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페스트/ 알베르 카뮈

나뭇잎숨결 2020. 3. 18. 12:41


한 도시를 이해하려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_12쪽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이고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재앙이 지나가버릴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지는 쪽은 사람들, 누구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다. _51쪽

의사는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문 채 그 대답은 이미 했다면서, 만약 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었다면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기고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세상 누구도, 심지어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 신부까지도 그런 전능한 신을 믿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점에서 리외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창조된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_152쪽

자기들과 비교해 다른 지역 주민들을 모든 면에서 자유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반면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힘든 순간에도 자기들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었다. 당시에 희망을 하나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_201쪽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외의 것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 등은 의지의 소산이에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의지 말이에요. _295쪽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 _295쪽

이 기록은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받아들일 수도 없기에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그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대항해 완수해야만 했고 아마도 여전히 완수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증언에 불과했다. _360쪽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인『페스트』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번으로 출간됐다. 페스트가 휩쓴 도시 오랑을 통해 전쟁의 기억과 유배의 감정을 담아낸 이 작품은 1947년 출간 당시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었고, 그해‘비평가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지금껏 프랑스어 판만 5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세기의 스테디셀러다.『페스트』가 담고 있는 극한 상황과 폭력, 그리고 진실이라는 문제제기는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한 울림으로 첨예하게 다가가리라 기대된다.

 

『페스트』는 1957년, 43세라는 역대 최연소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의 다섯번째 작품이다. 1947년『페스트』가 출간되었을 당시 서른네 살이던 카뮈는『이방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 대중들에게는 유명 작가가 아니었다. 페스트 발생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오랑에서의 10개월간의 사투를 담은『페스트』로 비로소 카뮈는 첫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지만 실제 사건을 관찰하고 취재해서 기록한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취하며, 집필 배경 역시 카뮈의 개인적 경험과 당시의 시대상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카뮈가 이 소설을 구상해 출간하기까지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죽음을 가져다주는 질병과도 같은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 후 카뮈는 1941년부터 오랑에서 1년 반 넘게 지내며‘페스트’에 관한 소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한다. 실제로 오랑 인근의 도시에 티푸스가 번져 지인이 감염된 사건과, 지병인 폐렴의 재발로 고통을 겪은 개인적 경험 등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페스트』에서 리외가 요양을 떠나는 아내와 이별하듯, 카뮈도 프랑스 산악지방으로 요양을 가 있다가 연합군의 알제리 해안 상륙으로 예기치 못하게 아내와 한동안 이별해 있기도 했다. 또한 다니던 신문사가 경영난으로 감원 조치를 시행하면서 실직을 당하기도 했던 카뮈는 전쟁, 궁핍, 질병 등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비극적인 요소들에 관해 깊이 성찰했으리라. 이 모든 사회적·개인적 사건의 경험이『페스트』의 다양한 인물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기여했다. 최초의 가제‘죄수들’이‘이별한 사람들’로, 최종적으로‘페스트’가 제목이 되었다. 이 제목들은 곧 작품의 주요한 소재이자 모티프다. 


소설의 무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알제리의 작은 해안도시이다. 어느 날 갑자기 쥐들의 시체가 발견되고, 어제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었던 이웃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나가지만 시민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페스트가 의심되지만 그들에게 페스트는 구체적인 현실감이 없는‘추상’일 뿐이다. 환자와 사망자 수가 급격히 늘어가면서, 시민들은 병을 이겨내기 위해 미신에 의지하기도 하고, 박하사탕이나 고무를 입힌 레인코트가 병을 이겨내는 데 효험이 있다는 뜬소문에 휘둘리기도 한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극한의 절망과 공포에 대응해 다양한 인간 군상이 그려진다.“사랑과 행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신문기자 랑베르)도 있고, 재앙 앞에서“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성찰하는 사람(파늘루 신부)도 있고, 속수무책인 현실 속에서“행위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사람(타루)도 있다. 그리고 묵묵히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이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의사 리외가 있다. 이들은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공동체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투신하는 가운데 조금씩 변화해간다.

누가 페스트의 종식을 말하는가? 진정한 인간으로 실존하기 위한 현재형 사투!

공동체를 위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게 된다. 그러한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그랑이다. 카뮈는 그랑에게 가장 공을 들여 영웅적인 면모를 부여했다. 시청의 말단 공무원인 그는 겉으로 봐서는 영웅적인 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리외처럼 의사도 아니고, 타루처럼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는 인물도 아니고, 파늘루 신부처럼 영적 구원을 구하는 인물도 아니지만 작은 일에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보건대 일을 묵묵히 해낸다. 리외는 조용한 미덕을 실천하는 그랑을 이 연대기의 주인공으로 꼽는다. 이는 곧 카뮈가 추구하는 인간상, 작가가 그린‘진정한 인간’이란“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색형 인간”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나’에서‘우리’로 변화하는 인간이다.

그렇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예나 모델이 제시되기를 정 원한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그런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이 영웅,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며,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진리에 진리 본연의 것을, 2 더하기 2는 4라는 답을, 그리고 영웅주의에는 행복에 대한 고귀한 요구의 앞자리가 아니라 바로 그 뒷자리라는 본래의 지위를, 즉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연대기에도 연대기의 특성, 즉 두드러지게 악하지도 않고 또 흥행물처럼 저속하게 자극하지 않는, 선량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보고서라는 성격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_164∼165쪽

『페스트』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발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서 전쟁에 대한 함의를 읽고, 등장인물들이 페스트에 맞서 투쟁하는 모습을 폭력적인 나치에 맞서 싸우던 레지스탕스에 대한 비유로 보기도 했다.‘페스트’는 질병이든 전쟁이든 가난이든, 우리의 운명에 불쑥 끼어들어 우리를 유폐시키고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어처구니없고 부조리한 모든 사건을 상징할 것이다. 

계엄령으로 도시가 폐쇄되어 고립된 상황에서“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균을 퍼뜨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시민은 서로에게 페스트이며 가해자”가 된다. 카뮈는‘페스트’라는 한계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인 폭력과 진실의 문제를 폭로한다. 

카뮈의 또다른 대표작『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사회의 부조리와 맞닥뜨리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러 개인으로서 자신을 반항인이라 인식한다면,『페스트』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에게 다가온 죽음이라는 공동의 운명에 함께 맞선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격에 순응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실천한다. 카뮈 자신이 말했듯이,“『이방인』이 부조리 또는 부정의 주제를 대표하는 소설이라면,『페스트』는 반항 또는 긍정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카뮈는 절망적이고 혐오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긍정을 이야기한다. 비극적 운명 속에 갇혀 살지만 희망과 긍정을 향해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인간들 간의 연대의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이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언제든 무너질 듯 취약한 삶을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평범한 인간들의 드라마”이자,“죽음에 승리한 삶의 기록이자 선의의 인물들이 써내려가는 객관적인 기록”인『페스트』는 큰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