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의 한귀퉁에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고 놓여있는 책,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세모에 읽기 적당한 책이다.
한 해 동안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면서, 나의 자유의지에 충실하며 생생한 삶의 시간, 날 것의 삶을 살아낸 니나였나? 아님 한 번 사랑하기로 운명 속으로 걸어 온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생을 완성하려는 슈타인인 가를 물을 수 있겠다. 니나는 유목민적 사유, 표류하는 삶의 표상이라면 슈파인은 정박한 삶의 표상이다. 누구의 생이 옳다고 규정할 수 없다. 모두 니나일 수는 없고 모두 슈타인일 수는 없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 빛이었는가가 중요하다. 어둠이었다해도 감당할 수 있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는> 주인공 니나 부슈만이 자신의 생일날 언니를 불러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나누는 대화와 니나에게 보내져 온 슈타인 박사의 니나를 향한 일관된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 결혼, 임신, 곧 이은 이혼, 체포, 구금...그러나 그러한 삶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 단 한 번도 외부와 타협하지 않았던 니나 부슈만의 생에 대한 저돌성. 선택에 따르는 길위의 날들, 베를린 국민 재판소 사건으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한 작가 루이제 린저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가 숨어 있는 듯한 소설 속의 니나 부슈만도 반나치파에 가담하여 위험을 자초하기도 하는 등 생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집념과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생의 한순간까지도 완벽하게 사랑한 여자, 자유에의 강렬한 의지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자, 기만과 타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니나 부슈만과 그녀의 고집스러움까지도 사랑한 슈타인 박사의 일기를 통해 전달되는 니나 부슈만의 의식세계는 고통을 넘어서는 생에 대한 완벽한 긍정과 집중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제 린저가 창조해낸 니나 부슈만이라는 인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생을 회피하지 말고 생생하게 살 것을 은연중 요구한다. 흔히 번역서가 그렇듯이 이 책 역시 누가 번역햇는가에 따라 니나와 슈타인의 시선으로 양분된다.
전혜린은 이렇게 말한다.
"영혼의 해후나 순수한 공감의 순간을 서로 가질 수 있는 사람끼리는 결코 결혼할 수 없고, 결혼의 전제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린저가 말하려고 한 것 같다. 불가해한 상대방의 본질에 대한 격렬한 지적 호기심, 어깨를 누른 강한 손길, 우연의 섭리, 그리고 누구의 명령을 받고 착하게 복종하고 싶은 여자의 본능, 안정에의 동경, 이러한 여러 요소가 전제로 되어서 마치 토끼가 덫에 잡히듯 서서히 자연스럽게 꽉 잡히고 마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니나와 슈테판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 해후를 실어본다. "
나는 인생한데, 나에게 그런 아름다운 해후를 마련해준 데 대해서 감사한다. 니나의 목소리는 내가 들은 마지막 인간의 것이 되어야했고 니나의 눈은 내가 본 마지막 눈이 돼야했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1929년 9월 15일 ---------새로운 여성 환자가 한 명 생겼다. 그 여자는 골칫덩어리다. 자기자신은 그것을 짐작도 못 하고 잇지만, 나는 이상하고 거북하고 물리칠 수 없는 방법으로 귀찮게 하고 있다. 한 주일 전 그 여자는 진찰 시간에 왔었다. 그 여자는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에 어린아이인 줄로 알았었다. 여위고 제대로 자라지 못한 소녀인줄로만 생각했다. 그 여자는 한 번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않았다. 그 여자의 차례가 올 때까지는 두 시간이나 걸렸다. 마지막 환자였다. 그 여자가 문지방을 넘어섰을 때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지 변화를 일으켰다. 나 자신이 변화를 한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쵸다보았고 ㄱ 여자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를 보고 잇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속회를 바른 벽처럼 창백햇다. 그 여자는 두 손으로 허공을 짚엇으나 의식을 잃기 전에, 그리고 내가 잡아주기도 전에 다시 기운을 차렸다. 시린을 하지 않으려고 비상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여자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앉아서 구두끈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발이 퉁퉁 부어 잇음을 당장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도우려고 했지만 그 여자는 내 손을 뿌리치고 양말을 발에서 홱 잡아채서 벗었다. 패혈증(패혈증)이에요. 하고 그 여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증세가 좋지 않게 보였다.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헬레네를 소리쳐 불렀다----- 중략----- ------------ 그 여자는 두 눈을 감고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직 한 번도 환자가 나를 유혹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나를 유혹햇다. 그 여자는 아름답지는 않았다. 마르고 슬라브적인 얼굴에 고등색 피부를 가진 여자, 그 나이 또래의 젊은 처녀에게서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우아한 맛도 없고 젖은 듯 양쪽 관자놀이에 달라붙은 허클어지고 먼지투성이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런 여자였다. 보통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 마음에 들었다. 마치 광야의 바람에 휘날려온 듯이 그 여자는 고동색 피부를 하고 깡마르고 거부하는 자세로 진지하고 또 대단히 위중해서 그곳에 누워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차를 준비하라고 헬레네를 불렀다. 내가 진찰실로 돌아왔을 때, 그 처녀는 일어나려고 했다가 이번에는 정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여자를 팔에 안아본 것은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여자는 가벼웠다. 그리고 열 때문에 뜨거웠고 먼지와 땀내가 코를 찔렀으며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를 차가 있는 데로 안고 가는 데 마치 침대로 안고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 루이제 린저, 장두식 역, 생의 한가운데, 범우사, 1999, pp. 44~46 1947년 9월 7일에서 8일에 걸친 밤에 -----------이것이 내 최후의 일기가 될 것이다. 벌써 글을 쓰기도 힘이 든다. 그래서 나는 다만 간간이 쉬어가면서 쓸 수가 있을 뿐이다. 벌써 나는 생명보다는 죽음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추억도 아무런 알맹이가 없게 되었다. 니나를 위해서, 완결을 위해서 나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니나는 늦은 하오애 왔다. 나는 헬레네에게 나를 니나와 단둘이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 애는 내가 흔히 그 애의 마음에 들기 위헤서 해달라고 하던 소원을 모두 비통하고 용감하게 들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모르핀을 들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은 비교적 기분좋고 활기찬 상태를 유지하였다. 니나는 내게 꽃을 가지고 왔다. 처음이었다. 그레서 나는 깉은 감동을 느겼다. 나는 나나를 초대하는 데 좀 덥을 먹었었다. 왜냐하면 니나의 생기 있는 태도를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니나가 굉장히 변한 것을 발견하였다. 지난해의 숨가뿐 명예심이나, 쉽게 믿어버리고 소매를 걷어붙인 듯한 열성, 흥분과 과도노출 같은 것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과도기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활동적인 면에 끼여 자기한테 주어진 침묵에서 벗어나려는 필연적인 것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인 시도였던 것이다. (아마 당신은 니나, 이 글을 아직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소. 그리고 이 페이지를 읽고 수긍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조만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오.)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기서 되풀이하기는 싫다. 물론 나는 늘 그랬듯이 어두운 대안(對岸)에 남아 있었고 니나는 다리도 없는 강 건너쪽인 밝은 기슭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상대자가 자기한테 소리치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이해했다. 니나가 가기 전에 우리가 얘기를 한 마지막 말 끝에 생겼던 침묵의 그 측량키 어려운 시점에서처럼 우리가 서로 가까웠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둡고 걸어갔을 때 나를 위해 늘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당신이었소. 당신이 오면 당신과 더불어 태양이 찬란한 자유로운 땅을 볼 수가 있었소. 그리고 나는 그 땅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의 마지막 정망 상태 속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바로 그 광경이었단 말이오. 아아, 하고 니나는 부드럽고 슬픈 듯 대꾸했다. 선생님은 왜, 그 문을 항상 선생님게 밀어붙인 것이 바로 저였다고 말씀하지 않으시죠?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 설사 당신이 그 문을 열어서 붙들고 있았다고 해도--- 그리고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자주 그리고 오래 그렇게 해주었지만---그랬다고 해도 나는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힘이 없었을 거요. 내 눈엔 색과 빛을 위헤서 마련되지는 않았소. 그렇기 때문에 알겠소? 우리는 서로 곧잘 마난볼 수 있기는 햇지만 둘이 다 그 저쪽의 다른 나라가 있는 문지방에 발을 얹어놓을 수는 없었소. 당신은 나의 인생을 승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것은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나도 판이하엿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저의 인생을 이해하고 승인할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니나는 소리쳤다. 나는 해야할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까닭에 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나는 미소를 지었다. 니나는 여전히 놀라서 나를 쳐다보고는 차차 이해가 가는 드시 이윽고 이렇게 나직하게 물었다. 왜 선생님은 '할 수 있다', '이다', '원한다'는 형재형 대신에 '할 수 있었다', '였다', '원했다'는 과거형을 쓰시죠? 그 질문에도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니나가 그 무언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니나가 그 침묵이 어떤 심연 끝에 서 있는 것인지를 이해했다고 느꼈다. 그러고 나서 니나는 가버렸다. 그 이상은 더 얘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니나가 길 모퉁이로 사라지기 전에 잠깐 한 번 돌아다보았을 때, 마지막으로 이 지상에서의 이별의 쓰라림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인생한데, 나에게 그런 아름다운 해후흫 마련해준 데 대해서 감사한다. 니나의 목소리는 내가 들은 마지막 인간의 것이 되어야했고 니나의 눈은 내가 기억해둘 마지막 눈이 돼야했다. 아침에, 다시 한 번 나의 양심은 나의 인생을 회고해보기로 강요했다. 그리고 나는 많은 빛이었던 것을 발견한다. 인생의 빛, 이제 너는 변경할 수 없는 그런 순간에 그런 것을 통찰한 고통은 크다. 나는 니나한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어스름이 닥치고 나를 위한 시간이 다가온다. 고통이 시작되고 나의 의식은 장막에 싸이기 시작한다. -루이제 린저, 장두식 역, 생의 한가운데, 범우사, 1999, pp.35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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