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상관없이 나는 청춘이다. 나는 청춘에만 끌린다. 여기서 청춘은 물론 나이의 청춘만 의미하지 않는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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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미쁘고 가혹하다. 분별의 지혜는 빈약하고 혈기는 뻗쳐오르기 때문이다. 꿈은 멀고 현실은 척박해서 괴롭다. 실패는 잦고 방황은 길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누가 청춘을 두려워하랴.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고 노래한 것도 청춘이다. 주리고 목마를 때조차 청춘은 이루지 못한 꿈들 때문에 빛나고, 순수한 활력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움켜쥔다. 실패와 방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 바다를 향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게 청춘이다.
시내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기본요금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곳, 그래서 택시미터기가 필요 없는 작은 도시 김천의 빵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에서 제 청춘의 갈피에 깊이 새겨진 문장들을 고요히 건져낸다. 지나간 청춘에의 탐사여행은 내면에 화인처럼 남은 몇 개의 문장에서 시작한다. 그것들은 내 안에 와서 머물다 사라진 것들이다. 김광석, 연탄 백장, 내셔날 카세트, 어머니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등단 소식, 만화방, 자전거로 달린 7번 국도, 하이쿠와 당시, 병원 대합실 의자에서의 한뎃잠, 비릿한 연애들, 랭보 시집과 같은 청춘의 기호들로 반짝거린다.
백만마리 황금의 새들아, 어디에서 잠을 자니?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던 빛을 따라 주름져가더라도, 어둠을 지나지 않으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 김연수의 문장들을 읽을 때 문득 마음이 베인 듯 아프고 가슴의 금(琴)이 홀로 운 것은 그 청춘시절이 내 청춘과 여러 모로 겹쳐지는 까닭이다. 청춘은 충분히 살고도 넘치는 잉여의 혈기로 다시 권태와 씨름하는, 누구나 두 번 겪을 수 없는 끔찍하면서도 미쁜 시절이다.
- 장석주
내가 삶이라는 것은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때다. 그게 사랑이든 복권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기다리는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효율성과 경제성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삶이라는 건 대단히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다. (33쪽)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67쪽)
그러니까 사랑이 막 끝났을 즈음이었다. 한 사람을 향해서만 쏟아졌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마음 속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채 처리하지 못한 감정이 넘쳐나게 되자,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활동은 정지됐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일도, 혹은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듣는 일도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 (136쪽)
중생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관음보살의 눈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윤리 시간에 배웠듯 측은해서가 아니라, 관음보살 자신의 몸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마음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몸에서 비롯한 눈물이었다 (139쪽)
사실은 지금도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사춘기. (191쪽)
누군가가 '바다다'라고 외쳤다. 떠들던 아이들이 모두 왼쪽으로 몰려갔다. 정말 바다였다. 바다라는 것이 그런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기차통로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가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라고 갖추고 볼 것을. (211쪽)
나이 서른다섯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체 인생을 70으로 봤을 때, 전반생과 후반생의 기점이 되는 나이, 풀 코스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하프 코스는 완주한 셈이다. 올해 서른다섯을 맞이하는 김연수는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여섯 권의 소설책을 펴냈으며 2003년에는 소설집『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인으로서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설 쓰기와 함께 마라톤에도 열심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이처럼 지치지 않고 꾸준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제임스 제부사 샤논 (1862-1923)
"청춘springtime" 1896년作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깊은 밤, 가끔 누워서 창문으로 스며드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게 불분명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살아온 절반의 인생도 흐릿해질 때가 많다. 하물며 살아갈 인생이란." (17p)
작가의 젊은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 .........작가에게 있어서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어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작가는 유년의 추억들, 성장통을 앓았던 청년기, 그리고 글을 쓰게 된 계기 등의 자전적 이야기들을 이백과 두보의 시, 이덕무와 이용휴의 산문, 이시바시 히데노의 하이쿠, 김광석의 노랫말 등 젊은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문장들과 함께 들려준다.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의 삶 속으로 선명하게 육박해 들어와 힘차게 공명한 문장들이 소개되고 있다. 인용된 문장들은 젊은날의 서사를 끌어내기도 하고, 마무리를 대신하기도 하는 가운데, 애잔함과 여운을 전해주면서 보다 정제되고 열린 공감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작가는 젊은날 이백의 시 「장진주」를 읽다가 '君不見' 그 세 글자에 그만 눈이 트이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귓전을 떠나지 않는 그 말의 절실함을 좇아 자전거를 타고 7번국도를 여행했던 일화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작가의 내면 풍경이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고. --------서른다섯의 작가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어떤 모습일까. 관절염 치료를 위해 서울 큰 병원에 왔다 돌아가는 어머니를 배웅하면서, 두 돌 된 딸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여름날을 만끽하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들어진 고향 거리를 걸으면서, 작가는 자신을 키워온 것과 사라져간 것들을 두루 추억한다.
작가에게는 고향집 지붕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나는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궁금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천문학과를 지망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영문학과에 진학하게 됐고, 남들보다 일찍 군복무를 마친 탓에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문장을 읽고, 또 문장을 지어냄으로써 젊은날의 허기를 달랬던 시절을 회상한다. 취직할 생각도 없고, 또 소설가로 성공하겠다는 야망도 없었던 당시의 그에게는 '아아, 장차 어찌할꼬, 이 청춘을'이라는 설요의 시가 사무쳤을 법하다. 하지만,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한 채" 보냈던 정릉 산꼭대기 자취방의 나날들이 ' 봄날'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는 무상함을 작가는 전해준다. 하지만,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몸이 아프다는 그는, 여전히 청춘의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듯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나는 사춘기"라는 말에서 만년 청년이고 싶어하는 작가의 순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대학 3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하고, 4학년 때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 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은 작가. 이 태생부터 `문과인간` 일 것 같은 주인공은 막상 자신은 `수학만이 최고의 언어라고 생각하던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수많은 문학과 중에서 천문학과를 택했다가 결국 영문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결국 그의 감수성은 `수학의 언어` 보다는 운문과 산문으로 이루어진 `청춘의 문장`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음악평론가 활동, 기자 생활과 같은 이력도 흥미롭지만, 청춘시절 그의 마음을 잡아끌었던 문장들, 앞이 막막한 불분명한 어두운 시절에 그를 이끌어 주었던 `특별한 문장들`을 훔쳐보는 재미는 더욱 쏠쏠하다. 작가를 사로 잡은 문장들은 두보, 이백의 당시부터 일본의 하이쿠(5.7.5조의 짧은 시), 이덕무, 박제가 등 옛 시까지 다양하다. 그 모든 시들이 참 멋스럽지만 이를 풀어내는 작가의 어린 시절과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간의 에피소드 역시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것이다.
"누군가가 `바다다`라고 외쳤다. 떠들던 아이들이 모두 왼쪽으로 몰려갔다. 정말 바다였다. 바다라는 것이 그런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기차통로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가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갖추고 볼 것을." ( 본문 211쪽)
사실 감동이라는 것은 거창한 그 무엇에 의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어깨를 다독이는 작은 손길. 다 잘 될 거라는 진심이 담긴 위로. 말 없이 옆자리를 지키는 친구의 어깨에서 찾아드는 것이 바로 감동이다. 김연수가 펼쳐놓은 문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자신의 책을 통해 위대한 교훈이나 사상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와 소소한 기억들을 풀어놓으며 그와 맞닿아 있는 `특별한 문장들`을 나즈막히 전해줄 뿐이다. 그 중 책장을 덮어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주인이 집을 물가에 지은 뜻은
물고기도 나와서 거문고를 들으람이다.`
유득공의 `부용산중에서 옛 생각에 잠겨` 라는 시 중 마지막 구절이다. 작가가 외롭고 쓸쓸한 물고기 같은 존재였을 때, 자신을 위해 물가에 집을 짓고 거문고를 들려준(듯한)한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구절이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있고, 또 계속된다.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 때론 방황하고 아파하며 늘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은 늘 청춘이고 사춘기가 아닐까. <청춘의 문장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비결과 다름 없다.
"사실은 지금도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사춘기." (본문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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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표지와 작가의 말(김연수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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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고 보니까,
웃통 벗은 남자 3부작의 두 번째 책이라고 막 우깁니다.
그럼 과연 세 번째 표지에서는?
글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동안 나는 결국 이 소설을 출판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고 생각했다. 다른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언제였을까? 1989년 2월, 영문학과 합격자 신분으로 학교 앞 식당 골방에 앉아 확신에 찬 어조로 마르크시즘을 설파하던 선배들의 얼굴을 힐끔거릴 때였을까? 아니면 1994년 4월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북한을 폭격하자던 월간지 기사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북한 지명들을 번갈아 들여다 보던 시절이었을까? 그 때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북한의 지명들을 제목으로 북한 사투리로 시를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당분간은 가보지 못할 곳을 소재로 시를 쓰다니. 뭐, 나란 인간이 좀 그렇다. 도저히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꾸 쓰고 싶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여 어찌어찌 갖은 고생 끝에 1995년에 나는 이 소설의 최초 버전이 될 장편소설을 썼다. 그 소설에는 전덕원이라는 복벽주의자, 즉 조선 왕조를 되살려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투쟁에 나선 사람이 등장한다.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는데, 이런 낡은 주장을 하니까 자연스레 독립군 내부에서는 이에 맞서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결국 단체는 갈라진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면 좋은데, 나중에 이 두 단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총을 드는 일이 생겨났다. 심지어 지난날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만주로 떠난 친구들끼리 서로 총을 쏘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게 내 최초의 의문이었다. 현대와 1920년대를 오가며 쓴 그 소설은 결국 5백 매에서 멈췄다. 나중에 나는 전덕원과 관계된 부분은 버리고 현대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따로 챙겨서 <7번국도>라는 소설을 썼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7번국도>와 독립군 내부의 동족상잔이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여기에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그 최초의 소설이 얼마나 엉성했는지 짐작하리라 믿는다.
다시 웃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원래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준다고 믿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대신에 조건은 있다.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줄 때까지 계속 간절히 원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열망이 이뤄질 때까지 열망한다. 나는 좀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버전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이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니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1995년의 와다 하루키 선생. 그 분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이란 책을 쓰셨다. 나는 이 책에서 중공 만주성위 동만특위 서기였던 위증민이 쓴 다음과 같은 보고 내용을 발견했다. “김일성, 고려인, 1931년 입당. 용감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민생단이라는 단체를 처음 알게 됐다. 전덕원 부대의 동족상잔보다 이쪽이 훨씬 끌렸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인 1999년, 신주백 선생이 쓴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라는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의 제4장 제4절은 동만 유격구의 반민생단투쟁에 대해서만 다룬다. 그 때 나는 출판잡지사 기자라는 신분을 한껏 남용해서 신주백 선생과 인터뷰를 했고, 헤어지면서 그 분에게 언젠가 만주 항일투쟁의 내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 해에는 연변대학교 역사계에 있는 김성호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1930년대 연변 민생단 사건 연구>라는 책도 발견했다. 마침내 민생단 사건 하나만을 다룬 책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열망은 최종적으로 내게 이 책에도 해제를 써주신 한홍구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상처받은 민족주의 - 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을 선사했다.
‘그렇다면 이제 일필휘지로 소설을 쓸 수 있겠다’라는 건,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일 뿐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면 우주 어디서나 그건 마찬가지다. 생각만으로 이뤄지는 건 하나도 없다. 뭔가 이뤄지려면 원하고 또 원해야만 한다. 몇 년이 지나도록 쉽게 소설을 시작하지 못했으므로 2003년 나는 연변에 가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가본 내게 연변은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 당시 교환교수로 연변대학교에 머물던 배재대 국문학과 정문권 선생과 그 분의 소개로 만난 연변대 김관웅, 김호웅, 우상렬 선생 등은 내가 여러 자료와 연변의 실상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연변대 유학생 기숙사의 수위 아저씨들은 혼자 머물던 내가 외롭지 않게 자주 일정량 이상의 알코올을 제공해주셨다. 연길 시내의 극장식 주점 ‘대우주성’도 적어두고 싶다. 거기서 나는 국경 너머 광야가 어떤 곳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길 제10중학교 조선어교원인 김점순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연길 생활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 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2004년 연길에 머물면서 이 소설의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캐나다 출신의 월드뮤직 가수 Matthew Lien과 독일의 고딕메탈 듀오 Mantus, 그리고 막 출반됐던 김윤아의 2집 앨범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온 세계가 나를 도와준 것은 거기까지였다. 초고를 마친 뒤에 나는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나는 여러 번 이 초고를 고치려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초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이대로 책을 출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내게 <밤은 노래한다>가 언제 출판되느냐고 물을 때마다 이번 계절이 끝나고 나면 출판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여러 번 계절이 그렇게 끝났다. 한 해 두 해 세 해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나는 그 찜찜함이 뭔지 알게 됐다. 그건 정희를 죽인 자들을 김해연이 복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땅히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여야만 했다. 그런 게 정의니까. 반드시 피의 앙갚음을 해야만 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결말을 고쳤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더더욱 이 소설은 출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게 다 뭔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맹세했던 사람들끼리 결국에는 서로 죽이는 이야기라니. 이런 얘기를 책으로 묶어내서 뭣하겠는가? 내게 소설을 쓰게 만들었던 최초의 의문은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나는 고치다 만 원고를 던져버렸다.
2007년 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썼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이십 대에 이 세상을 보면서 느꼈던 의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왜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는데도 이 세계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가? 그런 게 우리가 사는 세계라면 우리는 마땅히 현실에 순응하고 권력에 복종하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더 이상 뭔가를 간절히 열망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쓰면서 나는 그 의문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열망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열망으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망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열망은 그 자체로 결과이리라. 열망은 단지 열망하는 그 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이다. 과연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나만의 방식으로 다 썼다. 다 쓰고 나니까 이십 대의 내가 이해됐다. 결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이해된 게 아니라.
그리고 2008년이 찾아왔다. 한 신문사의 요청으로 나는 촛불시위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5월 31일 시청 앞으로 나갔다. 그 날 밤에 시위대는 효자동 입구까지 밀고 들어갔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경들 바로 앞에 연좌했다. 다시 전경들 앞에 앉고 보니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공포들, 공권력을 향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됐다. 결국 우리는 저들에게 진압당할 것이다. 초조했다. 그 때 뒤쪽에서 남총련의 깃발을 든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우습게도 안심이 됐다. 우리 세대에게 남총련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깃발을 들고 전경들 앞에까지 나온 남총련 학생들은 대오를 갖춰 자리에 앉았다. 남녀 학생들 몇몇이 앞으로 나갔다. 구호를 외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들이 대중가요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말 예상하지 못한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났다. 저런 애들을 믿고…… 한참 웃었다. 그 다음날 새벽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을 때, 내가 분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저렇게 새로운 아이들을 그토록 낡은 방식으로 대접하다니. 늙다리들. 구닥다리들.
결국 온 세계는 다시 나의 열망이 이뤄지도록 도와준 셈이었다. 그 학생들을 보고 나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열망 때문이든 아니든,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아닐 확률이 높지만, 어쨌든 결국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 그게 중요한 것이다. 반드시 내가 복수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당장 내 눈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이게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고칠 수 있었다. 결국 이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내 오랜 열망을 이룰 수 있었던 건 그 날 밤 효자동 전경들 앞에서 춤을 추던 학생들 덕분이다. 공포의 순간에 웃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해준 그 학생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늙다리들은 더 이상 춤추지 못한다. 나는 춤추는 사람들이 좋다. 나 역시 그렇게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 그 학생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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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이 약해졌다고 에베레스트산의 고도(高度)를 낮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젊은 소설가 김연수씨(36)는 ‘문학의 위기’에 대한 우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문학적 체력이 아직은 허약하다는 겸손한 고백이다. 그러나 눈높이만큼은 최고봉에 가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김씨를 21세기 대표작가로 꼽은 문단 관계자들의 선정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금까지도 잘해왔지만 앞으로 더 잘하리란 기대의 표시일 터이다.
실제 그의 글은 백두산이나 한라산 밖 ‘벌판’에 자리한다. 소설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1993) 때부터 그랬다.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이라는 자명한 이분법이 무너진 자리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하고 있는 장편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도 마찬가지다. 91년 전대협의 일원으로 방북 후 “(남과 북) 중간에서 버려져” 독일로 간 학생, 즉 정체성이 바뀐 뒤 자기 자신을 찾으려 고투를 벌이는 사람의 이야기다.
-전통적 글쓰기·새로운 상상력-
김씨는 “벌판에 가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의심하고 스스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캐릭터라서 매력적이었고, 그곳에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속울음 우는 게 문학적이었다”고 했다.
그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문학은 우스워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예컨대 그가 보기에 친일문학 작품의 문학사적 성취를 찾기란 어렵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만 쓰여졌으므로 지금 이곳에서 읽으면 “웃기는 것”이다. ‘한국문학=남한문학’ 작품도 통일 후 우스워 보일 만한 게 수두룩하다. 동아시아문학 또는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다시 읽으면 ‘웃기는 것’투성이이리라. 경계를 넘지 못한 문학은 시공에 갇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경계 또는 국경을 넘어서 그가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할 수 있는 유일한 동반자는 한국어일 수밖에 없다. 한국어에 대한 그의 자의식이 각별하고 비장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어와 그 표현법을 사수할 의지는 전혀 없다”면서도 “그러나 어떤 언어를 쓰든, 잘 쓰려다보면 한국어의 가능성을 다 쏟아부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온몸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면 외국어로 번역돼도 경계를 넘지 못하는 허섭스러운 작품이 되고 말리라는 뜻일 테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씨는 김씨의 언어의식에 대해 “한국어의 변별적 자질과 한국어 고유의 상상적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흔치 않은 작가”라며 “오늘날 그가 속한 세대의 문학을 생각해 볼 때 희소하고도 귀중하다”고 밝혔다.
-“글쓰기는 정체성 찾기의 여정”-
문단에서 작가 김씨를 두루 높이 산 배경은 그가 기존 문학을 안심시키면서도 향후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90년대 작가이면서 21세기의 작가이고, 한국의 작가이면서 국경을 넘어설 수 있는 작가이며, 정통적·전통적 글쓰기를 수행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의 촉수로 문학의 영토를 넓혀가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글쓰는 순간에만 (나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도저한 문학주의자이다. 그의 작품은 “소설 같은 소설”을 지향한다. 여기에 긴 설명이 필요없다. “그게 멋있다. 폼 잡고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써야 멋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그에게는 “내가 원하는 삶과는 좀 다른 삶”이 하나 정도 있다. “3년에 1권쯤 쓰면 적당할 것 같은데 (먹고 사는 문제 탓에) 1년에 1권 정도씩 쓰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문학적 탐구 역시 명민한 일급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고도 본질적이다. ‘정체성 찾기.’ 그는 “그게 안 찾아지니까 계속 글을 쓰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겠다는 태세에 다름아니다. ‘김연수=글쓰기’인 셈이다. 그러니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대중적 글쓰기를 요구하는 건 그에게 가면을 쓰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독서의 재미란 매우 힘든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쾌감”이라고 단언했다.
그런 그에게 91년은 “세계관의 원점”이었다. 역사를 회의하고 진실을 열망하게 된 분기점이었다. ‘분신정국’ ‘죽음의 굿판’ ‘정원식 총리 밀가루 사건’ ‘전대협의 북한행’ 등 한국사회에서 베를린 장벽에 해당하는 ‘경계’들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 시절, 그는 “내게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확신’과 ‘경계’들이 그해 이후 사라져갔다”고 했다. 문학도이던 그에게는 “리얼리즘 문학으로 쓸 수 없게 된 시대”로 다가왔다. 그는 이를 두고 “은폐된 현실을 폭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 것인가가 내 소설의 관심사가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 착근하면서도 그 이전의 사실주의적 문학과 다른 세계를 펼치게 됐다. 국경과 역사를 넘어선 ‘거짓말’을 쓰게 된 것이다.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거짓말을 쓰기 위해 그는 고단히 발품을 팔고, 책벌레처럼 수많은 기록을 더듬으며, 한뜸한뜸 문장을 만든다. 여기에 경계를 넘어선 ‘우습지 않은 문학’을 위해 두 겹 이상의 겹눈으로 세상을 살핀다.
-‘나’를 넘어 ‘공동체속 나’를 고심-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역시 이같은 노고에 값하는 성취를 일궈낸 경우다.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중략)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뿌넝숴’·不能說)이라는 작중 중국 인민지원군의 말은 작가 김씨의 소설관이기도 하다.
작가는 공식기록과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발가벗기고 그 폭력 밑에서 겨우 숨쉬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찾아낸다. “거짓말이 들통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중) 그는 공식적 거짓말들을 들통내면서 진실에 가까운 다른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이다. 독자는 그 거짓말 속에서 진실의 이면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는 즐거움을 누린다. 언어가 ‘헛것’이니 그 언어로 다룬 인간과 세상과 역사도 ‘허깨비’일 텐데 그의 작품은 공명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제 그는 ‘나’에서 한 발짝 나아가 ‘공동체 속의 나’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삶이든 역사든, 그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좀더 따져보고 좀더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겨우’ 십수년 글을 쓴 현재진행형 작가이므로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한 작가가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기대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글 김중식·사진 정지윤기자〉
-김연수는 누구-
2000년대 한국문학의 ‘블루칩’이다. 동서문학상(2001), 동인문학상(2003), 대산문학상·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5) 등을 탔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는 그의 문학적 기초공사와 적공(積功), 그리고 내공이 매우 만만찮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나왔다. 93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를 펴내며 소설가로 ‘전향’했다. 소설집 ‘스무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장편 ‘7번 국도’ ‘●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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