私的 言語와 意味
강 진 호 서울대 철학
1. 머리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243에서 사적언어(private language)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체험들 - 자신의 느낌, 기분, 등등- 을 사적인 사용을 위해 기입하거나 발언할수 있을 언어를 생각할수도 있을까? - 글쎄, 우리는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 그러나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언어의 단어들은 오직 말하는 사람만이 알수 있는 것을 지시하여야 한다; 즉 자신의 직접적인 사적 감각들을.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이해할수 없다.
곧이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나아가면서, 그는 그러한 사적언어가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가지 상이한 해석과 평가가 있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의 가능성 속에서 과연 사적언어논변의 진정한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해보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사적언어의 문제를 의미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고찰하였다. 사적언어의 문제는 결국 의미의 문제로 귀착되며, 따라서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의 핵심을 파악할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될수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의미에 관한 그의 일반적 고찰을 사적감각을 지시한다고 상정되는 언어에 적용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의미,사용,이해,규칙준수
2.1. 의미, 사용, 이해, 규칙준수의 상호관련성과 그 문제점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에는, 의미 이외에도 세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사용, 이해, 규칙준수라는 개념들이다. 우리는 의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 이들 개념들을 상호연관적으로 파악하여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대개의 경우, 단어의 의미는 언어속에서의 그것의 사용(쓰임)이다. 그의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단어의 의미는 곧 언어놀이(language game)속에서의 그 단어의 사용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그가 언어를 놀이에 비유하는 것은 언어와 놀이 사이의 두가지 공통점 때문이다. 첫째, 놀이들 모두에 공통된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없고 그들 사이에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만이 존재하듯이, 우리의 다양한 언어놀이들도 가족 유사성만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놀이가 규칙에 의해서 진행되듯이, 우리의 언어놀이도 규칙에 의해서 진행된다. 우리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각 단어들은 그것들이 언어놀이속에서 사용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어놀이속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의 사용규칙을 준수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규칙준수에 대한 논의가 왜 의미에 대한 논의에서 필요한지를 알수 있다.
한편, 의미가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대개 어떤 정신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때 더욱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단어를 듣거나 말할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다;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단숨에 파악하며, 이렇게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시간속에서 늘어져있는 '사용(쓰임)'과 분명히 다른것이지 않은가!
즉,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되는 것 같다: 우리는 단어를 그냥 사용하지 않는다. 단어를 사용할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단어의 모든 사용은 그러한 이해에서, 의미의 파악에서 따라나온다. 그러므로 단어의 의미, 단어를 말함으로써 무엇을 의미하는 것, 단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등은 모두 어떤 정신적인 활동이나 정신적인 상태로 보이며, 따라서 단어의 의미가 이러한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의 결과인 사용과 동일시될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단어의 의미가 곧 그것의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반론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우리들의 잘못된 그림(Bild)을 깨뜨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한 그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즉 그에 따르면,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어떤 정신적 상태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부터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왜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2.2. 규칙준수의 역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교사가 산술을 전혀 모르는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주면 0에서부터 시작하여 2씩 더해갈수 있게끔 가르치려고 한다. 그는 먼저 학생이 기본적인 수를 익히도록 '0'부터 '9'까지를 적어서 그것을 차례대로 암송시키고, 그 다음에는 수를 1씩 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처음에 그 학생은 자주 틀린다. (예를 들어 '69'다음에 '80'을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러나 반복된 훈련을 통해 그는 수열을 틀리지 않고 올바로 쓰게끔 된다. 이제 교사는 그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배울 준비가 됐다고 판단하고 학생에게 이 규칙을 가르친다. 그는 다시 학생에게, 설명을 하고,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12다음에는 14, 58다음에는 60...등등), 테스트를 한다. 학생이 1000까지의 수에 대한 테스트를 교사가 만족할정도로 수행하였다. 교사는 이제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이상에서 실행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학생은 '1004, 1008, 1012'...를 쓴다.
우리는 그에게 말한다: "자네가 무엇을 해놓았는지 좀 보게나!" - 그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한다: "나는 자네보고 2씩 더하라는 의미였네: 자네가 수열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게!" - 그는 대답한다: "예, 이게 맞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제가 이렇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 혹은 그가 수열을 가리키면서 "하지만 저는 똑같은 식으로 계속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 이제 "하지만 자네는 이걸 볼수 없나?"라고 말하면서 예전의 예과 설명들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에게는 마치 우리가 "1000까지는 2씩 더하고 2000까지는 4씩 더하고 3000까지는 6씩...등등의 식으로 더하라."는 명령을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설명과 명령을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이 그것의 모든 적용을 결정할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규칙을 모르는 이에게 있어서 물론 그것은 단순한 기호일뿐이다. 이제 우리가 그러한 이에게 그 규칙을 준수할수 있게끔 가르치려한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는, 이 때 우리가 규칙에 맞는 것으로써 제시해줄수 있는 사례들은 유한할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규칙이 적용될수 있는 사례는 무한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시한 사례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한편으로 제시하지 않은 다른 사례들은 만족시키지 않게끔 규칙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이 우리가 가르치려고 하는 규칙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우리가 볼때) 비표준적인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그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 방식은 우리가 제시한 사례들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규칙을 좀더 자세하게 만들어주면 될 것 아닌가? 위의 예에서, 만약 교사가 "2씩 더하라"고만 말하지 말고 "모든 수에 대해 다음수로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써라."라고 말해줬다면 그 학생은 위와 같은 반응을 안 보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규칙을 좀더 기본적인 규칙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본적 규칙에 호소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다. 어떠한 기본적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준수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서 학생이 그 규칙을 준수할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기본적 규칙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문제는 똑같이 발생할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 학생이 '모든 수에 대해 다음수로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써라'는 규칙에서, '2만큼 더 큰 수'란 개념 역시 다음과 같이 비 표준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보자.
'2만큼 더 큰수'는
① 1000미만의 수에 대해서는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지시하고
② 1000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그 수보다 4만큼 더 큰 수를 지시한다.
이러한 해석하에서라면 그 학생은 여전히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즉 어떠한 규칙을 아무리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규칙은 비표준적으로 해석가능하다. 그러므로 또 다른 규칙에 호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를 인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어떠한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의 과정을 규칙과 일치되도록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크립키(Kripke)가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역설, 혹은 규칙준수의 역설이다.
이러한 규칙준수의 역설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첫번째로, 이미 2.1의 논의에서 보았던것처럼 언어의 의미와 규칙준수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규칙준수의 역설은 산술의 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모든 개념들에 적용된다. 단어 '빨강'의 예를 들어보자. A가 B에게 '빨강'이란 단어를 가르치고 있다. A는 B에게 빨간 옷, 빨간 구두, 빨간 집등을 보여주면서 "이것들의 색을 우리는 '빨강'이라고 말한다."고 가르친다. A는 B에게 몇가지 사물들을 보여주고 그 중에서 빨간색을 가진 사물들을 골라내게끔 한다. B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제 A는 B가 '빨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A가 B에게 파란색 책의 색깔을 물었을때 B가 "빨강"이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물론 A는 B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B는 '빨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우리가
'빨강'은 ① 책의 색깔을 가리킬때에는 파란색을 지시하고
② 그 외의 사물의 색깔을 가리킬때에는 빨간색을 지시한다.
라는 규칙을 해석하는 식으로 해석했다고 해보자. 이때 A는 B의 대답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우리는 '책상','빠르게','그리고'등등의 모든 단어들에 대해서도 위와 비슷한 사례를 만들어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사례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언어의 사용규칙은 붕괴된다. 우리는 어떠한 단어에 대해서도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용할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규칙준수의 역설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산술의 예에서, 비록 상대방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지 못하지만 최소한 나는 그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역시 유한한 사례를 통해서 규칙을 배웠다. 그러므로 설령 내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실은 나도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0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적용해본적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10000에 2를 더하면 10004가 된다."라고 말할때,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라도 가지고 있는가? 10000에 2를 더하면 정말 10004일지도 모른다.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나만큼은 확실히 안다는 우리의 생각은 실은 아무런 정당화의 근거도 찾아볼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번째,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최소한 우리가 경험해본 사례들에 대해서는 규칙준수에 대해 의미있게 말할수 있는 것처럼 논의를 전개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유한한 사례'라는 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제 규칙준수의 역설은 모든 사례들, 규칙의 모든 적용들에 대해 성립된다. 다시 산술의 예로 돌아가보자. 교사는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까지 가르쳤다. 학생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제 교사는 다시 0에서부터 "2씩 더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학생이 '0,3,6,9'...을 썼다고 하자. 교사는 그가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할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학생은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우리가 '1994년 9월 3일 3시 이전에는 2씩 더하고 1994년 9월 3일 3시 이후에는 3씩 더하라'는 규칙을 준수하는 식으로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그때가 마침 1994년 9월3일 3시 이후였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학생은 자기 나름의 해석대로 정당하게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학생의 이러한 규칙준수 방식에 대해 교사가 틀렸다고 말할 어떤 근거가 있을수 있을까? 학생이 어떠한 규칙에 대해 어떠한 식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학생이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수 없다. 그 규칙에 대한 어떤 해석하에서 그의 행동은 여전히 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수 있는가? 규칙만으로는 규칙준수의 방식을 결정못해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언어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에도 적용된다면, 우리가 어떤 단어를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최소한 나 자신만은 그러한 정당화에 해당되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나도 내가 왜 이 단어를 이러한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 나는 그냥 그런식으로 그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어떠한 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용방식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에 맞게 해석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용할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어떠한 식으로도 사용될수 있다면,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언어의 의미가 없다면, 언어는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규칙준수의 역설이 옳다면, 언어는 불가능하다.
2.3. 역설에 대한 일반적 대안과 그 비판
2.3.1. 대안 - 규칙준수는 의미와 이해라는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규칙준수의 역설을 해결할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명백히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규칙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 규칙의 의미이다.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는 이미 '1000다음에 '1002'를 쓰라고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생이 '1000'다음에 '1004'를 썼다면, 그것은 교사가 의미한 것과 어긋나는 것이므로 교사는 학생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규칙을 준수할때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학생이 그 규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규칙을 준수하는 학생의 모든 행위는 그러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교사가 "2씩 더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때 이미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위의 학생이 그러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것은 그가 아직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가 학생에 대해서 규칙준수의 모든 사례를 가르칠수 없다는 점은 옳다. 그러나 학생은 그러한 유한한 사례를 통해서 무한한 사례에 적용할수 있도록 그 규칙을 이해할수 있다. 결국 규칙을 가르치고 그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견해(이를 견해 I라 하자.)이며, 비트겐슈타인 또한 견해 I를 인정한다. 그러나 견해 I를 인정하자마자, 곧이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정신적 상태나 활동이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이미 그는 '1000'다음에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했다."라는 말이나 "학생이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인정해야 되지 않는가?
규칙 '2씩 더하라'에 대한 교사의 의미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를 모두 결정해 줄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
교사가 규칙 '2씩 더하라'를 의미함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를 결정해주는 정신적 활동이 일어남.
규칙 '2씩 더하라'에 대한 학생의 이해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가따라나오는 정신적 상태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등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2.3.2. 비판 1 - 의미함은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다.
먼저 의미함에 대해서 논의해보겠다. 의미함을 정신적 활동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가정과 견해 I에 의해, 교사가 "2씩 더하라"고 말했을때 그는 이미 "'1000'다음에는 '1002'를 써라."는 것에 해당하는 어떤 정신적 활동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신적 활동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들을 모두 결정해주려면, 교사에게는 "'1000'다음에 '1002'를 써라"는 정신적 활동 이외에도 "'1004'다음에는 '1006'을 쓰고,'1006'다음에는 '1008'을 쓰고...'100034'다음에는 '100036'을 쓰고..." 등등에 해당하는 정신적 활동이 모두 벌어졌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이는 불합리하다. 유한한 순간동안 일어난 정신적 활동이 무한한 사례들을 포함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미함이 정신적 활동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교사가 그러한 무한한 사례에 해당하는 정신적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 아니라, 가령 "모든 수 다음에 그 수보다 2만큼 큰 수를 써라"는 것을 의미했다는, 그러한 정신적 활동을 벌였다는 뜻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어떤 규칙을 보다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규칙준수의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모든 수 다음에 그 수보다 2만큼 큰 수를 써라'는 규칙에 대응하는 어떤 정신적 활동으로 전환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후자의 정신적 활동이 전자의 언어적 표현의 사용의 무한한 예를 어떻게 결정할수 있을지는 다시 설명할수 없는 것으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박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미함을 정신적 활동으로 가정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정신적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2씩 더하라'는 규칙의 모든 적용사례들을 결정해줄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에게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는 정신적 활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견해 I, 즉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고 의미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정신적 활동이 일어남'과 '의미함'은 전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미함은 정신적 활동과 동일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2.3.3. 비판 2 - 이해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이제 이해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이해를 정신적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이해에 대해서는 의미를 정신적 활동으로 보았을때 발생되는 것과 같은 난점은 발생되지 않는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의 학생이 규칙 '2씩 더하라'를 준수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그러한 정신적 상태에 있다고 가정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아래와 같은 난점을 피할수 없다.
먼저 이해를 기쁨이나 고통과 같이 어떤 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그냥 낯선 언어를 들을때와는 달리 익숙한 언어를 이해하면서 듣고 있을때 우리가 느끼는 어떤 정신적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견해는 매우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는 기쁨이나 고통과 같은 정신적 상태와는 다르다. 기쁨이나 고통은 의식될수있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령, "나는 하루종일 기뻤다."라든지, "그는 밤새도록 고통스러워했다."와 같이 말할수 있다. 물론 우리는 '2씩 더하라'와 같은 규칙에 대해서도, "그 학생은 이미 어제부터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규칙 '2씩 더하라'의 이해에 해당되는, 우리가 의식할수있는 어떤 지속적인 정신적 상태가 있는가?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러한 정신적 상태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해를 어떤 의식될수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할때 그러한 의식적인 정신적 상태는 늘 순간적이고 곧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머에 빠지게 된다. 이해라는 것이 늘 그렇게 순간적인 정신적 상태라면 우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동안이나 이해하고 있다고 볼수 있는가? 이해한 그 순간만? 혹은 그 규칙을 듣거나 보았을때에만? 그렇다면 평소에 나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내가 일단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면 평소에도 나는 분명히 그 규칙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해에 대응하는, 어떤 의식될수있는 정신적 상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그러므로 이해는 의식될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해를 무의식적이고 내성에 의해서는 파악할수 없는 어떤 정신적 상태로 본다면 어떨까?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역시 문제가 있다. 앞서 논의했던 규칙준수의 예로 다시 돌아가서 그 이유를 알아보자. '2씩 더하라'는 규칙을 가르치던 교사는 그가 0에서부터 규칙에 맞게 계속 수를 써 나아가자, 적당한 시점에서 (이 예에서는 1000까지) "이제 그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000이상의 수에서 테스트해본 결과 그 학생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학생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사는 테스트를 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스트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학생이 '3000'까지 제대로 썼을 때? 혹은 '4068'까지 제대로 썼을때? 우리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가 올바르게 쓴 숫자들중 2000번째 숫자부터 그는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한 것이다."와 같이 자의적인 규정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러한 물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이해가 무의식적이고 내성에 의해 파악될수 없는 어떤 정신적 상태라면, 우리는 그 학생이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한 때가, 그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를 산출할수 있게끔 하는 어떤 정신적인 상태가 생겨난 바로 그때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가? 그 학생이 규칙을 준수할수 있기 시작했을때의 변화는 그의 행동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정신적 메커니즘의 변화와는 독립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어떤 의식될수 없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이해가 어떠한 정신적 상태와도 동일시 될수 없음을 알수 있다.
2.3.4.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새로운 환상
그러나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분명히 정신적 상태나 활동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쉽게 포기할수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마음이라는 어떤 비물질적인 존재를, 그리고 마음의 신비스러운 작용으로서의 의미(의미함)과 이해라는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를 가정하게 된다.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의미했을때 그의 마음은 물리적인 방식이 아닌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할 모든 단계를 이미 다 밟아갔다. 즉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의 적용사례들을 직접 쓰거나 말하기 전에, 모든 사례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은 규칙을 단숨에 이해하여, 그 모든 적용사례들을 미리 파악한다. 규칙의 무한한 적용사례들은 마음속에 물리적인 방식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미 들어가 있다. 마음이라는 비물질적 존재가 이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심신이원론이 이미 더 이상 매력적인 대안이 아닌 오늘날의 상황에서, 마음의 존재를, 더구나 마음의 그런 신비한 능력을 가정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의미함)나 이해가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이라는 주장을 유지하면서 위와 같은 난점을 피할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규칙준수의 역설을 해결할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는 이 대안이, 규칙준수의 역설을 풀기 위해 답변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술의 규칙준수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의 문제이다: 규칙 '2씩 더하라'는 단순히 "'1000'다음에는 '1002'를 써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의미(의미함)나 이해가 단지 어떤 물리적(신경생리적)인 것의 구조나 활동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필연성에 대해 말할수 없다. 우리가 기껏 말할수 있는 것은, "이러이러한 물리적(신경생리적)구조가 갖추어지면 그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쓸것이다."라는 예측 뿐이다. 그러나 "1000에 2를 더하면 1002가 된다."는 것은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와 같은 경험적 예측과는 분명히 다르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산술의 규칙이 가지고 있는 그 필연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분명히 물리적인 것에서 유래할수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산술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마음의 신비스러운 작용일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매우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규칙준수의 역설을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라는 가정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하였던 우리의 노력은, 그러한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가 마음이라는 신비한 존재의 신비한 작용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수 없을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역설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던 우리는 다시 역설속으로 빠져들고 만것이다.
2.4. 역설에 대한 답변
이 모든 역설과 난점에 빠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의미(의미함)와 이해를 정신적인 상태나 활동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어떻게 해결될수 있는가? 또한 위의 논의가 올바르다면,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무엇인가?
규칙준수의 역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역설이었다: 어떠한 행위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과정을 규칙과 일치되도록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모든 것을 규칙과 일치시킬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규칙과 충돌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치도 충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답변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의 답변처럼, 어떠한 행위도 규칙과 충돌하는것과 동시에 규칙과 일치시킬수 있다면 규칙에 대한 일치나 충돌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규칙준수의 역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준수라는 개념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답변이 옳다면, 규칙을 준수한다든지 준수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점에 있었던 것 아닌가?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일종의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는 일치도 충돌도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이 말을 통해 그는 규칙에 대한 일치와 충돌을 논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가정하는 한에서는 그러한 불합리한 결론이 나올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이 규칙준수의 역설에 대한 답변 역시 불합리함을 보임으로써, 근본적으로 역설이 제기된 논의의 틀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거부하는 틀이란 무엇인가? 위의 답변에 이어 계속되는 그의 언급을 보자.
여기서 하나의 오해가 있었다는 점이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우리가 사고의 과정에서 한 해석에 잇달아 다른 해석을 주었다는 사실로부터 보여질수 있다. 마치 각각의 해석들이, 우리가 한 해석뒤에 있는 다른 해석을 생각할때까지는, 우리를 적어도 잠시동안은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해석이 아니라, 실제의 경우들에서 우리가 "규칙을 준수함"과 "규칙에 反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보여지는, 규칙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규칙에 따르는 모든 행위는 해석이다라고.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해석'이란 용어를 규칙의 한 표현에 대한 다른 표현에로의 대치로 제한시켜야 할 것이다.
규칙을 해석함으로써 규칙을 준수한다고 가정한 것이 우리 오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준수할때, 그가 그 규칙을 '1000까지는 2씩 더하고 2000까지는 4씩 더하고 등등'...으로 해석하고 난 다음에 규칙을 준수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규칙을 그러한 해석의 방식을 통해 파악하지 않으며, 규칙을 파악하는 해석이 아닌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2.2에서 규칙을 좀더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았다. 또한 2.3에서 규칙을 그것에 대응되는 어떤 정신적 상태나 활동으로 환원시킨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음을 보았다. 규칙을 또 다른 기본적인 규칙이나 어떤 정신적 상태내지 활동으로 환원하는 것은 규칙을 다시 해석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내린 우리들의 결론을 다시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규칙을 파악하는, 해석이 아닌 방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가?
2.4.1. 규칙준수, 관습, 공동체, 행위.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훈련(training)을 받음으로써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배운다. 여기서 그가 '훈련'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규칙준수를 배우는 것이 어떤 이성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 '→'라는 기호가 있다고 해보자. 나는 이 기호에 대해서 그것이 오른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 기호가 왜 왼쪽이나 위쪽이 아니라 오른쪽을 가리켜야하는지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는 없다. 나는 그냥 그러한 기호가 오른쪽을 가리킨다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규칙준수를 단지 훈련이라는 자극과 훈련에 대한 반응의 관계로서만 記述한다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여전히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자극-반응 관계는 개별적 사례들의 경험적인 결과들에 근거한다. 즉 자극 A가 반응 B를 야기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극 A를 주었을때마다 반응B가 이루어진다는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한 경험적 인과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역설의 예에서,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어떠한 훈련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매번 학생이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행위를 보인다면, 우리는 그 학생의 답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할수 밖에 없다. 규칙준수가 자극-반응관계의 규칙성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라면, 교사의 훈련에 대해 학생이 규칙적으로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반응을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점은,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는 단순한 규칙성(regularity)을 넘어서, 규범성(normativity)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규칙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준수되어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준수되어서는 안된다.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준수한다면 그는 '1000' 다음에는 '1002'를 써야지 '1004'를 쓰면 안된다. 규칙준수의 본질은 이러한 규범성에 있는 것이다. 이 규범성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어떤 규칙의 표현 - 가령 표지판 - 은 나의 행위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 여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연관이 있는가? - 글쎄, 아마도 다음과 같은 연관일 것이다: 나는 그 기호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 기호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과적 연관만을 줄뿐이다. 즉 우리가 지금 그 표지판에 의해 가는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줄뿐, 이 표지판에-의해-가는것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점, 즉 표지판들에 대한 규칙적인 사용, 다시 말해 관습이 존재하는한에서만 어떤 사람은 표지판에 의해 갈수 있다는 점을 보였다.
규칙을 준수하는 것, 보고문을 작성하는 것, 명령을 내리는 것, 체스게임을 하는 것등은 관습(사용,제도)이다.
위의 언급들이 규칙준수의 규범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이다. 그에 따르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바로 관습이요 제도라는 것이다. 나는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서 '1000'다음에 '1004'를 쓸수도 있다. 그 규칙에 의해 '1000'다음에는 반드시 '1002'를 써야 한다는 어떤 초월적 정당성과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그런 식으로 준수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해서는 '1000'다음에 '1002'를 써야 한다는 것이 이미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규칙준수의 규범성은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에 지적한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 역시, 규칙준수가 이미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규칙준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을 준수하는 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에의 호소는 다음과 같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착될수 있으려면, 규칙을 어떻게 준수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먼저 공동체의 일치(agreement)가 있어야 한다. 이때 공동체는 무엇을 일치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다른 관습을? 그러나 관습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관습에 호소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읜 주장은 무한 퇴행에 빠지게 된다. 아니면 공동체의 다수가 가지는 의견을?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哲學史에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주장, 소위 진리규약설이라고 불리는 주장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규약설이 옳지 않다는 강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진리와 다수의 의견은 범주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떻게 진리가 다수의 의견에 의해 결정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준수에 대한 공동체의 일치가 관습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다수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들간의 일치가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인 것이다.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여기서 그는 의견과 삶의 형식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일치를 가리킨다. 아무도,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려면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내놓거나 토론해본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의 과정에 있어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는 수많은 규칙을 준수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고, 그러한 훈련을 통하여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규칙에 대해서도 공동체가 그것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그 규칙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학생은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것이 옳은 답이라고 끝까지 주장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주장을 끝까지 견지한다면, 즉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1000'다음에는 끝까지 '1004'를 쓴다면, 그는 학교에서 산수시험을 볼수 없을 것이며,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받아오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용돈을 제대로 관리할수 없을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는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과는 다른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이들이 규칙을 준수하는 방식을, 다른이들이 행위에서 일치하고 있는 그 방식을 따라야만 한다. 결국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착될수 있는 이유는 규칙을 준수하는 공동체가, 행위에 있어서의 일치,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일치,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보이고 있음으로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설사 의견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서의 일치에 의해 규칙준수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와 공동체의 일치를 구분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1000에다가 2를 더하면 1002가 된다는 수학적 진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그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수학의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거나 알지못하는 것과는 독립적인 것이오!" - 물론, "사람들은 2곱하기 2가 4라고 믿는다."라는 명제와 "2곱하기 2는 4이다."라는 명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모든 사람들이 2곱하기 2는 5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4일 것이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될것이란 말인가? - 글쎄, 나는,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다른 연산법, 말하자면 우리가 '계산'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다른 기법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것인가? (대관식은 틀린 것인가? 우리와 다른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극단적으로 기이하게 보일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의 각 성원들의 행위에 있어서의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가능성의 근거는, 우리가 규칙준수의 훈련에 대해서 대부분 비슷한 자연적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우리가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훈련에 대해 제각기 서로 다른 반응들을, 가령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A는 '1000'다음에 '1002'를 쓰고, B는 '1000'다음에 '1008'를 쓰고, C는 '1000'다음에 '1001'을 쓰는,..등등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은 이루어질수 없을 것이며, 아니 애당초 그 규칙에 대한 준수가 관습으로 정해질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훈련에 대해 우리들은 거의 모두 비슷한 반응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의 비슷함을 통해 공동체는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에서의 일치를 이루어낼수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그렇게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싶어할 것이다. 의학, 신경생리학, 유전학등의 발달은 규칙준수의 훈련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비슷함을 혹시 설명해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속의 우리의 행동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일어난 것을 '원초적-현상'으로 보아야 하는 곳에서 설명을 추구하는데에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이 언어놀이가 행해지고 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 곳에서.
우리의 탐구 영역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듯한 위의 언급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설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그 설명의 근거를 물어볼수 있다. 그러나 설명은 무한히 지속될수는 없으며 어디에선가 끝이 나야 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그 끝이 바로 언어놀이에 있어서의 우리의 행위이다. 우리의 모든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도 실은 바로 이 언어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사실, 의미(의미함)와 이해(이해함)가 정신적상태나 활동이 아니라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이미 암묵적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신적 상태나 활동에 대한 가정은, 또한 동시에 언어놀이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행위(=규칙을 준수하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틀이 될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가장 그럴듯한 설명의 틀을 무너뜨림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에서의 우리의 행위를 원초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이 설득력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국, 우리의 모든 삶과 모든 탐구의 토대는 바로 언어놀이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쓴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2.4.2.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답변과 사적언어의 불가능성
이제 의미(의미함)와 이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변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경우에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할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교사는 '2씩 더하라'는 규칙으로서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했다."라는 문장에서, 또 "학생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했다."라는 문장에서, '의미했다'라든지 '이해했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의미함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으로 '1000'다음에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가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규칙을 가르쳐본적이 있고, 그가 규칙을 올바르게 사용하리라는 것 등등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해에 대해서 그는,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그 규칙을 준수할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가 그 규칙을 숙달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단어 '안다','할수있다','이해한다','기술을 숙달했다'의 문법(grammar)들" 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의 의미란 언어의 사용이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를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을 뜻하며,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나온 소극적인 결론은, 그의 정신적 상태나 활동에 의해서는 결정될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나온 적극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은, (1)공동체가, (2)그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한다. (1)은 두가지 면에서 성립한다. 첫째,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공동체의 관습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둘째, 누군가가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 것은 이미 규칙을 숙달하고 있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그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며, 이때 그가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 스스로가 결정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시킨 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훈련을 시킨 이는 훈련받는 이가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는가? 여기서 (2)가 성립한다. 이때 결정의 기준으로 의존할수 있는 것은 오직 훈련받는 이의 행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1),(2)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릴수 있다.
따라서 '규칙을 준수하는것'은 하나의 실천(Praxis)이다. 그래서 규칙을 준수한다고 믿는것은 그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규칙을 '私的으로' 준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준수한다고 믿는 것은 그 규칙을 준수하는것과 동일한 것일테이니 말이다.
또한 이는 당연한 결론이기도 하다. 규칙준수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관습및 훈련과 관련해서만 비로소 의미있는 것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것처럼,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규칙을 준수하는 사용이었고, 언어로서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를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줄 알게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의미함)나 이해는 개인에 의해 결정될수 없다.
여기서, 머리말을 통해 언급되었던 사적언어의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사적언어는 오직 개인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개인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언어, 즉 다른 사람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수 없는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공동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개인에 의해서 결정될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3. 의미와 사적언어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미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이제 사적언어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없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견상으로만 볼때 비트겐슈타인은 #243에서 비로소 사적언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243이전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의미 일반에 대한 논의였으며,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 역시 그러한 일반적 논의에서부터 나온 결론이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준수할수 없다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 든 例는 '2씩 더하라'는 산술의 규칙이었는데, 이 규칙은 우리의 공적인 언어에서 쓰이고 있는 공적인 언어의 예였지 사적언어의 예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사적언어라고 가정될수 있는 어떤 언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은 이미 내릴수 있었지만.) 그런데 우리의 언어에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사적언어에 해당하는 언어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바로 '아픔','간지럼'등과 같이 개인의 감각을 나타내는 감각언어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개인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기 飁문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감각언어에 대한 잘못된 그림에서 파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원리적으로 부정된 사적언어에 대해 다시한번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243이하의 논의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크게, (1) 사적언어의 현실적 존재 여부와 (2) 사적언어의 원리적 가능성 여부라는 두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대략적으로 말해서 #244-255와 #272-315에서는 (1)을, #256-271에서는 (2)를 논의하고 있다. ((2)는 이미 결론이 난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논의된다). (1)과 (2)가 서로 다른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언어논변에 대한 지금까지의 많은 해석들은 (1)과 (2)를 서로 뭉뚱그려서 생각함으로써, 즉 (2)를 입증하기 위해 (1)의 논의를 끌어들인다든지 함으로써 사적언어논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적언어가 불가능함을 보이려면 우리는 (2)의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의미, 사용, 이해, 규칙준수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2)를 입증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논변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3.1. 사적언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아픔'의 예
사적언어는 실제로 있지 않은가? 우리의 감각언어(예를 들어 '아픔')는 사적언어가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펴고 있다.
1. '아픔'이라는 단어는 나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얻는다.
2. 나의 사적감각은 나만이 느낄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나의 사적감각을 느낄수 없다.
3. 그러므로 나의 사적감각은 나만이 알수 있다. (2에 의해)
4. 그러므로 나만이 '아픔'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1,3에 의해)
5. 그러므로 '아픔'은 사적언어이다. (4에 의해)
먼저 1에 대해서 살펴보자. 과연 우리는 '아픔'이라는 단어를, 우리 내부의 사적감각인 아픔을 지시함으로써 배우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1*.'아픔'은 아픔을 표현하는 나의 자연적인 행위에 의해 그 의미를 얻는다.
는 것이다.
어떻게 단어가 감각을 지시하는가?...여기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 단어들은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감각의 표현들과 연관되어있고 그러한 표현들을 대신해서 사용된다. 한 아이가 상처를 입고 운다; 그러자 어른들이 그에게 말을 건네고 그에게 감탄문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문장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아이에게 새로운 아픔-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2와 3에 대한 그의 거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2와 3을 살펴보자.
우선 2는 자명한 주장인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이 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은 도저히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바로 이 아픔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아픔과 다른 사람의 아픔이 같을수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무엇이 아픔의 같음에 대한 기준이 될수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다른 아픔이니 서로 같은 아픔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만약 그 기준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같음에 대한 기준이라면, 즉 어떤 것에 대해 그 스스로만이 자신과 같다고 판정하는 그러한 종류의 기준이라면, 우리의 사적감각 뿐 아니라 어떠한 공적인 대상도 서로 같은 것은 없다. 만약 그러한 기준이 아니라 같음에 대한 우리들의 일상적 기준이 같음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을 다른 사람도 느낄수 있다고 말할수 있다.
주장 3은 어떤가? 과연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를 단지 추측할수 있을 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확실히 안다. 병원에서 울부짖고 있는 환자를 보거나, 교통사고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정말로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아프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예를 들어서 2+2=4라는 것보다 덜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확신은 우리들의 성급함, 혹은 반성능력의 결여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논변에 대해서는 곧장 다음과 같은 반박이 뒤따를 것이다. 어쨌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심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내 앞에서 배를 움켜쥐면서 "나는 배가 아프다!"라고 울부짖고 있는 이 사람은 십중팔구 아픔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연극배우일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변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논변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라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지, 매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라는 점만을 보여주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언어놀이를 배워야 하며, 그것은 "나는 아프다."라는 문장이 통상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안 이후에야 가능하다.
우리는 아마도 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이 꾸민것이 아니라고 너무 서둘러 가정하는 것이 아닌가? -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가정은 어떠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가?
(거짓말 역시 다른 언어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언어놀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장 3을 받아들일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내가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는가? 그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즉 '아픔'과 같은 언어들이 사적감각을 표현하는 외부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안 1*는 2와 3의 주장이 가지는 난점을 해결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아픔'이 의미를 얻게 되는 방식으로써 1*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1,2,3을 논박함으로써 우리는 '아픔'이 사적언어라는 5의 주장을 거부할수 있다. '아픔'은 우리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하는 우리의 자연적 행위를 대신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자연적 행위는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얼마든지 확실히 알수 있다. 따라서 '아픔'이란 말은 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아픔'은 사적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아픔'이 사적언어가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성립할수 있었던 핵심은 우리의 사적감각이 그것을 표현하는 자연적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의 모든 사적인 감각이 그것과 연결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적언어는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즉 우리가 그러한 감각을 느낄때마다 그 감각을 지시하는 나만의 기호를 만듦으로써 나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호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243에서 말하고 있는 사적언어의 진정한 표본이 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호는, 어떠한 행위와도 연결되지 않은, 따라서 나만이 알수 있는 감각을 지시하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 기호의 의미를 이해할수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256 - 269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243에서 제기하였던 사적언어의 문제를 #256에서 다시 제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자, 이제 나의 내적인 감각을 기술하며 오직 나만이 이해할수 있는 언어에 관해서는 어떤가? 나는 어떻게 나의 감각들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는가? - 우리가 보통 하는대로? 그렇다면 감각들에 대한 나의 단어들은 감각들에 대한 나의 자연적 표현과 연결되어있는가? 그런 경우라면 나의 언어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또한 나처럼 그 단어를 이해할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내가 그 감각에 대한 어떠한 자연적 표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감각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이제 나는 단순히 이름들을 감각들과 연결시키며(associate) 그 이름들을 記述에 사용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할 작업은 이러한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3.2. 사적언어는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258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아래와 같이, 사적언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사례를 제시한다. (이를 사례 A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보자. 나는 어떤 감각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 관한 일기를 쓰고 싶다. 이 목적을 위해서 나는 그 감각을 기호'S'와 연결시키고 내가 그 감각을 느낀 날마다 이 기호를 캘린더에 적어넣는다. - 나는 우선 이 기호에 대한 정의가 정식화될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려고 한다. - 그러나 어쨌든 나는 나 자신에게 일종의 예시적 정의를 줄수 있다. - 어떻게? 나는 그 감각을 지시할수 있는가? 통상적인 의미로는 그럴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기호를 말하거나, 적고, 동시에 나의 주의를 감각에 집중한다.-그리하여, 말하자면, 그 감각을 내적으로 지시한다.
사례 A의 상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적언어를 언어적으로정의할수는 없다. 만약 사적언어를 언어적으로 정의할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사적언어의 의미를 이해시킬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적언어가 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위에서 "나는 우선 이 기호에 대한 정의가 정식화될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려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적언어는 예시적으로(ostensively) 정의될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시적정의가 가능하려면, 개인이 자신의 사적감각을 가리키면서 'S'라고 말할수(쓸수)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적감각을 가리킬수 있는가? 외부 사물을 가리키는 방법으로서는 사적감각을 가리킬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언어에 대한 예시적 정의는 외부 사물에 대한 예시적 정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위의 인용문에서 "일종의 예시적 정의"라고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특정한 사적감각을 느낄때마다 그것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감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사적언어 'S'를 만들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례 A에 대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儀式(ceremony)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냐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분명히 기호의 의미를 정하는데 이바지한다. - 글쎄, 그것은 정확히 나의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기호와 감각간의 연결을 인상짓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내가 그것을 나 자신에게 인상짓는다."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할수 있을 뿐이다: 즉 이 과정이 내가 그 연결을 장래에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을 야기시킨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의 이 경우에서 나는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에게 올바르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올바르다고. 그러나 그말은 단지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에 관해 말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고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만으로서는,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별로 분명하지 않다. 사적언어논변에 대한 많은 해석들은 이 부분을, 사적언어가 나의 사적감각을 지시할수 있기 위해서는 그 지시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를 검증(verification)할만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앞으로 이를 해석 V라고 부르자.) 해석 V에 따르면 사적언어논변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는 내가 어떤 특정한 감각을 느낄때마다 그것에 'S'와 같은 기호를 연결시킴으로써 'S'의 의미를 확정한다. 그러나 나는 'S'가 지시하는 원래의 감각을 잘못 기억할수도 있고(기억의 오류가능성), 다른 비슷한 감각과 혼동할수도 있다(감각의 오류가능성). 이러한 오류가능성을 배제하려면, 나는 과연 내가 'S'로써 원래의 그 감각을 올바로 지시했는지 확인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적감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취할수 있는 방법은 단지 사적감각에 대해 다시한번 더 주의를 기울여보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은 애초에 사적감각을 'S'와 연결시키던 방법과 동일한 것이므로 사적감각을 확인하는 더욱 확실한 방법이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S'로 나의 감각을 지시할때마다 'S'가 서로 다른 감각을 지시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S'의 의미를 확정지을수 없다. 따라서 'S'라는 기호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기호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S'는 언어가 될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언어는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해석 V는 사례 A가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중,
(1) 사적감각은 예시적으로 정의될수 있다.
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석 V가 위와 같은 논변으로 (1)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 해석을 받아들일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해석 V의 핵심적 논변은, 우리가 사적감각과 관련해서는 그것에 대한 예시적 정의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그러한 정당화를 가지고 있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공적인 대상 P를 가리키면서 'P'라고 말함(씀)으로써 P에 대한 예시적정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도 사적감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P를 다시 볼때 P를 보았던 그의 예전 기억이 잘못되어있어서 현재 보고 있는 대상을 P라고 여기지 않거나(기억의 오류가능성), 혹은 시각적 착각으로 말미암아 현재 보고 있는 P를 P가 아닌 P와 비슷한 다른 대상으로 볼 가능성(감각의 오류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물론 공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그럴 경우, 다른 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이 과연 P인지에 대하여 물어볼수 있으며 이때 다른 사람은 그에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적감각에 대한 경우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때 그가 다른 사람의 대답 또한 잘못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석 V를 옹호하는 이들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그러한 가능성은 지극히 낮은 것이라고 답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대답을 듣는것과 나의 사적인 감각을 느끼는 것은 모두 감각적 경험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전자의 오류가능성을 무시할수 있다면, 후자의 오류가능성도 무시할수 있다. 반대로 후자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전자의 오류가능성도 인정하여야 한다. 경험에 대해 궁극적으로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나의 감각이다. 도대체 나의 사적감각을 검증하기 위해서 왜 다른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단 말인가? 가령 나는 내가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봄으로써 판정하는가?
따라서 우리는 해석 V를 받아들일수 없다. 그러므로 일단 (1)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사례 A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1)이외에도
(2) 언어는 예시적 정의만으로 그 의미가 결정될수 있다.
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앞부분에서 이미 예시적정의만으로는 언어의 의미가 결정될수 없음을 논의한 바 있다. 가령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빨강'을 예시적으로 정의해주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를 위해서 나는 내 앞에 있는 빨간 옷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빨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 사람이 '빨강'을,그 옷의 색깔이 아닌 바로 그 옷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할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 사람은 또한 '빨강'을, 옷에 달려있는 레이스, 옷의 크기, 옷의 모양...등등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할수도 있다. 즉 예시적 정의는 그것만으로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수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예시적정의는 언어속에서 그 단어의 전반적인 역할이 분명할때 그 단어의 쓰임-즉 의미-을 설명해준다."는 결론을 내린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체스놀이의 비유에서 볼수 있듯이, 어떤 이가 체스의 왕에 대해 "이것이 왕이다."라는 예시적 정의를 통하여 체스에서의 왕의 쓰임을 알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이미 체스의 놀이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단어의 예시적정의에서 선행되어야할것은 언어속에서의 단어의 역할, 다시 말해 단어가 이러저러하게 사용되는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예시적정의에 의해서만은 그 의미가 결정될수 없다. 따라서 (2)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2)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했으므로, 이제 사적언어의 가능성은 완전히 부정된 것 아닌가? 아직 그렇지는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이 예시적 정의를 함으로써 사적언어의 의미를 결정할수 있기 위해서는 사적언어가 어떤 언어놀이에서 사용될수 있는 역할, 즉 사적언어의 쓰임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적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례 A를 옹호하는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수 있다. 개인이 그러한 규칙을 가질수는 없는가? 개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만들고 사적으로 그것을 준수하면 되지 않겠는가? 만약
(3) 개인은 규칙을 사적으로 준수할수 있다.
라는 조건이 성립된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2') 언어는 예시적 정의를 통해 그 의미가 결정될수 있다.
라고 말할수 있으며, 그렇다면 사적언어는 가능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3)을 부정할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의미, 이해, 사용, 규칙준수에 대한 앞서의 논의에서 이미 (3)이 성립할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3)을 인정할수 없으며 이에 따라 (2')도 인정할수 없다. 결국 사적언어는 원리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의미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입장의 맥락속에 위치시켜서 알아보았다.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사고의 광대한 들판을 모든 각각의 방향으로 이리저리 여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어떤 특정한 철학적 문제는 늘 그의 전체적인 철학적 입장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적언어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의미의 문제, 이해의 문제, 정신적 상태의 본성의 문제, 수학에서의 필연성의 문제등과 같이 언어철학, 심리철학, 수리철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대략적으로나마 언급하여야만 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다만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논의들의 내적인 체계와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려고 하는데에 있었으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그러한 드러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본 논문의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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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진 호 서울대 철학
1. 머리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243에서 사적언어(private language)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체험들 - 자신의 느낌, 기분, 등등- 을 사적인 사용을 위해 기입하거나 발언할수 있을 언어를 생각할수도 있을까? - 글쎄, 우리는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 그러나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언어의 단어들은 오직 말하는 사람만이 알수 있는 것을 지시하여야 한다; 즉 자신의 직접적인 사적 감각들을.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이해할수 없다.
곧이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나아가면서, 그는 그러한 사적언어가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가지 상이한 해석과 평가가 있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의 가능성 속에서 과연 사적언어논변의 진정한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해보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사적언어의 문제를 의미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고찰하였다. 사적언어의 문제는 결국 의미의 문제로 귀착되며, 따라서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의 핵심을 파악할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될수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의미에 관한 그의 일반적 고찰을 사적감각을 지시한다고 상정되는 언어에 적용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의미,사용,이해,규칙준수
2.1. 의미, 사용, 이해, 규칙준수의 상호관련성과 그 문제점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에는, 의미 이외에도 세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사용, 이해, 규칙준수라는 개념들이다. 우리는 의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 이들 개념들을 상호연관적으로 파악하여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대개의 경우, 단어의 의미는 언어속에서의 그것의 사용(쓰임)이다. 그의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단어의 의미는 곧 언어놀이(language game)속에서의 그 단어의 사용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그가 언어를 놀이에 비유하는 것은 언어와 놀이 사이의 두가지 공통점 때문이다. 첫째, 놀이들 모두에 공통된 어떤 본질과 같은 것이 없고 그들 사이에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만이 존재하듯이, 우리의 다양한 언어놀이들도 가족 유사성만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놀이가 규칙에 의해서 진행되듯이, 우리의 언어놀이도 규칙에 의해서 진행된다. 우리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각 단어들은 그것들이 언어놀이속에서 사용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어놀이속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의 사용규칙을 준수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규칙준수에 대한 논의가 왜 의미에 대한 논의에서 필요한지를 알수 있다.
한편, 의미가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대개 어떤 정신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때 더욱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단어를 듣거나 말할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다;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단숨에 파악하며, 이렇게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시간속에서 늘어져있는 '사용(쓰임)'과 분명히 다른것이지 않은가!
즉,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되는 것 같다: 우리는 단어를 그냥 사용하지 않는다. 단어를 사용할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단어의 모든 사용은 그러한 이해에서, 의미의 파악에서 따라나온다. 그러므로 단어의 의미, 단어를 말함으로써 무엇을 의미하는 것, 단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등은 모두 어떤 정신적인 활동이나 정신적인 상태로 보이며, 따라서 단어의 의미가 이러한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의 결과인 사용과 동일시될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단어의 의미가 곧 그것의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반론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우리들의 잘못된 그림(Bild)을 깨뜨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한 그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즉 그에 따르면,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어떤 정신적 상태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부터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왜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2.2. 규칙준수의 역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교사가 산술을 전혀 모르는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주면 0에서부터 시작하여 2씩 더해갈수 있게끔 가르치려고 한다. 그는 먼저 학생이 기본적인 수를 익히도록 '0'부터 '9'까지를 적어서 그것을 차례대로 암송시키고, 그 다음에는 수를 1씩 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처음에 그 학생은 자주 틀린다. (예를 들어 '69'다음에 '80'을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러나 반복된 훈련을 통해 그는 수열을 틀리지 않고 올바로 쓰게끔 된다. 이제 교사는 그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배울 준비가 됐다고 판단하고 학생에게 이 규칙을 가르친다. 그는 다시 학생에게, 설명을 하고,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12다음에는 14, 58다음에는 60...등등), 테스트를 한다. 학생이 1000까지의 수에 대한 테스트를 교사가 만족할정도로 수행하였다. 교사는 이제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이상에서 실행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학생은 '1004, 1008, 1012'...를 쓴다.
우리는 그에게 말한다: "자네가 무엇을 해놓았는지 좀 보게나!" - 그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한다: "나는 자네보고 2씩 더하라는 의미였네: 자네가 수열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게!" - 그는 대답한다: "예, 이게 맞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제가 이렇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 혹은 그가 수열을 가리키면서 "하지만 저는 똑같은 식으로 계속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 이제 "하지만 자네는 이걸 볼수 없나?"라고 말하면서 예전의 예과 설명들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에게는 마치 우리가 "1000까지는 2씩 더하고 2000까지는 4씩 더하고 3000까지는 6씩...등등의 식으로 더하라."는 명령을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설명과 명령을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이 그것의 모든 적용을 결정할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규칙을 모르는 이에게 있어서 물론 그것은 단순한 기호일뿐이다. 이제 우리가 그러한 이에게 그 규칙을 준수할수 있게끔 가르치려한다고 가정해보자. 문제는, 이 때 우리가 규칙에 맞는 것으로써 제시해줄수 있는 사례들은 유한할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규칙이 적용될수 있는 사례는 무한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시한 사례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한편으로 제시하지 않은 다른 사례들은 만족시키지 않게끔 규칙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이 우리가 가르치려고 하는 규칙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우리가 볼때) 비표준적인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그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 방식은 우리가 제시한 사례들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규칙을 좀더 자세하게 만들어주면 될 것 아닌가? 위의 예에서, 만약 교사가 "2씩 더하라"고만 말하지 말고 "모든 수에 대해 다음수로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써라."라고 말해줬다면 그 학생은 위와 같은 반응을 안 보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규칙을 좀더 기본적인 규칙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본적 규칙에 호소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다. 어떠한 기본적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준수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서 학생이 그 규칙을 준수할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기본적 규칙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문제는 똑같이 발생할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 학생이 '모든 수에 대해 다음수로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써라'는 규칙에서, '2만큼 더 큰 수'란 개념 역시 다음과 같이 비 표준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보자.
'2만큼 더 큰수'는
① 1000미만의 수에 대해서는 그 수보다 2만큼 더 큰 수를 지시하고
② 1000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그 수보다 4만큼 더 큰 수를 지시한다.
이러한 해석하에서라면 그 학생은 여전히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즉 어떠한 규칙을 아무리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규칙은 비표준적으로 해석가능하다. 그러므로 또 다른 규칙에 호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를 인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어떠한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의 과정을 규칙과 일치되도록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크립키(Kripke)가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역설, 혹은 규칙준수의 역설이다.
이러한 규칙준수의 역설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첫번째로, 이미 2.1의 논의에서 보았던것처럼 언어의 의미와 규칙준수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규칙준수의 역설은 산술의 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모든 개념들에 적용된다. 단어 '빨강'의 예를 들어보자. A가 B에게 '빨강'이란 단어를 가르치고 있다. A는 B에게 빨간 옷, 빨간 구두, 빨간 집등을 보여주면서 "이것들의 색을 우리는 '빨강'이라고 말한다."고 가르친다. A는 B에게 몇가지 사물들을 보여주고 그 중에서 빨간색을 가진 사물들을 골라내게끔 한다. B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제 A는 B가 '빨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A가 B에게 파란색 책의 색깔을 물었을때 B가 "빨강"이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물론 A는 B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B는 '빨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우리가
'빨강'은 ① 책의 색깔을 가리킬때에는 파란색을 지시하고
② 그 외의 사물의 색깔을 가리킬때에는 빨간색을 지시한다.
라는 규칙을 해석하는 식으로 해석했다고 해보자. 이때 A는 B의 대답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우리는 '책상','빠르게','그리고'등등의 모든 단어들에 대해서도 위와 비슷한 사례를 만들어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사례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언어의 사용규칙은 붕괴된다. 우리는 어떠한 단어에 대해서도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용할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규칙준수의 역설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산술의 예에서, 비록 상대방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지 못하지만 최소한 나는 그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역시 유한한 사례를 통해서 규칙을 배웠다. 그러므로 설령 내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실은 나도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0이상의 수에 대해서는 적용해본적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10000에 2를 더하면 10004가 된다."라고 말할때,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할 어떠한 근거라도 가지고 있는가? 10000에 2를 더하면 정말 10004일지도 모른다.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나만큼은 확실히 안다는 우리의 생각은 실은 아무런 정당화의 근거도 찾아볼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번째,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최소한 우리가 경험해본 사례들에 대해서는 규칙준수에 대해 의미있게 말할수 있는 것처럼 논의를 전개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유한한 사례'라는 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제 규칙준수의 역설은 모든 사례들, 규칙의 모든 적용들에 대해 성립된다. 다시 산술의 예로 돌아가보자. 교사는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을 1000까지 가르쳤다. 학생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제 교사는 다시 0에서부터 "2씩 더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학생이 '0,3,6,9'...을 썼다고 하자. 교사는 그가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할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학생은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우리가 '1994년 9월 3일 3시 이전에는 2씩 더하고 1994년 9월 3일 3시 이후에는 3씩 더하라'는 규칙을 준수하는 식으로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그때가 마침 1994년 9월3일 3시 이후였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학생은 자기 나름의 해석대로 정당하게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학생의 이러한 규칙준수 방식에 대해 교사가 틀렸다고 말할 어떤 근거가 있을수 있을까? 학생이 어떠한 규칙에 대해 어떠한 식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학생이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수 없다. 그 규칙에 대한 어떤 해석하에서 그의 행동은 여전히 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수 있는가? 규칙만으로는 규칙준수의 방식을 결정못해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언어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규칙에도 적용된다면, 우리가 어떤 단어를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최소한 나 자신만은 그러한 정당화에 해당되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나도 내가 왜 이 단어를 이러한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 나는 그냥 그런식으로 그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어떠한 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용방식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에 맞게 해석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용할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어떠한 식으로도 사용될수 있다면,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 언어의 의미가 없다면, 언어는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규칙준수의 역설이 옳다면, 언어는 불가능하다.
2.3. 역설에 대한 일반적 대안과 그 비판
2.3.1. 대안 - 규칙준수는 의미와 이해라는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규칙준수의 역설을 해결할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명백히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규칙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 규칙의 의미이다.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는 이미 '1000다음에 '1002'를 쓰라고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생이 '1000'다음에 '1004'를 썼다면, 그것은 교사가 의미한 것과 어긋나는 것이므로 교사는 학생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규칙을 준수할때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학생이 그 규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규칙을 준수하는 학생의 모든 행위는 그러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교사가 "2씩 더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때 이미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위의 학생이 그러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것은 그가 아직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가 학생에 대해서 규칙준수의 모든 사례를 가르칠수 없다는 점은 옳다. 그러나 학생은 그러한 유한한 사례를 통해서 무한한 사례에 적용할수 있도록 그 규칙을 이해할수 있다. 결국 규칙을 가르치고 그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견해(이를 견해 I라 하자.)이며, 비트겐슈타인 또한 견해 I를 인정한다. 그러나 견해 I를 인정하자마자, 곧이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정신적 상태나 활동이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이미 그는 '1000'다음에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했다."라는 말이나 "학생이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인정해야 되지 않는가?
규칙 '2씩 더하라'에 대한 교사의 의미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를 모두 결정해 줄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
교사가 규칙 '2씩 더하라'를 의미함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를 결정해주는 정신적 활동이 일어남.
규칙 '2씩 더하라'에 대한 학생의 이해 = 규칙 '2씩 더하라'의 적용사례가따라나오는 정신적 상태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등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2.3.2. 비판 1 - 의미함은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다.
먼저 의미함에 대해서 논의해보겠다. 의미함을 정신적 활동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가정과 견해 I에 의해, 교사가 "2씩 더하라"고 말했을때 그는 이미 "'1000'다음에는 '1002'를 써라."는 것에 해당하는 어떤 정신적 활동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신적 활동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들을 모두 결정해주려면, 교사에게는 "'1000'다음에 '1002'를 써라"는 정신적 활동 이외에도 "'1004'다음에는 '1006'을 쓰고,'1006'다음에는 '1008'을 쓰고...'100034'다음에는 '100036'을 쓰고..." 등등에 해당하는 정신적 활동이 모두 벌어졌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이는 불합리하다. 유한한 순간동안 일어난 정신적 활동이 무한한 사례들을 포함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미함이 정신적 활동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교사가 그러한 무한한 사례에 해당하는 정신적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 아니라, 가령 "모든 수 다음에 그 수보다 2만큼 큰 수를 써라"는 것을 의미했다는, 그러한 정신적 활동을 벌였다는 뜻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어떤 규칙을 보다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규칙준수의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모든 수 다음에 그 수보다 2만큼 큰 수를 써라'는 규칙에 대응하는 어떤 정신적 활동으로 전환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후자의 정신적 활동이 전자의 언어적 표현의 사용의 무한한 예를 어떻게 결정할수 있을지는 다시 설명할수 없는 것으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반박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미함을 정신적 활동으로 가정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정신적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2씩 더하라'는 규칙의 모든 적용사례들을 결정해줄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에게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는 정신적 활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견해 I, 즉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했을때 교사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고 의미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정신적 활동이 일어남'과 '의미함'은 전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미함은 정신적 활동과 동일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2.3.3. 비판 2 - 이해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이제 이해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이해를 정신적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이해에 대해서는 의미를 정신적 활동으로 보았을때 발생되는 것과 같은 난점은 발생되지 않는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의 학생이 규칙 '2씩 더하라'를 준수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그러한 정신적 상태에 있다고 가정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아래와 같은 난점을 피할수 없다.
먼저 이해를 기쁨이나 고통과 같이 어떤 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그냥 낯선 언어를 들을때와는 달리 익숙한 언어를 이해하면서 듣고 있을때 우리가 느끼는 어떤 정신적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견해는 매우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는 기쁨이나 고통과 같은 정신적 상태와는 다르다. 기쁨이나 고통은 의식될수있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령, "나는 하루종일 기뻤다."라든지, "그는 밤새도록 고통스러워했다."와 같이 말할수 있다. 물론 우리는 '2씩 더하라'와 같은 규칙에 대해서도, "그 학생은 이미 어제부터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규칙 '2씩 더하라'의 이해에 해당되는, 우리가 의식할수있는 어떤 지속적인 정신적 상태가 있는가?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러한 정신적 상태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해를 어떤 의식될수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할때 그러한 의식적인 정신적 상태는 늘 순간적이고 곧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머에 빠지게 된다. 이해라는 것이 늘 그렇게 순간적인 정신적 상태라면 우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동안이나 이해하고 있다고 볼수 있는가? 이해한 그 순간만? 혹은 그 규칙을 듣거나 보았을때에만? 그렇다면 평소에 나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내가 일단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면 평소에도 나는 분명히 그 규칙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해에 대응하는, 어떤 의식될수있는 정신적 상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그러므로 이해는 의식될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해를 무의식적이고 내성에 의해서는 파악할수 없는 어떤 정신적 상태로 본다면 어떨까?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역시 문제가 있다. 앞서 논의했던 규칙준수의 예로 다시 돌아가서 그 이유를 알아보자. '2씩 더하라'는 규칙을 가르치던 교사는 그가 0에서부터 규칙에 맞게 계속 수를 써 나아가자, 적당한 시점에서 (이 예에서는 1000까지) "이제 그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000이상의 수에서 테스트해본 결과 그 학생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학생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사는 테스트를 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스트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학생이 '3000'까지 제대로 썼을 때? 혹은 '4068'까지 제대로 썼을때? 우리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가 올바르게 쓴 숫자들중 2000번째 숫자부터 그는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한 것이다."와 같이 자의적인 규정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러한 물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이해가 무의식적이고 내성에 의해 파악될수 없는 어떤 정신적 상태라면, 우리는 그 학생이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한 때가, 그 학생에게 '2씩 더하라'는 규칙이 적용되는 사례를 산출할수 있게끔 하는 어떤 정신적인 상태가 생겨난 바로 그때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가? 그 학생이 규칙을 준수할수 있기 시작했을때의 변화는 그의 행동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정신적 메커니즘의 변화와는 독립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어떤 의식될수 없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이해가 어떠한 정신적 상태와도 동일시 될수 없음을 알수 있다.
2.3.4.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새로운 환상
그러나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분명히 정신적 상태나 활동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쉽게 포기할수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마음이라는 어떤 비물질적인 존재를, 그리고 마음의 신비스러운 작용으로서의 의미(의미함)과 이해라는 정신적 활동이나 상태를 가정하게 된다. 교사가 "2씩 더하라"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의미했을때 그의 마음은 물리적인 방식이 아닌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할 모든 단계를 이미 다 밟아갔다. 즉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의 적용사례들을 직접 쓰거나 말하기 전에, 모든 사례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은 규칙을 단숨에 이해하여, 그 모든 적용사례들을 미리 파악한다. 규칙의 무한한 적용사례들은 마음속에 물리적인 방식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이미 들어가 있다. 마음이라는 비물질적 존재가 이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심신이원론이 이미 더 이상 매력적인 대안이 아닌 오늘날의 상황에서, 마음의 존재를, 더구나 마음의 그런 신비한 능력을 가정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의미함)나 이해가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이라는 주장을 유지하면서 위와 같은 난점을 피할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규칙준수의 역설을 해결할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는 이 대안이, 규칙준수의 역설을 풀기 위해 답변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술의 규칙준수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의 문제이다: 규칙 '2씩 더하라'는 단순히 "'1000'다음에는 '1002'를 써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의미(의미함)나 이해가 단지 어떤 물리적(신경생리적)인 것의 구조나 활동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필연성에 대해 말할수 없다. 우리가 기껏 말할수 있는 것은, "이러이러한 물리적(신경생리적)구조가 갖추어지면 그는 '1000'다음에는 '1002'를 쓸것이다."라는 예측 뿐이다. 그러나 "1000에 2를 더하면 1002가 된다."는 것은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와 같은 경험적 예측과는 분명히 다르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산술의 규칙이 가지고 있는 그 필연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분명히 물리적인 것에서 유래할수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산술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마음의 신비스러운 작용일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매우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규칙준수의 역설을 의미(의미함)와 이해가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라는 가정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하였던 우리의 노력은, 그러한 정신적인 활동이나 상태가 마음이라는 신비한 존재의 신비한 작용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수 없을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역설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던 우리는 다시 역설속으로 빠져들고 만것이다.
2.4. 역설에 대한 답변
이 모든 역설과 난점에 빠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의미(의미함)와 이해를 정신적인 상태나 활동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어떻게 해결될수 있는가? 또한 위의 논의가 올바르다면,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무엇인가?
규칙준수의 역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역설이었다: 어떠한 행위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과정을 규칙과 일치되도록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모든 것을 규칙과 일치시킬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규칙과 충돌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치도 충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답변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의 답변처럼, 어떠한 행위도 규칙과 충돌하는것과 동시에 규칙과 일치시킬수 있다면 규칙에 대한 일치나 충돌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규칙준수의 역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준수라는 개념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답변이 옳다면, 규칙을 준수한다든지 준수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점에 있었던 것 아닌가?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일종의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는 일치도 충돌도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이 말을 통해 그는 규칙에 대한 일치와 충돌을 논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가정하는 한에서는 그러한 불합리한 결론이 나올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위와 같이 규칙준수의 역설에 대한 답변 역시 불합리함을 보임으로써, 근본적으로 역설이 제기된 논의의 틀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거부하는 틀이란 무엇인가? 위의 답변에 이어 계속되는 그의 언급을 보자.
여기서 하나의 오해가 있었다는 점이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우리가 사고의 과정에서 한 해석에 잇달아 다른 해석을 주었다는 사실로부터 보여질수 있다. 마치 각각의 해석들이, 우리가 한 해석뒤에 있는 다른 해석을 생각할때까지는, 우리를 적어도 잠시동안은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해석이 아니라, 실제의 경우들에서 우리가 "규칙을 준수함"과 "규칙에 反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보여지는, 규칙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규칙에 따르는 모든 행위는 해석이다라고.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해석'이란 용어를 규칙의 한 표현에 대한 다른 표현에로의 대치로 제한시켜야 할 것이다.
규칙을 해석함으로써 규칙을 준수한다고 가정한 것이 우리 오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 '2씩 더하라'라는 규칙을 준수할때, 그가 그 규칙을 '1000까지는 2씩 더하고 2000까지는 4씩 더하고 등등'...으로 해석하고 난 다음에 규칙을 준수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규칙을 그러한 해석의 방식을 통해 파악하지 않으며, 규칙을 파악하는 해석이 아닌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2.2에서 규칙을 좀더 기본적인 규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았다. 또한 2.3에서 규칙을 그것에 대응되는 어떤 정신적 상태나 활동으로 환원시킨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음을 보았다. 규칙을 또 다른 기본적인 규칙이나 어떤 정신적 상태내지 활동으로 환원하는 것은 규칙을 다시 해석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내린 우리들의 결론을 다시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규칙을 파악하는, 해석이 아닌 방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가?
2.4.1. 규칙준수, 관습, 공동체, 행위.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훈련(training)을 받음으로써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배운다. 여기서 그가 '훈련'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규칙준수를 배우는 것이 어떤 이성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 '→'라는 기호가 있다고 해보자. 나는 이 기호에 대해서 그것이 오른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 기호가 왜 왼쪽이나 위쪽이 아니라 오른쪽을 가리켜야하는지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는 없다. 나는 그냥 그러한 기호가 오른쪽을 가리킨다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규칙준수를 단지 훈련이라는 자극과 훈련에 대한 반응의 관계로서만 記述한다면 규칙준수의 역설은 여전히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자극-반응 관계는 개별적 사례들의 경험적인 결과들에 근거한다. 즉 자극 A가 반응 B를 야기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극 A를 주었을때마다 반응B가 이루어진다는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한 경험적 인과관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역설의 예에서,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어떠한 훈련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매번 학생이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행위를 보인다면, 우리는 그 학생의 답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할수 밖에 없다. 규칙준수가 자극-반응관계의 규칙성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라면, 교사의 훈련에 대해 학생이 규칙적으로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반응을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점은,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는 단순한 규칙성(regularity)을 넘어서, 규범성(normativity)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규칙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준수되어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준수되어서는 안된다.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준수한다면 그는 '1000' 다음에는 '1002'를 써야지 '1004'를 쓰면 안된다. 규칙준수의 본질은 이러한 규범성에 있는 것이다. 이 규범성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어떤 규칙의 표현 - 가령 표지판 - 은 나의 행위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 여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연관이 있는가? - 글쎄, 아마도 다음과 같은 연관일 것이다: 나는 그 기호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 기호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과적 연관만을 줄뿐이다. 즉 우리가 지금 그 표지판에 의해 가는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줄뿐, 이 표지판에-의해-가는것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점, 즉 표지판들에 대한 규칙적인 사용, 다시 말해 관습이 존재하는한에서만 어떤 사람은 표지판에 의해 갈수 있다는 점을 보였다.
규칙을 준수하는 것, 보고문을 작성하는 것, 명령을 내리는 것, 체스게임을 하는 것등은 관습(사용,제도)이다.
위의 언급들이 규칙준수의 규범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이다. 그에 따르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바로 관습이요 제도라는 것이다. 나는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서 '1000'다음에 '1004'를 쓸수도 있다. 그 규칙에 의해 '1000'다음에는 반드시 '1002'를 써야 한다는 어떤 초월적 정당성과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그런 식으로 준수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해서는 '1000'다음에 '1002'를 써야 한다는 것이 이미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규칙준수의 규범성은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에 지적한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 역시, 규칙준수가 이미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규칙준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을 준수하는 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에의 호소는 다음과 같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착될수 있으려면, 규칙을 어떻게 준수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먼저 공동체의 일치(agreement)가 있어야 한다. 이때 공동체는 무엇을 일치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다른 관습을? 그러나 관습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관습에 호소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읜 주장은 무한 퇴행에 빠지게 된다. 아니면 공동체의 다수가 가지는 의견을?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哲學史에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주장, 소위 진리규약설이라고 불리는 주장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규약설이 옳지 않다는 강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진리와 다수의 의견은 범주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떻게 진리가 다수의 의견에 의해 결정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준수에 대한 공동체의 일치가 관습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다수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들간의 일치가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인 것이다.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여기서 그는 의견과 삶의 형식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일치를 가리킨다. 아무도,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올바로 준수하려면 '1000'다음에는 '1002'를 써야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내놓거나 토론해본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의 과정에 있어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는 수많은 규칙을 준수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고, 그러한 훈련을 통하여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규칙에 대해서도 공동체가 그것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그 규칙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학생은 '1000'다음에 '1004'를 쓰는 것이 옳은 답이라고 끝까지 주장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주장을 끝까지 견지한다면, 즉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1000'다음에는 끝까지 '1004'를 쓴다면, 그는 학교에서 산수시험을 볼수 없을 것이며,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받아오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용돈을 제대로 관리할수 없을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는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과는 다른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이들이 규칙을 준수하는 방식을, 다른이들이 행위에서 일치하고 있는 그 방식을 따라야만 한다. 결국 규칙준수가 관습으로 정착될수 있는 이유는 규칙을 준수하는 공동체가, 행위에 있어서의 일치,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일치,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보이고 있음으로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설사 의견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서의 일치에 의해 규칙준수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와 공동체의 일치를 구분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1000에다가 2를 더하면 1002가 된다는 수학적 진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그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수학의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거나 알지못하는 것과는 독립적인 것이오!" - 물론, "사람들은 2곱하기 2가 4라고 믿는다."라는 명제와 "2곱하기 2는 4이다."라는 명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모든 사람들이 2곱하기 2는 5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4일 것이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될것이란 말인가? - 글쎄, 나는,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다른 연산법, 말하자면 우리가 '계산'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다른 기법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것인가? (대관식은 틀린 것인가? 우리와 다른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극단적으로 기이하게 보일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의 각 성원들의 행위에 있어서의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가능성의 근거는, 우리가 규칙준수의 훈련에 대해서 대부분 비슷한 자연적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우리가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훈련에 대해 제각기 서로 다른 반응들을, 가령 '2씩 더하라'는 규칙에 대해 A는 '1000'다음에 '1002'를 쓰고, B는 '1000'다음에 '1008'를 쓰고, C는 '1000'다음에 '1001'을 쓰는,..등등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규칙준수에 대한 훈련은 이루어질수 없을 것이며, 아니 애당초 그 규칙에 대한 준수가 관습으로 정해질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훈련에 대해 우리들은 거의 모두 비슷한 반응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의 비슷함을 통해 공동체는 규칙을 준수하는 행위에서의 일치를 이루어낼수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그렇게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싶어할 것이다. 의학, 신경생리학, 유전학등의 발달은 규칙준수의 훈련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비슷함을 혹시 설명해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속의 우리의 행동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일어난 것을 '원초적-현상'으로 보아야 하는 곳에서 설명을 추구하는데에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이 언어놀이가 행해지고 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 곳에서.
우리의 탐구 영역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듯한 위의 언급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설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그 설명의 근거를 물어볼수 있다. 그러나 설명은 무한히 지속될수는 없으며 어디에선가 끝이 나야 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그 끝이 바로 언어놀이에 있어서의 우리의 행위이다. 우리의 모든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도 실은 바로 이 언어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사실, 의미(의미함)와 이해(이해함)가 정신적상태나 활동이 아니라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이미 암묵적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신적 상태나 활동에 대한 가정은, 또한 동시에 언어놀이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행위(=규칙을 준수하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틀이 될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가장 그럴듯한 설명의 틀을 무너뜨림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에서의 우리의 행위를 원초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이 설득력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국, 우리의 모든 삶과 모든 탐구의 토대는 바로 언어놀이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쓴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2.4.2. 의미(의미함)와 이해에 대한 답변과 사적언어의 불가능성
이제 의미(의미함)와 이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변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경우에 의미를 사용과 동일시할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교사는 '2씩 더하라'는 규칙으로서 '1000'다음에는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했다."라는 문장에서, 또 "학생은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했다."라는 문장에서, '의미했다'라든지 '이해했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의미함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2씩 더하라'는 규칙으로 '1000'다음에 '1002'를 쓰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가 규칙 '2씩 더하라'를 이해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규칙을 가르쳐본적이 있고, 그가 규칙을 올바르게 사용하리라는 것 등등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해에 대해서 그는, 학생이 '2씩 더하라'는 규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그 규칙을 준수할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가 그 규칙을 숙달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단어 '안다','할수있다','이해한다','기술을 숙달했다'의 문법(grammar)들" 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의 의미란 언어의 사용이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를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을 뜻하며,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나온 소극적인 결론은, 그의 정신적 상태나 활동에 의해서는 결정될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나온 적극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다는 것은, (1)공동체가, (2)그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한다. (1)은 두가지 면에서 성립한다. 첫째,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공동체의 관습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둘째, 누군가가 언어사용의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 것은 이미 규칙을 숙달하고 있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그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며, 이때 그가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 스스로가 결정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시킨 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훈련을 시킨 이는 훈련받는 이가 규칙을 준수할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는가? 여기서 (2)가 성립한다. 이때 결정의 기준으로 의존할수 있는 것은 오직 훈련받는 이의 행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1),(2)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릴수 있다.
따라서 '규칙을 준수하는것'은 하나의 실천(Praxis)이다. 그래서 규칙을 준수한다고 믿는것은 그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규칙을 '私的으로' 준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준수한다고 믿는 것은 그 규칙을 준수하는것과 동일한 것일테이니 말이다.
또한 이는 당연한 결론이기도 하다. 규칙준수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관습및 훈련과 관련해서만 비로소 의미있는 것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것처럼,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규칙을 준수하는 사용이었고, 언어로서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를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는 것,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준수할줄 알게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의미함)나 이해는 개인에 의해 결정될수 없다.
여기서, 머리말을 통해 언급되었던 사적언어의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사적언어는 오직 개인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개인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언어, 즉 다른 사람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수 없는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의미함)와 이해는 공동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개인에 의해서 결정될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3. 의미와 사적언어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미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이제 사적언어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없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견상으로만 볼때 비트겐슈타인은 #243에서 비로소 사적언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243이전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의미 일반에 대한 논의였으며, 사적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 역시 그러한 일반적 논의에서부터 나온 결론이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준수할수 없다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 든 例는 '2씩 더하라'는 산술의 규칙이었는데, 이 규칙은 우리의 공적인 언어에서 쓰이고 있는 공적인 언어의 예였지 사적언어의 예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사적언어라고 가정될수 있는 어떤 언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은 이미 내릴수 있었지만.) 그런데 우리의 언어에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사적언어에 해당하는 언어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바로 '아픔','간지럼'등과 같이 개인의 감각을 나타내는 감각언어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개인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기 飁문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감각언어에 대한 잘못된 그림에서 파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원리적으로 부정된 사적언어에 대해 다시한번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243이하의 논의에 대해 살펴보겠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크게, (1) 사적언어의 현실적 존재 여부와 (2) 사적언어의 원리적 가능성 여부라는 두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대략적으로 말해서 #244-255와 #272-315에서는 (1)을, #256-271에서는 (2)를 논의하고 있다. ((2)는 이미 결론이 난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논의된다). (1)과 (2)가 서로 다른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언어논변에 대한 지금까지의 많은 해석들은 (1)과 (2)를 서로 뭉뚱그려서 생각함으로써, 즉 (2)를 입증하기 위해 (1)의 논의를 끌어들인다든지 함으로써 사적언어논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적언어가 불가능함을 보이려면 우리는 (2)의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의미, 사용, 이해, 규칙준수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2)를 입증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논변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3.1. 사적언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아픔'의 예
사적언어는 실제로 있지 않은가? 우리의 감각언어(예를 들어 '아픔')는 사적언어가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펴고 있다.
1. '아픔'이라는 단어는 나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얻는다.
2. 나의 사적감각은 나만이 느낄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나의 사적감각을 느낄수 없다.
3. 그러므로 나의 사적감각은 나만이 알수 있다. (2에 의해)
4. 그러므로 나만이 '아픔'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1,3에 의해)
5. 그러므로 '아픔'은 사적언어이다. (4에 의해)
먼저 1에 대해서 살펴보자. 과연 우리는 '아픔'이라는 단어를, 우리 내부의 사적감각인 아픔을 지시함으로써 배우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1*.'아픔'은 아픔을 표현하는 나의 자연적인 행위에 의해 그 의미를 얻는다.
는 것이다.
어떻게 단어가 감각을 지시하는가?...여기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 단어들은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감각의 표현들과 연관되어있고 그러한 표현들을 대신해서 사용된다. 한 아이가 상처를 입고 운다; 그러자 어른들이 그에게 말을 건네고 그에게 감탄문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문장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아이에게 새로운 아픔-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2와 3에 대한 그의 거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2와 3을 살펴보자.
우선 2는 자명한 주장인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이 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은 도저히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바로 이 아픔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아픔과 다른 사람의 아픔이 같을수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무엇이 아픔의 같음에 대한 기준이 될수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러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다른 아픔이니 서로 같은 아픔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만약 그 기준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같음에 대한 기준이라면, 즉 어떤 것에 대해 그 스스로만이 자신과 같다고 판정하는 그러한 종류의 기준이라면, 우리의 사적감각 뿐 아니라 어떠한 공적인 대상도 서로 같은 것은 없다. 만약 그러한 기준이 아니라 같음에 대한 우리들의 일상적 기준이 같음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을 다른 사람도 느낄수 있다고 말할수 있다.
주장 3은 어떤가? 과연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를 단지 추측할수 있을 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확실히 안다. 병원에서 울부짖고 있는 환자를 보거나, 교통사고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정말로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아프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예를 들어서 2+2=4라는 것보다 덜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확신은 우리들의 성급함, 혹은 반성능력의 결여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논변에 대해서는 곧장 다음과 같은 반박이 뒤따를 것이다. 어쨌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심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내 앞에서 배를 움켜쥐면서 "나는 배가 아프다!"라고 울부짖고 있는 이 사람은 십중팔구 아픔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연극배우일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변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논변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라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지, 매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라는 점만을 보여주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언어놀이를 배워야 하며, 그것은 "나는 아프다."라는 문장이 통상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안 이후에야 가능하다.
우리는 아마도 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이 꾸민것이 아니라고 너무 서둘러 가정하는 것이 아닌가? -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가정은 어떠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가?
(거짓말 역시 다른 언어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언어놀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장 3을 받아들일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내가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는가? 그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즉 '아픔'과 같은 언어들이 사적감각을 표현하는 외부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안 1*는 2와 3의 주장이 가지는 난점을 해결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아픔'이 의미를 얻게 되는 방식으로써 1*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1,2,3을 논박함으로써 우리는 '아픔'이 사적언어라는 5의 주장을 거부할수 있다. '아픔'은 우리의 사적감각을 지시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하는 우리의 자연적 행위를 대신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자연적 행위는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얼마든지 확실히 알수 있다. 따라서 '아픔'이란 말은 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아픔'은 사적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아픔'이 사적언어가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성립할수 있었던 핵심은 우리의 사적감각이 그것을 표현하는 자연적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의 모든 사적인 감각이 그것과 연결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적언어는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즉 우리가 그러한 감각을 느낄때마다 그 감각을 지시하는 나만의 기호를 만듦으로써 나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호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243에서 말하고 있는 사적언어의 진정한 표본이 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호는, 어떠한 행위와도 연결되지 않은, 따라서 나만이 알수 있는 감각을 지시하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 기호의 의미를 이해할수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256 - 269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243에서 제기하였던 사적언어의 문제를 #256에서 다시 제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자, 이제 나의 내적인 감각을 기술하며 오직 나만이 이해할수 있는 언어에 관해서는 어떤가? 나는 어떻게 나의 감각들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는가? - 우리가 보통 하는대로? 그렇다면 감각들에 대한 나의 단어들은 감각들에 대한 나의 자연적 표현과 연결되어있는가? 그런 경우라면 나의 언어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또한 나처럼 그 단어를 이해할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내가 그 감각에 대한 어떠한 자연적 표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감각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이제 나는 단순히 이름들을 감각들과 연결시키며(associate) 그 이름들을 記述에 사용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할 작업은 이러한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3.2. 사적언어는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258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아래와 같이, 사적언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사례를 제시한다. (이를 사례 A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보자. 나는 어떤 감각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 관한 일기를 쓰고 싶다. 이 목적을 위해서 나는 그 감각을 기호'S'와 연결시키고 내가 그 감각을 느낀 날마다 이 기호를 캘린더에 적어넣는다. - 나는 우선 이 기호에 대한 정의가 정식화될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려고 한다. - 그러나 어쨌든 나는 나 자신에게 일종의 예시적 정의를 줄수 있다. - 어떻게? 나는 그 감각을 지시할수 있는가? 통상적인 의미로는 그럴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기호를 말하거나, 적고, 동시에 나의 주의를 감각에 집중한다.-그리하여, 말하자면, 그 감각을 내적으로 지시한다.
사례 A의 상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적언어를 언어적으로정의할수는 없다. 만약 사적언어를 언어적으로 정의할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사적언어의 의미를 이해시킬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적언어가 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위에서 "나는 우선 이 기호에 대한 정의가 정식화될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려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적언어는 예시적으로(ostensively) 정의될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시적정의가 가능하려면, 개인이 자신의 사적감각을 가리키면서 'S'라고 말할수(쓸수)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적감각을 가리킬수 있는가? 외부 사물을 가리키는 방법으로서는 사적감각을 가리킬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언어에 대한 예시적 정의는 외부 사물에 대한 예시적 정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위의 인용문에서 "일종의 예시적 정의"라고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특정한 사적감각을 느낄때마다 그것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감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사적언어 'S'를 만들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례 A에 대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儀式(ceremony)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냐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분명히 기호의 의미를 정하는데 이바지한다. - 글쎄, 그것은 정확히 나의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기호와 감각간의 연결을 인상짓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내가 그것을 나 자신에게 인상짓는다."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할수 있을 뿐이다: 즉 이 과정이 내가 그 연결을 장래에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을 야기시킨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의 이 경우에서 나는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에게 올바르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올바르다고. 그러나 그말은 단지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에 관해 말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고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만으로서는,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별로 분명하지 않다. 사적언어논변에 대한 많은 해석들은 이 부분을, 사적언어가 나의 사적감각을 지시할수 있기 위해서는 그 지시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를 검증(verification)할만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앞으로 이를 해석 V라고 부르자.) 해석 V에 따르면 사적언어논변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는 내가 어떤 특정한 감각을 느낄때마다 그것에 'S'와 같은 기호를 연결시킴으로써 'S'의 의미를 확정한다. 그러나 나는 'S'가 지시하는 원래의 감각을 잘못 기억할수도 있고(기억의 오류가능성), 다른 비슷한 감각과 혼동할수도 있다(감각의 오류가능성). 이러한 오류가능성을 배제하려면, 나는 과연 내가 'S'로써 원래의 그 감각을 올바로 지시했는지 확인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적감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취할수 있는 방법은 단지 사적감각에 대해 다시한번 더 주의를 기울여보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은 애초에 사적감각을 'S'와 연결시키던 방법과 동일한 것이므로 사적감각을 확인하는 더욱 확실한 방법이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S'로 나의 감각을 지시할때마다 'S'가 서로 다른 감각을 지시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S'의 의미를 확정지을수 없다. 따라서 'S'라는 기호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기호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S'는 언어가 될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언어는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해석 V는 사례 A가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중,
(1) 사적감각은 예시적으로 정의될수 있다.
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석 V가 위와 같은 논변으로 (1)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 해석을 받아들일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해석 V의 핵심적 논변은, 우리가 사적감각과 관련해서는 그것에 대한 예시적 정의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그러한 정당화를 가지고 있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공적인 대상 P를 가리키면서 'P'라고 말함(씀)으로써 P에 대한 예시적정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도 사적감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P를 다시 볼때 P를 보았던 그의 예전 기억이 잘못되어있어서 현재 보고 있는 대상을 P라고 여기지 않거나(기억의 오류가능성), 혹은 시각적 착각으로 말미암아 현재 보고 있는 P를 P가 아닌 P와 비슷한 다른 대상으로 볼 가능성(감각의 오류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물론 공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그럴 경우, 다른 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이 과연 P인지에 대하여 물어볼수 있으며 이때 다른 사람은 그에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적감각에 대한 경우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때 그가 다른 사람의 대답 또한 잘못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석 V를 옹호하는 이들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그러한 가능성은 지극히 낮은 것이라고 답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대답을 듣는것과 나의 사적인 감각을 느끼는 것은 모두 감각적 경험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전자의 오류가능성을 무시할수 있다면, 후자의 오류가능성도 무시할수 있다. 반대로 후자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전자의 오류가능성도 인정하여야 한다. 경험에 대해 궁극적으로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나의 감각이다. 도대체 나의 사적감각을 검증하기 위해서 왜 다른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단 말인가? 가령 나는 내가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봄으로써 판정하는가?
따라서 우리는 해석 V를 받아들일수 없다. 그러므로 일단 (1)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사례 A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1)이외에도
(2) 언어는 예시적 정의만으로 그 의미가 결정될수 있다.
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앞부분에서 이미 예시적정의만으로는 언어의 의미가 결정될수 없음을 논의한 바 있다. 가령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빨강'을 예시적으로 정의해주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를 위해서 나는 내 앞에 있는 빨간 옷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빨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 사람이 '빨강'을,그 옷의 색깔이 아닌 바로 그 옷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할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 사람은 또한 '빨강'을, 옷에 달려있는 레이스, 옷의 크기, 옷의 모양...등등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할수도 있다. 즉 예시적 정의는 그것만으로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수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예시적정의는 언어속에서 그 단어의 전반적인 역할이 분명할때 그 단어의 쓰임-즉 의미-을 설명해준다."는 결론을 내린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체스놀이의 비유에서 볼수 있듯이, 어떤 이가 체스의 왕에 대해 "이것이 왕이다."라는 예시적 정의를 통하여 체스에서의 왕의 쓰임을 알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이미 체스의 놀이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단어의 예시적정의에서 선행되어야할것은 언어속에서의 단어의 역할, 다시 말해 단어가 이러저러하게 사용되는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예시적정의에 의해서만은 그 의미가 결정될수 없다. 따라서 (2)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2)의 성립가능성을 부정했으므로, 이제 사적언어의 가능성은 완전히 부정된 것 아닌가? 아직 그렇지는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이 예시적 정의를 함으로써 사적언어의 의미를 결정할수 있기 위해서는 사적언어가 어떤 언어놀이에서 사용될수 있는 역할, 즉 사적언어의 쓰임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적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례 A를 옹호하는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수 있다. 개인이 그러한 규칙을 가질수는 없는가? 개인이 사적으로 규칙을 만들고 사적으로 그것을 준수하면 되지 않겠는가? 만약
(3) 개인은 규칙을 사적으로 준수할수 있다.
라는 조건이 성립된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2') 언어는 예시적 정의를 통해 그 의미가 결정될수 있다.
라고 말할수 있으며, 그렇다면 사적언어는 가능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3)을 부정할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의미, 이해, 사용, 규칙준수에 대한 앞서의 논의에서 이미 (3)이 성립할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3)을 인정할수 없으며 이에 따라 (2')도 인정할수 없다. 결국 사적언어는 원리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의미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입장의 맥락속에 위치시켜서 알아보았다.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사고의 광대한 들판을 모든 각각의 방향으로 이리저리 여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어떤 특정한 철학적 문제는 늘 그의 전체적인 철학적 입장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적언어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의미의 문제, 이해의 문제, 정신적 상태의 본성의 문제, 수학에서의 필연성의 문제등과 같이 언어철학, 심리철학, 수리철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대략적으로나마 언급하여야만 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다만 사적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논의들의 내적인 체계와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려고 하는데에 있었으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그러한 드러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본 논문의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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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私的 言語와 意味 -강진호|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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