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지시란 무엇인가(류왕표)

나뭇잎숨결 2017. 4. 6. 18:27

지시란 무엇인가*

류 왕 표(경상대)


[한글 요약]

존재와 사유와 언어의 문제는 철학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자각을 가지는 순간에서부터 그러한 자각이 성립하는 불가결의 조건으로 그 셋은 함께 있다. 그것들을 그렇게 묶는 것이 의미의 연관이다. 따라서 철학에서 제일의 과제는 의미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그러한 의미의 단초는 우리의 사유와 세계의 접점인 개체에 대한 지시에서 열린다.

지시란 지시주체의 의도, 그 의도를 교감하는 지시상대, 물리적 변양으로 지시기호를 산출하는 의도의 작용, 그러한 물리적 기호에 대응하여 짝지어지는 지각적 지시대상,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병존시키는 단일한 공간, 마지막으로, 지시상황의 배경이 되는 맥락으로서 지시를 필요로 하는 관심의 교감을 조건으로 성립하는 의미관계이다. 이 지시관계에는 지각적으로 명시적인 4개의 관계항, 즉 지시주체, 지시상대, 지시기호, 및 지시대상이 개입한다. 따라서 지시는 4항관계이고 '지시한다'는 말은 반재귀적이고 반대칭적이며 반이행적인 4항관계빈술어이다.

주제분야 : 언어분석철학
주 제 어 : 지시, 기술

들어가면서

원래 필자는 "의미와 지시의 관계" 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 했다. 그 취지는 존재와 사유 그리고 언어의 문제들이 모든 언표의 형식적 기초로서 논리적 원리들이 가지는 의미론적 함의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 형식적 원리들의 의미론적 함의라는 필자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보았던 존재론에 기초한 논리적 형식의 도출 가능성과 현대에서 지시적 의미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시와 의미의 구분에 주목했던 프레게가 보여준 동일관계분석이 서로 보완적으로 결합될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 더욱 고무되었다.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의 저작이 이른바 고전논리학과 현대논리학에서의 제일의 텍스트인 만큼 필자의 논의가 두 논리체계가 가지는 근원적 동일성과 차이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일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오랜 동안 두 사람의 원전과 관계논문을 읽고 의중에 두었던 논의를 구성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대목 대목에서 떠오르는 의문과 혼란에 봉착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정돈되지 않고서는 목표로 했던 논의를 일매지게 구성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유, 형상, 개념, 관념, 자아, 대상, 존재 등과 논리, 언어, 진리 등의 말이 어떤 얼개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연결되어야 하겠는지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필자가 접하는 많은 논의들이 그것들에 대해서 가진 이해에서 심각하게 서로 착종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그러한 와중에서 벗어나 이어져 흐르는 논의를 해보자면 어디서 시작해야 되겠는지를 모색한 끝에 '지시'에 대한 필자 나름의 이해를 먼저 정돈해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그러한 시도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필자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납득하는 논의만을 전개하겠다. 또한 이 글의 논의가 필자의 생각의 틀인 우리말의 어감 속에서 정돈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우리가 어떤 문제를 탐구하여 이해를 얻는다는 일은 그 문제를 만드는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떻게 같은지를 알고 그것들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안다는 것이다. 철학 전체의 문제를 아우르는 말로 필자는 존재와 사유와 언어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별개의 문제로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렇게 셋이 함께 있어서 비로소 성립한다. 함께 있어서 비로소 존립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불가결의 요소가 된다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이른바 연쇄의 관계 정도가 아니다. 이를테면 삼각연쇄에서 세 개의 고리 각각은 뚜렷하게 서로 별개의 외연을 가진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존재와 사유와 언어의 삼각관계는, 공간적 형식으로 비유하면, 그 외연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연쇄쯤으로 생각된다. 외형으로는 세 개의 고리가 삼각으로 연쇄되었다는 직관을 주면서도 기실 하나의 돌덩이인 조각 작품 같은 것이 연상된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한다는 자각을 가지는 순간에서부터 그러한 자각이 성립하는 상황 조건으로서 존재와 사유와 언어를 가져 있다. 존재와 사유와 언어를 그렇게 엮어놓고 있는 것이 의미이다. 이렇게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 논의를 시작하자면 철학이라는 작업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의미란 무엇인가이다.

그러나 그렇게 물어지는 물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의미에 대한 탐구는 우리가 세계에 대면해 있다는 자각에 주어져 있는 존재와 사유와 언어가 관계하는 그 단초에서부터 즉 가장 단순 간명한 관계에서부터 이해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탐구란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탐구가 시작되는 조건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을 두고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존재와 사유와 언어가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지금의 작업에서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의미란 무엇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도 가져와서는 안 된다. 그것들의 본질과 상호연관에 대해서 어떤 편의적 가정도 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미에 대해서 아직은 아는 바가 없다.

우리가 이 세계를 아는 방법은 지각이다. 이 세계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질서를 가지는지를 우리는 지각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지각을 덮어두고 사변만으로 세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궁구해볼 수는 있다 하더라도, 이 세계는 우리로서 마주쳐보기 전에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우리의 지각에 주어지는 세계는 그 전체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 능력에 맞는 작은 단위의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단일한 대상을 두고 우리는 개체라 불러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우리는 말로 나타낸다. 세계를 말로 나타내는 일은 먼저 우리가 세계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주어지는 특정의 개체를 대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존재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말의 단초로서 이 개체를 가려 붙잡는 일이 지시이다. 이 글은 언어가 세계와 연결되는 접점으로서의 지시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구명하려 한다. 이 일은 지시와 기술이 어떻게 다른 지도 함께 드러내줄 것이다. 그러한 이해가 가지는 의의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 존재와 사유 그리고 언어를 엮어 있는 의미에 대한 이해에로 다가가는 길 위의 어디쯤에로 우리를 이끌어 주리라는 것이다.


2.

지시란 특정의 대상을 가리키는 일이다. 그런 것으로는 먼저 손가락 지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손가락 지시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 보이는 일이 아니라(이것은 기술이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경우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대상은 물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의도적인 행위의 주체가 하는 일이다. 또한 이 일은 상대가 있다. 이 일의 상대는 이 일을 이해하는 존재이다. 손가락 지시는 의도적인 주체가 그 의도를 교감할 수 있는 상대를 두고 물리적 대상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손가락 지시는, 여기에 보태어서, 손가락 지시가 성립하는 다른 조건은 무엇인가.

손가락 지시의 성립은 지시주체와 상대가 같은 공간 즉 하나의 공간에 실제로 공존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수적이다. 하나의 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은 전후좌우상하라는 방향과 거리의 단위라는 도식 즉 공간형식을 같이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손가락 지시의 성립을 인정하는 모든 논의는 의도적 행위의 주체와 그 상대가 공존하는 하나의 공간, 그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을 담아 있는 유일한 공간을 전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지시상황에 가담하는 지시주체와 상대는 그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과는 다른 공간 이를테면 격리된 공간이나 엇갈리는 공간을 따로 상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로서도 그들의 지시상황을 주목하는 한, 동일한 공간 안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별개 공간의 공존은 우리의 이해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손가락 지시와 같은 행위의 성립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유일 공간의 전제를 세우는 셈이 된다. 또한 손가락 지시의 성립은 그것이 성립하는 공간 안에 의도의 주체뿐만 아니라 의도를 교감하는 상대의 존치를 전제한다. 의도라든지 교감이라는 일이 물리외적이든 아니든 그 일은 손가락 지시 상황의 요소로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손가락 지시는 손가락까지의 신체적 즉 물리적 변양을 통하여 지시의도의 교감을 구하는 일이다. 원천적으로 우리의 모든 의도는 물리적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물리적 매개를 초월하는 의도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다짐하려는 것은 손가락 지시가 성립하는 상황에서 그 조건으로서 의도와 의도의 교감이라는 일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손가락 지시의 대상도 의도와 의도의 교감이 일어나는 공간 안에 공존한다. 또한 당연히 그것은 손가락 지시가 전제하는 공간의 형식에 좇아 존재한다. 손가락 지시는 그 공간의 형식을 따라 작용하고 그렇게 작용하는 방향과 거리에서 대상과 마주쳐서 성립한다. 그러한 대상은 물리적 대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의도가 물리적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것과 모든 의도는 물리적 변양을 지향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종국적으로 의도를 교감하는 상대의 비물리적 상태의 변화를 구하는 경우에도 바로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에 매개된 물리적 변양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도가 작용하는 한계는 물리적 변양에서 그치고, 또한 우리의 의도는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도 자체가 비물리적인지의 여부는 말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물리적 변양을 겨냥하고, 그러한 변양이 상대의 비물리적 상태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와 물리적 변양과, 다시, 상대의 비물리적 상태의 변화가 한 줄로 이어지는 작용의 연쇄 속에 있다. 한마디로 물리적 변양과 비물리적 변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그것을 꼭 인과의 연쇄라고 보아야 할 이유도, 그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의도가 물리적 매개를 통하여 연결된다는 것이 손가락 지시 상황의 성립 조건임을 지적할 뿐이다.

우리는 의도와 물리적 변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관념론적 환원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연결은 이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특정의 존재론적 가정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아무런 강제를 느끼지 않는다. 손가락 지시 상황에서 전제되는 의도와 의도의 이해,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물리적 대상이 위치하는 단일한 공간은 그렇게 엮어져서 지시라는 하나의 일을 성취해낼 뿐 아무런 갈등과 모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도와 의도의 이해를 확인하여 손가락 지시의 성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손가락 지시의 성립에서 그 조건으로 그것들의 성립을 전제하는 것이다.

손가락 지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고구되어야 할 것은 단일한 공간 안에서의 방향과 거리의 조합이다. 손가락 지시의 방향으로 어디쯤에서 지시주체의 의도와 대상이 만나는가. 지시주체의 의도와 대상은 손가락 지시의 성취에서 비로소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주체에게는 손가락 지시 상황에 앞서 주어져 있고 지시는 주어져 있는 대상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겨냥해 보이는 즉 지시하는 의도를 교감하는 상대는 지시하는 방향의 어디쯤에서 대상을 구하는가. 시각을 달리하는 지시주체와 상대가 지시주체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시선을 가눌 수 있음은 그 둘이 동일한 형식을 가지는 단일한 공간 안에 병존해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같은 방향으로 도열하고 있는 대상들 어느 것이 지시의 대상인가는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손가락 지시 상황에서 지시의 방향과 거리는 어떻게 결합하는가.

그것은 손가락 지시 상황의 배경, 이른바 상황의 맥락이다. 방금 위에서 열거한 손가락 지시 상황의 성립을 위한 여러 조건에 보태어서 이 상황의 맥락이라는 배경이 주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지시주체가 가리키는 것이 상대가 새로 사 입은 옷인지, 그 옷 한가운데 눈에 띄게 달린 멋스런 단추인지는 그것이 결정해준다. 그것이 없이는 손가락 지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한 결정은 손가락 지시의 대상일 수 있는 것들의 배열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시주체의 의도와 의도를 교감하는 상대의 관심의 합일에서 주어진다. 지시의도의 배경이 되는 관심이 그 의도를 요소로 하는 상황의 배경이다. 즉 지시를 하게 되는 관심사의 이해가 손가락 지시 성립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지시의 의도와 지시 의도의 배경이 되는 관심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지시 의도는 지시를 한다는 의도이고, 상대로 하여금 지시주체의 손가락까지의 동작이 뜻 없는 신체 동작이 아니라 지시의 의도적 행위라는 것을 교감케 하는 것이다. 그 배경으로서의 관심은 왜 그렇게 의도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한 관심의 이해나 공유가 손가락 지시를 두고 그것이 옷을 겨냥하는지 옷 위의 단추를 겨냥하는지를 결정해준다. 그러나 지시의도와 관심은 하나의 지시주체가 수행하는 같은 속성의 일로서 연속되어 있다. 관심이 지시의도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의도와 관심이 같은 속성의 일로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만 동질적 연속에서도 그렇게 구분되는 단계와 단위이다. 그 점에서 오히려 의도의 교감이라는 막연한 영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관심에 대한 이해로써 진작될 수 있다.

우리의 의도가 물질적 변양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의 관심도 물질적 변양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관심은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인지하는 우리의 관심은 그 상황에 대처하거나 변양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물론 물리적 상황이다. 그러나 상황의 대처나 변양이라는 것은 지각적으로는 아직 현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손가락 지시의 성립 배경이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손가락으로는 지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손가락 지시 상황이 성립하는 배경이 되는 관심의 내용으로서 손가락 지시 상황에 개입한다. 우리가 지각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즉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없는 대상을 다루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손가락 지시의 배경을 이루는 관심의 이해나 공유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손가락 지시의 수행으로써 그 일을 성취해 있다.


3.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말로 나타낸다. 물론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는 것도 우리는 말로 나타낸다. 그 경우라면 우리는 손가락 지시와 말을 병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쓰이는 말이 이른바 지시사로서, '이것', '저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지시사는 손가락 지시 없이 순수한 언표로서도 사용된다. 그 경우에도 지시사는 손가락 지시가 성립하는 전제로서의 공간 도식을 언어적으로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지시사가 가지는 공간 도식의 언어적 함축은 세계와 언어라는 대립적 관계항의 공존이고 결합이다. 그것은 언어가 세계와 교통하는 유일한 접점이다.

'이것', '저것'과 같은 지시사는 문맥에 따라 그 지시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고정된 문맥에서는 단일한 대상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고유명사와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단칭지시사라 불러 좋겠다. '이것들', '저것들'은 대상개체들을 통칭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술을 제시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것들이라는 기술이 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다시 문맥에 따른 구분이 필요하다. 그러한 기술에 해당하는 복칭지시사는 당연히 지시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고, 대상개체들을 통칭하는 경우는 단칭명제의 연접이므로 단칭지시사와 다를 바가 없다.

한편, 고유명사는 지시사가 가지는 공간도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기호가 물리적 소재라는 점말고는, 세계와 아무런 연결의 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유명사로써 지시를 수행한다. 정말 그러하다면 언어적 지시의 본령은 거기에 있고, 거기 지시의 신비가 있다. 언어가 세계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언어가 세계를 지시하는 일의 기전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어가 세계와 자체로서 관계하는 것이다. 언어기호 자체가 물리적 대상인 만큼, 그것이 대상을 인과적으로 지시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언어적 관계가 아니다. 인과적 관계는 의미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하늘에 뜬 먹구름을 하나의 기호로 간주한다면, 그것이 소나기를 지시하는가. 그럴 수 없다. 지시관계는, 이제 구명할 것이지만, 지각적으로 현전하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고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계기라는 시간적 선후에서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세계에서 인과의 유무는 우리가 알 수 없더라도, 인과의 시간 형식은 지시관계의 시간 형식과 들어맞지 않는다. 지시관계의 두 관계항은 동시적으로 존립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지각이 그 수행에서 시간의 경과를 겪을지라도, 지시관계의 지각적 대상으로서의 두 관계항은 동시적 존립을 전제한다. 나아가서 물리적 대상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그 성립의 시간형식에서 지시관계와 서로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인계관계는 지시관계라는 의미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길은, 언어가 세계를 지시하는 일이 물리적 대상들 사이에 비물리적으로 개입하여 그것들을 관계짓는 일이라는 것이다. 의미관계의 하나로서 지시관계가 가능하다면 이 길을 통해서 만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인과관계를 넘어서서 언어와 세계가 관계하는 길은 무엇인가.


4.

앞서 우리는,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접점이 개체이고, 이 개체를 가려 말로 붙잡는 일이 지시라 하였다. 이제 지시하는 일을 감당하는 고유명사를 그냥 '이름'이라 하자. 그러면, 한 개체와 그 이름의 관계는

이름은 개체를 지시한다. (1)

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1)은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

개체는 이름으로 지시된다. (1)a
개체를 지시하는 것은 이름이다. (1)b

위의 세 문장 모두에서 개체는 이름의 대상이다. (1)a와 (1)b가 (1)과 다른 말이 아니다. (1)은 지시라는 관계와 그 관계항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말이므로, 그것들을 다 묶어 (1)로 대표시키자.
관계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이 사용되는 문맥 속에서, 지금과 같이 '지시한다'와 같은 관계어의 경우라면, (1)과 같은 문맥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지시한다는 일을 포함하는 (1)의 문맥 전체가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일을 위하여 (1)의 관계가 적용될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지구'는 지구를 지시한다. (2)

(2)의 사례를 두고 다음과 같이 약정하자. '지구'는 '지'와 '구'의 두 글자를 그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다음으로, 지구는 … 지구는 무엇이라 약정해야 하는가. (1)의 범형에 따라서 말하면 지구는 개체이겠다. 어떤 개체인가. 지금 필자의 눈앞에 있는데, 바로 이것인데, 이것을 필자는 이 글 안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지을 수밖에 없다.

'지구'는 지구의 이름이다. (3)

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3)이 (2)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1)로써 인정해야 한다.

이름은 개체를 지시한다 (1)

'지구'가 지구의 이름이라면, 이름은 개체를 지시하므로, '지구'는 지구를 지시한다. 거꾸로, '지구'가 지구를 지시한다면, 이름은 개체를 지시하므로, '지구'는 지구의 이름이다. 곧 (3)과 (2)는 동일하다. 그래서 (3)과 (2)는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둘 다 '지구'로써 지구를 이름지은 것이다. 즉 '지구'라는 두 글자로 지구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름짓는 일은 지시가 아니다. 그것은 명명이다. 이러한 연관에서 드러나는 것은,
'지구'는 지구를 지시한다. (2)

에서 지구는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디디고 사는 큰 땅덩이'라든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일정크기의 천체로서 태양에서 몇 번째 가까운 것'이라는 등의 기술이다. 따라서 (2)는 (1)의 지시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의 예로서 적절치 못하다.

이제,
이름은 개체를 지시한다. (1)

의 지시관계의 문맥을 제대로 나타내는 예가 되자면, 개체의 자리에 오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는 명시적 표지를 달고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이 지시의 진정한 대상이라는 표지를 달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요구를 담아 이 글에서는 (1)의 지시관계를 분석하는 합당한 예로서

'지구'는 대상-지구를 지시한다. (4)

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대상-지구'라는 표기는 그것이 어떠한 기술적 내용도 담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실제의 지구, 즉 물리적 지구를 대신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규정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표기로써 이제 지시관계를 분석해보자.


5.

'A'가 대상-A를 지시한다는 것은 그 둘이 1대1로 대응하여 짝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대상-A를 지시하는 것이 'A' 말고도 따로 더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지구'는 대상-지구를 지시한다, 즉 그것과 대응하여 짝이 된다. 또한 'Earth'도 대상-지구를 지시한다. 다시, '지구'가 대상-Earth를 지시하고 'Earth'도 대상-Earth를 지시한다면, 대상-지구는 대상-Earth와 동일하다. 즉 하나로서 같다. 이 상황은 '대상-지구는 대상-Earth이다'라고 언표될 수 있다. 이름이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이 1대1로 대응하여 짝이 된다는 것은 한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단 하나 있다는 것이고, 그 조건은 이 예에서라면 방금 말한 '대상-지구는 대상-Earth이다'라는 동일명제에서 잘 지켜지고 있다. 여기서 대상은 지시대상인데, 지시대상은 이미 있어서 대상이고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지시되는 대상으로서 물리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가 대상-A를 지시한다'라고 할 때 지시되는 것은 여럿이 아니라 단 하나이다. 이것을 지시의 대응조건이라 해보자.

지시의 대응조건에서 보면 예컨대, ''행성'은 대상-행성을 지시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시되는 대상-행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행성'은 대상-수성, 대상-금성, 대상-지구, …, 대상-해왕성을 지시한다'라고 하는 경우에서는 대상이 단일하지 않다. 대상-수성, 대상-금성, 대상-지구, …, 대상-해왕성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달리, ''행성'은 대상-지구를 지시한다'라고 한다면, '행성'은 대상-금성을 지시한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둘이 같이 성립하자면, '대상-지구는 대상-금성이다'가 동일명제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도 ''행성'은 대상-행성을 지시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대상-행성이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떤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감각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태양 주위를 도는 일정 크기 이상의 천체'라는 개념으로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즉 개념적 대상도 지시의 대상이 된다고 하고, 대상-행성이 개념적 대상이라면 사정은 어떻게 되는가. 다른 예로 다루어보자.

예컨대 ''삼각형'은 대상-삼각형을 지시한다'라고 말해보자 또는, ''△'은 대상-삼각형을 지시한다'라고 말해보자. 여기서 대상-삼각형이란 굳이 대상이란 용어를 써서 말하는 개념적 대상이다. 이 입장은, '도무지 삼각형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있다'는 대답이고, '개념으로서 있다'는 대답이다. 그러면 그 말은, '개념이다'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이다'라는 말은 잘 이해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개념으로서 있다'라는 것은 '이러저러한 것으로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것이다'에 그치지 않고 '이러저러하게 있다'라고 말하자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다시 말해서, '삼각형이다'에 머물지 않고 '삼각형으로 있다'라고 하면 사정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제 사정이 선명해진다. '삼각형으로 있다'라는 말은 '삼각형인 것이 있다'는 것이고, 곧 '무언가가 삼각형이다'라는 것이다. 이로써 개념은 대상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개념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기술이다. 따라서 대상이 지시대상인 한 개념적 대상이라는 말은 잘못된, 잘못 결합된 말이다. 대상-삼각형은 있지 않다, 즉 없다.

이제 앞서의 예, ''행성'은 대상-행성을 지시한다'라는 말로 돌아가면, 개념적 대상으로서의 대상-행성은 없다. 따라서 '행성'은 그것을 지시할 수 없다. 결과로 '행성'은 기실 이름이 아니다. 행성은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개념-행성이다. 그러나 개념은 기술이므로 '개념-행성'이라기보다는 '기술-행성'이라 해야 오해의 소지가 없다.

행성, 삼각형 등을 우리는 보통 개념이라고 말한다. 보편논쟁 이래로 개념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문제들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개념(concetpt)이라는 용어는 관념, 이데아, 형상, 사유 등의 말과 연루되어 계속 존재론적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수많은 연관이 착종된 말을 굳이 써야할 이유가 없다. 개념에 대한 오해의 핵심은 그것이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개념과 대상의 구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곧 기술(description)이라는 것이 분명한 만큼, 다소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으로 '개념'이라는 말 자체를 '기술'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불편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행성이다. (5)

에서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기술로서 술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 이러저러한 것이다. (6)

에서 '행성'은 주어로 쓰이고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것을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어서 그것을 또한 기술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 점에서 존재론적 오해가 야기되었다는 것이고 그 관례는 고쳐져야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술어로 쓰이는 기술을 빈술이라 하고, 빈술로 완성된 문장을 두고 보통 그러하듯이 서술문이라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5)와 (6)은 모두 서술문이다.



6.

존재론의 문제로 말하자면, 이름과 그 지시대상은 존재론적 지위가 같아야 한다. 앞서 다룬 손가락 지시에서 보자면, 신체적 변용으로서의 지시는 그 대상 또한 물리적이다. 그런 사정이 이름이나 지시사라는 지시어의 경우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지시주체의 의도와 지시상대의 교감은 이름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이고 그 매개는 물리적 대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즉 이름은 물리적 기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공기의 진동을 기호로 하는 말이나 잉크자국의 배열을 기호로 하는 글이 모두 물리적 대상이다. 점자는 물론이고, 시각이나 청각 또는 신체의 어떠한 기능을 대신하는 기구도 지시주체나 지시상대에게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기호를 산출하고 또 물리적 대상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그러한 기호로 지시되는 대상도 또한, 지시대상이라는 그 점에서, 물리적 대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면 기술할 수는 있으되 가리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연관은 지시의 대응조건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고 그 조건이 가지는 함의의 하나이다. 이점에서 지시관계의 대상을 말하면서 그 존재론적 지위에 혼란은 있을 수 없다.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일의 결과는 문장을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지시로써 우리는 세계와 접촉했을 뿐, 아직 우리는 세계를 기술하지는 않았다. 지시로서는 아직 우리는 세계에 대한 사유를 구성하지 않았다. 앞서의 문장 (1), (2), (3), (4)는 지시가 아니라 지시의 문맥적 정의이다. 우리가 지시사로나 이름으로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빈술에까지 나아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유를 구성한다. 사유가 성립하기 전에 그 조건으로 우리 자신이 먼저 있어야 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이 글의 범위 밖에 있다.

한편, 빈술에서 대상이라 할 때는 상당한 유의가 필요하다. 빈술에서 그 대상이 지시사나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일 때는 물론 물리적 대상이다. 빈술의 대상이 기술일 때는 말할 것 없이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빈술과 그 대상은 존재론적 지위의 관계가 일관되지 않는다.



7.

지시관계의 고구에서 마지막으로 그 형식적 연관을 정돈해보자.
지시는 반재귀적 관계이다. 이름이 지시하는 것이 자기 자신일 수 없다. 어떤 기호 'A'는 스스로는 'A'이지만 'A' 자신을 지시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지구'는 대상-지구에 대한 지시일 수 있지만 자신인 '지구'에 대한 지시일 수 없다. 그러나 기술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예컨대' 아래서 행 중간에 쓰여진 어구'

라는 기술은 자신에 대한 기술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지시가 아니다. 왜냐하면, 방금 본대로, 어떤 기호도 자신에 대한 지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장단위의 역설에까지 갈 것도 없이 먼저 기술이 자신에 대한 기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론 상의 문제가 야기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시관계는 반대칭적이다. 이름이 지시하는 것은 다시 그 이름을 지시할 수 없다. 'A'가 대상-A를 지시한다면, 대상-A는 다시 'A'를 지시할 수 없다. 다시 같은 예를 들어, '지구'가 대상-지구를 지시한다고 먼저 전제하면, 대상-지구가 다시 역으로 '지구'를 지시할 수 없다. 1대1로 대응하여 짝이 되는 관계 중에는 물론 대칭적 관계는 허다히 있겠으나, 지시관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지시는 반이행적 관계이다. 'A'가 지시하는 대상-A를 다시 기호로 사용할 수는 있다. 대상-A가 물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 'A'가 그것을 지시할 수는 없다. 'A'는 대상-A를 지시한다면 다른 대상을 더 지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가 대상-지구를 지시하고 대상-지구를 기호로 삼아 무언가를 지시한다고 해도, '지구'가 지시할 수 있는 것은 1대1의 대응에 따라 달리 또 있을 수 없다.

지시관계의 형식적 연관이 기술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시에 근접에 있으면서 그것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기술에 대한 이해는 역으로 지시 자체에 대한 이해를 진작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 글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니다.



8.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지시의 정의를 구하면, 지시란 지시주체의 의도, 그 의도를 교감하는 지시상대, 물리적 변양으로 지시기호를 산출하는 의도의 작용, 그러한 물리적 기호에 대응하여 짝지어지는 지각적 지시대상,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병존시키는 단일한 공간, 마지막으로, 지시상황의 배경이 되는 맥락으로서 지시를 필요로 하는 관심의 교감을 조건으로 성립하는 의미관계이다. 이 지시관계에는 지각적으로 명시적인 4개의 관계항, 즉 지시주체, 지시상대, 지시기호, 및 지시대상이 개입한다. 따라서 지시는 4항관계이고 '지시한다'는 말은 반재귀적이고 반대칭적이며 반이행적인 4항관계빈술어이다.

지시조건을 이와 같이 정돈하는 중에 지시와 기술은 대비되고 구분되었다. 말을 이해한다는 일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인데, 존재와 사유와 언어를 엮는 의미관계의 단초로서 우리는 지시와 기술 또는 빈술의 연관을 구분하여 가진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시조건은 존재론적 가정의 도입을 회피하여 정돈된 것, 즉 지시상황의 성립으로부터 그 조건을 정돈한 것이지만, 그러한 조건을 모두 아우르는 특정의 존재론적 가정이 성립한다면, 우리가 그 가정을 회피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관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 이해를 얻기 전에 특정의 존재론적 가정의 도입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의미관계의 이해를 구하는 이러한 논의가 이어지는 중에 만약 그러한 가정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은 또다른 새로운 논의거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