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theosis of St Ignatius-BACICCIO.
c.1685.Oil on canvas, 48 x 63,5 cm.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구조와 그 역동성
차례
들어가는 말
[영신수련]의 목적
[영신수련]의 역동적 구조
[영신수련]의 내적 역동성
나가는 말
I. 들어가는 말
1548년에 출판된 이후 4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여러 다양한 신학적 내지는 철학적 배경에서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영신수련]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교회 안에 있어 온 여러 종류의 피정이나 영적수련들의 원형으로서 [영신수련]이 교회의 내적 삶에 기여해온 바는 이것이 지니는 고유한 역동성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역동성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피정자의 개별적인 투신을 심화시키도록 이끄는 외적인 구조와 그 내적인 움직임 모두를 의미한다.
한가지 미리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영신수련]의 내적 구조에 대한 설명, 혹은 [영신수련]이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 또는 [영신수련]을 구성하는 다양한 수련들에 대한 개별적 해설 등이 [영신수련]을 이해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영신수련]의 본래 의미는 피정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들이 그로 하여금 더 깊이 주님을 친밀히 알고, 깊이 사랑하며, 가까이 따르도록 이끌어 주는 여정에 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얻는 영적 체험은 늘 철저한 자기 정화를 시발점으로 하여 궁극에는 하느님을 향한 관대한 응답에 이르는 단계를 거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내적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피정자가 나아갈 방향의 객관적 설정, 그것을 향한 구체적인 여정의 단계, 그리고 거기에서 얻게되는 영적인 열매 등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영신수련]의 목적에 대하여 다루고, 그것이 진행되는 맥락을 살펴보면서, 그 저변에 깔려있는 인간관에 대하여 특히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해 보겠다.
II. [영신수련]의 목적
[영신수련]의 근본 목적이 무엇이냐는 어떤 입장에서 그것을 해설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물론 이런 다양한 견해들은 서로 중복이 되거나 때로는 서로 모순이 되는 듯하기도 하지만, 좀더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면 서로 보완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영신수련]의 목적이나 과정을 주님을 향한 더 큰 봉사를 위한 정화의 과정,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자신의 삶을 재 정돈하는 과정, 하느님의 은혜로운 활동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기 위한 해방의 여정,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취하기 위한 식별의 여정, 혹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일치의 여정으로 묘사하는 여러 입장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차이는 [영신수련]의 목적을'완덕'에 초점을 두느냐 아니면 '선택'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완덕'에 초점을 두며 [영신수련]을 해설하는 견해들 사이에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해설하는 견해들 사이에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들을 쉽게 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완덕에 초점을 두는 해설은 봉사의 신비주의 관점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강조하고, 선택에 초점을 두는 해설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언어로 표현하고 강조하기에 생활 신분의 선택이나 개선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물론 역사적인 관점에서 [영신수련]이 생활 신분을 선택하고 개혁하는데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어왔고 이러한 관점이 [영신수련]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결과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영신수련]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소명의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향해 더 단호히 투신토록 이끈다. 즉,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복음의 가치에 합당한 전폭적인 쇄신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의 신분이 정해져 있으면 정해진 바에서, 혹인 이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더 나은 쇄신을 위해 이끌어 간다. 이것이 [영신수련]의 본래 의미이다.
성 이냐시오는 먼저 [영신수련]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무질서한 애착을 깨끗이 제거해서 영혼을 준비하고 배치하는 모든 방법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 후,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배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모든 방법들을 영신수련이라고 한다."[1]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영신수련]의 목적을 "사람이 아무런 사욕 편정에도 좌우됨이 없이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생활을 정리하기 위함이다."[21]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표현된 [영신수련]의 정의와 목적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의 중요한 관점을 요약할 수 있다. [영신수련]의 목적은 하느님의 진리의 빛에 입각해서 자신의 삶을 쇄신하는 구원의 체험과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자신을 몰입시키면서 구원의 역사 안에 놓여진 자신의 올바른 위치로 복귀하는 투신의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신수련]의 주된 관심은 영혼의 내적 쇄신과 이 쇄신이 불러오는 하느님을 향한 더 나은 투신에 있다.
이러한 점은 이냐시오 자신의 경우를 살펴보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체험 특히 [영신수련]의 원형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만레사 시기, 그리고 빠리에서의 연학시절, 초기 예수회 동료들의 몽마르트르 서원 등과 같은 일련의 체험의 연속성을 살펴보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소명을 찾고 선택하는 것 훨씬 이전에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내적 회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회심은 이냐시오를 '영혼을 돕는 일'에 투신하도록 이끌었다. [영신수련]에 의해 영감을 얻고 양성되었으며 함께 뭉친 초기 동료들의 최대 관심사 역시 그리스도께 대한 전폭적인 투신을 불러오는 내적 쇄신에 있었다. 이러한 [영신수련]의 근본 전망에 입각해서 이냐시오의 첫 동료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면서 그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쇄신하도록 이끌어 더 크고 바람직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했다.
내적 쇄신, 즉 무질서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정돈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분을 향해 전적으로 투신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과정이 아니다.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여 자신의 삶에 이제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죄스러운 애착을 벗어버리고 복음의 원리와 가치들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무질서한 애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여러 성격적인 약점, 신학적 편견, 자기 중심적으로 치우친 편파적 이상 등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진정한 통교가 가능하도록 통로를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지니고, 그 개방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응답을 통해서 하느님이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신수련]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전적인 영적 자유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이 식별하는 삶, 즉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모든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
이러한 영적 여정이 [영신수련]에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4개의 주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일련의 프로그램이나 코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영신수련]의 본질은 문자로 기록된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끌어주는 일련의 체험들이 엮어내는 역동성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영신수련]을 연구함에 있어 그 역동성을 밝히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III. [영신수련]의 역동적 구조
하나의 단어나 구절로 간단하게 [영신수련]의 의미를 표현하기는 매우 애매하지만, '삶의 가치를 정돈하기 위한 과정'이라거나 '내적 자유의 성장을 도모하는 과정'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극명하게 그 본질을 드러내준다. '불편심'이나 '무애착' 등의 표현들 역시 [영신수련]을 체험하는 이가 결국에는 자신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신수련]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하여 여러 표현이나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극명하게 그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은 '내적 자유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는다'거나 주님께서 세상을 바라보고 결정하신 바로 그 원리에 따라 자신도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등도 바로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내적 자질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영신수련]이 어떤 정지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표를 향하여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들이다.
[영신수련]을 외부에서 바라보면 단지 외적으로 꽉짜여진 질서에 의해 기도와 성찰의 시간과 방법이 정해져 있고, 기타 제반 규정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듯한 구조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역동성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영신수련]의 구조와 흐름을 연구하기 위하여는 실제로 그것을 해본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신수련]이라는 체험의 현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성령의 움직이심을 수용하면서 자유롭게 응답을 내리도록 이끄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영적 열매를 충실히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들의 내부적 통일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선 그것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영신수련]을 구성하는 일련의 수련들을 설명해 보겠다.
1) '그리스도의 영혼은' 기도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이라는 기도문이 [영신수련]의 첫머리에 나오지만, 사실 이 기도문은 이냐시오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 기도문을 무척 좋아하여 즐겨 사용했고, 또 '세 가지 담화'[63, 147]와 '기도의 세 가지 방식'[253, 258] 등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기에 이 기도문이 이냐시오와 연관되어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영신수련]의 스페인어 원본이나 첫 라틴어 본에서는 이 기도문이 들어 있지 않으나, 1583년 이후에는 이 기도문이 [영신수련]의 한 부분으로서 간주되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 기도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으로 이끌어 가기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신수련]의 역동성과 잘 연결되고 있다. 이 기도문은 사도 바울로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하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 속에 융화되도록 이끌어 간다. 바로 이러한 정신 때문에 이 기도는 [영신수련]에서 통합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2) 일러두기
[영신수련]의 첫머리에는 '일러두기'라 불리는 20개 항의 지침들이 나온다. 이 지침들은 [영신수련] 본문 속에 필요에 따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부칙'들이나 '주의'들과 더불어 [영신수련]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그 기본 맥락을 지도자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영신수련]이 더 효과적으로 지도되고 힘을 발휘하도록 여러 형태의 안내서들이나 [지침서]들이 꾸준히 출판되어 왔지만, 이냐시오 자신의 실천적인 제안들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들이 바로 이 '일러두기'에 담겨있는 것이다. [영신수련]이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기간에 적용되어 진행될 때에도 이 '일러두기'에서 제시되는 견해들은 그 핵심적 역동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에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이 '일러두기'가 책머리에 나온다는 사실은 그 적용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냐시오는 그가 교회와 예수회에 전수해 준 [영신수련]은 단지 개략적인 틀로서 지도자에 의해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원 진리의 객관적 지평과 피정자의 주관적 지평이 보다 잘 만날 수 있도록 피정의 내용이나 진행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신수련]의 소위 '순수하고 고유한' 내용은 따로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직 피정자 개개인의 고유한 회심 체험의 역동성과 그 적용만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만이 피정의 진정한 동반자이시기에, 인간인 지도자는 분명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피정자가 자신의 기도 체험을 되돌아보며 나누는 것을 세심하게 듣고, 성령의 이끄심을 감지하며 회심 체험의 역동성이 깊어 질 수 있도록 이런 저런 조언을 주는 것을 통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냐시오식 피정의 지도자는 그 본문에 매이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피정자에게 요구되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이 똑같이 지도자에게도 요구된다.
이냐시오가 제시한 이러한 자유로움은 특히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313-336]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 더 많이 요구된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제안들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거나 그 반대로 이끌어 가는 다양한 영적 힘들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규범들을 통해 제공하는 도구들을 더 효과적으로 개별화하여 사용함에 의하여 피정의 역동성은 더 부드럽게 흘러나오게 된다.
3) 제목과 전제조건들
'일러두기'에 이어 [영신수련]의 목적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냐시오는 각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를 원했다. 우리 삶에서 서로 상충되고 반대되는 가치들을 정돈하기를 원하고 진실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감정이나 편견에 좌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우리가 삶의 근본적인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과 선택들을 직면할 때 분명히 요구된다.
바로 이 자유로움의 맥락에서 이냐시오는 피정자와 지도자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는 피정의 진행과 움직임에 관심을 둔다. 지도자와 피정자의 관계에 있어서 상호 신뢰와 개방성이 필수적이기에, 이냐시오는 비록 이상하게 여겨지는 말과 행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들이 그릇되게 들린다 할지라도 타인이 한 말을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잘못을 고쳐주거나 의도를 명료화하려는 시도는 분명 그리스도교적인 재치와 이해, 그리고 사랑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원칙은 모든 그리스도교 직무에 대한 이냐시오적 기초가 된다.
4) '원리와 기초'
대부분의 경우 [영신수련] 피정은 '원리와 기초'[23]라 불리는 대목을 숙고하면서 시작된다. 이 대목은 이냐시오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서, 이후 [영신수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몇 안되는 짧은 문단속에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전통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요약되어 있고, 이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구원 진리의 객관적 지평이 제시된다. 즉,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 사물과의 관계가 명확히 객관적인 지평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피정의 흐름은 이러한 객관적인 계시 진리에 대한 피정자의 고유하고 진지한 개인적인 응답을 심화시키는데 있다. 이냐시오는 그 동안 [영신수련]을 지도해온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여, 이러한 확고한 기반이 없이는 영적인 성장이나 [영신수련]의 진행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피정자가 자신의 죄스러움을 돌이켜보며 얼마나 하느님을 거부해왔는지를 숙고하면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정을 지니기 위해서는 우선 이에 앞서 그분의 창조적이고 한결같은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가 필요하다.
'죄'란 바로 신앙의 개념이기에, 이 의미를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선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물들에 대한 확고한 기초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영신수련]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수치심이라던가 자기중심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성찰이 지배하는 첫주간이 되기 쉽다. 이냐시오가 피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스러움을 용기 있게 대면하면서, 창조의 첫 순간에서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한결같이 신실한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정을 지니는 것이다.
이 '원리와 기초'가 피정에서 이냐시오 당시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몇몇 자료에 의하면, 피정을 시작하는 첫날에 피정자에게 진지하게 숙고해 볼 자료로서 제시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이 [영신수련] 피정을 받을 만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과정을 거쳐 피정을 시작할 준비를 해 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피정자가 무미건조한 듯한 그리스도교 근본 교리의 간략한 요약문에 대하여 익숙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 그 저변에 깔려있는 신비가 드러나면서 [영신수련]의 역동적 움직임이 시작된다. '원리와 기초'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면서 피정자의 의식 안에 이러한 초대에 올바로 응답하고 있지 못했다라는 인식이 형성되면서 첫째 주간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진다. 한편, [영신수련]이 지니고 있는 사도적 본질과 더 잘 만나게 해주기 위해 '원리와 기초'에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차원을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5) 첫째 주간
[영신수련]이 지도자를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첫째 주간에 두 종류의 자료가 배열된 순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양심성찰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24-43]을 설명한 후 곧 이어 다섯 개의 묵상[45-71]을 제시한다.
이냐시오는 본문의 앞부분에 양심성찰의 방법을 배치함으로써 피정이 진행되기 위하여는 성찰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 실천적 방법이 얼마나 핵심적인가를 강조했다. 또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개인의 죄스러움의 역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다루는 첫째 주간의 맥락에서 양심성찰이 지니는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지난날의 죄스러운 역사를 돌이켜보는데 있어서나 혹은 화해의 성사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양심성찰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냐시오식 피정은 그 과정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성찰적이다. 즉, 바로 앞선 시간에 행한 묵상에 대한 성찰이나 혹은 오늘 하루 혹은 반나절 동안에 피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마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된 요소들에 대한 성찰, 그리고 과거의 삶 속에 있는 여러 습관적 행동의 유형들에 대한 성찰 등등이 요구되기에 자기 성찰적이지 못한 이에게는 분명 이러한 형태의 피정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우선 피정자가 자신의 체험을 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보통 첫째 주간에 들어가면서 양심성찰의 작업이 피정자들에게 먼저 소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리와 기초'에서 첫째 주간의 묵상으로 옮겨가는 것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성찰의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섯 개의 묵상이 지시하는 기도의 방향 사이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피정을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바로 첫째 주간의 주제를 이루는 이 두 부분 사이의 흐름을 통합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피정자의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일러두기[4]에서 분명히 밝히는 것처럼 [영신수련]에서 사용되는 '주간'이라는 표현을 7일이라는 시간의 단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전체 4주간의 [영신수련]을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물론 피정자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한다. 다만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영신수련]에 소요되는 전체 시간이 대략 30일 정도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때, 첫째 주간을 위해 제시된 전체 내용이 단지 한 시간 짜리 다섯 번의 묵상이라는 점은 다소 이상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섯 번의 묵상 자료가 지닌 풍성함은 그것들이 소화되고 동화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요구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되풀이 묵상은 피정자가 묵상을 통해 "깨닫고 맛본"[2] 내용을 더욱 더 심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즉 묵상의 내용 그 자체 뿐 아니라 다섯 번의 기도를 통해 그 내용이 점점 더 내면화되면서 단순해진다. 이러한 점은 '구할 은혜' 뿐 아니라 담화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냐시오의 기본 전략은 먼저 보편적인 지평에서 죄의 신비에 대하여 성서를 통해 묵상하고, 이어서 어느 한 개인의 죄에 대해 묵상한 후, 자신의 죄를 묵상하도록 이끈다. 자칫 죄 묵상은 폐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냐시오는 먼저 객관적인 지평에서 죄의 보편성과 그 우주적인 상황을 깊게 자각하게 하면서 이 바탕 위에서 주관적인 지평으로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한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성, 감성, 의지의 차원에서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첫째 묵상[45-54]은 하느님을 거부한 천사들의 이야기, 태초의 인류 첫 조상들과 연관된 죄의 역사, 그리고 영원히 하느님을 거부할 수도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의지에 대한 신앙의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이냐시오는 생명 전부를 파멸로 이끌고, 온갖 증오와 분열을 조장하며,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죄의 엄청난 결과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피정자는 '담화' 즉 피정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더불어 죄의 결과에 대하여 친밀하게 나누는 대화[53]를 통하여 비로소 주관적 지평으로 들어간다. 이냐시오는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여러 양상의 죄의 연결망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이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어떻게 내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영원한 생명에서 현세의 죽음을 당하시게 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눈을 돌려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를 생각"[53]하도록 이끌어 준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느님과 피정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 가지 요점을 지닌 첫째 묵상은 생각과 추리를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이렇게 추리를 활용하는 기도방법을 묵상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추리 묵상 기도방법이 이냐시오가 피정자를 첫째 주간으로 이끌며 제시하는 기도방법이다.
둘째 묵상[55-61]에서 피정자는 그 자신의 죄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이 묵상은 첫째 묵상의 객관적인 지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교적 주관적인 입장에 더 다가가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자신의 잘못과 그 결과에서 생기는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끌어 주며, 직접 하느님께서 대자연이나 동료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끊임없는 지지와 사랑을 잊지 않도록 배려한다. 담화는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하여 마음 아파할 때조차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도록 함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갇히지 않도록 이끌어준다.
셋째 묵상[62-63]은 앞선 두 묵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앞서 행한 두 묵상의 주제를 상호 관련시켜 담화에 강조점을 둔다. 이 묵상에서 이냐시오는 세 가지 담화, 즉 성모 마리아, 예수, 성부와 담화를 통하여 이 주제들이 더욱 심화되도록 한다.
이냐시오는 피정자의 영혼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아주 고유한 방법을 사용한다. 즉 하루에 다섯 차례 하게 되는 묵상은 분명 그 갈망을 심화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 담화'이다. 신앙심이 깊은 이에게나 통할 것 같은 아주 순진한 방법으로 이냐시오는 필요한 은혜를 구체적으로 나열하도록 격려한다. 성모님께 다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성자께 간구해 달라고 청하고, 성모님과 더불어 예수님께 나아가 성부 앞에서 은혜를 간구해 달라 청하며, 마지막으로 성부께 더불어 나아가 되풀이 은혜를 청하도록 한다. 바로 이 셋째 묵상에서 이냐시오는 피정자로 하여금 죄의 신비에 대한 깊은 내적 인식, 우리를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바로 우리 안에 깃들이어 있는 죄스런 경향을 대항해 싸울 수 있는 힘을 청하라고 초대한다.
넷째 묵상[64]은 같은 주제와 같은 담화를 통해서 더욱 더 심화시키는 되풀이 묵상이다. 다섯째 묵상[65-71] 역시 하루 동안의 묵상을 더욱 더 단순하게 심화시키는 작업이다. 이냐시오는 이 다섯째 묵상에서 '오관의 적용'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묵상의 내용을 심화시키도록 이끌어 준다.
역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피정의 전형적인 하루의 구조는 우선 숙고를 위한 묵상자료들이 제시되어 추리를 사용하는 묵상이 진행되고, 다음의 기도에서는 추리의 활동이 줄어들어 담화가 점점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좀더 감성의 영역에 다가가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하루의 마지막 시기에 진행되는 다섯 번째 묵상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좀더 많이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도의 양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기도는 보다 수동적인 기도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오관은 우리 주변에 있는 감각적 자료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첫째 주간에서 피정자는 세상 안에 흩어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죄의 가증스러운 힘을 느끼며 자신의 죄스러운 역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죄의 세력 앞에 흠뻑 물들어 있는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지옥'이라는 상징을 통해 경험하지만[71],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하염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이냐시오식 [영신수련] 피정에는 분명한 역동적 움직임이 있다. 첫째 주간의 경우를 본다면, 우선 사고와 추리를 활용하여 진행되는 기도의 양상에서 추리가 줄어들고 마음에서의 응답이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 주간 전체의 진행에서도 엿보인다. 예를 들어, 첫째 주간에 피정자가 첫 3-4일 동안 여기에서 제시된 5개의 묵상을 되풀이한다면 하루하루 지나면서 묵상의 주제는 더욱더 심화되고 단순해지며, 피정자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성적 영역에서의 애정 어린 응답이 증가할 것이다.
첫째 주간에 깃들이어 있는 이러한 역동성이 이끌어 가는 방향을 바라보면, 그리고 물론 묵상을 위한 길잡이와 구할 은혜를 동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주간을 언제 마무리지어야 할지가 분명해 진다.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하느님에게 사랑 받고 구원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얻게되는 평화가 바로 첫째 주간을 마무리짓는 표시이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자비는 분명 실재 체험이며 우리 자신의 죄스러움만큼이나 사실적이다. 이냐시오가 첫째 주간에서 강조하는 관대한 마음의 태도는 둘째 주간으로 옮아가도록 피정자가 준비되어 있는지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6) 둘째 주간
둘째 주간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관상함으로써 그분이 취하신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분을 본받도록 이끌어 준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를 부르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도록 하시는지를 식별하도록 이끌어준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올바른 방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는 최상의 방법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제시해주신 것처럼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영신수련]의 고유묵상들, 즉 '왕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타잎의 사람들', '겸손의 세 단계', '선택을 위한 길잡이' 들이 둘째 주간의 중심 축을 이루며 그리스도 생애 신비 사적을 관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1. 왕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
'왕이신 그리스도의 부르심'[91-98]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 묵상은 통상적으로 '그리스도 왕국'이라 불린다. 이 묵상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거룩한 왕국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이냐시오가 구성한 첫째 주간의 묵상들을 보면 적어도 그 외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묵상이 제시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죄인으로서의 깊은 자각이 하느님의 자비하심 앞에서 어떤 응답을 요청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 즉 첫째 주간의 연속성에서 이 '그리스도 왕국' 묵상을 바라본다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피정자의 삶에서 구체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 묵상을 통해 피정자는 자신이 지닌 여러 종류의 열망에 초점을 부여하여 하나로 통합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을 통해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신수련]에서 언급하듯이 "올바른 판단력과 이성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사업을 위해서 자기 전체를 바치겠다는"[96]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묵상을 통해 피정자는 앞선 단계에서 강조되었던 불편심에서 구체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열심함과 쾌활한 마음으로 가난하고 수고하시는 그리스도께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따르고 선택하려는 열망이 둘째 주간의 기본 역동성이 된다. 즉, '그리스도 왕국' 묵상은 추상적으로 표현되어있는 '원리와 기초'를 다른 형태로 재구성하여 묵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일부 해석가들은 "둘째 주간의 원리와 기초" 라 부르기도 한다.
이냐시오는 이 묵상을 두 번 되풀이하라고 지시한다[99]. 첫째 주간에서 둘째 주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으로서의 '그리스도 왕국' 묵상은 피정자 안에 하느님의 자비하신 은총에 대한 관대한 응답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업에 투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높이게 된다. 동시에 이 묵상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자를 당신의 사도로 초대하시는 바로 그런 부활하신 주님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스도 왕국' 묵상을 마치면서 바치게 되는 봉헌의 기도[98]에서 이냐시오는 사도적 삶의 근본 기초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 길은 곧 그리스도의 길, 즉 가난과 모욕과 고통의 길이다. 따라서 가난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도 하다.
2. 관상
둘째 주간의 첫 3일은 강생의 신비, 탄생, 그리고 나자렛 예수의 숨겨진 삶을 관상하며 보낸다. 물론 하루하루의 외적 구조는 첫째 주간에 묘사된 것과 같다. 즉, 첫째와 둘째 묵상에 각각 묵상 요점이 제시되고, 셋째와 넷째는 되풀이 묵상이고, 다섯째는 오관적용이다. 피정자가 구해야 할 은총은 "나를 위하여 사람이 되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더욱 가까이 따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깊은 인식을 구하는"[104] 것이다. 그러므로 담화에서도 역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고 본받기 위하여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해야 한다.
이 둘째 주간과 잇따르는 주간에서 제시된 기도 방법이 이냐시오의 아주 고유한 면을 반영하고 있기에 '이냐시오식 관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비'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사적, 즉 복음서의 내용을 기도의 주제로 삼아 관상하는 기도방법을 일컬음이다. 이냐시오는 첫째 묵상[101-109]과 둘째 묵상[110-117]에서 관상에 접근하는 두 가지 기도방법을 기술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 지상을 내려다보시며 구원 의지를 굳히시는 맥락이 바로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장면을 관상하는 기본 배경이 된다. 하느님과 더불어 성모님의 응답을 통해 구체적으로 영원하신 성자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을 바라본다. 이냐시오에게 관상이란 복음서의 장면에 온전하게 몰입해서 사랑스런 현존을 통해서만 관통할 수 있을 그런 분위기를 맛보고 거기에서 표현된 말이나 행동 혹은 움직임들을 깊게 느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냐시오가 피정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바로 "본 것에서"[106], "들은 것에서"[107], "행해진 일들"[108]에서 영신적 신익을 얻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라는 객관적 지평이 성모님의 구체적인 응답이란 주관적 지평에서 만나고 있으며, 성모님의 관대한 응답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평이 이제는 피정자의 주관적 지평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응답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묵상에서 이제 예수님의 탄생 신비를 관상하게 된다. 이냐시오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분의 고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에서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단순한 성서의 사건을 관상하도록 이끈다.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관상하고 있는 그 사적에 때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또 때로는 그리스도의 삶 전체의 시각에서 단순하고도 온전하게 몰입하기를 초대한다.
바로 이러한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예수님께서 지내신 태도와 가치관을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 사적을 더 깊이 관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의 생활 태도와 가치관이 주님의 생활 태도와 가까워진다.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해 피정자가 얻는 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밀감'이다. 여기서 친밀감이란 내적 인식 혹은 사물의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피정자는 관상을 통해 예수님의 생활 태도와 가치를 맛보고 느끼게 되고, 그리하여 그분의 가치와 사랑과 자유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관상을 통해서 둘째 주간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는 선택과 식별의 맥락을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확고해진다.
3. 두개의 깃발
둘째 주간의 넷째 날에 이냐시오는 '두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이라는 아주 잘 짜여진 묵상을 통해 다시 한번 예수의 정체성과 가치 체계, 그리고 그분의 사명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이라는 묵상과 더불어 이 넷째 날의 핵심 기도 주제로 제시되기에, 전통적으로 이 넷째 날을 '이냐시오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개의 깃발'묵상이 세 번이나 네 번 되풀이되고, 하루의 마지막 기도에서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을 묵상하는 것이다.
이 넷째 날은 둘째 주간에서 아주 특별한 날이다. 이날의 기도는 오히려 머리를 많이 사용하는 묵상 형태의 기도이고, 복음서의 이야기가 전면적으로 묵상 주제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구할 은총 역시 "악마의 계교를 미리 알고, 거기서 나를 경계하기 위하여 은혜를 구할 것이요, 또 지존하신 참된 수령께서 가르쳐 주신 참다운 생활의 인식과, 그를 본받기 위한 은총"[139]이다. 즉, 이러한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가치와 우리를 부르시는 그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자 함이다. 물론 여기에 담겨있는 가치관은 이미 '그리스도의 왕국'이나 둘째 관상에서 드러난 것이다.
인간은 참된 안정과 만족을 누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고 조종하며, 타인의 삶을 조정함으로써 자기 충족감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피조물 안에서는 결코 자기 충족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안정과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성부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 묵상을 통해 인간 안에 깃들이어 있는 긴장, 즉 본성과 자신의 본연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을 이끌어내서 표면화시키고 있다. 즉 무엇인가 획득하기를 추구하는 본성과 움켜쥔 손을 놓으라는 본연의 움직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냐시오는 이 긴장을 두 개의 대립된 이미지를 통해서 두 개의 가치체계가 어떻게 정반대의 모습으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깃발' 묵상은 피정자로 하여금 예수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식별의 규범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두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의 제 1부 '사탄의 작전'[140-142]은 사탄의 역동성 곧 세상 안에 있는 암흑 세력의 활발한 움직임에 관한 비유이다. 사탄의 역동성은 소유하려는 욕구,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무질서하게 만듦으로서 자유를 파괴하고 항상 하느님을 선택하려는 지배적인 열망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제 2부 '그리스도의 작전'[143-147]의 역동성은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온전한 영적 가난을 유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면 항상 그 부르심에 마음으로 또 실제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가난과 모욕과 겸손을 위해 기도하고 열망할 수 있는 이유가 이 묵상을 통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를 살아나갈 수 있는 데 필요한 이해, 즉 내적 인식은 성모님, 예수, 그리고 성부께 바치는 세 가지 담화를 통해서 심화된다. 이 세 가지 담화에서 우리는 이 중요한 은총의 선물을 달라고 청한다.
4.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작전을 이해하는 것, 즉 가난과 모욕과 겸손을 통해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섬기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지녀야만 한다. '두 개의 깃발' 묵상에서 얻은 인식과 이를 위한 의지의 차원에서의 준비 사이의 움직임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이냐시오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149-156]이라는 묵상을 제시한다.
이 묵상은 세 가지 다른 양상으로 결정에 이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세 유형 그 어느 사람도 사실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첫 두 모습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그 본연의 부르심이 의도하는 바를 피하여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태도이다. 셋째 사람만이 개방성과 준비성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선택하고 결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특정한 애착과 선호도를 인정하면서도 단지 그 애착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러한 자유로움을 유지하여 우리 주 하느님을 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을 내린다.
이 묵상에서 구해야 할 은총, 즉 "하느님의 영광과 나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151]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덜 좋은가를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냐시오는 이 묵상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호도가 있을 때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돌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이 묵상에서 제시되고 있는 객관적인 예를 통해서 이냐시오는 우리가 자유를 위한 각자의 열망을 구체적으로 키워가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세 가지 담화를 통해 우리의 열망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주간 넷째 날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체계를 이해함으로써 어떠한 양상으로 다가오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의 의지를 준비해주는 묵상인 것이다.
5. 겸손의 세 단계
피정의 이 시점에서 이냐시오는 '원리와 기초'와 같은 숙고의 대상으로서 아주 잘 짜여진 묵상 주제를 제시한다. 이 묵상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다양한 강도의 개방성을 숙고하도록 한다. 이러한 개방성이 형성하는 주님과의 관계의 양상을 '겸손의 세 가지 단계'[165-167]라는 모습으로 넓게 그려내고 있다. 첫째 단계의 겸손은 중심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둠으로써 하느님을 자신의 삶에서 배제하는 일이 없는 그런 정도의 영적 자유를 지닌 사람이다. 둘째 단계의 겸손은 전반적인 삶의 방식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자 했던 예수의 삶의 방향과 함께 하려는 사람이다. 이 단계의 겸손은 '원리와 기초'에 나오는 완전한 초연함에 상응한다. 이냐시오는 여기에서 또 다른 차원의 친밀함을 제시하고 있다. 겸손의 셋째 단계에 이른 사람은 예수와 너무나 친밀하게 일치하길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외적인 모습, 특히 예수가 체험했던 가난, 예수가 받았던 버림받음, 궁극적으로는 예수가 졌던 십자가를 자신의 삶에서 닮아갈 수 있게 될 때 진정한 즐거움 과 기쁨이 누리게 되는 사람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인격적인 사랑이 담겨있는 단계다. 앞의 세 단계 모두 행동보다는 태도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만 이런 세 번째 단계의 겸손에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근본 태도에 관심을 둔다. 피정자가 각 시기에서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 친밀함에 대한 이런 입장들을 숙고하고, 만일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주는 것이라면 피정자가 세 번째 종류의 친밀함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예수님께 기도하도록 제안한다. 그리고 세 가지 담화에서 이러한 점이 보다 깊게 성찰되어야 한다.
이냐시오가 이들 세 가지 묵상, 즉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타잎의 사람들', '겸손의 세 단계' 묵상들을 통해서 피정자가 예수님을 따르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와 결정에 초점을 두고 그분의 생애 신비 사적을 관상하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의 가치 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그분을 따르려는 준비와 자발성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와 보다 친밀해질 수 있는 은총을 깊게 바라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가능하다면 예수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고 싶어한다.
6. 그리스도의 공생애
이렇게 고양된 내적 태도를 지니고 피정자는 예수심의 생애 신비 사적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부터 관상하기 시작하여, 그 이후 사막에서의 유혹, 사도들의 부르심이 이어진다. 물론 피정자간에 차이가 있고 각자의 열망이나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자 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둘째 주간의 내용을 구성하게 될 묵상을 위한 성서 자료의 수에는 큰 차이가 있겠다.
여기에서 이냐시오가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살펴보자. 이냐시오가 선택한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신비 사적은 피정의 방향성 안에서 그 순서를 따라야 한다. 관상하게 될 성서를 선택하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연대기적인 순서를 따르거나 혹은 피정 지도자 혹은 피정자가 선호하는 성서 대목을 계획 없이 무작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된 신비 사적은 항상 이 특정한 피정자가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순서가 잡혀져야 한다. 이냐시오는 피정자의 가능적 삶의 방향에 무게를 두고 하루에 한 가지의 성서 구절만을 관상하도록 제안하고 있고, 같은 요점을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반복하도록 했다. 이 관상의 중심적인 목적은 피정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보다 친밀해지는 것이고 그분의 인격적인 모습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벗이 되고 그를 따르는 보다 깊은 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7. 선택
둘째 주간 넷째 날에 다루는 묵상주제를 통해 예측해보면 피정은 분명 피정자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지도한 역사적인 증거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둘째 주간을 구성하고 있는 자료들의 배열은 바로 생활 신분의 선택이나 생활 개선을 위한 선택이 이러한 피정의 핵심적 주제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 혹은 '겸손의 세 단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냐시오는 생활 신분 결정이나 생활 개선을 위한 결정의 밑 근본을 이루고 있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영신수련]의 선택은 내적 존재의 방향, 즉 전체적인 삶의 양식과 태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방향성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모든 것들이 조직된다. 이것은 삶에 더욱더 단일성과 단순성을 부여한다. 이런 방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분명 긴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 이냐시오는 이런 준비를 위해서 선택의 세 시기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냐시오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데 필요한 내적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영신수련]에서 삶의 방식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결정 방식은 인간적인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한 기도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따르려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은 관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생기 있게 진행된다.
7) 셋째 주간
'겸손의 세 단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태도가 형성되거나 생활 신분 선택에서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결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면 이제 셋째 주간으로 옮겨갈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이 과정은 보통 첫째 주간에서 둘째 주간으로 옮겨질 때보다 한결 부드럽게 이루어진다. 셋째 주간의 목적은 "아픔으로 가득차신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고, 근심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근심하고,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받으신 그렇게 많은 고난에 대해서 눈물과 슬픔을 간구하는 것"[203]이다.
이를 위해 제시되는 기도 방법은 물론 관상이다. 이냐시오는 앞선 주간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되었던 세 개의 묵상 요점에 세 가지를 더하여 여섯 개의 요점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첨가된 세 개의 요점[195-197]은 숙고를 통해 예수의 삶의 신비 사적에 접근하는데 보다 내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첨가된 요점들은 이냐시오가 담화의 의미와 방법을 되돌아보면서 보충한 것으로 이제는 대화의 친밀함보다는 열정의 친밀함을 보다 강조한다.
이냐시오가 이 시기에 제시하고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203]이라는 생각이다. 이냐시오는 예수의 구원 행위가 우주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각 피정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고유하고 인격적인 사랑의 희생이었다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수는 한 사람의 죄를 위해서까지 자신의 삶을 바치신 것이다.
셋째 주간의 말미에 이냐시오는 '음식에 대한 규정'[210-217]을 첨부했다. 이런 규정들이 피정의 역동성 안에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냐시오가 이런 규칙들을 제시해주는 것은 다른 영적인 규칙들을 적용할 때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 규정들은 예수가 살았던 삶의 방식을 매우 일상적인 삶 즉 식사와 같은 삶 안에서 계속해서 훈련시켜가야 한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냐시오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실제적인 본보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보다 가깝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따라야 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피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음식에 관한 규정은 넷째 주간 동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하나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8) 넷째 주간
넷째 주간은 예수의 부활 신비를 묵상한다. 이 주간에 구하는 은총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광과 기쁨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221]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에 동참하고자 하는 은총을 구한다.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수고하도록 한 열정은 예수의 승리 안에서도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바뀐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새로운 삶의 완성에로 나아감에 있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이 기쁨은 큰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놀라움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이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급격하게 변해왔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부활의 진정한 효과는 무엇보다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과, 그분 행위의 효력, 그리고 교회 안에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넷째 주간은 사도를 양성하는,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의 특질을 형성하는 주간으로 볼 수도 있다. 넷째 주간의 관상들은 우리 안에 사도적인 정신을 양성해 주시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해준다. 사도적 정신이란 용기, 희망, 교회에 대한 사랑, 단순성, 인간애, 사랑이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조명 아래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230-237)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 관상의 목적은 사랑이라는 실재 안으로 뛰어들어, 우리 삶의 구체적인 이곳과 저곳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위로부터 내려와야 하는 사랑"[184]이다. 우리는 다만 이 사랑이 마음속 깊이 꿰뚫고 들어오도록 기도할 뿐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선물과 은총을 내림으로써 계속 위로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선물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는 불변의 선물이며, 그가 우리의 일과 어려움 안에서 계속해서 열정을 불어 넣어주는 선물이며, 이 새로운 창조 안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예수의 삶이 넘쳐흐르도록 하는 은총이다. 이 관상은 사도적 정신의 핵심이다. 늘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 우리가 늘 그 속에 잠겨있는 사랑, 모든 것이 시작되고 되돌아가는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만물과 나 자신은 성령의 현존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활동 속에서 관상하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IV. [영신수련]의 내적 역동성
이냐시오는 20여년이 넘게 [영신수련]을 집필하고 수정해가면서 전통적으로 '회심 체험'이라 불려온 체험의 내적 역동성을 담기 위해 애썼다. 그는 분명 이러한 역동성이 자신에게 뿐 아니라 그가 영적으로 도움을 주며 이끌어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 투신하도록 이끌어주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역동성에는 이 체험을 하는 피정자, 이를 이끌어 주는 지도자, 그리고 이 두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인격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신수련]은 이냐시오에 의해 특수하게 구성된 구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이끌면서, 그 중간에 간간이 아주 고유한 이냐시오적 특별 묵상들이 삽입되어 있다. 이렇게 세심하게 짜여진 구조에 담겨진 내용들은 피정자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와 부르심에 민감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지도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피정을 지도하는 이가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들의 의미와 내부적 통일성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 [영신수련]이 진행되는 현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성령의 움직이심을 수용하면서 자유롭게 응답을 내리도록 이끄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현장인 것이다.
우리는 [영신수련]의 고유한 내적 역동성을 1) 보편성과 특수성, 혹은 객관의 지평과 주관의 지평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 2) 지성과 의지 혹은 감성의 상호 관계, 3) 인간의 노력과 은총의 이끄심의 상호관계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살펴보겠다.
1) 객관의 지평과 주관의 지평
[영신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피정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의 인간적 측면과 초자연적 측면의 상호작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만나며 서로 조화를 추구해 나가는 역동적 움직임으로 설명된다.
훌륭한 [영신수련] 지도자는 인간 심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여정에 계시된 진리에 의해 피정자 안에 일어나게 되는 영적 활동을 또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피정자의 구체적인 특수성 안에서 이 구원의 메시지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면서 피정자를 이끌어 가는지 예리하게 파악하고 함께 식별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즉 [영신수련] 지도자는 계시된 진리에 대한 객관적 지평과 이에 대해 반응하는 피정자의 주관적 지평과의 상호작용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영신수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면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을 이룬다.
[영신수련]이 부여하는 체험은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구체적인 인간, 구체적인 상황에 제시되는 보편적 진리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더 넓은 구원의 관점에서 자신을 열도록 초대한다. 즉, 창조의 근본 질서를 향해 자신과 주변 상황을 쇄신하도록 초대한다. [영신수련]에 나타나는 이 두 움직임은 시간의 진행 순서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라, 서로에게 상호 호혜적인 생명력 있는 움직임이다. 보편적인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밝게 비추어 주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다루는 특수성은 객관적인 하느님의 온전한 계시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 한 마디로 보편성은 보다 깊은 보편의 지평 하에 개인적인 것을 더욱 개인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냐시오의 체험에서 엿볼 수 있듯이 구원의 객관적 진리가 체험의 주관성에 앞서 자리하지만, 이 객관적 구원진리는 구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적 지평에서 제시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영신수련]은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명료하고 단순하게 제시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구체적인 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구원의 역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기를 택하신 하느님의 방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영신수련]의 객관적 진리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성서에 담긴 구원의 역사이다. 성서의 말씀은 창조적이고 구원적인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하느님 사랑의 역사는 인간 죄스러움의 역사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배반, 그리고 극복의 역사이다. 성서 안에 기록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응답의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성서 전체의 흐름 안에 [영신수련]의 기본 역동적 움직임이 내재하며, [영신수련] 가운데 구원 진리의 객관적 지평과 주관적 응답의 상호작용으로 피정자의 영혼 안에 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움직임이란 우리 개개인의 영성생활의 흐름의 기본 유형이기도 하다.
2) 지성과 의지
인간관의 입장에서 주관성과 객관성 혹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바라보면 즉시 지성과 의지의 문제가 그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앞으로 따라오는 모든 영신수련들에서 우리는 지성으로 이치를 생각하고, 의지로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3]라는 지침을 제시한다. 또한 매 묵상마다 첫 머리에 이냐시오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묵상을 함에 있어 이해력, 기억력, 의욕력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냐시오의 지침은 고전적 그리스도교적인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지성은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구하고, 이 빛에 의해 정화되고 이끌리는 체험이다. 의지는 이런 하느님의 계획과 초대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내어놓는 것을 말한다. [영신수련]은 전체적으로 신적 은혜에 의해 조명된 지성과 하느님을 향해 이끌리는 의지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다.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조명의 은총이다. 특히 만레사 동굴에서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신비적 조명은 늘 새로운 은혜의 기반이 되었다. 이냐시오는 [자서전]에서 "그가 본 것들은 그를 강화시켰고, 그 후에도 언제나 그의 신앙을 굳게 하는 힘이 되었다."[29]고 적고 있다. 이런 이냐시오의 조명 체험은 [영신수련] 안에 체계화된 방법론으로 들어와 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다양한 영적 체험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복음서의 빛 아래서 여러 단계로 엮었고 이를 체험적인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이냐시오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내적인 체험을 깊이 성찰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즉 각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현실적인 적응력과 영적인 생동감을 갖는 것은 우리가 자신 안에 일어나는 내면 세계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하면서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면 세계에 대한 이런 지성적인 이해와 확신이 영적 성숙의 기반이 된다. 이런 지성적인 확신은 일반적으로 지적 호기심과 진리를 향한 단호한 투신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표현된다. 영혼의 내부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영혼의 여러 현상에 대해 이해하도록 촉구하고 지성적으로 이해할 때 얻는 확신은 이 이해를 실천에 옮김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영혼의 여러 현상들을 이해한다는 말을 또 다른 측면에서 [영신수련]에서는 "사물의 내적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2]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내적 인식을 구하라"[63]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서 내적 인식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인격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지 막연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사람을 친밀히 알 때의 인식을 의미한다. 즉 누구를 알듯이 하느님을 알게 되면, 그 내적 인식은 충만한 의미에서 바로 신앙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내적 인식은 한편으로 주관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극히 객관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며, 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모든 다른 것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선 객관적이다.
이런 내적인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서 여러 움직임들 가운데 성령의 움직임을 따져 보는 것이 영신식별이다. 이냐시오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서서히 자기를 동요시키고 있는 두 정신의 차이를 깨닫기에 이르렀다."[8]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영신식별은 다양하게 움직이는 영들에 관해서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영신식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 자체보다는 이런 내적인 충동들이 갖는 방향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단계를 살펴보면 1) 내부의 느낌과 떠오르는 생각을 관찰하는 단계, 2) 이런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내적 행동 양식을 배워가는 단계, 3) 자신의 내부 안의 변화를 발견하는 단계, 4) 내부 세계의 움직임들을 현실로서 인식하게 되는 단계, 5) 이런 움직임들의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원천에 관심을 갖는 단계, 6) 다양한 원천들의 대립된 양상을 파악하는 것, 7) 이런 원천들이 우리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단계, 8) 이런 인식을 가지고 일상적인 경험을 성찰해 보는 단계, 9) 의심의 여지가 없는 위안과 지적인 깨달음을 경험하는 단계, 10) 위안을 통해서 실천적인 결정에 있어 하느님의 확신을 갖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조명을 바탕으로 꾸준히 충실하게 하느님의 충동에 자신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따르게 된다. 이런 영적인 조명에 바탕을 두지 않는 의지는 인간적인 차원의 노력에만 머무를 수 있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의지는 하느님과의 친밀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안배하심에 내어 맡기는 노력에 의해서 길들여진 습성을 의미한다. 이냐시오는 인간의 궁극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재능의 활용을 크게 강조한다. 즉 인간의 모든 자유로운 응답의 궁극적 도움이며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해야 함을 강조한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우주를 탐구하도록 내어 주셨고 그 모든 재능을 활용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들어내도록 온전한 자유와 재능을 주셨다. [영신수련]은 이런 재능과 기능을 하느님의 안배하심 앞에 관대하게 펼치면서 그분을 만나는 데 그 성패가 달려있다.
[영신수련] 전체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관심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내적 인식을 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적 여정의 절정에서 모든 것이 이러한 친밀함의 빛 아래 보이게 되고 모든 인간적인 체험이 하느님의 체험이 된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하느님의 빛 아래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자유를 지니게 되고, 바로 이 빛 아래에서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깨닫게 된다.
3) 인간의 노력과 은총
[영신수련]의 주된 활동은 기도와 관상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있다. 기도의 체험이란 바로 영적인 체험이며 [영신수련]의 다양한 국면에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기도를 통해서 인간적인 노력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은총의 배려하심에 내 맡기게 된다. 그리고 구원의 객관적 진리를 향해 자신을 몰두시킬 때 구원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깊은 체험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지도자는 지성의 영역을 향해서 하느님의 활동과 구원 계획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지도하는 데 있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주고 있다. "관상하는 이는 사적의 요점을 취해서 그것을 홀로 성찰해 보고 생각해 보면서 사적을 좀 더 명백히 또 깊이 알아듣게 하는 그 무엇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이성적 노력으로나 혹은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비추어서, 이것을 주는 이가 직접 사적의 내용을 길게 설명하여 주었을 때 보다 더 깊은 맛과 더 큰 영신적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2] 여기서 [영신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요소가 주관적인 요소를 조정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제시된 구원의 진리와 구해야 할 은혜를 통해서 영적인 감각이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이냐시오는 "창조주가 피조물과 더불어, 또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주와 더불어 직접 행동하도록 맡게 둘 것이다."[15]라고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영신수련]의 특징적 요소 중의 하나는 영적 열망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온전히 동참하고 싶은 열망은 영성생활의 중요한 몫이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영적 열망을 지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그 근본 목적을 향해 이끄시기 위해서 은총의 힘에 의해 바래야 할 것을 마음속에서 충동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성장할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자신을 내어 주고자 하는 열망에 이끌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본받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은 완덕에 대한 그 큰 열망을 지닌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하며, 이 열망은 기도를 통해 더 깊은 신비를 향해 눈을 뜨게 하면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이 열망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향해 더욱 개방되도록 변화시킨다.
VI. 나가는 말
이런 전체 역동성이 [영신수련]의 구조 안에 드러나는 모습은 다음의 표에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객관적 지평과 주관적 지평, 지성과 의지, 인간의 노력과 은총이 [영신수련]의 구조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원리와 기초'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갖는 순서적인 프로그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제시된 흐름은 이상적인 차원에서 제시된 지평과 주관적인 응답을 정리한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순서적인 차원에서 피정이 진행되고 주관적인 인식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령 첫째 주간의 객관적 지평이 그 주간의 묵상 가운데 얻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둘째 혹은 셋째 주간에 더 깊게 피정자에게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리와 기초'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 첫머리와 끝머리에 나와 있기 때문에 [영신수련]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묵상은 [영신수련] 전체를 끌어가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종의 [영신수련]의 앞 괄호와 뒤 괄호의 역할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영신수련]에 있어서는 피정자와 지도자 모두 순서보다는 역동성에 더욱 주목하면서 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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