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산문시 혹은 잠언시라 불리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883~85년에 간행되었다. 차라투스트라(고대 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 교조 자라투스투라의 독일식 이름)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산을 내려와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뛰어난 문장으로 기술했다. 이 작품에는 니체의 중심사상인 '권력(힘)에의 의지', '초인(超人)', '영겁회귀(永劫回歸)' 등이 비유와 상징 및 시적인 문장으로 전개되어 있다.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파괴하고 현대인의 중심문제를 예언한 이 책은 뒤에 오는 철학자·시인·작가 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그리스도가 전하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카테고리, 즉 그리스도를 앞세운 기득권적 질서(기독교 안의 반그리스도적 행태, 종교적 엄숙주의, 배타주의)를 부정했음을 알 수 있다. 신에 대한 강한 부정은 신적인 것의 열렬한 갈망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신적인 것의 발현은 환시나 초월적인 경지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을 두루 갖춘 위버멘쉬의 출현, 즉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기 초극이 가능한 진정한 인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외침이다... 니체의 사상뿐 아니라 .비판적 책읽기는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옮겨본다.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63~)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이는 자들을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는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런 독자들의 시대가 한 세기 더 지속되기라도 한다면넋조차도 악취를 풍기게 되리라.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배워 읽을 수 있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쓰는 것은 물론 생각까지 부패하게 마련이다. 한때는 넋이 신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람이 되더니 지금은 천민이 되고 말았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산줄기에서 가장 짧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길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려면 긴 다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잠언은 산봉우리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을 들으려면 크고 우람한 체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엷고 깨끗한 대기, 신변의 위험, 유쾌한 악으로 가득찬 넋, 이런 것들은 썩 잘 어울린다. 나는 내 가까이에 요미를 두려 한다. 나 용기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유령들을 위협하여 쫒아내는 그런 용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요마를 만들어낸다. 용기는 웃고 싶은 것이다. 나의 느낌은 너희의 느낌과 더 이상 같지 않다. 내 발 아래 있는 이 구름, 내가 비웃고 있는 이 어둡고 무거운 구름, 그것이 바로 뇌우를 가져오는 너희의 구름이렷다. 높이 오르려 할 때 너희는 위를 올려다 본다. 그러나 이미 높이 올라와 있는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너희 가운데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높이 올라가 있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더없이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과 비극적 엄숙성이라는 것을 비웃는다. 지혜. 그것은 우리가 용감하고, 의연하고, 냉소적이며 난폭하기를 소망한다. 지혜는 여인이고, 그리하여 늘 전사만을 사랑한다. 너희는 말한다.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고. 그러나 너희는 어찌하여 오전에 긍지를 갖다가도 저녁에 이르러서는 체념하는가?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 그러나 그토록 연약한 언동을 삼가라! 우리 모두는 짐깨나 질 수 있는 연약한 암수 나귀가 아닌가. 우리는 한 방울 이슬이 떨어졌다 하여 파르르 떨고 있는 저 장미 꽃봉오리와 어떤 점에서 같은가? 그렇다. 삶에 친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속에는 얼마간의 광기가 있기 마련이다. 광기 속에는 얼마간의 이성이 마련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내게도 나비와 비누방울이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같은 자들이 행복에 관하여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들 경쾌하고 어리숙하며 사랑스러운 그리고 발랄한 작은 영혼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스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부르게 된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런데 나의 악마, 나는 그가 엄숙하며, 심각하고, 심오하며 당당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력의 악령이었던 것이다. 저 악마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노여움이 아니라 웃음으로써 살해를 한다. 자, 저 중력의 악령을 죽여 없애도록 하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줄곧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제 나는 가볍다. 나 날고 있으며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야 어떤 신이 나로 인해 춤을 추고 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정동호역, 책세상, 2007, 63~65쪽
오쇼 라즈니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하여, 심지어 광인 프리드리히 니체 4)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몇 귀절도 마찬가지다. 다른 책을 전혀 쓰지 않았다 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것만으로도 니체는 인류에게 무한한 공헌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값진 작업을 했다.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짜라투수트라를 발굴한 것이다. (페르시아의 예언자이며 짜라투스트라교의 개조. B.C. 5세게 중엽에 리디아의 그리스 역사가 크산투스는 짜라투스트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원전은 없어졌고 일부가 B.C. 1세기경의 인용문에 남아 있을 뿐이다. 페르시아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짜라투스트라는 알렉산더 대왕 이전 285년에 히스타스페스 왕을 귀의 시켰다고 하였고, 그때 나이 42세이며, 7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선악 이원론을 체계적으로 세운 최초의 사람이라 생각되어지고 있다. 선의 힘은 오르므즈드와 그 일곱 천사로 되어 있는데, 악의 힘은 그 이름이 금기시되어 분명하게 전해지진 않고 다만 그아래의 악령의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윤리적 이원론과 그 발전으로서의 짜라투스트라교는 이란 고원 오아시스의 반농반목의 정착민 사회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러한 정착민을 외부로부터 위협하는 유목민을 악의 힘이라 하고 스스로를 선의 힘이라 한 것이 아닌가 추측죄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멀리 중국에까지 미쳐 도교의 신비서 [황금꽃의 비밀]에 까지 영향을 남겼지만 그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들어 니체가 발 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탄생 시켰다.) 짜라투스트라를 재등장시키고, 그에게 불후의 생명과 부활을 준 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앞으로 미래의 성서가 될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럽다. 미소를 지을 수는 있어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단 말인가? 웃음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농담에 갓난아기 짜라투리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농담이다. 이 존재계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우주적인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다. 그대의 노트에 우주적인 농담이라고 쓰고 밑줄을 그어라. 나는 그대가 밑줄을 긋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다. 내 귀가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내가 원할 때면 나는 연필 굴러가는 소리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원할 때면 나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을 때면 나는 전혀 듣지 않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린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전생애가 하나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고통 속에서 삶을 산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만, 삶이 하나의 환희가 되고 넘치는 웃음이었던 사람은 금방 잊혀진다.
영어권에서 그의 이름을 조로아스터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괴물같은 이름인가! '짜라투스트라'는 장미 꽃잎과 같은 향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 는 기계 냄새가 나고 죽은 이름이다. 짜라투스트라까지도 자기의 이름이 '조로아스터'로 바뀐 것을 알면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 책을 쓰기 전 까지는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교도들의 강압에 못이겨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도로 탈출했가. 인도 말고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인도는 여권이나 비자 없이도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살인자 회교도들의 탄압을 피해 아주 적은 숫자의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만이 인도로 탈 출했다. 현재 그들의 숫자는 십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자, 불과 십만 명 정도의 추종자밖에 갖지 않은 종교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그들 대부분이 인도에 살고 있을 뿐이고, 그것도 봄베이라는 한 도시 주변에만 모여 산다. 그들 자신 조차도 짜라투스트라를 잊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 살아 가야 할 힌두교인과 타협한 것이다. 늪을 피해서 달아났지만 결국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더 깊은 진흙 웅덩이에 한쪽에는 늪, 다른 쪽에는 진흙 웅덩이, 그 중간에만 '길'이 있다. 붓다는 그 길을 중도라고 불렀다. 줄 위를 걷는 광대처럼 정확히 중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위대한 공헌은 짜라투스트라를 현대에 되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크나큰 잘못은 아돌프 히틀러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는 둘다를 동시에 했다. 물론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선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그것은 니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다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잘못 해석하는 것은 사람 들의 자유다.
나는 그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은 단지 몇 권에 불과하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내 도서 목록에 오를 첫번째 책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이다. - 오쇼 라즈니쉬, 류시화 역, <내가 사랑한 책들>중에서
영원회귀나 위버멘쉬 등을 핵심 주제로 그의 사상들이 집약되어 있는 철학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난숙한 사상적 경지에 이른 니체가 1883∼85년에 완성한 대표작이다. 니체는 1882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살로메와 마지막으로 만난 후 이탈리아 여러 곳을 전전하는 중에 이 책의 첫 부분이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883년에 1, 2부가 출간되었고, 빠른 속도로 3부까지 진행되어 1884년에 3부, 1885년에 4부가 나왔다. 1883년에 출간된 초판본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Ein Buch f r Alle und Keinen"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크게 4부로 나눠져 있고 각각의 부는 다시 20개 안팎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0년 간 산중 명상을 마친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세계로 내려와 자신이 터득한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신약성서'의 예수의 행적에 빗대어 수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는 니체의 대표적 저작이다. 기독교적인 이원론과 목적론을 생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는 니체의 근본사상이 깔려 있는 이 작품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는 곧 인간 생명의 약동이자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니체의 작품 세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치는 각별하다. 이 작품은 시기적으로 그의 집필 활동의 정점에 씌어진 것으로, 그의 활동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용을 두고 본다면 그 의미는 더욱 돋보인다. 그 자신의 철학의 완성 단계에 이른 니체가 이전의 사상 모두를 받아들여 통합하고 이후의 사상적 전개에 토대와 방향을 제공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 철학의 전부이기도 하다. 거기에 니체 철학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니체 스스로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것 전후에 씌어진 작품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에 기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로 그 전에 씌어진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은 이 작품을 위한 입문서에 주석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바로 그 뒤에 씌어진 '선악의 저편'은 그것을 풀이하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작품도 니체의 주요 작품이라 불러 손색이 없는 것들이어서 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 즐거운 학문(1882) 中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의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의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니체가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1장 中
19세기에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시인, 음악가, 문헌학자, 문화 비평가, 심리학자, 계보학자, 미학자. 그가 주장한 주요 철학적 사상에는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6][7], 신은 죽었다, 운명을 사랑하라[9], 영원 회귀 등이 있다.
특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대륙철학,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대륙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와 더불어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르크스와 니체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진실되지 못하다는 말로, 니체가 당대에 끼친 지성사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발언이었다.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오인되기도 하지만, 어떤 철학자보다 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극단적일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그러한 까닭 중 하나는 니체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지며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온화하고 유머를 좋아했으며 사교성이 있었다고 한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왕국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생일이 똑같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니체의 가정사는 복잡했다. 그는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역시 목사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 여동생 엘리자베스, 어린 남동생 요제프, 할머니, 미혼인 두 고모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니체가 5살 때 뇌연화증으로 죽었다. 몇달 후 동생 요제프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이후 니체는 여성들 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가운데 홀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니체는 가장으로서 정신적 부담에 시달렸을 것이다.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작곡 활동이나 시를 짓는 등 음악과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 청년이 된 니체는 1864년, 본 대학교에 진학해 신학과 그리스 고전 문헌학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본 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2학기가 지난 1869년, 학생신분이었던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바젤 대학교 문헌학 교수가 되었는데, 심지어 이 때의 니체에게는 아무런 학위도 없었다. 바젤 대학교는 이례적으로 학위 논문 심사를 거치지도 않고 라이프치히 대학을 통해 니체에게 박사학위를 주었고, 바로 한 달 뒤 니체는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니체는 그 대학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바젤 대학교 문서에 따르면, 리츨(F. W. Ritschl) 교수의 추천과 니체의 문헌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 때문에 이러한 이례적인 결단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가 바젤대 교수가 되면서부터 니체는 인근에 거주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깊은 친분을 맺으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바그너와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토론으로 날을 지새우기도 했다. 바그너와의 교류는 그가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전환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깊게 반영하여 작곡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크게 감복한다. 니체는 1870년부터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발전시켜 1872년 "비극의 탄생"을 완성했다. 그는 이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의무병으로 종군했다. 그러나 병으로 귀환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병에 시달렸다.
1870년대 중반 즈음에 바그너가 점차 데카당스, 독일 제국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여긴 니체는 1876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보고 회의를 더해갔다. 니체는 사실상 이때부터 바그너와 정신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그너 부부에게 부모와도 같은 정을 느꼈던 니체는 결별 선언을 미루었다. 결국 1882년 바그너 최후의 작품인 파르지팔을 보고 니체는 바그너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여기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바그너 부부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1879년 건강 악화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10년간 유럽을 떠돌며 자신의 주요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1889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정신이 나갔는데,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고는 울면서 그 말을 감싸안다가 넘어졌다. 이날 작성된 편지를 보면 그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날은 니체가 제정신을 가진 마지막 날로 사실상 그의 기일이다. 그의 정신착란을 두고 한 때 매독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적 고찰을 통해 나온 많은 논문에서, 뇌종양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말년엔 정신 발작으로 몸과 마음이 더 쇠약해져 10년 동안 부모님과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뒤 병이 악화되어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니체는 평생 독신이었다. 1882년 친구의 소개로 루 살로메라는 지적인 여자와 친분을 맺고 청혼했으나 차였다. 그녀는 그저 니체의 철학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루 살로메의 회고에 의하면 니체는 자신보다 17살이나 연상이었다고...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 것이다.-=《아침놀》 中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이해를 함에 있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쳐가는 생각,—앞으로의 삶에서 내게 근거와 보증, 달콤함이 될 생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 즐거운 학문
여기서 쓰인 긍정(Bejahung)이란 부정의 반댓말이다. 즉 확인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귀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의미의 귀족주의가 아니라 "정신의 귀족주의"를 말한다. 본인도 '어떤 사람이 귀족인가 아닌가'는 '어디에서 왔는가'(=혈통)가 아니고, '어디로 가는가'로 분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귀족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해 자기 자신의 의욕을 긍정하는 인간이며, 또 자신의 의욕을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인간과 도덕을 두 부류; 노예와 귀족으로 나눈다. 노예는 사랑과 희생을 미덕으로 삼아서, 되도록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주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보한다. 반면에 귀족은 자신의 욕망과 권리를 적극적으로 챙긴다. 또한 노예는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노예의 주인이다. 귀족은 노예와는 다르게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잘못되더라도 기꺼이 책임을 진다. 따라서 니체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마음껏 드러내고 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는 사람을, '정신의 귀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3가지로 나누고, 각각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하였다. '낙타'는, '~해야 한다.'로 상징되는 '용'에게 지배당한다. 낙타는 자신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고통의 사막을 건너면서도 남(용)이 가르키는 방향에 자신의 방향을 맞추며 살아간다. 낙타는 금욕주의와 자기부정을 통해 살아가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상징한다. 이러한 낙타는 사막이라는 고통을 겪으면서 점점 반항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사자'의 단계이다. '사자'는 '용(용이 상징하는 것: '해야 한다.')'의 권위와 가치에 의문을 품고 적극적으로 반항한다. 하지만 반항만 할 뿐이어서, 용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지니지 못한다. 용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어린 아이'는 '해야 한다'는 용의 무시무시한 압력에도 잠시 뒤돌아서면 망각하며, 자신의 방향을 자기가 결정해서 삶(놀이)의 규칙을 입맛에 맞게 매일마다 바꾼다. '어린 아이'와 같이 스스로가 삶의 가치를 창조하며 이러한 삶 자체를 긍정하는 사람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자기자신을 극복한 사람'인 것이다.
현재 정말로 활동적인 인간들은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중간 정도 수준인 좀더 온순하고 좀더 관상적인 사람들은 오직 (현재에 맞게) 조정된 기독교, 즉 놀라울 만큼 단순화된 기독교를 믿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루게 하는 신, 행복과 마찬가지로 덕을 우리에게 주거나 빼앗으면서 전체적으로는 항상 올바르고 선하게 진행되게 하고 우리가 삶에 대해 불평하거나 비난할 아무런 근거가 없게 하는 신
간단히 말해 신성으로까지 높여진 체념과 겸손ㅡ 이것이 여전히 기독교에 남아 있는 최상의 것이자 가장 생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는 기독교가 부드러운 도덕주의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신, 자유, 불사'가 아니라, 오히려 호의와 절도 있는 법도, 그리고 호의와 절도 있는 법도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안락사다. ― 아침놀, '기독교가 죽어가는 침대에서
독수리가 토끼를 사냥하는 상황을 보자. 토끼는 자신을 죽이는 독수리를 '악'으로 보고 그것을 감내하는 자신을 '선'으로 볼 것이지만, 독수리는 토끼를 선과 악으로 보지 않고 단지 좋아하는 음식으로 볼 것이다. 여기서 선악을 구분하는 토끼의 마음은 '노예도덕'이고, 선악의 구분없이 단지 호불호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독수리의 마음은 '주인도덕'이다. 즉, 토끼와 같은 약자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과 희생'으로 몰아넣고, 이를 '선한 것'이라고 합리화하지만, 독수리와 같은 강자는 굳이 '선'해지려고 마음을 먹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행할 뿐이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는 노예도덕이다. 현세가 아닌 죽음 이후의 천국과 종말론에 의지하여 도덕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지상에서의 삶을 희생시키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욕망의 긍정을 말하지 않고, 자기부정을 가르치는 기독교를 때려부숴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소리의 울림마다 사탕처럼 달콤한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약한 것을 좋음으로 위조하려고 합니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으로 바뀝니다. 불안한 천박함은 '겸허'로 바뀝니다.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순종'으로 바뀝니다. 약자의 비공격성, 약자가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비겁함 자체, 그가 문 앞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인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미덕이라고 까지 불립니다. 복수할 수 없는 것이 복수하고자 하지 않는 것으로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라고 불리기까지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한 '적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밀담자와 구석에 있는 화폐 위조자들이 모두 이미 서로 따뜻하게 의존하며 웅크려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가련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련함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영예이며, 마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개를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내게 말합니다. ― <도덕의 계보학>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니체는 도덕을 2가지 종류, 소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라 불리는 것으로 구분 짓고, 인간의 삶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불필요하게 옥죄고 구속하는 것들을 비판했다. 또한 니체는 기존의 규범들을(Nomos) 비판하며 그리스도교적 겸손, 순종과 같은 전통적인 규범들이 생의 활력을 빼앗아간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의 명령, 이성중심주의, 절대적 법칙(칸트의 정언명령도 여기에 포함된다) 등으로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행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아포리즘인 '신은 죽었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즉 니체가 겨냥했던 신은 단순히 종교에서 믿는 신이나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니체가 문제 삼았던 것 중에는, 동시대의 근대 철학이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니체에게 있어서 과학, 인간의 이성, 전문가, 다수 등의 모든 권위와 우상들은, 종교와 다를 바 없이 부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알려지면서 니체가 그리스도교만을 싫어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기존의 모든 절대가치들을 모조리 '때려부수고자'했으며, 그 배경에는 니체의 도덕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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