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나뭇잎숨결 2013. 1. 11. 08:27

내 소설의 제목은, 쓰여질 당시에는 『수도원의 범죄사건(Murder in the Abbey)』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제목을 파기했다. 그 까닭은 독자들의 관심을 미스테리 자체에만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독자들이 액션으로 가득한 약간은 황당 무계한 책으로 오해하고 책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멜크의 아드소(Adso von Melk)』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아드소가 화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립적인 데가 있는 이 제목이 썩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출판업자들은 고유 명사로 된 책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내 소설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는 실로 우연히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부르고자 하고 보니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상징적 의미는 그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잘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단테의 라고 할 때, 이라고 할 때, 라고 할 때의 장미, 라고 할 때, 라고 할 때, 할 때의 장미…… 이런 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제목이 내가 예상했던 대로 독자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하나의 해석만을 선택할 수 없었다. 혹 이 작품의 결론에 해당하는 시구에 대한 唯名論(Nominalism)的 독서가 가능한 독자라도 맨 끝에 가서야, 나름의 수많은 해석 중에서 하나의 해석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독자를 조직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 창작노트』中에서

 

내가 이 소설을 쓴 것은 나에게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나는, 한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막역한 아이디어에 자극을 받고 1978년에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 소설 쓰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머지는 쓰여지는 과정에서 붙은 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아이디어는 1975년의 메모에서 이미 불특정 수도원의 수도사 명단을 작성했던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전에 내 머리 속을 맴돌았음에 분명하다. 그것뿐이다.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선, 20년 전 우연히,위스망(작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세느 강변의 고서점에서 산 오르필라(Orfila)의 『독물논고(Traite des poisons)』를 읽었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독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생물학자인 내 친구에게, 특정한 속성(가령 손을 대면 피부로 흡수된다든다 하는)을 지닌 약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친구의 편지는, 받는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 그의 편지는 표면적으로는 내 겨냥에 합당한 독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답신이었으나 읽기에 따라서는 나와 함께 교수대로 가는 것을 거절하는 답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당시의 수도원에 상주하는 수도사를 생각하고 있었다(처음에 내가 생각한 것은, 좌익신문을 읽을 만한 탐정 수도사였다. 이탈리아에는 좌익에도 또 좌익이 있다). 그러나 수도원이 되었든 수녀원이 되었든, 그 분위기는 생각만 해도 바로 무수한 중세적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문서처을 뒤적여보았다. 나는 冬眠中인 중세학자가 아니던가(나는 1956년에 중세의 미학에 관한 책을, 1969년에는 같은 주제로 수백 페이지 짜리 책을 출판했고, 1962년에는 몇 편의 에세이를 산발적으로 발표하다가 제임스 조이스 연구와 때를 같이 해서 중세 전통 연구로 되돌아섰으며, 1972년에는 《요한의 묵시록》과, 리에바나 사람 베아토에 의한 주석서 해명의 방대한 연구에 몰두했으니만치 중세 문제라면 준비 운동은 충분하게 되어 있었던 셈이다). 나는 1952년부터 모아온 - 원래의 목적은 다소 막연한 것, 말하자면 중세 괴수사(怪獸史), 중세 분석 백과, 혹은 서명 목록론(書名目錄論) 같은 것을 쓰는 데 있었다 -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파일카드, 복사물, 노트 등)을 뒤적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중세가 내 나날의 꿈인 바에야,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중세에 쓰자고 결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세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곧 話者인 수련사였다. 이로써 나는 장벽의 반대편에서 지나간 시대의 화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나는 당혹하고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조명 아래로 노출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범자 노릇을 가장하고 있다가 조명을 받는 바람에 신분이 드러난 연극비평가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중세의 리듬과 중세적 순진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었다. 많은 경우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내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해주곤 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이 의혹에서 해방되는 기분을 맛보아다. 나는, 이라고 했다. 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읽기 과정에서 나는, 작가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그래서 우리에게 누누히 일러왔던 것)을 재발견했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미 세상에 유포된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잃어버렸다가 발견된 원고 이야기(당연한 일이지만 이것 역시 인용의 꼴을 하고 있다)에서 시작되기만 하면 될 터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서문에 착수하면서 나 자신의 記述을 액자의 제4레벨에, 말하자면 세 화자의 이야기를 뚫고 들어가야 이를 수 있는 레벨에 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드소(Adso)가 썼다고 마비용(Mabillon)이 주장했고, 마비용이 썼다고 발레(Vallet)가 주장하는 바를 쓰게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소설의 집필을 시작한 첫 해를 나는 바로 이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에 바쳤다. 중세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방대한 서명목록을 뒤적거리는 일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어서 나는 등장 인물이 될 만한 무수한 사람들의 인명과 성격의 자료까지 준비했다. 물론 이들 중의 상당수는 소설에서 제외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주변의 수도사들에 관한 자료까지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독자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 소설의 등장 인물에 관한 연구가 도시와 그 정밀함을 겨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게 누구던가? 그렇다. 소설은, 심지어는, 도시의 설계도와는 겨룰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 역시, 수도원의 각 건물을 제대로 배치하기 위해, 각 건물간의 거리를 정하고, 심지어는 나선형 계단의 계단 수를 정하기 위해 건축학 연구에 몰두했는가 하면 건축 백과 같은 책에 나오는 사진과 바닥 그림을 일일이 조사했다. 언젠가 나는 영화 감독 마르코 페레리로부터, 내 소설에 나오는 대화의 길이는 대화에 허용된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령 두 사람이 식품 저장고에서 회랑까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경우, 나는 대화의 길이와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면서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만한 시각에 그들의 대화도 끝나는 것이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敵意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는 왜 14세기의 소형제회 수도사가 등장하는가? 중세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면 12세기나 13세기를 무대로 써야 마땅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나는 14세기보다는 12세기나 13세기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관찰력이 예민하고, 정황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안목을 지닌 조사관(가급적이면 영국인으로)이 하나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관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그것도 로저 베이컨 이후에나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호 해석에 관한 진보적인 이론은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이후에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캄 사람 윌리엄의 추종자가 필요했다. 물론, 기로 해석의 이론은 그 전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기호 이론이나 기호 해석은 기회의 상징성 해석에 머무는 것인데가가 다분히 기호에서 인식이나 관념을 읽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 이야기의 무대를 14세기로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이번에는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12세기나 13세기에서와는 달리 14세기라는 시대에서는 내行步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14세기에 관한, 보다 정교한 독서를 통하여 14세기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라면 설사 영국이라고 하더라고, 오캄 사람 위릴엄의 친구이거나 추종이거나 知人이기만해도 청빈에 관한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처음에는 내게 오캄의 윌리엄 자신을 조사관으로 삼을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위대한 박학 나으리에게는 인간미가 없는 것 같아서 이 계획을 중도에 그만두기로했다.)

왜 이 소설의 시간적인 무대는 1327년 11월 말이 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12월이 되면 체제나의 미켈레(Michael of Cesena)는 아비뇽(Avignon)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소설에서의 소설적 소도구 배치가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에 나오는 수도원의 계단 숫자 같은 것은 작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가령 미켈레의 움직임 같은 것은 실재인 역사적 고간 안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되도록 이 움직임에 근사하게 맞추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11월 초순이나 중순은 조 이르다. 게다가 나는 수도원의 불목하니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게 해야 했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피 항아리에 시체를 거꾸로 처박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요한의 묵시록(Apocalypse)》에 따르면,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요한의 묵시록》은 기존하는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질문을 통해서 나는, 당시의 수도원에서는, 날씨가 추어지지 않으면 돼지를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11월은 너무 이르다. 그래서 나는 수도원을 산중에다 배치했다. 처음부터 눈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런 고충이 없었더라면 내 이야기의 무대는 폼포사나 콩퀘스 같은 평야 지대가 되었을 것이다.

미궁에 관한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내가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모든 미궁(내게는 미궁에 관한, 산타르칸젤리의 연구서가 있다)은 옥외의 미궁이다. 내가 아는 미궁은 모두 지독하게 복잡하고 그 구조상 와선과 곡절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내게는 옥내의 미궁이 필요햇다 (옥외 장서관이라는 것이 도무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미궁은 너무 복잡하면 안되었다. 길이 너무 복잡하고 방이 너무 많으면 공기의 소통이 안 될 터이고 공기의 소통이 안 되면 화재로 전소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내 계획에 따르면 장서관은 결국 전소하게 되고 잇었다. 이것은 우주론적-역사론적 귀결이다. 중세에는, 성당이나 수도원은, 불이 붙었다 하면 부싯깃처럼 탔다. 화재가 없는 중세를 상상한다는 것은 화염에 쌓인 채 떨어지는 전투기가 나오지 않는 2차 대전 영화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힘드는 일이다). 결국 두세 달에 걸쳐 적당한 조건을 갖춘 미궁을 만든 나는, 여기에다 몇 개의 환기구를 배치하여 공기를 충분하게 공급하게 만듦으로써 대화재로 전소될 수 있게 했다.

내 앞에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내게는 밀폐된 공간, 말하자면 고밀도 우주가 필요했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밀폐하기 위해서는, 내가 보기에는 단일한 장소는 물론이고 단일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차피 단일한 행동이라는 것은 도무지 가능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베네딕트 회 수도원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네딕트 회 수도원의 삶의 모습은 전례 시간에 따라 좌우된다.

대화의 문제가 특히 내게는 까다로웠지만, 내 경우, 모든 대화는 아드소에 의해 회고되기때문에, 모든 대화에다 아드소가 자신의 견해를 개입시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비교적 쉬웠다.

그런데 대화는 나에게 엉뚱한 문제를 던졌다. 중세의 대화가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책을 쓰면서 나는 내 책에 나오는 대화가, 긴 와 아리아로 이루어진 경가극(輕歌劇) 구조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리아(가령 교회의 출입구에 대한 묘사)는 중세의 장중한 수사법을 모방한 것으로, 그 전형이 될만한 문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하지만 대화는 어떤가? 나는 일정한 대목에 이르자 대화는 아가다 크리스티의 대화, 아리아는 수제나 생 베르나르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중세의 소설, 에 쓰여진 작품들을 정독한 뒤에야 나는, 중세의 話法에 관한 한 초라하나마 면허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여전히 중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 않았을 터인 화법이나 시적인 용어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사이의 音域을 바꾸는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목소리의 포장, 혹은 화자가 나타낼 견해의 포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 소설의 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어 이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엇다. 물론 에서도 나는 아드소의 언어는, 비록 문헌학상으로만 기능하기는 하지만(하지만 이걸 누가 믿을 것인가) 적어도 다른 두 사람(즉 미비용과 발레 수도사)에 의해 여과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드소의 일인칭 기술이 문제를 제기했다. 잘 아시다시피 아드소는 나이 여든에 이르러 열 여덟 살 때 겪은 일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든 살이 된 아드소인가? 아니면 열 여덟 살인 아드소인가? 물론 둘 다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기술적으로 까다로웠다. 그래서 나는 속임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젊은 시절에 보고 느낀 것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끊임없이 늙은 아드소를 등장시킨 것이다.

아드소는 나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처음부터 나는 한 사춘기 소년의 입을 통해 이야기(그 미스테리, 정치적, 신학적 사건, 심지어는 이러한 사건이 지니는 이중적인 의미까지)를 하게 하고 싶었다. 이때 내가 말하는 사춘기 소년은 문제의 사건을 경험하고 이것을 사진처럼 그려낼 수는 있되,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늙어서는, 곧 자기 스승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적멸에 들기 때문에 끝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암시적인 看過

아드소의 화법은 , 혹은 , 혹은 이라고 불리는 수사학적인 방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투더 왕조 시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때 화자는, 다른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 굳이 말할 것도 없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화자는 정확하게 바로 그 뇌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드소도 이 방법을 자주 쓰고 있다. 아드소도 이 방법을 자주 쓰고 있다. 그는, 당시에는 익히 알려져 있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 방법을 쓰고는 한다. 아드소의 독자들, 즉 14세기 말의 독일인들은 아드소가 말하는 사람들이나 사건에 관해 알 턱 이 없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14세기 초의 이탈리아 사람들 일이거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므로) 아드소는 서슴없이 , 그것도 훈계조로 논의하고는 한다(어떤 사건을 기술할 때마다 백과 사전적인 관념을 서슴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중세 연대기 작가들에게 공통된 스타일이다).

장미의 이름(상)
글을 쓸 때는 누구나 독자 생각을 한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여기에서 저자는 제외된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책을 통해서, 다른 책의 주변에서만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저자와 그 저자의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

저자는 책을 쓸 때 마음 속에 어떤 경험적인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근대 소설을 확립한 리처드슨, 필딩, 디포우 같은 작가들(출판업자와 자기네 마누라를 위해서 쓴)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들만 그랫던 것은 아니다. 조이스 역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대중을 위해서 쓰건, 돈을 위해서 쓰건, 아니면 새로운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 쓰건, 글쓰기라는 것을 곧 텍스트를 통하여 자기나름의 독자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한 독자가 소설의 처음 백 페이지하고 하는 잠재적인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닌, 거기에 이어지는 것을 읽어낼 만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의 冒頭에다 백 페이지의 잠재적인 난관을 매설하는 것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는 작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소설을 쓰면서 바라던 독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물론, 나의 장난에 함께 놀아나 줄 공범자이다. 나는 철저하게 중세적이고자 했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것처럼 중세를 살고자 했다(중세를 사는 것처럼 이 시대를 살고자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의 독자 유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일단 통과의례 끝마치고 나면 나의 (내가 만든 텍스트의 밥이라는 편이 더 낫겠다)이 되는 독자, 텍스트가 주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독자를 창조하고자 했다. 텍스트라고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변모의 경험을 뜻한다. 독잗르은, 섹스가 있고, 마지막 대목에서 범인이 드러나고, 그러면서도 액션이 철철 넘치는 범죄 소설의 구성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소설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산송장과 악몽 같은 미궁, 범죄에 대한 죄없는 회오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낡아빠진 범죄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창피하게 여긴다. 그래? 그렇다면 라틴 식 고전으 선사할 수밖에? 여자는 등장하지도 않는 소설, 신학이 난무하고, 그랑 귀뇰 극장의 단골 단막극처럼 몇 갤런의 피가 쏟아지는 소설을 쓸 수도 있다. 그러면 독자들은, 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독자 들은 내 것이 되어야 한다. 내 것이 되어, 세상의 질서를 아무짝에도 쓸데 없게 만들어 버리는 하느님의 無所不在와 전지 전능에 스릴을 느끼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독자들을 어떻게 이런 덫 쪽으로 유인해 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왜? 나는 단계단계마다, 틈날 때마다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내가 독자들을 파멸로 이끌로 있다고 경고했기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악마의 조건을 다 알기 전에는 절대로 악마와의 계약에 서명ㅎ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마의 조건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지옥에 떨어지는 징벌을 당할 리가 있겠는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전율하게 할 만한 일(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무수한 플롯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구조, 즉 탐정소서의 구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역사소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역사소설을 쓰고자 했다. 우베르티노와 미켈레가 역사적인 실재 인물이고, 그들의 행위나 말이 역사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내가 역사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윌리엄 같은 가공인물이, 그런 시대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해야 했고, 실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내가 이러한 목적에 얼마나 충실햇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비록 후대 저자들(가령 비트겐시타인 같은)의 말을 슬쩍 끌어와 그 시대 사람의 말인 양 인용하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목적을 도외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인용의 주체를 내세울 때마다, 등장인물이 대단히 현대적인 중세인이 아니라,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가공 인물들에게 전적으로 중세적인 사고 체계의 단편을 모아, 중세인들도 자기네 것으로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나 아닐까 자문하고는 한다. 그러나 나는 역사 소설도 마땅히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를, 장차 올 것의 원인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인이 결과를 지어 내는 과정도 추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 나의 등장 인물이 두 가지의 중세적 관념체계에 견주어 보다 현대적인 세 번째의 관념 체계를 형성시키고 있다면, 그는 문화가 한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에,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의 발언을 써 낸 작가가 없었다면(공포와 이로써 당할 치욕이 두려워),산만하게나마 생각이라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쨋든,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해서 참으로 내가 고소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은, 나는 정확하게 14세기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는데도 이따금씩 독자나 비평가들이 나의 등장 인물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지적하는 점이다. 물론 독자들은 참으로 탁월한 중세적 감각으로 그려진 대목이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부당하게 현대적이라고 보는 대목도 있다. 중요한 것은, 중세에 관한 한, 대부분의 경우는 부패를 떠올리지만, 우리 모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같은 시대의 修道者들만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언표하면 화형대에 걸릴지도 모르는, 대단히 위험한 진실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1932년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현대의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아퀴나스의 철학에서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엄청나게 박식한 사람이다. 전 세계 수십 개 대학에서 강의한 바 있는 에코 교수는 모국어인 이탈리아 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에 무불통달하고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해독하는 지독한 <공부벌레>이자 <언어의 천재>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로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에코 교수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로부터 추리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이를 계기로 『장미의 이름』을 2년 반에 걸쳐 썼다고 한다.


에코 교수의 이 책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바치는 하나의 찬사로서 그 자체로 완벽한 본격 추리 소설이다. 그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도 기호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88년 가을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자들의 찬사와 교황청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유럽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상징과 사실, 개념은 물론 현대 만화 주인공까지 총동원한다. 그의 작품의 난해성이 독자들로부터 때로 불평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에코적> 서술은 독자에게 다채롭고 흥미 진진한 지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에코의 저서로는 장편 소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이 있고, 『폭탄과 장군』, 『세 우주 비행사』 등 두 권의 동화와 이론서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 『열린 작품』, 『기호학 이론』, 『논문 작성법 강의』,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 『대중의 슈퍼맨』, 『해석의 한계』, 『소설 속의 독자』, 『기호와 현대 예술』, 『해석이란 무엇인가』, 『중세의 미와 예술』,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 『무엇을 믿을 것인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