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제9장 -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나뭇잎숨결 2009. 1. 20. 23:01

제9장 -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취而銳之, 不可長保.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예지, 불가장보.
金玉萬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무리해서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들겨 날카롭게 만든 칼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은 보화를 집안에 가득 쌓아둔다고 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는 없다.

부귀하여 교만하게 되면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일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천도의 이치이다.
 
 
 
 아래 해석글은 뿌리깊은 나무 http://cafe.daum.net/suming56 의메뉴 한문학,명구에서 발췌
 
 持而盈之, 不如其已.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而銳之, 不可長保.
    취이예지, 불가장보

    金玉滿堂, 莫之能守.
    금옥만당, 막지능수.

    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持―잡을 지, 지닐 지, 盈―찰 영, 가득할 영, 已―그칠 이, 이미 이, 따름 이,
취―헤아릴 취, 잴 취, 銳―날카로울 예, 保―지킬 보, 보전할 보, 滿―찰 만,
堂―집 당, 莫―없을 막, 말 막, 아득할 막, 驕―교만할 교, 遺―남을 유, 끼칠 유,
咎―허물 구, 재앙 구, 功―공 공, 遂―이룰 수, 드디어 수, 退―물러날 퇴

    잡고서 그것을 가득 채우려함은 그만두느니만 못하고,
    헤아려 가며 더욱 날카롭게 해보지만 오래 보존할 수가 없다.
    금과 옥으로 집안을 가득 채워도 능히 지킬 수가 없나니,
    부귀(富貴)하면 교만해져서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功)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 이것이 하늘의 도(道)이다.

    < 뜻풀이 >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니며, 우리 눈에 나빠
보이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감각되어지는 것'과 '사실'이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단지 보여지는 '감각'에
머물지 아니하고, 그 너머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가닿을 수만 있다면!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로, 옛날 북방 국경 근방에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① 하루는 그가 기르던
말(馬)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집을 나가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도망가버렸다.
이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이 늙은이를 위로하고 동정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福)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했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을 한 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를 크게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화(禍)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하고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전부터 말타기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마구 달리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들이 병신이 된데 대해 슬퍼하며
위로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런지 1년이 지난 후 오랑캐들이 대거 쳐들어왔다. 마을의 장정들은 활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병신이어서
징집(徵集)을 면해 부자(父子)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① 새옹(塞翁)이란 '새상(塞上 : 북쪽 국경)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다.

    우리가 인생(人生)을 살면서 이 늙은이와 같은 삶의 지혜 ― 모든 것은 다만 '과정
'일 뿐이요 '변화'할 뿐이라는 것을 깊이 아는, 그리하여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사는
― 에 눈 뜰 수만 있다면!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네 삶 속에서 치러내야
할지도 모르는 무수히 많은 수고와 아픔과 무게들을 덜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참으로 많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삶을 눈부시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은 그러지를 못하고,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또한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여기고는 안타까이
그 끄달림에 그저 발만 동동거리며 서있구나……. 아아, 나는 그들에게 이 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이 깊고도 풍요로운 삶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존재의 지복(至福)을 누리게 하고 싶다.

    持而盈之, 不如其已(잡고서 그것을 가득 채우려 함은 그만두느니만 못하고)……
잡고서 그것을 가득 채우려 함은? 무얼 잡고서?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잡고서 그
'나'를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우려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늘상 하는 일이 이런
일들이지만, 도대체 얼마만큼을 채우면 우리가 만족하게 될까?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는 '만족'을 위하여 발버둥쳐야 하는 불만족이 영원히 끝이 날까?
    그런데 정녕 그런 순간이 있을까? 그리고 '만족'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무언가로
가득 채워짐으로써, 혹은 어떤 조건이 충족됨으로써 비롯되는 것일까?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채워서 만족하려는' 그 마음의 허망함을 깨닫고 한 순간 그것을
내려놓을 때 문득 우리는 이미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더욱 충만한 자신을 말이다.
    진정한 만족[自足]이란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해서
채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而銳之, 不可長保(헤아려 가며 더욱 날카롭게 해보지만, 오래 보존할 수가 없다)
……이 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우리가 숫돌에 칼을 갈 때 가끔씩 칼날을 세워
눈으로 헤아려 가면서 날을 갈 듯이, 그렇게 우리 자신을 가끔씩 돌아보며 더욱 날카롭고
빈틈없으며 강하게 해보려 하지만, 아아 그 오랜 세월 마음 쓰고 노력한 만큼 정말
강해지던가?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빈틈없고 가득 찬 사람이 되던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런 사람이 됨으로써 비롯되는 영혼의 '쉼'이 오던가? 그렇기는커녕 웬일인지
자꾸만 그런 사람이 된 체 하고, 짐짓 강한 척, 아는 척 하게 되지 않던가? 그렇게
진짜의 '진척'은 없는데 '포장'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정교해지고 많아지지 않던가?
아아, '참됨'을 <추구>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이 어쩔 수 없는 '거짓'과 '오만'이여―!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지리산에서의 나의 지난 삶들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교직(敎職)을 그만두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산중턱의 토굴 같은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칭찬을 자주 들으며 자라온 터라 그것이 묘하게도
자기우월감으로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데다, 교직을 그만두고 지리산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훈장처럼 여겨져 한동안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스스로를
자랑하며 다녔었다. 말하자면, "교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진리를 추구하는 나 같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라는 식이었으며, 하필
지리산이라 도(道) 닦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언제나 그들 앞에서는 열심히 수행하고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연(修行者然)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그때의 나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곧 말라버릴
무화과 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벗었음을 가리고자 한"② 짓이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맞닥뜨리기가 두려워 "능히 지키지도 못할 온갖 좋아 보이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고 포장하기에 급급했던(金玉滿堂, 莫之能守)"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얘기를 조금 하려는 것이다.

    ② 도덕경 3장에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하와가 자신의 '벗었음'을 부끄러워
하며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고작 무화과 나무잎으로 가려봐야 얼마를 가리겠는가?
그런데도 마치 그러한 노력들이 온전히 자신을 가려주고 숨겨줄 수 있기라도 한듯이
얼마나 자주 그 허망한 몸짓들을 되풀이했던지!

    그때 나는 하루 두 끼에 소식(小食)을 하고 있었다. 토굴 같은 집이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래도 등 눕힐 아랫목은 따뜻했다. 겨울 산중턱에는 일찍 어둠이 찾아왔고,
그러면 나는 두 개의 양초에 불을 붙이고 내가 손수 대나무를 대어 만든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지나온 나의 삶을 기억나는 한껏 자세하고도 세밀하게 적어 보는
'자아 탐구'를 하고 있었다. …… 아니, 가만!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마침내 모든 방황에 종지부를 찍다!>라는 제목으로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낼 생각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다만 노자(老子)가
하고자 하는 얘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특히 기억나는 예화(例話) 한 두 가지만을
소개하기로 하자.

    이것은 아마 지리산에 들어가서의 처음 두 달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마치 자기우월감에 빠진 '환자
'처럼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무슨 대단한 수행자라도 되는 양 우쭐거리며 끊임없이
지껄이고 다녔는데, 그러다가 문득 혼자 있게만 되면 이번에는 내가 언제 수행자
였느냐는 듯 더없이 게으르고 권태로워 하면서, 자신이 정작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특히 홀로 있는 저녁 시간이 되면 거의 완전히
'본색'을 드러내어, 그 무엇도 하기 싫어하고 귀찮아하면서 멍청히 아랫목에 앉아
다만 지겨워만 하고 있기가 일쑤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엔가부터는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문득 눈에 띈 생라면을 부숴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지리산에서의 나의 생라면 부숴먹기는 라면 한 박스가 바닥이
나도록 매일 밤 계속되었는데, 처음엔 그저 생라면만 부숴먹다가 나중엔 더 맛있게
먹으려고 스프를 조금씩 뿌려가며 먹기도 하고, 또 어떤 땐 버너불에 살짝 구운 다음
그 위에 스프를 뿌려 먹으니 더욱 맛있는 것 같아 한꺼번에 두 개씩 먹기도 했다.
하! 생라면을 부숴먹어 본 사람은 알리라, 몇 입 깨물지 않아 곧 입안이 헌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의 생라면 부숴먹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고 슬픈 것은, 그런 중에도 유독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나는 또다시 용맹정진
하는 수행자로 표변(豹變)하여, 생라면을 부숴먹기는커녕 그 시간 내내 공부하고 정진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 앞에서 끝없이 끊임없이 지껄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직 생라면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그 입으로 말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가끔씩은 이런 저런 볼일 때문에 대구로 나왔었는데,
그럴 때면 으레 예의 그 자기방기적(自己放棄的)인 게으름과 권태가 발동하여, 무슨
특별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시내 중심가로 나가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곤
했다. 그러다가는 또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남의 눈을 피해가며 야한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3류 영화관을 곧잘 찾곤 했다.
    그런데 이때의 나의 모습을 볼라치면, 마치 007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과
민첩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의 마음 속에는 내가 진리를 얻기 위해 속세를
떠난 수행자라는 의식 ― 이것은 특히 남들을 만나기만 하면 대단한 자부심과 허영심으로
더욱 강화되고 미화(美化)되었다 ― 이 무슨 자랑처럼 각인되어 있었기에, 문득 야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 순간부터는 혹여라도 나를 아는 사람에게 들킬까봐
가슴 졸이며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관이 가까워 올수록 강도를 더해가 때로는 정말이지 총을 든 007처럼
벽에 등을 착 붙인 채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연히 아는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이번에는 그냥 그곳을 지나가던 중인 것처럼 짐짓 온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은 채
태연하게 행동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영화관 입구까지 다다르게 되면 이번엔 극도의
긴장감과 민첩함으로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는데, 오! 그 마지막 순간에
남의 눈에 들켜서는 아니되지 않는가! 그렇게 영화관에 들어가서는 누구의 눈에도 띌
염려가 없는 어두컴컴한 속에 앉아 회심의 미소마저 띠면서, 야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마른침을 꿀떡 삼키면서 눈이 벌겋도록 영화를 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다시 밖으로 나올 때는 아까와는 반대로 재빨리 영화관을
빠져나오고, 그리곤 가급적 멀리, 누가 보더라도 그런 저질의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곳까지 빠른 걸음으로 가서는, 이번에는 꿈에서조차 영화를 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 되어 다시 거리를 활보한다.

    하하―, 그렇게 끝없이 끊임없이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온갖 거짓과 가식 속의
허망하고 헛헛한 삶을 살아가던 나도 <남의 눈에 비친 나>나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해갔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제는 그냥 다만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 I am who I am ― 아아,
겉과 속이 같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그 모든 방황이 끝난 이 삶이 얼마나 복되고
충만한지! 그리하여, 말로써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이 지복(至福) ―
우리 모두에게 이미 구족(具足)한 ― 을 나는 올올이 모두와 나누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찾는 인생의 궁극의 '답(答)'은 <추구>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케 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는 '완전'
이란 실재(實在)하지 않는, 우리의 관념 속에만 있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답'은
뜻밖에도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답'을 얻고서야 마침내 <추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득 <추구>를 그칠 때 내가 이미 처음부터 '답'이었음을 그제서야 알리라.

    富貴而驕, 自遺其咎……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자꾸만 '持而盈之'하려 하고 '취而銳之'하려 하며 '金玉滿堂'
하려 하다 보면 어느새 교만해져서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못한 엄청난 노력과 공을 들여 도달한 자리인데, 어찌 교만이 따라붙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시 한 번 진실로 말하거니와, 진리는 결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 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며"(마태복음 19:23∼24),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 5:3) 아멘!

    功遂身退, 天之道……공(功)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 그것이 하늘의 도(道)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功)'이라는 것은 다만 우리의 삶 속에서 무언가 훌륭하게 이루어낸
업적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네 삶의
모든 순간 순간이 온통 '공(功)'인 것이다. 따라서 '공을 이루면 몸이 물러난다
(功遂身退)'는 것은 다만 어떤 특정한 일의 '결과'와 그에 대한 무집착(無執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순간 순간의 삶의 공(功)>과 <그 모든 순간 순간에
있어서의 신퇴(身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다만 <현재>를 사는 것"
이며, "머무르는 바 없이 삶을 사는 것[應無所住而生其心]"이니,

또한 하늘의 도(道)이다.

 

 

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 들이끼속의 烏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