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의미와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
머리에 재 얹으며 희생과 보속의 삶 다짐… 사순 시기 시작
- 가톨릭교회는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는 예식으로 사순 시기를 시작한다. 재를 얹는 예식은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으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오는 2월 26일은 재의 수요일이다.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 첫날로 사순 제1주일 전(前) 수요일을 말한다. 사순 시기는 본래 40일을 의미하는 라틴말 ‘콰드라제시마’(Quadragesima)에서 나온 말로 성경에서 40은 ‘고행의 시기’ ‘시련의 시기’를 뜻한다. 교회도 이 성경의 전통을 받아들여 40일간 사순 시기를 정해 희생과 보속으로 주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재의 수요일의 의미를 살펴보자.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은 이날 미사 전례 중에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해 이마에 바르거나 머리에 얹는 예식을 행하는 데서 이름이 생겨났다. 재의 수요일을 사순 시기 첫날로 제정해 교회의 전례에 공식 예식으로 도입한 이는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 대교황이다.
성경에서 재와 먼지는 속죄와 참회의 표지이다. 또 죽음과 재앙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회와 슬픔을 드러낼 때 머리에 재를 얹었다. 아칸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자 여호수아는 자기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자기 머리 위에 재를 끼얹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저녁때까지 엎드려 속죄하였다.(여호 7,6) 또 욥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으면서 잿더미에 앉아 자신의 죄를 보속하였다.(욥 2,8) 예수님께서도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보고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마태 11,21)이라고 꾸짖으신다.
성경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을 때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자루 옷을 찢으며 행한 이 참회 예식(2사무 13,19; 에스 4,1)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성 목요일에 공적 참회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었고, 그들의 옷에 재를 뿌렸다.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그레고리우스 성사집」에서 이날을 ‘재의 날’이라 불렀다. 재의 수요일에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공적인 회개의 상징으로 공식 전례 안에 도입된 것은 1091년 복자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 교황이 이탈리아 베네벤토 공의회에서 이 예식을 권고하면서부터이다. 베네벤토 공의회는 “재의 수요일에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는 재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 예식은 12세기 「로마 주교 예식서」 에 수록됐다.
재의 의미
재의 수요일에 사용하는 재는 일반적으로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나눠 받았던 성지(聖枝)를 거두어 태워 남은 재이다.
재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다양하다. 재는 불로 태워진 것, 즉 불로 시련과 단련을 받은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열망과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버리고 살아야 함을 뜻한다. 또한, 재란 남김없이 타버린 존재를 의미한다. 더는 태울 것이 없는 순수한 인간 존재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일깨워준다. 아울러 재는 생명과 새로운 성장을 위한 거름이다. 재를 받음으로써 사순 시기 동안 새로운 각오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제를 준비하며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재를 얹거나 바르는 예식
사제는 이 재를 축복한 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십시오”(창세 3,19) 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마르 1,15)라고 말하고 회중의 머리에 재를 얹거나 이마에 재를 바른다.
재를 얹거나 바르는 예식은 인간은 결코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현세의 삶에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지만,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준비를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게 재의 예식의 본뜻이다. 따라서 재의 예식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회개하고 하느님께 향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다. 더불어 전례적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사순 시기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주님 부활의 영광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달려 있음을 드러낸다.
재의 수요일 ‘재를 얹거나 바르는 예식’은 준성사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재의 예식을 받을 수 있다. 교회법은 “축복들은 우선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지만, 예비신자들에게도, 또한 교회의 금지가 방해하지 아니하는 한, 비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줄 수 있다”(교회법 제1170조)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이 예식은 미사 없이도 독립적으로 거행할 수 있다.
금식과 금육
금식과 금육재는 단순히 먹고 마실 것을 절제하라는 고행의 의미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곤경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한다. 따라서 금식과 금육은 세속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감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꺼운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사를 보면,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을 모범으로 삼아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초대 교회 때부터 금식재를 지켜왔다. 2세기부터 신자들은 주님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금식재를 지켰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며칠 동안 부활 전 단식 규정을 지켰다.
육식을 금하는 금육재 관습 역시 이미 초세기부터 지켜져 왔다. 금육은 영적인 완화를 위한 고신극기의 의미도 있었는데,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와 제자들은 육식을 절제하고 빵과 물, 소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성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 교황은 교령 「회개하여라」(Paenitemini, 패니테미니, 1966. 2. 17)을 통해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끔 금육재와 금식재의 규정을 수정했다.
현 교회법은 주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도 금육재와 금식재를 지키도록 정해 놓았다.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모든 신자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며, 성인이 된 모든 신자는 60세까지 한 끼를 단식하는 금식재를 지켜야 한다.(교회법 제1252조) 한국 교회에는 만 18세부터 만 60세 전까지 금식재를, 만 14세부터 금육재를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다.(「사목지침서」 136조) 이외에도 사목자와 부모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의무가 없는 미성년자들도 참회 고행의 의미를 깨닫도록 보살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2월 23일, 리길재 기자]
재의 수요일 강론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이다. 그러기에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즉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재의 수요일 강론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재의 수요일입니다. 또 어김없이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오늘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2코린 6,2). 이 영적투쟁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친히 나의 말을 들어주시겠다네요.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하시네요. 그러니 걱정말고 힘차게 시작해 봅시다. 그럼,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요? 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3)고 하네요. 사순절이라 회개와 보속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열심히 하고, 십자가의 길 등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이웃들에게 자선도 더 베풀어야지 결심도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사실 회개는 참회와 보속(옷을 찢음)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회개는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 사는 근심걱정과 온갖 탐욕과 욕심,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 온갖 죄와 악습을 향해 있는 상태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마음의 찢음).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는 사도의 초대가 바로 이 뜻이겠지요.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는데 우리는 그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늘 딴 데만 쳐다보고 있기에, 이제 그만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겠지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우리를 짝사랑하도록(풀톤 쉰 추기경) 내버려두지 않고, 같이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진정한 회개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도 친히 우리가 하는 '단식과 기도와 자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시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고 보여주는 것이 되게 하라(마태 6,1-6, 16-18)고 권고하십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하느님 앞에 선 피조물로서 자신을 그분께 합당한 존재로 닦아나가는 매우 중요한 수덕적 실천방식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는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단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자선을 통해 공동체와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죄를 씻고 새롭게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지켜온 이처럼 귀한 종교행위를 존중하시되, 그것이 더욱 가치로운 "마음의 봉헌"이 되는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2).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사순절 담화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선익에 이바지하고, 우리가 하느님 자녀답지 않게 살게 될 때 그릇된 욕망에 빠져 죄의 노예가 됨을 지적하시면서,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동산을 황무지로 만들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엄청난 파괴력을 확산시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실제로,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남으로써, 피조물도 파스카를 경축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묵시 21,1 참조). 파스카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참회와 회개와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얼굴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파스카 신비의 풍요로운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이 ‘간절한’ 기다림은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날 때 실현될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회개에 따르는 ‘산고’에 온전히 참여할 때에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모든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도록” 부름받았습니다(로마 8,21). 사순 시기는 이러한 회개의 성사적 표징입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생활에서 무엇보다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통해 파스카 신비를 더욱 깊이 구체적으로 드러내도록 초대합니다. 단식은 타인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을 채우려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우상 숭배와 자만을 버리고 주님과 그분 자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자선은 우리가 관장할 수 없는 미래를 스스로 보장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피조물과 우리 각자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획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 계획은,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와 온 세상을 사랑하고 이러한 사랑 안에서 우리의 참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보내신 ‘사순 시기’는 그분께서 피조물의 광야로 들어가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광야를 원죄가 있기 전에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던 동산으로 복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1,12-13; 이사 51,3 참조). 우리의 사순 시기도 이와 같은 길을 따르는 여정이 되어, 그리스도의 희망을 피조물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이 은총의 시기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맙시다! 우리가 참된 회개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우리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를 뒤로하고 예수님의 파스카를 향해 돌아섭시다. 어려운 우리 형제자매들의 이웃이 되어 우리의 영적 물적 재화를 그들과 함께 나눕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삶 안에 실제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도 그리스도 승리가 가져다 준 변모의 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누구에게나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 자기 삶만 돌아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때"를 그저 지나치거나 흘려보냈습니까! 무지해서도 그랬고 게을러서도 그랬고 두려워서도 그랬고 또 아직 탐욕이나 욕망과 결별하기 아쉬워서 모른 척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알고도, 모르고도 "때"를 놓쳐온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의 입을 빌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물러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이 사순절에는 사람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마음을 다해 설 수 있기를,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 등 뒤로 던져버리신 옛 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를, 숨어 계신 주님 안에 깊이 깊이 숨어 들어 겸손하신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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