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올해 노벨문학상은 일본계 영국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63)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5일(현지시간)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시구로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그가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5살 되던 해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영국 켄트대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스물 여덞 살이던 198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의 피폭과 재건을 그린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2015년 발표한 ’파묻힌 거인‘까지 모두 8권의 소설을 출간한 그는 주로 기억, 시간, 환상, 자기기만을 소설의 주제로 삼아왔다. 그 중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된 ’나를 보내지 마‘는 이시구로의 대표작으로 복제 인간들의 슬픈 운명과 사랑을 그린 SF 소설이다. 우리에겐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한 그의 세 번째 소설이자 앤서니 홉킨스, 엠마 톰슨 주연의 동명 영화 ‘남아있는 나날’로 잘 알려져 있다.
<사진>가즈오 이시구로 |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림원이 지난해와 같은 파격을 택할지, 보다 폭넓은 공감대와 노벨문학상의 전통적인 가치에 충실한 선택을 할지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미국의 팝 가수이자 시인인 밥 딜런을 선정, 논란을 불러일으킨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는 보수적인 선택을 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했다. 이에 따라 유럽출신의 소설가가 선정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은 이런 측면에서 최선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스웨덴 한림원 사라 대니우스 사무총장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프란츠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을 결합한 형태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약간 더해진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즉 소설문학의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전쟁의 참상과 평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시구로의 소설적 천착은 노벨문학상이 추구해온 전통적 가치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럼에도 지역, 성별, 쟝르적 안배의 측면에서 노벨상 수상을 점쳐온 호사가들에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은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meelee@heraldcorp.com
(뉴스투데이=이준혁 기자) 5일 오후 8시(한국시각) 스웨덴 한림원(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으로부터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일본계 영국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63)는 섬세한 문체와 독자를 사로잡는 구성으로 현재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 최고란 평을 받는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일곱 번째 장편 《파묻힌 거인》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1989년 서른다섯 살 때 발표한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영미권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찍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시구로는 등단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섯 편의 장편과 한 편의 단편집만을 발표할 만큼 매 작품마다 완벽을 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결과 모든 작품이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하고 부커상에만 네 번이나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역시 10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일곱 번째 장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평단과 대중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2015년 3월 《파묻힌 거인》은 발표되자마자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주요 언론들은 “올해 이보다 더 중요한 소설은 출간되지 않을 것”(더 타임스), “걸작”(뉴욕 타임스), “놀라움 그 자체”(파이낸셜 타임스), “이전작과 전혀 다르면서도 가장 이시구로다운 작품”(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문학적 사건”(NPR) 같은 말로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부응하듯 작품은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영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시구로는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더 타임스》 선정)에 들 만큼 현대 영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명성보다는 동양과 서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시구로만의 낯설고 깊은 상실의 정서다. 이번 신작에서 역시 망각의 안개가 내린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무대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답고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또한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소재와 형식을 차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작가답게 이번 신작은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키는 판타지 모험담의 틀을 빌려 그 놀라움과 흥미진진함을 더하고 있다. “피터 잭슨이 영화로 만든다면 더없이 멋질 것”(더 타임스)이라는 바람대로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할리우드의 실력파 제작자 스콧 루딘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우리 시대 상실을 가장 유려하게 그려내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그의 가장 이례적인 작품이자 가장 이시구로다운 작품
부커상 수상작가의 판타지 모험담이라는 의외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이시구로만의 색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뒤흔들어놓는다. 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시기, 브리튼족과 색슨족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전쟁을 벌인 이후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 수 없는 망각의 안개가 평원을 뒤덮어 사람들은 서로의 잔혹했던 과거를 잊은 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브리튼족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이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워한다. 두 사람 모두 망각의 안개를 통해서만 서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께해온 삶을 전부 잊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힘들어하며, 과거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이 느끼는 깊은 사랑에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였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나요.” _70쪽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잃어버린 기억과 사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여행길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색슨족 전사 위스턴과 신비로운 소년 에드윈, 아서 왕의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을 만나 모험을 더해간다. 다정하고 친절한 노부부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둘이 함께하는 것뿐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여행을 통해 과거를 기억해내야 하지만, 예기치 못한 모험들을 통해 문득문득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이들은 두려움 역시 점점 커지는 것을 깨닫는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가? 그리고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땅에 묻힌 거대한 거인이 깨어날 때, 그들은 지금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기억하려는 자와 잊으려는 자, 진정한 사랑과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의(또한 인류의) 기억과 망각에 대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묻힌 거인》은 잃어버린 기억과 사랑, 복수와 전쟁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판타지라는 환상적인 무대 위에서 더욱 과감하게 파고들어간다.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베일에 싸인 사랑 이야기와 함께, 망각의 입김을 내뿜는 용을 두고 벌어지는 전사 위스턴과 기사 가웨인 경의 갈등은 기억하려는 자와 잊으려는 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서로의 원한과 상처를 망각의 안개로 인해 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설은 “어떤 기억이든 소중한 것이고 우리는 기억을 꼭 붙들어둬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차라리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잘못된 일이 그저 잊히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이냐고 강하게 반문하는가 하면 “안개 덕분에 오래된 상처가 아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시구로는 NPR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작품이 유고슬라비아 해체나 르완다 대학살 같은 현대의 역사적 사건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파묻힌 거인》은 그 제목이 품고 있는 거대한 비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랑의 여러 모습에 대해 탐구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이 전쟁과 상처에 대처하고 회복하는 방식에 관한, 나아가 전후 갈등 해소에 관한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풍성한 작품이다. 용과 요정과 도깨비, 전사와 기사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판타지의 틀 속에서 이토록 애틋하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는, 또한 첨예한 현실의 문제까지 읽어내게 만드는 것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대가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고대 잉글랜드의 안개 낀 평원,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토끼 굴 언덕 마을에 살면서 동족인 브리튼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 부부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보살피지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마을을 뒤덮은 망각의 안개가 이들 부부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기억을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기억도, 오랜 원한과 상처에 대한 기억도 모두 가져가버렸다. 어느 날, 안개로 자욱한 기억 저편에서 비어트리스는 문득 자신들에게 다 큰 아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아들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길을 떠난 노부부는 하룻밤 묵어가기 위한 마을에서 용감한 젊은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도깨비들에게 납치된 소년 에드윈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액슬은 위스턴을 보면서 자신 역시 아마도 한창 나이 때는 위스턴과 같은 전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한편 도깨비에게 물린 상처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소년은 전사와 함께 마을을 떠나 노부부의 여정에 동참하고, 이들은 곧 낡은 갑옷을 입은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을 만난다. 액슬을 알아보는 듯한 가웨인 경은 그러나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숨긴 채 이들과 동행한다. 힘겹게 찾아간 수도원에서는 수상한 의식이 행해지는 가운데 이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흔들리는 바구니에 몸을 싣고 강물 위를 떠내려가다 도깨비에게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독을 품은 염소를 끌고 산을 오르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위험 가득한 여행길에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향한 사랑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동안 잊혔던 어두운 상처들을 만나게 되는데…….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_48쪽
그의 옆에서 비어트리스가 몸을 뒤척였지만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고 숨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늘 그렇듯 액슬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가슴속에 따사로운 기쁨의 감각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곧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슬픔이 묻어났다. 이런 느낌에 놀란 액슬은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하면 어두운 그늘을 몰아낼 수 있다는 듯이. _107쪽
“무한한 자비를 가진 신이 무슨 소용이 있지요? 신부님은 절 이교도라고 놀리지만 우리 조상이 믿는 신들은 그들의 방식을 명확하게 밝히고 우리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엄격하게 벌을 내립니다. 신부님의 기독교에서 믿는 자비의 신은 사람들이 몇 차례의 기도와 작은 속죄로도 용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탐욕을 추구하고 땅과 피를 향한 갈망을 좇도록 자유를 주어요.” _226쪽
“그런데 부인, 당신은 이 안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나요?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_264쪽
“케리그가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_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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