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나뭇잎숨결 2016. 1. 14. 21:01

"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짐은 너를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장-뤽 낭시, <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 -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이만형,정과리 공역, 문학과지성사, 2015

 

 

 

 

 

 

 

이게 믿음la foi과 신앙la croyance을 화해가 불가능하게끔 갈라놓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앙은 타인에게서도 신앙이 증명되고 강화될 수 있는(그는 선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구원한다) 일종의 동일성을 제기 혹은 가정하는 데 비해,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과 믿음을 갈라놓는 것은 똑같이 종교와 문학·예술을 갈라놓는 것이기도 하다._22쪽

만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부활한 몸이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텍스트는 이 몸이 만져질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혹은 차라리, 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_31~32쪽

그를 만졌다고 착각함으로써,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접촉과 현존은 그 떠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말이다. “부활이 일어날 때, 그는 떠난다. 다시 말해, 부활은 현존에 무엇인가를 보태 그 한결같은 동일성을 영구화시키고 무한히 적용되게 하고 무한히 의미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융기surrection이다. 즉,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surgissement하는 것이다._32~33쪽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 자신의 나타남이라는 선물을 그녀에게 주긴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라고 그녀를 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떠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도 떠나 소식을 알린다. 바로 그녀가 최초로 파송된 사람이다. 예수의 말씀을 전파할 책임을 떠맡은 사람들, 즉 “형제들”을 제치고 그녀가 최초의 메신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손은 빈번히 두 개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여인을 멈춰 세워 그녀를 저의 소명 쪽으로 돌려놓는다._61쪽

대체로 보아, 한 그림의 고유한 힘은 이 만지는 동작과 이 만짐을 얼마나 자기 방식으로 과감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두 인물이 서로를 만지거나 스칠 때가 있는가 하면(폰토르모, 뒤러, 카노), 혹은 유사한 빈도수로 나타나는 경우에서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질 때가 있고(티치아노, 지오토), 또는 예외적으로 예수가 여인을 만지는 때가 있다. 마지막의 경우 그 만짐의 방식에 대한 논란이 있다. 폰토르모의 그림은 마리아의 가슴에 닿은 그리스도의 집게손가락을 그리는 것으로 혹은 희미하게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그쳤다._63쪽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만지고 우리를 찌르는 것은 그것들이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것들이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행위, 그것은 그것들의 멀어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 멀어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감각이 그들의 의미 자체이다. 만짐의 감각이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_64~65쪽

그것을 원하지 마라, 그것을 생각하지 마라. ‘그것을 하지 마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할 때조차도(막달라 마리아는 그것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의 손은 벌써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손에, 혹은 그의 옷이거나 그의 벗은 몸의 살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바로 잊어라.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_65~66쪽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대놓고 예수를 만졌던 여자다. 향유를 그의 몸에 바른 여인이다. [……] 성유聖油는 감각을 자극하는 향유香油로 대체되고, 기름은 머리가 아니라 발에 부어진다. 진짜 기름부음인 건 맞지만, 그러나 죽을 예수의 몸을 미리 향기롭게 하는 기름부음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것, 그의 생애에서 품행이 의심스러운 여자로부터 도유를 받는 기묘한 축복을 통해서 기림받게 된 그의 몸을 예고하는 것이다._71~72쪽

대관절 왜 몸인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_86쪽

이러한 떨어짐, 이 물러남 혹은 이 거두어들임이 없다면 만짐은 더 이상 만짐이 아닐 것이다. [……] 그것은 어떤 포착, 고착, 접착, 더 나아가 그것을 특정한 사물 속에 가두고 사물을 그 자신 안에 가두어, 그것들을 맞물리게 하고 서로 상대방을 제것화하고 동시에 상대방 안에서 적응되는 응착 속에서 사물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동일화, 고정, 소유, 부동성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나를 붙들지 마라Ne me retiens pas”는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_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