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낮은 숨결- 당신에 대해서(문학과지성사, 1989)
- 이인성
우선,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잠깐 동안 눈을 감도록 권하겠다.
눈을 감지 않고 위의 비어 있는 한 줄을 뛰어넘었다면, 제발, 아래의 비어 있는 한 줄을 건너기 전에, 꼭, 눈을 감아보기 바란다. 이때 눈을 감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또한 기필코, 당신 자신이 깨달아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앞에서 눈을 감았었더라도 그저 눈꺼풀을 덮어본 놀음에 불과했다면, 이 경우 역시, 다시 한번 당신 눈 속의 그 어둠과 마주하는 게 스스로 뜻깊겠다. 이번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눈꺼풀 안으로 쫓아들어온 현란한 빛무늬가 완전히 암흑의 뒤편으로 스러지도록. 그래서 원컨대, 그 짙은 어둠의 응시가 이 소설 읽기를 지탱하도록.
분명, 당신은 눈을 감지 않았거나 너무 일찍 눈을 떴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이제 이 순간, 돌연히, “오, 빌어먹을! 늘 똥 마려운 듯한 그대, 성급한 독자여! 속물이여! 개새끼여!”라는 격한 욕설─써놓고 나니 지나치게 시적이다─을 당신에게 퍼부어버려도 상관은 없으리라. 용기 있게 그랬던 그 누군가들처럼. 그러나, 그렇게 강풍처럼 당신을 몰아치는 것이 결코 무턱댄 짓은 아니더라도, 그러나, 현재의 나─나? 나, 누구?─로서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다름아닌 당신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끝끝내 당신을 끌어안아야만 하겠기 때문에. 아니, 아무래도 ?전혀?라는 말은 좀 거짓이다. 죄송하다. 게다가 글이란 대개 순서적으로 읽히는 것이니까, 앞서의 문장들에서 당신은, ?그러나?의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잠깐 동안, 이미 약간의 불쾌한 충격을 느꼈음직하다. 솔직히 이야기해, 이런 시대─어떤 시대?─를 함께 살면서, 그 미풍 같은 충격조차 빼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고나 할까. 이 마음이 당신에게 이해되기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언젠가는.
그렇다, 그 ?그 언젠가?를 향해 막막히 이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아마도 멀고먼 그 언젠가, 당신을 다르게 참답게 만나겠다는 마음을 꾸면서. 하지만 그 언젠가가 아닌 지금의 당신은, 오히려 이런 내 태도에 대해 반발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나를 비웃고 싶을는지도 모른다. “미풍 같은 불쾌감은커녕 입김 같은 느낌도 없는걸.” 뭐, 더 심하게, “좆같은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가 뭔데 남을 갖고 놀라구 그래?”하는 소리─써놓고 나니 이건 상당히 사실적인 욕이다─가 들려올 듯도 하다. 그건 필경, 뭣도 못 되는 내가 건네주는 시늉만 했던 쬐끄만 욕사발을 당신이 지레짐작, 미리 낚아채 얻어마신 덕분에 토해내는 욕지기일 터이다(그래도 이렇게나마 반발감을 느낀다면, 역설적이지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라는 애매한 질문이 불쑥 괄호 안에 묶여 튀어나온다). 여기서(거기서), 추상적으로 역할 그 욕지기의 냄새를 추상적으로나마 직접 맡고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왜 그런지 언뜻 대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 자체로밖에 구체화될 수 없다고 해서), 나는(당신은),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투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일종의 자기 속임수를 쓰지는 않겠다(마찬가지로, 생각해보니 그런대로 재미있을 것도 같은 소설인데─하고 슬쩍 얼버무리고픈 함정에서 벗어나야 된다). 차라리 적극적으로(그러면 당연히), 나는(당신은), 그것을 일단 긍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려 하는데(이 태도의 또 다른 위험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혹을 뒤잇게 될 텐데), 왜냐하면 이제 그 비어버린 허구의 욕사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당신을 상상하면서(왜냐하면 그렇게 당신을 상상하는 나를 상상하면서), 그 모습이, 그 비어 있음을 통해 바로 당신 자신을 보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정말 그러한지, 모든 물음들을 당신 자신에게 되돌리는 의식의 시련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내 상상 속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자세로, 이 소설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을 거꾸로 덮치는 말사발 속에, 환한 듯 캄캄하게 갇혀들곤 했던가). 어쩌다 입장은 대립되었었지만, 어쨌든 당신도 당신 나름의 길을 따라 ?그 언젠가?에 이르고 싶다는 듯이(부디 그러기를!).
앞뒤가 그리 짜여질 수 있다면, 이제 그 반발의 방식으로 당신에 대한 당신 자신을 더 깊이─아니, 그런즉 더 표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당신도 동의해줄 수 있지 않을까? 욕지기를 뱃속까지 뒤집어 훑어내고 나서 제 몸을 납작하게 뻗쳐 눕힌 마음으로, 최초의 당신이 보일 때까지. 처음의 제안과는 정반대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자, 그렇다면…, 그렇듯 두 눈에 온 힘을 모으고, 그리고 다음 한 줄의 빈 공간 앞에서 읽기를 멈추고, 수시로 잊어버릴 테지만 끊임없이 되돌아와야 할 자리인 지금 그 상태의 당신을, 샅샅이, 둘러보라.
보았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이 소설을 앞에 둔 당신 자신을? 그래서 솟구쳐 알겠는가, 이제는 나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령 앞 문단의 첫머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거니와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넘어섰는데 웬 시비냐?”라고 당신이 항의한들, 이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는 데는 헛물켜는 짓이나 다름없음을. 그리고 알겠는가, 그렇다고 나에 대한 맹목적의 긍정으로 단순히 돌아와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가령 내가 뒤이어 당신의 반응을 적절히 지적해냈다고 해서 새삼 “그렇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들, 이번엔 뜨물 먹고 주정하는 짓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또 한번 솟구쳐 알겠는가, 색깔 다른 두 마리 뱀─살갗에 비늘이 돋혀오는 징그러움의 홀연한 아름다움, 그 상투적 느낌과 껴안는 새로움!─이 서로서로 꼬리를 물고 돌게 하며 그 가운데의 낯선 공간을 우리의 그 ?무엇?으로 빚어내야 하는 알마음의 노동을?… 그래도 아직 모르겠는가, 이 비약 아닌 비약들을?…
이런, 이런 세상에… 느닷없이 충동에 겨워 단박 끝장이라도 볼 듯한 질문들을 쏟아놓고 나니, 시작의 한 고비로는 너무 숨가쁘다. 그것도 암담하기 그지없는 숨가쁨. 특히 마지막 질문이 덧붙여진 순간은, 갑자기 내가 나에게 당한 듯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의 대답이 전혀 들리지 않았으니까… 뭐? 당신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고? 그럼, 방금 내가 당신의 대답을 즉각적으로 듣고야 말겠다는 심산으로 그 질문들을 퍼부었단 말인가? 두말할 나위없이 당연한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것도 잊고?… 바보 같으니! 지금 여기서 당신의 대답을 판별해낼 수 없음은, 뭐랄까, 애당초 절대적인, 그리고 끝끝내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죽음처럼 숙명적인 현실이요 조건이 아닌가. 마치 지금 거기 있는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내 육체의 호흡이 갑자기 거칠어져 있는 사실을 감지할 수는 없듯이. 이것은 다름아닌 소설이므로. 지금, 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과 만나 목소리를 나누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불현듯 솟구치고 싶은 욕망 때문에─그 욕망 자체야 하등 탓할 바가 있으랴만─ 마음결만 소용돌이에 휘말린 셈이다. 더구나 이 어쩔 수 없음이야말로 실제로는 그 고동치던 질문들의 근거이기조차한데, 이렇게 글의 머리와 꼬리를 뒤바꿔버린 꼴 하며… 그래, 여기선 불가능한 당신의 확정적인 대답을 구하지 않는 글길을 따라갔어야 했다. 더 앞에서는 이미 그럴듯하게 해냈던 것처럼. 그리고 이 지점에서 “왠지 알겠는가? 바로 이게 소설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는 식의 어투를 취할 수 있듯이. 하기야 소설이라고 꼭 대놓은 질문을 하지 말란 법은 없겠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열린 마무리가 아닐 때, 거기에 다음 순간의 내 독단이나 단호함 혹은 급박한 방향 전환이 요구되는 것은 필연이다. 요컨대 위 질문들을 그대로 뒤이으려면, 나는 당신을 알아들었거나 못 알아들은 어느 한편으로 일방적으로 간주하거나, 이야기의 다른 매듭으로 건너뛰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팔라지기에는 아직 자리가 마땅치 않다. 그러니 어리석은 나여, 아무래도 여기선 내 가쁜 숨이나 얼른 가다듬는 게 낫겠다.
그 사이, 엉겁결에 허둥지둥 내 글의 숨결을 뒤쫓아왔을 당신도, 멈춰서서 내 횡설수설의 타당성을 한번 따져볼 일이다.
이유 없이 하나의 영상이 떠오른다. 어떤 짙은 어둠의 집 밖으로 막 나서서 눈부심에 눈물겨운 눈을 찡그리며 주춤거리는, 그러나 빛 속을 건너보기 위해 고통스럽게 초점을 찾는 나어린 누군가의 모습이. 언제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데, 누구일까?
이 영상의 심연으로부터도, 지금은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천천히, 다시 시작하자. 문제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보았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이 소설을 앞에 둔 당신 자신을? 그러면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의 옷차림을, 당신의 자세를, 당신의 몸 생김새를, 이 책을 붙들고 있는 손 모습을? 또?… 그리고 그 보이는 것 너머로는 무엇을?…
당연히, 이번엔 당신의 직접적인 대답이 목적은 아니다. 나는 다만, 조금 전 내가 나에게 되풀이 확정되었듯, 무엇보다도 당신이 당신에게 확인되기를 원한다. 이 순간 최소한 확실한 행위의 주체자인 당신으로서, 즉 딴 살을 뺀 이 소설의 독자로서. 지금, 당신은 아무튼 읽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나와 만나 목소리를 나누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또 이 이후에도, 때없이, 당신은 무심코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거나 빠져들기 쉽다. 여기서도 막바로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라는 서술형 대화체로 글쓰듯 혼자 대꾸하며, 어쩌면 그 역시 이게 소설이기 때문에 오랜 습관을 떨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맹세코, 이건 당신을 비난하려는 태세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 착각의 자연스러움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깨우칠 때, 그러면서 다시 그 자연스러움에 기꺼이 몸담을 때, 그리고도 수시로 거기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을 때, 그렇게 넘나들 수 있을 때(때, 때, 때, 때, 슬며시 말에 가락이 붙어), 더 드넓은 말밭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밭을 가세∼ 밭을 가세∼). 그 착각의 소지가, 독자인 당신이 읽는 당신이 바로 작가인 내가 그려내는 당신이라는 사실에 있는 까닭이다(씨 뿌리세∼ 씨 뿌리세∼). 되돌아보라(노래를 끊자, 냉정히). 한 예로, 나는 당신에 대해서, “분명, 당신은 눈을 감지 않았거나 너무 일찍 눈을 떴다”고 썼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그 다음 줄거리를 이었다. 하다못해 당신이 어떠어떠하게 반발하리라는 것까지도 임의로 적었다. 하지만 그때그때, 그 도처에서, 실제의 당신은 그 진술 내용을 벗어나 있었기 십상이다(그 동안 당신과 당신에 대한 내 묘사가 완벽하게 일치해왔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수상하기 짝이 없으니 가슴에 손을 얹을 것). 그런데 또 한번 뒤집자면,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거기서 여기까지 계속 읽었다는 명백함이 놀라운 것이다. 술집이나 다방의 한구석에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 내가 “눈 감어!”“눈 부릅떠!”를 외치며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에 대해 일방적 판단을 늘어놓는 광경 속에서라면, 보나마나 당신은 내 뺨을 후려쳤거나 미친놈 피하듯 자리를 떴을 것이다. 헌데 그와 맞먹는 상황의 문자 재현인 이 소설을 당신은 내팽개치지 않았다(이미 내팽개친 사람은 스스로 나의 ?당신?이기를 거절하고 이 글의 세계 밖으로 나갔으니, 지금껏 나의 ?당신?인 당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왤까? 그것은 당신이 이 소설 앞에 최초로 다가왔던 이전의 당신─이 당신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과는 다른 이후의 당신─이 당신은 어떻게 이룩될 것인가─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당신과 포개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섯 살 윤곽이 환갑 얼굴에 어리는 변함없음만큼이나, 여섯 살 수줍쟁이를 환갑 불호랑이로 바꿔놓는 동력이 존재하듯?
이 소설 읽기의 동력인, 또 하나의 당신? 몸이 마주치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실증적 표상인 얼굴 때문에 섣불리 나타나지 않는, 이렇게 이런 소설의 ?당신?을 용납함으로써나 슬며시 스며나오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어디에 어떻게 포개져 있는지 불확실한, 당신이면서 당신이 아닌, 또 하나의 당신─우선은 그렇게 일컬어두자. 그러면 희미하게나마 의식하겠는가, 당신이 나를 헛보며 소리없이 말을 되받아 건넨 상대가 실상은 그 또 하나의 당신이었음을?… 그리하여 당신의 당신 자신과 나의 ?당신?인 당신을 끊임없이 오가는 넓이 속에 부득이 펼쳐진 당신! 여기서 당신은 그중의 한쪽으로 고정될 수 없다. 그 두 당신을 하나의 당신으로 부르는 나에 의해.
그러므로 만약 이 새로운 어쩔 수 없음이 글읽기의 눈짓 속에 깊이 배어들기를 희망한다면, 당신은, 차후, 적어도 행간을 띄우는 자리에서만은, 의식적으로라도 눈길을 멈추어야만 하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벌써부터 당신에 대한─더불어, 불가피하게 당신과의 관계 속에 곁세워진 나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진행해온 셈이다. 당신이 이 『한없이 낮은 숨결』이란 소설집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 목차에 나타난 이 소설의 제목이 터놓고 암시해주었던 대로. 그런데 막상 인사가 너무 늦어진 듯싶다. 무례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늦게나마 인사를 드려야겠다.
─독자여, 안녕하셨는가? 나는 이 소설의 작가 이인성이다. 다름아닌 당신에 대한 소설을 쓰며, 나는 지금…
인사를 적다가 문득, 나는 지금, 당신이 이 인사법에 주목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쏠린다. 나는 물론 이 소설의 이야기꾼이지만, 이 소설에선 이야기꾼으로서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본문 안에서도 여전히 이 책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이름의 존재와 동일한 이인성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 점은 퍽 중요하다. 지금, 나는, 그 동안 줄곧 그래왔고 앞으로도 대개는 그럴 것이듯이, 내 소설 속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꾼이 되기를 애써 피한다.
이 말을, 당신에 대한 또 하나의 당신의 관계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당신에 대해 그렇게 규정하고 난 후, 나에게도 또 하나의 내가 있음이 느껴지기는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만년필을 쥔 내 손놀림을 통해. 하지만, 나와 또 하나의 나 사이에서 씌어지는 소설 속, 다른 이야기꾼들에 대한 고려는 차원이 바뀐 문제로 보인다. 작가와는 다른 이름으로 무수히 가능한 다른 이야기꾼들이란, 새로운 두께로 겹쳐져, 나로 하여금 바로 나와 또 하나의 나 사이를 오가게 하는, 그 사이 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타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쓰기는 언제나 결단을 부른다. 그 낯익으면서도 낯선 무형의 얼굴을 위해 어떤 이름을 붙여줄 것인가? 이름과 함께, 그는 나를 벗어나 독자적인 주체이자 대상이 될 테지. 나로부터의 분열이든 확산이든, 그때 하나의 실체인 그는 이미 그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그를 고스란히 나 자신으로 품고 싶다. 원심력의 욕구를 가지고 나로부터 떨어져나가려는 한 의식의 반대편으로 일종의 구심력을 작용시키며, 내가 팽팽하게 둥근 하나의 폭으로 열리도록.
그런데 얼핏, 의혹이 든다. 내 주장이야 어떻든, 정말 내가 여기서 이인성 그 자신으로 표출되고 있을까? 조금 전, 사설이 거창하게 번진 것부터가 미심쩍다. 혹시 나는, 이 소설을 쓰는 이인성과는 다른, 다만 소설 속의 이름이 이인성일 뿐인 다른 이야기꾼이 아닌가?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의 작가 이인성이다”라고 했을 때의 나는 작가라는 특정한 역할 속의 이인성이라는 역할을 맡은, 작가로서의 ?나? 자체를 가장한 별개의 ?나?라는… 그렇다면 ?그 자신?이니 ?자체?니 하는 표현들보다는…, 에, 그러니까…
일단 멈추겠다. 자꾸 따져나가다 보니 인사 하나가 너무 게걸스럽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는 당신이 더 중요한 주인공인데도. 그러니까 이 순간은 그냥, 애초의 목적을 위해 일상적인 어감으로 간략히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 어떨지. “전, 이인성이라고 합니다. 감히 내놓고 말씀드리기가 좀 뭐하지만, 소설갑니다. 워낙 평범하게 살아와서 특별히 소개드릴 만한 건 없고, 그저 나름대로 세상에 나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소설가가 되었지요. 삼십대니까 팔팔한 나인데, 게으른 데다가 밥벌이도 해야겠고 하다보니, 소설다운 소설도 제대로 못 쓰고… 아, 지금 쓰는 거요? 이건 소설가인 제가 독자인 당신께 직접 말을 트는 척하는 그런 건데요, 쓰다보니 별로 신통해보이지 않고, 원…” 하고. 이게 너무 밋밋한 맛이라면, 무대 위의 스타를 흉내내볼까. “안, 녕, 하세요?! 조용필, 아니, 이인성임다! 오늘의 쇼, 아니, 소설은…” 어이쿠, 이건 영 못 해먹겠다. 내게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렇지만 말이 나온 김에 연상되는 건데, 이 상황의 나는 무대 위의 가수나 배우와 흡사하다. 그들의 신상명세보다는 노래나 연기가 참으로 중요하며, 그나마 일방적으로 자신은 소개했지만 당신을 소개받을 길이 없다는 점에서. 그래도 객석의 당신이야 어렴풋이나마 보이고 간혹 실존의 증거인 헛기침도 들리지만, 책읽는 당신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이 처지가 더 비극적으로(?) 과장될 여지가 많다. 때때로 가슴을 두드리는 느낌─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하늘의 눈 아래 혼자 벌이는 어릿광대짓. 그런 날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불러내고 쏘다니고 술을 퍼먹지만…, 이제 정색을 하자면, 진정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독자로서 이 소설 앞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나이만큼 살아온 그 전체로서의 당신은? 나는, 숨을 가득 들이쉬고 깃털을 곤두세우고 날개를 활짝 펴 무엇인가를 가득 품은 최대치의 당신을 그린다(끝내 얼굴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 당신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고 남들 속에 숨어들며 대답을 피하지 말라(무작정 달려가 얼굴을 맞대고 싶은 열정을 애틋이 가라앉힌다). 아까와는 반대 태세로 오뉴월에 서리 내리게 뭔가에 사무친 처녀처럼 독기를 품고 말하건대, 이 물음은 정면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미리 단서를 달아두었었지만, 당신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해서 반드시 대놓고 질문하지 말란 법은 없다. 아까의 경우와는 질문의 형태부터 다르다. 여기서 나는 위 질문을 절대격의 의문부호로 닫아, 어차피 외로운 나를 더 철저히 고립시키면서, 그 대신 그것을 당신의 살 깊숙이 당신에 대한 당신만의 물음으로 새겨넣겠다. 지금 당장 팔뚝을 펼쳐보라. 거기 이미 새겨져 있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진하게 느껴지는 문신이. 그 허구의 문신을 바라보며, 당신은 홀로 내밀하게 발음해야 한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여기야말로, 당신이 자발적으로 당신 스스로를 향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곳이 아닐까?
당신만의 시간 이편에서, 내 몫으로 머릿속에 떠올라 혼탁하게 뒤척였던 꿈그림자: 누구일까, 한 아이가 희디흰 햇살의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빛의 공간만이 아득히 확대되는 거기서, 빛 위를 걸을 수 있는 신발인 양 작은 그림자만을 신은 채. 한없는 걸음. 그러다가 홀연히, 아이는 빛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과감히 한 단절의 단락을 앞에다 세워놓고 나서, 다시금 어떻게 「당신에 대해서」란 제목을 위해 당신에게로 다가갈까? 아마도 그 때문이었겠지만, 조금 전 당신의 정체에 대한 물음을 전적으로 당신에게 몰아붙인 후 햇살과 아이의 몽상마저 사라졌을 때, 한 유혹의 손길이 내 속의 어느 곳에서 내 속의 다른 곳으로 뻗쳐나왔었다(당신 속에 침잠해 있는 동안, 당신도 어떤 손길을 만났는가?). 누군가─또 하나의 나였을까,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엄연한 남이었을까─가 낮게 속삭여댄 것이다(당신이 만난 손길은 얼마나 거칠고 얼마나 부드러웠는가?). “앞의 그 태도는 아무래도 무책임하다고 판단되지 않어? 지나치게 방관자적으로 한발 물러서는. 더 적극적일 수는 없을까? 그런 뜻에서, 너의 ?당신?을 이쪽에서 능동적으로 추출해내면 어떨까? 예컨대 이 책의 속성에 비추어 그 독자들을 분석해봐. 소설집도 가지각색이니까, 그중에서 이런 유의 소설집을 구입하거나 뒤적일 만한 사람들을.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평판, 광고 방식, 이런 유의 책을 갖다놓는 서적과 고객 성향, 저널리즘의 소개, 또, 비평가들의 관점 등등,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말야. 그러면 그들이 속한 사회적 계층이라든가 경제적 능력, 지적 수준 따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추적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거기다가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너란 작자의 소설까지 읽어가고 있다 칠 때, 문학에 대한 관심이랄지 취향, 혹은 의무감이라도 지니고 있을 게 거의 틀림없고 말이야. 그런 특성들을 모아 재구성해보면 그런대로 구체성을 띠지 않겠어? 그래서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거야. 그땐 훨씬 적절하고도 강력한 대응 문맥을 구할 수 있겠지.” 적극적, 능동적, 속성, 분석, 사회, 객관적, 재구성, 구체성, 전형, 대응… 그 낮은 목소리는 그다지 싫지 않게 거칠었고, 또 그 나름의 단단한 사랑의 표현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외로운 액체성의 독기를 품고 있던 내 가슴속의 여성─그녀는 또 누구?─이 하마터면 그 남성적 에로티즘에 매혹되어 몸을 풀어버릴 뻔했다. 아니, 그때 눈꺼풀을 덮고 새어 내보내던 가느다란 신음을 미리 기록해두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의 애무는 그녀의 성감대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손길은 오히려 그녀의 살갗을 차갑게 굳힐 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어휘 체계의 에로티즘이 껴안을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녀는 내 가슴의 컴컴한 어둠 속에서 홀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 하염없이 가슴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나는 앞의 방식을 제안해준 그 누군가의 굳센 순정을 의심치는 않는다. 내 가슴에 울린 그의 목소리의 색채가 그것을 전해주었으니까. 이 비실증적 증거를 기꺼이 용인하는 내 성적 상상력은 그러나 그와 나를 결합시켜주지 못했다. 찬찬히 따져보면, 이 어긋남은 당연하다. 실은, 애당초 그런 상상력의 차원에 성급히 몸을 내맡긴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나는 혼돈에 빠졌었음이 자명하다. 그 순간의 외로움에 마비되어. 그를 그야말로 그의 방식으로 보지 않고, 내 방식으로 그의 문맥 속에서 정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참모습 그것만을 끌어안으려 했던 까닭에. 하지만 그와 나의 결합은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같은 전선에 나란히 선 전우애의 상상력 속에서나 이루어질 성질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와 나는 당신의 삶의 공간 속에 근본적으로 의미 좌표를 달리하고 있는 어떤 표적을 겨냥하는 형국이랄까. 따라서 그의 의견을 수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또 다른 한 편의 소설을 새로 시작해야 함을 뜻한다. 당신과 내 이야기꾼이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을 나눠 갖고. 그런데, 아니다. 내가 여기서 실천하고자 하는 행위는, 소설이라는 형태를 매개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그 최소한의 간격만을 유지한 채, 즉 소설 쓰기와 소설 읽기라는 상황으로 우리─우리? 오, 우리!─를 수렴시켜, 모든 당신을 ?당신?에게, 모든 나를 ?나?에게 끊임없이 되돌리며 되씹게 하는 일이다(그러므로 이미 지나왔지만, 내가 그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잘못 발 디뎠던 그와의 에로티즘을 묘사했던 곳에서도, 당신은 그 환상에 동화되어 같이 나뒹굴지 않았어야만 했다). 그 무수한 당신이, 그 무수한 내가 누구이건간에 말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주 작게, 그러나 본질적인 변모의 가능성을 향하여. 마침내 그 언젠가, 무한히 서로를 만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때 그곳에서는, 우리─이 어휘의 존재 방식부터 떠올려야겠지만─의 아름다운 성적 상상력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이봐요, 이인성씨! 여길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데,”하고, 불쑥, 이번엔 내 몸 밖 어디서의 누군가가 글길을 막는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당신 나름의 작가적 순수성이랄지 성실성이랄지 하는 건 인정한다 쳐도, 정작 그 문학적 태도엔 심각한 회의가 가는데, 좀 따져봐야만 되겠소.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도대체 이 소설을 가지고 뭘 바라는 거요?” 내가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듯 누군가가 나를 ?당신?이라 지칭하는 게 몹시 기꺼워, 나는 흥분에 휩싸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것은 지금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방안의 책장에 꽂힌 어떤 책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음성이다.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바로 당신을 원하는 거지요.” 나도 그를 ?당신?이라 부르며 대답한다(표면으로 불거져나왔을 뿐, 그 또한 당신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난 지금 그렇게 문학적으로 얼버무리는 소릴 들으려는 게 아니오.” 그가 약간 성난 듯이 반발하며 말을 잇는다. “이게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무엇을 기여하느냐, 알고 싶은 거지.” 이 대화를 회피할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당신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잠시 미뤄둬야겠다. 그러나 여기서, 당신도 방관자로 한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가 아니고 내가 아니며, 따라서 여전히 당신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제 내가 말하겠다. “난 이 소설의 문맥 속에서 대답했을 뿐 결코 얼버무린 게 아닙니다. 헌데 당신은 소설가인 나에게, 그것도 소설 속에서, 명료한 의식의 부분, 논리의 부분만을 떼어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게 내게는 몹시 거북살스럽다는 걸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부호 하나 빼놓지 않은 이 소설 전체가 그 자체로 내 대답이라 말하는 게 내 식으로 타당한 대응이겠지만, 일단 당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말았으니, 한번 당신 뜻을 따라봅시다. 그럼, 당신들의 용어를 빌어 대꾸해볼까요? 이런 소설을 쓰는 건 바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의 당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섭니다, 라고.” 그:“해방? 이게 어떤 식으로 인간 해방과 관련을 맺는지 말해보겠소?” 나:“대개가 다 그렇지만, 이 소설도 삶의 여러 양상 중 어떤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미리 염두에 두어줬으면 좋겠군요. 여기선, 내 소설을 읽는 독자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꿈꾸고 스스로 반성, 비판하는 정신적 실천의 영역에서지요.” 당신(계속 읽고 있을 뿐이므로 이 대화에 직접 끼여들 수는 없어도, 독립된 말 자리만은 갖추어두어야겠기에):“
”그:“구체적인 현실이 삭제된 소설을 통해 정신적 실천이 행해진다는 건 공허한 관념론으로 들리는데…” 나:“가볍게 반문해봅시다. 밥 벌어먹기 위해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만이 구체적인 현실이고, 소설을 읽고 몽상하고 성찰하는 건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그거야말로 독단적 관념론이 아닐까요? 지금 나는 독자의 책읽기라는 ?구체적인 현실?을 겨냥하고 있는 겁니다.” 그:“내가 지적하는 건 독자의 개체적 현실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적 현실이오. 인간 해방이란 명제가 개인의 차원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머무를 수도 없는 건데…, 역사의 진보를 논할 때, 거기서 궁극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은 인간들이 함께 실재하는 이 사회, 이 세계일 테니까 하는 소리요. 그에 비추어보자면 당신은, 개인의 구원이 해방의 완수인 양, 또 문학과 독서의 혁신이 곧 세계의 혁신인 양 착각하는, 뭐랄까, 일종의 정태적 개인주의, 자폐적 문학주의 같은 데 빠져 있는 거 아니겠소?” 나:“어떤 명제가 헛된 구호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선, 그 명제의 실행 조건들이 문자 그대로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상식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자주 무시되는 사실부터 이야길 시작하겠는데요, 그건 개인이 사회적 조건 속에 실존하는 만큼 사회는 개인 실존들에 근거하고 있고, 동시적이며 불가분리의 관계인 이 둘은 함께 얽혀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바뀐다고 할 때, 바뀌는 것은 표면적인 사회 구조만이 아닙니다. 사회가 바뀐다는 것은 곧바로 인간이 바뀐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삶의 양상 일체가 변화하는 거지요. 올바른 인간 해방 운동은, 따라서 세계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들이 더불어 전진해나갈 때 완수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나는, 문학도 인간의 정신 활동과 관련하여, 그때 바뀌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학적 의미의 사회화는 독자들이 그걸 통해 얻은 정신 능력을 집단적 생활 속에 발현시키는 데서 비롯됩니다만, 그 진실된 발현을 가능케 하려면, 우리는 현체계의 근원적 뿌리부터, 즉 문학적 소통의 출발점부터, 그러니까 글쓰기와 글읽기의 과정에 개입되는 여러 국면부터 정면으로 문제삼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 역동적이어야 한 일단 정지의 시간, 정서와 의식의 공간을. 당신이 이걸 단순하게 개인적·정태적이라 비난하는 건, 아마도 그 점을 간과한 성급한 정열 탓일 것 같은데요…” 당신:“
”그:“위와 같이 미분화된 논리를 들이대는 것부터가 이미 사태를 정체화시키는, 운동으로부터의 국외자적 태도를 반증하는 것이오.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이렇게 방향을 바꿔 이야기하겠소. 무엇보다도 당신 소설은, 당신의 그런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와 방향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잖소? 요컨대 운동적 성격을 띠려면 독자에 대한 당신의 전망을 명확히 제시하고 그걸 확산시키는 노력을 경주해야 되지 않겠소? 헌데 당신은 거꾸로 난삽한 요설 속으로 도피해 들어가고 있소. 문학 전문가들이나 겨우 알까말까 한 파격을 즐기면서. 혼란한 일상 속에 들볶이는 민중일 일반 독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미 내재된 역량을 분출시켜줄 명쾌한 해석과 실행을 바라고 있는데 말이오.” 나:“글쎄요…, 매우 미묘하긴 합니다만 여전히 당신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군요. 자칫 이 소설로서는 곁길인 이 대화가 너무 확대될 위험이 있으니까, 대범하고 짧게 이야기해보지요. 어쨌든 그 문제는 우리가 해방된 세계상·인간상으로서 어떤 전망을 확보하는가와 결부된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로 한정시켜 이야기하자면, 작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해주는 바를 그대로 주입받는 독서는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이상형이 아닙니다. 해방된 사회의 해방된 독자는 최소한 주체적인 사고인이자 몽상가여야 합니다. 그때 작가란 단지 그 사고와 몽상의 계기를 그답게 주체적으로 마련해줄 뿐이지요. 거기서, 비로소 작가와 독자의 평등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미래의 작가는 우월한 윗자리에서 열등하고 수동적인 독자를 가르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간의 자유와 평등이 그렇게 문학적 방식으로도 수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요. 내 소설이 취하는 파격은, 그 바람을 지금 여기로 바싹 끌어당기려는 시도와 현실과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결과겠지요. 그러니까 바로 거기, 내 무의지적 의지와 무방향적 방향성이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당신:“
? 그:“이젠 아주 무정부주의자적인 면모까지 드러내는데, 본격적인 논쟁을 펼치고 싶은 생각이 용솟음치지만, 어차피 이게 당신 소설 속이니까, 그냥 다음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겠소. 그 대신 한 마디만 덧붙여둡시다. 당신의 의도가 아무리 선량한 것이더라도, 그게 결과적으로 독자들을 절박한 현실에 동참시키는 작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썩은 세계에 안주하는 허위로 전락할 것이라고. 그걸 방지하려면 민중으로서의 독자의 실상과 만나야만 한다고.” 나:“입을 터버리고 말았으니 나 또한 차후의 논쟁을 마다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선 나도 간단히 덧붙이고 끝내지요. 당신 또한 그 단단한 선입관의 틀을 벗어나 나의 이 노력과도 참으로 만나야 한다고. 전혀 별종의 짐승을 대하듯 ?난해?란 학명을 붙이고─기실 ?난해?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적 체계를 벗어나 있다는 뜻 이상은 아닌데도─, 그렇게 선전된 내 소설을 동물원의 구경거리로나 제쳐놓으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독자들, 어쩌면 자기 문학관을 아집스럽게 고수하려는 전문가들보다 훨씬 유연할지 모르는 그들, 그들의 억압받는 미래에의 잠재력을 시급히 떠올려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당신:“
”침묵.
의식을 곤두세웠던 힘겨움에, 내가 내 속에 풀어져 햇살의 운동장을 헤맨다. 햇살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캄캄한 햇살의 천지다. 이 빛의 어둠 속에 숨겨져,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먼 울음만이 들린다…
번번이 밀려드는 이 환영을 번번이 내 몫으로만 가두려 하지 말아야지. 그래, 그러니 물어야 해. 당신은 이 환영을 통해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나로 하여 또 당신 몫의 상념을 펼쳐보았을 당신은, 앞자리의 대화를 거치며 선명히 드러났듯이, 단순한 단수 2인칭 대명사의 대상이 아니다. ?당신?은 일종의 집합대명사다. 나는 ?당신? 속에서 들끓는 복수를 본다. 하나의 중심 행위로 겹쳐진 복수. 그러므로 ?당신? 속의 당신들은 책을 펼쳐 이 지면 위에 시선을 둔 하나의 자세로 집중되어 있되, 또 하나같이 각양각색인 조각들일 것이다. 그 당신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제각기 이 소설을 읽고 있을까? 가령, 당신은 앉아 있을까? 거실이나 다방의 소파에 등을 파묻고. 혹은 화장실 변기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힘준 상체를 구부리고. 혹은 사무실이나 교실 책상에 팔꿈치를 의지해 손등으로 광대뼈를 고이고. 혹은 흔들리는 버스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니면, 당신은 누워 있을까? 하숙방이나 숙직실 맨온돌 위에서, 접어 세운 한쪽 무릎 위에 턱하니 다른 발을 얹은 채 두 손으로 어디선가 빌려온 이 책을 허공에 띄우고. 혹은 공원 잔디밭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이 책으로 햇살을 가리며. 또 아니면, 당신은 엎드려 있을까? 텅 빈 연구실의 침대처럼 길고 평평한 열람대 위에서, 포개진 두 손등에 턱을 대고. 혹은 진짜 편한 침실의 침대에 어깨 위만 곤두세우고. 또 또 아니면, 당신은 서 있을까? 서점의 책장벽 한 모퉁이에 엉거주춤 기대어. 그것도 아니면, 당신은 걷고 있을까? 혼잡한 거리에서(이런 소설의 경우엔 그러기가 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휘청휘청 행인들과 부딪치며. 또 그것도 아니면?…
당신들의 생김새만큼 모조리 다를 그 자세나 동작들은, 그렇다면 그 이전의 또 얼만큼이나 다른 생활들로부터 연결되어나온 것일까? 가령 앞의 모습들을 거슬러올라가 볼 때, 그 첫 그림은 일요일 오후의 지식인적 한가로움을 채우려고 이것저것 뒤지다가 이 책이 손에 잡혀서였을까? 한편, 그 옆은, 조용한 음악이 있는 다방에선 책이 읽고 싶어져요 하며 담배 피는 소녀적 취향에서? 줄줄이 엮어보자. 심각하게 우리 문학의 현황을 점검하려는 사명감으로 줄담배와 함께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아랫배가 싸늘해져서? 어차피 쌓이고쌓이는 타자용 서류뭉치를 피곤한 손길로 밀어놓고 상사의 눈치 틈을 타서 슬쩍? 강의 내용은 귀 밖을 맴돌고, 안 되는 연애는 괴롭고, ?당신에 대해서?라니 이 속에 무슨 수가 없을까 싶어? 대학은 못 갔지만 의식만은 갖추어야 한다는 의지로 어디서든지 책을 놓지 않는 다부진 습관의 연장으로? 다른 필요 때문에 다른 글을 읽다가, 스며드는 궁상맞은 객지 기분을 잊기 위해? 이게 사는 꼴이냐, 비록 월급쟁이로 시달리지만 문화인다움의 긍지만은 잃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나마 고즈넉한 시간을 얻게 되면? 젊어 방황하고 있음을 순진하게 시위하고 싶어, 책읽는 자기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낼 만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웬일인지 열띤 친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그럴 때의 그 무엇인가에 대해 혼자 버티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서? 이만하면 잘먹고 잘사니까 머리라도 뭔가 이야깃거리를 채워놔야지 하는 심리로? 돈은 궁하지만 세상을 보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서점 순례를 몸으로 때우며? 새책만 보면 공연히 궁금하고 들뜨는 성질에, 막 책방에서 사들고 나오며 우연히 펼쳤던 게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그런데 이 순간, 막무가내로 가슴이 저려온다(그래서, 그러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의 당신 모습은?─하고 묶일 질문이 뒤로 떨어져나간다). 당신들을 가능한 한 넓게 어지럽게 흩어놓으려 했지만 당신들이 흩어져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음을, 또한 선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막노동판의 인부가 도시락을 까먹고 철근더미에 기대어 이 소설을 읽으리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캄캄한 갱도 속에서 곤죽이 되어나온 광부나 재봉틀 앞에서 열다섯 시간을 기계로서 움직이며 파김치가 되는 처녀의 짧은 휴식과 나를 맺어본다는 건 터무니없다. 또 만약 문맹자인 리어카 행상을 책과 연결시켜보려 한다면, 헌책을 근으로 달아 사서 헌책방에 넘기는 장사로밖에 가정해볼 수 없다. 그렇게 지금, 그들은 모두 쓰기를 선택한 나와 읽기를 선택한 당신들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뿔뿔이 널어놓은 당신들을 다시 하나됨에 모아들이려 해도, 그 주위에서 결코 ?당신?으로 겹쳐지지 않을 그들이 외쳐대는 침묵에 휩싸여, 어찌 뼈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들린다, 당신도 들리는가, 귀울음처럼 흐르는 저 낮은 소리바람이. 그 신음과 한숨과 울분의 침묵이 묻는다. “넌 뭐냐?” 대답할 수 없음. “밥과 잠을 다오.” 아무것도 줄 수 없음. 아까와 같은 대화라면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그 모든 것 이전에, 맹목적으로 복받치는 이것은? 오, 푸르른 하늘님, 어찌하오리까?
……절벽 같은 탄식을 쏟아놓고도, 나는 이곳을 망연자실한 빈줄로 띄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버티는 한 가닥 의식의 응어리에, 만년필을 쥔 내 손에 안간힘을 모은다. 불모의 양심가책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가까스로 나는, “나는 왜 혁명가가 못 되는가”라는 자학적 질문 대신 “나는 소설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산적 질문에 작품으로 답해나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뒤집어 설득해본다. 하지만 여전히 뚫려 있는 그 순수 감정의 구멍을 어쩔 것인가. 아무래도 얼마간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어야겠다.
……당신은?
잠깐! 지금은 내 가슴 구멍을 메꾸기도 벅차지만, 그 곁에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오기가 발동해서, 한 가지 당신에 대해 억지로라도 써놓아야겠다. 그래, 일부러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는다고 어느덧 타성으로 돌아가, 이런 고통의 자리에서조차, 공백의 행간을 모르는 척 지나칠 참인가?
여기선 악쓰듯 다음 여백을 두 배로 더 넓혀놓겠다.
지금 당신은, 지금의 ?지금?이라는 시간 단위 위에 있는 당신이 한정된 ?당신?임을 깨닫고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그 언젠가의 ?지금?엔 지금과 다른 당신이 되어 지금은 ?당신?이 아닌 그 누군가들과도 함께 ?당신?이기를 바라는가? 그래서 당신은, 그 언젠가로 가기 위해 무엇을 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응전인 이 소설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숙고해야만 하리라 믿는가?
너무 노골적으로 의도된 이 질문들을, 바로 그 점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취소하겠다. 단, 아주 인쇄를 삭제해버리지는 않는다는 조건하에.
다시 사이를 두고 뜸을 들였더니, 이번엔 매우 순진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당신은 왜 소설을 읽고 있는가, 왜? 움찔, 당황한 미소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주위에 누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당신만이 읽고 있으니까, 마냥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이 질문이 난감한가? 이 질문의 폭이 너무 큰 까닭에? 그런 우려를 축소시키기 위해, 이 원초적 물음을 제한된 차원 속에 옮겨보자. 지금, 당신은 왜 다른 짓을 하지 않고 소설을 읽고 있는가? 왜 연극이나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왜 음악 감상이나 하지 않고, 왜 테니스를 치거나 조깅을 하거나 하다못해 골목 산책을 하지 않고, 왜 백화점 구경을 하지 않고, 왜 제 자식이나 조카와 그네를 타거나 장난감 조립을 하지 않고, 왜 친구들과 어울려 노닥거리지 않고, 왜 공부를 하지 않고, 밀린 사무를 보지 않고, 왜 집수리를 하지 않고, 화분을 돌보지 않고, 아내의 설거지를 돕지 않고, 왜 신문을 읽지 않고, 왜 사회학이나 역사학이나 철학 서적을 읽지 않고, 왜 시나 수필이나 평론을 읽지 않고…, 하필이면 소설을 읽고 있는가? 다른 게 귀찮아서, 또는 어쩌다가 그냥? 다른 게 다 귀찮은데 이건 왜 그나마 귀찮지 않나? 어쩌다가 그냥 붙든 게 어쩌다가 소설이냐? 무의식적으로라도, 어쨌든 당신은 소설에 다다라 있다. 속마음을 온통 뒤집어 훑어도 전혀 소설에 관심이 없고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당신의 손길이 소설에 미친 것은 소설에 대한 어떤 최소한의 관념만은 잠재 의식 속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음을 뜻하지 않을까? 막연히나마 소설이란 어떤 것이라는 판단과 거기서 대충 어떤 걸 구하리라는 기대로서.
여기서, 당신은, 그 자각을 실체화시켜보는 예로서, 이 소설을 처음 대하여 「당신에 대해서」라는 제목부터 읽기 시작했을 때 은연중 예감해본 것을 상기해내 의식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때 당신은 교과서식으로 생각해, 어떤 제삼의 가공 인물을 ?당신?으로 지칭하며, 그·그녀에 대한 애틋한 짝사랑의 고백을 하든가 어떤 비극적 사건을 함께 겪었던 상대로 설정하고 대화하듯 그걸 회상해보는 등의 소설을 염두에 두었었을까? 이미 내 다른 소설을 읽어보았거나 나에 대한 소리를 잠깐 들었기에, 바로 이렇게 당신 자신의 상황을 그려주리라 확신했었을까?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치 않고, 아무 선입관도 없이 그저 읽히는 대로 읽을 태세였을까?
그러면 그 순간을 떠나 이제껏 자신의 시간을 이 소설의 시간에 걸쳐 놓아온 당신은, 드디어, 그 사이에 무엇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깨닫겠는가? 최초의 예감이 충족되건 배반되건 초월되건, 그 두 다른 시간의 자장 속에서 다음 순간의 활자로 눈길을 지속해나가는 차례차례가 언제나 더욱…
아, 당신이 꽤나 지겨워진 모양이다. 그렇게 몸을 비틀어대는 걸 보니. 하기야 멈출 듯 멈출 듯 이어온 이 눌변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길이로 봐서도 그럴 만하다. 또 마침, 어서 끝자리에 이르고 싶은 나로서도, 이미 지나온 이야기가 자칫 반복될까 걱정스러웠는데 적당히 잘라낼 수 있어 잘 됐다. 그럼, 잠깐이나마, 불편하게 위축된 자세를 쭉 펴고 크게 기지개나 켜두자. 등이 뻐근하면, 두 손을 등뒤로 뻗어밀며 가슴과 배는 앞으로 힘껏 제끼고. 그렇지, 좌우로도 허리·어깨를 흔들면 좋다.
그러나 말이다,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당신과 편하게 어울리자마자, 번쩍 칼날을 세우는 초-의식이 개입해 들어온다. 이렇게: 이 소설을 쓰는 나에겐 꽤 유용했던 방금 그 시간이 혹시 나에 의해 교묘히 유도된 것은 아닌가? 당신은 잘 읽고 있었는데, 내 지적 때문에 공연히 찌뿌드드한 자세를 의식하게 되고, 내가 적은 대로 따라 해보고 있는 게 아닌가? 더 지나쳐서, 내 이야기에 맞춰 편하던 자세를 일부러 불편하게 고치기까지 한 건 아닌가? 그랬다면 당신은 내가 그토록 애써왔음에도 아직?… 아니, 침착하게 생각해볼 때, 오랫동안 소설을 읽는다는 일이 늘 그랬으니, 그 습관을 이 몇 페이지 안에서 뒤바꿔놓는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 모른다. 게다가, 이젠 탁 터놓고 속과 겉을 완전히 뒤집어 밝히건대, 정말 곤혹스러운 점은 당신이 원래 너무도 자유스럽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 소설 앞에서만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그렇다. 거기 내가 말 못 해온 고뇌가 있는데, 글 속에 잠겨 단지 읽어주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뿐인 내가 뭐라고 하든, 당신은 완전히 당신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읽으라고 한들, 당신이 저렇게 읽으면 도리가 없다. 나는 당신이 내 말의 직접적인 수신자이길 바라지만, 당신은 이미 ?당신?이길 벗어나 나와 어떤 ?당신?과의 관계를 관찰해보려는 제3자로 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조금 전의 당신이 만약 그저 멍청히 내가 지시하는 대로 몸놀림을 따라했다면, 그건 또 얼마나 역설적인 모순인가? 도대체 당신은 당신의 그런 자유를 스스로 깨우치고나 있었는가? 그리고 그 자유를 이때껏 충분히 행사해왔다고 자신하는가?
자, 당장 그 자유를 시험해볼 기회가 왔다. 곧 또 한번 줄을 띌 참이니, 그냥 마구 뛰어넘든지 말든지 오로지 당신 뜻대로 해보라는 말이다. 의의의 전환이라고 꺼림칙해할 이유는 없다. 이건 표면적으로만 모순되어 보이고 그 바탕에서는 처음과 같은 문맥이므로.
캄캄한 빛이냐 환한 어둠이냐, 나는 더듬어지지 않는 허공만 더듬는다. 저 아이를 이 드넓은 공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울음소리는 분명한데. 혹시 그 아이를 내가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아이가 내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각설이처럼 타령으로 떠돌다가 빈손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왠지 내 의식 속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하게 인식된다. 지금, 나는 쓰고 있다. 지금, 당신은 읽고 있다. 변함없는 현재. 나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라 쓰고 있는데, ?쓰고 있는데?를 읽는 당신을, ?당신을?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 멈추자. 그러고 보니, 나는 빈손으로 왔지만 빈 느낌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이상한, 이라기보다는, 자못 신비한 느낌이 든다. 지금, 나는 쓴다. 지금, 당신은 읽는다. 이때 나와 당신은 정말 동시적인가? 당신과 나는 다른 공간의 같은 시간 속에서 이 글을 주고받고 있는가? 현실적으로는 이렇다. 지금, 나는 쓴다. 지금 씌어지는 이 소설은 얼마 후 출판사에 넘겨져 편집되고 인쇄되어 책으로 제본되고 나서 책방을 거쳐 당신 손에 들어간다. 그때 당신은 읽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쓰고 있는 지금, 당신은 읽고 있지 않다. 지금 당신은 밥을 먹고 있거나 직장에서 사무를 보고 있거나 버스 안에서 졸고 있거나 화투를 치고 있거나 애인 팔짱을 끼고 걷고 있거나 다른 책을 읽고 있거나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거나이다. 그런데 분명히, 다름아닌 지금, 당신은 읽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막, ?그렇지 않은가??라고 당신은 읽지 않았는가? 하지만 당신이 이 소설을 읽고 있을 때, 내가 이걸 쓰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때 나는 이미 썼다. 그러니까 당신이 읽고 있는 지금, 나는 늦잠을 자고 있거나 다른 돈벌이가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거나 등산을 하고 있거나 술을 퍼마시고 있거나 부부싸움을 하고 있거나 다른 소설을 쓰고 있거나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거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썼었다?라고 쓰거나 ?당신은 읽을 것이다?라고 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지금 나는 쓰고 있고, 지금 당신은 읽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간격이 있는데 간격이 없다! 신비한 말의 모순이랄지, 현재가 과거로 불려가고 과거는 미래로 불려가 서로 엉겨붙는다. 아니, 이럴 수가…, 이렇듯 당신이 이미 나의 과거이자 미래이자 현재라니… 황홀한 반죽이다! 우리─문득 이 어휘의 실감이 스치는구나─가 마음살을 비비며 합쳐지는…
오오, 그러므로 글을 쓰고 읽는다는 건 애당초 그 결합의 첫걸음을 실천하는 일? 그래서 당신은 내가 숨쉬는 공기 같은가? 등뒤를 돌아본다. 당신은 없다. 몸을 되돌린다. 당신이 등뒤에 있다. 그 보이지 않는 무수한 입자들로 떠도는 당신. 그러고 보니, 당신들끼리도 그렇다. 당신은 당신들이니까, 나의 이 지금으로부터 당신들은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좌표 위에 무수히 흩어진 점들이지만, 그러나 이 소설이 그 좌표 위의 어느 곳으로도 같은 형체로 다가가듯, 우리─뚜렷이 이 어휘를 새겨 지니고 싶구나─의 ?지금? 속에서 그 간격을 지울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함께 말하게 될 터. 서로의 이 몹시도 작은 사랑에 대해서. 모래알 하나에 하나가 덧붙여지고 그 둘에 또 하나가 덧붙여지듯, 더디게 더디게, 하지만 또 어느 날 무겁고 거센 모래사태로 몰아치려고. 나와 당신은,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은, 또 다른 당신과 나는, 그렇게, 철조망처럼 가로놓인 온갖 절차를, 검열을 광고를 소문을 기사를 비평을 거래를, 정치를 사회를 경제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한없이 아득하지만 그래도 아무려나 갈 수 있으리라, 가야만 하리라. 그러니 그 미래의 현전인 이 순간만은 이 꿈에 기꺼이 도취해보자! 뒹굴자, 흙탕물에 맘껏 몸을 내던진 듯한 환상적인 전율로! 빛이 어둠인지 어둠이 빛인지, 내 어딘가의 여성이 내 어딘가의 남성과 섞여 아이를 낳았는가, 내 밖의 아이가 내 안에서 울고 있지 않으면 내 안의 아이가 내 밖에서 울고 있다…
제대로 취해보지도 못했음에 틀림없을 당신이 왜 그리도 얼얼한 정신으로 비틀대는가? 이 말에 자존심이 할퀴어졌으면, 그만 돌아오라. 당신의 지금 여기로.
멀리, 당신의 웅얼거림이, 당신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물론 상상적으로, 그러나 너무도 사실적으로.
이제, 이것으로 한 매듭을 짓는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당신은, 이전의 당신과 실오라기 간격만큼이나마 달라진 어떤 당신일까?
이제, 지금의 당신은 나의 다음 소설을 다시 읽으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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