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습지가 그렇듯 우포도 범람(汎濫)의 산물입니다. 큰물이 질 때 낙동강이 넘쳐흐르면서 뒤쪽에 뻘과 물이 고였습니다. 소벌은 해마다 범람이라는 자연 현상을 되풀이하고 이를 통해 생태계는 스스로를 유지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범람은 문화이기도 합니다. 문화란 넓게 잡으면 인간 생활양식 전부를 이릅니다. 옛날 물가 농사는 3년이나 4년에 한 번씩 풍년이나 흉년이 들었답니다. 나락 싹이 패거나 알이 여물 때 물이 넘치면 흉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풍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농사가 들쭉날쭉해도 사람들은 물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범람이 땅을 기름지게 해서 농사짓기가 쉬웠는데 거기에다가 한 번 풍년이 들면 소출이 그야말로 푸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방과 펌프가 발달하면서 범람 여부에 따라서만 풍흉이 결정되는 일은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미FTA 쌀시장 개방으로 농사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전망과 고민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천변저류지입니다. 천변저류지를 만들자는 말은 옛날 습지였던 데를 원래대로 돌리자는 얘기입니다. 강물이 넘칠 때 담아둘 수 있도록 완충지대를 마련해두는 것입니다. 여태 짓던 농사와는 달리 범람을 그대로 두고 타협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세상과 생태계 사이 완충지대를 두고, 평소는 농사짓다가 홍수가 지면 물에게 땅을 내어주자는 얘기입니다.
- 김훤주
엽기적인 사건사고가 터지거나 상식으로 이해 안되는 일이 벌어질 때, 누구든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리라. 그때, 나와 이 세계를 정화시키는 것은 자연이다.
<습지와 인간>, 이 책은 단순하게 자연을 정화시켜주는 습지의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습지를 사람의 삶과 관련지어 한번 들여다보고, 사람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숨 쉬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습지는 그냥 습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과 교섭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진 나뭇잎 숨결(2008년 여름)
우포늪을 담으려고 삼각대를 조절하는 이 젊음이는 누구인가?
우포늪에 둑을 쌓아 물을 우포늪으로 빼낸 후에 그 땅을 개간하여 지금은 청정 벼농사를 짓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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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와 인간 http://sobulman.tistory.com/
<습지와 인간> 20~23쪽에서
양·배수장 신축 공사를 위해 새로 유수지(遊水池)를 파다가 조개층 따위가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을 하자 유물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이 쏟아졌습니다. 발굴은 200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김해국립박물관이 진행했습니다. 80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원래 길이 3m 남짓), 사람 것으로 보이는 똥 화석(糞石), 짠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가 발견됐습니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었습니다. 도토리와 가래(가래나무 열매), 솔방울, 조 같은 먹을거리도 나왔습니다. 목탄(木炭)과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도 있었으며 재첩과 굴과 고막의 껍데기는 물론 잉어 이빨과 사슴·멧돼지·개의 뼈, 상어 척추와 가오리 꼬리뼈도 함께 띄었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들도 확인이 됐습니다. 나중에 설명이 나오겠지만, 이 구덩이들이 띠는 역사적 의미는 굉장하다고 합니다. 낙동강 본류를 바라보고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등고선을 따라 포물선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맷돌 구실을 하는 갈돌과 갈판도 함께 나왔습니다.
비봉리 신석기 시대 습지 유적지에서 나온 8000년 전 쪽배.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유적지 배수장 뒤쪽으로는 해발 401m 짜리 월봉산이 가파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적에 비춰보건대, 옛날 이 산에는 가래가 열리는 가래나무와 솔방울이 맺히는 소나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자랐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도 살았을 것입니다. 왼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 본류와 직각에 가깝게 만나는 청도천이, 유적이 있는 근방에 이르러 갑자기 유역이 넓어집니다. 옛날옛적에는 양쪽으로 편평한 저습지를 이뤘을 것입니다. 지금은 양쪽으로 인공제방이 있고 그 너머는 모두 논입니다. 하지만, 이 제방 공사 전만 해도 비봉리 상류인 인교 마을까지 돛단배가 드나들었다는 마을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 논들은 그 이전에 모두 습지였음이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경남대학교 이상길 역사학 교수는 도토리 저장 구덩이 행렬을 두고 “당시 해안선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교수는 “떫은 맛(타닌 성분)을 우려내는 데는 민물보다 짠물이 낫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우리 땅에 앞서 살았던 신석기 사람들이 알고 이처럼 바닷물이 드나드는 데에다가 구덩이를 파고 도토리를 담았다고 봅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비봉리 일대는 지금 동해안에 있는 석호(潟湖) 같은 모양이었을 것입니다.”라고 짐작했습니다. 낙동강과 청도천이 만나는 지점에 서에서 동으로 모래톱 같은 것이 형성돼 있었고, 그 안쪽은 호수 같은 상태를 유지했으리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이처럼 자연 조건이 비슷한 곳곳에 사람들은 자리잡았을 것이고 물길을 통해 서로 오가기도 했을 것입니다.”며 “강물은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이고 습지는 먹을거리 등 삶의 바탕을 제공하는 공동 영역이었다고 봐야 합니다.”고 덧붙였습니다. 강이나 산의 줄기가 나라와 나라, 자치단체와 자치단체를 나누는 기준이 돼 있는 요즘 눈으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습니다. 이를 씻어내려는 듯이 이 교수는 “강줄기가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구실을 하게 되는 때는 훨씬 이후입니다.”라 질러줬습니다. 오히려 “당시는 바다·강과 습지를 중심에 놓고 여러 군데 흩어져 사는 동일 문화권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알려주는 유적이 밀양과 창원에 많이 남아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비봉리와 성격이 비슷한 유적이 낙동강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비봉리에서 동쪽으로 산을 하나만 넘으면 밀양 하남읍 들판이 나옵니다. 이 교수는 “이 들판 한가운데 백산(栢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흰산’이라 한답니다. 조개더미가 하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고 했습니다. 비봉리 유적보다 시대는 처지지만 성격이 같은 유적이며 따라서 백산 일대 또한 광범한 습지였다는 말입니다. 이 교수는 이어 “창원 동읍에도 합산패총이라고 있습니다. 성격이 같습니다. 비봉리 사람들과 비슷하게 산 사람들의 자취이지요.”라고도 했습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에 있는 다호리 고분군과 거기서 출토된 철기·청동기도 습지 유적”이라며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을 갖춘, 그리고 갖출 수 있는, 습지가 아니었으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월 6일, 어쩌다 보니 경북 경산까지 가서 안심습지를 둘러보게 됐습니다. 강의를 해 달라 해서 갔는데요, 습지 현장에서 하다 보니 많이 추웠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점들은 오리들입니다. 갈대들 누운 모습에서 찬 바람이 나지 않습니까? 무척 추웠습니다. 바로 가까운 데 ‘반야월’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한밤중에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겠지요. 그 왕건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반달이었습니다. 처량한 왕건 심정을 울렸겠지 싶습니다. 앞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들은 연입니다. 시들어 있었습니다. 햇살을 물결이 튕겨내고 있습니다. 바짝 말라버린 고추와 들깨가 찬 바람 견뎌내며 선 채로 참선에 들었습니다. 이 안심습지 때문에 금호강이 안심하고 흘러갑니다.
2002년 태풍 루사에 터진 제방을 다시 쌓는 공사를 하려고 낸 길. 이 탓에 버들이 많이 잘렸습니다. 제 눈에는, 멀리 보이는 저 버들보다 정겨운 것이 없습니다. 여기 안심습지가 그래서 팽개쳐 두고 있는데 경산시에서 잘 됐다 싶어 여기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려 했다지요.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고 환경단체들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와서 보니 굉장한 습지였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날 설명을 해주신 이상원 선생님 말씀으로는, 여기 생물 다양한 정도가, 가장 이름난 습지인 창녕 소벌(우포늪)보다 낫습니다. 수달도 살고 있고요, 두루미 같은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노릇도 톡톡히 한답니다.
9. 낙동강이 남해안과 이어지는 방법 “그래서 철새가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원도 철원을 거쳐 주남저수지나 낙동강 하구에 왔던 철새들한테 사천 광포만 일대는 기착지 구실을 합니다. 이들이 전라도 순천만으로 갈 때 들렀다 쉬어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아마 광포만이 없다면
창원과 창녕을 잇는 본포 다리에서 상류 쪽을 보고 찍은 낙동강. 왼쪽 창원 북면에 붙은 모래톱이 50년 전에는 오른쪽 창녕 부곡 노리 앞에 있었답니다. 10. 낙동강도 생물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습지와 인간> 276쪽에 있습니다.
11. 낙동강은 사람이 새겨져 있는 문화다 <습지와 인간> 279~280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수다리와 이어지는 밀양시 무안면 인교리도 다리 교(橋)를 쓰는 데서 짐작되듯 제방 공사 이전에는 돛단배가 드나들었을 정도로 습지와 관련이 깊답니다.
창원 주남 돌다리의 아름다움도 습지가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창녕 부곡 노리 북쪽 임해진(臨海津)도 눈길을 끄는 땅이름입니다. 바닷물이 예까지 올라왔다는 이름으로 50년대에는 5일장이 설 정도로 번창했고 노리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 절벽은 또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절경이었다 합니다. 임해진보다 더 북쪽 남지서도 바닷물고기인 웅어가 잡히니 틀리지는 않을 성 싶습니다. 소벌이 있는 유어면은 옛날 유장면과 어촌면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늘 논다(遊長)는 이름도 별나지만, 육지 한가운데서 고기잡이마을((漁村)이 있다니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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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포늪의 사계( http://www.up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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