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규칙 따르기 개념을 중심으로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의 연구*

나뭇잎숨결 2017. 9. 19. 11:11


규칙 따르기 개념을 중심으로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의 연구*


(규칙 따르기 개념을 중심으로)




이종권 (중앙대 교수)

2-210-0101-01

법칙, 규칙과 규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시종일관 언어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언어를 어떻게 말하고 사용할 때 참인 진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의미 있는 진술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구분했으며, 후자의 문제만이 진정으로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어떻게 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물음은 그 물음에 대해 어떤 답변이 주어지는가에 따라 다른 많은 철학적 문제의 해결의 방향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우선적이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미하려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미 있는 언어의 사용을 규제하는 어떤 규범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련된 그러한 규범의 성격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은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

 

규범적인 진술은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규범적인 진술이 성립하는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사실을 인식함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을 의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서둘러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믿음은 외부의 사실에 관한 것이지만 "내가 서둘러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왜 참인가? 그것은 그 표현이 시계가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 한 문제의 시계가 실제로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서둘러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 서둘러 옷을 입는 행위 간에 성립하는 인과 관계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강의 시간에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서둘러 옷을 입지 않는다면 인과적으로 그러한 결과가 야기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서둘러 옷을 입는 행위를 해야만 한다. 즉 여기서 나에게 적용되는 규범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인과 관계이다. 이러한 종류의 규범은 그러나 동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얼룩말을 덮치기 위해 접근하고 있는 사자 한 마리를 생각해 보자. 이 사자는 달리는 속도가 얼룩말보다 뒤지기 때문에 상당한 거리까지 접근하여 기습하지 않는 한 얼룩말을 잡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자가 어느 정도 얼룩말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뛰쳐나가 얼룩말을 덮치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고 하자. 이 경우 이 사자에 대해 좀 더 살금살금 기어가 얼룩말과의 거리를 더 좁힌 다음에 뛰쳐나갔어야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사자가 얼룩말을 잡기를 원했으며 또한 얼룩말과 사자가 처한 상황에 적용되는 인과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사자가 얼룩말과의 거리를 실제 사자가 했던 것 이상으로 좁히지 않는 한, 사자가 얼룩말을 잡기는 불가능했다고 한다면 문제의 사자가 얼룩말과의 거리를 더 좁혔어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의 예에서 강의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원하는 사람에 대해 서둘러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이 경우의 규범은 각 상황에 적용되는 인과 법칙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규범이 성립하는 듯하다. 예컨대 그것은 규약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앞서 얼룩말을 잡기 위해 접근하던 사자가 얼룩말과의 거리를 더 좁히지 않고 달려드는 바람에 얼룩말을 놓쳤다고 해서 사자가 얼룩 말을 잡는 규약을 어겼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는 동작은 어떤 규약을 따르는 예가 아니다. 설령 얼룩말을 잡는데 성공한 사자들의 행태에서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해도, 그것을 사자들이 얼룩말을 잡는데 따르는 규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자의 행태가 규약에 따르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사자로부터 얼마 만큼의 거리에 얼룩말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 있어 도로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사자들은 일반적으로 얼룩말과의 거리가 일정 이상으로 줄어든 것을 관찰하면 얼룩말을 향해 뛰쳐나간다. 마찬가지로 운전사도 일반적으로 '서행'이라고 써 있는 도로 표지판을 보면 자신이 몰던 차의 속도를 어느 정도까지 줄이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사자의 행태는 사자의 부모에게서 배운 동작을 반복적으로 훈련함으로써 얻어진 것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얼룩말과의 거리와 사자가 뛰쳐나간 행태 간에도 인과적인 관련성 이상의 것이 없다. 그러나 '서행' 표지판과 운전사의 행위간의 관계는 인과적인 관계가 아닌, 규약으로 파생되는 규칙 따르기의 관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어떤 규칙--예를 들어 도로 표지 판--의 표현과 나의 행동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경우, 양자 간에 어떤 관련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이렇게 답변할 수 있으리라. 즉, 지금까지 나는 그 표지판에 대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아왔으며, 지금 나의 행위도 그러한 종류의 반응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답변은 단지 인과적인 관련성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도로 표지판을 따르고 있는데, 그러한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지, 도로 표지판을 따른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 (···)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이하 PI로 약함), §198

 

요컨대 내가 도로 표지판을 지날 때의 이러저러한 행동들은 문제의 행동을 지배하는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위에서 말한 얼룩말을 앞둔 사자의 행태를 오직 인과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 규약적인 규칙을 따르는 행위에는 인과적인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을 따르는 행위에 필적할 행태가 사자에게는 없다. 다시 말해 사자에게 적용되는, 사자가 준수해야 할 규약적인 규칙이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다양한 규약적인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는 경기 규칙이, 거리를 통행할 때는 교통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한 규칙에 기반하는 규범은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 법칙에 기반하는 규범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위의 논의는 인과 법칙과 약정적인 규칙이 규범적인 진술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관련된 인과 법칙은 "결과 R을 얻기 위해서는 A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형태의 진술을 성립시킨다. 이것으로부터 "만일 R을 얻으려 한다면 A를 해야만 한다."는, 칸트의 용어를 빌자면 가언적인 명령문이 얻어진다. 약정적인 규칙은 "E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A를 하기로 약정되어 있다."와 같은 형식을 지닌다. 이것으로부터 상황 E에 놓여진 사람에 대해 "A를 해야 한다."는 정언적인 명령문이 성립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는 약정이 아닌 합리적인 원리에 기반한, 위와 같은 형식의 도덕 명령문, 또다시 칸트 자신의 표현을 빈다면 정언적 명령문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인과적인 법칙이나 약정적인 규칙으로부터만 규범적인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나 지식은 우리의 사고의 규범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P는 참이다."라던가 혹은 "P는 지식이다."라는 진술은 인과적인 법칙이나 약정적인 규칙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부터 "P라고 생각 해야 한다."라는 규범적 진술이 성립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인과적인 법칙 이외에도 논리 법적, 형이상학적 원리도 우리의 사고를 규제하는 규범을 제공한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에 관한 규범을 제공하는 진리나 지식 혹은 논리 법칙, 형이상학적 원리도 인과적 법칙이나 약정적인 규칙과는 다른 범주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그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적용되는 규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러한 규칙을 준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과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경우는 서로 구분해야 한다. 아침에 내린 눈을 보고 어떤 사람이 "아 눈이 참 검구나!"라고 말했다고 하자. 예를 들어 그의 시각 체계가 갑자기 잘못되어서 흰 것을 검은 것으로 지각했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 경우 그는 낱말을 잘못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시각 체계의 결함으로 인해 외부 사물을 잘못 판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 '눈'이나 '검다'와 같은 낱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가 눈을 보고 단 한번 검다고 말한다면 혹시 그 순간에 눈의 색깔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회수가 많아진다면 언어의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사물을 잘못 판단한 것인지 그렇기 않으면 낱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인지를 모든 경우에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0에서 9까지의 수를 나열하는 것을 가르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이제 그 숫자들을 혼자서 적는데 순서가 엉망인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즉 이 숫자 저 숫자를 멋대로 적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지점에서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숫자의 순서를 ‘착각’하는 것일 수 있다. --후자와 전자와의 차이는 물론 빈도(frequency)의 차이가 될 것이다. (···)

PI, §143

 

모든 진리는 어떤 언어인가에 의거해서만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어떤 진리도 표현할 수 없다는 혹은 더 나아가 믿음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언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이 세계에 있어 어떤 것이 진리인가의 문제보다 선행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적 생애를 통틀어 진리보다는 언어의 의미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모든 언어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그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언어적 규칙이 존재한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러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 규칙은 언어 사용을 규범적으로 규제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윤리 규칙이나 약정적 규칙 혹은 인과 법칙이 우리의 행위를 규범적으로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윤리 규칙이나 약정적 규칙은 물론이고 언어 규칙도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대로 인과율로부터 비롯되는 규칙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러한 언어적 규칙은 어떠한 성격의 규칙인가? 논리 규칙이나 윤리적 규칙처럼 어떤 합리적인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혹은 약정적 규칙처럼 인간이 합의한 규약에 근거하고 있는가? 전자는 대개 실재론자들이 선택하는 입장인 반면 후자는 규약주의자이 걷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 규칙을 중대하게 위반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오류는 오히려 철학자의 경우 현저하며 많은 철학적 문제는 그것이 언어 규칙을 위반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해소된다. 그러나 언어 규칙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 혹은 어떤 원리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전 ·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언어 규칙의 성격에 대한 이러한 차이가 전 ·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특징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같은 차이는 당연히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언어적 규칙의 개념에 관한 전 ·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의 변화는 객관성이나 필연성과 같은 개념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논리적 구문론의 규칙으로서의 언어 규칙


20세기 언어적 전회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철학자인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는 플라톤적인 언어관이 깊이 침투해 있었다. 플라톤적인 언어관에서는 문장과 그것을 참이게 하는 사태로서의 진리 조건, 그리고 외부째 실재하는 세계를 핵심적인 요소로 한다. 하나의 사태는 성립할 수도 성립하지 많을 수도 있지만 여하간 모든 유 의미한 문장은 그것의 진리 조건이 되는 어떤 사태와 결부된다.1)

 

여기서 그 사태는 사실상 그 문장의 의미와 동일시된다. 즉, 하나의 문장은 그것과 결부된 사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언어관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선 언어적 표현과 그것의 의미에 해당하는 진리 조건, 그리고 세계와 더불어 그 세 요소간의 관계가 모두 우리의 사유라든가 우리의 언어 사용과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문장이 어떤 진리 조건을 갖는가 하는 것, 그리고 이 세계에서 어떤 진리 조건이 성립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독립적이다. 하나의 문장이 어떤 사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언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2)


플라톤에 있어서 ‘正義’는 正義라는 형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성삼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는 성삼문이 正義의 형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태를 의미하므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언어적 표현들의 사용 규칙을 어기는 것으로서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언어적 규칙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따라서 언어의 사용과는 무관한 언어와 의미와 세계간의 관계에 관한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사용에 관한 규칙이 실제 언어의 사용으로부터 파생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플라톤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언어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윤리적 기준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 사용과 무관하게 정해져 있는 언어 규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적인 언어관에 의하면 어떤 문장이,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성삼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와 같은 문장이 참인 것은 그것이 실재와 일치하는 경우 또 오직 그 경우에 한한다. 그것이 실재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 문장을 참이게 하는 진리 조건이 실제로 성립한다는 말과 동일하며 그것은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사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렇게 해서 언어의 의미는 언어와 실재를 연결시키는 매개가 된다. '정의'라는 낱말은 그것의 의미 덕분에 그 낱말과 일치하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게 되며 마찬가지로 "성삼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와 같은 진술도 그 의미를 매개로 하여 어떤 사태를 가리키게 된다. 그러므로 낱말이나 문장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이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지 혹은 그 문장이 실재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그 문장이 참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3)

 

플라톤적 언어관의 한 예로 프레게의 의미론에 의하면 고유 명사나 문장과 같은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지시체(Bedeutung)와 아울러 의미(Sinn)를 지닌다. (문장의 의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충족되지 않은(unsaturated) 표현으로서 함수와 그것과 결합된 고유 명사의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 고유 명사나 문장의 의미에는 그것들이 가리키는 지시체 즉 개별적 대상 내지는 참(True), 거짓(False)을 제시 하는 방법(mode of presenting)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고유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이나 문장의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게나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우리의 언어 사용 규칙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언어와 독립적인 사실들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언어 사용의 규칙을 결정하는 그러한 사실은 보여 질 수만 있을 뿐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다.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은 의미의 한계를 넘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배척된다. 형이상학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로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언어에 의해 기술될 수 있어야 한다.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이하 TLP로 약함)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처럼 세계에 관해 기술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언어의 본질적인 특징을 제시하고자 했다. 플라톤에 있어 감각적인 개별적인 사물이 형상을 모방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도 언어는 실재를 그대로 복사 혹은 그려냄으로써 그것을 기술하게 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실재는 형이상학적 구조가 아니라 논리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 그것과 동형 관계(isomorphism)에 놓여야 하는 언어의 구문론도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4)


TLP에서 묘사된 이상적인 혹은 본질적인 언어가 지니는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은 세계가 지니고 있는 논리적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5)

 

어떤 원자 문장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 하는 규칙은 그 원자 문장에 포함된 논리적 고유 명사가 가리키는 단순 대상의 결합 가능성에 의존하는데 그러한 가능성은 세계가 지니고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다. 따라서 그러한 규칙에는 현실적인 언어의 문법적 규칙이 지니고 있는 규약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 규칙들은 우리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두 언어 사용에 있어 준수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고유 명사의 의미는 단순 대상이므로 그 대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원자 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진리 조건으로서 사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기술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사용하여 추리를 행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임의의 문장 "A"와 "A이면 B이다."로부터 B를 이끌어내는 것이 허용되는데, 이것은 "A이고 A이면 B일 경우 B이다"가 필연적인 진리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도 임의의 한 문장은 그것이 실재와 일치할 때 참이 되는데, 언어와 실재와의 일치는 그것이 그리는 혹은 표상하는 사태를 매개로 해서만 확인이 된다. 사태란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현실화될 때, 그것은 사실이 된다. 그런데 한 문장과 그것이 그리는 사태간의 관계는 그 둘이 그러한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내적'(internal)이다.6)

 

따라서 문장이 그리는 사태를 알지 못하고서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사태가 현실화되었음을 인식함으로써 문장이 실재와 일치했음을, 따라서 참임을 알 수 있다.

 

TLP에서의 언어는 이데아로서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자연언어는 어떤 경우에도 위에서 설명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을 위배할 수 없다. 그 규칙은 어떤 언어에도 공통적인 것이며 그것을 위반해서 언어를 사용할 경우, 의미 있는 진술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규칙은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언어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규칙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7)

 

그러나 실제 언어의 문법적 규칙이 그러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규칙은 일상 언어의 문법적 구조에 반영되지 않은 채 은폐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이 많은 철학적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한 문제를 언어 비판 혹은 언어 분석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에서 철학적 작업이 된다.8)


의미와 언어 규칙


위에서 우리는 누군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명제가 인과 법칙이나 약정적 혹은 규약을 기초로 해서 성립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이나 프레게, 그리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언어적인 규칙의 연원은 인과 법칙이나 약정이 아니다. 플라톤에 있어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실재에 관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프레게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실재가 지닌 논리적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거나 우리의 행위나 삶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종류의 것으로서 우리의 언어 사용을 규제한다. 그러면 인과 법칙이나 약정 이외에 규칙의, 적어도 언어 규칙을 제공하는 원천이 또 달리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언어 규칙을 제공하는 원천에 대해 전기와는 다른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9)


언어 규칙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할 때 적용되는, 즉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이다. 어떤 언어적 표현 S의 의미가 M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표현을 M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한다는 의미에서 언어 규칙은 언어의 의미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어떤 언어적 표현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의미하게 되는가? TLP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언어와 세계간의 그림 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와 같은 관계에 의거하여 세계의 본체(substance)를 이루는 대상의 본성과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반영하는 복잡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이 성립하는데, 우리의 언어의 사용은 그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은 우리의 언어 사용과 무관하게, 언어 사용 이전에 이미 성립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 사용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후기의 여러 철학은 우리의 삶과 독립적인 것이, 우리의 삶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언어 사용을 비롯하여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생각에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 철학도 20세기 후반의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더 이상 언어 규칙이 우리의 삶을 초월하는 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어적 표현의 의미가 형이상학적 실재 같은 우리의 현실적 삶을 초월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의미"(meaning)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즉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 있어서의 그것의 사용(use)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43

 

낱말의 의미가 언어에 있어서의 사용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낱말의 의미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혹은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규칙을 결정해 준다. 그러므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의미가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그 의미를 미리 알고 있지 많으면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낱말의 의미가 언어에 있어서의 사용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인가? 낱말의 의미와 동일시할 수 있는 사용은 어떤 것이고 그 의미에 의해 결정된 규칙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사용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낱말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사용이란 지금까지의 사용 즉 과거의 사용(past use)이며 낱말의 의미에 의해 주어지는 규칙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사용은 앞으로의 사용이다. 지금까지 어떤 낱말이 그 언어 집단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왔는가 하는 것에 의해 그 낱말의 의미는 결정되며, 또한 그렇게 결정된 낱말의 의미에 의해 주어지는 사용 규칙에 따라 그 낱말은 앞으로도 사용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낱말을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면 낱말의 의미를, 더 나아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어떤 낱말의 과거의 사용이 그 낱말의 의미를 결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사용이 어떤 규칙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이전의 사용에 의해 결정되는 규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일 과거의 낱말 사용이 현재 그 낱말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을 제공했다고 한다면, 이는 곧 그 낱말이 이러저러하게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로부터 그 낱말을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이 이끌려 나온다는 말과 다름없다. 낱말의 사용에 관한 규범이 그 사용에 관한 과거의 사실로부터 이끌려나온다는 의미에서 의미를 사용과 동일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일종의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적 언어관에서는 지금까지 어떤 것을 사람들이 '정의'라고 불러왔다는 것과 어떤 것이 실제로 정의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어떤 것이 정의라는 것은 그것이 정의의 형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낱말의 사용을 그 낱말의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위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것이 실제로 정의라는 것과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정의’라고 불려 왔다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언급은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그는 PI에서 언어에 대한 논의를 언어의 사용을 게임을 하는 것과 비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과 비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를 다른 것과 비유할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측면에서 비유하는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게임과 비유하는 요체는 무엇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긍정, 의문, 명령문?--수없이 많은 종류의 문장이 있다. 이른바 '기호', '낱말', '문장'들의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사용(use)이 있다. 더욱이 이러한 다양성은 한번 주어지면,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언어, 말하자면 새로운 언어-게임이 등장하며 또 다른 것은 퇴물이 되어 잊혀지는 것이다. (이의 비근한 모습을 수학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 (···)

 

언어의 도구의 다양함,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의 다양함, 그리고 낱말과 문장의 종류의 다양함을 (『논리 철학 논고) 의 저자를 포함한) 논리학자들이 언어의 구조에 관해 기왕에 언급한 바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23

 

논리학자들이라고 해서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비롯하여 플라톤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다양성보다는 공통성이다. 正義로운 것은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모든 正義의 형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실제 언어의 용법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正義로운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正義롭게 만드는 것으로서의, 즉 正義의 본질로서의 正義에 형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언어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으로서 언어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왜 이제 다양성을 강조하는가?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언어로 취급하는 것에 그러한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게임과 비유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과정들을 생각해 보자.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장기판 게임, 카드 게임, 공놀이, 올림픽 게임 등등인데, 이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가? ‘무언가 공통적인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하지 말고 그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 혹시 있는지 그냥 보라. (···)

 

이렇게 살펴본 결과는 어느 경우에는 전반적인 유사성이, 혹은 세부적인 유사성들이 서로 그물처럼 복잡하게 겹치고 얽힌 것만을 관찰할 따름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66

 

그러한 유사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가족 유사성'이란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

PI, §67

 

위에서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일단, (A)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10)

 

이것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언어 사회학적 사실일 수 있다.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경험적으로 가릴 수 있으며 또 그런 것들에 공통적인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비트겐슈타인의 권고에 따라 그냥 봄으로써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위의 (A)인가, 아니면 (B)"모든 게임에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인가? 즉, 정작 중요한 문제가 (B)라고 한다면, (A)로부터 (B)가 따라 나오던가 혹은 (A)를 (B)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만일 (C)"게임이란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라고 가정하면 당연히 (A)로부터 (B)가 따라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게임'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게임이며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에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면 모든 게임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게임'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게임'이라는 낱말을 그 어떤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게임이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게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게임'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게임이란 우리가 '게임'이라는 낱말을 사용해서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게임'의 의미는 그 낱말에 대한 우리의 사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아무 수정 없이 수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실제로 '게임'이라는 잘못 사용하는 경우를 관찰한다면 다양할 것이며 그 가운데는 잘못 사용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이란 우리가 '게임'이라는 말을 정확히 사용했을 때,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게임'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했다고 할 수 있는가? 바로 게임에 적용했을 때라고 한다면 공허한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게임이란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저 "게임은 게임이다."라는 말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사용을 게임을 하는 것에 비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일반 명사로 지칭하는 것들에 어떤 본질적인 공통점은 없으며 이른바 '가족 유사성'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러한 비교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각 언어적 표현은 일상적인 삶에서의 그것의 사용과는 독립적으로 그 의미가 결정되며, 그러한 의미가 그것들의 사용을 규제한다는 생각을 언어 사용 규칙에 대한 신화적인 개념으로 배척하려는 것이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규칙에 지배되는 행위(activity)임을 강조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규칙에 지배되는 행위라는 것은 그 규칙이 현실적인 삶에서 기원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실천(practice)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언어를 말하는 것,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게임에서 수를 두는 것과 비교가 된다. 게임에서의 동작은 게임 규칙에 지배되는 행위로서 그 규칙은 게임에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은 생각할 수 없으며, 게임에서 어떤 수도 그 게임에 적용되는 규칙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동작을 두고 그것이 문제의 게임에서의 어떤 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게임의 규칙을 전부 동원하지 많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장기에서의 왕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왕이다'라고 말해도 상대방이 게임의 규칙을 이 마지막 대목, 즉 왕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이미 알고 있지 않으면 그 장기 말의 용도(use)를 말한 것이 되지 않는다. (···)

PI, §31

어떤 게임에서 장기 말은 그것이 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해 그것이 어떤 말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용도가 동일한 장기 말은 동일한 장기 말이다. 그런데 어떤 장기 말의 용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장기 말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규칙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장기에서 마(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象)과 차(車)를 비롯한 다른 패가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가는 물론이고 장기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하게 되는가 등등 장기 게임의 모든 규칙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에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 낱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낱말의 용도를 다 설명했다면 그 낱말의 의미를 다 설명한 것이 되며 또한 두 낱말의 용도가 동일하다면 동일한 의미의 낱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장들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들이 동일한 용도(use)를 갖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러시아어로는 '그 돌은 붉다'(the stone is red)라고 말하는 대신 '그 돌 붉다'(the stone red)라고 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문장의 의미에서 繫辭가 빠진 것을 느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사유 안에서 붙여 넣겠는가?)(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21

장기 게임의 경우에서 각 수와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서도 한 낱말의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것의 용도를 설명한다는 것인데, 그 용도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포함하여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의 일부분으로서만 의미가 있으며, 규칙이란 삶의 형식에 내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어-게임'이라는 낱말을 들고 나온 것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행동의 일부임을, 삶의 형식(a form of life)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23

위의 논의는 언어의 의미를 인식하거나 설명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만일 언어에서의 의미가 그것의 사용이라면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언어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의 사용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사용이 위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올바르지 않은 사용을 관찰을 통해 얻은 의미의 이해는 정확한 이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낱말을 올바르지 않게 사용 했다는 것은 그 낱말과 관련된 언어 규칙에 어긋나게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관련된 언어 규칙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규칙이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 하는 물음이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언어와 게임과의 유비는 끝난다. 게임의 규칙은 게임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특정한 시기에 게임과는 독립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규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 규칙은 적절한 상황에서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규범적이다. 혹은 나의 언어 사용은 그것에 적용되는 규칙에 의해 정당화된다. TLP에서의 그것은 세계의 논리적 구조와의 일치하는 논리-구문론적인 것으로서 언어 사용과는 독립적으로, 그것을 초월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원리는 더 이상 언어 사용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초월 한 것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언어 규칙은 언어 사용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의미는 언어적 규칙에 따라 사용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규칙은 반대로 그 낱말의 과거 사용에 의해 결정된다. 즉 언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 이제 그 낱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 ‘붉다’는 낱말을 붉은 대상을 의미하는데 사용했다면 지금 그 낱말을 붉은 대상을 의미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붉다’는 낱말을 잘못 사용한 것이 된다. 혹은 그러한 사용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위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듯 하다.

(1) 낱말 W는 지금까지 사람들에 의해 M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2) 이제 W의 의미는 M이며, 따라서 W를 M을 의미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한다.

(3) 지금 W를 M을 의미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위와 같은 추론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이 성공적이기만 하다면 언어의 의미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열리는 셈이다. 위의 추론이 옳다면 지금 사람들의 언어의 사용은 규칙의 규제를 받기는 하지만 또 다시 장래의 언어 사용에 관한 규칙을 성립시키는 촉매가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추론이 개인의 차원에서도 성립할까? 그 추론을 나에 국한하여 변형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4) 나는 과거 낱말 W를 M을 의미하는 데 사용하였다.

(5) (적어도 나에게는) W를 M을 의미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한다.

(6) 지금 나는 W를 M을 의미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른바 사적 언어 논증이 (4)에서 (5)를 거쳐 (6)으로 이르는 추론이 타당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11)

그에 의하면 (4)가 참이기만 하면 (5)가 성립하고 따라서 (5)에서 언급한 규칙에 의해 지금 내가 M을 의미하는데 W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즉 나에 있어서도 어떤 낱말을 과거 어떤 의미로 사용 하였다면 지금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하며, 또한 그러한 규칙에 의해 지금 내가 그 낱말을 과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크립키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이 문제 삼은 것이 (4)가 참인가 하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은 (4)가 참이 아님을, 따라서 내가 W를 M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과거 그 낱말을 과거 그러한 의미로 사용한 것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크립키의 회의주의 논증


크립키는 PI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243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그 때까지의 통념을 뒤엎고, 사적 언어 논증의 진수는 이미 §243 이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202가 실은 그 논증의 결론에 해당 한다고 말하고 있다.12)

그에 의하면 "§202에서 제시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논의 과정에 이미 핵심적인 고찰은 다 포함되어 있으며"13)

, §243 이후의 여러 절에서의 이른바 ‘사적 언어 논증’은 실은 언어에 대한 그러한 일반적인 고찰을 감각의 문제에 적용한 특수한 경우째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14)

크립키가 PI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202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도 실천(practice)이다. 또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많다고 하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크립키가 보기에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극복하려고 하는 문제는 규칙의 개념에 관해 제시되는 '회의론적 역설'(sceptical paradox)이다. 그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회의주의자'라는 호칭을 들고 나오지 않았으며 또한 그럴 생각이 없었음이 거의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도 "철학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과격하고 독창적인 형태의 회의주의였다."는 것이다.15)

그러한 역설을 제시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흄이 '회의론적 해결책'(sceptical solution)이라고 부름직한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비트겐슈타인은 회의론적인 역설을 회의론적인 해결책을 사용해서 이열치열 식으로 극복하여 하고 있다는 것인데, 크립키가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회의론적 역설은 §201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역설이다: 어떤 행동 방식도 규칙에 의해 결정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어떤 행동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모든 것을 그 규칙과 일치시킬 수가 있다면 반대로 모든 것을 그 규칙과 충돌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규칙과의 일치도 없을 것이며 충돌도 없게 될 것이다. (···)"

규칙과의 일치도 없고 충돌도 없다면 어떤 낱말 W를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위의 (6)은 부정되며, 그러므로 그 낱말을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아무렇게나 사용 해도 상관이 없다. 크립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낱말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 따위가 일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낱말을 새로 적용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일과 다름없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건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치도 있을 수 없고 충돌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2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이다.17)


(5)가 사실이라면 (6)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과거 낱말 W에 대한 나의 사용이 그에 관한 규칙을 결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4)가 성립할 경우, (5)가 사실로 성립하며 따라서 (6)도 잇달아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크립키가 보기에 (6)을 거부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4)가 거짓임을 주장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4)와 (5)에 의거해서 (6)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선 (4)에서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6)은 현재의 나의 언어 사용에 대한 규범적인 명제이다. 그것은 내가 낱말 W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4)는 언어 사용에 관한 사실적 명제이다. 따라서 (4)에서 궁극적으로 (6)이 따라 나온다는 말은 내가 과거 W를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현재 그 낱말을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혹은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이 따라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18)

크립키가 보는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4)를 거부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선 (4)가 기술하는 사실, 즉 과거 내가 W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의미했다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립키가 보기에 (4)를 부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더욱 극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PI와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3rd ed.(Basil Blackwell, 1978), 이하 RFM으로 약함)에서 (4)를 반박하기가 가장 어려워 보이는 수학적 연산과 감각 지각, 혹은 우리의 내면적 상태를 가리키는 낱말들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19)


전통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꼽힌 것은 PI의 §258인데, 그곳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논증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말해 내적인 감각을 가리키는 사적인 명사(Private name)의 불가능성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내가 얻은 어떤 감각에 대해 'E'라는 사적인 명사를 부여했다고 하자. 그것은 앞으로 그와 동일한 감각이 내 마음 안에서 얻어졌을 경우, 그것을 E라고 부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앞으로 나의 어떤 감각에 대해 그것을 E라고 했을 때, 그것이 올바른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 경우, 나에게는 올바름의 기준(criterion of correctness)이라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에게 올바른 것(right)으로 보이는 것은 정말로 올바른 것이라고. 그러나 그 말은 단지 이 경우 ‘올바름’에 관해 말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할 따름이다.

PI, §258

내가 나의 감각에 대해 E라고 했을 때, E에 대한 그러한 사용이 올바른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기준 내지는 규칙이 없다면 나는 E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위의 (4)를 부정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크립키는 그러나 심리학적인 낱말이 아닌 수학적 연산을 가리키는 낱말을 예로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의 핵심이 (4)을 부정하는 것임을 보이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크립키는 통상적인 덧셈 연산인 '더하기(plus)' +를 기초로 하여 다음에 의해 정의되는 '비표준적인 덧셈' 연산 '도하기(quus)' 를 도입한다.



크립키는 내가 과거에 한 덧셈 연산은 그 수가 모두 57 미만이었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과거에 사용한 '+'란 낱말의 의미에 관한 회의론적 역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립키가 사용한 '회의론적'인 말에 의해 문제의 역설이 인식론적인 역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회의론이란 본래 인식론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며 또한 크립키가 회의론적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연산의 정의가 귀납적 추론에 대해 흄 적인 회의론을 제기하기 위해 굿맨(N. Goodman)이 도입한'glue'의 정의와 유사하기 때문에 크립키의 문제 제기를 인식론적인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RFM, Ⅰ, §3에서 수열 +2의 전개를 두고 '2004, 2006'처럼 써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을 '2004, 2006'처럼 써야 한다는 것, 혹은 그것과 다르게 써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인식론적인 수단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크립키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내가 과거에 사용한 '+'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것이 도하기(quus)가 아닌 더하기(plus)였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다 과격한 것이다.20)


크립키에 의하면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첫째로 내가 과거에 '+'라는 낱말로 의미한 것이 도하기(quus)가 아닌 더하기(plus)였다는 사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로 지금 내가 '68더하기 57'에 대해 '5'라는 답변이 아닌 '125'라는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고 장담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21)

첫 번째 주장은 두 번째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어떤 낱말을 사용해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2)


위의 첫 번째 주장이 두 번째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립키가 위의 (4)에서 (6)으로 이어지는 추론의 타당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크립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68+57'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는 단순히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앞서 제시한 지시들을 따르고 있는데 그 지시에 의하면 이 새로운 경우에서는 바로 내가 '125'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23)

나는 이러한 지시를 실제로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규칙을 실제로 준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규칙은 어디에서 성립하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 내가 +를 특정한 어떤 의미로 사용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덧셈과 같은 수학적 규칙을 고려할 때, 그 규칙을 새로운 경우에 적용할 때마다 우리 자신이 지도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함수의 새로운 값을 계산하고 있는 사람과 이 수 저 수를 아무렇게나 들이대는 사람과의 차이이다. '+'를 내가 과거 어떻게 의미했는가 하는 것이 주어질 경우, 하나 그리고 오직 하나의 답변만이 '68+57'에 대해 적절한 답변으로 지정되는 것이다.24)


따라서 과거에 내가 '+'라는 낱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다면 그 의미에서 비롯되는 규칙에 의해 지금도 그것을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명제가 성립한다. 현재 그 낱말을 사용하려면 그 규칙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용에 있어서도 나는 그러한 규칙의 인도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정당한 근거를 얻자면 실제로 내가 과거에 '+'를 더하기의 의미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존재해야 한다. 크립키가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은 바로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는지를 의심한다.

위와 같은 회의주의자들의 문제 제기에 제대로 응수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 '+'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도하기(quus)가 아닌 더하기(plus)를 의미했다는 것이 어떤 사실인지 그에 대해 설명해야 하며, 둘째로 그러한 사실이 그것에 입각할 때 현재 내가 '68+57'에 대해 '5' 라는 답변이 아닌 '125'라는 답변을 제시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125'라는 답변은 아무 근거 없는 주먹구구식 답변에 불과하다.

그런데 크립키의 회의주의자에 의하면 나의 정신의 과거사를 아무리 뒤져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회의주의자들을 반박할 수 있는 사실이 반드시 콰인의 경우처럼 나의 외부 행동(behavior)에 관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나의 외면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관찰할 수 있어도 나의 내면의 심적 상태는 관찰할 수 없는 외부 관찰자가 입수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5)

그렇기 때문에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는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내 마음 속을 샅샅이 살펴본다고 해도 내가 '+'로서 덧셈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으리라고 주장한다.26)

만일 나의 정신의 과거사를 아무리 뒤진다고 해도 내가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나의 정신에 관한 과거사는 내가 과거에 의미했던 것이 도하기(quus)이며 따라서 (68+57에 대해) '5'라는 답변을 제시했어야 했다는 가설과도 양립 가능하다."27)


크립키의 회의주의자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증은 적극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제기할 법한 모든 반론을 물리칠 수 있는 논증을 전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반론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내가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것이 과거 25+34에 대해 59라는 답변을 제시했다는 계산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 연산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내가 의미했다는 사실이 될 수가 없다. 내가 과거에 내린 답변을 유한하므로 그것들은 모두 예를 들어 57 미만의 수에 대해서만 이루어졌을 수 있다. 이 경우 만일 내가 과거 의미했던 연산이 그러한 계산에 대해 내가 내린 답변에 있다고 한다면 그 의미했던 것이 더 하기(plus)가 아닌 도하기(quus)였다는 가설도 도하기(plus)였다는 가설 못지 않게 타당하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25+34에 대해 59라고 계산했다는 것은 앞으로 내가 68+57을 125라고 계산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그렇게 계산할 것이라는 것도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 서 과거 그가 '+'의 연산에 대해 실제로 어떠어떠한 답변을 내렸다는 사실을 '+'로서 그가 어떤 것인가를 의미했다는 사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내가 + 연산에 의해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을 결정해주는 사실로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이나 미래에 +를 할 때에 더하기를 하는 것을 정당화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과거 실제로 +를 어떤 특정 방식으로 계산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내가 지금이나 미래에 과거에 내가 한 계산보다 더 큰 수를 대상으로 + 계산을 할 때에는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후자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을 회의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내가 과거 이러이러한 답변을 제시한 것은 사실 '셈'(counting)이라는 작업의 일환으로 한 것이며 과거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어떠어떠한 수에 대해 이러저러한 답변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답변이 바로 셈을 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있다고 응수할 수 있다. 셈은 어떤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작업으로서 그 규칙은 무한히 많은 수에 대해 + 연산에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지시해 준다. 그 규칙이란 x+y를 계산하고 싶다고 할 때, 우선 x개만큼의 자갈의 무더기를 셈하고 이어서 y개만큼의 무더기를 셈한 그 두 무더기를 합친 무더기를 셈하여 그 결과를 x+y로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앞서 계산을 할 때에 이러한 규칙을 마치 판에 새겨 넣은 것처럼 내 마음에 새겨 넣었다고 하면 나는 앞으로 무한히 많은 수에 대해 + 계산을 할 때, 도하기가 아닌 더하기 계산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뿐더러 그렇게 계산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응수는 '더하기'를 '셈'이란 낱말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만일 '셈'의 의미가 위에서 기술한 연산으로서 더 이상 회의주의자들의 도전이 허용되지 않는 낱말이라고 한다면 '더하기'는 바로 더하기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들은 그 낱말이라고 해서 '더하기'에서와 같은 회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응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표준적인 셈에 대해 "그 가운데 57 개 이상의 자갈로 이루어지지 않은 무더기들을 합친 무더기를 셈할 경우에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셈하되, 그 가운데 하나라도 57개 이상이 자갈로 이루어진 무더기가 있을 때는 그것들을 합친 무더기를 셈할 때 '5'라는 답변을 제시하는 비표준적인 셈을 '?'(quounting)이라고 할 때, 더하기를 해석할 때 동원된 '셈'이 의미하는 바가 셈이 아닌 ?이었다는 주장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 나의 마음속에 새겨 넣은 규칙이 셈이 아닌 ?의 규칙이었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규칙을 다른 보다 '근본적인' 규칙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 '근본적인' 규칙에 대해서도 회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의 해석이 허용된다면 나는 본래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적용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28)

크립키는 PI의 §198의 다음 대목이 바로 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해석도 그것이 해석하는 대상과 함께 여전히 공증에 떠 있게 되며, 따라서 그것이 해석하는 대상을 받칠 수 없게 된다. 해석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리에 충격을 가하면 깨질 것이라는 것이 유리의 물리적 구조에서 비롯된 유리의 성향으로부터 설명 혹은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더하기 계산 행위도 나의 심리적 구조에서 비롯된 나의 성향(disposition)으로부터 설명과 예측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즉 내가 과거 25 더하기 34를 59라고 계산한 것은 내가 지니고 있었던 어떤 성향 때문이며, 그러한 성향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계속 지니고 있는 한 68+57을 125라고 계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여전히 내가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동일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향이라는 것은 우선 오류가 가능하다. 과거 25+34를 59라고 계산하게 한 나의 성향은 68+57에 대해서는 125가 아닌 5라고 계산하게 할지 모른다. +가 적용되는 대상이 되는 수는 또한 한정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한 대상에 대한 성향이 나에게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향은 행위에 대한 인과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불완전하게나마 앞으로 내가 어떤 행위를 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68+57에 대해 125라는 답변을 제시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답변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미래 내가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를 예측하 게 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행위가 정당함을 설명할 수는 없다. 반면에 내가 과거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내가 68+57에 대해 실제로 125라는 답변을 제시하건 않건 간에 그러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고찰은 내가 과거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었다는 것을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과 동일시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29)


"내가 과거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에 어떤 규칙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거나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닌 마치 두통이나 가려움 혹은 구토증 같은 "우리 각자가 내성(內省)에 의해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감각질(quale)을 지니는 환원 불가능한 경험30)

혹은 내적 상태를 내가 지니는 것과 동일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반격도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들을 무력화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과거 + 계산을 하는 동안에 내가 두통과 같은 독자적인 감각질을 지닌 경험을 가졌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지금까지 내가 하지 않은 덧셈 계산을 할 때 어떤 특정한 수를 해 답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결론이 귀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감각질을 지닌 내적 상태도 그 자체로 미래의 새로운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 나에게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31)


그런데 내가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가설과 도하기를 의미했다는 가설 가운데 어떤 것이 내가 과거에 실제로 어떤 두 수의 합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가? 이것은 곧 나의 과거의 행위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혹은 최선의 설명이 되는 가설을 채택하자는 것인데 우리가 문제 삼는 두 가설 사이에서 보다 좋은 것은 물론 단순한 가설로서 그것은 +로서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나에 있어 과연 +로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하는 사실 자체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지, 이러한 사실이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인가 혹은 도하기를 의미했다는 사실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최선의 설명 혹은 단순성에 의존하는 것은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도전을 물리치는 데 아무 해당 사항이 없다.32)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자신들이 논증이 지향하는 것은 우선 과거에 내가 어떤 낱말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기 어려우나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결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과거에 어떤 낱말로서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에도 그러하다.

만일 과거에 내가 어떤 함수를 의미했는지에 관한 사실이 전혀 존재할 수 없다면, 현재에도 그와 같은 것은 일체 존재할 수 없다.33)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낱말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낱말을 새로 적용하는 일도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일과 다름없게 되었다. 내가 과거 '더하기'라는 낱말로 무언가 의미했던 것이 있었으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지금 새로운 두 수에 대해 어떤 일정한 답을 제시하도록 명령한다는 느낌을 나는 받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나의 마음속에나 머리 속에나 어디에서건 그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크립키의 회의주의자가 행하는 공격은 단순히 "사적 언어가--혹은 어떤 다른 특수한 형태의 언어가--불가능 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일체의 (공적, 사적, 혹은 그밖에 어떤 것이건) 언어가 가능함을 어떻게 보일 수 있겠는가?"34)

하는 것을 문제 삼음으로써, 일체의 언어, 혹은 일체의 개념의 형성 가능성을 부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크립키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회의론적 역설에 대해 그가 회의론적 해결이라고 부르는 해결책을 시도하고 있다.

회의론적 해결과 규약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 논증은 흄의 그것과 더불어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것인 것으로 간주될만하다. 흄의 회의주의 논증이 과거의 사건과 그 이후의 어떤 사건과의 인과적 연관이 존재하는지를, 그리고 과거의 명제들로부터 미래의 명제로의 귀납 논리적 연관이 존재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는 나의 과거의 '의도'(intention) 내지는 '의미'(meaning)와 현재의 실행(practice)과의 연관이 존재하는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35)

그들의 역설적인 결론은 모두 각각의 문제에서 상식적인 관점을 뒤엎고 있다. 흄의 회의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간의 공통점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크립키가 보기에 그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제기한 역설적인 문제 상황을 직접적인 해결책(straight forward)이 아닌 회의론적인 해결책(sceptical solution)을 통해 극복하려 시도한다.

회의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회의주의자들이 논증이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보이는 논증을 제기하는 것이다. 흄이 귀납논증이 타당하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증명하거나 혹은 인과 관계에 관한 분석을 통해 두 사건 간에 진정으로 필연적인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흄은 예를 들어 두 사건 사이에 그것들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사실 이외에 그것들 사이에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사적 인과 관계(private causation)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뒤에도, 그 두 사건간의 인과 관계의 관념이 그 두 사건을 포섭하는 두 사건 유형 사이의 '관습적인 전이의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말함으로써 회의론적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36)

크립키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도 흄과 마찬가지로 회의주의적인 논증에 의해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를 비롯한 일체의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뒤에 회의론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크립키의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이 부당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물론 내가 어떤 낱말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결정해 주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곧 "내가 어떤 낱말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문장을 참이 되게 하는 진리 조건(truth condition)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회의론적 역설을 직접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해결책은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진리 조건과 동일시하는 TLP의 의미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든 여러 사실 이외에 달리 회의주의적 역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실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회의주의 논증은 수학적 진술을 대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이 미치는 범위는 수학의 진술을 넘는다. 앞의 절에서의 사적인 경험에 관한 논의는 사적 경험 혹은 지각에 관한 진술의 경우에도 그러한 진술로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진리 조건적 의미론에 머무르는 한, 그러한 진술들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가 없다. 이러한 회의론적 역설을 극복하자면 진리 조건적 의미론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해결책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크립키에 의하면 그러한 해결책은 언어를 게임으로 보는 언어관으로 전환할 때 얻어진다.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할 때, 우리는 "이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 성립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에 첫째로 "어떤 조건 하에서 이러한 형식의 낱말들을 주장해도 (혹은 부인해도) 적절한가?"하는 것을 묻고 이어서 그 물음에 답변이 주어지면, "그러한 조건 하에서 그와 같은 형식의 낱말들을 주장하는 우리의 행위(practice)가 우리의 삶에서 하는 역할(role) 혹은 유용성(utility)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37)

이러한 언어관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그러한 주장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 대충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게임이 우리 삶에서 하나의 역할을 가져야 한다는 것뿐이다."38)

라는 생각에 입각한 것이다.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위의 두 물음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그러한 주장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39)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떤 주장을 해도 좋은가 하는 것은 그러한 주장의 진리 조건이 아닌, 주장 가능 조건(assertability condition)을 묻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크립키의 답변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로서 더하기를 의미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조건이란 새로운 경우에 그가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40)

자신이 올바른 언어 규칙에 따라 주장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이 PI §289에서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주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41)

우리의 일상적인 관행은 누구든지 자신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 방식에 따라 언어 규칙을 적용할 경우 그가 그러한 규칙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러나 문제의 언어 규칙을 올바르게 준수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당화 조건은 고립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언어 공동체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어떤 화자의 특정한 규칙의 적용이 올바르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공동체의 사용과 충분히 많은 경우에서 일치해야 한다.

덧셈의 개념을 이미 익혔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답변이 언어 공동체의 답변과 충분히 많은 경우에, 특히 간단한 경우에 일치한 경우, 실제로 그 공동체에 의해 문제의 개념을 익혔다는 판정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러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덧셈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것이다. 만일 충분히 많이 다른 경우에서도 그와 같은 시험을 통과하면 그 언어를 정상적으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42)


즉 개개인이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 개인의 정신 안에 있는 어떤 사실의 유무가 아니라 그 개념을 적용하는 그의 방식과 우리가 전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 가려지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당화의 조건은 우선 문제의 언어 공동체가 언어 사용에 있어서 전반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일 공동체의 답변이 전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개개인이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게임이란 성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43)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낱말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용 규칙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다른 행위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우리의 일치된 사용 규칙의 체계와 그것들이 우리의 다른 행위와 엮여져 있는 방식을 삶의 형식(form of lif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화의 첫째 조건은 바로 삶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삶의 형식을 배경으로 할 때 만이다. 크립키에 의하면 회의주의적 역설에 대한 위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은 삶의 형식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의 사용 방식과 일치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삶의 형식을 이루는 사용 방식과 일치하는지를 다른 사람들도 검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기준(criteria)의 개념이 암시하는 것이다.44)


어떤 사람의 해답이 사회의 일반적인 해답과 일치할 경우 또 오직 그 경우에 한해 그가 어떤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으로 인정하는 관행이 가지는 유용성은 어떤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러한 관행에 의해서만 우리의 상거래와 교육, 정책 결정, 싸움 같은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와 사적 언어 논증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45)

그러나 크립키의 해석이 타당한가, 그리고 타당하면 어느 정도 타당한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과제가 아니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크립키의 해석에 의존할 때,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는 언어의 의미와 언어를 적용할 때의 규칙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크립키의 회의주의자에 의하면 내가 '더하기'라는 말로서 덧셈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더하기'라는 말로서 덧셈을 의미한다."는 표현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크립키에 의하면 이러한 회의주의적 결론은 TLP에서의 진리 조건적 의미론에 의거할 때 그러하다. 그런데 진리 조건을 의미로 보는 입장에서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진술을 거짓으로 만들 따름이지 그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크립키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위의 표현의 의미로서의 진리 조건이 없다는 것이지 단순히 그러한 진리 조건이 사실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위의 언어적 표현이 의미는 있지만 참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적인 해결책만을 도모한다면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진리 조건이 어떤 형태로서든 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주의자들의 결론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더하기'라는 말로서 덧셈을 의미한다."는 표현이 진리 조건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의미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박탈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이른바 "주장 가능 조건" 혹은 "정당화 근거"는 나 하나만을 고려해서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립키에 의하면 '더하기'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두 수의 더하기에 대해 제시하는 답변은, 그리고 더 나아가 임의의 낱말에 대해 그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것이 바로 그 공동체가 하나의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해당한다. 이 경우 우리는 항상 두 수의 '더하기'에 대해 내가 내리는 답변이 우리 공동체의 대체적으로 일치된 답변과 동일한지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리는 대부분의 답변이 공동체의 답변과 일치하면 나는 '더하기'라는 낱말로 덧셈을 의미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 낱말의 의미를 아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만일 그 언어에 속하는 충분히 많은 언어에 대해 그러한 테스트에 내가 통과된다면 나는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68+57'에 대해 125라고 답한 반면 다른 사람은 5라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하자. 이에 대해 일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68+57'의 결과에 대해 그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답변이 어떻게 내려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두 가지 답변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두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이 경우에는 그가 '68+57'을 계산할 때,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사람도 잘못된 계산을 한 것이 아니고 나는 '+'로서 덧셈을 의미한 반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서 돗셈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의견의 차이가 곧바로 그 사람이 사용한 낱말로서 의미한 것의 차이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의 차이가 상당히 혹은 '충분히' 많은 두 수에 대해 일어났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의견의 차이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서 의미한 것의 차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위에서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PI, §143가 바로 이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 +'로 덧셈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어떻게 가려지는가? 그것은 그 가운데 누구의 답변이 혹은 누구의 견해가 우리 사회의 대체적으로 일치된 답변과 어긋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46)


어떤 사람이 '+'로서 덧셈을 의미하고 있다는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두 수에 대해 + 연산을 한 그의 결과가 우리 사회의 일치된 답변과 ‘충분히 많은 경우에’ 일치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반드시 모든 경우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일치된 답변이라는 것도 모든 사람의 일치하는 답변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일치된 답변이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이 동의하는 답변인 것으로 충분하다. 크립키가 "사실에 있어 우리의 실제 사회가 덧셈에 대한 행위에 있어 대충 일치하고 있다."47)

고 말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일치'(agreement)의 개념과 관련하여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 '68+57'에 대해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5라는 대충 일치된 답변을 제시했다고 하자. 이때 내가 그에 대해 마찬가지로 5라고 답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로서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하게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정당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의미하는 사실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답변을 하는 한에서는 그 사회에서 원만한 삶이 이루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두 수의 + 연산에 대해 사람들의 답변이 대충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우선 그 수의 + 연산의 결과가 얼마인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언어에 속한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사람들이 일치된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은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어떤 사회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 바로 그 사회가 하나의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혹은 그 사회가 하나의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일치된 반응(response)들의 체계와 그것들이 우리의 다른 행위와 엮여져 있는 방식이다."48)

라는 크립키의 말은 그가 명백히 전자의 입장에 서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이러한 크립키의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일치(agreement)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를 결정한다는 말인가?"--인간이 말하는 것은 참인 것, 그리고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치하는(agree)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의견(opinion)에서의 일치가 아닌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PI, § 241

그러니까 언어 사용에서의 일치는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지만 그것은 의견의 일치와는 구분된다. 의견에서의 일치는 삶의 형식의 일치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가 삶의 형식의 일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반응들의 체계를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응답(response)이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믿음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문제삼는 것은 언어의 의미에서의 일치이다. 크립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대체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립키에 있어 관련된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의 일치는 사실의 문제에서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어로 의미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대략 일치되고 있는 언어의 사용이 그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그러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 언어를 이해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에서 일치된 언어의 사용 방식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명제가 성립한다. 여기서 그와 같은 규범이 성립한다는 것은 그러한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에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서 크립키가 본 비트겐슈타인의 PI에 있어 언어 규칙의 원천은 무엇인가에 관해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사회에서 대체적으로 일치된 언어 사용의 체제이다. 그것을 하나의 규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언어 규칙은 원천은 일종의 규약이라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낱말은 그 낱말을 적용해야 하는 새로운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100 이하의 수에 대해서만 +2의 연산을 했다고 하고 그 모든 경우에 그 답변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자. 이 경우 100+2의 연산을 하는 것은 '+2'를 적용하는 새로운 경우가 된다. 그런데 크립키의 설명에 의거할 때, 지금까지의 +2의 연산에 관한 사회의 일치로부터 100 이상의 수에 대해 사람들이 '+2'를 어떤 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100 이하의 수들에 대해서는 '+2'의 사용에 대해 아무리 사람들 사이에 일치가 있었다고 해도 새로운 경우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의 일치가 없으므로 '100+2'에 대해 어떤 답변을 해야 하는가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의 답변이 대다수의 답변과 일치된 결과를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어떤 답변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104라고 답변할 수도 있고 5라고 답변할 도 있다. 그것에 대해 대다수의 답변이 일치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으로 '+2'의 의미가 새로이 결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의 ‘삶의 형식’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것은 아주 과격한 형태의 규약주의이며 이러한 형태의 규약주의가 예를 들어 논리적 필연성의 개념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수리 철학에 관한 글을 통해 더미트가 급진적인 규약주의(fool-blooded conventionalism)라고 부르고 있는 입장을 취하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49)

이러한 규약주의에 입각한 수학적 지식의 본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이 어떤 장점과 더불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그에 관한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범위를 넘는다.





참고문헌

1. Baker, G. P. 및 Hacker, P. M. S., Scepticism, Rules and Language, Oxford: Basil Blackwell, 1984.

2. Barry, Donald K., Forms of Life and Following Rules, Leiden: E, J, Brill, 1996.

3. Dummett, Michael, "Wittgenstein’s Philosophy of Mathematics", 그의 Truth and Other Enigmas(London: Duck worth, 1978)에 수록, Ludwig Wittgenstein: Critical Assessments, Vol Ⅲ, 121-37쪽에 전재.

4. Ebbs, Gary, Rule-Following and Real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5. Kripke, Saul,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aug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Shanker, Stuart.(ed.), Ludwig Wittgenstein: Critical Assessments, Vol Ⅲ. From the Tractatus to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6. 6. Wittgenstein o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London: Croom Helm, 1986.

7.Shanker, Stuart.(ed.), Wittgenstein and the Turning-Point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London: Croom Helm, 1987.

8. Wittgenstein, Ludwing.,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G. E. M. Anscomge 번역. Oxford: Basil Blackwell, 1978.

9. Wittgenstein, Ludwing.,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3rd ed. G. H. von Wright, R. Rhees, 및 G. E. M. Anscombe 번역. Oxford: Basil Blackwell, 1978.

10. Wright, Crispin, Wittgenstein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London: Duckworth, 1980.

각 주

* 본 연구는 1996년도 중앙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원에 의한 것임.

1 플라톤에 있어 어떤 개별적인 사물에 대해 어떤 서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물이 어떤 형상(form)에 ‘참여’하는가에 좌우된다. 한 문장의 주어는 개별적인 감각적 사물을 지시하며 술어는 형상을 지시한다. 따라서 "S는 P이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S가 지시하는 개별적 대상이 P가 가리키는 형상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제로 S가 지시하는 개별적 대상이 P가 가리키는 형상 간에 참여 관계가 성립할 경우 또 오직 그 경우에 한해, "S는 P이다"는 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S가 지시하는 개별적 대상이 P가 가리키는 형상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S는 P이다"를 참이 되게 한다. 개별적 사실과 형상간의 관계에 관한 조건이 실제로 사실로 성립하지 않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조건은 그것이 성립할 경우 "S는 P이다. "라는 표현이 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참이 되게 하는 사태, 혹은 진리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표현의 진리 조건이 성립하는 경우, 우리는 그 표현이 실재와 일치(fit) 혹은 대응(correspond)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상에서 말한 언어관에서는 언어적 표현의 진리 여부는 언어와 실재간의 일치 내지는 대응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2 예를 들어 플라톤의 경우 '正義'와 같은 술어는 正義라는 형상을 가리키며 "성삼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는 성삼문이 正義의 형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태를 의미한다. '정의'가 정의를 가리킨다는 사실과 "성삼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라는 진술이 성삼문이 형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지만 여하간 그것은 언어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실이다.

3 의미가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오로지 정신(nous)에 의해서만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정신을 지니는 존재로서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이 실재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문장의 의미로서 사태를 포착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나 그 사태가 정말로 존재 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매개적인 장치는 필요하지 않은가? 만일 문장과 실재와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한 장치로서 의미가 필요한데 더 나아가 문장의 의미가 정말로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알기 위해 또 다른 매개적인 장치가 요구된다면 매개적인 장치에서 또 다른 매개적인 장치로의 무한 퇴행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무한 퇴행을 막기 위해서는 문장과 실재의 일치는 의미라는 매개적인 장치에 의거하지 않고 곧장 파악되지는 않지만 문장의 의미와 실재간의 일치를 파악하는 데는 더 이상의 매개적인 장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4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실은 또한 단순한 것으로서의 대상들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언어는 이러한 대상에 대응하여 논리적인 명사를 포함하며, 그 대상이 그 명사의 의미가 된다. 각 대상들은 세계의 본체(substance)를 이루는 것으로서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대상들 이외에 다른 여러 대상들과 여러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따라서 대상들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응하여 그것들을 의미하는 논리적인 의미의 고유 명사들도 서로 결합하여 가장 기초적인 단위의 문장 혹은 원자 문장(atomic sentence)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고유 명사들이 어떤 다른 고유 명사들과 결합하여 원자문장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구문론적 규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구문론적 규칙은 전적으로 세계의 본체를 이루는 대상들이 지니는 논리적 성격에 의해 결정되므로 논리-구문론적 규칙 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각 원자문장이 그리는 것 혹은 의미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사태(state of affairs)로서 원자 문장과 그것이 그리는 사태는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공유한다. 또한 언어에 속하는 모든 의미 있는 문장 혹은 正型문장(well-formed sentence)은 원자 문장을 토대로 해서 논리-구문론적인 규칙에 따라 논리적 연결사를 반복적으로 이용하여 만들어진다.

5 TLP, 6.13.

6 TLP, 4.123

7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것은 반드시 그 규칙이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많은 경우 그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의미에서 규칙에 대한 묵시적인 이해가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8 TLP, 4.0031.

9 규범적인 진술에 대응하여 합리성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인과 법칙으로부터 "R을 얻기 위해서는 A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진술이 성립하며 이것으로부터 R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A를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 진술이 성립함을 보았다. 그러므로 R을 얻으려는 상황에서는 A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의 합리성을 우리는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약정에 의해서건 합리적 원리에 의해서건 E의 상황에서는 누구건 A를 해야 한다는 진술이 성립한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A를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다. 도덕적인 면에서 비합리적인 사람이다. 또 "p가 지식이다."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p라고 믿는 것이 인식적인 합리성에 부합하는 태도이다. 만일 언어적 표현 S가 M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S를 M을 의미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이 성립하는데, 이것은 달리 말해 그렇게 S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동물이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서술한 행위들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또한 그러한 행위들이 관련된 규칙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면, 다른 낱말에 대해서도 그것을 적용하는 대상들에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언어'라고 부르는 것에도 공통적인 요소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혹은 모든 언어를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언어의 본질이 있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것을 규명하려는 작업은 포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PI, §19)이며 따라서 살의 형식의 일부로서만 우리는 언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행위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것들을 모두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우리의 삶과 독립적인 언어 규칙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11 Kripke, Saul A., Wittgenstein-On Rules and Private Langaage(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Massachusetts, 1982, 이하 Wittgenstein으로 약함)

12 Wittgenstein, 2-3쪽.

13 Wittgenstein, 3쪽

14 Wittgenstein, 같은 곳.

15 Wittgenstein, 61, 63쪽.

16 Wittgenstein, 4쪽.

17 Wittgenstein, 55쪽.

18 설(John Searle)에 의하면 내가 어떤 약속을 했다는 사실적 명제로부터 적절한 상황에서는 내가 약속한 바를 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제가 따라 나온다. 설의 관점이 옳다는 가정 하에 내가 과거 낱말 W를 이러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앞으로도 그 낱말을 이러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했음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내가 과거 낱말 W를 이러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사실로부터 현채 그 낱말을 이러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이 따라 나올 것이다.

19 그 증거로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RFM, Ⅰ, §3에서 다음과 말한 것을 들고 있다. "내가 수열 +2를 전개할 때, '20004, 20006'처럼 써야 하지 '20004, 20008'처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이 물음은 "이 색깔이 빨강임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물음과 비슷하다. )"(이탤릭체 강조, 원저자)

20 여기서 일단 논의의 전략상 현재 덧셈과 돗셈이 어떤 연산을 의미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사용한 '+'가 돗셈이 아닌 덧셈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내가 어떤 낱말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현재 내가 어떤 낱말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사실도 존재하는 않는다는 결론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와 '' 라는 낱말을 사용해서 어떤 수학적 함수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도 존재하는 않는다는 결론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와 '<A NAME="#46e8dfbe"></A><IMG src="C:\DOCUME~1\user\LOCALS~1\Temp\UNI000b.gif" width=14px height=14px border=0>' 라는 낱말을 사용해서 어떤 수학적 함수를 의미

Wittgenstein, 21쪽 참조.

21 Wittgenstein, 11쪽.

22 다음과 같은 크립키의 발언도 명백히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의미와 의도와 미래의 행위 간의 관계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것이다. "(Wittgenstein, 37쪽)

23 Wittgenstein, 10쪽.

24 Wittgenstein, 17-8쪽.

25 Wittgenstein, 14쪽.

26 Wittgenstein, 14쪽.

27 Wittgenstein, 15쪽.

28 Wittgenstein, 17쪽.

29 콰인의 자연주의적 입장은 의미를 성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설사 성향이 오류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왜냐하면 콰인의 경우 나의 성향은 나의 언어적 행위에 의해 결정할 수밖에 없는데, 직접 관찰에 의해 진위를 결정할 수 없는 이론적 진술의 의미는 나의 행위를 망라한다고 하더라도 결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모든 문장의 의미가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낱말이 예를 들어 'rabbit'를 의미하는지 'rabbit-stage'를 의미하는지가 결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크립키가 보기에 콰인의 경우에도 비트겐타인과 유사한 문제가 일어난다. Wittgenstein, 57쪽 참조.

30 Wittgenstein, 41쪽.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PI, §21은 이러한 종류의 내적 경험에 대해 어떤 언어적 표현을 부여할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 같다.

31 Wittgenstein, 43쪽.

32 Wittgenstein, 38-40쪽.

33 Wittgenstein, 13쪽.

34 Wittgenstein, 62쪽.

35 Wittgenstein, 62쪽.

36 Wittgenstein, 67쪽.

37 Wittgenstein, 73쪽.

38 Wittgenstein, 77-8쪽.

39 Wittgenstein, 86쪽.

40 Wittgenstein, 90쪽.

41 비트겐슈타인은 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어떤 낱말을 정당성이 없이(without a justification, ohne Rechtfertigung) 사용한다는 것이 올바르지 않게(without right, zu Unrecht)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괄호 안의 이탤릭체는 독일어 원문이고 영어는 Anscombe의 영문 번역임.)

42 Wittgenstein, 91-2쪽.

43 Wittgenstein, 96쪽.

44 Wittgenstein, 98-9쪽.

45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Baker 및 Hacker의 Scepicism, Rules and Language(Oxford: Basil Blackwell, 1984)의 1장 및 2장과 Shanker의 Wittgenstein and the Turning-Point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London: Croorm Helm, 1987), 1장을 참조할 것.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곳에서 피력한 회의주의에 대한 일관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회의주의를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적인 결론을 내릴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예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Notebook 1914-16(Oxford: Blackwell, 196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문이란 질문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존재할 수 있으며, 질문은 또한 해답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존재할 수 있고 해답은 무엇인가 말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

46 물론 두 사람이 모두 우리 사회의 일치된 답변과 어긋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두 사람 모두 '+'로서 덧셈을 의미하고 있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47 Wittgenstein, 91쪽.

48 Wittgenstein, 96쪽. 그러므로 예를 들어 두 수의 + 연산에 대해 일관되게 서로 다른 답변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49 더미트는 "Wittgenstein's Philosophy of Mathematics"(Ludwig Wittgenstein: Critical Assessments, Vol Ⅲ, 121-37쪽에 전재)에서 '필연성'에 관한 규약주의를 "모든 필연성은 우리가 실재Ireality)가 아닌 언어에 부연한(impose)한 것이다."라고 보는 입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규약주의는 다시 온건한 규약 주의(modified conventionalism)과 급진적인 규약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수학적 명제의 필연성에 관한 한, 전자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선택한 노선이며, 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상기 논문 123-4쪽 참조.)

이력사항


이종권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