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 이전의 반례들*1) 신 상 형(안동대) [한글 요약] '고유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현대 언어철학의 물음을 비트겐슈타인은 <말놀이>의 기제로 설명하고 있다. <말놀이>의 체계가 그러나 이런 물음을 받자마자 직관적으로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경귀적 시어들의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 선행하는 그리고 자신과 반대되는 이론들에 대한 노작의 열매이다. 본 논문은 이런 선행하는 반대 견해들을 추적하여 그 한계를 살펴보는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피는 반증사례들은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직접 표적으로 삼는 아우구스티누스, 프레게, 러셀 및 전기 비트겐슈타인들로서, 크게 보아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들이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비교되는 점이라면, 낱말의 의미가 고정불변하는 것이고, 한 가지이며, 그것과 떨어져서 그리고 맥락을 떠나서 존재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대신, 말놀이에서 단어의 의미란 맥락 의존적/중심적이어서 언제나 다르게 변화하며, 그래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 논문의 진행을 통해 암시하는 것은, 이런 반례들이 말놀이와 갖는 관계이다. 즉, 이것들은 의미 생성의 기제를 한 측면에서 강조하여 절대시한 점은 한계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시사 받았음직한 설명의 방식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영향상 생산적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기 위해 좀 더 정치한 논의가 모색되어야 하리라는 것이 이 논의가 남기는 과제이다. 주제분야 : 영미철학 주 제 어 : 의미, 지시, 직시, 지칭, 비트겐슈타인 들어가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말놀이에 대한 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고백록』의 저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에 따른 의미론을 주장하는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 의미론은 단어 용법의 일면만을 본 "단순화의 오류"에 해당하는 설명이다.1) 이 단순 의미론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원시적 언어 활동의 측면에서만 살펴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유치한 일면식의 언어관찰에 불과한 탐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이 언어의 기제를 꿰뚫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소위 많은 초기 언어철학자들의 보편적 입장이다. 이 일면식적 의미 탐구는 그 나름대로 통찰력을 가진 것이긴 해도, 통용되는 한 단어의 다양한 면을 '살려내는' 데는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단어의 '다면성'은 통찰력 있는 철학자의 명료한 설명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말놀이'(language-game)라는 설명이 대표적으로 이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말놀이의 체계를 상세하게 탐구하는 것이 이 본문의 본래 혹은 직접적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의미론의 완벽한 설명을 위한 대안인 말놀이가 나올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그 선행된 의미론들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보여주려는 것이 필자가 여기에서 시도하는 목적이다. 이런 목적을 관철할 수 있도록,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지목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입장들 - 프레게, 러셀 및 전기 비트겐슈타인 - 을 중심으로 의미론에 관한 논의를 우리는 진행시킬 것이다. 이 논의의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의미론 관점의 한계가 자연스레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견해를 상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2) 푸는 말 비트겐슈타인의 반례 제공자들은 한결같이 한 낱말의 의미(sense)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의미론이 이들과 맞서는 이유는,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이 단어가 속해 있는 언어 내에서 찾지 않고 언어의 바깥에서 찾음으로써 언어의 의미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그려내는데 실패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의 맥락 안에 살아 있는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 단어를 말하는 사람 사이를 오가며 의사를 소통케 하는 "생명력"3)을 가지고 있다. 이 생명력으로 인해 단어의 의미는 확장·축소되며, 이곳에서는 생동하나 저곳에서는 전혀 통하지도 않는 죽은 것이 된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의 생동함은 어떻게 우리에게 이해되는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나 정의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보고 기술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4) 그 이유는 그것의 살아있음이 관찰을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죽은 것 - 예컨대 시체 - 은 그것이 무엇이었고 현재는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 될 것인지를 '말로 설명해 줘야' 한다. 설명은 우리가 보고 기술할 수 없는 이론을 동원해야 하므로, 그 상황과 상관없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 형이상학적 설명은 따라서 말의 의미에 대한 의미를 그리는 불필요한 작업을 요청하는데, 이런 요청에 응한 사람들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선행적인 '아우구스티누스 계열' 철학자들이며, 이들을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형이상학의 주제는 지칭(reference)에 관한 것이다. 데까르뜨 이래 서양의 합리적 이론은 세계를 사변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로 나누고 의식을 통해 이 두 세계를 일치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이에 영향을 받은 언어철학은 사변의 세계를 언어의 세계로 나누어, 언어의 각 낱말이 실재의 각 대상을 지시(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해 왔다. 따라서 지시의 내용과 형식이 문제로 등장되는데, 만일 어떤 기호인 낱말이 실재를 지시하면 그 낱말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지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 무의미한 -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지시'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도대체 지시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해 몇 몇 철학자, 다시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반례 제공자들은 나름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살펴보자. 1. 아우구스티누스: 직시적 정의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개념에 관한 진술로 『탐구』의 논의를 연다.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을 이렇게 요약한다: '언어의 개별 낱말들은 대상들의 이름이고, 문장은 그런 이름들의 결합이다.'5) 또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발전시킨다: '각 낱말은 하나의 지시(의미)를 갖고 있다.'6) '모든 낱말은 이름이며, 대상을 대표(의미)한다.' '낱말의 지시(의미)는 대상이다.' 한편, 『고백록』에서 이것은 정치한 언어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언어 습득의 과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진술이다.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혀 의미론적 차원에서 투쟁할 생각이 없는데도 비트겐슈타인이 지나친 엄숙주의로써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실 또한 그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소위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이 언어, 심리 및 세계를 둘러싼 전체 세계관의 정원에 있는 거대한 잡초로서 광범위한 의미론에 집중된 광범위하게 퍼진 철학이자, 많은 철학적 의미론의 진보를 형성하는 시원적 이론(proto-theory)으로 대표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근절한다는 생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7)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입장을 발전시켜 그 영향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확장시켜 두 가지로 표현한다.8) 즉, 직시적 정의는 낱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근본적 형식이다. 또, 매 문장은 어떤 것의 기술이든가 혹은 이름부름과 기술함은 두 가지 본질적 언어의 기능을 구성한다.9) 이렇게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에 대한 그림은 직시적 정의와 기술이 언어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Hacker도 지적하고 있듯이,10) 위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 - '낱말은 의미를 갖는다.'와 '문장은 이름의 결합이다.' 라는 주장 - 은 낱말과 문장은 무엇을 뜻하는지, 표현을 이해하거나 그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것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로 낱말마다 의미(지시)를 갖는다는 것은 참인가? 둘째로, 직시적 정의가 낱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원초적 형식이라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 주장인가? 덧붙여, 이름 부르기와 기술이 언어의 본질적 기능임을 비트겐슈타인은 반대하고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타당한 주장인가? 의미에 대한 토론을 도입하려는 목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는 이것을 즉각 발전시킨다. 그가 각 낱말은 대상의 이름이라는 생각을 더 복잡한 개념의 근원으로 취급하는데 이것은 세 가지 주제로 분절된다.11) 첫째, 모든 단어는 의미(지시)를 갖고 있다. 둘째, 이 의미는 그 낱말과 상관된 무엇이다. 셋째, 의미는 단어가 대표하는 대상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한 낱말은 어떤 대상의 이름으로 쓰이며, 대상은 바로 그 낱말의 지시이다.' 라는 말로 요약되어진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공해 준다. 첫째, 직시적 정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낱말은 지시를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품사에는 상관없이 모든 낱말이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낱말-대상 사이를 획일화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둘째, 지시 대상이 없는 경우, 즉 지시는 불가능한 경우에도 낱말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의 담지자는 반드시 실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된 주장은 무엇인가?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어=의미/이름=대상', '의미는 직시적으로 드러난다.'는 주장을 한다. 여기에서 의미란 영어로(meaning)으로 표시하나,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에서는 - 독일어를 직역한다면 - 지시(reference)로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해석하면 '낱말은 지시를 갖는다.'이다. 어떤 유의미한 단어도 무엇인가를 기호화한다. 그것의 의미란 그것이 대표하거나 기호화하는 무엇이다. 단어는 대상과 그것을 상관시킴으로써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런 상관은 단어를 한 대상의 이름으로 만들어 넣음으로써 거기에 한 의미를 제공한다. 단어는 그것이 대표하는 그 대상을 재현한다. 한 단어가 아무 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12) 의미를 설명하는 데는 대개 언어적 정의와 직시적 정의로 구분된다.13) 언어적 정의가 이 표현을 통해 저 표현을 정의하는 것이므로, 언어 내의 연결을 구성하는 반면, 직시적 정의는 낱말과 사물을 상관시키기에 유일한 가능적 수단을 제공한다. '저것은 …이다.'라는 형식의 발화만이 무엇을 가리키는 동작과 더불어 한 단어와 한 사물을 연결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14) 모든 언어에는 직시적 정의가 있어야 한다.15) 직시적 정의는 언어가 실재를 재현하는데 필수적이다. 한 단어와 한 사물을 상관시키기 위해 사용된 방법에 관한 어떤 자세한 설명도 그것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대상과 상관되어 <있다>는 노출된 사실뿐이다.16) 나머지는 단지 심리학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심일 따름이다. 한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일어나는 맥락이 무엇이든 그 모든 적용이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똑같은 대상을 대표한다. 즉 그것은 그것이 나타나는 문장들과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갖는다.17) 다음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직시적 정의를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분석 불가능한 단어의 직시적 정의는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최종적이고도 애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직시적 정의는 언어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었다. 모든 직시적 정의가 정의된 단어의 적용에 대해 애매하거나 의문을 남겨 놓으면, 그것은 보충을 요하고, 이것이 자체로 더 이상의 직시적 설명이 아니었다면, 직시적 정의와 다른 어떤 것이 언어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원시적 표현의 직시적 정의를 보충하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불필요하거나 이미 거기에 할당된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 최종적이고 명료한 직시적 정의는 어느 것이든 무엇이 정의된 표현의 바른 용법으로 간주되는가를 완벽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것은 피정의체 용법의 모든 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용법을 지배하는 어떤 원리들이라도 거기서부터 흘러나와야 하는데, 이 표현이 그래서 특별한 사물과 상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유출되어야 한다.18) 이것은 의미체들의 유비에 의해 재현될 수 있다.19) 한 단어의 바른 용법 규칙들은 의미로서 그것과 상관되어 있는 것의 본성을 표현한다. 마치, 일군의 채색된 삼각형의 순열조합 가능성이 각 삼각형이 칠해진 단일 면이 비가시 유리 프리즘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다. 의미 규칙은 의미체의 기하학을 나타낸다.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의 총체적 용법을 결정하며, 직시적 정의는 그 의미를 완전하게 결정한다. 단어와 상관된 사물의 본질적 속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의미 규칙들은 세계의 본질적 면들을 표현한다. 이것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형이상학적 조화를 보증한다. 언어의 본질은 세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20) 그런데 하나의 직시적 정의가 각 색깔 세계에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면, 아무 것도 붉고 푸르지 않다라는 필연적 진리는 붉고 푸른 색깔들의 본질에서 흘러나와야 한다.21) 이 색깔은 각각 반대 색깔의 방식을 끌어들여야 하며, 그럴 때 양자는 동시적으로 같은 위치를 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22) 원시적 표현들의 직시적 정의의 완벽성은 종합적 필연적 진리를 위한 여지를 마련하는 것 같다.23) 직시적 정의는 논리적 유형과 범주의 상이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단어들이 그렇게 정의될 수 있다: 예컨대, 고유명사, 형용사, 행위동사 및 성격 명사들.24) 범주 차이는 따라서 단어들과 상관된 대상들의 본질적 성격에서 나와야 한다. 언어의 논리적 문법이나 논리적 구문론을 때때로 세계의 논리적 구조로 주어지는 무엇이다.25)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이름과 지시를 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이름이 담지자를 필연적으로 갖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구분한 프레게를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프레게: 의미와 지시 프레게는 겉으로 보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미-대상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리고 크게 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관을 계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모든 낱말은 이름이고, 모든 문장은 이름의 결합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26)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한 낱말의 의미(meaning)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단일한 한 가지, 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만일 이름 혹은 기호와 그 의미가 일의적이고 직접적인 일치 관계를 가진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없을 경우, 그 이름은 무의미한 것이 되며, 그 이름을 사용하는 문장은 자연히 무의미한 문장이 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일상적 삶에서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프레게에 의하면, 이런 일은 한 낱말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의미라는 것을 '의미'와 '지시'의 두 가지경우로 혼동하여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프레게의 논의를 따라 가 보자. 프레게에 따르면,27) '일치'의 관계는 대상과 대상의 관계가 아니다. 예를 들어, a=a와 a=b는 동일한 인식값을 갖지 않는다. 이 경우 만일 우리가 동일성을 a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것과 b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것 사이의 관계로 간주하고 싶다면, a=b는 a=a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a=b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a와 b가 동일한 것을 지명하는 것이므로, 이 때는 그 기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이런 관계는 이름이나 기호 사이에서,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이름하거나 지명하는 한에서만 성립된다. 그런데 이런 지명은 임의적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임의적으로 산출하는 사건이나 대상을 무엇에 대한 기호로 사용토록 허락되어져 있지 않다. 이런 경우, a=b라는 문장은 더 이상 주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명 양식을 지시할 것이다.28) 다시 말하면, 기호 a가 기호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기호 b와 구분된다면 a=a의 인식 값은 본질적으로, a=b가 참이라면, a=b의 인식 값과 같게 된다. 그런데 차이는 그 기호 사이의 차이가 지명 받는 것의 제시 양식의 차이에 대응된다. 이름은 바로 이런 제시 양식을 가리키는데, 기호의 지시라 부를 수 있는 것 말고도, 이것이 그 안에 포함된 것을 프레게는 기호의 <의미>라고 부른다.29) 인식 값의 차이는 바로 이 의미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비록 '저녁별'과 '아침별'은 지시는 동일하나 의미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그는 낱말의 의미로 '의미'(Sinn: meaning) 와 '지시'(Bedeutung: reference)를 구분한다. '지시'가 실재 세계에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의미'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낱말들은 이름이 되기 위해 '지시'라는 개념에서 어떻게 명시되는가를 살펴보자. 첫째, 한 낱말은 유의미한 경우 하나의 지시를 가지며, 그 낱말이 나타나는 한 문장은 하나의 참 값(a truth-value)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 '의미'를 가진 표현은 그 표현이 나타나는 문장이 참 값을 가지려면 하나의 '지시'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문장의 참 값을 결정하는 필수 요소는 바로 '지시'에 있다. 이 지시는 결과적으로 문장 속에서 그 값이 결정되는 요소가 아니라, 독립 요소이며, 이것의 값은 맥락에서 독립해 있는(context-independent), 그래서 그 값은 실재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렇게 낱말이 참값을 가지는 경우에 한해서는 프레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같다. 둘째, 그러나 거짓의 값을 갖는 단어의 경우에서는 다르다. 한 문장이 참값을 가지지 않는 경우, 다시 말해서 그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지시'를 갖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 이런 경우의 예로서 프레게는 계사(copula)와 변수(variable)를 든다. 이들의 의미는 그 자체로써 발생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It is a dog.'에서 'is'는 앞과 뒤를 연결해 주는 말이다. 이 말은 참과 거짓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지도 않고, 또 그것이 지시하는 지시대상도 갖고 있지 않다. '…이다'나 '있다'는 반드시 그 주체가 있어야 뜻이 통하는 것은 우리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것들의 의미는, 어떤 의미가 발행한다면, 그 의미는 '의미'로서 존재하지, '지시'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는 맥락 의존적인(context-dependent) 의미이지, 맥락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프레게의 입장에서 보면, 맥락 의존적인 표현은 엄밀히 말해서 결코 완전한 의미를 가진 것일 수 없다. 셋째, 프레게의 관심은 그러나 단어가 이름으로 쓰인다는, 구문론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관심은 반대로, 특정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어떤 사물의 이름이 되는가 하는, 의미론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숫자는 일차 개념의 이름인가, 이차 혹은 삼차의 것인가, 아니면 대상인가 등등. 또 낱말도 논리적 유형으로 구분하며, 문장도 이것으로 구분하여, 잘 구성된 문장과 허튼 소리 문장과를 구분하며, 문장을 진리치의 복합이름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름에다가 흡수시킨다. 넷째, 프레게의 의미론을 이해하는 데는 그의 독자적인 용어인 '지시' (Bedeutung)를 이해하는 것이 첩경이다. '의미'가 의미로 바뀌기 위해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을 그것의 지시체로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한 대상을 우리는 두 개 이상의 단어 - 이름 - 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중 하나는 그 지시를 가짐으로써 유의미한 단어가 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지시'를 갖지 않고 '의미'만 가짐으로써 무의미한 단어가 되는 경우이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2+2=4 지구는 돈다 이것들은 동일한 '지시'(Bedeutung)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자연언어 가운데 어떤 것은 '의미'는 가지나 '지시'는 갖지 않는 것이 있으며, 하나의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의미하는 두 개의 이름이 쓰일 수 있다. 다섯째, 결국 이름과 대상 사이에는 각각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되며, 그 관계 또한 여러 논리적 유형들로 나타난다: 고유명과 대상들의 관계; 속성과 일차 개념들의 관계; 양사와 이차 개념들의 관계 등등이 그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맥락이 다르지 않는 의미론을 말했다면, 프레게는 동일한 맥락이 다양한, 그래서 상호 차별적인 맥락의 의미론을 말하면서, 맥락과 더불어 표현이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을 했다. 문장 또한 이름으로 이루어진 구조들로서, 이를 분절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프레게는 직시적 정의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프레게의 한계는 무엇인가? 여섯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름들 사이에서조차 '의미'의 동일성 기준에 대해 명백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프레게에 기준에 따르면, 의미론은 과학적인 관점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신선한 견해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가 그 지시를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장의 의미를 내가 파악한 것이 어떻게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내 능력과 관계되는가는 명료하지 않다. 이것은 프레게가 '완벽한 사실에 대한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구문론에 있어서 그리고 단어와 관련된 바른 판단을 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옳게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대부분은 '0'이라는 숫자를 바로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의미'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프레게의 의미론에는 두 개의 모순된 관념이 존재한다. 하나는, 한 단어의 '의미'는 초월적인 무엇이다, 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을 이해하는 중에 우리가 이해하는 무엇,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것을 정의하면서 설명하는 무엇이다, 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단어의 '의미'는 어떤 단어의 적용이 옳은지를 해결하여, 그래서 그것이 어떤 사람이 그 단어를 바르게 이해하는가 여부를 판단해 줄 객관적 기준을 구성한다. 그 다음으로, '의미'가 언어 용법에 대한 난문제들을 설명하려면, 우주 내재적이며 접근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프레게의 '의미'-'지시' 구별을 통한 의미론은 그 기능이 모자란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프레게 공격은 그래서 아직 유효하다. 예를 들어, 형용사나 부사의 경우는 사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프레게에 있어서 이것은 참값도 거짓 값도 갖고 있지 않는 단어인데, 이 경우 어떻게 참 거짓을 통해 그것의 고유한 값을 알 수 있으며, 유의미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낱말이 의미와 지시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기술적인 모습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언급한 러셀에게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3. 러셀: 지칭구 러셀은 '지칭이론'(On Denoting)에서 프레게가 놓쳤던 의미 구성의 요소를 간파하고 있다. 러셀의 특징은 과학적 방법을 존중하고 이를 적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그는 보이는 것을 문제삼고, 계산되는 것을 수용 가능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띠고 있다. 러셀의 의미론에 있어서 핵심적 내용은 문장에 나타나는 단어마다 어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30) 이것은 낱말들이 그 자체 이외에 무엇을 의미하는 부호이므로.31) 그런데 낱말을 통제하는 논리적 원리들은 그 의미로 그것들과 상관된 대상들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지식을 말하고 있는데, 면식지(acquaintance)와 대상 지식(knowing about)으로 나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지칭을 통해서이다.32) 그리고 모든 생각은 면식에서 출발, 그러나 우리가 전혀 면식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33) 그리고 면식법은 지각에서는 지각 대상들을, 사고에서는 보다 관념적 논리적 성질 대상들이다. 그렇지만 면식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지칭에 의해 알려진다. 이 단계에서 러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단어-의미의 그림의 두 문제를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는 계사의 의미인데, 러셀은 그것을 유일한 관계 형식이라고 아주 흐릿하게 취급하고 있다.34) 또 하나는 그가 지칭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분석이다.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라는 문장에서, '한' 과 '사람'은 둘 다 개념을 의미하나, 사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문장은 나와 한 사물의 관계를 진술하나, 나와 한 (복합) 개념 사이의 관계를 진술하는 것은 아니다.35) 이 혼란의 해결의 실마리는 지칭 개념에 의해 주어진다. '한 사람'이라는 구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라는 문장에 있는 한 사물(사람)을 지칭한다. 그런 경우 지칭된 사물은 어떤 특별한 방식에서 그 개념과 연결된다. 오해를 피하려면, 우리는 한 복합 명사가 의미하는 것과 그것이 지칭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반면에, 단순 명사는 한 사물과 이런 신비적 관계를 가질 수 없다. 러셀은 프레게의 용어들인 Sinn과 Bedeutung을 자기의 용어인 meaning과 denotation으로 바꾸어 해석하고는, 다만 복합 이름에만 적용 가능한 구별을 단순이름들의 경우에 마저 짓는다고 비판했다.36) 러셀의 논지는 복합명의 지칭은 그것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단어의 의미가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이라는 논지의 거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저서에서 러셀은 문장들이 이름의 결합이라는 것을 수용한다. 문장은 복합적인 것으로, 둘 이상의 구성 요소들로 구성된 명제에 대응한다.37) 또 한 명제는 낱말들로 이루어지지 않고, 낱말들이 지시하는 실재들을 포함한다.38) 이것은 두 개의 혼란을 초래한다. 첫째, 거짓 판단을 하는 것이나 거짓된 무엇을 진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걱정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거짓 문장이 말하는 것에 대응하는 명제란 전무하기 때문이다.39) 둘째로 한 명제가 어떻게 그 구성 요소인 집합과 다른지, 한 명제의 통일성은 어디에서 발견될 것인가에 대한 혼란이 생겨난다. '갑은 을과 다르다.'라는 명제의 구성 요소는 '갑,' '을,' '다름'이다. 그러나 이런 구성 요소는 병립시켜 놓을 때, 그것이 명제를 재구성하지는 않는다. 러셀은 그 해결책이 동사로 사용된 동사와 그 문장에서 명사로 간주된 동사와를 구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구별을 명백하게 하려고 계사를 구별했으나 실패한다. 외관상, 러셀은 의미론의 후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에서 점차 퇴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불완전 기호의 인식은 바로 한 문장에 나타나는 표현 전부가 이름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의 수용이다. 참 문장에서는 모든 표현이 명제의 한 구성 요소나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사실을 의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점차적으로 불완전 기호의 집합을 확대하였다. 우선, 그는 확정 기술을 추가하고, 집합 개념 및 이름을 보태고, 가장 일상적 고유명과 지시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논리적 상수를 첨가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러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상당한 착오이다. 왜냐하면 불완전 기호의 인식은 단지 거기에 완벽하게 밀착하게 만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40) 러셀은 현상과 인식이 우리 언어의 개념 안에서 대조되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모든 단어가 전부 그 의미로 그것이 대표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모든 문장의 구성 요소가 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에 순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문장의 외관상의 구성 요소들은 그것의 실제적 요소들은 아니다. 이것은 논리적 분석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또 복합 명사들은 그 정의로 그것들을 대치시킴으로 소거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은 그것 모두가 그것의 정의 가능한 구성 요소들로 분석될 때가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불완전 기호들은 연속적으로 그것들을 의미상 원래의 것과 동등한 전체 문장들을 대치시킴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지난 후에야 한 명제의 실제 구성 요소들은 드러난다. 그 중 그들의 의미들이 대상인 것만 참이다. 러셀의 명백한 이 견해에 대한 실행의 원천은 면식지의 원리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명제마다 전적으로 우리가 면식하는 실제 구성요소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기술이론을 완성시키기 전에 러셀은 이 원리를 지칭의 애매한 관계의 설명을 갖고 부가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정 기술을 불완전 기호들로 파악한 것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 그림이 완벽한 언어 설명을 그것의 완전히 분석된 형태로 제공한다는 주장에 대한 주요 장애물은 없어졌다. 이것이 기술 이론이 러셀에게는 하나의 해방이라는 이유이다.41) 한편, 이름으로서 단어 개념은 러셀의 면식의 원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그것 또한 유형이론, 철학적 분석 개념, 보편자 이론 및 인과론적 의미론까지도 깔려있다. 이것을 하나씩 음미함으로써 의미 결정에 대한 러셀의 논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논리적 유형의 구분은 단어가 의미하는 대상들의 속성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초물리학이다. 한 단어가 술어로 기능하는 것을 확립시키는 것은 어떤 속성이 그 의미로서 그것과 상관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관된 것은 속성이 아니므로 하나의 속성이 아니다. 한 속성이 그 자체를 속성으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 대상들의 속성도 속성들의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유형이론은 그런 기본 사실의 진술 체계이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기호의 결합이 의미 있는 문장들을 구성한다, 즉 기능을 자체의 논증으로 취급하는 것은 헛소리라는 규칙 체계를 이끌어낸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기호에 대한 규칙을 제정할 때 기호론에 호소했다는 것을 배척했다.42) 러셀조차도 이 비판을 받아들여, 나중에 유형이론은 실제로 기호론이지 사물론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공식 견해로 채택했다.43) 그러면서도 그는 유형이론을 이전과 다름없이 설명하면서 그런 필연성을 집합과 개별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으로 주장했다.44) 다음으로 러셀은 철학의 타당한 업무를 분석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단어와 상관된 것을 그것의 논리적 구성 요소들로 부수면 이 구성 요소를 대표하는 단어들의 측면에서 그 단어의 정의에서 비춰지리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 단어의 바른 정의는 그것이 대표하는 것을 그것의 논리적 구성 요소들로 해부하는 것에 틀림없이 대응한다. 한 단어의 의미 분석은 상관된 대상의 논리적 구조에 대응한다. 따라서, 철학적 분석은 언어와 세계 양자를 명료화한다. 그는 이 견해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또 러셀은 언어의 바른 설명에 보편자의 필요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많은 보편자의 존재에 대한 논쟁을 제출하는데45) 비해 그의 대안의 고려는 피상적이고 선결문제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46) 그는 일반 단어에 의미를 할당할 유일한 방법이란 그것을 이름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그것들이 이름이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내 방안에 있다.'라는 문장에서 '안에'는 분명히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나와 내 방 사이에 성립하는 한 관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안'이라는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인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나는 내 방안에 있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47) 결과적으로, 보편자 소거의 유일한 논증은 언어란 어떤 일반 단어의 사용 없이도 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러셀을 바로 판단한다.48)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에 사로잡힌 어떤 사람만이 이런 논평을 진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은 보편자들이 활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할로부터 명백하다. 러셀은 그것들을 선험적 진술에까지 진리대응이론으로 확장시키는데 이용한다. 예를 들어, '1+2=3'이라는 문장은 수 1, 2, 3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그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참이다. 이 진리 설명은 보편자들에게 그것이 일반 단어들의 의미라는 이론과는 독립적인 제2의 역할을 제공한다. 러셀의 후기 의미 인과론은 <『마음의 분석』49)과 『의미와 진리에 관한 문의』에서 시작하는데, 그 시원은 한 단어의 의미란 그것을 대표하는 것과의 상관된 무엇이라는 생각이다.50) 즉, 이름 관계는 단어와 사물들간의 인과 관계라는 것이다.51) 그것은 이름과 이름 붙은 대상들간의 심적 연상의 본질을 탈 신화화시키고, 이것을 경험적 자극들과 심리적 조건지움에 있는 체험들로부터 익숙한 행동적 반응들을 비유한다.52)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 배경이 없었더라면, 러셀의 이런 인과론의 작업은 전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문장이 이름의 결합이라는 개념은 동시에 러셀의 저술을 통틀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명백히 그의 면식 원리 가운데,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형이상학과의 진리 대응론에서도 공식화된다. 하나의 사실은 단순 대상들로 구성된 복잡한 대상이다.53) 한 문장은 완전히 분석 될 경우, 단순 기호들로 구성되며, 그래서 그것은 단순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복합이다. 단순 대상들로 구성된 복합 대상은 그것의 형식에 따라 그 이름과 상관성을 가지며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참이다. 문장과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사실과의 대응은 이름으로 이루어진 문장의 구성에 의해 좌우된다.54) 이름을 문장 안으로 결합시키는 상이한 논리적 형식들의 명료화는 러셀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그의 저술에 점증하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언어에 대한 러셀의 일반적인 설명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에 순응한다는 말은 너무 약한 표현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지속적인 의미론의 총체적인 의도가 언어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 순응은 깊으나 드러난 것이 아니므로 논증되어야 한다. 철학적 언어 분석은 그것을 드러나게 한다. 면식 원리는 그것을 요약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러셀의 이상언어 개념을 제공해 주는데, 그것은 어떤 문장도 완벽하게 분석된 형식을 제외하고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순응이 보이는 하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러셀의 언어 기술에 있어서 한 재현 규범으로서 기능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로 들어가 보자. 4. 전기 비트겐슈타인: 그림 <논고>를 통해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분석된 명제 가운데 나타나는 기호들은 논리적 연산자들과는 달리 이름들이다.(<논고> 3.201) 한 이름은 대상을 의미한다. 대상은 그것의 의미(지시)이다.(<논고> 3.203) 각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즉 그것은 논리적 계산에 의해 그것들로부터 구성된다.(<논고> 5) 요소명제는 이름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이름들의 연쇄이다. 직접 결합된 이름들로 구성된다.(<논고> 4.22) 결과적으로 명제의 가능성은 기호들이 대상들을 대리한다는 원리에 근거해 있다.(<논고> 4.0312) 모든 명제는 정말로 이름으로 구성되며, 가능한 사실의 기술이다. (<논고> 3.144 , 4l01, 4.023) 이리하여 명제의 일반 형식은 '이것이 사물이 서 있는 방법이다'. (<논고> 4.5) [Abstract] Some Falsifiers of Wittgensteinean 'Language-Game' Shin, Sang-Hyong(Andong National Univ.) In this paper the writer seeks to show what Augustinean philosophers, as falsifiers of Wittgensteinean 'language-game', talks about proper names, in which most Anglo-American linguistic philosophers were interested. What they say, he argues, is that the meaning of a word is something fixed, context-independent, objective and unchangeable. Although what each of them claims is different from the other's, there is something in common, which fall among the same, i.e. Augustinean Model. We need to look close into those philosophers: First, Augustine himself claims that every word has its own meaning; that its meaning is the thing for which it stands; and that the meaning is therefore the object. However, he fails to distinguish between meaning and reference. Second, to overcome this limitation, Frege makes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m. Making emphasis on reference rather than meaning, he fails to show how a word works in reference mechanism: what reference of a word stands for or is in relation of is unclear. And this leads us to Russell's on Denoting," in which he tries to makes it clear by way of function-class concepts. This leads us to complicated abstract rallies, not productive discussions. This situation invites us to note of why early Wittgenstein puts forward his "picture theory" in the Tractatus. Picture theory seems to succeed in showing what words picture, except in speaking how the meaning of a word is made, for the meaning is different depending upon where it appears. This will be shown in his later description in "language-games." On the other hand, what we have discussed so far implies that even though the falsifiers fails to show appropriate explanation for meaning, each of them may gives his own prospect from which Wittgenstein could get some idea to suggest new ideas. The ideas could, it is believed, be inserted into the language-game in the way Wittgenstein has given it. How he did, including checking whether it really was, is left for us to proceed. [출처] 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 이전의 반례들-신상형|작성자 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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