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복음을 쓴 요한 사도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다른 3명의 복음사가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해서만 기록한 반면,
성 요한 사도는 홀로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이라는 높은 점을 주안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새보다 더높이 나는 독수리에 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 요한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해 특별히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 성서에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요한 13, 23)고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요한은 이전에 성 요한 세례자의 열심한 제자요,
다른 유다인들과 같이 구세주의 임하심을 하루를 천추와 같이 고대했다.
그런데 하루는 스승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십니다"(요한 1, 29)하고 가리키며
구세주이심을 깨우쳐 주니 요한은 즉시 베드로와 그동생 안드레아와 같이
최초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처음 주님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찾아간 시각도 잊지않고
"때는 이미 오후 네 시경이었다"(요한 1, 39)고 기록했다.
요한은 사도들 중에서도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이 주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분이다.
즉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켰을 때와 타볼 산에서 모습이 변하셨을때에 그 참관자가
위의 세 명이었다는 점으로도 능히 추측된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와같은 각별한 애호에 감사하는 정에서 알뜰히 주님을 사랑하고 받들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동네에서 냉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야고보와 같이 화를 내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 54)하고
극도록 심한 말을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즉시 책망하시며 "당신들은 어떠한 영에 속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루가 9, 56)하고
타일러 주셨지만, 그래도 그들의 당신께 대한 사랑의 정은 기꺼이 여겼으리라.
또 이 이야기 외에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네르게스(Boanerges),
즉 천둥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신 일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얼핏 보기에 여성다운 부드러운 인물같은 상상이 들지만
주님께서 "당신들은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하셨을 때에,
그들 형제는 서슴지 않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의 수난이 시작되자 야고보는 실망해 도망쳤고, 베드로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해 큰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사도들도 모두 슬금슬금 다 꽁무니를 빼는 틈에
오직 요한 만은 머물러 있어 성모와 같이 갈바리아 산상에서 예수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산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는 전에 타볼산에서 목격한 바와는 아주 판이한 장면이었다.
참혹하게 된 예수의 비통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털끝만큼도 동정심이 없는 악당들의 조롱하는 소리에 요한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이 구속사업에 필요함을 알았고,
자신도 마음의 고통을 참음으로써 주님과 같이 희생으로 바쳤다.
이 같은 충성을 주님께서 등한히 하실리는 만무했다.
주님께서는 그 보답으로 성스러운 성모의 장래를 그에게 맡기셨다.
요한은 이 중임을 얼마나 명예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인가!
그 날부터 그는 성모를 자기 집에 모시고 정성껏 돌봐 드렸다.
그가 저술한 성서가 다른 저자와 그 취지에 있어 매우 차이가 있고,
예수의 신성을 역력히 드러내는 빛나는 주옥편이 된 것은 성령의 감도도 감도려니와,
그가 평소 성모를 곁에 모시고 섬기며 종종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께서는 유서 깊은 갈바리아를 잠시도 잊지 못하시고 여생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셨는데,
요한은 그녀의 임종 때까지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성모를 섬겼고,
44년 헤로데 아그리파에게 박해를 당해, 사도들이 각국으로 흩어질 때 그도 에페소로 피했으며
그 곳 소아시아의 각 교회,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이아 등 일곱 교회를 지도했다.
95년에 제2의 네로라고 불리는 도미시아노의 박해가 시작되자, 요한도 마침내 잡혀 파트모스 섬에
유형 당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이 직접 계시로 붓을 들어 저 유명한 묵시록을 저술했으며
교회의 장래 승리를 예언해 고통을 받는 신자들에게 위안과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96년, 도미시아노가 암살되자 이어 왕위에 오른 넬바는 추방된 신자를 전부 소환했으므로, 요
한도 그리운 에페소의 땅을 다시 디딜 수가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매우 고령이었다. 그러라 유일하게 생존한 사도로서 힘껏 신자들을 가르쳤다.
너무 노쇠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는 신자들에게 부축을 받아 성당에 갔고,
"아들아, 서로 사랑하라!"하며 교훈했다.
한결같이 같은 말만 거듭해 신자들이 싫증을 내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가 그 귀중한 성서를 저술한 것은 1세기 말 경이요, 그노시스 이단 및 예수의 신성에 대해
구구한 이설이 떠돌 때였다.
그래서 그의 저술의 목적은 앞서 말한 그 이설에 대항해 올바른 것을 가르치기 위한,즉
구세주께서는 위격(位格)으로 하느님이심을 명백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 맡은 사명을 충분히 채운 사도 성 요한은 트라야노 황제 시대에
백 살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총애 깊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John the Evangelist with the Poisoned Cup-CANO, Alon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