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도플겡어,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뭇잎숨결 2009. 2. 2. 08:47

오늘의 책,  네어버에서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야, 나 아까 너랑 똑같은 사람 봤어! 넌 줄 알고 불렀는데 네가 아니더라? 진짜 닮았더라' 이런 말을 들어봤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적어도 5번쯤은 들어본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지방에서 전학 온 친구가 나를 보고는 자기가 전학 오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나와 정말 똑같이 생긴 친구가 있다는 얘길 했다. 당시 우리 또래 사이에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그 즉시 죽게 된다는 얼토당토않은 미신 따위가 돌던 참이었다.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그 '닮은 존재'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만남이 현실화되는 즉시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짐작해 보건대 '닮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비단 현대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옛 이야기 '옹고집전'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성질 고약하고 사람에게 인색한 옹고집을 혼내주기 위해 도승이 짚단으로 그와 똑같은 가짜 옹고집을 만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의 주된 교훈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지만 그 교훈 외에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즉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도 '나'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쉽사리 떨칠 수 없는 문제인가 보다.

역사 교사인 테르툴리아노. 그가 도플갱어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어 영영 그를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하는 그의 심리를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결국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삼류 영화배우를 찾아내지만, 그와의 만남에서 밝혀진 '자신이 복사본'이라는 난감한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솔직히 누가 원본이고 복사본인지 가르기에 애매한 상황이나 생년월일시가 30분 이르다는 이유로 테르툴리아노는 한 순간에 배우의 복사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30분 늦게 태어났으니 30분 늦게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가지고 위안을 삼지만, 그렇다고 복사본에게 주어지는 30분 동안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리고 책 속 테르툴리아노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겨서 오는 심리적 충격이 아니라 내가 그 동안 지내온 모든 시간들이 '그 존재'에 덧붙여진 시간이라는 데서 오는 허무함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비애감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라 나와 '닮았을' 뿐이다. 비록 그가 나와 닮았을지는 몰라도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을 하나의 점까지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땐 아마도 '인간복제'를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지.

오늘의 책을 리뷰한 '완전정복'님은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만큼 한 자 한 자라도 먹어치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대학생. 세계여행도 하고 싶고, 봉사활동도 하고 싶고, 작가도 되고 싶고, 승무원도 되고 싶고 뭐든 다 되고, 하고 싶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한 가능성의 소유자. http://blog.naver.com/hm4clover
정말로 불안한 건 오 년 전에 저 자와 내가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사실이야 - 책 속 밑줄 긋기

그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닮은꼴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쌍둥이가 한 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육십억 명의 사람들 중에 정확히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29쪽)

제일 불안한 건, 그는 마침내 정리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저 자가 나를 닮았다는 사실, 내 복사판이라는 사실이 아냐. 그건 그렇게 진기한 일도 아니지. 쌍둥이도 있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있고, 같은 종에 속한 생물들은 서로의 모습을 복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인간도 머리, 몸통, 팔, 다리를 똑같이 갖고 있잖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정말로 불안한 건 오 년 전에 저 자와 내가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까지 똑같았단 말이지, 게다가 오 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그 자가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불안해. (32쪽)

문제는, 고통스럽고 영원한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람들이 때로 사랑은 물론이고 열정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애정에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양초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더 높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더 밝게 타오르는 친숙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걸까. 우리가 이렇게 타오르는 양초의 빛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순전히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그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눈은 그 빛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여전히 행복해할 테니까 말이다. (144~145쪽)

소설 같은 허구의 세계에 비해 현실은 항상 우연의 일치에 인색한 것 같다.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는 원칙이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진정한 지배자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그런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우연의 일치도 글 속에 등장하는 우연의 일치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235쪽)

사실 난 독신이에요. 그래도 당신은 내 복사본, 내 분신, 거울 속에 비친 영원한 나의 모습일 거에요, 거울 속에서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없겠죠.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298쪽)

둘 중 한 사람, 그러니까 배우와 역사교사 중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분의 존재라고 했다. 하지만 너는 아니었다. 넌 여분이 아니었다. 너 대신 나타나서 네 어머니의 옆자리를 차지할 복사본은 없다. 너는 독특한 존재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독특한 존재이듯이. 진정으로 독특한 존재이듯이. (413쪽)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주제 사라마구
1922년 포르투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한 후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46살까지 우익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공산주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1947년 'Terra do Pecado'(죄악의 땅)를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66년 시집 'Os Poemas Possíveis'(가능한 시)를 펴낸 후에야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성기를 연 작품은 1982년 작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이 작품으로 유럽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으며 199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눈먼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를 비롯해 <미지의 섬>, <세상에서 가장 큰 꽃>, <돌뗏목>, <예수의 제2복음>, <동굴>, <리스본 쟁탈전> 등이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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