려는 것은, 철학자들이 주의하지 않으면 종교신앙을 밀교적 말놀이라고 취급하는데 대한 우려가 종교 신앙이 왜 중요한가를 보여주려는, 그 신앙에 관련된 가치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시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종교 신앙이 밀교적 말놀이가 아니라는 기준은 무엇인가?

2) 합리성 기준

종교 신앙의 판명한 말놀이라는 철학적 특성화에 관한 우려는 종교에 대해 동정적이든 냉소적이든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결론을 상대편이 수용하지 않으면 안될 합리성의 기준에 의해 도달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에 이른다. 신자와 비신자가 공통된 합리성 기준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면, 종교 신앙이 밀교적 놀이라는 데 대한 우려는 피할 수 없다. 이런 우려를 해소키 위해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신앙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간다.

종교와 관련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비신자가 신자가 믿는 것을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가 신자와 반대 혹은 대립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대립한다는 것은 그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측은 거짓이므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마치 일각수의 존재에 대해 대립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자와 불신자는 대립하는가? 다시 말해서, 일각수의 존재는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므로, 그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립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일각수가 존재론적으로 '상징적 동물'이라는 굴욕적 판단을 감수하는 <신사적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신의 존재에 대해서 신자와 불신자의 사이에 이런 신사적 게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실재는 한 종류가 아니며, 그는 일반 존재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실재는 하나님과는 다는 사물들에 적용되기도 하는 공통된 자로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필립스는 이에 대해 예를 들어 보다 상세히 설명한다.

무엇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존재하기를 중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리에 맞다. 그러나 종교 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중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그들이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중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대전제로서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나님에게, 존재하다가 사라져가는 사물에게 묻는 유형의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예컨대,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언제 그는 존재하기를 중지할 것인가?', '그는 어제는 존재했는데, 오늘은 어떤가?' 따위의 질문은 할 수가 없다. 결국 종교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교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종교에서 사용하는 방식인지, 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고 예배자들에 대해 말한다면 아주 이상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필립스는 이 이유를 분석한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 믿음의 차이를 이런 저런 이유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심각한 큰 실책이 행해진 조짐으로 본다. 일단 실책으로 차이들이 보이면 종종 종교적 담화의 '논리적 특성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우리가 익숙해 있는 비종교적 이야기 방식의 일탈 내지는 왜곡이라는 말이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실재는 보다 광범위한 지각 가능성의 기준에 좌우된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상대적 실재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평가되는 기준에 관련된 가설의 실재를 갖는 것이다. 종교 신앙이 관련된 평가 기준과 관련될 때 그것은 착오, 왜곡, 환각 내지 실책들인 것으로 보인다. 필립스는 이런 것을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면서 가진 깊은 철학적 선입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 선입견의 특징을 그는 일반화의 갈구라고 본다. 예컨대 <존재>, <믿음>의 용법은 모든 맥락에서 동일하다는 주장, 그리고 이것을 이런 낱말들의 '한' 용법이 그 단어들의 '어떤' 용법의 전형으로 부적절하게 상승시킨 것으로 인식 못한다는 주장 등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믿음>과 <존재>가 갖는 상이한 용법들을 주목하면, 일반화의 갈구를 배척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일반화의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도 믿음에 대한 증거나 근거가 없이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한다는 사고이다. 어떤 것의 정통성에 대한 믿음이란 바로 이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말이 곧 모든 종교 신앙의 증거나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다는 주장에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신앙에 대해 어떤 근거를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믿는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사람들은 논리상 일치하고 있다. 이들은 한 가설 ― 만일 그것이 가설이라면 ― 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 혹은 믿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종교 신앙은 한 가설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종교 신앙은 하나의 가설인가? 이 질문에 대해 필립스는 비트겐슈타인을 통한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별로 선명하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이 예를 드는 핵심은 미켈란젤로의 아담 창조의 그림에서 보여지듯, 그림이 실재가 아니라 그림의 방법을 통해 종교가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림에 대한 믿음은 가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신자가 어떤 중대 결정을 할 때, 실패와 좌절 혹은 성공을 획득했을 때 마음에 두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론에 이르는 추론이나 증거의 비중을 함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그림을 늘 앞에 두는 사람과 전혀 그것을 쓰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양식적 차이가 있다. 이때 우리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 양자는 서로가 대립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함으로써 필립스는 그 대답을 시도한다. 즉, 만일 한 가지 사태를 두고 두 가지로 해석하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다르게 사고한다, 다시 말해 다른 그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이들은 서로 반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따라서 가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을 믿는 것은 믿는 자가 그것을 신뢰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그것을 자기의 삶에서 규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필립스는 문법으로 설명하면서 실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즉, 수를 쓰는 사람이 칠판에다 갑자기, "나는 덧셈을 하겠다."고 하면서 <2+21=13>이라고 쓴다면, '이것은 전혀 실책이 아니야.' 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장난이 치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전혀 덧셈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책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자신이 우려하는 핵심이라고 필립스는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양자 사이를 갈라놓는 기준은 무엇인가?

3) 기준의 애매성

지금까지의 주장 ― 합리성의 기준이 있다 ― 과는 정반대로 종교 신자들은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은 말놀이가 자체 내에 지각 가능성을 갖고 있고, 한 말놀이를 다른 편에서 취한 지각 가능성의 기준을 통해서는 지각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필립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이런 견해와 그것에 대해 표층적 유사성을 갖는 다른 견해와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는 맥퍼슨 T. H. McPherson을 예로 든다. 맥퍼슨은 '종교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많은 난센스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다양한 종류의 표현 불가능한 "체험들"을 단어로 바꾸려고 하는 노력과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말하려는 시도의 자연스런 결과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필립스와 맥퍼슨의 관찰 사이의 차이는, 전자가 불가해성의 언급이 없는 반면 후자에서 있다는 것이다. 사실 종교적 의식 혹은 관행 내에는 말할 수 있고 없는 기준이 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종교 내에서 실책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으로는 비판가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군의 무의미한 규칙들이 내적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규칙들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신앙이 그 지지자들이 따를 수도 따르지 못할 수도 있는 규칙을 가진 판명한 말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규칙들이 어떤 의미든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정당화된 우려들은 종교 신앙과 놀이 사이에 유추상의 긴장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 신앙의 요점은 단순히 종교 신앙과 인간 존재의 다른 면들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의 삶에서 종교의 중요성은 단순히 종교와 다른 사회적 삶의 양식들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당연히 간주하듯, 같은 언어는 다른 말놀이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말놀이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모든 명제는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상이한 말놀이들이 하나의 큰 놀이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즉 상이한 놀이들이 하나의 놀이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한 언어 즉 동일한 언어는 말놀이의 가족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한 언어가 갖고 있는 통일의 종류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이 점에서 언어와 놀이 사이에는 유비 상의 긴장이 있게 된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집짓는 사람들을 말놀이의 유비로 사용하는데, 예배자의 경우로 이것을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그 사람들의 명령과 대응이 그 일을 하는 기술 이외의 모든 것에서 단절되어 있다면, 우리는 집짓는 벽돌을 가지는 놀이 즉 기호에 대한 대응 체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의 집짓기에 관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종교 예배를 예배의 형식들 이외의 모든 것에서 단절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배이기를 멈추고 밀교적 놀이로 된다. 그렇다면 예배 행위의 리허설과 실제 예배 행위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답은 기호에 대한 대응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기호에 대한 대응도 리허설에서는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행위가 예배자의 삶에서 갖는 의미 즉, 그것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갖는 함의와 관련된다. 종교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종교를 지시하지 않고도 전혀 지각 가능한 국면들에 대해 말할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생, 사, 기쁨, 번민, 좌절, 불운 등이 그러하다. 종교 신앙의 힘은 종교 이외의 것에 의해 좌우된다. 예컨대 '세상이 주는 것은 내가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는 예수의 주장은, 세상이 주는 세속적인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필립스는 종교 신앙이 다른 양식의 삶과는 판이하게 유리된 말놀이라는 주장이 오해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종교는 글자 그대로 하나의 놀이 즉 그 해석과 실행에 있어서 세련미를 더해 가는 말끔한 규칙 세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진짜와 가짜 예배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배 의식에서 동작과 반응이 바르면, 더 이상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물론 종종 종교 의식이 그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해야 할 환경이 있지만, 교회 문밖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종교가 세상을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 대한 종교의 반응은 외부의 적절성의 기준을 통해 평가될 수는 없다. 종교 신앙과 그런 상황 사이의 연결은 환상적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신앙인은 모든 고통이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반면, 세속인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고통은 이 기준에 의해 종교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고통은 우리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알고 믿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종교적 반응은 그들이 세속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무시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환상적이다. 신자들이 말한 것이 사실을 위반하거나 세속의 상황 파악을 왜곡시킬 경우, 말하는 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말해진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호소도 그 위반과 왜곡을 정당화 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다.

필립스는 더 나아가 종교 신앙과 세상의 연결을 강조한다. 즉 이런 신앙이 가진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앙이 일으키는 난점의 본질을 끌어내기 위해 그런 연결을 강조한다. 종교 신앙이 폐쇄적 말놀이로서 공식적으로 종교적이지 않는 모든 것에서 절연되어 있는 것이라면 종교 신앙과 관련된 특징적 난점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그는 반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일어날 난점들이 복잡한 기술을 숙련시키는 것과 연관된 난점들의 종류일 뿐이라면 그러하겠지만, 그것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믿으려는 분투는 그 자체가 종교 신앙의 중요한 일면이다. 한 신자의 신앙과 그의 욕구 사이에는 긴장이 있으므로 일어나는 난점들이 있다. 자만심, 질투, 욕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 한, 그 난점들은 이해될 수 없다. 긍정적 미덕은 비교되는 사악이 지시되지 않는 한 이해되기 어렵다.

또 다른 종류의 난점들도 있다. 이것은 믿는 가운데 있는 난점인데, 악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때때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으로서 비극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컨대 예수는 자신을 위해 사람이 자기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아이들이 자기 양친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예수가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신자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삶을 의미 없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라고 필립스는 말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는 하나님에게만 바쳐야 할 자리를 내준 것이 된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아이의 죽음을 직면하고는, 그것을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어떤 힘이나 위로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시의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자기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그는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설이 검증되거나 이론이 검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 수 없다는 것, 즉 그는 어떤 상황의 그림에 대한 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그 비극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는 한, 이런 난점에 대한 의미란 있을 수 없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종교가 밀교적 놀이라면 도대체 왜 그런 비극이 그것에 대한 함의를 가져야 하며, 신앙이나 신앙의 시도하는 난점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까지 보아 왔듯이 종교 신앙의 의미나 힘은 부분적으로는 이런 신앙과, 종교 이외의 인간 존재의 측면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존이 없다면 종교는 그것이 인간의 삶 가운데서 갖는 중요성이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런 중요한 진리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종교 신앙을 판명한 말놀이로 말하는 데 대한 철학적 반대를 설명하는 의식이다. 종교 신앙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종교 이외의 인간 삶의 국면들에 좌우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철학자들은 우리가 이런 의존을 인식했다고 그리면서 종교 신앙이 판명한 말놀이 임을 주장한다면, 스스로 대립되리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종교 신앙과 비종교적 사실 사이의 관계가 정당화된 것과 그것의 정당화 사이의 그것, 혹은 한 결론과 그 근거 사이의 관계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광범위한 혼동이라고 필립스는 보고 있다. 종교 신앙의 의미가 부분적으로 비종교적 사실에 의존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신앙이 문제가 되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추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에 관한 필립스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의 요점은 이러하다:

우선, 종교 신앙의 진정한 맥락은 종교의 예식이라고 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 종교 신앙의 이해라고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이 예식을 극단적으로 이해할 때 일어날 우려를 분석하여 비판하는 것이 전반전의 과제였다. 논의를 통해 우리는 예식은 종교 신앙이 말놀이임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서, 말놀이가 갖는 편협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른 사태도 결국은 마찬가지이지만, 종교 신앙은 그 나름의 논리적 문법을 가진 다원적이고도 다층적인 말놀이임을 논증하였다.
이 논증을 하기 위한 토대로서 또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본 틀로서, 필립스는 철학에 대한 기능의 이해를 시종일관 촉구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철학의 바른 역할 ― 거울의 역할 ― 을 이해하게 되면, 종교 신앙이 말놀이임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개념인 그것을 '삶의 형식'으로 바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입장을 드러낸다.

필립스가 보는 예식에 대한 오해는 실증주의적, 신자 중심적, 미신적, 실용주의적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예식을 편헙하고도 고정 불변한 것으로 보는 한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만일 예식을 '종교 신앙인들이 행하는 것'이라고 융통성 있게 이해하면, 그것을 아우르는 가장 적합한 개념이 곧 말놀이임을 알게 된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러나 종교 신앙이 말놀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다른 반대, 즉 객관적 기준을 결여한 편협한 밀교적 말놀이의 부당성이라는 저항에 부딛친다.

이런 곡해에 대해 필립스는 세 가지로 답한다. 첫째, 말놀이에는 여러 논리적 문법이 존재하는데, 종교 신앙의 핵심은 사실의 그것과는 다르게 파악된다고 본다. 즉 종교의 가치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일반화의 갈구에서 비롯되는 사실 혹은 그것의 존재는 절대적 기준을 요구하나 신앙은 그렇지 않으며, 합리성의 기준은 신앙적 그림을 통해 행동을 규칙화하는 신앙인의 삶에 의해 드러나는 객관성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이런 객관성도 종교 언어와 놀이 사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긴장이 생겨나는데, 그런 종교적 표현들은 세속적 개념들을 통해 대조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유의미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필립스는 보고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신앙의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