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사진의 눈으로 근대를 바라보다

나뭇잎숨결 2009. 2. 3. 16:47

<경성, 사진에 박히다>(이경민, 2009, 산책자)는 일제 강점기 사진에 얽힌 풍속을 다룬 사진으로 보는 근대사다. 사진, 사진관, 사진사 등 신문물을 접한 경성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보여준다. 책은 최근 몇년간 출판·대중문화계에 유행이 되다시피한 '경성 이야기'류에 속한다. 분석보다 묘사에 치중한 '미시적 근대 읽기'쯤 되겠다.

 

책은 당시 신문기사들을 텍스트로 삼아 경성의 풍경을 풀어나간다. 그래서 사진에 얽힌 사건·사고가 많이 눈에 띈다. 사진기는 쌀 수 십, 수백 가마니 값어치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절도범의 표적이었다. 사진관을 털거나 사진을 찍어달라며 사진사를 한적한 곳으로 유인해 사진기를 강탈하는 등의 절도사건이 심심찮게 신문에 등장했다. 기생을 상대로 한 사진첩 사기도 있었다. 관청과 상점에 배포할 '명기(名妓) 프로필 사진첩'을 만든다며 권번을 돌며 돈을 받아챙긴 신종 사기수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진기를 둘러싼 사건들을 보면 사진기가 금전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은밀한 욕망의 도구이기도 했다. 20년대 중반부터 신문 광고란에 '비밀사진'이라는 말이 하나 둘 등장했다. 비밀사진은 여인의 나체사진을 일컫는 말이었다. 일본에서 밀수입된 나체사진이 버젓이 판매된 것. 이 은밀한 사진은 30년대 '에로 사진'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사진과 포르노그래피의 역사는 비슷하다는 말이 조선의 근대에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경성인에게 사진은 각별했다. 얼굴 사진을 자신의 표상으로 여겨서였을까. 20~30년대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얼굴 사진을 신문사에 보내곤 했다. 이것은 유행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자살을 예고하는 것이었든, 자살 기사에 자신의 사진이 함께 실리기를 바라서였든 사진과 자살의 관계는 당시의 암울한 세태를 반영한다.

 

 

 

근대 신문 기사 속에서 발견되는 사진 문화는 다종다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식민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의 수단으로, 신분증명의 도구로, 정보 독점의 기술로 사진이 행사되기도 하고, 사진관을 통한 초상 이미지의 대중화가 진전되면서 전통적 재현 방식에서 근대적 재현 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각종의 사진 관련 이슈와 범죄가 발생했으며, 한인 이민사에서 비롯된 사진결혼 제도가 성행하고 근대적 성풍속의 단면을 보여주는 에로 사진이 출현하기도 한다. 시간적 거리 때문에 생소하거나 낯선 풍경들도 있지만 안중근 사진 소지자에 대한 단속 사건은 1980년대의 숱한 공안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며, 자살 전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신문사에 보내고 죽은 한 젊은 학생의 사연에는 2007년 세계를 놀라게 한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한인 학생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새해에 첨군자(僉君子, 여러 점잖은 사람)에게 요긴한 실물로써 바치려고 안 의사 중근 공의 최후 승리, 곧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등박문을 죽일 때 모양과 여순 옥중에서 유언하던 사실까지 기록하여 네 가지 종류로 각각 사진을 박았습니다. 이 사진 한 장에 25전씩 받삽는데, 이것은 곧 안공의 전기 간행에 보용할 터이올시다. 유지 첨군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 「사진으로 맺어진 사상적 동지, 안중근과 송학선」 중에서

 

 

 


1924년 9월24일 경성에 콩알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당시 한 신문은 가정집 장독 두껑 못지않게 사진관의 피해가 무척 컸다고 전한다. 사진관의 유리 지붕들이 속절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인공 조명이 일반화되지 않은 20년대 사진관은 햇빛을 들이기 위해 지붕을 유리로 만들었다. 당연히 우박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10년 이전 사진관 신문광고 끝부분에 주인인 남자의 이름과 함께 여성의 이름이 병기돼 있거나 '우리 사진관에는 여성 사진사도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자주 눈에 띈다. 여성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개화기라 해도 남녀유별이 공고하던 때여서 여성은 남자 사진사 앞에 서기를 무척 꺼렸다. 대신 여성이 촬영을 한다면 거리낌없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일제시대에는 사진 찍는 행위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사진에도 검열과 통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하는 부감 사진과 항공 사진은 엄격히 제한됐다. 한동안 조선총독부 같은 관공서, 군사시설물은 물론 시가지를 조망하는 사진은 법적으로 금지됐다. 일제가 그런 사진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속에 파묻혀 사는 현대인이 근대를 상상할 때, '이미지의 기원'을 찾아내는 일은 시대 상상과 연구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또한 사진으로 근대를 상상하는 작업은 사진 매체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의 인식과 활용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 20세기 초 조선에 불붙은 사진 문화를 살피는 일은 사진의 정체성을 되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 는 근대 문화의 창인 사진의 눈을 통해 근대 조선의 풍경들과 사건들, 거기 드리운 식민지적 그늘을 둘러보고 근대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없는 근대-20세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근대' 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병원 같은 건축물, 기차나 전차 등의 탈것, 여행 등 근대적 체험, 이밖에도 수많은 담론과 실천이 들끓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일제 강점으로 얼룩진 더욱 문제적이고 복합적인 형상이 떠오른다. 근대에 탄생하여 '모던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기계이자 매체인 사진은 명실 공히 근대를 상상하는 발화점이다. 사진을 통해 근대 사회를 고찰하는 『경성, 사진에 박히다』가 제기하는 질문, 즉 '사진에 박힌 우리의 근대는 어떠했나?' 라는 물음은 근대의 기원을 찾으려는 속 깊은 작업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보다 친근한 궁금증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근대인들은 그림이나 글보다도 더욱 확실한 표상 매체를 원했고 사진은 그런 요청에 의해 탄생했으며 훌륭히 그 요구에 부응했다. 사진이 이 시기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근대의 모습이란 대부분 사진에서 비롯되었고 우리는 이미지를 근대라고 설명한다. 그 재현 방식이 객관적인 것과는 달리 사진의 주제와 구성은 얼마든지 주관적인 개입이 가능하기에, 누가 재현했느냐에 따라 사진의 사태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 부분이 사진의 아찔한 함정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이미지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생산되었으며, 즉 우리의 근대 이미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으므로 그 이면에 작동하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유의하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경성, 사진에 박히다』는 우리에게 남은 '근대 이미지'의 재현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진의 이면에 숨은 의도를 끌어내고 탐구한다.

사진은 문화 현상으로서 어떻게 사회 속에 스며들어갔으며, 당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사진의 도입으로 탄생한 새로운 사회사와 문화 영역은 엄청나다. 현재만 하더라도 결혼식, 백일, 돌, 입학, 졸업, 장례 등 기념사진을 빼놓고는 완성되지 않는 통과의례와 관광사진, 초상사진, 가족사진에서 사건사고 현장 검증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 행위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사회적, 문화적 행위가 일상 곳곳에 스며 있다. 근대에서 이 문화의 기원을 더듬어보면 그 문화들이 매우 일찍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근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사진 문화들의 양상들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농촌 총각들이 베트남 처녀의 사진을 구경하듯 하와이 이주민들은 사진으로 결혼을 하고, 안중근의 사진은 마치 오늘날의 체 게바라 사진처럼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인기 있는 아이콘이 된다. 또한 신문 속의 노골적인 에로 사진 광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를 바가 없다고 웃음을 흘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사진 문화를 통한 문화 연구와 분석은 근대인과 현대인의 사회적 감수성과 그 흐름을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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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레닌 사진을 압수하라

함북 청진에 사는 이선우는 레닌의 사진을 자기 방 벽에 걸어 두었는데, 마침 약품 조사를 왔던 청진경찰서 순사가 이것을 보고 "당신이 이 사진을 걸어둔 것은 이 사람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냐" 며 사진을 압수해 갔다(《조선일보》, 1924년 12월 15일자). 일제는 신분 증명이라는 틀로 조선을 한 번 더 묶어놓았으며, 각종 사진 유통 규제와 촬영 규제로 조선인들의 근대적 재현 행위를 방해했다. 사상 규제를 위해 레닌 사진을 압수하고 안중근 사진을 판매 금지시키던 행태들은 1980년대 공안 사건을 떠오르게 하며, 최근의 국방부 불온서적 파동과도 닮아 있다. 사진을 이용한 일제의 사상 규제와 조선 사회 통제를 파헤친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이 경성 하늘에 비행기가 뜬 것은 결코 한 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그 비행은 우리에게 있어 어떤 의미에서 모욕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10일 조선인 비행사로서는 처음으로 경성 비행을 마치고 그 소회를 발표했다(《개벽》, 1923년 1월호). 경성의 하늘을 일본인 비행사에게 먼저 내준 식민지 조국의 치욕스런 역사, 그 역사를 바로잡으려 비행사가 된 안창남의 행보가 공개된다. 조선과 일본에서 활발한 비행 활동을 펼치며 독립 운동에도 일조한 비행사 안창남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폭로하고, 비행 활동과 항공사진 규제로 조선의 자유로운 근대적 체험의 길을 막아버린 일제의 식민 전략을 고찰한다.

이홍경, 경성 최초 '부인사진관'을 개업하다
"금춘을 기하여 좌기 장소에 초상과 및 사진업을 개하옵고 3200촉의 전기를 응용하와 정선한 기술로써 요구하시는 대로 수응하겠삽기 이에 광고하오니 사해 신사숙녀 제위는 여자 사업계의 첫거름임을 넓히 애고찬동하시와 일차 시험하여주심을 업대여 바라나이다." 여성 사진사 이홍경이 사진관을 열고 신문에 낸 광고 문구다(《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 경성 최초로 '부인사진관'을 열고 남성 사진사들과 당당히 경쟁하며 사진관을 꾸려나간 프로 사진사이자 이후 근화여학교 사진과 교수가 된 신여성 이홍경의 이야기가 밝혀진다. 1930년 사진사 수가 1800여 명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대중화된 사진관의 번창기를 읽어가며, 각종 사건사고와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끌려간 사진사들의 수난기에도 눈길을 돌려 본다.

소년 사진사 백골 사건
1938년 9월 16일 정릉 신흥사 뒤편 소나무 숲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부검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백골만 남은 이 시체 곁에는 대형 사진기가 놓여 있어, 죽은 이가 출장 사진사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동아일보》, 1938년 9월 18일자). 사건을 맡은 동대문서는 대전으로부터 받은 편지로 죽은 이의 신원을 밝혔다. 도렴정 문화사진관의 견습 사진사인 17세 소년 이동만이 살해당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어린 견습 사진사를 죽인 것일까? 이 사건 외에도 조명 폭발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촬영 시설 파손부터 시작해서 빈번히 일어난 카메라 절도, 강도 사건에 사기 사건까지 사진과 관련된 다양한 범죄를 재구성한다.

박열 부부 괴사진, 일본 정계를 뒤흔들다
1927년 1월 21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사진 한 장이 이후 10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단 한 장의 사진이 일본의 와카스키 내각과 야당 정우회를 일대 파란으로 몰아갈 수 있었을까? 조선과 일본 언론을 뒤흔든 대사건, 아나키스트 박열과 후미코 부부의 괴사진 사건이 소개 된다. 대역 사건으로 교도소에 갇힌 부부가 어떻게 한 방에서 다정히 포옹한 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나에 대해 분분한 논란이 오고갔다. 일본에서 반천황제 투쟁으로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폭탄 투척을 모의한 대역 사건의 주인공이면서, 이후 전향하여 미나미 총독을 감동시켰다는 일제 어용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박열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다.

조선의 체 게바라, 안중근 사진 사가시오
"어렸을 때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항상 부러워했다." 1926년 4월 28일 일본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 다카유키와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 코지로를 습격한 송학선이 7월 15일 열린 공판에서 안중근의 사진을 보고 그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했다. 안중근 사진은 사실 일본인들이 먼저 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처음에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범죄자 사진엽서로 제작되었지만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 잘 팔려나갔다.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정치 거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그 대단한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던 것이다. 일본인 상점에서까지 '테러리스트' 이자 '충신' 안중근의 사진을 팔았고, 다급해진 일제는 부랴부랴 판매를 금지시켰다. 지금의 체 게바라 사진마냥 대중의 사상적 아이콘이 된 안중근 사진의 자세한 사연이 밝혀진다.

"옛날 사진 찍던 그곳에 가서 죽을 테여요"
1926년 6월 20일 젊은 여성의 초상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렸다. 18일 새벽 1시경 독약을 먹고 자살한 20세의 주부 한경숙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한경숙이 죽기 바로 전날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이었던 암전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암전사진관 주인 이와다는 정성껏 사진을 찍어준 부인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다음날 신문에서 보고 말을 잃었다. 심지어 한경숙은 임신 3개월째였다. 어떤 괴로움이 아이를 가진 여인을 자살로 몰아갔을까. 그리고 그녀는 왜 죽기 전날 사진을 찍었을까? 근대인에게 사진이란, 영원히 변치 않을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 결국 자신과 동일시되는 상징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자살하기 전 유서를 쓰듯 사진을 찍은 사람들, 이루지 못할 사랑에 함께 목숨을 버린 연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 배우의 사진을 연인인 양 간직한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애잔한 사진 문화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오세요
1936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조선의 인상』을 발행했다. 이 작은 관광책자의 표지에는 새침한 얼굴로 고궁 기둥에 수줍게 기대어 선 두 명의 기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조선을 알리는 사진엽서에도 얌전한 기생의 얼굴과 쓰개치마 쓴 다소곳한 여인이 실렸다. 기생과 때묻지 않은 자연의 풍광은 차차 조선 여행 책자의 단골 화보가 되어갔다. 아름답고 순수한 풍광, 청초하며 매혹적인 기생들이 있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하지만 조선은 정말 태초부터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을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 '연약한 여성' 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워, 조선을 마땅히 정복하고 계도해야 할 미개지로 만드는 일제의 관광 사업책을 근대 관광사진과 사진엽서를 통해 파헤친다.

신랑 찾아 삼만리,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들
《매일신보》는 1914년 6월 13, 14, 16일 3일에 걸쳐, 하와이 사진 신부의 기구한 사연을 연재했다. 평양에 살던 19세의 청상과부 박성삼은 하와이 교포 김성운과 사진결혼을 해 하와이로 떠났지만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과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호놀룰루의 모 교회로 도망쳐 참혹한 생활을 하게 되고, 여기에 그녀의 모친 홍기안이 딸이 정신병원에 있으니 돈을 부치라는 등의 사기를 당하고 딸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연까지 가세해 소설이 따로 없을 만큼 긴박한 사진결혼 이야기를 보여준다. 사진 문화가 형성되면서 등장한 독특한 결혼방식이 바로 사진결혼이다.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 남성들과 결혼하면 보다 나은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꿈을 품고, 사진 한 장만 보고 인륜지대사를 결정한 사진 신부들의 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사진 신부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떠났으며 이들은 어떤 결혼생활을 했을까? 사진결혼은 한국 농촌 총각들과 베트남?연변 등지의 외국인 신부들과의 국제결혼이라는 형태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만큼, 주목해 볼 만한 근대의 사진 사건이다.

비밀 사진을 아시나요?
1935년 1월 27일 밤 경기도 안성에서 청년 6명이 안성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들의 범행이 '몰카 촬영 시도' 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안성 읍내에 있는 조선사진관이 목욕탕 위층에 있었던 것을 이용해 마루창을 뚫고 아래층에서 목욕하고 있는 여성들의 알몸을 찍으려 했던 것이다. 기사를 쓴 신문 기자는 이들을 '에로청년' 이라 불렀다. 바야흐로 '에로 그로 넌센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근대 조선을 습격한 포르노그래피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비밀 사진', '미인 나체 사진', '에로 사진' 등으로 불렸던 근대의 포르노그래피들과 관련된 사건들에 쓴웃음을 흘리게 된다. 《동아일보》나 《매일신보》에 게재된 놀라울 정도로 노골적인 포르노 사진 광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는 불법복제 에로 사진, 포르노 사진과 서적을 탐독하다 망상에 빠진 여학교 선생 이야기 등 씁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비밀 사진'의 행보를 추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