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김태용, 대니얼 헬러-로즌의『에코랄리아스』서평

나뭇잎숨결 2015. 10. 13. 19:04

에코랄리아스표지입체대니얼 헬러-로즌, 『에코랄리아스』(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글: 김태용(소설가. 자끄 드뉘망이란 이름으로 시도 씀)

 

 

망각이여 입을 열어라

입맞춤

내가 너의 입 속에 다른 말을 넣어주겠다

겨울 식탁에 엎드려

뿔라롱은 잠꼬대 한다

나는 떠났고

스즈끼는 잠꼬대 번역중이다

자끄 드뉘망, 숙면중에서

 

책을 펼치면 책날개에 저자와 역자의 약력이 있다. 읽는다. 놀라지 말아야 한다. 진정하고 세 장을 넘기며 서지를 읽고 인용된 글을 읽는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Yahoo’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네이밍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문학이 위대하다면 그 한몫은 고유한 이름과 반복적인 명명 때문이다.(‘명명’을 세 번 이상 반복하면 ‘멍멍’이 되기도 한다. 문학은 이런 걸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차례’를 읽는다. 1장부터 21장까지. 소리 내서 읽어본다. 제목만 읽고 덮거나 던져버리는 책이 있는데, 주로 시집이 그렇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 귀를 뗄 수가 없다. 입을 뗄 수가 없다. 입은 이미 벌어졌고 닫을 수 없으니 다시 뗄 수가 없다.

 

과장이 언제나 우리의 미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과장 없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지금도 ‘과장’을 ‘과정’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역자의 소개로 저자와 책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내가 퍽이나 좋아할 책이 될 것이라는 말에 나의 오만한 문학관과 미성숙한 언어성향에 물을 타고 싶어졌고, 저 책이 영원히 번역이 되지 않아도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기대보다 좋지 않으면 어쩌지, 아니 좋지 않을 거야, 좋을 리가 없어, 좋아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책을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 내가 좋아할 책이 있다면, 그 책은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왜 그런가. 왜 그러면 안 되나.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나 이 책 다 읽었어, 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건 정말 다 읽은 게 맞는 걸까. 혹은, 아직 다 읽지 못했어,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왜 게으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가. 읽는 동안 밑줄을 긋고, 책귀를 접고, 포스트잍을 ‘잍잍’ 붙여놓지만 책을 덮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것은 문장의 흔적과 잔해뿐이다.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구성된 글이 아니라면, 문장의 마침표는 편의상 만든 것이고 한 문장의 길이는 무한히 늘어날 수 있으니 단 한 줄의 문장도 믿을 수 없다, 문장들에 아무리 핀을 꽂아도 한 권의 책을 다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기억술을 빌려 한 번 읽은 글을 통째로 외워서 구술하고 기록한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도 책을 다 읽었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언제나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지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지, 라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읽고 있는 것을 다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독서를 진행할 수는 없다. 결국 같은 것만 읽는 꼴이 될 것이다. 무엇을 읽든지 어떤 문장은 놓치고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읽고 있지 않지, 라고. 그래. 나는 무엇을 읽고 있지 않았을까.

 

보다 뛰어난 망각술을 갖고 있다면 책의 ‘차례’만 읽고도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으니 다 읽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언어들을 잃어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말하기’로 시작해 ‘쓰기’와 ‘읽기’를 거쳐 다시 ‘말하기’로 순환하고 있는데, 하나의 장(章) 속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언어가 충만해지는 동시에 언어가 빠져나가는 것 같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빠진 언어의 자리가 다른 언어로 채워지는 순간 머릿속 밑줄만 남고 언어는 메아리리리리리이히이히이히리♪가 되어 사라진다.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빠져나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이토록 잘 읽히는가. 잘 읽혀도 되는가.(너무나 많은 혀들이 날름거리며 독자를 유혹하는 동시에 절망하게 만든다.)

 

개별적인 이야기들의 재미를 요약하거나 인용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모독이자 오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마지막 21장 「바벨」의 언어가 어떤 착각과 기대 속에서 0장 「바벨 이전의 목소리」가 되어 책을 둥글게 말고 싶어진다. 결국 다 읽었다는 것을 포기하면 처음 빠져나간 언어와 유사한 흔적과 잔해의 언어만 남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언어의 첫 발성, 울음(웃음), 찢겨 나옴, 옹알거림이다. 옹알거림은 기록될 수 없고, 망각될 수 없다. 문자로 잡아둘 수 없기에 망각될 수 없다. 문자로 잡아두는 순간 최초의 옹알거림은 달라지고 다른 언어의 흔적과 잔해로만 어설프게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을 요구하면 사라진다. 이해를 바라면 사라진다. 이 책은 그렇다. 그러니까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고, 더 많은 이해를 요구해도 좋다.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22장, 23장, 24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끝장이 날 때까지. 끝장은 없다.) 이미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으려는 순간 또 다른 망각의 입이 열리고 입천장에 언어들이 닿고 달라붙어 버리고 만다. 15장 「아글로소스토모그래피」의 이야기처럼 혀 없이도 말할 수 있으니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잠시 잊고 구강에 집중한다면 입천장이 언어들로 검게 물들여지지 않을까. 감각할 뿐이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한 순간이자 과정이다. 멍멍.

 

너무나 많은 밑줄을 그어서 그 어떤 문장도 인용할 수 없고,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용인하면서도, 19장 「“페르시아어”」의 이탈리아 작가 톰마소 란돌피(Tommaso Landolfi)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과 16장 「후드바」에 나오는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의 『구제된 혀』를 헌책으로 구한 것이 ‘다음 책’을 위한 독서의 망각운동으로 메아리칠 것이라고 기대하는 가운데, 저자의 다른 책인 『검은 혀들』이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역자의 말은(범죄조직의 은어와 시어의 비밀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의 책 중에 유일하게 독일어로 번역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나를 또다시 유혹하는 동시에 절망하게 만들고 말았다?!

 

12

엘리아스 카네티의 『구제된 혀』

 

34

역자가 보내온 대니얼 헬러-로즌의 『검은 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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