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질 들뢰즈 연구 (진기행)

나뭇잎숨결 2017. 11. 17. 03:31

질 들뢰즈 연구 - 차이의 존재론을 중심으로

 

진기행

 

부산외국어대학교 강사

 

2-148-9601-10

 

pp.443-470

 

 

 

[이 논문은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들뢰즈 전체사상에 관한 연구의 일부분으로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은 들뢰즈의 니체론이었다. 이 글은 <들뢰즈의 베르그송론>에 대한 연구로서,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들뢰즈에 관한 >연구이지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는 아니다. 베르그송 연구자들이 이 글에서 논해지고 있는 베르그송론에 대하여 문제 삼고자 할 때에는 들뢰즈의 글을 먼저 보기를 권한다. 인용문에 있어서 p.xx로 표기된 것은 영어판의 페이지를 가리키며, 00쪽으로 표기된 것은 한글판이나 일어판의 쪽수를 가리킨다. 인용문의 자세한 전거(典據)는 참고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용어나 개념에 있어서 외국어 표기는 불어일 경우에 이텔릭체로 표기하였다.]

 

 

1들뢰즈 초기 사상의 특징

 

 

들뢰즈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그가 행한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공격 때문에 비철학적 혹은 반(反)철학적인 사상가로서, 아니면 포스트 철학적이거나 포스트모던적 철학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오해가 팽배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오해일 뿐이다. 들뢰즈는 그의 사상의 여정의 처음과 끝을 철학적인 사유의 정수(精髓)로 장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축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개념의 창조와 철학적 사유의 폭을 현실에서 넓혀 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관하고 있다. 비록 그가 전통 철학(특히 플라톤과 헤겔)의 담론을 거부하고 오히려 생물학, 심리학, 예술, 정치학, 정신분석학 등의 담론을 즐겨 사용했을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창조하려고 하는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존재론의 틀 내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중기 혹은 후기의 저작들(들뢰즈 사상의 구분에 대해서는 졸고,「들뢰즈 연구 - 니체론」을 참조)에서 자유자재로 구사되고 있는 중요 개념들은 그의 초기 철학사 연구 기간 중에 마련되고 형성된 개념들의 변용과 발전이며, 따라서 그의 초기 철학사 연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을 때에는, 숱한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그의 초기 저작들(흄,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 칸트)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는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그 당시 유럽 대륙의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반(反)헤겔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그것은 그 당시 전 유럽 대륙을 사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헤겔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통하여, 특히 <부정>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참된 <비판>의 토대를 새롭게 구축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헤겔적·반변증법적 이론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그는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의 반헤겔주의적 시도는 매우 힘든 난관에 봉착한다. 그것은 <반대> 혹은 <대립>이라는 개념이나 운동 자체가 이미 변증법이라는 틀 안에 마련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개념이나 운동 그 자체가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반헤겔적인 시도가 역으로 가장 변증법적인 시도가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진정한 반헤겔적인 시도는 단지 대립이나 비판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거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헤겔만큼, 아니 오히려 헤겔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시도 자체는 사이비 반헤겔주의에 머물고 말 것이다.

 

들뢰즈가 모색하고 있는, 헤겔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는, 그의 이론적 실천을 이끌어 가는 두 가지 중심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부정(negation)에 대한 비변증법적 개념화와 실천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e) 이론이다."(하트, GD, p.xii) 들뢰즈는 이 두 중심적 요소를 새로운 이론적 지평 위에서 구축하기 위하여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를 가져온다.

 

들뢰즈는 이 세 사람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하여 비변증법적 부정개념과 구성적 실천 이론을 위한 지평을 열어 가고, 그들을 통하여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하여, 결국 『차이와 반복』에서 그 이론적 결실을 맺게 된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비 변증법적 부정개념>이 헤겔의 <부정개념>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그 개념이 단순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하트, GD, p.xii) 다시 말하면, 헤겔의 부정개념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 성격인 <지양>(Aufheben)이라는 성격, 마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부활 혹은 회복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 과연 <부정> 혹은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되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심각한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핏보면 들뢰즈의 이러한 논지는 극단적 허무주의(nihilism)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연 들뢰즈의 논지가 그러한지는 따져보아야 되겠지만, 우선 우리의 현실을 볼 때, 과연 누가 쉽사리 이러한 허무주의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 문제, 지구전체의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 문제, 아직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빈부 문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등 참으로 인류에게 끝없는 고통을 강요하고 있는 문제들이 헤겔적 부정개념으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가?

 

그러면 도대체 들뢰즈가 주장하고 있는 비변증법적 부정개념, 즉 순수하고 절대적인 부정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들뢰즈의 이론적 발전에 따라 차차 밝혀지겠지만, 우선은 <파괴적 계기>로 이해할 수 있겠다.(하트, GD, p.xiii) 즉 그것은 변증법적 종합의(synthetic) 계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며, "현존하는 일체의 것이 부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정되어지는 것이 완전하고도 제약되지 않은 힘에 의해 공격받는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부정이다.(하트, 같은 곳) 이러한 철저한 부정은 그 철저함 때문에 존재론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이러한 부정을 통하여 존재의 어떤 선구성된(preconstituted) 구조나 현존의 목적론적(teleological) 질서도 부정한다. 그렇다고 들뢰즈가 존재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엄밀하게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존재론적 담론을 새롭게 이끌어 내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들뢰즈의 존재론을 <차이의 존재론>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에 의해 이미 일정 부분 수행되었던 것이다. (이정우, 「질 들뢰즈, '철학자들 중의 철학자'」, 138쪽.참조) 그리고 실천에 대한 구성적 이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건설의 계기>로서 실천을 통한 존재의 구성 혹은 조직화를 말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존재는 "육체적 평면과 정신적 평면 위에 동시에 놓여 있게 되었으며, 행동의 복합적인 역동 속에, 신체들의 표면적 상호작용들 속에" 그 기반을 둘 수 있게 되었다.(하트, GD. p.xiv)

 

이러한 들뢰즈의 창조적 사유는 물론 오랜 기간의 철학사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서서히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다. 들뢰즈의 사상적 진화 과정 속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이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문제삼고 또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해 두자.(하트, GD, p.xiv .참조) 첫째로 그는 헤겔적인 부정적 존재론을 비판하고, 그것 대신에 작용적(efficient)이고 내부적인(internal) 인과성 개념에 의존하는, 절대적으로 적극적인 존재의 운동을 제시하려고 한다. 둘째로 그는 변증법적 규정(determination)의 부정적 운동에 대해 차이화(differentiation)의 적극적 운동을 대립시킨다. 셋째로 그는 일(一)과 다(多)의 변증법적 통일에 대해 생성(becoming)의 환원 할 수 없는 <다양성>을 대립시킨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조직화나 구성에 대한 질문과 생성의 존재(being of becoming)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들뢰즈는 이러한 존재론적 문제들을 윤리학적 술어로써 제기하려고 한다. 이 마지막 문제는, 들뢰즈가 베르그송 연구를 통해서는 해결하지 못하고 니체 연구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들뢰즈는 그의 논의 속에 전통적인 인과론을 드러내놓지 않고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목적인(final cause)이나 형상인(formal cause)이 아니라 작용인(efficient cause)을 그의 차이의 존재론 전체를 해명할 수 있는 중심 개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는 조직화라는 개념을 질서(존재·진리·사회의 질서)에 대비시키면서 내재적인 창조를 해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들뢰즈가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정리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일 뿐이고, 그의 초기 사상 전체에 대한 논의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베르그송에 대한 논구(論究)는 그의 저작 여러 곳에서 수차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의 베르그송론을 총괄적으로 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우선 그의 초기 베르그송론에 한정하여 논하려고 한다. 들뢰즈의 초기 베르그송에 대한 글은 3편이 있다.

 

먼저 "Bergson"(Les philosophes celebres, edited Maurice- Ponty, Editions d'Art Lucien Mazendo, Paris, 1956, pp.292-299. 이하에서『베르그송』으로 약기함)과 "La conception de la differerce chez Bergson"(Les etudes bergsoniennes, no.4, 1956, pp.77-112. 이하에서 『주의』로 약기함)가 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 쓰여진 "/Le bergsonisme" P.U.F., Paris, 1966, 이하에서 『주의』로 약기함)이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 세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데, 앞의 두글은 일역본(『差異について』, 靑年社, 1992)을 텍스트로 하였으며, 세 번째 저서는 영역본(Bergsonism, ZONE BOOKS, 1988)을 텍스트로 삼고 일역본(『べルクソンの哲學』, 法政大學出版局, 1992)과 대조하였다. (영역본과 일역본이 다른 곳은 원본을 참조하여 교정하였다).

 

 

2차이의 존재론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존재론적으로 독해하면서, 특히 <차이> 개념을 중심 개념(key word)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차이의 관념은 베르그송의 철학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 것이지만, 역으로 베르그송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에 최대의 기여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며(『차이』, 7쪽), "베르그송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며, 차이의 실현의 철학"으로 간주한다. (『차이』, 125쪽) 이 <차이> 개념을 통하여 들뢰즈는 존재 그 자체를 운동 속에서, '존재의 토대인 실재적 역동 속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 베르그송을 <차이의 존재론>으로 독해하면서 들뢰즈가 해결하려고 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하트, GD, p.2. 참조) 첫째, 헤겔의 논리학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두 계기, 즉 존재의 규정(결정, determination). 그리고 일(一)과 다(多)의 변증법과 대결함으로써, 헤겔의 변증법 즉 존재의 부정적 논리학이 결국 <차이>에 대한 잘못된 개념화라는 것을 밝혀 내려고 한다. 둘째,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정초 하기 위하여 차이 속에서의 존재의 적극적 운동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들뢰즈의 베르그송에 대한 첫 연구성과물이라고 할수 있는 『차이』와 『베르그송』을 중심으로 그의 베르그송론, <차이의 존재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두 논문에서의 주된 목표는 역시 기존 철학의 오류, 즉 차이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베르그송이 그에 앞선 철학자들에게 퍼붓는 본질적인 비난은 참된 본성의 차이를 확인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차이』, 9쪽) 그래서 "어떤 이유로 저것이 아니라 이것인가? 베르그송은 항상 이 차이의 문제를 제출한다."(『차이』32∼33쪽) 들뢰즈의 베르그송은 (본성의 차이)와 <정도(단계)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한다. 들뢰즈가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크게 보아 철학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철학이 만물과의 사이에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철학이 사물 그 자체를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현실적 존재에 없는 모든 것과의 차이에 있어서, 즉 그 내적 차이(difference interne)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 들뢰즈는 일관되게, "존재란 차이이며 부동(不動)적인 혹은 무차이(無差異)적인 것이 아니며, 사이비 운동에 다름아닌 모순도 아니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또한 "존재란 사물의 차이 그 자체이며 베르그송은 그것을 누차 뉘앙스라고 부른다"(『베르그송』, 178쪽)고 한다. 만약 철학이 이러한 내적 차이를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또한 동일한 유(類)에 속하는 사물의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음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성의 차이야말로 모든 존재론적 문제를 해명하는 열쇠이다.(『차이』, 13쪽,참조) 따라서 철학은 내적 차이에 도달하기 위한 본성의 차이를 겨냥하던가, 아니면 사물과의 사이에 소극적 혹은 유적(類的) 구별의 관계만을 유지하고 비판 혹은 일반성의 영역에서 혹은 단순히 외적인 반성의 상태 속에서 출구를 발견하던가, 어느 쪽일 것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 철학의 이상(이상)은 "사물과 개념의 일치"이며, 그것은 바로 내적 차이이며, 이 일치 혹은 내적 차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본성의 차이를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차이』, 14쪽) 여기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인 직관을 가져온다. 베르그송의 독창성 중의 하나는 "직관 그 자체를 참된 방법으로서, 사이비 문제를 제거하고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방법"(『베르그송』, 171쪽)으로서 조직화했던 것에 있으며, 직관이란 바로 "차이의 향수(享受)이다."(『차이』, 14쪽) 들뢰즈가 베르그송 철학에서 직관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는 그의 세편의 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먼저 『베르그송』에서 들뢰즈는 <직관의 성격>을 네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직관의 첫 번째 성격은, "거기에 있어서 또한 그것에 의하여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추론되고 결론으로 주장되는 대신에 스스로 나타나고,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베르그송』, 172쪽) 이 직관의 성격은 철학의 전체적인 방향설정과 관계되는 중대한 것으로, 철학이 "과학이 바로 우리에게 은폐하고 있고, 우리로부터 빼앗고 있는 인식과의 관계를 창출하고, 혹은 오히려 부흥"(위의 글,같은 곳)시키려고 할 때, "우리를 사물로부터 또한 그 내면성으로부터 갈라놓고 있는 엄청난 형식이나 관계"(위의 글, 173쪽)를 찾아내고 해명하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의 성격이다. 직관의 두 번째 성격은 "스스로를 회귀(回歸)"로서 나타낸다는 것이다.(위의 글, 173쪽) 공간, 지능, 그리고 과학은 우리를 사물과 격리시키고 사물의 외부에 두게 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두 개의 세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可知的)인 세계의 어떠한 구별도 없으며, 오직 두가지의 운동 혹은 오히려 한 운동의 두 개의 방향, 즉 하나는 그 운동이 그것을 산출한 것 속에 응결하는 방향과 다른 하나는 산출된 것 속에 그 자체가 거리로부터 생겨난 운동을 재발견하는 방향이 존재할 뿐이다. 이 후자의 방향은 자연에 거슬러 스스로를 창출하는데, 자연은 거기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긴장 속에서 스스로를 되찾는다. 이와같이 직관은 우리를 사물의 내부로 되돌려 놓는 방법이며, 이것이 직관의 두 번째 성격이라고 들뢰즈는 강조한다. 직관의 세 번째 성격은 "차이를 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위의 글, 180쪽) 즉 직관은 자연의 다양한 차이, <현실계의 분절(分節)>을 탐구하여 찾아내는 방법이다. "직관은 바로 분할의 참된 방법으로서 나타난다."(위의 글, 182쪽) 현실의 존재는 분절화되어 있으며, 사이비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차이를 무시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베르그송의 가장 유명한 부분중의 하나는 바로 강도(强度)라는 것이 사실은 자연의 다양한 차이를 숨기고 있으며,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직관이라는 것을 주장한 점에 있다. 직관의 네 번째 성격은, 직관이 사물을 재단하기 위하여 자연의 분절을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은 또한<사상(思想)의 방향선>, 차이화의 방향성을 소급하여 몇가지 개연성의 묶음으로서 단일한 것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직관은 재단(裁斷)할 뿐만 아니라, 고쳐 재단하며, 차이화는 단일적이며 불가분한 것 즉 지속하는 것의 권능이다. 들뢰즈는 직관에 대하여 『차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고있다. 직관의 첫 번째 노력은 본성의 차이의 확정이다.(『차이』, 15쪽) 즉 현실계의 분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절된 두 사물간의 본성의 차이는 아직 그것 자체의 내적 차이는 아니다. 따라서 직관의 또하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상(事象)의 방향선(方向線)의 구별이다. (『차이』, 16쪽) 현실의 분절화는 만물을 그 본성의 차이에 따라서 구분하고, 그것은 시차(示差)작용 즉 미분화를 형성한다. 반면에 사상의 방향선은 그 방향이 끝까지 찾아가게 되는 몇가지 방향이 있으며, 유일하게 동일한 것으로 집중적으로 향하는 방향이다. 그것은 통합작용 즉 적분화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계의 분절화 작용은 재단(裁斷, decoupage) 혹은 구분에 해당하고, 사상의 방향선 <다시 재단함>(recoupement) 혹은 재음미, 선들의 교차에 해당한다. 이 두가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확산과 수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현실의 분절화는 우리에게 사물 상호간의 본성의 차이를 맡기며, 사상의 방향선은 그 차이 그 자체와 동일적인 그것 자체, 어떤 것과의 동일적인 내적 차이를 우리에게 나타낸다."(「차이』, 18쪽) 이러한 본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바로 "철학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서 들뢰즈는 두가지를 예로 들고 있다. 하나는 "본성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로 바꾸어 버린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본성의 차이를 "단순한 강도(强度)의 차이(diffence d' intensite)로 바꾸어 버린 형이상학이다."(『차이』, 19쪽)

 

먼저 과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살펴보자. 과학에서는 질적인 차이를 단지 공간의 등질성(等質性) 속으로 용해시켜 버린다. 공간이란, 지능이 지능에 몸을 맡기는 물질에 의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공간이 오성에게 제시하는 것, 오성이 공간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사실·산물·결과이며, 그것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간 속에서의 사물간에는 비율의 차이(diffence de proportion)밖에 없다. 이것에 비하여 본성에 있어서 다른 것은 사물도, 사물의 존재방식도 아니며, 성격도 아니라, 바로 경향(tendances)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우리는 "현실에 있는 성격을 고집해서는 안되며, 발전해야할 경향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차이』, 22쪽) 하나의 사물은 그것 자체로서 또한 그 참된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기 이전에 하나의 경향의 드러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단순한 정도의 차이는 경향으로부터 끊어 내어져 그 기초적인 원인들 속에서 파악된, 사물들의 정확한 규격이다"(「차이』, 23쪽)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들뢰즈의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원인이란 실제로 양(量)의 세계에 관계될 뿐이다. 공간 속에서 파악된 사물이나 산물이나 결과는 항상 혼합물이며, 지능은 혼합물밖에 찾아내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혼합물이란 폐쇄된 것과 열린 것, 기하학적 질서와 생명의 질서, 지각과 감정, 지각과 기억등의 혼합물을 말하며, 거기에는 어떠한 것도 본성으로서 어떠한 것과의 사이에도 차이를 낳지 않는, 그러한 견지에서 보여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등질적인 것은 바로 혼합물이다. 왜냐하면 "단일적인 것은 항상 본성에 있어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경향만이 단일적이며 순수한 것이다."(『차이』, 25-26쪽) 현실에 차이를 가진 것은, 만들어 내어진 것의 너머에 경향을 재발견하는 것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한편 형이상학은 거의 강도의 차이만을 문제로 한다. 이러한 오류는, 과학과 같이 혼합적인 관념들 보다도, 오히려 사이비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 사이비 관념들도 일종의 혼합적 관념이며, 강도의 오류는 궁극적으로 공간의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본성의 차이 대신에, 강도의 차이를 문제로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의 자의성을 고발하는 것이 직관의 역할이다.

 

우리는 참된 차이에 도달하기 위해서 혼합물을 분할해야 한다. 직관은 차이 혹은 분할의 방법으로서, 혼합물을 두 개의 경향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는 주체는 아니고 경향의 드러남이며, 또한 더욱이 하나의 존재의 어떤 경향이 다른 경향과 대립관계를 가지는 한에서의 경향의 드러남이다. 따라서 주체는 존재가 아니라 경향이다. 경향만이 개념과 그 대상을 통일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대상은 더 이상 우연적이지도 않으며 일반개념도 아니게 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경향을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배적인 경향이고, 혼합물의 참된 본성을 규정하는 것은 단지 이 지배적인 경향만이며, 유일한 개념이며 순수한 것은 이 경향 뿐이다. 다른 하나의 경향은 지배적인 경향을 위태롭게 하며, 방해하는 불순성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두개의 경향 사이의 본성의 차이는 사물 상호간의 정도의 차이나 존재들 상호간의 강도의 차이에 비하여 진보한 것이지만, 아직 외면적 차이를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고 한다. 진정한 본성의 차이는 이 두 개의 경향의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본성의 차이는 그것 자체가 경향의 하나이며, 다른 경향에 대립하고 있다. 예컨대 공간은 물질과 지속이라는 두가지 경향의 혼합물인데, 지속이란 자기에 대하여 차이를 만드는 것인 반면에, 물질은 자기에 대하여 차이를 만들지 않고, 반복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속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차이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것과의 사이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신과의 사이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의 차이는 두 개의 사물 혹은 오히려 두 개의 경향의 사이에는 더 이상 없고, 본성의 차이는 그것 자체가 사물이며, 다른 경향에 대립하는 하나의 경향이다. 지속 경향이란 자기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차이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차이를 가진 것이란 직접적으로 실체와 주체와의 일치이다. 이리하여 차이는 더 이상 두가지 경향사이에는 없고, 그것 자체가 경향의 하나이며, 따라서 외적 차이는 내적 차이로 되고, 본성의 차이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본성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분절화와 사상의 방향선이 서로 대조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의 의미이다.

 

나아가 들뢰즈는 <차이>에 대한 오류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헤겔 변증법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내적 차이는 모순, 타자성, 부정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차이』, 48쪽) 이 점에서 차이에 대한 베르그송적인 이론과 방법은 플라톤의 타자성의 변증법과 그리고 헤겔의 모순의 변증법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들뢰즈가 보기에 "베르그송적인 사고방식의 독창성은 내적 차이가 모순이나 타자성, 부정성으로까지는 가지 않고, 또한 가야하는 것도 아닌 것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 있다."(『차이』, 48쪽) 그런데 들뢰즈가 헤겔 변증법에 대하여 베르그송을 무기 삼아 비판하는 방식은 좀 특이하다. 헤겔을 직접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헤겔 변증법의 문제점들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계론(Mechanism)과 플라톤주의(Platonism)를 비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헤겔에 대한 비판을 유도해 내고 있다. 여기서 논의의 중심 되는 명제는 헤겔이 스피노자로부터 가져온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부정적 운동을 통한 규정된 존재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비규정적 존재이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존재론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기계론에 대하여 비판하는 논지를 살펴보자. 기계론에 대한 주된 비판은 그것이 존재의 실체적이고 필연적인 질(quality)을 파괴한다는데 있다. 기계론적 결정(규정,determination)의 과정에서 제시되는 차이는 어디까지나 존재에 대하여 외부적이며 양(量)적 차이이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기반을 해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계론적 외부적 차이는 항상 원인, 목적, 우연한 기회로서의 <타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필연적인 질을 파괴하고 오히려 우연적인 질을 도입한다. "결정은 우연적일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은 하나의 원인, 하나의 목적 혹은 하나의 우연으로부터만 그 존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존속하는 외재성을 포함하고 있다."(『차이』, 55쪽) 그러므로 기계론적 결정은 존재의 실체적 내면성이 아니라 단지 실재적 외면성만을 함축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비결정적(비규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계론에 대항하여 베르그송은 생명의(vital)의 차이란 내적 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내적 차이는 단순한 결정(규정)으로서는 생각되지 않는다. …생명적 차이는 결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며, 선택에 있어서 그것은 비결정 그 자체일 것이다."(『차이』, 54-55쪽) 그러면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말하는 내부적 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를 정초하는 것이며, 존재에 대해 그 필연성과 실체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인이 그 결과에 대하여 내부적이어야 한다. 여기로부터 인과성에 관한 논의가 발생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존재론을 독해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과 그것을 이어받은 스콜라철학의 인과성론을 차이에 대한 논의로 대체한다. 따라서 "사상(事象)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차이이며, 그 원인들은 아니다."(『차이』, 125쪽) 질료인, 목적인, 형상인, 작용인 중에서 내부적 원인으로서 존재를 실체로서 그리고 자기 원인으로서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작용인> 뿐이다. 왜냐하면 나머지 원인들은 그 결과에 대하여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며, 존재의 필연성이 아니라 단지 존재의 가능성만을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들뢰즈의 베르그송에서는 <작용인>을 <작용적 차이>로 대체하고, 그 작용적 차이란 바로 존재의 내부적 동력이 되는 차이이다. 이 내적 차이, 작용적 차이만이 존재의 필연성과 실재적 실체성을 유지시키고, 내부적인 생산적 역동을 통하여 자기 원인이 되는 것이다. 기계론적 결정(규정)은 존재에 대하여 이러한 역할을 한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적인 질료인에 의하여 구성되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논의가 분명히 단순히 인과성에 대한비판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원인에 대한 외부적 개념화에 대한 거부이자 내부적, 작용적 개념에 대한 지지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하트. GD, pp.5-6)

 

다음으로 우리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플라톤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대결하려고 하는지를 살펴보자. 들뢰즈가 보기에, 플라톤과 베르그송 간에는 커다란 유사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두사람이 모두 <차이의 철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들 두사람은 모두 차이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모순으로 환원시키거나 모순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들뢰즈가 플라톤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목적(지향)성(finality)의 원리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물의 차이는 그것의 목적에 의해서만, 즉 선(the Good)의 이데아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차이』, 65쪽)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과 사물의 차이가 아니라 각 사물과 이데아 사이의 차이이다."(이정우, 앞의 글, 144쪽) 플라톤은 존재를 목적인에 의하여 근거지우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존재의 필연성을 내부적이지 않은 외부적인 원인, 즉 목적인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내부적 동력에 의하여 추동되는 차이를 가지고 해명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목적인과 베르그송의 작용인, 즉 목적적 차이와 작용적 차이가 대조된다. 기계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에서도 문제는 적(지향)성이라는 외부적인 지지에 의존하는 차이로서는 존재의 필연성과 실체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데 있다. 오직 내부적인 작용적 차이만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기계론 및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새롭게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과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본성의 차이들)(differences of nature)과 <정도(혹은 단계)의 차이>(differences of degree)를 구별하고, 기계론자들과 플라톤주의자들도 "본성의 차이가 있었던 곳에 오직 정도의 차이들만을 인정했다"(『차이』, 9쪽)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본성의 차이만이 자기 원인으로서 필연성과 실체성을 함축하는 차이로서 나타날 수 있고, 정도(단계)의 차이는 우연적 원인으로서 나타나는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부적 차이를 그 자체로서, 순수한 내부적 차이로서 생각하는 것, 차이의 순수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차이를 절대적인 것에로 올려놓는 것 - 이것이 베르그송의 노력이 갖는 의미이다."(『차이』, 49쪽) 비록 기계론과 플라톤주의가 차이를 사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연에 의한 차이, 즉 징도(단계)의 차이에 이를 뿐이고, 베르그송의 내부적 차이, 즉 본성의 차이에 의해서 우리는 실체적인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기계론과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독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대결하려고 하고 있는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을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들뢰즈가 보기에 헤겔은 차이의 외면성을 극단에까지 끌고 가는 사람이다. 즉 헤겔은 외부적 차이를 절대적 외면성으로까지 가지고 간다. 이 점에서 헤겔은 기계론과 플라톤주의의 오류를 한데 끌어 모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기계론과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의 외면성은 제한된 것이었다. 기계론에서는 차이를 외부적 지지에 의존하는 것으로 개념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외부적 지지물인 질료적인 사물에 의존하고 있는 한에서이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지지물인 목적(지향)성에의존하고 있는 한에서이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외부적 차이를 무제한으로, 모순(contradiction)으로까지 가지고 간다. "헤겔에 의하면, 사물은 자기와의 사이에 차이를 만들지만, 그것은 먼저 자기 아닌 일체의 것과의 사이에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며, 이리하여 차이는 모순으로까지 간다."(『차이」, 69쪽) 거기에 비하여 "베르그송의 경우, 잠재성의 관념의 덕택으로, 사물은 먼저 직접적으로 자기와의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차이』,68쪽) 베르그송에게서 사물의 차이는 내부적이고 작용적인 생산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헤겔 변증법에 있어서 모순에 의한 발전은, 그 원인이 결과에 대하여 완전히 외부적인 발전이다. 그리고 대립물의 매개 과정은 필연적으로 외부적 인과성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적 존재론도, 기계론과 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필연성이나 실체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변증법적 존재는 실재적 외면성의 극단적인 경우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매개라는 헤겔적 개념에 대한 베르그송적 공격의 핵심은, 그것이 존재를 필연적이고도 실체적인 것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하트, GD, p.8)

 

뿐만 아니라 들뢰즈의 베르그송은, 헤겔적 변증법이 존재의 구체성과 유일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도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헤겔에 있어서 변증법적 차이는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플라톤주의에 퍼부을 수 있었던 이의(異議)는 차이에 대해서 아직 외적인 사고방식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 있었지만, 모순의 변증법에 보내는 이의는 단지 추상적인 차이의 관념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 있다."(『차이』, 72쪽) 외부적 원인에 의한 외부적 차이는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것을 생산할 수 없기 때들에 추상적이다. 결국 들뢰즈가 보기에 "부정없는 차이의 개념, 부정을 포함하지 않은 그 사고방식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야맡로 베르그송이 가장 진력(盡力)했던 바이다."(『차이』, 72쪽)

 

들뢰즈는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 초기 단계에서, 즉 『차이』와 『베르그송』에서, <내부적 차이>라는 개념에 존재론적으로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하고있다. 이 차이 개념을 가지고 들뢰즈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문제들을 역전시켜 놓았다. '어떻게 존재가 결정성(규정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어떻게 존재가 그것의 차이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대신에, '어떻게 차이가 그것의 존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다. 베르그송의 내부적 차이는 작용적 인과성으로서 나타나면서, 본성의 차이 혹은 실체를 그 필연성과 실재성에서 지지하고 있는 차이를 포착한다. 이에 비하여 기계론과 플라톤주의에 의해 제시된 외부적 차이는 존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지지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만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운동을 가지고 존재를 해명하려고 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본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도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존재는 우연적일 뿐 아니라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상은 정도도 뉘앙스도 수반 할 수 없다. 이리하여 모순의 변증법은 차이 그 자체를 결여하고 있으며, 차이란 뉘앙스의 근거이다. 그리고 모순이란 결국 베르그송이 고발하고 있는 엄청난 회고적 성찰에 의한 착각의 하나에 불과하다."(『차이』, 70-71쪽)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생명적 차이는 결정(규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며 선택에 있어서 그것은 비결정(비규정) 그 자체일 것이다."(『차이』, 55쪽)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주장하는 비규정(비결정)이란 결코 비합리성이나 추상적인 것인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이성, 규정이 아니라 차이인 철학적 이성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비규정(비결정)은 존재의 창조성과 독창성, 그리고 예견 불가능성을 올바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경우, 예견 불가능성, 비결정성이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인 것이며 우연성의 부정이다."(『차이』, 56쪽)

 

3다양성(multiplicity)과 조직화

 

 

 

앞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차이』와 『베르그송』을 중심으로 <차이>개념을 중심으로 한 베르그송 독해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그보다 10년 후에 쓰여진 『주의』에서 들뢰즈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 저서에서 들뢰즈는 10년 전의 두 글의 연장선상에서 베르그송을 독해하고 있지만, 약간의 논지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 저서에서도 들뢰즈는 베르그송 철학을 여러 가지 면에서 풍부한 독해를 시도하고 있는데, 특히 중심되는 문제는 역시 헤겔의 존재론적 문제, 즉 규정의 부정적 운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두 글과 비교하여 그 비판의 초점을 약간 변경시켜, 존재의 다양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즉 <일(一)과 다(多)>의 이론과 <다양성>의 이론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 된다. "철학에는 일과 다를 결합한 많은 이론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이론들은 일반 관념에 의하여 실재를 재구성한다고 주장하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자아는 하나이며[테제], 그것은 다이고[안티테제], 다음으로 그것은 다의 통일이다[진테제]라고 말한다. 혹은 오히려 일은 이미 다이고, 존재는 비존재 속으로 이행하여 생성을 낳는다고 말한다. "(『주의』, pp.43-44) 들뢰즈는, 이러한 추상적 사고의 운동을 부정하는 점을 베르그송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라고 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통하여 헤겔의 변증법을 매우 거칠고 단순화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주안점은 두가지다. 하나는 "이러한 변증법적 방법에 있어서는, 헐렁헐렁한 옷과 같이, 너무나도 큰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주의』, p.45)는 점이다. 즉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일반적인 일, 일반적인 다. 일반적인 존재, 일반적인 비존재등, 실재는 이러한 추상적인 것으로 재구성된다. 그렇게 되면 실재를 접합시키려고 하는 변증법은 도대체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변증법은 사이비 운동"이라는 점이다. 즉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의 운동이며, 불확실한 힘에 의해서만,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대립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주의』, p.44) 물론 헤겔의 변증법을 이런 식으로 단순화하여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며, 해겔을 곡해하고 있다는 역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헤겔에 대하여 비판하는 주안점은 바로 변증법이 존재를 역동성이나 과정에 의하여 인식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변증법이 사이비 운동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일(一)의 그 대립물로의, 그 비존재로의 시초적 운동은 완전히 외부적이며, 오직 우연적인 관계만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적 종합(진테제)은 단지 추상적인 항들(terms)들의 조합(combining)이나 결합(joining)에 불과하고, 따라서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그리고 헤겔 변증법의 용어들은 실재 존재의 특이성과 유일성에 대한 치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다. "베르그송이 변증법에 반대하여, [일과 다라고 하는] 대립하는 것의 일반적 개념에 반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명확한 지각, <무엇>과 <어느 만큼>에 대한, 또한 <뉘앙스> 또는 가능태로 있는 수(數)라고 부른 것에 대한 명확한 지각이다."(『주의』, p.45) 결국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들뢰즈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이다. "다양성의 개념에 의하여 우리는 <일과 다>를 매개로 하여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주의』, p.43)

 

들뢰즈는 여기서 또다시 다양성을 둘러싸고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리만(G.B.R.Riemann)과 아인슈타인을 들고 있다. 물론 리만과 아인슈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헤겔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들뢰즈는 다양성을 두 개의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공간에 의하여, 혹은 동질적인 시간의 불순한 혼동에 의하여 표상 되는 것으로, 그것은 "외재성·동시성·병치(juxtaposition)·질서·양적 차이·정도(단계)적 차이의 다양성이며, 비연속적 그리고 실재하는 수적(數的) 다앙성이다."(『주의』, p.38)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지속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계기(繼起, succession)·융합·조직화·이질성·질적 구별 또는 질적 차이의 내적 다양화이며, 수(數)로는 환원되지 않는 잠재적 그리고 연속적인 다양성이다."(『주의」, 같은 곳) 리만과 아인슈타인은 다양성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수적이고 양적인 다양성만을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것은 외면적인 다양성이며, 질서의 다양성이다. 대신에 베르그송은 질적 차이에 기반한 질적 다양성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내면적인 다양성이며, 조직화의 다양성이다. 천재적인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리만은 "사물을 그 차원 즉 독립변수를 함수로 하여 규정된 <다양성>으로서 정의하고, 또한 그는 <불연속적 다양성>과 <연속적 다양성>을 구별하였다."(『주의』, p.39) 들뢰즈에 의하면 베르그송은 이와같은 리만의 다양성의 구별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즉 베르그송은 연속적인 다양성을 본질적으로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지속은 질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성이고, 물질은 양적이고 수적인 다양성이다. 리만은 바로 이 질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양적이고 수적인 다양성을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보면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그도 물체의 수축, 그 물체의 시간의 팽창, 운동의 상대성, 시간의 다양성, 시간의 복수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베르그송도 지속 즉 시간이 본질적으로 다양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어떠한 유형의 다양성인가하는 것이다. 다양성에는 실재적·수적·비연속적 다양성과, 잠재적·연속적·질적 다양성이라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첫 번째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다양성의 두가지 유형을 혼동하고, 그것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의 혼란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을 베르그송은 비난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본다. (『주의』, p,80. 참조) 이러한 리만과 아인슈타인에 비하여 헤겔은 전혀 다양성을 사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은 본성의 차이도, 그리고 정도(단계)의 차이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베르그송으로서 중요한 것은 다와 일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닌, 두 가지 유형의 다양성을 구별하는 것이다."(『주의』, p.39) 이와 같이 들뢰즈는 다양성의 두 가지 유형을 구별함으로써, 헤겔의 변증법을 대신하는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질서의 다원론이 아니라 조직화의 다원론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 연구를 통하여, 적극적이고 내부적인 운동을 통하여 존재는 그 유일성과 특수성에서 질적으로 규정되고 자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모든 논의를 꿰고 있는 중심 개념은 역시 <차이>라는 개념이다.

 

들뢰즈는 존재의 필연성을 떠받치고 존재에게 동일성과 차이를, 통일성과 다양성을 제공해 주는 그러한 존재의 적극적인 운동을 정교화하려고 한다. 이때 이 존재의 적극적인 운동은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 사이에서의 운동이다.

 

들뢰즈는 존재론적 운동에 대한 논의를, 베르그송 독해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 사이의, 그리고 지속과 물질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근거하여 전개하고 있다. 공간은 정도(단계)의 차이만을 내포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양적인 변화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질적인 차이를 포함하며 그렇기 때문에 실체의 참된 매개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속과 공간 간에도 구별이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지속은 모든 질적인 차이를 자기를 위하여 떠맡던가 혹은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왜냐하면 지속에는 그것 자체에 대하여 질적으로 변화하는 <힘>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단계적인 차이만 나타낸다[왜냐하면 공간은 양적인 동질성이기 때문이다]."(『주의』, p.31) 지속은 본성의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그 안에서 우선적인 존재론적 운동을 발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공간은 그 자신과 다를 수 없으며 단지 반복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도(단계)의 차이만을 포함하는 공간 혹은 물질은 양태적 운동의 영역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질적인 차이를 포함하는 것은 지속이며, 그 결과, 지속은 그것 자체에 대한 교체로서 정의되기에 이른다. 정도의 차이를 배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공간이며, 그 결과, 공간은 무한정한 분할가능성의 도식으로서 나타나기에 이른다. …물질은 본질적으로 반복이다."(『주의』, pp.92-93) 왜 그런가? 그것은, 공간은 외면성의 다양성, 양적인 차이화의 수적인 다양성, 질서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순수한 지속은 내부적 다양성, 질적인 차이화의 이질성, 조직화의 다양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주의』 p.38.참조) 그 리고 지속의 영역은 심원한 통일성을 역시 제공해주지만, 공간은 그 양태적 본성 때문에 고유한 통일성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적인 본성을 실체적 통일성으로서 인식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유일하고, 하나이며,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주의』, p.78) 시간에 의해서 사고해야만 한다. 존재의 적극적인 운동은 지속 혹은 시간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은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유일한 시간의 가설만이 잠재적 다양성의 성질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러한 운동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먼저 잠재적인 것이란 존재의 단순성을 말하며, 그 자체 안에서 순수한 기억내용(추억, recollection)을 말한다.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미분화된 것도 아니며, 실재적이며 차이화의 내부적 과정을 통해 질적 규정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잠재적 존재는 무한하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순수하고 초험적인 존재이다 이에 비하여 현실화된 존재는 미분화되고 질적으로 규정되며 제한된다는 점에서 실재적 존재이다. 그리고 "분화(차이화)한다는 것은 잠재성이 실현되는 운동인 것이다."(『차이』, 57쪽) 들뢰즈는 차이화의 과정 혹은 현실화의 과정은 바로 현실적인 것 안에서의 잠재적인 것의 펼침(unfolding)이며, 생명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차이화는 "생명이 스스로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내적 폭발력"(『차이』, 57쪽)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잠재성, 단순성, 총체성으로서의 순수한 존재는 이 차이화의 과정을 통하여 현실화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을 베르그송에 있어서 존재의 차이화는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서 개념화되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강조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가능적인 것은 현실성을 가질 수 있지만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로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잠재성으로서 하나의 실재성을 소유한다."(『주의』, p.96) 즉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이지만 가능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운동은 가능-실재 관계가 아니라 잠재-현실관계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와 가능적인 것의 실재화를 구별하고, 실재화 보다 현실화를 옹호하고 있다. "실재화의 과정은 유사(resemblance)와 한정(limitation)이라는 두가지 본질적인 규칙에 따르고 있다."(『주의』, p.97) 왜냐하면 실재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보다도 더 가지고 있는 것은 존재 또는 실재성뿐이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은 그것이 실재화하고 있는 가능적인 것과 유사하다. 바꾸어 말하면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또한 가능적인 것이 모두 실재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화에는 하나의 한정이 포함된다. 이 한정에 의하여 몇 가지 가능적인 것이 배제되거나 방해받는 것이며, 다른 몇 가지 가능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잠재적인 것은 실재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잠재성의 특질은 차이화하면서 현실화되는 방식으로, 또는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차이화하고 차이화의 선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주의』, 같은 곳) 이러한 현실화의 규칙은 유사와 한정이 아니라, 차이 쪼는 분화와 창조이다. 왜냐하면 실재적인 것은 그것이 실재화하는 가능적인 것의 이미지이며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창조적일 필요가 없지만 현실적인 것은 그것이 구체화하는 잠재적인 것과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차이 때문에 현실화의 과정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베르그송이 기계론 및 목적론, 그리고 변증법을 함께 비난하는 것은 바로 "운동에서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를 보는 대신에, 운동을 현재의 항들 사이의 관계로서 구성하는 잘못된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르그송』, 186쪽)

 

이 문제를 앞서 언급한 <질서>와 <조직화>의 관점에서 논하면 다음과 같다. 가능적인 것의 실재화는 질서의 다양성을 낳고,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조직화의 다양성을 낳는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적 존재는 가능적인 것의 <사이비 현실성> 속에 미리 주어져 있거나 미리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질서의 다양성만을 낳지만,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차이화의 과정이므로 이 과정에서 현실적 존재의 독창적인 배열 혹은 정합성이 창조되며, 이 과정에서 바로 조직화의 다양성이 생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고 독창적인 존재를, 그리고 혼합의 새로운 면을 형성할 수 있는 창조적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조직화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통일성 속에 있는 다양성의 전성설(前成說, preformism)에 대하여 거부했기 때문에(『주의』, p.98), 즉 모든 실재는 이미 가능적인 것 속에 주어져 있거나 정해져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들뢰즈의 <질서>에 대한 비판과 <조직화>에 대한 긍정으로서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적론적 질서, 가능적인 것의 질서, 변증법의 질서를 거부하고, 대신에 조직적인 역동체, 현실적인 것의 조직화, 다양성의 조직화를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적 조직화와 논의는 들뢰즈의 베르그송 연구에서는 해명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베르그송에게서는 약간의 암시만 나타날 뿐이고, 니체를 거쳐 스피노자에 가서야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베르그송에 있어서 통일성의 다양성으로의 이행, 즉 차이화의 과정이나 현실화의 과정은 잘 해명되지만, 그 역의 과정 즉 다양성에서 통일성으로의 조직화의 과정은 해명하기 힘들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시간에 근거한 운동은 "현재로부터 과거로, 지각으로부터 기억내용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로, 기억내용으로부터 지각으로 움직이는 것"(『주의」, p.63)이지만, 우리에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적인 것의 창조적 조직화를 위해서 필요한 운동은 지각으로부터 새로운 기억내용으로의 운동이며, 새로운 통일을 만들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정향되어진 확장하는 운동이며, 그것은 실재적 조직화의 공통 지점으로서의 미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들뢰즈의 베르그송 연구에서는 매우 암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들뢰즈는 현실의 창조적 조직화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생명이 스스로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내적 폭발력"으로서의 <직관>이 아니라, <창조적 정서>(creative emotion)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정서는 바로 우주적 기억이 아닐까? 우주적 기억은 모든 차원을 동시에 현실화하고, 인간에 고유한 면 또는 차원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을 모든 창조의 운동에 적합한 창조자로 만드는 것이다."(『주의』, p.111)고 하고, 또한 "창조적 정서는 지능 속에서의 직관의 발생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열린 창조적 전체성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명상하는 것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행동하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이다"(『주의』, 같은 곳)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의 논의는 베르그송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니체적이다. 이 부분 때문에 들뢰즈는 많은 베르그송 연구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데(베르그송 연구자들에 의한 들뢰즈에 대한 비판은 하트, GD, pp.22-25를 참조),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적인 존재론으로부터 니체적인 윤리학으로 나아가게 된다.

 

 

4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들뢰즈의 베르그송론을 <차이>개념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들뢰즈가 50년대 중반부터 주장했던 이 개념은 그후 프랑스 철학의 핵심개념으로 논해지게 되었다. 특히 데리다에 의하여, 비록 들뢰즈와는 다른 의미일지라도, 집중적으로 논구되었음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들뢰즈의 <차이> 개념은 베르그송에서 시작하여 니체와 스피노자를 거쳐 『차이와 반복』에 가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논해진다. 그러므로 현재 베르그송을 논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는 들뢰즈의 <차이>개념이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를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았을 따름이다. 확실한 것은 들뢰즈가 차이개념을 가지고 대결하려고 했던 것은 헤겔이었다는 점이다. "헤겔은 차이란 즉자적으로 모순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차이를 통일성의 단순한 반대로 여기거나, 동일성과 <변증법적으로> 동일하다고 간주하지 않는, 즉 차이에 대한 비모순적, 비변증법적 사고의 길을 닦는 것이다"(데꽁브, 『동일자와 타자』, 169쪽.수정인용) 이것이 들뢰즈와 데리다의 문제였다.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서 이 차이의 개념이 가지는 중요성은 다음의 글귀로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차이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본성의 차이는 지속이며, 물질은 그 지속의 최저의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참된 시초이다."(『차이』, 121-122쪽)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해명하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해 가는데 있어서, 그의 이 차이개념, 모순보다도 더 근본적인 차이개념이 얼마나 적절하며 효과적인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결코 현실로부터 유리된 관념론자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의 문제들과 대결하려고 했던 실천적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은 시대에 대한 분노와 불가분의 것"이며, 부당한 권력에 맞선 "전투 없는 전쟁, 유격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 『대담 1972-1990』, 21쪽) 얼핏보면 <차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권력에 대한 <전쟁>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헤겔적 <모순>개념이 더 전투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의 전체과정을 살펴보면, 그리고 현실 세계사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모순개념이 얼마나 실제적인 <모순>에 무력(無力)하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옹호하고 증폭시키는데 기여해왔는가를 실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가 시도하고 있는 '헤겔적 <모순>개념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들뢰즈에게서 헤겔적 모순개념과 마르크스적 모순개념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앞으로 우리가 들뢰즈를 연구하면서 밝혀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들뢰즈의 베르그송론을 통하여, 철학계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 특히 우리나라 철학계에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만 할 것이다. 들뢰즈도 일반적인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베르그송에 관한 나의 책이 좋은 본보기이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베르그송에 관해서까지 글을 썼다고 비난하며 웃어 대지만, "그건 역사를 잘 몰라 하는 소리야. 그들은 베르그송이 혐오를 통해서 프랑스 대학 내에 응집시켜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또 어떻게 그가 온갖 종류의 광인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는지 모르고 있어."(들뢰, 『대담 1972-1990』, 29쪽) 나아가 우리는 들뢰즈가 시도하고 있는 기존 철학사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의 모범을 그의 이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에서 볼 수 있다. 즉 어떤 철학자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사상에 대한 "비틀기, 미끌어지기, 부수기"를 함으로써 재발견되는 새로움의 창조적 획득이 바로 그것이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통하여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구축은 실로 현대철학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질 들뢰즈는 우리를 현대 형이상학의 세계로 초대한다. 베르그송 이래 …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사유는 나오지 않았다. … 우리는 들뢰즈에게서 오래간만에 그리스 철학에 버금가는 사유의 총체성과 깊이를 경험한다(이정우,「질 들뢰즈, '철학자들중의 철학자'」, 138쪽)는 찬사에 쉽게 수긍이 가는 것은 그동안 우리에게 참된 형이상학이 부재했었다는 것에 대한 긍정 때문일 것이다. 물론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형이상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부터 부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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