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르스트의 <되찾은 시간>에서 자존심이 소설 창작의 장애물임을 강조한다. 프르스트의 자존심은 라 로슈코프가 말하는 기계적인 힘이 아니라, 모순되는 두 방향으로의 충돌로서 언제나 결국 개인을 분열시키고 만다. 자존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멀어져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에게게 다가가고 다른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라고 믿으면서 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마음을 닫아버린다. 우리가 자존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우리는 자아의 심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움직임에 따라 타인에 대한 인식도 깊어진다. 어떤 깊이에 이르면 타인의 비밀과 우리 자신의 비밀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어진다. 소설가가 이 자아, 즉 각자가 뽐며 그러내는 자아보다 훨씬 진실된 자아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진다. 바로 이런 자아가 중개자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모방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심층의 자아는 보편적 한 자이인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모방의 삶을 살고 있으며 중개자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르네 지라르, 김치수. 송의경 옮김,<낭만적 소설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 2002,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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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1923년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인디애나 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 주립대학, 스탠퍼드 대학 등에서 정교수?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 문화, 문학, 사상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는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저서 역시 미국에서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의 이론과 사상은 미국 대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1947년 제르보, 샤르피에 등과 함께 아비뇽 교황청에서 '현대 회화전'을 개최하여 브라크, 샤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마티스, 몬드리안, 피카소 등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많은 화가들과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1961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비평언어와 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르트, 데리다, 골드만, 이폴리트, 라캉, 풀레, 토도로프, 베르낭 등 많은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욕망하는가 하는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진실과 소설적 진실>에서 주목한 것은 라캉처럼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규명이었다. 그는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속 인물들의 욕망을 통해, 욕망의 은폐된 허위의식을 바라본다. 소설속의 인물도, 그 인물을 창작하는 주체인 작가도, 그리고 그 소설을 읽는 독자도 모방의 욕망을 지닌다고 본 것이다. 즉 지라르가 바라본 욕망이란 욕망의 주체, 대상, 중개자가 각각 꼭지점을 이루는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욕망은 원하는 대상으로부터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 중개자(모델 또는 라이벌)에 의해 간접적으로 잉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타자에 대한 모방적 욕망이라고바라본 것은 지라르가 최초의 감식안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신화나 비극, 세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교묘하게 감춰진 질투나 선망(envy)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사적 갈등구조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삼각형 구조를 갖는 모방적 욕망은 모방자와 모델의 경쟁적 관계에 따라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로 구별된다. 가령 돈 키호테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통해 이상적 기사의 전형을 동경하며, 산초 판사는 주인을 통해 자신의 섬(왕국)을 꿈꾼다. 이는 외면적 간접화의 전형적인 예로서, 주체와 모델 사이의 거리가 불변하며 그들 사이에 어떤 교환도 없는 경우이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도 지방 부르주아들을 통해 파리 상류사회를 동경하지만, 이들과 감히 경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면적 간접화의 한 예로 꼽힌다.
그러나 내면적 간접화의 경우, 모방자와 중개자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는 중개자가 적극적으로 욕망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레날과 발르노가 쥘리앙의 가정교사 영입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인 쥘리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차지하는 것이 상대보다 사회적 우위를 점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개자는 부단히 모방자에게 ‘나를 따라 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정작 모방자가 중개자와의 차이를 없애려고 경쟁적으로 모방할 경우, 중개자인 모델은 갑자기 ‘나를 따라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게임의 규칙을 뒤엎는다. 이때 모방자는 그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심리적 분열상황에 빠지는데,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중개자(모델)가 설치한 장애물에 크게 절망하고 증오하지만 내심 그에 대한 선망은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강렬한 모방의 대상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치게’ 된다. 궁극적으로 모델이 모방자에게 대상에 대한 접근을 금지하는 한, 경쟁적 모방 욕망은 극도의 숭배와 증오심, 더 나아가 폭력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니체와의 진지한 대화를 펼치는 소설 ‘악령’에서 스타브로긴과 키릴로프는 타인에 대한 숭배와 증오심의 절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욕망과 증오의 화신인 스타브로긴은 타자들을 노예화하는 절대적인 주인으로 군림함으로써, 극도의 오만과 자기분열로 파멸한다. 그와 달리 키릴로프는 예수의 희생을 모방하고 니체적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자살하는 대목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인가? 유럽 낭만주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스스로 욕망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욕망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의 욕망은 독립적이고 오만한 겉모습과는 달리 매개되고 모방된 욕망이며, 절대화된 타자를 간절히 열망하는 허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아라는 제단 위에 세상을 제물로’ 바치려 하지만, 정작 숭배하는 대상은 타자이기 때문에 공전한다. 낭만적 열정도 알고 보면, 상대방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경쟁적 허영심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한 전쟁’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전염성이 강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폭로하고 주체와 중개자의 ‘주인-노예’의 상태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진실의 표현방식이 된다.
지라르의 매개적 욕망이론의 가설은 야심차다.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욕망구조를 포괄하는 매우 간단하고 경제적인 욕망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허나 쟁점은, 욕망은 경쟁적 모방의 구성물이라는 지라르의 주장은, 욕망이란 매개 없이 리비도나 충동, 이드와 무의식에 의해 기능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이란 무의식이 아니라 너무나 또렷한 (은폐된)이성의 교묘한 전략이며, 부자간의 오이디푸스적 성적 욕망의 갈등구조 가설도 허구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가족적 차원에서의 삼각형 욕망의 한 부분일 뿐이므로, 오이디푸스 신화가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확대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집단적인 무의식이나 광기는 언제나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면죄부를 도덕적 딜레마없이 주기 때문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보여주는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다소 엄격하고 도식적이며 복음주의적 도덕론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뤼시앙 골드만 류의 유물론적 문학사회학과 달리, 그는 중개자가 휘두르는 ‘형이상학적 위력’을 낭만적 소설의 주인공들이 종교적인 수행과 구원의 방식으로 초월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자에 대한 모방적 욕망이 야기하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는 유일한 대안은 ‘속죄양’인 예수를 모방하는 길뿐이라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이런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문신록적, 혹은 유물론적 입장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정치한 논증력과 탄탄한 문체는 독서의 쾌락을 보증하며, 인류학과 정신분석학,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면서 담론의 진경(珍景)을 보여준다.
르네 지라르의 또 다른 저서는 인간의 욕망과 구조를 밝혀내려는 작업의 결실인 『폭력과 성스러움』이 있다. 그밖에도 그는 『지하실의 비평』(Critique dans un souterrain, 1976),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온 것』, 『이중규제』(To Double Business Bound:Essays on Literature, Mimesis and Anthropology, 1978), 『희생양』, 『옛 사람들이 걸어간 사악한 길』(La Route antique des hommes pervers, 1985),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떨어지는 사탄을 보았노라』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문학작품 분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폭력과 구원에 관한 주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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