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는 이미 내게 '마시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홍차를 많이 마신 사람들은 홍차를 친구에 비유하고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제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홍차는 내 삶의 일부분을 함께 하고 나의 혼잣말을 들어준 친구 같은 존재다.
--- 머리말 중에서
어느 홍차폐인의 향기로운 기록 "홍차는 혼잣말을 들어주는 속 깊은 친구다"
우리에게 홍차는 어느 먼 나라의 고상한 취미이거나, 슈퍼마켓에서 파는 티백의 한 종류로 그 맛을 가늠했던 낯선 음료였다. 그러나 한 잔의 홍차에서 커피보다 진한 매력을 발견한 블로거의 홍차 탐닉일지가 네티즌의 마음을 진홍 빛깔로 물들이고 있다.
짧은 직장 생활을 접고 평범한 일상에 묻혀 지내던 저자는 우연히 홍차의 세계에 발을 디뎠고(첫 번째 잔 - 차를 만나다), 홍차를 친구 삼아 수다를 떨고 (두 번째 잔 - 차와 속삭이다), 홍차의 변화무쌍한 응용에 몰두하기도 하다가 (세 번째 잔 - 차에 빠지다), 결국 홍차로 일상을 촘촘히 수놓는 경지에 이르렀다(네 번째 잔 - 차를 사랑하다).
그녀에게 홍차 티백 혹은 찻잎이 우러나는 3분의 시간은 숨 가쁜 일상에서 크게 숨을 쉬고 창밖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 따뜻한 티 포트에 손을 얹고 팍팍해진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시간, 향을 들이 마시면서 눈을 감고 온 몸의 긴장을 푸는 시간, 그리고 혼잣말마저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속 깊은 친구와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마시는 것' 이상이 되어 버린 홍차 한 잔의 존재
홍차 없이는 단 하루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는 저자가 홍차를 즐기는 법은 다양하고도 풍요롭다. 아침잠을 깨우는 브렉퍼스트 티, 케이크보다 더 달콤한 향의 캐러멜 티, 오후의 나른함을 활력으로 바꾸는 상큼한 베르가못 향의 얼 그레이, 치약보다 개운하게 입맛을 정리하는 민트 티, 부드럽게 온 몸으로 퍼지는 밀크 티... 냉침을 하겠다며 소주에 담그기도 하고, 심지어는 뜨거운 홍차 위에 아이스크림까지 동동 띄워 마시는 그녀는 무궁무진한 홍차의 세계에서 행복한 탐험을 하고 있다.
'나만의 티타임'에서 찾은 위로와 행복
흔히 영화에 등장하는 오후의 티타임은 꽃무늬가 화사한 티 포트,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쿠키, 넓고 화려한 정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의 티타임에는 그녀만의 골든 룰을 지켜서 우려낸 차 한 잔이 전부다. 그녀에게 티타임은 거창하고 번거로운 의식이 아니라, 매일 먹어야 하는 밥과 같은 것이다.
그녀가 털어놓은 홍차와의 일상은 정갈한 시와 닮아 있다. 웨지우드, 해로즈, 실버 포트, 마리아쥬 프레르 등의 유명 홍차 브랜드 시음기는 간결하지만 각각의 개성과 매력을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더불어 직접 만들어 소박하고 정겨운 티코지, 어머니가 물려주신 도일리, 조카와 나눠먹은 과자 등이 어우러진 그녀만의 티타임은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해 준다.
아직도 마셔보지 못한 홍차가 너무 많아 리스트를 쌓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맛보지 못한 홍차를 마음껏 마셔 볼 수 있는 외국여행을 꿈꾸는 홍차폐인.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홍차에 대해 알아갈 것이며 부족한 부분은 채워 나갈 것이고, 가능 한 오래도록 티타임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누구나 바닥을 통해 가슴 속에 담아 놓은 추억들을 갖고 있다.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던 넓은 안방의 노란 장판지. 자잘하고 울긋불긋한 타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맞물리며 깔려 있던 축축한 욕실 바닥. 왁스 향이 켜켜이 배인, 칙칙하게 번들거렸던 교실의 마룻바닥. 콩알 만한 자갈들과 뽀얀 흙먼지가 쌓여 있던 삭막하게 넓었던 메마른 운동장 바닥. 촌스럽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패턴이 끝없이 반복되었던 보도블록. 그 보도블록에 점점이 쌓여 있던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 -프롤로그 중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감상적인 동경과는 별개로, 나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신기루처럼 세워지는 아파트들의 모습을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는다. 저런 건물, 저런 풍경이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조건들의 절묘한 조합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다름 아닌데, 나는 아직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것이 신기루처럼 생겨나고 사라지는 한국 사회, 젊은 건축가가 바닥에 탐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신기루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어지로운 와중에도, 내 존재의 근거, 내 지난 삶의 근거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묵직한 무언가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그것이 저자가 바닥에 탐닉하는 이유일 것이다.
바닥에 대한 탐닉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다. 흔히 우리는 '걸을 때는 땅을 보지 말고 멀리 보고 씩씩하게 걷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라' 같은 말을 들으며 성장해왔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높이 치고 자글자글한 일상보다는 거창한 겉모습에 비중을 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바닥은 햇빛과 빗물, 사람,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을 짓고, 그 표정 안에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또한 바닥은 바닥을 차지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열한 싸움터이다. 저자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흔적을 바닥을 통해 읽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읽어내는 섬세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 현실의 바닥을 통해 오히려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이상의 모습을 이 책의 행간 곳곳에서 제시한다.
바닥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주관한 제1회 김중업장학재단 수혜자로 선정되어 파리를 체험하고 공부했고, 제1회 무애건축상을 수상하는 등, 이제는 전도유망한 건축가가 된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바닥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그는 우리가 매일 걷고 차를 타고 다니는 이 땅 위의 모든 '바닥'을 사랑한다. 바닥에 그려진 선 하나, 햇빛에 반사된 그림자 하나에도 눈길을 두고, 거기에서 사람들의 의도와 쓰임새를 읽는다. 빗물에 젖은 바닥, 사람의 손길이 닿은 바닥, 낯선 도시의 바닥, 기호로 점철된 바닥, 세월의 흔적을 담은 바닥.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신선한 시선으로 바라본 '바닥'에는 세심한 디자이너의 배려, 어느 행정가의 고민, 누군가의 치기어린 장난이 숨어 있다. 어쩌면 저자의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들은 바닥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출퇴근길에 지나치는 지하철역의 바닥에서 도시인의 익명성과 쓸쓸함을 포착한다. 그런가 하면, 빗물이 얼룩덜룩하게 마른 골목길에 잠시 멈춰 서서 따뜻한 미소를 던진다. 대학로의 거리 공연을 보면서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퍼포먼스보다는 비닐 장판을 깔고 청테이프로 고정시킨 임시 무대의 바닥에 더 많이 감탄한다. 흔하디흔한 맨홀 뚜껑이 너무나 '무심하게 디자인 되었다'고 안타까워하고, 깔끔하고 매끈하게 그려진 도쿄의 횡단보도 기호에서 돋보이는 디자인 감각을 찾아낸다. 패션의 완성이 구두이듯, 그에게는 일상의 완성이 바닥이었다.
바닥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미래를 이야기하다 저자 천경환이 바닥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미를 찾는 것은 누구나 바닥을 통해 가슴 속에 남을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안식처로, 때로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때로는 쓸쓸함을 치유하는 위로의 공간으로... 무심히 잊어버렸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바닥이 하나쯤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닥은 타임캡슐이다. 천장이 무너지고 벽이 쓰러진 한참 뒤에도 바닥은 홀로 남아서 우리에게 예전의 기억을 전해준다. 바닥을 파헤치는 것으로 우리는 과거와의 대화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바닥은 미래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역사가 시작되며 예술이 창조되는 곳이 바로 바닥이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고 공존하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 바닥에서 우리는 오늘도 숨쉬고 먹고 자고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일깨우고 있다. 출퇴근길과 점심시간, 휴일이나 여행길에 그가 발견한 바닥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닥'의 아름다움과 추억, 미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늘 발길질 당하고 밟히고, 눈길 한번 받지 못하던 바닥이 들려주는 담담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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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를 마시면서 헷살이 깊이 들어온 마루바닥에 누워 책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의 주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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