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신석기유적지를 거쳐 우포늪으로 간다

나뭇잎숨결 2009. 2. 2. 19:32

 

대부분 습지가 그렇듯 우포도 범람(汎濫)의 산물입니다. 큰물이 질 때 낙동강이 넘쳐흐르면서 뒤쪽에 뻘과 물이 고였습니다. 소벌은 해마다 범람이라는 자연 현상을 되풀이하고 이를 통해 생태계는 스스로를 유지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범람은 문화이기도 합니다. 문화란 넓게 잡으면 인간 생활양식 전부를 이릅니다. 옛날 물가 농사는 3년이나 4년에 한 번씩 풍년이나 흉년이 들었답니다. 나락 싹이 패거나 알이 여물 때 물이 넘치면 흉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풍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농사가 들쭉날쭉해도 사람들은 물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범람이 땅을 기름지게 해서 농사짓기가 쉬웠는데 거기에다가 한 번 풍년이 들면 소출이 그야말로 푸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방과 펌프가 발달하면서 범람 여부에 따라서만 풍흉이 결정되는 일은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미FTA 쌀시장 개방으로 농사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전망과 고민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천변저류지입니다. 천변저류지를 만들자는 말은 옛날 습지였던 데를 원래대로 돌리자는 얘기입니다. 강물이 넘칠 때 담아둘 수 있도록 완충지대를 마련해두는 것입니다. 여태 짓던 농사와는 달리 범람을 그대로 두고 타협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세상과 생태계 사이 완충지대를 두고, 평소는 농사짓다가 홍수가 지면 물에게 땅을 내어주자는 얘기입니다.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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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사건사고가 터지거나 상식으로 이해 안되는 일이 벌어질 때, 누구든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리라. 그때, 나와 이 세계를 정화시키는 것은 자연이다.    

 

<습지와 인간>, 이 책은 단순하게 자연을 정화시켜주는 습지의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습지를 사람의 삶과 관련지어 한번 들여다보고, 사람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숨 쉬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습지는 그냥 습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과 교섭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습지 하면 먼저 떠오르고, 가장 유명하기도 한 우포늪이 아니라 창녕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로부터 책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낙동강 본류와 청도천 지류가 만나는 창녕 비봉리는 태풍 매미로 인해 이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배수장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80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 등 신석기 시대 유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옛날 사람들이 구릉이 아니라 습지에 살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고, 실제로 고고학의 관심도 마른 땅에서 습지로 옮겨가고 있다고 한다. 물과 뭍이 만나는 습지는 먹을거리가 풍부했으며 강물은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 이렇듯 습지는 역사적로도 사람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끊임없이 인간과 교섭하면서 변해왔다.

  경남 창녕이 고향이기도 한 저자는 우포늪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이름 때문이다. 대대로 '소벌'이라 일컬어져왔으며 지금도 나이 드신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벌'이라 하는데 어느새 소 우(牛)자를 써서 우포로 바뀌어 널리 퍼지고, 람사르 습지로까지 등록이 되었으니 아름다운 우리말 동네이름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의 목덜미에 해당한다고 붙은 이름 소목은 우항(牛項)이라 하는 세태, 소벌(우포)에는 거룻배(널빤지로 만든 배)만 있는데도 쪽배(통나무를 파내서 만든 배)라 하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정말 이 지역의 토박이만이 할 수 있는 신랄한 지적이면서 소벌 둘러보기는 창산다리에서부터 해야 한다든지, 소목둑 어디쯤에 소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든지 하는 생생한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리고 소벌(우포)의 생생한 속살인 물결무늬 바위를 보여주며 1억 4천만 살의 나이를 짐작해본다. 낙동강에 홍수가 져 물이 넘칠 때 그 배후에서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여 담아두는 구실을 하던 소벌. 범람은 자연적인 연례행사이므로 굳이 막을 게 아니라 그대로 두어야 생물다양성도 높아지고, 생태계가 유지된다며 저자는 무문별한 개발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연안습지 갯벌과 산지습지 소개

사천 광포만에서 시작하는 갯벌에 대한 소개는 남해, 고성, 거제를 지나 마산, 하동에 이른다. 특히 저자는 마산의 갯벌이 아직도 넓고 아름답게 남아 있다고 감탄한다. 창원에 살면서 마산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저자는 마산 봉암갯벌을 늘상 바라보면서 지나다닌다. 경남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인 마창공업단지. 그 한가운데에 봉암갯벌이 있다. 그런데 1997년 레미콘 공장을 위한 매립 허가가 난 것이다. 마창환경운동연합을 위시한 주민들은 그나마 자정능력이 있는 갯벌을 죽이려 한다며 반대했고 지역 어촌계도 물고기 산란장이 사라진다며 반대 움직임을 보였으며, 창원시도 오염정화기능 보전 등을 내세워 반대했다. 그 결과 인공섬 조성과 생태체험관 설치 등도 이루어졌고 봉암갯벌은 생명을 되찾았고, 시민의 품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3부 산지습지에서는 밀양 재약산 산들늪이 오프로드에 망가진 사연, 지율스님의 양산 천성산 사태와 천성산에 얽힌 전설 두 가지 등을 소개하며 그래도 여전히 장엄하게 아름다운 화엄늪을 바라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논도 습지다 . 4부 람사르와 남은 이야기에는 람사르 협약의 의미와 역사, 논의 중요성, 습지와 관련한 여러 뒷이야기를 실어놓았다.


2005년 11월 우간다에서 열린 제9차 람사르 총회에서는 일본 미야기(宮城)현 다지리(田尻)정 가부쿠리(蕪粟)늪과 일대 무논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자연습지가 아니라 인간이 개발해 농사를 짓기까지 하는 땅이 습지 목록에 오른 것이다. 가부쿠리늪 일대 무논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겨울철에도 물을 채워 유기농업을 하고 있었다. 논은, 인간이 크게 간섭을 한다는 점만 빼면, 다른 습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 야생 동물과 식물의 터전이며 물속 유기물질을 없애는 오염 정화 구실까지도 다 하고, 물을 가둬두는 저수지 구실과 빗물을 땅 밑으로 스며들게 하는 통로 구실도 톡톡하게 한다. 논에는 벼 말고는 아무것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논도 습지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습지를 사람의 삶과 관련지어 한번 들여다보고, 말하자면 습지를 그냥 습지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숨 쉬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 나뭇잎 숨결(2008년 여름) 

 

 

 

 

 

 

 

 

 

 

 

 

 

 

 

 

 

 

 

 

 

 

우포늪을 담으려고 삼각대를 조절하는 이 젊음이는 누구인가?

 

 

 

 

 

 

 

 

 

 

 

 

 우포늪에 둑을 쌓아 물을 우포늪으로 빼낸 후에

 그 땅을 개간하여 지금은 청정 벼농사를 짓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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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와 인간 http://sobulman.tistory.com/

 

<습지와 인간> 20~23쪽에서


창녕 부곡면 비봉리의 신석기 습지 유적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44번지. 낙동강 본류와 청도천 지류가 만나는 곳에 학포 마을과 들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도천을 따라 창원시 동읍 본포에서 넘어오는 30번 도로를 타고 밀양시 무안면 인교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나옵니다. 비봉리 신석기시대 습지 유적이 있는 곳입니다. 2층짜리 건물은 가뭄과 홍수에 대비한 양·배수 펌프장입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 일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펌프 용량을 키우는 확장 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배수장 신축 공사를 위해 새로 유수지(遊水池)를 파다가 조개층 따위가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을 하자 유물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이 쏟아졌습니다. 발굴은 200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김해국립박물관이 진행했습니다. 80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원래 길이 3m 남짓), 사람 것으로 보이는 똥 화석(糞石), 짠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가 발견됐습니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었습니다. 도토리와 가래(가래나무 열매), 솔방울, 조 같은 먹을거리도 나왔습니다. 목탄(木炭)과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도 있었으며 재첩과 굴과 고막의 껍데기는 물론 잉어 이빨과 사슴·멧돼지·개의 뼈, 상어 척추와 가오리 꼬리뼈도 함께 띄었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들도 확인이 됐습니다. 나중에 설명이 나오겠지만, 이 구덩이들이 띠는 역사적 의미는 굉장하다고 합니다. 낙동강 본류를 바라보고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등고선을 따라 포물선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맷돌 구실을 하는 갈돌과 갈판도 함께 나왔습니다.

비봉리 신석기 시대 습지 유적지에서 나온 8000년 전 쪽배.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유적지 배수장 뒤쪽으로는 해발 401m 짜리 월봉산이 가파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적에 비춰보건대, 옛날 이 산에는 가래가 열리는 가래나무와 솔방울이 맺히는 소나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자랐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도 살았을 것입니다. 왼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 본류와 직각에 가깝게 만나는 청도천이, 유적이 있는 근방에 이르러 갑자기 유역이 넓어집니다. 옛날옛적에는 양쪽으로 편평한 저습지를 이뤘을 것입니다. 지금은 양쪽으로 인공제방이 있고 그 너머는 모두 논입니다. 하지만, 이 제방 공사 전만 해도 비봉리 상류인 인교 마을까지 돛단배가 드나들었다는 마을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 논들은 그 이전에 모두 습지였음이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경남대학교 이상길 역사학 교수는 도토리 저장 구덩이 행렬을 두고 “당시 해안선입니다.”라 했습니다. 이 교수는 “떫은 맛(타닌 성분)을 우려내는 데는 민물보다 짠물이 낫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우리 땅에 앞서 살았던 신석기 사람들이 알고 이처럼 바닷물이 드나드는 데에다가 구덩이를 파고 도토리를 담았다고 봅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비봉리 일대는 지금 동해안에 있는 석호(潟湖) 같은 모양이었을 것입니다.”라고 짐작했습니다. 낙동강과 청도천이 만나는 지점에 서에서 동으로 모래톱 같은 것이 형성돼 있었고, 그 안쪽은 호수 같은 상태를 유지했으리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비봉리 일대는 전형적인 습지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인 셈이고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들이 어우러지는 터전이었던 셈입니다.


2. 지류가 낙동강 본류랑 만나는 데가 터전인 까닭

<습지와 인간> 32~33쪽에 있습니다.
강물은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이처럼 자연 조건이 비슷한 곳곳에 사람들은 자리잡았을 것이고 물길을 통해 서로 오가기도 했을 것입니다.”며 “강물은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이고 습지는 먹을거리 등 삶의 바탕을 제공하는 공동 영역이었다고 봐야 합니다.”고 덧붙였습니다. 강이나 산의 줄기가 나라와 나라, 자치단체와 자치단체를 나누는 기준이 돼 있는 요즘 눈으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습니다. 이를 씻어내려는 듯이 이 교수는 “강줄기가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구실을 하게 되는 때는 훨씬 이후입니다.”라 질러줬습니다. 오히려 “당시는 바다·강과 습지를 중심에 놓고 여러 군데 흩어져 사는 동일 문화권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알려주는 유적이 밀양과 창원에 많이 남아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비봉리와 성격이 비슷한 유적이 낙동강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비봉리에서 동쪽으로 산을 하나만 넘으면 밀양 하남읍 들판이 나옵니다. 이 교수는 “이 들판 한가운데 백산(栢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흰산’이라 한답니다. 조개더미가 하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고 했습니다. 비봉리 유적보다 시대는 처지지만 성격이 같은 유적이며 따라서 백산 일대 또한 광범한 습지였다는 말입니다. 이 교수는 이어 “창원 동읍에도 합산패총이라고 있습니다. 성격이 같습니다. 비봉리 사람들과 비슷하게 산 사람들의 자취이지요.”라고도 했습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에 있는 다호리 고분군과 거기서 출토된 철기·청동기도 습지 유적”이라며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을 갖춘, 그리고 갖출 수 있는, 습지가 아니었으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월 6일, 어쩌다 보니 경북 경산까지 가서 안심습지를 둘러보게 됐습니다. 강의를 해 달라 해서 갔는데요, 습지 현장에서 하다 보니 많이 추웠습니다.

안심습지 찾아가는 길은 이렇습니다. 대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1호선 종점인 안심역까지 갑니다. 안심역 4번 나들머리로 나오셔서 죽 길 따라 가다 보면 안심 차량기지 안내 표지가 나옵니다.

좀 멀기는 하지만 40분 남짓 이렇게 걸으면 차량기지 정문이 나오는데, 차량기지 울타리를 끼고 내려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안심습지가 보입니다. 여기는 연이 그렇게 이름나 있다더군요.

물 위에 떠 있는 점들은 오리들입니다.

안심습지에서 안심은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돼 있습니다.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한테 왕창 깨지고 신하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죽는 틈을 타 왕건이 달아납니다.

갈대들 누운 모습에서 찬 바람이 나지 않습니까? 무척 추웠습니다.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들 고함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데에 이르러 왕건이 이랬답니다. “아이고, 이제 안심이다.”  이래서 안심이 됐습니다.

바로 가까운 데 ‘반야월’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한밤중에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겠지요. 그  왕건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반달이었습니다. 처량한 왕건 심정을 울렸겠지 싶습니다.

앞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들은 연입니다. 시들어 있었습니다.


 

햇살을 물결이 튕겨내고 있습니다.


 

바짝 말라버린 고추와 들깨가 찬 바람 견뎌내며 선 채로 참선에 들었습니다.


 

이 안심습지 때문에 금호강이 안심하고 흘러갑니다.


 

 

2002년 태풍 루사에 터진 제방을 다시 쌓는 공사를 하려고 낸 길. 이 탓에 버들이 많이 잘렸습니다.


 

제 눈에는, 멀리 보이는 저 버들보다 정겨운 것이 없습니다.


여기 안심습지가 알려진 계기는 쓰레기매립장이었다고 합니다. 동네 주민들이 강에다 둑을 쌓고 매립해 연밭으로 만들었는데 지층이 바위라 농사가 잘 안 됐답니다.

그래서 팽개쳐 두고 있는데 경산시에서 잘 됐다 싶어 여기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려 했다지요.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고 환경단체들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와서 보니 굉장한 습지였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날 설명을 해주신 이상원 선생님 말씀으로는, 여기 생물 다양한 정도가, 가장 이름난 습지인 창녕 소벌(우포늪)보다 낫습니다. 수달도 살고 있고요, 두루미 같은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노릇도 톡톡히 한답니다.

 

 

 

9. 낙동강이 남해안과 이어지는 방법

<습지와 인간> 154쪽에 나옵니다. 
갯잔디 최대 군락지 광포만

“곤양천 하구에 최근 들어 뻘흙이 많이 쌓여 물 위로 드러났습니다. 아마 바닷물 흐름이 달라진 것 같은데요. 이를 따라 갯잔디가 한 1만 평정도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새만금 등 서해안 곳곳을 다녀봤지만 이만한 갯잔디 군락은 본 적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고 잘라 말할 수 있어요.”

갯잔디는 전통 자연 해안선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데서만 자란다고 합니다. 콘크리트 따위로 망가진 바닷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답니다. 또 갯잔디에는 철새들 먹이가 되는 기수(갈)고둥 같은 조그만 조개가 많이 엉겨 살아갑니다.

“그래서 철새가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원도 철원을 거쳐 주남저수지나 낙동강 하구에 왔던 철새들한테 사천 광포만 일대는 기착지 구실을 합니다. 이들이 전라도 순천만으로 갈 때 들렀다 쉬어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아마 광포만이 없다면 철새들 많이 힘들겠지요.

지난해에는 천연기념물 203호인 재두루미도 21마리씩이나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눈이 많이 올 때였는데 먹이도 없고 쉴 데도 마땅찮으니까 따뜻하고 먹이 많은 이곳에 왔다고 봅니다.”

창원과 창녕을 잇는 본포 다리에서 상류 쪽을 보고 찍은 낙동강. 왼쪽 창원 북면에 붙은 모래톱이 50년 전에는 오른쪽 창녕 부곡 노리 앞에 있었답니다.

10. 낙동강도 생물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습지와 인간> 276쪽에 있습니다.
얘깃거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습지

낙동강이 100년 단위로 옮겨 다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지금 창원시 북면 쪽에 붙어 있는 모래밭이, 50년 전에는 맞은편 창녕군 부곡면 노리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리에서 밀양시 무안면으로 시집간 한 어르신이 일러줬습니다.

“지금은 천마산 쪽에 붙었는데 옛날에는 노리 앞에 있어서 땅콩 농사를 좀 지을 수 있었지.” 천마산은 지금 마금산이라 합니다. 마금산은 (창원시) 북면에 있습니다.

 

 

11. 낙동강은 사람이 새겨져 있는 문화다

<습지와 인간> 279~280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습지 관련 땅이름

앞서 나온 학포의 토종 이름은 ‘새개’입니다. 들머리 청도천과 낙동강이 마주치는 어귀에 황새를 비롯한 새가 많이 날아와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개’는 바닷가가 아니라 ‘작은 나루’를 이르는 경상도 ‘표준말’입니다. 부곡면에는 학포 말고 수다(水多)리도 있는데 말 그대로 물이 많은 동네라고 합니다.

수다리와 이어지는 밀양시 무안면 인교리도 다리 교(橋)를 쓰는 데서 짐작되듯 제방 공사 이전에는 돛단배가 드나들었을 정도로 습지와 관련이 깊답니다.

인교에서 고개만 하나 넘으면 나오는 범평리는 마을 이름에 아예 돛(帆)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안면도 찬찬히 따져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갈래 설이 있습니다. 원래는 수안(水安)이라 했는데, 여기서 ‘수’는 뜻을 땄고 ‘안’은 소리를 땄다는 얘기입니다. 호수처럼 물이 괴어 있는 안쪽이란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물안’이라 하다가 ‘ㄹ’이 탈락돼 무안이 됐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명대사가 힘을 써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는 설과 맞서고 있습니다.

창원 주남 돌다리의 아름다움도 습지가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창녕 부곡 노리 북쪽 임해진(臨海津)도 눈길을 끄는 땅이름입니다. 바닷물이 예까지 올라왔다는 이름으로 50년대에는 5일장이 설 정도로 번창했고 노리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 절벽은 또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절경이었다 합니다. 임해진보다 더 북쪽 남지서도 바닷물고기인 웅어가 잡히니 틀리지는 않을 성 싶습니다.

소벌이 있는 유어면은 옛날 유장면과 어촌면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늘 논다(遊長)는 이름도 별나지만, 육지 한가운데서 고기잡이마을((漁村)이 있다니 흥미로웠습니다.

일제 때인 1914년에 두 면이 합쳐지면서 놀면서(遊) 고기잡는(漁) 동네가 됐습니다. 낙동강 따라 널려 있는 세진 송진 반포 본포 등에서 진(津)과 포(浦)가 나옵니다.

이 둘은, 진은 여객운송업만 주로 이뤄진 작은 나루고 포는 여객운송업에 더해 화물운송업까지 행해진 커다란 나루였다는 식으로 구분하면 다 맞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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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포늪의 사계( http://www.up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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