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사르트르의《지식인을 위한 변명》

나뭇잎숨결 2009. 1. 21. 07:11

“지식인의 가장 직접적인 적은 내가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부르려 하는 자들, 니장 Nizan이 <집 지키는 개>라고 이름지어 주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지배 계급의 사주를 받아 자칭 엄격한 논리 - 말하자면 과학적 연구 방법의 산물인양 제시되는 논리 -를 통해 특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 든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1999.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그 이론적 기초를 맑스주의에 두고 있다. 우선 적대적 두 계급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또는 부르주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설정하고 지식인은 그 두 계급 사이의 중간층에 위치시키는 점이 그렇고,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갈등을 통해서, 그리고 모순과 소외 현상을 통해서 지식인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는 점이 그러하며, 노동자계급을 계급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계급으로 고려하면서 지식인의 목표를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일치시킬 것을 주장하는 점이 그렇다. 따라서 지식인이 수행해야 할 기능 또한 당연히 이와 같은 맑스주의적 구도를 따라 정해진다. 첫째, 지식인 자신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중간층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이로부터 파생되는 자신의 모순적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 모순적 삶을 극복해야 한다. 이때 모순적 삶을 극복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를 유지시켜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실제로는 거짓된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이 폭로를 통해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착취 관계를 밝혀 드러내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일로 귀결된다. 둘째, 지식인은 이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모순적 삶뿐만 아니라 지식인 내부의 모순적 삶 또한 극복해야 한다. 한편으로 보면 지식인은 지배계급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이 주입시키는 특수주의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식인의 전문성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자신에게 주입된 특수주의,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특수주의에 대한 부인 자체이기도 하다. 지식인은 이처럼 그의 보편주의적 전문성과 지배계급의 특수주의가 자신 속에서 항구적으로 싸운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싸움, 즉 지식인 자신의 내적인 모순에 의해서 정의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모순적 삶을 극복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자기 내부의 모순적 삶을 극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끊임없이 보편적인 것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 지식인은 계급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노동자계급과 연대하면서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서 공동으로 투쟁해야 하며,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생적(유기적) 지식인이 배출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 즉 지식인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계급적 갈등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등에도 참여해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볼 때 이 갈등은 모두가 다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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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전 세계적으로 지식인의 종말이 회자되고 있다. 첫째, 가깝게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보산업의 눈부신 발달이 지식인의 끝을 재촉하는 듯이 보인다. 즉 모든 사람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획득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적어도 뭔가 "지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한다면, 지식인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은 이처럼 과거와 같이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적인 앎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 부단히 되어가고 있다. 네이버, 다음, 야후, 구글 등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모든 지식과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해주는 마당에 지식은 결코 더 이상 지식인을 정의해주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1990년대 이후로 대학에 꾸준히 강요되어왔고, 또 대학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 자체가 더 이상 지식 학문이 아닌 정보 학문이 되어버린 현상 또한 지식인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즉 오로지 자본에만 봉사하고 자본에만 복종하는 정보 전문가가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양산됨에 따라서 지식인이 점차 소멸하게 된 것이다. 셋째,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의 전통이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지식인의 최후를 이야기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프랑스 리옹대학의 교수 레지 드브레는 그의 책 『지식인의 종말』에서 오늘날 지식인이 앓고 있는 중병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그들의 허위, 위선, 직무 유기, 무력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1. 자신들만의 틀에 갇혀 대중과 단절된 "집단 자폐증"
2. 연구도 안 하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현실감 상실증"
3. 여전히 사회의 도덕을 선도한다고 믿는 "도덕적 자아도취증"
4. 들어맞지도 않는 예측을 쏟아놓는 "만성적 예측 불능증"
5. 자신의 이름이 잊혀질까 두려워 매스미디어의 장단에 맞추어 설익은 견해를 유창한 언변으로 늘어놓는 "순간적 임기응변증"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지식인의 종말을 당연한 일로 여기거나 또는 고소해하며 즐거워해야 할까? 결코 그렇지가 않다. 과거에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똑같이 요구된다. 즉 사회는 계속해서 바뀌어가지만 사회는 사회 자신을 위해서 지식인에게 언제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지식인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범주는 바뀔 수 있어도 지식인의 고유 역할은 언제나 동일하게 존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무제한의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오늘날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코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요구되는 지식인 고유의 역할, 즉 보편화를 위한 비판적인 기능의 수행과 이를 담보하기 위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인의 역할은 과거처럼 학자, 교수, 전문가 등 일군의 사회적 중간 집단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그것은 지식과 정보를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제한 없이 개방된다. 즉 과거와 그 정도를 비교할 수 없는 지식과 정보의 보편적 확장으로 인해서 이제 "유기적" 지식인의 탄생이 그만큼 용이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게 되는 문제는 분명하다. 도대체 "어떻게" 지식인 고유의 역할을 인지할 것이며, 또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르트르의 지식인론,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4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강연을 담은 책이지만, 이 책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오늘날의 지식인에 대해서" 여전히 유효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책은 우선 우리로 하여금 기능의 측면에서 고려되는 지식인, 역사적 주체로서 자신의 소명을 의식하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식인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게 한다. 즉 도대체 "어떻게" 지식인 고유의 역할을 인지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책은 지식인의 비판적인 기능의 수행을 담보하는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준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피지배계급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계급보다도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이기 때문에, 바로 이 피지배계급의 입장에 서거나 또는 입장을 대변할 경우에만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사르트르의 대답이다. 원서가 출간된 지 이미 사십여 년이 지난 "고전"이요, 딱딱한 계급투쟁의 언어로 된 건조한 글이지만,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3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강연이다.


-이 책은 1965년 9월과 10월에 도쿄와 쿄토에서 세 차례 행해진 사르트르의 강연을 담은 것으로, 가독성을 돕고 강연의 현장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강연체로 번역을 하였다.
-이 책은 원저작권자인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하여 처음으로 번역, 출판하는 책이다. 기존에 허술한 번역으로 국내에 출판된 해적판이 여러 권 있었으나, 이 책은 사르트르를 공부한 전문 학자가 완전히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 될 수 있으며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확장된 독자층, 즉 보다 확장된 잠재적 지식인을 염두에 두면서 그에 맞추어 번역을 하였다.
-실제로 이 책은 고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번역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또 중요한 학문적 용어가 나올 때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친절한 주석을 달았다.

 

   

  그람시 Gramsci 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란 지배 계급의 필요에 의해 길러지고 편입된 실용적 목적의 학자, 전문가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의 세계관도 한 점으로 소실된다. 계급의 이익이다. 착취 당하는 계급도 계급의 이익을 위해 유기적 지식인을 필요로 하는데 편입되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자체적으로 길러지는 지식인은 없다. 유기적 지식인이란 계급이 생산하는 잉여가치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유기적 지식인의 수는 지배 계급의 필요에 따라 조절된다. 실용적 목적은 단 기간 내에 이루어야 할 할당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성과를 계량화하여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계급의 실용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봉사료를 받는다. 진실 - 혹은 그것의 규명을 위해 필요한 시간, 즉 역사 - 따위란 이들에겐 쓰레기일 뿐이다. 지식인에게 가장 큰 시험대는 시간이다. 지식인은 역사를 두려워한다. 매일매일 자신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 역설적으로, 지식인은 항상 사이비 지식인으로 전락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사이비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아니다, 하지만’, 또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라고 즐겨 말한다.” 

 

  사이비로 전락하고 나면 유기적 지식인으로의 편입을 꺼릴 이유가 없어진다. 유기적 지식인이 되면 ‘하지만’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유기적 지식인들은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사이비 지식인들은 최대한 감춰가며 말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이비 지식인들의 장황한 연설 중간에 슬쩍 들어가는, ‘하지만’ 다음에 나오는 짧은 몇 마디 말이다. 지식인이란 예비-사이비 지식인, 잠재적-유기적 지식인이다. 이 위태한 외줄타기에서는 잠시 딴 생각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지식인의 역할이 필요 없어지게 될 때 비로소 지식인은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세상이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확신 아래 그런 세상이 오기를 마음껏 꿈꾸고 열망한다. 지식인은 이런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매 순간 고민한다. 지식인이라는 말은 당대가 아닌 역사 속 인물의 이름 앞에 붙는 헌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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