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교님William John McNaughton (1926~2020)의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 주교님의 순례여정 https://blog.naver.com/seasta2/221796852876
한국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초대 인천교구장 주교으로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식 이름은 나길모(羅吉模)이다. 세례명 굴리엘모의 영어식 명칭은 윌리엄.[1]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Lawrence)에서 출생. 1944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동(同)회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예일 대학에서 1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1954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충북 청주교구의 장호원 감곡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 장호원, 북문로, 내덕동 성당에서 사목을 폈다. 그러다 1958년 인천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고 3년 후인 1961년 6월 6일 인천감목대리구가 인천대목구로 승격되자 같은 해 8월 24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 성성식은 그해 8월 24일 고향인 미국 로렌스 시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주교 성성식에 이어 1961년 10월 26일 오전 11시, 주피(Xavier Zupi) 주한 교황 사절의 인천교구 설립식과 주교 임명장 수여식이 답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 주교의 주교서품 당시 나이는 만 35세로 이는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서품 기록이다.[2]
나 주교는 교구장에 취임하자마자 신설 교구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한 복음선포 사업에 중심을 두었다. 당시 인천교구는 박문초등학교,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었으나, 동구 화수동에 있었던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새 출발을 시켰다. 운영권이 노틀담 수녀회에 있던 박문학교와 달리, 대건학교는 교구 직속에 두면서 미국인 교장(조셉 기본스 신부)을 임명하고 철저하게 미국식 사립학교 체제를 도입하여 학교 수준을 매우 끌어올렸다.
1966년 한국 천주교가 사회 참여에 돌입하는데 본격적인 계기가 된 강화 삼도물산 사건이 일어나자 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1970~80년대의 독재시기 때도 이어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수원교구장과 광주대교구장을 역임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안동교구장 프랑스인 두봉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이름을 떨친다. 특히 인천교구가 당시의 신흥 공업지역이었던 인천, 부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사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또한 인권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노동자 사목, 양심수 석방운동, 독재 투쟁 활동 등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인해서 독재 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참여에만 몰두하지 않고 인천교구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초기 9개 성당과 약 23,000명의 신자들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를 은퇴 시에는 10배 정도 확장시켰다. 현재까지도 인천과 부천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 비율이 높은데, 이는 나 주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4월 24일 교구장직을 은퇴하였다. 은퇴 시에도 여러 가지 기록을 만들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이었으며 41년간 교구장직을 수행하여 최장 임기 교구장 기록을 세웠다. 나 주교가 은퇴는 한국 천주교가 그동안의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완벽하게 독립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었다. 후임 교구장으로는 부교구장이었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승계하였다.
은퇴 뒤에는 고향인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5남매의 장남이었던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은퇴 뒤에는 고향에서 살기 바란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얼마간은 자신의 본 수도회인 메리놀회 본부에서 소임을 하였고, 미국 여러 교구 성당들을 돌면서 견진성사를 집전하였으나 구순에 가까워 가는 나이로 인해서 2010년에 들어서는 수도원에서의 주일미사를 집전하거나 양로원에서의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소임을 하고 있다. 또한 은퇴 이후에도 종종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2011년에 주교 서품 50주년을 축하하는 금경축(金慶祝)[3] 기념미사와 천주교 인천교구 설정 50주년 감사미사 참석차 은퇴 이후 9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인천 깍쟁이 美신부님' 주교 50주년
2020년 2월 3일, 미국에서 노환으로 선종하였다. 향년 94세.
여담으로 주교관이 있는 답동성당 바로 길 건너편 신포시장에서 파는 만두를 엄청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 스스로 '만두 중독자'라고 하셨을 정도.[4]
천주교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인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가 3일(현지시간) 선종했다. 향년 93세.
천주교 인천교구는 5일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께서 미국 시각으로 3일 오후 6시50분에 선종(善終)하셨다"고 밝혔다.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시에서 태어난 나 주교는 1944년 메리놀외방전교회에 입회, 메리놀 대신학교 학부와 신학원을 졸업하고 1953년 종교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사제품을 받은 뒤 이듬해 1년간 미국 예일대학교 한국어과 과정을 수료하고 입국해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청주교구에서 교구 내 본당 보좌신부와 주임신부, 참사와 부감목을 지냈다.
1961년 6월6일 인천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완전히 분리됨과 동시에 투부르보 미누스 명의주교와 인천대목구장으로 임명돼 같은 해 8월24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후 1962년 교황청이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를 정식 인준함으로써 초대 인천교구장으로 전보됐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교부(敎父)로 참석했으며 주교회의 총무, 주교회의 일치위원회 위원장,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2년 4월25일 인천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뒤에는 미국으로 귀국해 생활했다.
나 주교는 한국 내 해외선교사 출신 마지막 주교다.
분향소는 천주교 인천대교구청 보니파시오대강당이며 위령미사는 오는 10일 오전 10시30분 인천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
'백서(帛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의 수요일] 2020년 사순절 시작 (0) | 2020.02.24 |
---|---|
세상이 치유되려면 너만 치유되면 된다 /헬렌 슈크만 (0) | 2020.02.19 |
성인 호칭 기도 (0) | 2020.02.07 |
춘천교구 성산본당, 공소 5곳 한꺼번에 재건축 축복 (0) | 2020.01.12 |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0) | 2019.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