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 관점, 즉 유형학적 분석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기계들의 일반적인 유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른판의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나 추상적인 기계들은 지층들, 나아가 배치물들을 구성하는 조작들 전체에 소진시키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층들은 고른판 그 자체에 "달라붙어서" 거기에서 다른 판의 축들(형식-실체, 표현-내용)에 따라 조직되고 전개될 조밀화, 응결 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지층들은 고름의 통일성 또는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 있는데, 이 통일성은 우선 실체적 요소들 및 형식적 특질들과 관련되며, 이 다른 판을 주재하는 전적으로 지층적인 추상적인 기계들을 증언한다. 그리고 세번째 유형이 있다. 즉 탈영토화를 재영토화로 그리고 탈코드화를 덧코드화나 덧코드화의 등가물을 상쇄해주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배체물 특유의 이형조성적 지층들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pp975~976)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 책은 [안티-오이디푸스}와 함께 현대 서구 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사상은 지난 90년대 한국 지성계를 풍미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의 한계와 탈출구를 동시에 보여주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독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안티-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안티’, 즉 반(反)의 ‘부정적 비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생물학과 지질학, 분자생물학, 위상 기하학부터 시작해 인류학과 고고학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인간의 지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종합’하고 있는 이 [천 개의 고원]은 지난 20세기의 인문학의 온갖 모험이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고 교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이를 비판하는 대신 그러한 이념이 어떤 근거에서 발생하는 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부 1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일관되게 저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서론으로 두 저자의 이론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1장의 '리좀'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인미답의 사유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제까지의 서양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각각의 개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되어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실제로는 가는 길과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노예와 비슷했으며, 게다가 장기의 모든 게임은 국가의 왕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나무형 사유’라고도 부르는데, 뿌리와 줄기가 가지와 잎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국가형 사유 모델이 지난 2000년 동안 서구의 현실과 사유를 동시에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항상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상승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복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인 왕(또는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사유 방식은 항상 기호학을 법칙으로 하는 위계적이고 중심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궁정의 게임인 장기와 달리 동양의 재야 선비들의 게임인 바둑은 모든 돌=주체가 평등하며, 따라서 왕도 신하도, 주체도 객체도, 또 이미 정해져 있는 길도 없는 유목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최근의 인터넷처럼 모든 돌이 동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연결로와 교통망을 통해 평등하게, 또 계속 새로운 사유를 함께 만들 나가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는 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리고 장기가 기호학의 법칙을 추구한다면 바둑은 다양한 연결선들의 봉쇄와 차단과 연결과 접속(저자들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영토화, 탈용토화, 재영토화 등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다)으로 짜여지는 거대한 네트(net)적 사유의 창조 행의 자체인 것이다.
최근 우리는 중심과 질서가 없어져 간다는 비탄조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있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창조와 변신의 기회로 멋지게 전환시켜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질서냐 아니면 무질서냐, 또는 국가냐 아니면 아나키냐 하는 대립축으로 문제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질서들’의 접속들이 새로운 시대의 모럴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지를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1장의 리좀 대 나무부터 시작해 주체와 다양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국가의 포획 장치 대 유목민의 전쟁 기계 등의 새로운 대립쌍으로 변주되면서 기존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 고고학, 생물학의 성과들을 재검토하는 멋진 시험지가 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는 “언젠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푸코의 그러한 평가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반증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다양한 반체계적, 반-시대적 사유들의 접속을 추구하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과 함께 네티즌의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정신적 지도를 너무나 정확하게, 또 흥미진진하게 그려주는 점에서 바로 시대의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적 모험을 이렇게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질서에 대해 저항이 또 다른 질서에 대한 꿈을 낳았으나 또 다른 질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무질서로의 급경사(예를 들어 68 운동과 모든 ‘질서’를 거부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로 이어졌으나 저자들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성벽은 워낙 강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네트워크의 시대를 맞이하며 질서도, 그렇다고 또 다른 질서도, 또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들의 공존과 접속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도 이들은 ‘비정확한 것’의 제거를 위한 기준과 공리론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자 과학, 또는 왕립 과학이 아니라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유목 과학, 또는 소수자 과학을 추구한다. 앞의 과학은 모든 것을 질서지우고, 서열화하지만 후자의 과학은 다양한 근접한 사유들의 공존과 접속을 겨냥한다. 아마 이만큼 우리 시대의 사유의 풍경과 나아갈 길을 흥미있게 제시하고 있는 철학책도 드물 것이다. 비정확하지만 엄밀한 것에 기반한 비질서의 유목적 사유들과 표준, 기준, 공리를 기반으로 한 왕립 과학의 대결이라는 틀.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두 사람의 이 책은 인문학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답게,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 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멋진 방법들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던져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들자면 그 동안 각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되어온 두 사람의 주요한 개념어들을 완벽하게 한글화시켜 놓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역자인 김재인은 plan de consistence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고른판’이라는 말로 하부지층, 상부지충, 메타지층 등으로 추상적으로 번역되어온 개념들을 밑지층, 윗지층, 사이지층 등으로 완전히 한글화시켜 놓았다. 아마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지난 90년대 동안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만 막상 좋은 한국어 번역은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의 번역 작업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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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두번의 휴가 기간이 돌아왔다. 옛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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