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놀이’의 기술 방법
신 상 형*안동대 동양철학
요약문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는 철학의 탐구 방법을 ‘말놀이’의 기술 방식을 통해 보여주려는 시도로 씌어진 것이다.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한 낱말이 나르고 있는 짐, 즉 그 의미를 바로 전달하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적 진술은 그러나 그 나름의 표현방식에 의해 그 의미가 가리워지거나 주는가 하면, 늘어나거나 거짓꼴을 갖추기도 한다. 따라서 철학의 중요한 역할은 이것을 위한 치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철학의 치료적 기능을 통해 노리는 목적은 ‘매사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을 본 논문은 <설명을 버리고 기술을 택하라>는 말로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서양 철학의 핵심된 사조는 경험 이면에 있는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도에 있었고, 이 본질 탐구의 벽은 늘 언어 표현을 그 본질을 <지시하는 무엇>으로 여기게 했고, 이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설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설명은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발견되는데, 이 설명은 몇 가지 형태가 있으며 그것들은 각각 결정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첫째, 직시적 설명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는 사물의 복합성 ― 의미 ― 을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직시하지 못하는 단어가 있기도 하므로, 환원의 과정에 한계를 갖는다. 둘째, 언어적 설명은 사물을 가리키는데 쓰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공통성을 갖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데, 이 믿음은 사태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을 근거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데서 선결문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대상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믿음도 이 설명의 암묵적 토대인데, 이것 또한 언어내의 정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설명은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지식을 발전, 증진시킨다고 해서 바른 설명이 아니라, 설명을 통해 의미의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기술을 통해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기술은 그러나 언어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동일하지 않다. 우선, 언어문제에 대한 철학적 맥락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언어의 토대, 예컨대 정의를 통한 사물의 설명 따위를 지양하고, 각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존중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연중 들어 올 질병적 정의를 용인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개념의 실질적인 쓰임새가 여과없이 표현되는 그대로의 의미를 일상언어 사용자가 알도록 말한다는 뜻이다. 종교적 언술의 경우, 말의 직설적 대상을 통한 이해가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의미를 일상적(보편적) 언어로 담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런 각도에서 모든 진술은 다 철학적 분석을 거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기술과 사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를 갖는지가 문제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모든 문장은 기술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는데,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했다. 각 문장이 단일한 용법을 가지는데 비해, 기술은 여러 용법을 가진다. 기술로 기능하는 문장과 그렇지 못한 문장이 있고, 한 문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를 왜곡시킨다. 마지막으로, 위장된 기술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분석을 통해 보펀적인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이해란 정신상태나 문장을 말하고 듣는 부수 과정이라는 논지에 반기를 든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문장을 통한 시원적 그림 추구와는 다른 차원의 시도, 즉 ‘보고 알아채기’ 인 것이다.
※ 주요어 : 설명, 기술, 직시, 비트겐슈타인, 공통성
1. 철학적 기술의 범위
플라톤이래 서양철학의 핵심된 사조는 우리 경험의 이면에 있는 절대불변의 것 곧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 본질철학의 목표이자 이상은 순수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세계에 대한 수정과 같은 논리의 순수성에 도달하여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질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대표적으로 알 수 있듯이 인식론적 각도에서 보면 ‘직시적 의미론’ostensive reference theory 에 기초해 있다. 철학적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여러 시기를 거쳐 무엇이 그 본질인가를 물었다. 이것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언어와 관련하여 본질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 이들은 ‘기호에 대응하는 대상’으로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대상 파악의 실패를 초래한 철학자들의 시도 속에서 말의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 개념은 진술된 단어의 겉모습을 통한 의미 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말하자면 단어의 겉모습은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날라다 주지 못한다. 절제되고 축약된 낱말의 사용은 의미의 일부분을 내비치는가 하면, 늘어지고 과장된 낱말들은 제값을 다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단어의 의미란 그 자체가 ‘늘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동일한 진위의 값을 대화자들 사이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도리어 의미는 한 단어의 쓰임새로부터 ‘결정되는’ 무엇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그의 <사적 언어 논증>, <가족 유사성>, <삶의 형식> 따위의 논의들을 통해 언어의 특징들을 이해할 때 금방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타당성이 누구에게나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논의는 겉모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얼개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앞의 것을 표층문법이라고 하고 뒤의 것은 심층문법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특정한 논증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것들을 다루게 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시각 ― 방법론 ―을 논의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즉 우리가 노리는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제기된 ‘기술의 방법’을 밝혀, 그것을 통한 세계의 기술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방법론으로 크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설명 explanation과 기술description이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2. 설명
비트겐슈타인은 사물의 이름을 대상에 대한 부호 달기로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시적 정의’에 대해 한 마디로 유치한 이해라고 격하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낱말-대상의 대응’ 언어관을 비판하면서 반례로서 ‘붉은 다섯 개의 사과’ five red apples를 제시한다. ‘사과’는 대응을 이루는 대상을 갖고 있으나, ‘붉음’과 ‘다섯’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후자는 어디에서 그 대상을 찾을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설명이란 어딘가 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Hanfling은 이 설명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모두는 실제로 낱말의 의미를 낱말의 바깥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따라서 언어의 문제를 언어 외에서 찾는 ‘논점일탈의 오류’를 빚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직시적 설명 Ostensive Explanation
사람들은 자기의 토속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낱말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설명으로서 직시적 설명이 동원된다. 우리는 때때로 한 사람의 능력을 그 사람에게 설명된 것이 무엇인가를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Es regnet’을 ‘비가 온다’로 들을 수 있고, 이것은 그가 독일어를 쓰는 그의 능력을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자기 토속어 단어를 아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깝다’라는 의미를 설명을 통해 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은 또다시 이 낱말을 쓰는 그의 지속적인 능력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도 어느 단계에서는 그 낱말들이 낱말과는 다른 무엇과 관련되는 경우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들을 비언어적 사실에 적용할 수 있지 않는 한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언어 구사 능력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하나의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정의의 방법이 있고 직시의 방법이 있다. 그런데 앞의 것이 언어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언어밖에 있고 기호와 실재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밖에 있는 무엇에 연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언어는 아무 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는 무엇이므로 단순한 소리이고 격분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규칙에 따라 소리가 바뀌는 일종의 놀이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도 또다시, 의미나 의미의 지식에 관한 ‘설명’은 그것이 말로 표현된 한 수준으로 남아 있는 한, 즉 다른 종류의 설명으로 물러나지 않는 한 불완전하다. “말로 한 정의는 우리를 말로 한 이 표현에서 저 표현으로 이끌어 가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더 이상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시적 정의에서 우리는 의미를 배우는 쪽을 향해 더 실제적인 한 걸음을 떼는 것 같다.”
그런데 직시적 정의를 통해 의미와 의미를 배우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유형의 정의가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말로 된 정의의 부족을 메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미 낱말의 기존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상상의 단어인 ‘tove’를 도입하고는 어떤 사람이 연필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tove이다.‘라고 말한다고 전제했다면, 배우는 사람은 이것으로 무엇을 이해했을까? 아마도 그는 ’연필‘을 의미하려고 취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나무‘, ’하나‘, ’딱딱하다‘ 등등으로 또한 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두 개의 호도를 갖고 ’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며, ’둘‘이란 이 특별한 집합의 호도에 주어진 이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특별한 집합의 이름이 주어질 경우, 이것을 숫자 이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직시적 정의를 제공하는 사람 이름을 색깔 등의 이름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직시적 정의는 매 경우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분명한 치유는 그 직시적 정의를 ’이 수는 “2”라고 부른다.‘는 말을 첨가시켜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수”라는 낱말이 직시적 정의가 이해되기 전에 설명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직시적 정의가 매 경우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사물의 복합성, 다시 말해 우리가 가리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어떤 무한수의 방법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일 직시적 정의를 통해 ?논고?에서처럼 ’단순한‘ 대상들을 지시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논고적 의미의 지시가 가능하기만 하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지시하는 오류를 범치 않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 직시적 정의가 인식적으로 오해되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관련된 한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그 정의가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그럴 때 가리키는 행위는 배우는 사람에 의해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를 모르는 한 사람에게 전나무와 잣나무 숲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을 가리키는 산림청 직원이, “저것은 잣나무 숲이다.”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손가락 끝을 전나무 숲으로 이해한 경우, 이 사람의 직시적 정의의 내용은 잣나무가 아니라 전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직시적 가르침의 예를 가리키는 것을 통해 생각하기 쉬우나 가리키는 의미 자체가 이런 방법으로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는 불명료하다. 예컨대 ’이것‘ ’여기‘라는 낱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비슷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둘째, 직시적 정의라는 관념이 얼른 보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여러 다른 낱말들이 있다. 예로서 ‘오늘’, ‘아니다’, ‘그러나’, ‘아마’, ‘수’와 같은 예들이 언급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색깔이나 상위에 있는 한 대상의 경우에서와 같은 지시나 보여주는 명백한 방식이 전혀 없다. 그런 낱말들은 이런 방법을 따를 더 단순한 구성요소로 분석될 수 없다. Hanfling은 ‘과거’를 예로 들고 있다. ‘과거’라는 의미를 이 방법을 통해 가르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란 현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 없으므로, 직시적 방법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관점에 대해 지시한다는 관념이 애매할뿐더러, 도리어 이 관념은 용례를 지각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이 때 주어진 예에서 직접적으로 시간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라는 관념을 정확히 경험적으로 그 예를 봄으로써 “붉다”라는 관념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세부사항이나 유사한 주장으로 향할 때 ‘과거’를 배우는 사람은 이미 ‘이전’, ‘동안’, ‘사건’ 따위의 시간적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관념의 도움 없이는 과거라는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어떻게 배웠을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라는 개념은 없어도 좋은가? 이런 개념들은 서로 꼬여 있어서, 그것을 하나씩 따로 배우기란 환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직시적 가르침에 대한 비판은 종종 불신을 받는다. 그가 마치 명백히 일어나는 어떤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붉다’, ‘인형’이라는 낱말을 가르칠 때 적절한 대상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직시적 가르침은 실제에 있어서 작동된다. 의미되는 것을 파지하는데 요구된 능력은 통상 당연시된다. 그런데 핵심은, 이 능력들 자체가 직시적 가르침에 대한 지시로써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들을 간과하기가 쉬운데 이는 그 문제를 고려하는 우리가 너무 그것들에 익숙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는 행위는 주목하나, 그곳에 반드시 있어서 가르침이 작동되려면 전개되어야 할 기술의 거대한 틀을 주목치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더욱 그러한데, 사실 모국어를 배우는 경우와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다르다. ‘이미 하나의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새로운 언어의 소리를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개념에 일치시키며, 새 개념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Zeno Vendler에 따르면, 가장 합리적 설명은 어린이가 자기 모국어를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틀림없이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달리 말해서 어떤 가능한 인간 언어의 원초적이고 구문론적 의미론적 측면들을 코드화하는 시원적 장치가 틀림없이 있다. 그런데 이 합리적 설명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외국어와 달리 코드나 장치는 단지 요청되어진다고 한다. 이 아직 알려지지 않는, 인간 신경 구조에서 작동되는 코드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논리적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설명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정당화하는 설명은 한 사람이 자기가 행하고 있거나 말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동원될 수 있다. 예컨대 가르치는 상황의 경우, 배우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나 언어사용을 자기가 말한 것을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신경 구조 상태나 조건지음의 과정을 지시함으로써 언어의 사용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가 하는 이유로 주어질 수 있으나, 어떤 것을 행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 안에 정당화하는 설명들은 있으나, 전체로서의 언어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언어적 설명 Verbal Explanation
직시적 설명은 언어와 실재 사이의 결정적 연결을 확립시키는 것으로, 언어가 비언어적 세계에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언어적 정의는 이런 궁극적 역할을 갖고 있지 않고 이 언어적 표현에서 저것으로 데려다 줄뿐이다. 그런데도 세계 내에 낱말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섬유조직과 같은 공통성이 언어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우선, 두 번째 것부터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실처럼 두루 통하는 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낱말들을 상정하면서 대체로 어떤 본질적 정의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는, 낱말이 본질적 정의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 여부가 아니라, 낱말로서 기능하기 위해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가 여부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 본질적 정의의 필연성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놀이”라는 낱말을 공통성을 통해 범주를 만들 수 있는데, 이런 공통성의 범주가 과연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사용을 통해 드러난 것인가? 그리고 이런 공통성을 우리는 실제적으로 도대체 발견할 수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그 공통성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가족유사성’으로 기술된 그의 입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예컨대 왜 우리는 ‘놀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전통적인 대답은 우리가 공통된 면모, 일단의 대상을 소유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공통된 단어를 거기에 적용하는 이유이다. 이런 방식으로 개념의 존재는 설명되고 정당화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개념어나 보통 명사의 용법은 정당화되는데... 왜냐하면 구성 요소 사이에 이행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그는 즉각 ‘이행은 어떤 것에서 어떤 것에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맞받아 쳤다. 이행이나 중첩의 존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중첩의 한 배열을 다른 배열보다 더 좋아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실제적 용법을 넘어서는 그런 판단이 행해질 수 있는 지시에 의해 마련되는 기준이란 없다. 어떤 개념, 예를 들면 “놀이”와 같은 것은 경계를 만들면 이것 자체가 그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바지하지 않을뿐더러, 그곳에 존재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유사성의 예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놀이나 수, 선, 문장과 언어, 읽기 따위가 있다. 그러나 필요충분 조건을 주어진 단어에 대해 찾으려 시도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 주장의 영역을 쉽게 점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잃는다(상실, 패배)는 것은 ‘경기를 잃는다.’와 ‘우산을 잃는다.’에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가족유사성은 본질주의적 모델에는 모순되는 수많은 관계 중 하나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한 낱말이 다양하게 쓰인다. ‘달콤한 사탕’, ‘달콤한 꿈’; ‘무딘 사람’ ‘무딘 칼’.... 그러나 이 언어의 사용은 은유나 유사한 종류 즉 이미 설명이 있는 것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구슬픈 멜로디는 불평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여태 보아왔던 이런 설명은 어떻게 이해에 이르게 되는가?
3) 설명의 이해
이해의 개념과 그것의 의미와 설명의 관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따라서 그는 심리학을 논리학에서, 주관을 객관에서 떼어내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런 시비는 심리주의가 잘못한 데 대한 오해에 놓여있다. 프레게의 심리주의 거부는 의미가 객관적이고, 공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이라는 바론 통찰력과 관계가 있다. 관념들은 식별 가능성을 자체에 의존하고 있어서 객관적이지도, 나눌 수도 없다. 사실, 그것들은 그것들을 지명하는 단어들이 객관적이고 그래서 지명된 관념에서 구분되는 의미를 가지는 조건에서만 소통 가능하다. 이 데카르트적이고 경험론적인 유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심리주의적 개념이 올바른 의미론의 견해에 스며들어 있지 않다는 주장을 전혀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더구나 그 의미란 어떤 사람이 한 표현을 이해할 때 이해되는 것이므로, 이해라는 개념은 정말로 우리의 탐구에 침투해 있다. 심리학적 이해의 부수물이 무관한 반면, 이해의 기준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이해를 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근거를 보이는데, 이해 개념은 우리에게 의미의 개념에 지렛대를 제공한다. 이해의 기준이 한 표현의 공유하면서 일치하는 이해의 가능성을 확립하고, 이해의 대상이 따라서 객관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같이 보이므로, 이해 개념의 도입은 우리를 주관주의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심리주의가 보존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의미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설명은 내적으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이해를 발생시키거나 증진시키는 것이라 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설명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일 프랑스에 대한 지식을 복용자에게 생기게 하는 효과를 가진 약을 복용했다면, 그 약 복용은 일종의 설명도 아니고, 거기에 일종의 가르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잘 때리면 가르침을 재촉할 수 있으나, 그것이 설명은 아니다. 설명은 이해의 내용, 즉 화자가 이해한 설명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설명은 이해자들이 비록 내적으로나 약으로 촉발되기는 했으나, 이해된 무엇을 상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는 의미에 대한 설명에 의해 주어지는 무엇이다. 따라서 설명이 파악될 때 이해되는 것은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해는 설명의 상관물이다. 한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어야, 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통해 달변가는 자기 말을 바르게 사용한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그의 능력이 그 용법을 설명하는 그의 능력을 능가할 수는 없는가? 그리고 만일 그가 일종의 설명을 줄 수 있다면, 그 설명들이 바른 용법과 타당한 설명을 향한 길을 지적하지는 않는가?
이것은 프레게의 견해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프레게 철학에서처럼 설명 개념이 고상하다면, 설명이 이해의 상관물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인간성이 순수 형식에서 한 개념의 지식을 획득하는데 마침내 성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수세기에 걸친 거대한 지적 노력이 있고 난 후에 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무한한 것에 이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독자나 청취자를 암시를 통해 지시된 것처럼 단어들을 이해토록 이끄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전혀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명들은 발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 구사자들이 이해한 것이란 공유되고, 공통적인 공식적 의미이다. 표현 불가능한 그런 것들은 존재치 않으며, 이해는 더 이상 감추어진 내적 기제가 아니다. 달변가는 자기 언어의 표현들을 이해한다. 그 이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표현의 바른 사용 즉 일반적 수행을 따른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용의 바른 설명 즉 의미의 바른 설명인데, 그 두 기준은 논리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상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상관되어 있다. ‘x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는 표현은 하나의 직접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x가 뜻하는 것’은 x의 의미인 어떤 대상을 대표하는 한 상대적 구절은 아니다. 이리하여 x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는 것은 ‘x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x라는 표현을 이해한다면, 그는 ‘x는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즉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점은 똑같이 문장과 단어와 구에 적용된다. 단어의 경우, x를 바르게 사용하는 달변가는 x의 용법을 설명할 수 있고, 최소한 그것의 용례들을 불러 올 수 있다. 많은 단어들은 적절한 그 활용례들의 연쇄를 말해줌으로써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들은 일종의 속임수가 아니고 단순한 설명의 암시만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적절한 예들이 주어질 때, 어떤 이는 그것을 직시적 정의를 주는 한 예로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붉은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그는 그것이 붉은 그 대상의 색깔을 말함으로써 ‘붉음’을 정의할 수 있다. 직시적 정의는 이해의 보조가 아니라, 하나의 규칙으로, 기호론에 속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런 예도 주어지지 않으면서 그것이 어디 있는가를 알 때, 그는 국소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사용할 줄 아는 능력과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이런 연결은 수용할만한 설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조로운 해석에 좌우된다. 비록 바른 사용과 바른 설명이 이렇게 연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상호 독립적이다. 어떤 사람이 x를 바르게 사용했다는 그 사실로부터 그가 그것을 요구에 따라 바르게 설명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가 그것을 틀리게 사용하여, 자기의 x 이해에 의심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가 일반적으로 여러 전형적 문맥에서 x를 바르게 사용한다면, 그는 x에 대한 바른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이 x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통상 x를 바르게 쓸 것이다. 바른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해의 한 기준이다. 그가 원을 어떤 지점에서 등거리에 있는 각 점들을 가진 평면도형으로 설명한다면 그는 통상 원이라는 용어를 ‘저기 있는 원은 너무 작다.’ 혹은 ‘너는 여기서 원을 그릴 수 있니?’와 같은 문장 속에서 바르게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설명과 용법이 이렇게 연결된다면, 그것은 독립적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자기 설명에서 바른 방식으로 제공한 규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그는 ‘노랑’을 우리가 ‘노란 무엇’이라고 사용하듯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직시적 정의를 주나, 정의된 표현은 달리 사용한다. 이러므로 그의 틀린 사용은 자기의 바른 설명에 의해 자기는 x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진술에 주어진 비판적 지지를 물리칠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 설명을 실제로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함을 명시할 것이다. 이제 이런 한계를 극복할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기술의 방법으로 들어가 보자.
3. 기술의 방법
낱말의 의미를 ‘설명’으로 해명하려는 작업은 앞의 절에서 보았듯이, 실패로 끝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란 언어의 바깥에서 찾는 소위 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철학의 임무와 역할이란 모든 것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1) 언어문제에 대한 철학적 맥락
언어철학의 영역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한 말을 저 사람이 알아듣는 것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지으면서 서로 말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듯, 언어철학자들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고 꿈꾸는 것은 전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철학적 문제는 이런 형식을 갖는다: ‘나는 내 길을 몰라.’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질적 언어 용법을 방해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그것을 기술만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토대도 제공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사를 그대로 둔다.
여기서 ‘매사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점에 대해 Phillips는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매사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일상의 언어 사용자들이 철학자들의 역할을 하라든가, 언어에 대한 그들의 사용 의미를 투표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어떤 언어 사용자들을 이해하려면, 요컨대 그들의 언어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설명과 언어 사용자가 자기의 (언어사용에 들이는) 신념에 제공하는 설명과는 동일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 신자가 기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을 경우, 그는 기도를 정의한 구절을 외우든가, 자기가 사용하는 기도문을 욀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기도라고 하는 <종류>의 활동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지, 기도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일상용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 신자는, 기도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 그와의 대화, 죄의 고백, 감사, 혹은 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 등등의 정의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가 기도 시에 행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요구하는 것은 기도가 도대체 일상적인 말로 설명해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며, 이 경우 신자가 자기의 기도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그는 더 이상 갈 길을 잃는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 행위에 대해 비종교적 설명을, 다시 말해, 기도 의미의 어떤 지시를 기도가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람에게 제공할 철학적 혹은 개념적 설명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며, 이럴 경우 그는 적절한 설명을 마련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이런 실패는 비단 종교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 사용자, 심지어 과학자들조차도 흔히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신자들의 말과 행동에 주목한다면, 철학자들은 무엇을 발견할까? 그들의 말과 행동이 모순된 언술로 엮여지는 것을 발견하는데도 이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예를 들어, 한 신자의 자식은 그 신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맥락에서는 다같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부자 모녀간의 혈통이 있음에도 ‘형제자매’로 통칭하는 것은 모순적 언술이다. 이럴 때 그런 진술의 바른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Malcolm은 일찍이 기존의 ‘신존재 증명’의 부당함을 과학의 존재론적 입장에서 Anselmus를 비판한 기존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을 향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서 비판하고 있다. 우선 후자의 주장을 보자: ‘그리고 분명히 이 최대 가능자가 너무나 참되게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존재자로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우월한 것도 그러하다. 따라서 보다 더 큰 것이 감지될 수 없는 것이 비존재로 생각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고의 최고 대상이면서 최고가 아니어야 한다 ―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보다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너무나 참되게 있으므로 비존재로 생각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여기에 대해 말콤은 안셀무스의 논증을 현대적 의미로 고친다. 그는 우리가 사실상 하나님을 그의 존재를 위해 자기와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혹은 다른 존재나 상황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방법을 썼다. 이제 말콤은 지적하기를, 많은 철학자들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위에서 언급된 속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실상은 그것들을 소지하는 존재가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어하리라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말콤은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부터, 그가 존재했다면, 그가 단지 시간의 지속을 가졌지 영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결론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얼마나 오래 존재했는가?, 다음 주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그런 질문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나 불합리하다. 우리의 그에 대한 통상적 개념에 따르면, 그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리고 영원성은 끝없는 시간의 무한히 아니다. 영원을 무엇에 돌리는 것은 그것이 시간의 지속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의미하는 모든 문장들을 무의미하게 배제시키는 것이다. 한 사물이 지속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적 사실일 뿐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속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끝없는 지속을 가진다면, 그것이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이 그것을 존재하기를 멈추게 야기 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의미 있을 것이다. 끝없는 지속을 가진 존재는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제한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파악되는 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무제한적 존재임이 파악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말콤은 계속해서 현대철학에 그런 영향을 끼친 칸트의 존재론적 논증 비판을 고찰한다. 칸트의 견해는 절대 필연적 존재 개념의 경우, 그것의 존재가 부인된다면, 우리는 모든 그것의 속성을 통해 사물 자체를 배척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말콤은 이런 반대가 그 주체를 존재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에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앞 논증 전체의 요점은,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감각적으로 이야기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말콤은 주장하기를, ‘대화의 주체의 종류만큼 많은 존재론적 명제들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요컨대, 시간의 개념을 통한 필연성의 의미로 해결한다:
‘시편 9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산들이 나오기 전, 심지어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와 영원성의 관념, 유대 기독교에 본질적인 관념이 표현되어 있다. 저 복잡한 사고 체계, 저 ‘말놀이’에는,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나?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말해야 한다. ‘이 말놀이는 행해진다!’
말콤의 존재론적 논증이 성취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신앙에 대해 물을 수 있고 없는 종류의 질문들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말콤의 논문이 종교에게 유리한 승리하고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견해로 그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말콤이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질문을 하고 싶어 할 때, 우리의 진로 상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현대 종교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말콤의 태도는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탐구의 결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소지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동의는 하나님 믿음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와 무신론자는 모두가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말놀이의 철학적 맥락은 이런 기술을 통해 우리에게 제대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기술과 사실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2) 기술과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모든 문장이란 기술들이라는 근본적 생각에 건축되어 있다. 이런 시원적 그림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가장 조야한 반성을 통해서 보면 분명 그것은 잘못인 것 같아 보인다. 사실, 한 언어는 전혀 아무런 기술을 포함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명령이나 질문 및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오류이고 사실 명백한 것이기도 하지만, 문장이란 이런 개념은 그것을 상투적으로 부닥치는 기술에 의해서는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스스로 그것에로 논증하려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그들은 이런 상투성에 대한 무지를 그렇게 철저히 논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시원적 그림을 자기 추론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을 분명한 반대에 반대해 옹호하려고 더 완벽한 문장-의미에 대한 설명을 다듬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원적 그림에 대한 한 변호 노선은 문장들이란 상이한 용법들을 갖고 있는 것을 받아들여, 이것을 그 문장들이 상이한 사실들의 기술이라는 사실로 돌리는 것이다. 한 규칙의 표현은 실재가 무엇인지를 기술하지 않고, 실재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기술한다. 한 요청은 화자의 욕구를 기술하는데 비해, 한 질문은 때때로 화자의 무지 상태를 기술하고, 때때로는 무엇을 알려는 그의 소망을 기술한다. 한 화자의 자기 행위의 정당화는 자기 행동과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요구나 주문 사이의 연결을 기술한다.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사실들에다가 아무런 제약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문장의 용법의 차이들이란 늘 그들이 표현하는 기술의 종류의 차이를 대표할 수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 전개상의 결점을 지적하는 논평들을 하고 있다.
첫째, 문장을 기술로 부른 요점은 아마도 그것을 특별한 용법을 가지는 것으로 특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기술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용법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더 이상의 ‘기술’의 확대, 예컨대 규칙을 규범 사실들의 기술로 다룬다던가 하는 확대는 이 문제를 약화시킨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론적으로, 모든 문장들이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단일한 용법을 가졌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지각 가능한 언어에서 모든 가능한 문장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즉, 기술로 기능하지 않는 문장과 같은 그런 것이 없었다면, ‘기술’이라는 용어는 그 관습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 텐데, 이는 그것이 일상적으로 기술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을 망라할 만큼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무 문장도 기술이지 않을 수 없다라는 논지는 모든 문장은 곧 기술이라는 주장을 공허하게 만든다.
셋째, 각 문장을 기술로 취급하는 것은 한 문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에 연결을 왜곡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데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어떤 사실의 기술이라면,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자기 기술에 정보를 끌어들이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정보에 대응하면서 하는 것은, 아마도, 모두가 독립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우리가 그것에 복종하기 전에 한 명령을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하도록 명령받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 계기이다, 우리 행동이 기껏 하나의 증후인 계기를 위해서 말이다. 유사하게, 우리가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자기가 아프다는 정보를 날랐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종류의 취급은 고통을 경감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우리 행동이 그런 상황하에서 귀납적 추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설명은 발화에 대한 어떤 행동적 반응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왜곡시킨다. 이러므로, 그것은 발화에 대한 대응들이 원시적이라는 것, 즉 추론에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넷째, 기술 개념이 내적으로 타자들, 예를 들어, 속성, 진리 및 증거를 가지기 시작하고 끝낸다는 개념들과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 문장을 기술로 특징 지우는 것은 논리적 귀결을 갖는다. 모든 문장을 기술로 부르는 귀결은 역설의 부담이다. 거짓 유비는 분명한 문제를 발생시키며, 신비적 실재들이나 과정들은 그것들을 풀기 위해 존재로 호출된다. ‘ 내 방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의 모범적 진술이며, ‘언제 열렸는데?’하는 것은 거기에 응답하는 재치 있는 질문이고, 이것은 문제없는 답변을 갖고 있다. ‘내 문이 열렸다는 것은 참이다.’라는 문장과 ‘내 문은 내년에 다시 채색될 것이다 는 것은 참이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라. 이것은 특별한 진술들을 참으로 기술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언제 참이 되었는가(될 것인가)고 묻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언제 그것들은 참이 되기를 그만두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진리란 특별한 종류의 진술 속성이라고 말함으로써 대거리 할 수 있는데, 이때 이 질문은 무질서해진다. 그러나 ‘p라는 것은 참이다’가 어떤 것(참되는 것으로)을 기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그 문장이 ‘p’와 대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유사하게, 어떤 이들은 재치 있게 ‘당신 문이 열린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물을 수 있고, 이것은 문제없는 대답을 갖는다: 예컨대,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치통을 앓고 있다.’라는 문장과 ‘나는 화났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라. 이것들은 기술인가? 만약 기술이라면, 무엇을 기술하는가? 어떻게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그들이 마음 상태를 기술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진술들이 내감을 통해 참임이라는 것을 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둘을 다 비판하면서 그것들을 부분적으로 이 문장들은 기술로 기능 해야 한다는 독단적 가치를 추적한다. 우리는 내적 상태(고통, 분노, 사랑, 연민, 우울 등)의 표현들과 그것의 기술들 사이의 차이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또 동일한 유형의 문장들이 이제 이것을 위해, 저 때는 다른 것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 모든 문장을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문장을 그것의 명시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범례로 일치시키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기술들 사이의 문법적 차별성을 마음에 둘 때 혼동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상이한 용법 가운데 있는 이들 문장들은 다양한 의미의 세계 기술들 속에 있는 기술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 전부를 ‘기술들’이라는 제하에 모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이런 비판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모든 단어는 이름들이라는 요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판정과 평행을 이룬다. 우리가 한 단어를 ‘x는 ...을 기호화한다.’는 형식의 문장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p는 ... 사실을 기술한다.’는 형식의 문장을 통해 어떤 문장이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통한 문장 용법의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자체를 더 이상 다른 것과 같이 이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로 된 문장마다 무엇인가를 기술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3) 위장된 기술과 분석
앞 선 고려들은 매 문장은 그대로 어떤 사실의 기술이라는 생각에서 어떤 사람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원적 그림을 폐기시키지는 않고, 대신 그것에 대해 더 교묘한 옹호로 이끌어 갈 수 있다. 현상과는 달리 매 문장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술이다. 이것은 문장이 알맞게 변형될 때만이 분명해 진다. 분석은 그것의 참 형식을 노출시키는데 필수적이다. 언어를 기술로 결합되는 이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시원적 그림은 분석에 호소함으로써만이 입증될 수 있다.
문장 분석은 두 가지 중 한 형식을 취하여, 약간 다른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의 발전에로 이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어떤 문법 형식으로 된 주어진 문장을 동일한 용법을 가지나 기술의 형식을 지닌 동등한 문장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p라는 경우인가?’라는 문장의 질문 분석은 예를 들어 ‘그것이 p라는 경우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고 싶다.’라는 문장이 될 것이다. 유사한 번역 과정들이 매 종류의 문장에 설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분석은 그 용법이 무엇이든지 매 문장으로부터 하나의 기술로 기능 하는 무엇인가를 발췌해낼 수 있다. 분석이 드러내는 것은 상이한 용법을 가진 문장들은 일치하는 기술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중요한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한 문장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그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도록 한다면 옳은 것이다. 문장의 용법상의 상이점들은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말로 그것들은 화자들의 목표와 그것을 청중에게 옮기는 규약에 의존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레게는 하나의 단일한 판단 내용은 p라는 진술, p가 그 경우인가 여부의 질문, p 라는 짐작 및 p이면 q이다 라는 진술에서 전건과 공유된다고 주장했다. 주어진 판단의 내용에 대한 용법 가운데 본질적 차이는 문법 규칙을 통해 과도하게 표현된 구별되는 마음의 활동의 발생에 좌우된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핵심을 일반화했다: ‘진술은 심리적일 뿐이다... 판단, 명령 및 질문은 모두가 동일한 수준에 서 있다. 그러나 모두는 명제 형식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논리학에 흥미를 제공하는 것은 진술 안된 명제들뿐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문장의 본질적 기능은 기술하는 것, 즉 명제의 일반형식은 ‘이것은 사물이 서 있는 방식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반대하면서, 분석을 제일 형식으로 묶어,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이제 제안한다. 첫째, 어떤 주어진 문장과 그것의 기술로서 개작은 동일한 용법을 가지므로, 모든 문장을 단일한 형식으로 개작할 가능성 때문에 그것들이 단일한 용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들이 상이한 용법을 가진 정도로, 그것은 이 상이함을 감추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문장들이 단일한 방식으로 기능 한다고 주장하면, 잘못된 의미를 어떤 문법적 변형의 가능성에 갖다 붙인다.
둘째로, 매 문장을 기술로 개작할 가능성이 언어의 비기술적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 언어 이해에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생각은 하나의 착각이다. ‘그것은 p라는 경우인가’를 ‘그것이 p라는 경우인가 여부를 나는 알고 싶다.’ 혹은 ‘그것이 p라는 경우인가 여부를 모른다.’라고 개작을 고려해 보라. 이 ‘기수들’ 각각은 간접 질문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상응하는 직접 질문을 지시로써 설명되어질까? 그렇다면 그 개작은 원래 질문의 분석인가?
셋째, 매 문장이 비록 동일한 용법을 가진 기술로 개작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술들이란 궁극적인 문장 형식이라는 것도, 한 문장을 발화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늘 그 기술 개작에서 진술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도 우리는 잘못된 의미를 어떤 문법적인 변형의 가능성에 붙이고 싶어진다.
제2형식의 분석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의 개선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더욱 광범위하다. 첫째, 한 진술이 부분으로서 다른 문장의 용법과 공유되는 기술적 내용을 포함한다는 생각은 착오이다. 이 착오는 진술을 하기 위해 사용된 문장들을 ‘...라고 진술된다.’거나 ‘...라는 경우이다.’라는 연산자로 시작하는 ‘that’-절로 개작하는 가능성을 잘못 해석하는데서 비롯된다. 이 개작 가능성과는 독립적으로 한 선언문의 의미를 표현하는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하는 ’문장의 기술적 내용‘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프레게가 짐작하듯이, 한 문장의 기술적 내용은 독립적 실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술하고, 질문하고, 명령을 내리고 등등을 위해 고립적으로는 사용될 수 없는 표현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이러므로 그것은 한 문장으로 재현될 수 없다. 기술적 문장 내용을 그렇게 표현할 유일한 대안은 ‘that’ 절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지지를 받는다. 첫째, ‘that’절은 진술, 질문, 명령을 하기 위해 사용된 문장들을 연산자로 시작하는 명사절로 개작하는데서 나타난다. 둘째로, ‘that’ 절은 때때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진술하고, 명령했는가를 보고하는데 따라 사용되며, 그래서 그것은 무엇이 진술되었나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that’ 절의 의미는 어떤 문장의 의미로도 파악될 수 없다. 사실, 프레게는 이런 점을 시인하면서, ‘that’절의 지시와 그것을 포함한 문장의 의미를 일치시켰다. 이런 의미의 비동등성은 문장이 아니라 ‘that’절은 말놀이에서 수를 두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시된다. 그러므로, 한 문장의 기술적 내용을 표현하는 것은 문장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문장의 의미일 수가 없다.
둘째로, 공통적 기술 내용의 요지에 상관된 생각은 진술, 짐작, 질문, 요구, 명령 따위는 화자의 의도나 정신적 의미 행동의 지시로써만 달라진다. 이 틀린 생각의 일반적 배경은 문장들이 그 배경 사고와 일탈될 때 죽은 기호라는 개념이다. 즉 그 표현 이면과 그 발화를 동반하는 혹은 들리는 심리 상태나 과정들이 문장에 활력을 준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이해는 정신 상태라거나 문장을 말하고 듣는 부수 과정들이라는 논지에 대해 많은 반대 논증을 진척시킨다. 기호의 생명은 그 용법에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적 조망은 진술, 짐작, 명령, 예측 등등의 차별화에도 적용된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문장을 사용하는 수행 즉, 그것들이 발화되는 상황, 그것에 주어지는 설명, 그 발화를 위한 상이한 정당화, 그것에 반응하는 상이한 수행들에 있는 차이이다. 한 발화가 한 진술인가 여부는 예컨대, 그것을 참, 거짓으로 특성화시키는 언어 내에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진리 함수의 계산 내에 그것을 사용하는 가능성이 있는가 여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발화가 ‘판단하는’ 심적 활동을 수반하는가 여부에는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특별한 발화의 조건, 예를 들어 화자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거나 책을 큰 소리로 읽는가 여부에는 좌우된다. ‘불’하는 것은 여기서는 명령으로, 저기서는 보고로 기능한다는 것은 발화의 대조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경우, 예를 들어, ‘불 가져 와!’ 혹은 ‘불은 이미 켜져 있습니다.’에서 명시적이 된다. ‘진술’, ‘명령’, ‘약속’ 등의 용어들은 문장 용법의 특성화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진술했는지, 명령했는지, 혹은 약속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행동 기준이 엄연히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판정은 어떤 형식으로도 분석은 기술이 문장의 본질적 기능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법상 ‘피상적’ 차이들 배후의 깊은 통일성을 폭로함으로써는 문장이 기술이라는 시원적 그림이라는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다른 차원의 시도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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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ow Language-Games Are Described
- Shin, SangHyong -
Wittgenstein says that philosophy may in no way interfere with the actual use of language; it can in the end onl y describe it. For it cannot give it any foundation either. It leaves everything as it is.
The reason for this seems to show that philosophy is contaminated with a serious disease, which has come from 'essence' philosophy since Plato. It is therefore necessary that such a philosophy should have a therapy.
In this paper we try to show that a reasonable therapy may be given by Wittgenstein, in particular from a point of view with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he process made in PI consists of two steps: rejecting 'Explanation' and accepting 'Description.'
Despite a well-known common sense in which philosophy is the attempt to make explanations, Wittgenstein claims that in philosophizing we should not explain something but describe it. For an explanation comes to an end somewhere. And it gives us foundations from which we tend to make things something different from what they really are. Thus we have to pay attention to 'Description.'
According to Wittgenstein, to say that we describe something is to say that we have to deal with it in a philosophical context, which is not the same thing as sciences do. Philosophical contexts turn our eyes to look and see what they are, rather than what they should be; that is, realizing words and sentences in their own circumstances, we have to understand them in our ordinary language-use.
In addition, errors and mistakes, which Augustine put forward in his explanation of languages, are discovered while we look for Wittgensteinean point of view on language-games. 'Description' we mean be in this paper may be summed up in a word: "Look and See" what is happening.
신 상 형*안동대 동양철학
요약문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는 철학의 탐구 방법을 ‘말놀이’의 기술 방식을 통해 보여주려는 시도로 씌어진 것이다.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한 낱말이 나르고 있는 짐, 즉 그 의미를 바로 전달하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적 진술은 그러나 그 나름의 표현방식에 의해 그 의미가 가리워지거나 주는가 하면, 늘어나거나 거짓꼴을 갖추기도 한다. 따라서 철학의 중요한 역할은 이것을 위한 치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철학의 치료적 기능을 통해 노리는 목적은 ‘매사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을 본 논문은 <설명을 버리고 기술을 택하라>는 말로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서양 철학의 핵심된 사조는 경험 이면에 있는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도에 있었고, 이 본질 탐구의 벽은 늘 언어 표현을 그 본질을 <지시하는 무엇>으로 여기게 했고, 이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설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설명은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발견되는데, 이 설명은 몇 가지 형태가 있으며 그것들은 각각 결정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첫째, 직시적 설명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는 사물의 복합성 ― 의미 ― 을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직시하지 못하는 단어가 있기도 하므로, 환원의 과정에 한계를 갖는다. 둘째, 언어적 설명은 사물을 가리키는데 쓰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공통성을 갖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데, 이 믿음은 사태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을 근거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데서 선결문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대상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믿음도 이 설명의 암묵적 토대인데, 이것 또한 언어내의 정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설명은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지식을 발전, 증진시킨다고 해서 바른 설명이 아니라, 설명을 통해 의미의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기술을 통해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기술은 그러나 언어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동일하지 않다. 우선, 언어문제에 대한 철학적 맥락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언어의 토대, 예컨대 정의를 통한 사물의 설명 따위를 지양하고, 각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존중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연중 들어 올 질병적 정의를 용인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개념의 실질적인 쓰임새가 여과없이 표현되는 그대로의 의미를 일상언어 사용자가 알도록 말한다는 뜻이다. 종교적 언술의 경우, 말의 직설적 대상을 통한 이해가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의미를 일상적(보편적) 언어로 담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런 각도에서 모든 진술은 다 철학적 분석을 거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기술과 사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를 갖는지가 문제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모든 문장은 기술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는데,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했다. 각 문장이 단일한 용법을 가지는데 비해, 기술은 여러 용법을 가진다. 기술로 기능하는 문장과 그렇지 못한 문장이 있고, 한 문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를 왜곡시킨다. 마지막으로, 위장된 기술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분석을 통해 보펀적인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이해란 정신상태나 문장을 말하고 듣는 부수 과정이라는 논지에 반기를 든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문장을 통한 시원적 그림 추구와는 다른 차원의 시도, 즉 ‘보고 알아채기’ 인 것이다.
※ 주요어 : 설명, 기술, 직시, 비트겐슈타인, 공통성
1. 철학적 기술의 범위
플라톤이래 서양철학의 핵심된 사조는 우리 경험의 이면에 있는 절대불변의 것 곧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 본질철학의 목표이자 이상은 순수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세계에 대한 수정과 같은 논리의 순수성에 도달하여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질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대표적으로 알 수 있듯이 인식론적 각도에서 보면 ‘직시적 의미론’ostensive reference theory 에 기초해 있다. 철학적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여러 시기를 거쳐 무엇이 그 본질인가를 물었다. 이것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언어와 관련하여 본질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 이들은 ‘기호에 대응하는 대상’으로 대답한다. 이런 대답은 대상 파악의 실패를 초래한 철학자들의 시도 속에서 말의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 개념은 진술된 단어의 겉모습을 통한 의미 파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말하자면 단어의 겉모습은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날라다 주지 못한다. 절제되고 축약된 낱말의 사용은 의미의 일부분을 내비치는가 하면, 늘어지고 과장된 낱말들은 제값을 다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단어의 의미란 그 자체가 ‘늘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동일한 진위의 값을 대화자들 사이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도리어 의미는 한 단어의 쓰임새로부터 ‘결정되는’ 무엇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그의 <사적 언어 논증>, <가족 유사성>, <삶의 형식> 따위의 논의들을 통해 언어의 특징들을 이해할 때 금방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타당성이 누구에게나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논의는 겉모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얼개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앞의 것을 표층문법이라고 하고 뒤의 것은 심층문법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특정한 논증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것들을 다루게 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시각 ― 방법론 ―을 논의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즉 우리가 노리는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제기된 ‘기술의 방법’을 밝혀, 그것을 통한 세계의 기술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방법론으로 크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설명 explanation과 기술description이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2. 설명
비트겐슈타인은 사물의 이름을 대상에 대한 부호 달기로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시적 정의’에 대해 한 마디로 유치한 이해라고 격하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낱말-대상의 대응’ 언어관을 비판하면서 반례로서 ‘붉은 다섯 개의 사과’ five red apples를 제시한다. ‘사과’는 대응을 이루는 대상을 갖고 있으나, ‘붉음’과 ‘다섯’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후자는 어디에서 그 대상을 찾을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설명이란 어딘가 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Hanfling은 이 설명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모두는 실제로 낱말의 의미를 낱말의 바깥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따라서 언어의 문제를 언어 외에서 찾는 ‘논점일탈의 오류’를 빚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직시적 설명 Ostensive Explanation
사람들은 자기의 토속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낱말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설명으로서 직시적 설명이 동원된다. 우리는 때때로 한 사람의 능력을 그 사람에게 설명된 것이 무엇인가를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Es regnet’을 ‘비가 온다’로 들을 수 있고, 이것은 그가 독일어를 쓰는 그의 능력을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자기 토속어 단어를 아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깝다’라는 의미를 설명을 통해 그가 배울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은 또다시 이 낱말을 쓰는 그의 지속적인 능력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도 어느 단계에서는 그 낱말들이 낱말과는 다른 무엇과 관련되는 경우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들을 비언어적 사실에 적용할 수 있지 않는 한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언어 구사 능력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하나의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정의의 방법이 있고 직시의 방법이 있다. 그런데 앞의 것이 언어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언어밖에 있고 기호와 실재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밖에 있는 무엇에 연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언어는 아무 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는 무엇이므로 단순한 소리이고 격분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규칙에 따라 소리가 바뀌는 일종의 놀이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도 또다시, 의미나 의미의 지식에 관한 ‘설명’은 그것이 말로 표현된 한 수준으로 남아 있는 한, 즉 다른 종류의 설명으로 물러나지 않는 한 불완전하다. “말로 한 정의는 우리를 말로 한 이 표현에서 저 표현으로 이끌어 가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더 이상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시적 정의에서 우리는 의미를 배우는 쪽을 향해 더 실제적인 한 걸음을 떼는 것 같다.”
그런데 직시적 정의를 통해 의미와 의미를 배우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유형의 정의가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말로 된 정의의 부족을 메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미 낱말의 기존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상상의 단어인 ‘tove’를 도입하고는 어떤 사람이 연필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tove이다.‘라고 말한다고 전제했다면, 배우는 사람은 이것으로 무엇을 이해했을까? 아마도 그는 ’연필‘을 의미하려고 취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나무‘, ’하나‘, ’딱딱하다‘ 등등으로 또한 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두 개의 호도를 갖고 ’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며, ’둘‘이란 이 특별한 집합의 호도에 주어진 이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특별한 집합의 이름이 주어질 경우, 이것을 숫자 이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직시적 정의를 제공하는 사람 이름을 색깔 등의 이름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직시적 정의는 매 경우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분명한 치유는 그 직시적 정의를 ’이 수는 “2”라고 부른다.‘는 말을 첨가시켜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수”라는 낱말이 직시적 정의가 이해되기 전에 설명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직시적 정의가 매 경우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사물의 복합성, 다시 말해 우리가 가리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어떤 무한수의 방법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일 직시적 정의를 통해 ?논고?에서처럼 ’단순한‘ 대상들을 지시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논고적 의미의 지시가 가능하기만 하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지시하는 오류를 범치 않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 직시적 정의가 인식적으로 오해되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관련된 한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그 정의가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그럴 때 가리키는 행위는 배우는 사람에 의해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를 모르는 한 사람에게 전나무와 잣나무 숲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을 가리키는 산림청 직원이, “저것은 잣나무 숲이다.”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손가락 끝을 전나무 숲으로 이해한 경우, 이 사람의 직시적 정의의 내용은 잣나무가 아니라 전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직시적 가르침의 예를 가리키는 것을 통해 생각하기 쉬우나 가리키는 의미 자체가 이런 방법으로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는 불명료하다. 예컨대 ’이것‘ ’여기‘라는 낱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비슷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둘째, 직시적 정의라는 관념이 얼른 보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여러 다른 낱말들이 있다. 예로서 ‘오늘’, ‘아니다’, ‘그러나’, ‘아마’, ‘수’와 같은 예들이 언급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색깔이나 상위에 있는 한 대상의 경우에서와 같은 지시나 보여주는 명백한 방식이 전혀 없다. 그런 낱말들은 이런 방법을 따를 더 단순한 구성요소로 분석될 수 없다. Hanfling은 ‘과거’를 예로 들고 있다. ‘과거’라는 의미를 이 방법을 통해 가르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란 현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 없으므로, 직시적 방법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의 관점에 대해 지시한다는 관념이 애매할뿐더러, 도리어 이 관념은 용례를 지각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이 때 주어진 예에서 직접적으로 시간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라는 관념을 정확히 경험적으로 그 예를 봄으로써 “붉다”라는 관념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세부사항이나 유사한 주장으로 향할 때 ‘과거’를 배우는 사람은 이미 ‘이전’, ‘동안’, ‘사건’ 따위의 시간적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관념의 도움 없이는 과거라는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은 어떻게 배웠을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라는 개념은 없어도 좋은가? 이런 개념들은 서로 꼬여 있어서, 그것을 하나씩 따로 배우기란 환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직시적 가르침에 대한 비판은 종종 불신을 받는다. 그가 마치 명백히 일어나는 어떤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붉다’, ‘인형’이라는 낱말을 가르칠 때 적절한 대상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직시적 가르침은 실제에 있어서 작동된다. 의미되는 것을 파지하는데 요구된 능력은 통상 당연시된다. 그런데 핵심은, 이 능력들 자체가 직시적 가르침에 대한 지시로써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들을 간과하기가 쉬운데 이는 그 문제를 고려하는 우리가 너무 그것들에 익숙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는 행위는 주목하나, 그곳에 반드시 있어서 가르침이 작동되려면 전개되어야 할 기술의 거대한 틀을 주목치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더욱 그러한데, 사실 모국어를 배우는 경우와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다르다. ‘이미 하나의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새로운 언어의 소리를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개념에 일치시키며, 새 개념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Zeno Vendler에 따르면, 가장 합리적 설명은 어린이가 자기 모국어를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틀림없이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달리 말해서 어떤 가능한 인간 언어의 원초적이고 구문론적 의미론적 측면들을 코드화하는 시원적 장치가 틀림없이 있다. 그런데 이 합리적 설명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외국어와 달리 코드나 장치는 단지 요청되어진다고 한다. 이 아직 알려지지 않는, 인간 신경 구조에서 작동되는 코드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논리적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설명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정당화하는 설명은 한 사람이 자기가 행하고 있거나 말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동원될 수 있다. 예컨대 가르치는 상황의 경우, 배우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나 언어사용을 자기가 말한 것을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신경 구조 상태나 조건지음의 과정을 지시함으로써 언어의 사용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가 하는 이유로 주어질 수 있으나, 어떤 것을 행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 안에 정당화하는 설명들은 있으나, 전체로서의 언어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언어적 설명 Verbal Explanation
직시적 설명은 언어와 실재 사이의 결정적 연결을 확립시키는 것으로, 언어가 비언어적 세계에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언어적 정의는 이런 궁극적 역할을 갖고 있지 않고 이 언어적 표현에서 저것으로 데려다 줄뿐이다. 그런데도 세계 내에 낱말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섬유조직과 같은 공통성이 언어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우선, 두 번째 것부터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실처럼 두루 통하는 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낱말들을 상정하면서 대체로 어떤 본질적 정의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는, 낱말이 본질적 정의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 여부가 아니라, 낱말로서 기능하기 위해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가 여부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 본질적 정의의 필연성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놀이”라는 낱말을 공통성을 통해 범주를 만들 수 있는데, 이런 공통성의 범주가 과연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사용을 통해 드러난 것인가? 그리고 이런 공통성을 우리는 실제적으로 도대체 발견할 수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그 공통성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가족유사성’으로 기술된 그의 입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예컨대 왜 우리는 ‘놀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전통적인 대답은 우리가 공통된 면모, 일단의 대상을 소유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공통된 단어를 거기에 적용하는 이유이다. 이런 방식으로 개념의 존재는 설명되고 정당화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개념어나 보통 명사의 용법은 정당화되는데... 왜냐하면 구성 요소 사이에 이행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그는 즉각 ‘이행은 어떤 것에서 어떤 것에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맞받아 쳤다. 이행이나 중첩의 존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중첩의 한 배열을 다른 배열보다 더 좋아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실제적 용법을 넘어서는 그런 판단이 행해질 수 있는 지시에 의해 마련되는 기준이란 없다. 어떤 개념, 예를 들면 “놀이”와 같은 것은 경계를 만들면 이것 자체가 그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바지하지 않을뿐더러, 그곳에 존재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유사성의 예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놀이나 수, 선, 문장과 언어, 읽기 따위가 있다. 그러나 필요충분 조건을 주어진 단어에 대해 찾으려 시도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 주장의 영역을 쉽게 점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잃는다(상실, 패배)는 것은 ‘경기를 잃는다.’와 ‘우산을 잃는다.’에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가족유사성은 본질주의적 모델에는 모순되는 수많은 관계 중 하나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한 낱말이 다양하게 쓰인다. ‘달콤한 사탕’, ‘달콤한 꿈’; ‘무딘 사람’ ‘무딘 칼’.... 그러나 이 언어의 사용은 은유나 유사한 종류 즉 이미 설명이 있는 것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구슬픈 멜로디는 불평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여태 보아왔던 이런 설명은 어떻게 이해에 이르게 되는가?
3) 설명의 이해
이해의 개념과 그것의 의미와 설명의 관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따라서 그는 심리학을 논리학에서, 주관을 객관에서 떼어내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런 시비는 심리주의가 잘못한 데 대한 오해에 놓여있다. 프레게의 심리주의 거부는 의미가 객관적이고, 공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이라는 바론 통찰력과 관계가 있다. 관념들은 식별 가능성을 자체에 의존하고 있어서 객관적이지도, 나눌 수도 없다. 사실, 그것들은 그것들을 지명하는 단어들이 객관적이고 그래서 지명된 관념에서 구분되는 의미를 가지는 조건에서만 소통 가능하다. 이 데카르트적이고 경험론적인 유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심리주의적 개념이 올바른 의미론의 견해에 스며들어 있지 않다는 주장을 전혀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더구나 그 의미란 어떤 사람이 한 표현을 이해할 때 이해되는 것이므로, 이해라는 개념은 정말로 우리의 탐구에 침투해 있다. 심리학적 이해의 부수물이 무관한 반면, 이해의 기준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이해를 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근거를 보이는데, 이해 개념은 우리에게 의미의 개념에 지렛대를 제공한다. 이해의 기준이 한 표현의 공유하면서 일치하는 이해의 가능성을 확립하고, 이해의 대상이 따라서 객관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같이 보이므로, 이해 개념의 도입은 우리를 주관주의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심리주의가 보존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의미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설명은 내적으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이해를 발생시키거나 증진시키는 것이라 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설명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일 프랑스에 대한 지식을 복용자에게 생기게 하는 효과를 가진 약을 복용했다면, 그 약 복용은 일종의 설명도 아니고, 거기에 일종의 가르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잘 때리면 가르침을 재촉할 수 있으나, 그것이 설명은 아니다. 설명은 이해의 내용, 즉 화자가 이해한 설명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설명은 이해자들이 비록 내적으로나 약으로 촉발되기는 했으나, 이해된 무엇을 상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는 의미에 대한 설명에 의해 주어지는 무엇이다. 따라서 설명이 파악될 때 이해되는 것은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해는 설명의 상관물이다. 한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어야, 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통해 달변가는 자기 말을 바르게 사용한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그의 능력이 그 용법을 설명하는 그의 능력을 능가할 수는 없는가? 그리고 만일 그가 일종의 설명을 줄 수 있다면, 그 설명들이 바른 용법과 타당한 설명을 향한 길을 지적하지는 않는가?
이것은 프레게의 견해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프레게 철학에서처럼 설명 개념이 고상하다면, 설명이 이해의 상관물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인간성이 순수 형식에서 한 개념의 지식을 획득하는데 마침내 성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수세기에 걸친 거대한 지적 노력이 있고 난 후에 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무한한 것에 이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독자나 청취자를 암시를 통해 지시된 것처럼 단어들을 이해토록 이끄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전혀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명들은 발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 구사자들이 이해한 것이란 공유되고, 공통적인 공식적 의미이다. 표현 불가능한 그런 것들은 존재치 않으며, 이해는 더 이상 감추어진 내적 기제가 아니다. 달변가는 자기 언어의 표현들을 이해한다. 그 이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표현의 바른 사용 즉 일반적 수행을 따른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용의 바른 설명 즉 의미의 바른 설명인데, 그 두 기준은 논리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상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상관되어 있다. ‘x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는 표현은 하나의 직접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x가 뜻하는 것’은 x의 의미인 어떤 대상을 대표하는 한 상대적 구절은 아니다. 이리하여 x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는 것은 ‘x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x라는 표현을 이해한다면, 그는 ‘x는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즉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점은 똑같이 문장과 단어와 구에 적용된다. 단어의 경우, x를 바르게 사용하는 달변가는 x의 용법을 설명할 수 있고, 최소한 그것의 용례들을 불러 올 수 있다. 많은 단어들은 적절한 그 활용례들의 연쇄를 말해줌으로써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들은 일종의 속임수가 아니고 단순한 설명의 암시만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적절한 예들이 주어질 때, 어떤 이는 그것을 직시적 정의를 주는 한 예로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붉은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그는 그것이 붉은 그 대상의 색깔을 말함으로써 ‘붉음’을 정의할 수 있다. 직시적 정의는 이해의 보조가 아니라, 하나의 규칙으로, 기호론에 속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런 예도 주어지지 않으면서 그것이 어디 있는가를 알 때, 그는 국소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사용할 줄 아는 능력과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이런 연결은 수용할만한 설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조로운 해석에 좌우된다. 비록 바른 사용과 바른 설명이 이렇게 연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상호 독립적이다. 어떤 사람이 x를 바르게 사용했다는 그 사실로부터 그가 그것을 요구에 따라 바르게 설명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가 그것을 틀리게 사용하여, 자기의 x 이해에 의심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가 일반적으로 여러 전형적 문맥에서 x를 바르게 사용한다면, 그는 x에 대한 바른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이 x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통상 x를 바르게 쓸 것이다. 바른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해의 한 기준이다. 그가 원을 어떤 지점에서 등거리에 있는 각 점들을 가진 평면도형으로 설명한다면 그는 통상 원이라는 용어를 ‘저기 있는 원은 너무 작다.’ 혹은 ‘너는 여기서 원을 그릴 수 있니?’와 같은 문장 속에서 바르게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설명과 용법이 이렇게 연결된다면, 그것은 독립적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자기 설명에서 바른 방식으로 제공한 규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그는 ‘노랑’을 우리가 ‘노란 무엇’이라고 사용하듯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직시적 정의를 주나, 정의된 표현은 달리 사용한다. 이러므로 그의 틀린 사용은 자기의 바른 설명에 의해 자기는 x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진술에 주어진 비판적 지지를 물리칠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 설명을 실제로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함을 명시할 것이다. 이제 이런 한계를 극복할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기술의 방법으로 들어가 보자.
3. 기술의 방법
낱말의 의미를 ‘설명’으로 해명하려는 작업은 앞의 절에서 보았듯이, 실패로 끝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란 언어의 바깥에서 찾는 소위 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철학의 임무와 역할이란 모든 것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1) 언어문제에 대한 철학적 맥락
언어철학의 영역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한 말을 저 사람이 알아듣는 것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지으면서 서로 말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듯, 언어철학자들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고 꿈꾸는 것은 전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철학적 문제는 이런 형식을 갖는다: ‘나는 내 길을 몰라.’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질적 언어 용법을 방해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그것을 기술만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토대도 제공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사를 그대로 둔다.
여기서 ‘매사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점에 대해 Phillips는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매사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일상의 언어 사용자들이 철학자들의 역할을 하라든가, 언어에 대한 그들의 사용 의미를 투표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어떤 언어 사용자들을 이해하려면, 요컨대 그들의 언어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설명과 언어 사용자가 자기의 (언어사용에 들이는) 신념에 제공하는 설명과는 동일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 신자가 기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을 경우, 그는 기도를 정의한 구절을 외우든가, 자기가 사용하는 기도문을 욀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기도라고 하는 <종류>의 활동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지, 기도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일상용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 신자는, 기도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 그와의 대화, 죄의 고백, 감사, 혹은 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 등등의 정의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가 기도 시에 행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요구하는 것은 기도가 도대체 일상적인 말로 설명해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며, 이 경우 신자가 자기의 기도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그는 더 이상 갈 길을 잃는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 행위에 대해 비종교적 설명을, 다시 말해, 기도 의미의 어떤 지시를 기도가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람에게 제공할 철학적 혹은 개념적 설명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며, 이럴 경우 그는 적절한 설명을 마련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이런 실패는 비단 종교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 사용자, 심지어 과학자들조차도 흔히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신자들의 말과 행동에 주목한다면, 철학자들은 무엇을 발견할까? 그들의 말과 행동이 모순된 언술로 엮여지는 것을 발견하는데도 이를 참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예를 들어, 한 신자의 자식은 그 신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맥락에서는 다같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부자 모녀간의 혈통이 있음에도 ‘형제자매’로 통칭하는 것은 모순적 언술이다. 이럴 때 그런 진술의 바른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Malcolm은 일찍이 기존의 ‘신존재 증명’의 부당함을 과학의 존재론적 입장에서 Anselmus를 비판한 기존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을 향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서 비판하고 있다. 우선 후자의 주장을 보자: ‘그리고 분명히 이 최대 가능자가 너무나 참되게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존재자로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우월한 것도 그러하다. 따라서 보다 더 큰 것이 감지될 수 없는 것이 비존재로 생각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고의 최고 대상이면서 최고가 아니어야 한다 ―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보다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너무나 참되게 있으므로 비존재로 생각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여기에 대해 말콤은 안셀무스의 논증을 현대적 의미로 고친다. 그는 우리가 사실상 하나님을 그의 존재를 위해 자기와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혹은 다른 존재나 상황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방법을 썼다. 이제 말콤은 지적하기를, 많은 철학자들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위에서 언급된 속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여전히 실상은 그것들을 소지하는 존재가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어하리라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말콤은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부터, 그가 존재했다면, 그가 단지 시간의 지속을 가졌지 영원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결론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얼마나 오래 존재했는가?, 다음 주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그런 질문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나 불합리하다. 우리의 그에 대한 통상적 개념에 따르면, 그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리고 영원성은 끝없는 시간의 무한히 아니다. 영원을 무엇에 돌리는 것은 그것이 시간의 지속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의미하는 모든 문장들을 무의미하게 배제시키는 것이다. 한 사물이 지속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적 사실일 뿐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지속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끝없는 지속을 가진다면, 그것이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이 그것을 존재하기를 멈추게 야기 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의미 있을 것이다. 끝없는 지속을 가진 존재는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제한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파악되는 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무제한적 존재임이 파악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말콤은 계속해서 현대철학에 그런 영향을 끼친 칸트의 존재론적 논증 비판을 고찰한다. 칸트의 견해는 절대 필연적 존재 개념의 경우, 그것의 존재가 부인된다면, 우리는 모든 그것의 속성을 통해 사물 자체를 배척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말콤은 이런 반대가 그 주체를 존재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에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앞 논증 전체의 요점은,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감각적으로 이야기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말콤은 주장하기를, ‘대화의 주체의 종류만큼 많은 존재론적 명제들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요컨대, 시간의 개념을 통한 필연성의 의미로 해결한다:
‘시편 9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산들이 나오기 전, 심지어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와 영원성의 관념, 유대 기독교에 본질적인 관념이 표현되어 있다. 저 복잡한 사고 체계, 저 ‘말놀이’에는,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나? 여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말해야 한다. ‘이 말놀이는 행해진다!’
말콤의 존재론적 논증이 성취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신앙에 대해 물을 수 있고 없는 종류의 질문들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말콤의 논문이 종교에게 유리한 승리하고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견해로 그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말콤이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질문을 하고 싶어 할 때, 우리의 진로 상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현대 종교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말콤의 태도는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탐구의 결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소지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동의는 하나님 믿음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와 무신론자는 모두가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말놀이의 철학적 맥락은 이런 기술을 통해 우리에게 제대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기술과 사실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2) 기술과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모든 문장이란 기술들이라는 근본적 생각에 건축되어 있다. 이런 시원적 그림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가장 조야한 반성을 통해서 보면 분명 그것은 잘못인 것 같아 보인다. 사실, 한 언어는 전혀 아무런 기술을 포함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명령이나 질문 및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오류이고 사실 명백한 것이기도 하지만, 문장이란 이런 개념은 그것을 상투적으로 부닥치는 기술에 의해서는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스스로 그것에로 논증하려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그들은 이런 상투성에 대한 무지를 그렇게 철저히 논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시원적 그림을 자기 추론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을 분명한 반대에 반대해 옹호하려고 더 완벽한 문장-의미에 대한 설명을 다듬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원적 그림에 대한 한 변호 노선은 문장들이란 상이한 용법들을 갖고 있는 것을 받아들여, 이것을 그 문장들이 상이한 사실들의 기술이라는 사실로 돌리는 것이다. 한 규칙의 표현은 실재가 무엇인지를 기술하지 않고, 실재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기술한다. 한 요청은 화자의 욕구를 기술하는데 비해, 한 질문은 때때로 화자의 무지 상태를 기술하고, 때때로는 무엇을 알려는 그의 소망을 기술한다. 한 화자의 자기 행위의 정당화는 자기 행동과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요구나 주문 사이의 연결을 기술한다.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사실들에다가 아무런 제약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문장의 용법의 차이들이란 늘 그들이 표현하는 기술의 종류의 차이를 대표할 수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 전개상의 결점을 지적하는 논평들을 하고 있다.
첫째, 문장을 기술로 부른 요점은 아마도 그것을 특별한 용법을 가지는 것으로 특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기술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용법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더 이상의 ‘기술’의 확대, 예컨대 규칙을 규범 사실들의 기술로 다룬다던가 하는 확대는 이 문제를 약화시킨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론적으로, 모든 문장들이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단일한 용법을 가졌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지각 가능한 언어에서 모든 가능한 문장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즉, 기술로 기능하지 않는 문장과 같은 그런 것이 없었다면, ‘기술’이라는 용어는 그 관습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 텐데, 이는 그것이 일상적으로 기술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을 망라할 만큼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무 문장도 기술이지 않을 수 없다라는 논지는 모든 문장은 곧 기술이라는 주장을 공허하게 만든다.
셋째, 각 문장을 기술로 취급하는 것은 한 문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에 연결을 왜곡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데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어떤 사실의 기술이라면,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자기 기술에 정보를 끌어들이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정보에 대응하면서 하는 것은, 아마도, 모두가 독립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우리가 그것에 복종하기 전에 한 명령을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하도록 명령받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 계기이다, 우리 행동이 기껏 하나의 증후인 계기를 위해서 말이다. 유사하게, 우리가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자기가 아프다는 정보를 날랐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종류의 취급은 고통을 경감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우리 행동이 그런 상황하에서 귀납적 추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설명은 발화에 대한 어떤 행동적 반응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왜곡시킨다. 이러므로, 그것은 발화에 대한 대응들이 원시적이라는 것, 즉 추론에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넷째, 기술 개념이 내적으로 타자들, 예를 들어, 속성, 진리 및 증거를 가지기 시작하고 끝낸다는 개념들과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 문장을 기술로 특징 지우는 것은 논리적 귀결을 갖는다. 모든 문장을 기술로 부르는 귀결은 역설의 부담이다. 거짓 유비는 분명한 문제를 발생시키며, 신비적 실재들이나 과정들은 그것들을 풀기 위해 존재로 호출된다. ‘ 내 방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의 모범적 진술이며, ‘언제 열렸는데?’하는 것은 거기에 응답하는 재치 있는 질문이고, 이것은 문제없는 답변을 갖고 있다. ‘내 문이 열렸다는 것은 참이다.’라는 문장과 ‘내 문은 내년에 다시 채색될 것이다 는 것은 참이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라. 이것은 특별한 진술들을 참으로 기술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언제 참이 되었는가(될 것인가)고 묻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언제 그것들은 참이 되기를 그만두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진리란 특별한 종류의 진술 속성이라고 말함으로써 대거리 할 수 있는데, 이때 이 질문은 무질서해진다. 그러나 ‘p라는 것은 참이다’가 어떤 것(참되는 것으로)을 기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그 문장이 ‘p’와 대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유사하게, 어떤 이들은 재치 있게 ‘당신 문이 열린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물을 수 있고, 이것은 문제없는 대답을 갖는다: 예컨대,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치통을 앓고 있다.’라는 문장과 ‘나는 화났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라. 이것들은 기술인가? 만약 기술이라면, 무엇을 기술하는가? 어떻게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그들이 마음 상태를 기술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진술들이 내감을 통해 참임이라는 것을 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둘을 다 비판하면서 그것들을 부분적으로 이 문장들은 기술로 기능 해야 한다는 독단적 가치를 추적한다. 우리는 내적 상태(고통, 분노, 사랑, 연민, 우울 등)의 표현들과 그것의 기술들 사이의 차이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또 동일한 유형의 문장들이 이제 이것을 위해, 저 때는 다른 것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 모든 문장을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문장을 그것의 명시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범례로 일치시키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기술들 사이의 문법적 차별성을 마음에 둘 때 혼동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상이한 용법 가운데 있는 이들 문장들은 다양한 의미의 세계 기술들 속에 있는 기술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 전부를 ‘기술들’이라는 제하에 모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이런 비판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모든 단어는 이름들이라는 요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판정과 평행을 이룬다. 우리가 한 단어를 ‘x는 ...을 기호화한다.’는 형식의 문장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p는 ... 사실을 기술한다.’는 형식의 문장을 통해 어떤 문장이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통한 문장 용법의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자체를 더 이상 다른 것과 같이 이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로 된 문장마다 무엇인가를 기술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3) 위장된 기술과 분석
앞 선 고려들은 매 문장은 그대로 어떤 사실의 기술이라는 생각에서 어떤 사람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원적 그림을 폐기시키지는 않고, 대신 그것에 대해 더 교묘한 옹호로 이끌어 갈 수 있다. 현상과는 달리 매 문장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술이다. 이것은 문장이 알맞게 변형될 때만이 분명해 진다. 분석은 그것의 참 형식을 노출시키는데 필수적이다. 언어를 기술로 결합되는 이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시원적 그림은 분석에 호소함으로써만이 입증될 수 있다.
문장 분석은 두 가지 중 한 형식을 취하여, 약간 다른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의 발전에로 이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어떤 문법 형식으로 된 주어진 문장을 동일한 용법을 가지나 기술의 형식을 지닌 동등한 문장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p라는 경우인가?’라는 문장의 질문 분석은 예를 들어 ‘그것이 p라는 경우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고 싶다.’라는 문장이 될 것이다. 유사한 번역 과정들이 매 종류의 문장에 설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분석은 그 용법이 무엇이든지 매 문장으로부터 하나의 기술로 기능 하는 무엇인가를 발췌해낼 수 있다. 분석이 드러내는 것은 상이한 용법을 가진 문장들은 일치하는 기술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중요한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은 한 문장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그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도록 한다면 옳은 것이다. 문장의 용법상의 상이점들은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말로 그것들은 화자들의 목표와 그것을 청중에게 옮기는 규약에 의존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레게는 하나의 단일한 판단 내용은 p라는 진술, p가 그 경우인가 여부의 질문, p 라는 짐작 및 p이면 q이다 라는 진술에서 전건과 공유된다고 주장했다. 주어진 판단의 내용에 대한 용법 가운데 본질적 차이는 문법 규칙을 통해 과도하게 표현된 구별되는 마음의 활동의 발생에 좌우된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핵심을 일반화했다: ‘진술은 심리적일 뿐이다... 판단, 명령 및 질문은 모두가 동일한 수준에 서 있다. 그러나 모두는 명제 형식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논리학에 흥미를 제공하는 것은 진술 안된 명제들뿐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문장의 본질적 기능은 기술하는 것, 즉 명제의 일반형식은 ‘이것은 사물이 서 있는 방식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반대하면서, 분석을 제일 형식으로 묶어,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이제 제안한다. 첫째, 어떤 주어진 문장과 그것의 기술로서 개작은 동일한 용법을 가지므로, 모든 문장을 단일한 형식으로 개작할 가능성 때문에 그것들이 단일한 용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들이 상이한 용법을 가진 정도로, 그것은 이 상이함을 감추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문장들이 단일한 방식으로 기능 한다고 주장하면, 잘못된 의미를 어떤 문법적 변형의 가능성에 갖다 붙인다.
둘째로, 매 문장을 기술로 개작할 가능성이 언어의 비기술적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 언어 이해에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생각은 하나의 착각이다. ‘그것은 p라는 경우인가’를 ‘그것이 p라는 경우인가 여부를 나는 알고 싶다.’ 혹은 ‘그것이 p라는 경우인가 여부를 모른다.’라고 개작을 고려해 보라. 이 ‘기수들’ 각각은 간접 질문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상응하는 직접 질문을 지시로써 설명되어질까? 그렇다면 그 개작은 원래 질문의 분석인가?
셋째, 매 문장이 비록 동일한 용법을 가진 기술로 개작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술들이란 궁극적인 문장 형식이라는 것도, 한 문장을 발화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늘 그 기술 개작에서 진술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도 우리는 잘못된 의미를 어떤 문법적인 변형의 가능성에 붙이고 싶어진다.
제2형식의 분석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의 개선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더욱 광범위하다. 첫째, 한 진술이 부분으로서 다른 문장의 용법과 공유되는 기술적 내용을 포함한다는 생각은 착오이다. 이 착오는 진술을 하기 위해 사용된 문장들을 ‘...라고 진술된다.’거나 ‘...라는 경우이다.’라는 연산자로 시작하는 ‘that’-절로 개작하는 가능성을 잘못 해석하는데서 비롯된다. 이 개작 가능성과는 독립적으로 한 선언문의 의미를 표현하는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하는 ’문장의 기술적 내용‘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프레게가 짐작하듯이, 한 문장의 기술적 내용은 독립적 실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술하고, 질문하고, 명령을 내리고 등등을 위해 고립적으로는 사용될 수 없는 표현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이러므로 그것은 한 문장으로 재현될 수 없다. 기술적 문장 내용을 그렇게 표현할 유일한 대안은 ‘that’ 절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지지를 받는다. 첫째, ‘that’절은 진술, 질문, 명령을 하기 위해 사용된 문장들을 연산자로 시작하는 명사절로 개작하는데서 나타난다. 둘째로, ‘that’ 절은 때때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진술하고, 명령했는가를 보고하는데 따라 사용되며, 그래서 그것은 무엇이 진술되었나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that’ 절의 의미는 어떤 문장의 의미로도 파악될 수 없다. 사실, 프레게는 이런 점을 시인하면서, ‘that’절의 지시와 그것을 포함한 문장의 의미를 일치시켰다. 이런 의미의 비동등성은 문장이 아니라 ‘that’절은 말놀이에서 수를 두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시된다. 그러므로, 한 문장의 기술적 내용을 표현하는 것은 문장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문장의 의미일 수가 없다.
둘째로, 공통적 기술 내용의 요지에 상관된 생각은 진술, 짐작, 질문, 요구, 명령 따위는 화자의 의도나 정신적 의미 행동의 지시로써만 달라진다. 이 틀린 생각의 일반적 배경은 문장들이 그 배경 사고와 일탈될 때 죽은 기호라는 개념이다. 즉 그 표현 이면과 그 발화를 동반하는 혹은 들리는 심리 상태나 과정들이 문장에 활력을 준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이해는 정신 상태라거나 문장을 말하고 듣는 부수 과정들이라는 논지에 대해 많은 반대 논증을 진척시킨다. 기호의 생명은 그 용법에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적 조망은 진술, 짐작, 명령, 예측 등등의 차별화에도 적용된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문장을 사용하는 수행 즉, 그것들이 발화되는 상황, 그것에 주어지는 설명, 그 발화를 위한 상이한 정당화, 그것에 반응하는 상이한 수행들에 있는 차이이다. 한 발화가 한 진술인가 여부는 예컨대, 그것을 참, 거짓으로 특성화시키는 언어 내에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진리 함수의 계산 내에 그것을 사용하는 가능성이 있는가 여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발화가 ‘판단하는’ 심적 활동을 수반하는가 여부에는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특별한 발화의 조건, 예를 들어 화자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거나 책을 큰 소리로 읽는가 여부에는 좌우된다. ‘불’하는 것은 여기서는 명령으로, 저기서는 보고로 기능한다는 것은 발화의 대조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경우, 예를 들어, ‘불 가져 와!’ 혹은 ‘불은 이미 켜져 있습니다.’에서 명시적이 된다. ‘진술’, ‘명령’, ‘약속’ 등의 용어들은 문장 용법의 특성화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진술했는지, 명령했는지, 혹은 약속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행동 기준이 엄연히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판정은 어떤 형식으로도 분석은 기술이 문장의 본질적 기능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법상 ‘피상적’ 차이들 배후의 깊은 통일성을 폭로함으로써는 문장이 기술이라는 시원적 그림이라는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다른 차원의 시도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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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ow Language-Games Are Described
- Shin, SangHyong -
Wittgenstein says that philosophy may in no way interfere with the actual use of language; it can in the end onl y describe it. For it cannot give it any foundation either. It leaves everything as it is.
The reason for this seems to show that philosophy is contaminated with a serious disease, which has come from 'essence' philosophy since Plato. It is therefore necessary that such a philosophy should have a therapy.
In this paper we try to show that a reasonable therapy may be given by Wittgenstein, in particular from a point of view with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he process made in PI consists of two steps: rejecting 'Explanation' and accepting 'Description.'
Despite a well-known common sense in which philosophy is the attempt to make explanations, Wittgenstein claims that in philosophizing we should not explain something but describe it. For an explanation comes to an end somewhere. And it gives us foundations from which we tend to make things something different from what they really are. Thus we have to pay attention to 'Description.'
According to Wittgenstein, to say that we describe something is to say that we have to deal with it in a philosophical context, which is not the same thing as sciences do. Philosophical contexts turn our eyes to look and see what they are, rather than what they should be; that is, realizing words and sentences in their own circumstances, we have to understand them in our ordinary language-use.
In addition, errors and mistakes, which Augustine put forward in his explanation of languages, are discovered while we look for Wittgensteinean point of view on language-games. 'Description' we mean be in this paper may be summed up in a word: "Look and See" what is happening.
[출처] 말놀이’의 기술 방법-신 상 형|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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