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

나뭇잎숨결 2020. 3. 17. 11:43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


1. 중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제



                                               부산외대   박병철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저작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그가 갑자기 현상학(phenome nology) 또는 현상학적 언어(phenomenological languag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현상학을 물리학(physics)과 또 현상학적 언어를 물리적 언어(physicalistic language)와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1) 그는 ‘현상학적 언어’ 또는 ‘물리적 언어’의 대비 외에 ‘제 1 체계’(the first system )와 ‘제 2 체계’(the second system), 그리고 ‘일차적 언어’(primary language)와 ‘이차적 언어’(secondary language)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바에 대해 아무런 가설 없이 순수하게 기술하는 언어인가 아니면 직접경험에 가설적인 요소가 포함된 기술인가에 따른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적 언어’ 또는 ‘일차적 언어’는 현상이 경험에 나타나는 바를 그대로 기술하는 언어로서 직접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기술 이상의 것을 하지 않는다. 반면 ‘물리적 언어’ 또는 ‘이차적 언어’는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채용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기술 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종합해 보면 철학의 문제는 그러한 직접경험을 순수하게 기술해 내는 언어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은 그 자체가 물리적이므로 현상학적 언어는 포기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직접 인용해 보자.


나는 이제 현상학적 언어, 또는 내가 ‘일차적 언어’라고 부르곤 했던 것을 나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하고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의 언어에서 본질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언어의 부류를 기술하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에서 본질적인 것을 보이게 되는 것이며 직접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언어가 표상을 해야 한다면, 그 언어에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은, 즉 우리의 언어에 어떤 부분이 헛도는 바퀴인가를 인식하는 것은, 결국 현상학적 언어의 구축과 동일한 것이 된다.2)


위 인용문의 첫째 문단에서 보듯이 비트겐슈타인은 현상학적 언어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 대신 둘째 문단에서 그는 현상학적 언어 없이도 ‘직접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이 가능함을 암시하고 있으며, 마지막 문단에서 그러한 과제는 바로 언어에서의 본질적인 것을 인식하는데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현상학적이지 않고 물리적 체계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언어 그 자체는 제 2 체계에 속한다. 내가 언어를 기술할 때 나는 본질적으로 물리학에 속하는 무엇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물리적인 언어가 현상적인 것을 기술할 수 있는가?3)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직접경험에 주어진 바를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기술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하겠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고민은 1929년 그가 직업 철학자로 복귀하면서 가지게 된 문제로서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여타 철학자들과의 관계이다. 위의 인용문들은 현상학적 언어보다 물리적 언어가 우선적 위치를 가지며, 철학적 문제들은 물리적 언어의 분석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이 무렵 비엔나 써클은 바로 물리주의(physicalism)의 문제로 내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로서 비엔나 써클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비트겐슈타인의 표절 시비


1932년 카르납은 철학잡지 Erkenntnis에 「과학의 보편언어로서의 물리적 언어」4)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이른바 Aufbau5) 이래 세계구성의 토대로 삼은 현상론적 기초를 포기하고 물리적 기초로 전환한다. 이때 전환의 근거는 현상론적 언어(와 그 기반이 되는 프로토콜 문장)은 근본적으로 유아론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 논문에서 카르납은 자신이 물리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하게 된데는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영향이 크다고 밝히고 있다. 문제는 그가 이 논문의 별쇄본을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내면서 시작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카르납의 논문을 받아보고 격앙한다. 물리주의에 대한 카르납의 주장을 읽고서는 그 내용이 사실은 자신이 1929년 이후에 계속 주장해온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카르납은 물리주의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노이라트는 언급하고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는 철학자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은 즉시 슐릭과 카르납에게 편지를 보낸다. 1932년 5월 6일자 슐릭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제 곧 나 자신의 작업은 카르납이 해 놓은 것의 재탕 또는 표절로 간주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 써클은 지적 소유에 관한 한 공동체적 성격이 농후해서 내가 그 써클의 멤버라면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예를들어 카르납의 아이디어를 이용할 수 있고, 또 카르납도 내 아이디어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카르납과 그런 공동체에 속하고 싶지 않으며, 그가 속한 써클에 속하고 싶지도 않다.

만약 우리집 앞뜰에 사과나무가 있다면, 그 사과나무는 나를 기쁘게 해주고 또 (당신과 바이스만 처럼) 내 친구들이 그 나무의 사과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 . 그런데 만약 그 친구들이 그 사과나무가 나와 그들 공동의 소유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일 것이다.6)


이 편지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카르납이 물리주의라는 사과나무를 자신의 동의 없이 훔쳐갔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7) 카르납은 물론 슐릭 역시 비트겐슈타인의 분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납이 슐릭에게 보낸 편지에서(1932. 7. 17.) “비트겐슈타인은 물리주의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도 않았었다”8) 고 한 것을 볼때 카르납 자신은 1929년 이래 비트겐슈타인이 무슨 철학적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을 슐릭으로부터 전해들은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슐릭에게 편지를 보내(1932. 8. 8.)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물리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그런 끔찍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고, ?논고?와 같이 간결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9)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1929년 가을부터 반복해서 주장해 온 물리적 언어의 우위성에 관한 생각이 카르납의 물리주의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에 분노하며 지적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논고?에서부터 1930년경까지의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은 서로 유사한 철학적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이 점이 사실이라면, 비엔나 써클이 ?논고?로부터의 지대한 영향권 아래 있었음이 틀림없으므로 써클 내부에서 1930년을 전후하여 새로이 부각된 물리주의의 문제도 비트겐슈타인의 물리적 언어와 깊은 관계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


물리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노이라트는 물리주의란 현대 물리학의 정신의 틀에서 시공적 기술을 시도하려는 입장이며, 물리적 문장은 물리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시간과 공간적 질서에로의 언급을 포함하는 문장이라고 주장하였다.10) 물리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그래서 모든 문장은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유형의 문장이거나 그런 유형으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언어를 도구로 다른 모든 과학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르납의 경우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이라트의 주장은 비엔나 써클 내에서도 하나의 커다란 변화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이른바 프로토콜 문장에 대한 견해차로 써클 멤버들 사이에 내적 갈등을 야기한다.

카르납은 그가 비엔나 써클에 합류하기 이전에 이미 완성한 Aufbau에서 세계에 대한 지식구성의 가장 확실한 기초로서 자심리적 기초(autopsychological basis)를 채택한다. 즉 일인칭의 경험에 주어진 바 로부터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지식의 대상을 분석불가능한 기초경험(elementary experience)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으로서 일인칭의 감각에서 가지게 되는 기초경험으로부터 객관적인 과학적 지식을 논리적으로 구성해내려는 시도였다. 그는 이러한 자심리적 기초를 유아론적이라고 했는데, 이 경우 유아론의 주장을 따르는 것은 아니고 단지 방법론적 유아론(methodological solipsism)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비록 주어진 바로부터의 구성이기는 하지만 구성의 초기단계에서는 자아나 다른 주체를 구분해서 말할 수조차 없다. 경험은 나타나는 그대로 취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구성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자아와 타자간의 구분이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르납의 자심리적 기초는 일인칭이 경험하는 바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유아론적이지만 결코 (내용에서) 유아론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바에는 주체(subject)가 없으며, 자아중심성(egocentricity)은 주어진 바의 본래적 성질이 아니라고 한다.11) 그리고 객관적이고 공통주관적 세계의 기초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만 관계하며 구조적 성질을 다루는 한정기술구를 통해서 확보된다고 보았다. 즉 러셀이 기술의 이론을 통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카르납은 개개의 주관적 측면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구조적 성질을 다루면서 공통주관에로의 변환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개인의 경험에 주어진 내용을 다루는 자심리적 기초에서 출발하여 내용이 아닌 구조적 성질을 다루는 공통주관에로의 변환은 바로 과학적 문장의 주요특성이라는 것이다.12)

Aufbau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카르납은 노이라트의 물리주의를 지지하게 되면서 종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입장을 고수할 수 없게됨을 깨닫게 된다. 자심리적 기초 위에 선다는 것은 일종의 현상론적 기초를 인정하는 것인데, 노이라트의 물리주의는 그러한 현상론적 기초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의 1932년 논문에서 카르납은 Aufbau에서 그가 견지했던 것과는 다른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즉 자심리적 기초와 현상론적 입장을 버리고 모든 과학의 문장들은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물리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13) 하지만 카르납은 그러한 과학의 기초로서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지는 않았다. 직접경험의 영역은 존재하며 그에 대한 진술도 가능하다. 그는 그러한 진술을 일차적 언어(primary language), 또는 보다 적절한 용어로 프로토콜 언어(protocol-language)라 칭했다.14) 프로토콜 언어란 주어진 바를 다루는 언어로서 검증이 요구되지 않는 직접경험의 언어 또는 현상론적 언어(phenomenal language)다. 프로토콜 언어 자체는 독립적으로는 의미가 없고 그것이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진다. 즉 그 자체로 완전히 독립된 언어는 아니고 물리적 언어에 기생하는 하부언어인 것이다.15) 카르납이 이와 같은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현상론적 언어로서의 프로토콜 언어를 인정하려고 한 이유는 그것이 나타내는 바―직접경험―는 인식론적으로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이고 공통주관적인 과학의 문장들도 결국은 그 출발점에서는 각각의 과학자들의 경험 (및 그로부터 나온 관찰문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비엔나 써클 내의 좌파 리더였던 노이라트는 카르납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카르납이 물리적 언어를 도출해 내는 기초로 삼은 현상론적 언어를 완전히 배제시키기를 원했다. 맑스주의자였던 그는 카르납이 Aufbau에서 채용한 방법론적 유아론 자체를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잔재로 보았고, 카르납의 물리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도 그것이 현상론적 언어를 인정하는 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노이라트는 관찰문장 자체가 물리적 진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물리적 언어에 대비되는 특별한 현상론적 언어는 없다고 주장한다.16) 검증이 요구되지 않는 원초적 프로토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물리적 대상에 관한 진술이며 따라서 공통주관적이라는 것이다. Aufbau 출간 이후 지속적으로 노이라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카르납은 이처럼 그가 새로 채용한 물리주의에 있어서도 프로토콜 문장의 위치를 놓고 노이라트와 의견 차이를 보였으나, 결국 노이라트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관찰문장은 사적인 심리상태보다는 물리적 대상의 공적인 성질에 관한 것이라는 노이라트의 입장으로 전회하고 말았다.18) 그러나 비엔나 써클 내의 우파 리더였던 슐릭은 노이라트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인의 직접경험의 영역을 배제하고 물리적 대상이 가진 공적 성질만을 인정하는 프로토콜 문장에 대한 견해는 궁극적으로 이른바 규약주의와 진리정합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슐릭은 과학의 기초로서 문장과 문장간의 비교가 아닌 문장과 사실간의 비교(검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9)

이 글은 프로토콜 문장에 관한 논쟁이 그 주제는 아니므로 여기서 일단 이 문제를 접어두고자 한다.20) 지금까지 비엔나 써클이 물리주의를 채택하게 되는 과정과 프로토콜 문장에 대한  논쟁을 자세하게 다룬 이유는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가 1929년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의 물리적 언어 (또는 물리주의)에 대한 견해와 관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과연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4.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의 만남

물리주의라는 끔찍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물리주의를 말해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이 주장은 정당한 것일까?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 써클의 일부 멤버들과 정기적으로 가진 모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1920년대 초 결성된 비엔나 써클은 결성 초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한(Hahn)은 라이데마이슈터(Kurt Reidemeister)의 요청에 의해서 그들의 모임에서 ?논고?에 대한 강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21) 카르납의 증언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프레게를 떠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며, 비엔나 써클의 모임에서도 ?논고?가 한줄씩 소리내어 읽혀졌다고 한다.22) 그러나 비트겐슈타인과 가장 깊은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철학적으로도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받은 비엔나 써클의 멤버는 슐릭이었다. 슐릭은 ?논고?에 감명을 받아 1925년에 오스트리아의 외딴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있던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하려고 했으며, 결국 1927년부터 비엔나에서 비트겐슈타인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처음에는 비트겐슈타인과 단독으로 만났던 슐릭은 곧 바이스만, 카르납, 파이글 등을 모임에 참여시키지만, 1929년부터 카르납, 파이글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견에 따라 결국 슐릭과 바이스만만이 모임을 계속했다. 슐릭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비엔나 써클의 모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모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슐릭, 바이스만과의 모임을 통해서 자신이 새로이 발전시킨 생각들을 설명하고 그 내용을 바이스만을 통해서 비엔나 써클에 전달하도록 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과의 철학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비엔나 써클은 결성 초기부터 표절시비가 일 때까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비엔나 써클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가이다. 이 문제는 써클의 주요 멤버들이 서로 상이한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받아들였다는데서 흥미로운데, 노이라트와 카르납 그리고 슐릭 각각의 입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지적한대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감명을 받아 그의 철학을 수용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슐릭이었다. 슐릭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깊이 자극을 받아 1936년 피살될 때까지 비트겐슈타인과의 친분을 잃지 않은 유일한 비엔나 써클의 멤버였다. 그는 1918년에 이미 ?지식의 일반이론?23) 출간해 독자적인 철학을 세웠는데, 비트겐슈타인에게 너무나 깊은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의 철학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혹자는 슐릭과 비트겐슈타인의 만남은 슐릭의 독자적인 사상가로서의 마감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24)

그러나 슐릭과는 달리,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과의 접촉 이후 그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는 ?논고?의 일부 석연치 않게 느껴졌던 부분을 비트겐슈타인과 직접 만나고 난 후에 자신의 입장과 다른 것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석연치 않게 느꼈던 부분은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로서 신비주의를 의심하고 있었던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직접 만난 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강렬하고 꿰뚫는 힘을 가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은 종교와 형이상학의 많은 문장들은 엄밀히 말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 . .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정서적으로 그에게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 . . 이전에 내가 비엔나 써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을 때 나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우리의 태도와 유사한 것이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책에서 신비적인 것에 대한 언급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는데 . . . 그를 직접 만나고 나서야 이 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좀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25)


즉 비엔나 써클과 비트겐슈타인은 동시에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주장했지만 그들 각각의 문제의식이나 접근방법은 무척 상이했다는 것이다. 카르납은 그 점을 확인하자마자 노이라트와 더불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비엔나 써클의 좌파 리더였던 노이라트는 써클 결성 초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인물이었으며,26)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카르납의 입장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엔나 써클 멤버들간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남는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물리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반복해서 지적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카르납이 자신의 물리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카르납은 1929년 초부터는 비트겐슈타인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와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의 물리주의는 노이라트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나름대로 카르납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1932년까지는 바이스만이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 내용을 비엔나 써클에 전달하는 공식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스만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관했기 때문에27)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를 비교적 자세히 비엔나 써클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물리주의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5. 비트겐슈타인과 물리주의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언명?에서 현상학적 언어는 불필요하다고 했다. 이 점은 그가 비엔나 써클의 멤버들과 대화한 내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흥미롭게도 “유아론”이라는 제목을 단 1929년 12월 20일의 대화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주로 사용하는 일상언어(everyday language)가 있고, 우리가 진짜로 아는 바, 즉 현상을 표현하는 일차적 언어(primary language)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또한 제 1 체계(a first system)와 제 2 체계(a second system)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이제 나는 왜 더 이상 내가 그 개념에 집착하지 않는가를 설명하고 싶다.

나는 본질적으로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진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우리의 일상언어이다.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거나 새로운 상징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없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장애물을 제거한다면 우리의 일상언어는 이미 언어(the language)인 것이다.28)


위의 문맥상 비트겐슈타인은 예전에는 두 언어 모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물리적 언어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은 그가 물리주의자였다는 해석을 낳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이러한 해석은 비트겐슈타인 및 비엔나 써클 연구자들에게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는데,29)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힌티카(Jaakko Hintikka),30) 할러(Rudolf Haller),31) 우벨(Thomas Uebel)32)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제 이들 각각의 견해를 차례로 검토하면서 과연 비트겐슈타인을 물리주의자로 볼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힌티카는 비트겐슈타인의 현상학적 언어는 직접경험의 언어로서 ?논고?에 나타난 언어가 바로 그러한 언어였다고 한다. 1994년까지만 해도 미출판 원고였던 1929년의 노트북을 검토한 힌티카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갈등 끝에 1929년 10월 직접경험의 언어를 포기하고 물리적 언어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카르납이 문제의 1932년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물리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를 도용하여 과학적으로 치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3)

우리는 실제로 카르납이 말하는 물리주의가 1929년의 비트겐슈타인의 언급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현상학적 언어를 일차적 언어라 하고 있고, 물리적 언어를 이차적 언어라고 불렀는데, 카르납도 거의 유사하거나 동일한 용어로 이들 언어를 지칭하고 있다. 둘 다 물리적 언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더러, 비트겐슈타인의 현상학적 언어는 직접경험의 언어로서 카르납의 현상론적 언어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카르납도 그의 현상론적 언어를 일차적 언어라고 불렀다.

이처럼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듯 하다. 할러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물리주의를 주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물리주의는 내용상 카르납이나 노이라트의 그것과 유사할 뿐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할러는 카르납과 노이라트의 물리주의를 구분하면서 먼저 카르납의 물리주의가 말하는 바는 모든 명제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가능한 사실은 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 언어를 통일과학의 확립을 위한 기본적인 틀로 삼는 출발점이 된다.) 반면 노이라트의 물리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단 한 종류의 대상―원리적으로 관찰가능한 물리적 대상―만이 존재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할러에 의하면 1929년을 전후한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 이와 유사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4)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지속적으로 반과학주의적이었고 따라서 모든 언어를 물리적 언어로 번역하여 통일과학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으므로 카르납의 물리주의와 다르고,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물리적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노이라트의 그것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할러는 비트겐슈타인이 결코 물리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카르납이 말하는 물리주의를 처음 주장한 것은 노이라트였다고 한다.35) 다만 비트겐슈타인이 견지하고 있는 카르납이나 노이라트와 유사한 언급이 시사하는 바는 언어에 대한 물리주의적 해석을 통하여 후기의 사적언어 논의로 발전하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이다.36)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직접경험의 현상론적 세계이고, 언어가 말하는 세계는 물리적 대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할러는 언어가 말하는 세계가 물리적 대상의 세계뿐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은 당연히 현상론적 영역인 사적 감각(private sensations)의 세계를 물리적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우벨은 이 문제에 관련된 철학자들 “물리주의”라는 이름을 통해서 각기 상이한 논의와 양립불가능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37) 물리주의에 대한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관련가능성을 인정하는 힌티카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8) 그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직접경험의 언어인 현상학적 언어를 부정한 반면, 카르납은 인식론적 목적에서 현상론적인 프로토콜 언어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벨은 할러와 마찬가지로 카르납의 물리주의를 노이라트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벨은 할러와 달리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그리고 노이라트 모두 조금씩 다른 색깔의 물리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이러한 차이점은 세 개의 상이한 사적언어 논의(private language arguments)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6. 물리주의와 사적언어 논의


먼저 우벨이 주장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그리고 노이라트의 사적언어 논의가 각각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이미 할러가 지적한 바대로 1929년 가을 언어의 물리적 해석을 통해서 ?철학적 탐구?39)서 사적언어 논의로 귀결하게 되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언어는 물리적 대상을 나타내는 물리적 언어이기 때문에, 직접경험을 나타내는 언어를 따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중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인데, 이 경우 그가 내적 감각과 같은 현상론적 세계를 동시에 부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런 세계를 물리적 언어만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결정판이 ?탐구?에서 사적언어 논의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우벨은 비트겐슈타인의 첫번째 사적언어 논의라 할 수 있는 1929년 당시의 비트겐슈타인의 촛점은 검증(verification)에 쏠려있다고 한다. 즉 인식론적 주체가 그의 직접경험에 나타나는 바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사용하는 언어는 공적인 물리적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40)

우벨은 카르납의 경우도 비트겐슈타인과 유사하게 검증 개념에 입각한 사적언어 논의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카르납은 1932년의 물리주의 논문에서 귀류법을 통해서 물리주의의 불가피성을 논증하려 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주체가 가지는 프로토콜 언어의 모든 명제가 그 주체에게만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원리적으로 다른 어떤 주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그 단어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어떠한 공통주관적인 프로토콜 언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는 이해될 수 있으며 검증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언어의 대상은 주관적인 것일 수 없다. 즉 카르납의 경우 프로토콜 언어는 공통주관적인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것이 사적 또는 주관적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라면 물리적 언어로 번역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과학의 기초로서 개인의 직접경험을 인정하려는 입장에서 원초적 프로토콜 언어를 고집했지만, 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검증 개념에 촛점을 맞추었다.41) 즉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검증 개념에 입각해서 그의 사적언어 논의를 펴고 있지만, 그의 입장이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다른 점은 인식론적 출발점으로서의 현상론적인 프로토콜 언어를 인정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벨은 노이라트에게서 또 다른 사적언어 논의가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노이라트는 카르납을 비판하면서 현상론적 언어와 물리적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단 하나의 물리적인 언어만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언어는 물리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카르납의 경우처럼 유아론적 기초에 있는 프로토콜 언어를 인정할 때 현재 순간의 유아론(solipsism of the present moment)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벨은 노이라트의 사적언어 논의는 현상론적 프로토콜 언어가 원리상 물리적 언어로 번역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번역규칙은 결코 주어질 수 없다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카르납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언어 사용의 사회적 성격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42)

결국 우벨은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그리고 노이라트가 물리주의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은 각각이 내세우고 있는 상이한 사적언어 논의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주의에 대한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관련가능성을 부정하는 우벨이나 할러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물론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해 줄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각자가 내세우고 있는 물리주의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떠나 누가 먼저 물리주의를 이야기했고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해석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들에 관한 것이다. 먼저 우벨은 카르납의 물리주의는 현상론적 프로토콜 언어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물리주의와 다르다고 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좀더 주의 깊은 검토를 요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주의해야 할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현상학적 언어의 불필요성 (또는 불가능성)을 주장할 때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적 언어를 포기했는가의 문제이다. 우벨의 주장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 가을 두 언어 모델에서 현상학적 언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물리적 언어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 경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우는 단 하나의 언어는 물리적 언어뿐이라는 노이라트의 입장과 유사해 보이지만, 우벨은 노이라트가 주장하는 세계는 물리적 대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인 반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세계는 직접경험의 세계이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카르납의 입장과도 다르고 노이라트의 입장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필자는 우벨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에 현상학적 언어의 불필요성을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상학적 언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현상학적 언어를 부정하고 물리적 언어관으로 전환했다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포기하고 다른 언어를 채택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점은 그의 시간관의 전환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시간 개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이른바 기억시간(memory-time)과 정보시간(information-time)을 구분하였는데, 1929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에는 기억시간이 주가 되는 시간관을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정보시간에 주가 되는 시간관을 가졌었다. 이때 기억시간은 시간 개념을 기억에 의존해서 구성하는 것이고, 정보시간은 시간 개념을 시계나 달력 등 공적 (물리적) 수단에 의존해서 구성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가지 시간 개념 모두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다만 어떤 이유에 의해서 1929년 이전에는 기억시간에 우위를 두었고, 1929년 이후에는 정보시간에 우위를 두었던 것이다.43)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의 전환도 그의 시간관의 전환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의 언어관의 전환과 시간관의 전환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44)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이제 그가 물리적 언어가 우위를 점하는 언어관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점은 언어가 지칭하는 세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우벨의 둘째 오류와 연결되어 있다.

우벨은 비트겐슈타인은 현상학적 언어를 부정한 후에도 우리의 세계는 직접경험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종류의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사용―그의 용어법을 빌린다면, 어떤 문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대상을 물리적 대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직접경험의 대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그에게는 직접경험의 대상이나 물리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구분은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물리적 대상으로 동일시될 수도 있고, 직접경험의 대상으로 동일시될 수도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언어의 문법으로 동일시된 대상은 직접경험의 대상이요, 물리적 언어의 문법으로 동일시된 대상은 물리적 대상인 것이다.45)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문법을 각각 ‘기하학적 눈’(the geometrical eye)과 ‘물리적 눈’(the physical eye)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그가 물리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은 기하학적 눈보다는 물리적 눈이 지배하는 언어관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벨이나 할러의 진단과는 달리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점은 무척 포괄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르납과 노이라트의 물리주의가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점이 물리주의의 아이디어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그렇다고 해서 실로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르납과 노이라트의 물리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는 다르며, 물리주의를 주장하게 된 배경도 다르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이라트과 비트겐슈타인의 관련성은 더 적어 보인다. 그러나 카르납의 경우는 그 연관성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7. 검증과 물리주의


먼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관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 배경을 보자. 그의 1929년 노트북은 날짜별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서 그가 실로 어떠한 문제를 놓고 어떻게 생각을 발전시켰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그의 고민이었던 현상학과 물리학, 그리고 현상학적 언어와 물리적 언어의 대비관계는 그해 초의 노트에서부터 발견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시각공간과 같은 직접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현상학과 물리학(또는 각각의 언어)는 세계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현상학적 언어와 물리적 언어 모두 그러한 직접경험의 영역을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46) 일기처럼 기록된 노트북은 그가 바로 직접경험을 기술하는 언어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의 해결점은 1929년 10월이 되어서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검증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얻은 결과이다.

즉 1929년 중반까지만 해도 비트겐슈타인의 문제는 직접경험에 주어진 바와 그것을 기술하는 언어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현상학적 언어나 물리적 언어 모두가 가능한 기술방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경험에 주어진 사실을 언어로 기술하는 문제는 과연 기술이 얼마나 정확한가의 문제로 연결되고, 이는 ?논고?에서처럼 사실과 명제의 비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논고?에서 가지고 있던 주요 입장들을 포기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비교방법을 찾으려 했고, 그 결과는 검증 개념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문제점은 검증은 시간적으로 현재에 일어나는 반면 비교대상인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경험이라는 것이다. 검증되는 명제가 나타내는 사실은 직접경험에 주어진 내용일 수가 없는데, 검증은 시간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성은 물리적인 것으로서 명제에 있어서 검증과 관계되는 단어가 지칭하는 바는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대상(temporally persisting object)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검증될 수 없는 유아론적 문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와 실재가 비교 가능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명제는 시간적으로 검증되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지칭하는 바도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는 경험자가 자신의 직접경험을 비시간적으로 기술하는 현상학적 언어가 아니라, 시간을 매개로 한 물리적 언어라는 것을 뜻한다.47)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현상학적 언어에 대해서 물리적 언어가 우위를 가지는 언어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카르납의 프로토콜 문장은 검증될 수 없는 문장이다. 프로토콜 문장이 기술하는 직접경험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아론적인 진술로서 발화자에게는 언제나 참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닌 무의미한 진술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경험자가 자신의 직접경험에 대해 직접적인 기술을 시도하는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러한 기술을 일차적 언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학적 언어는 더 이상 검증 가능한 언어가 아니므로 이제 검증 가능한 이차적 언어인 물리적 언어로 언어관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검증이 과학적 지식의 특성인 공통주관성을 보장해준다는 카르납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검증 개념을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유아론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편에서였다는 점과 시간성의 개입 자체가 공통주관성의 확보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의한다면,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검증 개념이 카르납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1929년 12월 22일 비엔나 써클과의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이다”라는 자신의 검증 개념을 설명했는데, 이 언급은 “유아론”이라는 제목아래 행해졌으며 우리의 언어는 물리적이라는 주장 바로 다음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48) 이 점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유아론, 물리적 언어에로의 전환, 그리고 검증 개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유아론은 비트겐슈타인이 빠져 나와야 할 문제였고, 물리적 언어에로의 전환은 그의 해결점이었으며, 검증 개념은 그러한 해결점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을 완전히 파악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점을 직접 듣고 기록한 슐릭과 바이스만은 그 내용을 비엔나 써클에 전달했고,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의 검증 개념이 비엔나 써클의 검증원리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9) 그러나 더욱 주목할 점은 카르납도 후에 사실적 내용을 포함한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검증 개념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50) 앞서 지적한 것처럼 카르납이 물리주의로 전환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현상론적 프로토콜 문장이 공통주관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만약에 카르납이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 검증 개념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빌어왔다면(그가 비트겐슈타인이 검증 개념을 내세우게 된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었건 아니건 간에) 결과적으로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유사한 입장에 서게 된다.

사실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써클의 물리주의는 그 배경에서 상이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통일과학의 기초를 세우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물리주의를 채택한 비엔나 써클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부터 시작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언어관의 전환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카르납은 인식론적으로 우선적인 프로토콜 문장을 물리적 언어의 하부언어로서 인정하고 그것이 물리적 언어로 번역 가능한 이상 그 프로토콜 문장의 영역을 인정하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표면적으로 현상학적 언어를 완전히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살펴 본 것처럼 인식론적으로 일차적인 현상학적 언어의 영역을 제거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상학적 기술이 유아론적으로 쓰일 때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 써클의 문제점이나 이상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슐릭과 바이스만을 통해 후자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카르납도 직접경험을 보고하는 기술인 프로토콜 문장이 유아론적이라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와 같이 카르납도 우리의 언어가 말하는 세계는 물리적 대상의 세계라는 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카르납이 원리적으로는 현상론적 기초나 물리적 기초 모두가 가능하다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이 어떠한 문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대상이 물리적 대상으로 동일시될 수도 있고 감각소여로 동일시될 수도 있다고 한 점은 바로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이 실제로 얼마나 가깝게 접근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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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The source > : http://sang1475.com.ne.kr/data/data3.html<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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