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나뭇잎숨결 2013. 1. 3. 11:13

슈테판 츠바이크 , 위로하는 정신

뛰어난 소설가이자 전기작가로 널리 알려진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남다른 시적 감수성을 보였던 츠바이크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호프만슈탈, 릴케 등에게서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빈과 베를린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1901년 첫 시집 『은빛 현』을 출간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소설, 시, 희곡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원입대하여 군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는데, 이 시기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영향으로 반전(反戰)에 대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에세이 『세 거장』을 비롯하여 『악마와의 투쟁』 『세 작가의 인생』 『로맹 롤랑』 등 유명 작가들에 대한 평전을 출간했고,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로 전기 『조제프 푸셰』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등을 집필하며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작품을 많이 선보였는데, 「낯선 여인의 편지」 『아모크』 『연민』 등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은 뛰어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가 자신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압박해오자 1934년 런던으로 피신해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고, 이후 유럽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했다. 1941년 자전적 회고록이자 자신의 삶을 축으로 하여 유럽의 문화사를 기록한 작품 『어제의 세계』를 출간하고, 소설 「체스 이야기」를 완성했다.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자멸로 우울증을 겪던 츠바이크는 1942년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부인과 함께 약물 과다복용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역자 서문 츠바이크가 남긴 유언
머리말 몽테뉴에 대한 회고

1 평민에서 귀족으로
: 너그럽고도 넉넉한 교육방식은 몽테뉴의 특별한 영혼의 발전에 결정적인 행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교육방식이 제때 끝난 것 또한 행운이었다.

2 몽테뉴가 된 몽테뉴
: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작별이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했다.

3 창작의 10년
: 그는 학자처럼 정확하거나, 작가처럼 독창적이거나, 시인처럼 언어가 뛰어나야 할 의무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문필가가 되었다.

4 자아를 찾아서
: 모든 것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찾다.

5 자신만의 보루 지키기
: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6 여행
: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7 마지막 나날들
: 모든 경험을 탐색한 이 사람은 자기 삶의 마지막 국면, 즉 죽음을 알아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

세계적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사망 70주기, 그의 마지막 유작


“모든 나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원컨대, 친구 여러분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빕니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
위와 같은 작별 인사를 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흘렀다. 한때 인문주의 문화의 절정을 맛보았으나 그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감성적이고 섬세했던 교양인. 오스트리아에서 인문주의의 절정을 한껏 만끽했던 그는 양차 대전과 나치를 겪으며 자신이 믿었던 유럽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그의 심리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 있다.

도망쳐라, 너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너의 작업 속으로. 단지 네가 너 자신인 곳으로, 한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이런 지옥 같은 도박의 대상도 아닌 곳으로 도망쳐라. 그곳만이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네가 가진 얼마간의 오성이 아직 합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글은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 일촉즉발의 긴장된 분위기에서 쓴 것이다. 이 글을 보면 끝까지 합리적 이성을 갖춘 교양인으로 남고자 했던 츠바이크의 열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위안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에세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다.

왜 몽테뉴인가

츠바이크는 20세기 초 청년 시절에 오스트리아에서 『수상록』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었지만 거의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이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되는 강렬한 감정”이 없어서 자기 인생에는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 1881년에 태어난 츠바이크는 자신이 누려온 인류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가 지속되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퇴보하다니? 문명사회에 위기가 닥쳤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정신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해야 할 필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에게 “몽테뉴는 이미 오래전에 끊어진 사슬을 덜거덕거리면서 무의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츠바이크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희망으로 가득한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으나 그 세계의 퇴화를 목격했던 몽테뉴처럼, 츠바이크도 가장 운이 좋은 나라에서 가장 좋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의 세계는 곧 산산이 부서졌다.
츠바이크는 제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집필에 몰두했다. 가진 자료를 모두 고국에 두고 왔으므로 변변한 자료도 없었지만, 써야 했다.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그는 『수상록』을 다시 읽었다. 청춘 시절에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느꼈던 그 책이 이제 자신만을 위해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몽테뉴에 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츠바이크의, 츠바이크에 의한, 츠바이크를 위한 몽테뉴 평전

『위로하는 정신』은 몽테뉴와 츠바이크 두 사람의 유사한 체험을 거리낌 없이 세상에 알리는, 매우 사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어느 글에서 2차 대전이나 프랑스 내전과 같은 시기에는 보통 사람이 광신자들의 강박 관념에 희생되며, 아무리 진실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인간성을 온전히 유지할 것인가?”라는 물음보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착하게 된다고 썼다. 그러면서 몽테뉴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이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나타난다고 보았다. 몽테뉴의 가치를 알려면 벌거벗은 ‘나’, 즉 단순한 자신의 실존 이외에는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연결 고리가 망가진 세상을 복구할 수 있는 해법을 개개인이 ‘나’로 시작하는 각자의 연결 고리로 되돌아가서 현실 세계에 발을 붙이는 기술부터 시작해서 ‘사는 법’을 배우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면을 부지런히 살핀다. 누구나 자기 앞만 쳐다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내게는 나 자신에 관한 일 이외에는 상관할 일이 없다. 나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 자신을 살펴보고, 나 자신을 음미한다. …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뒹군다.”
츠바이크는 이런 몽테뉴를 읽으며 깊은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그에게 진정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아주 사적인 전기 『위로하는 정신』을 썼다.

그리고 우리가 츠바이크의 몽테뉴를 통해 얻는 것

지금은 절체절명의 자본주의 위기 상황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전에 없던 침체와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여러 가지를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절정과 나락을 모두 겪어버린 츠바이크는 역시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한 몽테뉴가 말한 것처럼 자기 내면으로 온전히 돌아가서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임으로써 큰 위안을 얻었다. 이는 지금 한국의 독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성공과 성장에 집착하며 안달복달하는 우리에게 츠바이크는 몽테뉴를 통해 실패와 좌절의 의미, 고귀한 자유의 가치, 무엇보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야 함을 나지막이 일깨운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오롯이 지켜내는 것만큼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체념할 때는 체념하자. 물러설 때는 물러서자. 당신에겐 더 귀한 가치, 자기 내면의 자유가 있지 않은가.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조금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대수인가?” 이미 그 스스로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가 된 츠바이크가 힘겨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프랑스 작가·철학자 | 브리태니커

 
태어난 때 1533. 2. 28
죽은 때 1592. 9. 13
죽은 곳 몽테뉴 성.
소속 국가 프랑스
직업 작가·철학자
1533. 2. 28 프랑스 보르도 근처 몽테뉴 성~ 1592. 9. 13 몽테뉴 성.

프랑스의 사상가·문필가.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의 와중에서 종교에 대한 관용을 지지했고,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했다.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또는 좀더 정확히는 그러한 견해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기 위해 에세(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수상록 Essais〉은 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과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하고 있다.

젊은시절과 작품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는 몽테뉴 성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포도주와 생선 장사로 치부한 그의 증조부가 거기에 딸린 귀족 칭호와 함께 사들인 영지였다. 아버지 피에르 에캥은 부유한 상인으로 한때 보르도 시장을 역임했으며, 어머니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계 유대인 집안의 딸이었다. 몽테뉴는 살아남은 8남매 가운데 맏이었고, 신교도가 된 남동생과 여동생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 미셸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당시 지식인에게 필수적인 라틴어 교습을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게 했다. 덕분에 몽테뉴는 6세 때 라틴 고전을 읽을 정도로 라틴어에 유창할 수 있었으며, 그때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보르도의 기옌 중학교에서 7년을 보낸 뒤, 툴루즈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1554년부터 페리괴에 신설된 조세재판소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 재판소가 1557년에 폐지되고 보르도 고등법원에 병합되는 바람에 그곳으로 옮겨 1570년까지 심사관으로 일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몽테뉴는 업무에는 별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 경험을 통하여 그는 법률 운용에 숱한 모순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시절에 그는 역시 심사관으로 일하던 에티엔 드 라 보에티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몽테뉴보다 약간 손위였던 라 보에티는 언어학자이자 문필가로서 가톨릭 금욕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지녔던 반면, 몽테뉴는 아직도 자신에게 걸맞는 역할을 모색중인 재능있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독특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정을 나누었으며, 이런 교류는 심원(深遠)한 인간관계에 대한 몽테뉴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라 보에티는 몽테뉴와 우정을 맺은 지 약 4년(혹은 6년) 뒤에 이질에 걸려 요절했으며, 친구의 죽음은 몽테뉴에게 평생 가시지 않는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만약에 라 보에티와의 우정이 좀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몽테뉴는 친구를 읽은 슬픔을 달래려고 약 2년간 숱한 연애를 했으며, 1565년 7월에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의 딸인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6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레오노르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었다. 그에게 결혼은 사회적 의무였을 뿐 깊은 인간적 유대를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569년에 출판된 몽테뉴의 첫번째 책은 스페인 출신의 의사이자 신학자인 레몽 드 세봉의 1,000쪽 분량의 라틴어 저서 〈자연신학〉을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창조라는 관점에서 끌어낸 인간과 신의 유사점을 통해 신의 존재와 본성을 입증하고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문은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원저자의 딱딱한 문체를 다듬고 서문에 나오는 주장들을 과감히 삭제한 몽테뉴의 번역본은 한 번도 금지처분을 받지 않았다. 1568년 6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미셸은 몽테뉴의 영주가 되어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았다. 2년 뒤 그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고등법원 심사관 자리를 팔고 라 보에티의 저작 대부분을 펴낸 뒤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성탑 3층에 있는 서재에 틀어박혀 독서와 명상에 잠기고, 라틴 고전을 비롯한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지냈다.

〈수상록〉 제1·2권

그는 그후 9년(1571~80) 동안 주로 〈수상록〉 제1권과 제2권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파리 궁정에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완전히 은둔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1571년에는 성 미셸 훈위를 받았고, 1573년에는 가톨릭교도인 앙리 3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1577년에는 신교도 지도자인 나바라 왕 엔리케(나중에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또한 1572~76년에는 나바라 왕 엔리케와 기즈 공 앙리의 불화를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나바라 왕 엔리케의 측근이라는 이유 때문에 실패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과 종교적 대립에서 비롯된 이 갈등은 결국 신·구교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하여 몽테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580년에 출판된 〈수상록〉 제1권과 제2권은 총 94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은 여러 가지 일화에 짤막한 결론을 덧붙인 것으로 장의 길이가 짧고 비교적 비개인적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몽테뉴를 사로잡고 있던 문제들, 예를 들면 모순과 야망, 고통과 죽음의 문제들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때까지 라 보에티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몽테뉴는 인생을 고난에 에워싸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런 고난에 저항하기 위해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기로 결심한다.

1574~75년에 쓴 〈수상록〉은 인생의 제반 문제에 대한 금욕주의적 해결책이 점점 신중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습에 관하여〉에서 몽테뉴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가사상태에 빠졌던 경험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던 것을 묘사하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 미리부터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절제에 관하여〉에서는 고통에 대해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으로 맞서는 것이 절제나 지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세아 섬의 관습〉에서는 자살을 옹호하는 고대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자살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겁하며 부자연스러운 행위라고 공격한다. 그리하여 그는 금욕주의를 비롯한 모든 독단론에 맞서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576년에 집필한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 Apology for Raymond Sebond〉이라는 글(제2권 제12장)이다. 〈수상록〉 중 다른 것에 비해 특히 긴 이 장은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해석하는 데 가장 난점이 많은 글이다. 이 글에서 몽테뉴는 그리스의 철학자 엘리스의 회의주의를 빌려 인간정신이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 유명한 명제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변명〉은 6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뒤의 5부분을 세봉의 저술에 대한 독단론적 비판들에 다시금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선, 첫부분에서 그는 세봉과 그의 저술에 대한 2가지 주요한 비판, 즉 종교에 있어서 이성은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견해와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스봉의 이론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2번째 부분에서는 동물이 사실상 인간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3번째 부분에서는 인간은 신도 인간도 알지 못하므로 결국 어떤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음을 입증한다. 4번째 부분에서는 다음에 나올 논의가 적의 무기(이성)를 빼앗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마지막 수단이라고 밝히고, 5번째 부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인 만큼 변화도 존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 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스토아 철학이 아니라 오직 신만이 인간을 인간성보다 더 높이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레몽 세봉을 위한 변명〉은 제목과 내용이 어긋나기 때문에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세봉의 학설을 변호한다는 것은 구실일 뿐 세봉을 다룬 것은 전체의 1/10도 되지 않으며, 몽테뉴는 여기서 대부분 자기 고유의 사상을 전개한다. 게다가 세봉을 다룰 때도 변호하기보다는 반박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 뵈브는 이것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은근한 공격으로 보았고, 또 어떤 비평가는 몽테뉴가 세봉을 옹호하는 동안에도 그를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그럴 듯한 견해는 몽테뉴가 세봉에 관해서는 별 관심도 없이 인간의 오만과 이성의 허영에 관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 이 〈변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몽테뉴는 인간의 지식을 공격했지만, 자아에 대한 인식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변명〉은 되풀이하여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강요하여 현명해져야 한다"는 몽테뉴의 말은 자아인식이 가능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아인식이 지식과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변명〉의 회의주의는 몽테뉴를 독단적인 철학에서 자아연구로 이끌어간다. 1578~80년의 〈수상록〉에서는 낙천적 견해가 주조를 이루는데, 이는 몽테뉴가 인간의 한계에서 인간의 재능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는 지적으로는 이미 〈변명〉에서 이전 사상가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해 있었지만, 이를 실천하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실천은 1578년 여름에 신장결석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지병이기도 했던 이 병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나타날 것을 전부터 두려워해왔던 그는 그 두려움에 비하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며 어느 정도 다스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다. 교육에 대한 견해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교육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곧 〈아동교육에 관하여〉에서 그는 좋은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를 논한다. 그에 의하면 단순히 기억 속에 마구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선악에 대한 판단력을 키움으로써 도덕적으로 독립된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이야말로 좋은 교육이라는 것이다.

여행

〈수상록〉 제1·2권이 출판되자, 그는 국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노르망디로 앙리 3세를 찾아가 저서를 바쳤다. 그런 다음 관광과 담석증 치료를 위한 온천욕을 목적으로 15개월 동안 프랑스·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여행했는데, 이때 쓴 기행문은 그가 죽은 뒤인 1774년에 출판되었다.

보르도 시장

이탈리아의 라빌라 온천에 머물고 있던 1581년 9월에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앙리 3세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는 결국 수락했다. 첫번째 임기(1581~83)는 무사히 지났으나, 2번째 임기는 그렇지 못했다. 보르도 시는 신성동맹에 가담해 있었고 신교도 군대는 시 외곽까지 진격하여,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이 임박해 있었다. 몽테뉴는 초연한 입장을 고수했으나 그의 편지들은 그가 매우 기민하고 적절하게 대처했음을 보여준다. 시장 임기가 끝날 무렵인 1585년 7월에 보르도 시를 떠나 있던 몽테뉴는 임지로 돌아가는 대신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1586년 7월, 몽테뉴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스티용이 신성동맹 군대의 포위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고, 몽테뉴는 양쪽 진영의 극단주의자들로부터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흑사병이 재발하여 몽테뉴의 영지까지 퍼졌으므로, 6개월 동안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생브리스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여 중재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587년말에 그는 나바라 왕의 밀서를 가지고 파리로 가서 앙리 3세를 만났는데, 나바라 왕과 국왕을 연합하여 신성동맹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자 그는 신·구교 양쪽의 의심을 샀으며, 그결과 이듬해 여름에는 신교도세력과 신성동맹 세력에 차례로 체포되어 잠깐씩 옥고를 치렀다.

〈수상록〉 제3권

1588년에 파리에 머무는 동안, 몽테뉴는 〈수상록〉을 증보해서 제5판을 출판하는 동시에 별도의 13장으로 이루어진 제3권 초판을 펴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신뢰와 유대감은 첫번째 〈수상록〉이 호평을 받은 일, 외국인들과 맺은 우호관계, 보르도 시장으로 2번이나 선출된 일, 그리고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영웅적 행동을 보여준 농부들에게 느낀 애정 등으로 인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제3권은 첫 문장부터 인류와 개인에 대한 이 새로운 유대감을 선언하며, 그의 자화상은 인류의 자화상으로 확대된다.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그는 더욱 솔직해지고 공적 활동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성찰이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그 자신을 향해 쏠리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아연구야말로 인간 본성을 배울 수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궁극적으로는 모랄리스트였으며, 판단하기에 앞서 이해하려고 애썼고, 인간의 가장 높은 지혜와 행복은 남과 자신에 대한 의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공적 활동은 화려했지만 사생활은 엄격했으니, 사생활에서는 겉치레가 아니라 미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생활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자신의 타고난 조건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성찰과 자제를 통하여 정신적 독립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므로 항상 자신의 심판관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나를 심판하는 나 자신의 법률과 법정을 갖고 있다. 나는 어느 곳보다도 자주 그 법정에 출두한다"고 몽테뉴는 말했다.

결국 몽테뉴는 인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한 유혹이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기개선의 전제 조건이다. 몽테뉴의 궁극목표는 진리와 조화이다. 몽테뉴는 질병을 통해 고통을 쾌락과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받아들이고 고통과 쾌락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뻐하셨듯이 나는 삶을 사랑하고 삶을 즐긴다"고 그는 말한다. 〈수상록〉의 마지막 부분은 삶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 찬가이다.

말년

몽테뉴의 마지막 4년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진 바가 없다. 1588년초에 몽테뉴는 그의 열렬한 숭배자인 마리 드 구르네를 만났는데, 마리는 나중에 그의 양녀가 되어 그의 저서를 관리하는 유언집행자가 되었다. 국왕이 기즈 공 앙리의 반란을 피해 파리에서 도망치자, 그는 왕을 따라 샤르트르와 루앙으로 갔다. 그는 블루아에서 열린 삼부회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앙리 3세는 기즈 공 앙리를 죽였다. 1588년말에 몽테뉴는 남부로 돌아가, 보르도가 앙리 3세에게 계속 충성을 바치고 앙리 3세가 암살당한(1589) 뒤에는 앙리 4세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죽기 며칠 전부터 편모농양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1592년 9월 13일, 그는 59세의 나이로 자기 방에서 미사를 참배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가 1588년 이후에 쓴 〈수상록〉은 그의 사색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더욱 대담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내전의 잔인함과 위선을 공격하고, 신교도뿐 아니라 가톨릭교도도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는 비록 종교와 법률에 자극받은 미덕이라 해도 우리 자신의 미덕이 아니면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금욕주의에 대한 거부감도 더욱 날카로워진다. 〈변명〉에서는 영혼의 자의성, 즉 감각적 인식에 형태와 색깔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자유는 인간의 무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지만, 이제 그것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예찬된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불행은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도 완전히 바뀐다. 한때는 죽음을 인생의 목표라고 했지만, 이제 죽음은 삶의 목적이 아닌 삶의 끝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또한 고통도 항상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쾌락을 제거하는 것이고, 결국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평가

몽테뉴가 죽은 뒤 4세기 동안, 그에 대한 견해는 그 자신만큼이나 많이 변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자화상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금욕주의적 경구를 존경했다. 17세기 사람들은 그에게서 주로 회의주의적이고 '정직한 인간'을 보았고, 장 자크 루소와 후기 낭만파들은 그의 자화상과 자유분방한 문체에 매혹되었다. 19세기의 생트 뵈브는 자연스럽고 독자적인 그의 도덕성에 감동을 받았다. 20세기 독자들은 이 도덕성과 그의 자화상이 갖는 보편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