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목록

나뭇잎숨결 2008. 11. 27. 08:56

 

 

역대 노벨문학상( Since1901~)수상자 목록

 

 

 

 

  2008년노벨 문학상에 佛 소설가 르클레지오

  2008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의 소설가 장-마리 구스타프 르 클레지오(68, 사진)에게 돌아갔다. 프랑스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이 돌아간 것은 1985년 이후 처음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9일 르 클레지오를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했다. 한림원은 르 클레지오를 새로운 출발과 서정적 모험, 관능적 황홀감, 인간애 탐험 등에 몰두한 작가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림원은 문학상 선정 이유를 통해 특히 르 클레지오가 1980년 발표한 소설 '사막'을 높이 평가했다. 한림원은 르 클레지오가 '사막'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소설 '사막'은 검색하기 북아프리카 사막의 파괴된 문명을 불청객 유럽 이민자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1940년 4월13일 영국인 의사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8살 때 아버지가 일하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건너가 2차대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23세 때 처녀작 '조서'(Le Proces-verbal)로 르노드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린 르 클레지오는 이후 단편집 '발열'과 장편 평론 '물질적 황홀', 장편소설 '대홍수', '사랑하는 대지'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르 클레지오는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한 지한파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2001년 한불작가교류 행사 당시
운주사를 찾아 그때의 감흥을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도리스 레싱 2007 년 수상


 이란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아프리카의 로디지아 (짐바브웨)에서 25년이나 살다가 1949년에 런던으로 왔다고 합니다.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 다 이혼했다. Lessing은 두 번째 남편의 姓이라고 합니다. 남편 복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아마도 남편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리스 레싱’은 1950년 《 The Grass is Singing》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의 배경은 그녀가 살았던 아프리카였다고 합니다. 그 후로 시, 희곡, 장 ·단편 소설을 포함한 많은 작품으로, 1950년대의 ‘Angry Young Men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서머싯 몸 상(賞)을 받은 중편소설집 《 Five》(1953)가 있고, ‘진정한 혁명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혁명’이라는 주장을 담은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The Golden Notebook》(1962)이 유명한데, 이 작품으로 200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여성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작가는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글을 쓴다.” 이 말은 도리스 레싱이 한 말입니다. 1994년에는 자서전 《 Under My Skin》을 냈습니다. 이 할머니는 14세를 끝으로 정규 교육은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르한 파무크 2006 년 수상


그는 동양과 서양, 이슬람근본주의와 세속주의, 신과 인간 등의 문화적 충돌구도와 그 소통방식을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세속주의, 세계화와 지역주의, 서구문명과 동양문명, 신과 인간, 진보와 보수 등 ‘이질적인 문화의 갈등과 소통’문제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묵직한 주제의식과 정교한 작품구조에 전 세계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의 소설 세계는 조국 터키의 지리적 특수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에 있는 터키는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중간 지대다. 터키의 위치와 역사는 파무크 씨의 소설을 설명하는 큰 열쇠이기도 하다.


1985년 발표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 ‘하얀 성’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젊은 학자가 터키 해적에게 납치돼 이스탄불에서 서구의 과학, 기술, 의학을 가르치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에서는 동서양의 만남과 갈등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신(神) 중심의 회화기법인 이슬람 세밀화와 인간 중심의 서양화 스타일이 충돌하는 과정을 그린 ‘내 이름은 빨강’(1998년)은 파무크 씨의 히트작이다. 화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은 추리소설과 연애소설이라는 이질적인 양식을 정교하게 교직한 작품이다. 이 책으로 유럽의 각종 문학상을 받았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2002년 발표한 소설 ‘눈’은 폭설로 길이 차단된 터키의 국경 도시 카르스에서 사흘 만에 막을 내린 쿠데타를 큰 줄기로 삼았으며 신과 인간, 종교와 정치의 갈등, 그리고 비극적인 사랑이 설경과 함께 펼쳐진다. 그의 작품을 번역한 이난아(40·한국외국어대 터키어과 강사) 씨는 “건축가가 건물을 세우고 창을 만들고 마루를 놓듯 그는 치밀한 계획하에 글을 쓰며 그렇게 쓰인 소설에는 정교한 지적 재미가 스며 있다”고 말한다.


그의 문학의 저력은 무엇보다 뜨거운 창작열에서 나온다. 그의 좌우명은 ‘창작 시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셋째도 인내’다. 파무크 씨와 수차례 만났던 이난아 씨는 “항상 오전 5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저녁에는 만년필 뚜껑을 열어 잉크의 양을 확인할 정도”라고 전했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는 “아랍식 이야기 전통과 모던한 현대소설 기법을 결합해 아랍문학의 경지를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요즘 그는 연모하는 사촌누이의 팔찌, 귀고리 등을 모아 박물관을 짓는 한 남자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를 그린 ‘순수 박물관’을 집필 중이다. 새벽마다 펜을 드는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감의 요정이 언제 내 등을 두드리고 귀에 속삭일지 모릅니다.”

 


      해럴드 핀터 2005 년 수상 


102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 씨는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지성파 극작가로 영미 문학계에 자리를 굳힌 대가다. 그는 중년 부인의 권태를 다룬 연극 ‘티타임의 정사’(원제 The Lover·情婦)의 극작가로 국내에도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는 연출가 배우 시인 정치 운동가로서도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해 왔다.


그는 1930년 10월 10일 런던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7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주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작품 낭독회, 심포지엄,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피터 씨 탄생 축제가 열려 연극계 저명인사들이 대거 모였다. 하지만 정작 영국에선 별다른 행사 없이 지나갔다.


그는 왕립 연극아카데미를 중퇴했으며 1951년 ‘연설과 드라마 중앙학교’에서 배우 수련을 받은 뒤 배우로 첫발을 뗐다. 1956년 여배우 V 머천트와 결혼했고 이듬해 처녀 희곡인 단막극 ‘방(The Room)’을 내놓았다. 이어 1958년 잇달아 희곡 작품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별로 명성을 떨쳤다. 이 해에 그의 연극 ‘생일파티’가 텔레비전에 방송되었으며 ‘벙어리 웨이터’ ‘관리인’이 성공리에 무대에 올려졌다.


그의 연극들은 침묵이 큰 역할을 해 ‘침묵의 연극’이라고 불렸다. 언어의 연극에 반기를 든 것으로 그는 현대 영국 연극의 혁명가로 손꼽혔다. 그는 초기 작품들이 “사뮈엘 베케트,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미국의 갱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대표작 ‘배신’ 등 29편의 희곡을 썼으며 제레미 아이언스와 메릴 스트립이 나온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비롯한 24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연극 연출가로서도 제임스 조이스의 ‘추방’ 등 모두 27편을 무대에 올리는 등 종횡무진의 활약상을 보였다.


그는 2002년 식도암 수술을 받고 암을 극복해냈다. 이때 “나는 암 종양이 죽는 것을 보고 싶다”는 내용의 시 ‘암세포’를 발표했다. 그는 “암 투병을 통해 죽음을 더욱 의식하게 됐다. 과거에는 세상의 일부로서 반응했다면 이제는 그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과거엔 정치적으로 열정적이었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는 암 발병 이전 그가 시민운동가로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한 것을 가리킨다.


그는 2000년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유고를 공습할 때, 2003년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대규모 집회에서 반전 연설을 했다. 2000년 당시 ‘서방 세계의 공적 1호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옹호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밀로셰비치가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민간인이 살상된 폭격을 지시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마찬가지다”라고 반박했다.


 

 

 

    엘프리데 옐리네크 2004년 수상

 

1946 10 20에 슈타이어 마르크 주 뮈르츠주슐라크에서 태어나 빈에서 자랐다. 옐리네크는 연극사와 예술사 그리고 음악을 공부했다. 『우리는 모두 미끼일 뿐이다!』라는 첫 작품을 출간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여러 문학 잡지와 모음집에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1986년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쾰른 시의 하인리히-뵐 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슈타이어마르크 주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브레멘 시의 문학상을, 1998년에는 게오르크-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J.M. 쿳시 2003년 수상     

 

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우스터에서 출생.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여러 나라 말로 글을 써왔다. 문학뿐만 아니라 언어학자, 수학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기도 한 그는『마이클K의 삶과 세월』『추락』으로 한 작가에게 상을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전례와 불문율을 깨고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하고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을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같은 남아공 출신 작가 고디머나 브링크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하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인식의 지평 안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헤집어보고 회의하며 의심한다. 현재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문학교수로 재직 중. 

  

   임레 케르테스 2002년 수상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부헨발트와 짜이츠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종전과 해방을 맞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두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래 인류의 가장 큰 상처"라면서 "소설을 쓸 때마다 아우슈비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국가의 제도적 폭력에 억압받는 개인의 고통이 녹아들어 있고, 10여 년간의 퇴고 끝에 내놓은 처녀작 '운명'은 죽음의 불안을 초연한 자세로 이겨낸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V.S. 네이폴 2001년 수상    

 

1932년 서인도제도의 프리니다드 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은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네이폴의 조부는 인도로부터 이주해온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다. 18세 때인 1950년 옥스퍼드 대학의 장학생으로 영국에 가게 되었는데, 유색인으로서 백인사회로 옮겨와 정착해야 했던 개인적인 체험은, 방황하는 고독한 이방인이라는 주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네이폴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인종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뿌리는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가오싱 젠 2000년 수상    

 

1940년 중국 동부 장시 성 간저우에서 은행 간부인 아버지와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일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환경 덕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1975년부터는 문예지의 프랑스 문학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부조리'의 개념을 정립해 나갔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공산당의 공포정치와 테러에서 부조리의 근원을 읽어내고 연극적 요소를 통해 이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의 본령으로 삼았다.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련을 겪었고, 1989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활발한 저술 활동을 시작을 시작했다. 1990년 대만에서, 1995년 프랑스에서 『영혼의 산』이 출간되고, 200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귄터 그라스 1999년 수상     

 

1927 10 16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후, 그는 17세 때인 고등학교 시절에 징집되어 독일 방위군에서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미군 포로가 되었다. 이후 뒤셀도르프 예술대에서 수학하였고 1954년 서정시 대회에서 입상하여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적 집단인 <47그룹>에 가입했다. 60년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하여 '핵무기 반대' 등을 외치며 빌리 브란트 수상의 재선을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기도 했으며, 나아가 수상선거 때마다 헬무트 콜의 낙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대표작, 『양철북』에서는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독일의 일그러진 역사가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 마체라트에 의해서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지고 있다. 

  

   주제 사라마구 1998년 수상    

 

1922년 포르투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용접공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사라마구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들어서야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사라마구 문학의 전성기를 연 작품은 1982년 작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유럽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으며 199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등이 있으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경쾌함, 실험적 문장,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가미한 작품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리오 포 1997년 수상   

 

1926년 이탈리아 출생. 공동 작업으로 소규모 카바레와 극장을 위한 시사풍자극을 제작하면서 연극과 관련을 맺었다. 1959년 다리오 포-프랑카 라메 극단을 설립했으며, 1968년 이탈리아 공산당과 연합하여 또다른 연극 단체인 누오바 스케나를 결성했다. 그후 1970년 공동체 집단 극장을 시작하면서 공장, 공원 등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그들의 극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무정부주의자의 돌연한 죽음>이 있고. 연기자로서 포는 <우스꽝스러운 비밀>이라는 1인극에 출연하였다. 그는 연극적인 풍자만화 작가, 사회 선동가, 급진적 광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비슬라바 심보르스카 1996년 수상   

 

1923년 폴란드 서부의 포즈나인 근처에 있는 브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45~48년에 크라쿠프의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그녀의 시는 1945년에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심보르스카는 개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재검토하였으며, 초연하고 아이러닉한 문체로 당시 독유럽 시문학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법을 보여준다. '예티에게 외치다 Woanie do Yeti'(1957)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고, 그밖의 작품으로는 '소금 Sol', '큰 수' 등이 있다. 

  

   시머스 히니 1995년 수상   

 

1939 4월 벨파스트 북서쪽에 있는 런던데리에서 가톨릭교 가정의 9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벨파스트의 퀸스대학교에서 공부했고, 그후 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972년에 아일랜드로 이주한 히니는 그후 더블린과 옥스퍼드대학교 및 하버드대학교를 오가며 지냈는데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시를 가르쳤고, 하버드대학교에서는 1985년부터 보일스턴 석좌교수로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의 시는 대부분 정치적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의 삶의 투쟁을 표현하고 있다. 결코 목청을 높이지 않는 히니의 언어가 갖는 힘은 그 섬세함에 있으며,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풍경은 히니의 시세계가 짙은 향토색을 갖추게 된 배경이 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1994년 수상     

 

1935년 일본 남부 시코쿠의 에히메현 기타군에서 유명한 사무라이 집안에서 일곱형제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인도의 타고르에 이은 세번째 수상자인 겐자부로는 스위스 한림원에서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과 당혹감 등 실존의 문제를 다루어왔다고 밝힌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주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 등단한 지 5년 후에 큰 아들이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것을 계기로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고 원폭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 사람들에게 많은 위안을 얻게 되었고 핵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1965년에 <히로시마 노트>를 발간했다. 미일 안보조약을 반대하는 지식인을 대변하고, 솔제니친 석방요구 성명과 한국 시인 김지하의 탄압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에 참가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와 동시에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기도 했다. 

  

   토니 모리슨 1993년 수상      

 

1931년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인 로레인에서 태어났다. 흑인을 위해 설립된 하워드 대학교를 졸업(1953)하고, 코넬 대학교에서 문학석사학위(1955)를 받았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1965년부터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현재 프린스턴 대학의 로버트 F. 고힌 기금교수로 있다. 퓰리처상(1988), 노벨문학상(1993) 수상작가. <타임>지 선정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명’ 중 하나. 소설로는 『가장 파란 눈The Bluest Eye(1970) 외에도 『술라Sula(1973)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1977) 『타르 베이비Tar Baby(1981) 『빌러비드Beloved(1987) 『재즈』(1992) 『파라다이스Paradise(1997)가 있으며, 동화로는 아들과 함께 쓴 『네모상자 속의 아이들The Big Box』이 있다. 

 

    데릭 월코트 1992년 수상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19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출간했고, 1962년 런던에서 '초록빛 밤 속에서 In a Green Night'를 펴내 일약 카리브 해 문학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다. 1959년 트리니다드에 극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희곡들을 무대에 올렸고, 1985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오메로스 Omeros'(1990) '복합적 혈통과 카리브 해에서 얻은 감각과 리듬으로 카리브 해 현실과 풍광 속에 세계 문화의 모든 조류를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딘 고디머 1991년 수상    

 

1923 11 20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섬세한 감수성, 선명한 이미지, 암시에 넘치는 문체가 특징이다. 『사탄의 달콤한 목소리』(1952), 『금요일의 발자국』(1960) 5권의 단편집과 장편 『낯선 자의 세계』(1958) 등이 있다.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정면으로 항의하지 않고 인종간의 협조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이 남아프리카 국민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주로 다루었으며, 개인적인 소외와 사회정의의 실현 사이에서 빚어지는 지속적인 긴장상태를 자세히 묘사했다. 고디머는 이 긴장상태가 결국 인종차별정책, 망명에 대한 국가의 거부, 현정책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마비상태를 낳게 된다고 보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 1990년 수상    

 

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족이 멕시코 내란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파스는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로마 가톨릭계 학교와 멕시코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글쓰기에 몰두하여, 19세 때인 1933년 첫시집 '숲속의 달 Luna silvestre'을 출간했다. 파스는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공화주의자들의 대의명분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주요시집으로는 '통과 금지! No pasaran!'(1937),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1949), '독수리냐 태양이냐? Aguila o sol?'(1951) 등이 있다. 파스는 마르크스주의·초현실주의·실존주의·불교·힌두교에서 차례로 영향을 받았고 원숙기의 시에서는 풍부한 초현실주의적 형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카밀로 호세 셀라 1989년 수상   

 

스페인 내란(1936~39)을 전후하여 마드리드대학에 다녔으며, 내란 기간에는 프랑코 군대에서 복무했다. 셀라는 문학활동이 중단되었던 전쟁 기간이 끝난 후 최초로 부상한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작품들은 구성이나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보다는 소품, 세부묘사, 혁신적인 언어구사 등이 특징이다. 현실을 변형시켜 기괴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셀라의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파스쿠알 두아르테가'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수차례 살인을 저지른 한 농부의 사회적 배경과 가족환경을 고찰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스페인 문학이 간결하고 평범한 경향으로 나가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나집 마후프즈 1988년 수상   

 

아랍권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1988)을 받은 작가이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카이로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34~71년에 이집트 행정부의 문화 부문에서 일했다. '카이로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 '알술라시야 AlThulthiyya'에서 제1차 세계대전부터 파루크 왕을 몰아낸 1952년 군사 쿠데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카이로에 살던 여러 가문의 3대에 걸친 삶을 그리고 있다. 그뒤에 쓴 작품들에서는 옛 이집트의 왕정, 영국의 식민주의, 현대 이집트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 '게벨라위의 아이들 Awld ratin'(1959)은 종교를 주제로 한 소설로서 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마호메트·모세를 비롯한 종교적 인물들을 등장시킨 까닭에 한동안 이집트에서 판금당했다. 

  

   조지프 브로드스키 1987년 수상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시인으로 있었고 그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레 소잉카 1986년 수상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요루바족으로 태어나 거번먼트 칼리지와 이바단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다녔고, 1958년 영국의 리즈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그의 희곡은 요루바족의 민속 및 종교에 깊게 뿌리를 둔 주제 및 극적 기법들과 서구적인 요소가 재치있게 융합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최고작들은 반어법과 풍자라든가 복잡한 등장인물들의 언어를 각자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자질에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재능뿐 아니라 유머와 세련된 시적 문체를 보여준다. 

  

   클라우드 시몽 1985년 수상   

 

195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누보 로망을 대표하는 작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기병장교의 아들로, 홀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파리·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40 5월 독일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의 문체는 상황의 전개와 의식의 흐름이 뒤섞인 것으로, 1,000여 개의 단어들이 구두점 없이 한 문장을 이루기도 한다. 이 단어들의 커다란 모임을 통해 그는 바로 삶의 진행 그 자체를 포착하려 했다. 그의 소설들은 외견상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는데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만하다.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1984년 수상   

 

1950년까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1920년 첫 시집 '눈물의 도시 Masto v slzch'를 출판했다. 초기 프롤레타리아 시에는 소련 공산주의의 미래에 대한 젊은이다운 기대가 나타나 있으나, 후기작에서는 순수시의 서정적인 요소가 뚜렷이 나타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사건과 상황은 그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가 되었다. '전등을 꺼라 Zhasnte svtla'(1938)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를 독일에 합병시킨 뮌헨 조약에 관해 썼다. '빛에 감싸여 Svtlena odna'(1940)의 주제는 프라하였으며 '진흙투구 Pilba hliny'(1945)에서는 1945년의 프라하 봉기를 다루었다. 

  

   윌리엄 골딩 1983년 수상     

 

맬버러 그래머 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 브레이즈노스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1935년 졸업 후에 솔즈베리의 비숍 워즈워스 스쿨의 교사가 되었다. 1940년에는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호'를 침몰시킨 전투에 참가했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로켓 발사 전함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나자 교직으로 돌아와 1960년까지 교사로 일했다. 윌리암 골딩은 첫 작품인 『파리대왕』에서부터 독자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았으며 이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다. 1959년과 64년에 각각 출간된 『끝없는 추락 Free Fall』과 『첨탑 The Spire』은 그동안 그가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다루었었던 "벌이 꿀을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악을 만들어낸다"는 골딩의 신념이 잘 반영되어 있는 소설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82년 수상     

 

마르케스의 주제와 본질적 기교는 그의 성장 배경과 삶의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아라카타카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마르케스는 12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태어난 후 8년 간을 외조모부의 집에서 살았고, 1950~1965년까지 콜롬비아, 프랑스, 베네수엘라,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또한 그를 콜롬비아의 세르반테스라고 일컫게 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콘도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하여 부엔디아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엘리아스 카네티 1981년 수상    

 

1905년 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영국으로 이주한 여섯 살 때 갑작스럽게 닥친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작품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홀로 된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한 카네티는 자연스럽게 고대 스페인어와 불가리아어, 영어, 독어, 프랑스어를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네번째로 배운 독일어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망명한 1938년부터 1994년 죽을 때까지 50여 년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그는 평생 독일어로만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 및 군중심리를 탐구하고 있다. 

 

    체슬로우 미워시 1980년 수상   

 

폴란드 태생 미국의 작가·번역가·비평가. 토목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21세 때 첫 시집 '얼어붙은 시간의 시 Poemat o czasie zastygym'를 발표했다. 그는 이 무렵 21세의 나이에 사회주의자이자 시인 단체의 지도자였는데 그 단체는 절박한 세계의 재앙을 예견한다는 뜻에서 '격변설지지자'라는 이름을 지녔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시기에는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워싱턴 D.C.의 폴란드 대사관 문화담당관과 파리의 폴란드 대사관 문화담당 제1서기관을 지낸 뒤, 1951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9년 뒤 미국으로 이주하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970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1979년 수상   

 

크레타의 부유한 알레푸델리스 가문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아테네에서 보냈다. 아테네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1930년대에 그리스의 전위 잡지 '네아 그라마타 Nea Grammata'에 시를 발표하면서, 법학공부를 포기하고 시작에 전념했다. 그의 초기 시들은 초현실주의 색채와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1941년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 당시 그는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에 대항하는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장시 '알바니아 전쟁에서 실종된 육군 소위를 위한 영웅 애가'(1945)는 자유를 위한 송가가 되었고, 그는 그리스 젊은이들 에게 음유시인으로 알려졌다. 

  

   아이작 B. 싱어 1978년 수상    

 

폴란드 태생 미국의 작가. 190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랍비 신학교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지만 작가가 되고자 했고 31세때 미국으로 망명한다. 폴란드와 미국 내 유대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그의 소설은 아이러니·위트·지혜가 절묘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기괴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으로 유명하다. 싱어의 작품들은 영문판이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거의 이디시어로만 작품을 썼고 직접 영문 번역을 지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적과 사랑이야기'(1972)· '쇼샤'(1978)·'참회자'(1983) 등이 있다. 

 

    바센테 알레익산드레 1977년 수상   

 

스페인의 시인. 철도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과 경영학을 공부했고, 1949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파괴 또는 사랑’으로 스페인 문학상을 수상했고, 자유시의 대가로 평가 받았다. 그의 후기 시는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는데, ‘완성의 노래’, ‘인식에 관한 대화’에서는 죽음·지식·경험 등의 문제를 탐구했다. 시뿐만 아니라 산문 작품인 ‘회합’을 출판하기도 했다. 

  

   사울 벨로 1976년 수상   

 

미국의 소설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창한 이디시어를 구사했는데 이는 그의 힘찬 영어 문장에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 뒤 미국 문단의 중심이 된 유대계 미국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벨로가 9세 때 가족은 시카고로 이사했다. 시카고대학교를 다녔으며 1937년 노스웨스턴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네소타·프린스턴·뉴욕 대학교, 바드대학, 시카고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강의하면서 작품을 썼다. '오기 마치의 모험'(1953)을 선보이면서 폭넓은 격찬을 받았고 1954년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여기에서 벨로는 당시의 작가들이 몰두한 완벽한 형식에 대한 고의적인 반항으로서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를 처음으로 구사했다. 

 

    위제니오 몬탈레 1975년 수상   

 

이탈리아의 시인·산문작가·편집자·번역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 후에는 파시즘에 반대했는데, 그무렵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말의 정서적 암시성과 주관적인 의미를 갖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기에서는 생각을 좀더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자신이 쓴 시들을 직접 번역했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 T. S. 엘리엇,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와 허먼 멜빌, 유진 오닐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산문도 번역했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실렸던 단편과 스케치들을 모아 '디나르드의 나비'(1956)라 하여 출판했다. 

 

    예빈드 욘손 1974년 수상   

 

북극권 근처의 고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며 우울한 어린시절을 보낸 뒤, 학교 교육은 사실상 전혀 받지 못한 채 20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유럽을 향해 무작정 남쪽으로 떠났다. 스웨덴은 변경에 사는 국민의 비참한 생활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따금 고향에 돌아와도 별로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프루스트와 앙드레 지드 및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초기 소설은 주로 인간의 좌절을 다루고 있다. 스웨덴 문학에 새로운 주제와 관점을 도입했으며 새로운 형식과 가장 진보적인 기법을 실험한 소수의 노동계급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리 마르틴손 1974년 수상   

 

독학의 노동계급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스웨덴 한림원에 선출된(1949) 작가이다. 에이빈 욘손과 함께 197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어린시절에 여러 양육원을 떠돌아다녔으며 청년기에는 상선 선원, 노동자, 방랑자로 전전했다. 대표작으로 시집 '무역풍 Passad'(1945)과 방랑자나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쓴 소설 ' Vagen till Klockrike'(1948), 1959년 카를 비르거 블롬달이 오페라로 개작해 성공한 우주여행에 관한 서사시 '아니아라 Aniara'(1956) 등이 있다. 

  

   패트릭 화이트 1973년 수상   

 

20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작가. 부모가 런던을 방문하던 중에 태어났고, 12세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낸 뒤 영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양 목장에서 일했다. 그뒤 영국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서 근대언어학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에서 근무했고 이때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화이트의 스타일은 신화·상징·알레고리 등이 풍부한 난해한 수법이다. 그가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주제는 인간의 고립감과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탐색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인리히 뵐 1972년 수상     

 

1917 12 21 독일 쾰른 출생. 전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구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1937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점원으로 일하다가 1938년 노무자로 징용당한 뒤 독일군 사병과 하사로 6년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전선에서 싸웠다. 가톨릭교도이며 평화주의자로서, 주변 사회에 대해 매우 도덕적이긴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발전시켰으며,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반전사상과 비협조주의를 나타내기 위해 절제된 산문과 예리한 풍자를 사용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민이 겪은 일들을 인도주의 입장에서 해석한 탁월한 인물로 평가된다. 

 

    파블로 네루다 1971년 수상    

 

파블로 네루다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자신의 시와 정치 사상을 통해 동시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작가였다. 그는 고국인 칠레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폭 넓은 일반 독자층으로부터 평범한 삶의 찬양자이자 국민적 정체성의 창시자로서 존경받았다. 그래서 산티아고의 어느 판자촌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라 마을명을 정하고, 그의 시집 제목을 따라 비포장도로명을 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이자예비치 솔제니친 1970년 수상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포병대 대령으로 진급했으나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낸 뒤, 3년간 더 강제 추방당했다. 솔제니친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스탈린 시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한 수인이 겪는,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뒤 정부로부터 공공연히 시달림을 받았고, 이후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소련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1974년 2월 12 반역죄로 법정에 서고 이튿날 소련에서 추방당했고 나중에 스위스로 갔다. 

 

    사무엘 베케트 1969년 수상     

 

190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부유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 벨파스트에서 잠깐 교편 생활을 했다. 1928년에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강사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된다. 유럽 전역을 여행하던 끝에 1937년에 파리에 정착했고,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종전(終戰)까지 나치를 피해 은거,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다수의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그는 전적으로 예술에 전념하고자 했기 때문에 라디오나 텔레비전 출연, 언론 인터뷰 등 모든 사람의 이목을 차단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수상은 받아들였지만 수상식에서 대중연설을 하지 않으려고 스톡홀름에 가지 않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1968년 수상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우수에 젖은 서정성을 통해 고대 일본문학의 전통을 현대어로 되살려낸 작가이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15세 때 10년간 함께 살던 조부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생겨난 허무와 고독, 죽음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작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1920년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는데 곧 국문학과로 전과, 1924년 졸업하였다. 1937 '설국'을 출간하여 독보적인 일본 작가로 국내외에서 자리매김하였고, 줄곧 서정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서정문학의 장을 열었다. 1972 3,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후 퇴원 한 달 만에 자택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미구엘 엔젤 아스투리아스 1967년 수상   

 

1923년 과테말라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은 뒤 파리에 정착하여 소르본대학에서 민족학을 공부했다. 앙드레 브르통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초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첫번째 주요작품은 스페인 사람들이 상륙하기 전 마야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묘사한 '과테말라의 전설 Leyendas de Guatemala'(1930), 조국인 과테말라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과테말라로 돌아가 라디오 잡지와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 그가 소설가로서 재능과 영향력을 나타낸 것은 외교관으로 일하던 이 시기였다. 과테말라의 독재자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를 강력하게 비난한 작품 '대통령 각하'(1946)를 시작으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옥수수의 인간들'(1949)에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진 한 원주민 농부의 삶을 그리고 있다. 

 

    넬리 작스 1966년 수상   

 

부유한 제조업자이자 발명가의 딸로 태어난 작스는 베를린의 상류층 거주지인 티에르가르텐에서 성장했다. 독일에 나치즘이 출현하여 생활이 암담해지자 작스는 고대 유대인들의 글에서 위안을 찾았다.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질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1940년에 스웨덴으로 탈출했다. 방이 하나뿐인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스웨덴어를 배운 뒤, 독일 시를 스웨덴어로 번역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인 1965 75세 생일날 독일 출판업자들이 주는 평화상을 받았다. 

 

    쉬뮈엘 요젭 아그논 1966년 수상   

 

폴란드 유대상인, 랍비, 학자 들의 집안에서 태어나 본명과 여러 가지 필명으로 이디시어와 히브리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07년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아그논이라는 필명으로 극적이고 환상적이며 고도로 세련된 화술을 나타내고자 성서의 언어를 선택했다. 자신의 첫번째 팔레스타인 이야기인 '버림받은 아내들'(1908)로 문단에 등단했다. 3번째 작품이면서 가장 유명한 소설인 '그저께'(1945)에서는 이스라엘은 더이상 약속된 땅이 아니라 단지 되찾은 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물질적·정신적·도덕적 분위기를 흡수해 서구화된 유대인들이 직면한 문제를 다루었다. 

 

    미하일 숄로호프 1965년 수상   

 

숄로호프 문학의 일관된 큰 주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개인의 운명이었다. 혁명·국내전·집단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사실에 기초하여 거시적 각도에서 묘사하는 한편, 그중에서 개인의 운명과 생활을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만큼 미세하게 표현하였다. 대표작 '고요한 돈 강'에서 그가 제기한, 혁명에 있어서 진정한 도덕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악인가 하는 문제는 극히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순한 역사소설·대하소설의 범주를 넘는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 1964년 수상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한 사르트르는 2차대전 이후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에 눈을 돌렸다. 수년 동안 그는 가난한 사람과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사람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이전 작품들에서는 가치있는 특정 목적이나 목표가 필요하지 않은 무상의 활동으로 여겨졌던 자유 자체가 소책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인간의 투쟁 수단이 되었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위하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인간이며, 그는 바로 그러한 인간을 그린다. 

 

    조르고스 세페리스 1963년 수상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그리스 외교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런던과 알바니아에서 일했으며, 대전중에는 망명해 그리스 자유정부와 함께 일했다. 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수필도 썼는데, 주요수필작품으로 '도키메스'· '에로토크리토스 Erotokritos'가 있다. 1947년에는 아테네 아카데미로부터 명예시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스 현대문학에 상징주의를 소개한 '30년대 세대' 시인 중 가장 뛰어난 그리스 시인으로, 세련된 서정성과 신선한 어법은 그리스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작품에는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비극적 곤경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잘 나타나 있다. 

 

    존 스타인벡 1962년 수상     

 

자신의 책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작품을 쓰면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대공황이 일어난 1920년대의 비참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분노의 포도'는 퓰리처상을 받았고, 1940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은 한 일가가 오클라호마 주 더스트보울에서 쫓겨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해가지만 무자비한 농업경제정책으로 인해 계속 착취당한다는 줄거리이다. 스타인벡의 명성은 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로부터 얻은 것이다. 등장인물을 통해 신화적·원형적 요소를 전달하려 한 그의 노력이 가장 효과를 거둔 것은 바로 이 작품들에서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보 안드리치 1961년 수상    

 

세르보크로아티아의 소설가·단편작가. 1차 세계대전 동안 민족주의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에 의해 억류당한 기간에 쓴 명상적인 서정 산문 '엑스 폰토'로 명성을 얻었고 1920년부터 단편집을 계속 출판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쓴 3편의 장편소설 중 '트라브니치크 연대기 Travnika hronika'(1945)· '드리나 강의 다리 Na Drini uprija'(1945)는 보스니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안드리치의 작품은 그의 결정론적 철학과 동정심을 보여주며, 매우 아름답고 정결한 언어를 사용해 객관적이며 침착한 어조로 씌어졌다. 노벨상 위원회는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나타난 그의 '서사적인 힘'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생 종 페르스 1960년 수상   

 

1960년에 '시의 드높은 비상과 생생한 회화적 형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시는 흔히 랭보의 시와 비교되었다. 그는 최면 상태에 빠진 듯한 환상을 기도서와 같은 운율과 특이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정확함과 순수함 때문에 시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그의 시 언어는 매우 까다로워서,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초기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장시인 '원정(遠征) Anabase'(1924)이고, 망명시절에 쓴 시로 '망명 Exile'(1942)· '바람 Vents'(1946)· 등이 있다. 

  

   살바토레 콰지모도 1959년 수상   

 

원래 에르 메티스모 시인들의 지도자였던 콰시모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당시의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유력한 시인이 되었다. 전후 '하루 또 하루'(1947)를 출간한 때로부터 죽을 때까지 콰시모도의 작품세계를 형성한 것은 그의 사회적 신념이었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의 부당함과 전쟁의 공포와 이탈리아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시를 많이 썼다. 동일한 성격을 지닌 후기 시들은 간결한 언어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2권의 이탈리아 시선집을 편찬하고 중요한 평론도 많이 썼는데, 이 평론들은 '시인과 정치인, 그리고 기타 시론'(1960)이라는 평론집과 '연극 비평집 Scritti sul teatro'(1961)에 실려 있다. 1971 '시와 시론 Poesie e discorsi sulla poesia'이 출판되었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 1958년 수상     

 

의사 지바고'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1987년에야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사후 복권을 허락함으로써, 1958년 작가동맹에서 추방된 이후 불법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의 적법성이 인정되었고, 드디어 '의사 지바고'가 소련 내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알베르 카뮈 1957년 수상     

 

알자스 태생의 궁핍한 노동자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세계에서 그의 세대의 대변가이자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글들은 주로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그리고 죽음이라는 임박한 파국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 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카뮈는 많은 동시대인의 허무주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진실과 중용 및 정의 같은 가치에 대해서도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957년에 카뮈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겸손한 카뮈는 자신이 심사위원이었다면 분명 앙드레 말로에게 표를 던졌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후 3년이 채 안 되어서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후앙 레이몽 히메네스 1956년 수상   

 

스페인의 시인. 1912년부터 4년 동안 레시덴시아데에스투디안테스에 거주했으며 이 교육기관에서 발행되는 간행물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1916년 뉴욕 시를 여행했고 힌두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제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와 그곳에서 결혼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할리도르 킬잔 락스네스 1955년 수상   

 

아이슬란드의 소설가. 1955년 노벨 문학상, 1969년 소닝상을 수상했다. 청년 시절의 그는 세계의 여러 종교와 철학들에서 만족할 만한 믿음을 찾으려고 한 반항적인 불가지론자였다. 1924년 자서전의 성격이 짙은 첫번째 소설에서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대한 호교론을 드러냈으나 끝에 가서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만다. 그 다음해부터 3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사회주의로 전환한 뒤 일생동안 그것을 고수했다. 1930~32년에 다시 아이슬란드로 돌아가서 2편의 연작 소설을 썼는데 이들은 1936년 영어로 번역되어 '살카 발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사회에 대해 지각있는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이 작품은 아이슬란드의 한 아담하고 발전하는 어촌에서 고기잡이와 교구의 수돗가 주위의 잡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주민들의 삶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1954년 수상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주요한 신문이었던 '스타 Star'지의 기자로 일했고, 눈에 결함이 있어 계속 군입대를 거절당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했다. 헤밍웨이는 전생애에 걸쳐 전쟁에 몰두했는데,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도 관여했다. 그는 보병4사단 22연대에 소속되어 노르망디와 벌지 전투에서 상당히 많은 전투를 보았다. 또한 파리 해방에 참가했으며, 비록 겉으로는 기자였지만 전투에서는 용감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사문제와 게릴라 활동, 특히 정보수집에서는 실질적인 전문가로서 직업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쿠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 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윈스턴 처칠 1953년 수상    

 

명문 말버러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 옥스퍼드셔 블렌엄 궁에서 태어난 윈스턴 처칠은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할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을 더블린에서 보냈다. 그후 잉글랜드의 해로학교에 입학하였고,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쿠바, 인도 등에서 복무했으며, 종군기자로도 활약하였다. 처칠은 독일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고속전함 건조, 해군 출동훈련 실시 등 전쟁에 대비했으며, 장갑차, 전차 등 육상무기의 개발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5년 소신을 가지고 추진했던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작전)이 비참한 실패로 끝남으로써 해군장관을 사임하고 좌천되는 쓴맛을 겪기도 한다. 1940년 마침내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영국을 구해낼 사명을 안고 총리직에 오른다. 1953년 기사작위와 함께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6년간 집필해온 전 6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1955, 노령과 건강 쇠약을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했으나 같은 해 선거에서 84세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프랑소와 모리악 1952년 수상    

 

엄격한 집안에서 태어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준엄한 심리 드라마를 주로 썼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는 언제나 죄악·은총·구제라는 문제와 씨름하는 종교적 영혼이었다. ‘문둥이에게 보내는 입맞춤’을 통해 소설가로 자리를 굳혔고, 이후 ‘사랑의 사막’을 써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주는 1925년도 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독사의 집’은 가족에 대한 늙은 법률가의 증오심, 탐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개종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인간관계에서 얻는 사랑은 헛되고, 신의 사랑만이 진정한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작가들과 함께 일했고, 1962년부터 공식적으로 드골을 지지했으며, 1964년에 ‘드골’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팔 파비엔 라게르크비스트 1951년 수상    

 

스웨덴의 소설가·시인·극작가. ‘문학예술과 회화예술’이라는 선언문에서 예술과 문학의 급진주의를 지지했고, ‘극장’과 3편의 단막극인 ‘고통스러운 시간’에서는 그 비슷한 모더니스트의 관점을 드러냈다. 이후 산문과 희곡에서 파시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였고, ‘인간을 살게 하라’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동료를 심판하고 죽게 하는가를 다루었다. ‘난쟁이’, ‘바라바’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버나드 아서 윌리엄 러셀 1950년 수상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로,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저작활동을 벌였다. 평화주의자로서 1938년 뮌헨 조약에서 독일에게 영토를 양도하기로 한 영국의 정책을 지지했고, '버트런드 러셀 평화재단' '애틀랜틱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그의 활발한 정치,사회,문화적 활동은 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것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있게 표현되었다. 

  

   윌리엄 포크너 1949년 수상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1897년 미시시피 주의 뉴올버니에서 태어나, 군인이자 작가, 정치가인 증조부와 변호사인 조부 밑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옥스퍼드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혼자만의 독서와 사색에 심취하여 고등학교 때 자퇴하였고, 이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작가 수업을 쌓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에스텔 프랭클린과 결혼한 이후 『음향과 분노』를 내놓으며 소설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연이어 문제작을 출간하면서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 남부 지역 특유의 지방색에 의식의 흐름 기법과 같은 실험성을 접목하여 삶과 죽음, 운명과 욕망 같은 보편적인 주제에 도달한 작품 세계로 퓰리처상, 노벨 문학상을 차례로 수상하였다. 

 

    T.S. 엘리어트 1948년 수상     

 

미국 태생 영국의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황무지'(1922) 같은 시와 '대성당의 살인'(1935)·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고,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로 활동했다. 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앙드레 폴 기욤 지드 1947년 수상     

 

남부 위그노교도 농부 집안 출신 아버지와 로마 가톨릭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경증 발작을 겪었고, 건강의 악화로 자주 공부를 중단했다. 1880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로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냉담한 가정교사들과 어머니에게 교육받았으며, '화요회' 모임을 통해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893년 청교도식의 제약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갔는데, 그곳에서 전혀 다른 도덕 기준을 접함으로써 사회적 위선에 대한 지적 반감을 느끼고 동성애 성향을 깨닫게 되었다. 거의 전생애에 걸쳐 관습적인 도덕성을 무시하면서 개인 행동의 자유에 대한 주장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혁명론자로 여겨졌으나, 죽기 전에는 위대한 17세기 프랑스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인문주의자요, 모럴리스트로 널리 인정받았다. 

 

    헤르만 헤세 1946년 수상     

 

천성적인 자연아(自然兒)였던 헤세는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카멘친트 Peter Camenzind(1904)로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얻은 뒤 1962년 세상을 뜰 때까지 문학에 전념하며 자기 실현의 길을 걸었다.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엔 지식계급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의 문단과 출판계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身病) 등 가정적 위기를 당하면서 정신분석 연구에도 매달렸던 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뚜렷한 작풍의 변화를 갖는다. 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나치스의 광신적인 폭정에 저항한 일 등 파란한 일생을 보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1945년 수상   

 

칠레의 시인.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1945) 여류시인. 일생 동안 교육자·문화상·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1914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로 칠레상을 받았고,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으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러한 슬픔은 좌절된 모성애에의 강한 충동으로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부드러움’, ‘파괴’에서는 인류에 대한 폭 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그녀가 자주 다룬 주제는 어린이들과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문화사절로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의 사회·문화 위원회에서도 일했다.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1944년 수상   

 

초기에는 옛날 이야기 작가로 알려졌는데, 이 작품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히메를란에서 나온 이야기, 극동지역 여행에서 들은 이야기, 그리고 ‘신화’라는 제목으로 되풀이되어 출판된 100편이 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에 대한 가공적인 전기를 쓴 뒤 얼마 안 있어 미국을 여행하고 나서 ‘마담 도라’, ’수레바퀴’를 발표했다. 1906년 시집을 출판했고, 6권의 장편소설 ‘긴 여정’을 썼다. 이 작품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까지 인간의 진보를 그린 것으로 아마추어 인류학자로서의 상상력과 능력을 보여준다. 

 

    프란스 이밀 실란페 1939년 수상   

 

1915년 여러 잡지를 통해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0년대 초에 첫 장편소설 ‘삶과 태양’을 썼다. 1918년 핀란드 내란을 겪은 뒤, ‘온순한 유산’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순박한 오두막지기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지도 못한 채 적위군에 가담하는 과정을 무게감 있게 그리고 있다. ‘젊었을 때 잠들다’에서는 한 늙은 농부 가족의 이야기를, ‘남자의 길’에서는 젊은 농부가 성숙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여름 밤의 사람들’은 완벽한 문체로 쓰여진 시적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회고록 ‘말하기와 묘사하기’, ‘그날의 최고 순간’ 역시 걸작으로 꼽힌다. 

 

    펄 벅 1938년 수상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생활을 다룬 소설을 주로 썼다. 상하이에서 학교를 다닌 뒤, 1914년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의 랜돌프메이컨여자대학을 졸업했고, 중국에 돌아와 난징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다. 1931 '대지'를 발표하면서 폭넓은 독자층을 얻게 되었고, 속편으로 '아들들'· '분열된 집안'이 발표되었으며, 3부작은 '대지'로 출판되었다. 그녀는 1917년 선교사 존 L. 벅과 결혼했으나 1934년 이혼하고, 다음해에 뉴욕의 출판업자인 리처드 J. 월시와 재혼하여 미국에서 살았다. 2차 세계대전 뒤에는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남기고 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펄 S. 벅 재단을 세웠다. 벅은 1967년에 수입의 대부분인 7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이 재단에 희사했다. 

  

   로제르 마르탱 뒤 가르 1937년 수상    

 

1881년 파리 근교의 뇌이이 쉬르 세느에서 태어났다. 1908년 장편소설 『생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고, 1922년부터 『티보 가의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 1936년에 발표된 『1914년의 여름』으로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1940년에 발표했다. 『티보 가의 사람들』의 완성 뒤로 전원에 칩거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제2의 대하소설 『모모르 대령의 회고록』을 집필하였으며, 이 작품을 자신이 죽은 뒤에 출판할 것을 조건으로 국립도서관에 맡겼다. 1958 8월 벨렘에서 사망. 

  

   유진 글래드스톤 오닐 1936년 수상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연극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 탓에 오닐은 호텔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호텔방, 열차, 무대 뒤에서 보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1년간 다니다 중퇴한 후, 그가 뒤에 진정한 교육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 '인생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며, 뉴욕 시의 선창에서 부랑자생활을 했고,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했으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16년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조용한 어촌에서 극작가로 등단했는데,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포함한 작품으로 첫 공연을 함으로써 오닐의 뉴욕 데뷔가 이루어졌다. 1920년 그의 첫 장편극 '지평선 너머'를 공연했고, '밤으로의 긴 여로' 등으로 모두 4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루이지 피란델로 1934년 수상    

 

이탈리아의 극작가·소설가·단편작가.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 인물’이라는 희곡에서 극중극을 창안하였고 193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딸 안토니에타 포르툴라노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1903년 유황 광산이 폐쇄된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경제적 재난으로 말미암아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던 아내는 끝내 요양원에 수용되고 마는데, 이때의 고통은 그가 작품에서 인간성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는 프로이트의 저서를 알기 전부터 이미 작품에서 심리학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가 사용한 심리학적 주제가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 작품은 ‘함정’, ‘내일, 월요일…’, ‘목소리’, ‘삶의 고통’ 등이다. 특히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은 프랑스 연극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1933년 수상    

 

롱펠로의 ‘히아와타’를 번역해 1903년 러시아 아카데미로부터 푸슈킨 상을 받았고 1909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푸슈킨 계열의 전통에 속하는 고답풍의 시를 썼으며 전위적인 모더니즘 경향을 거부했다. 주로 단편소설 작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가 특히 유명하다. 장편소설로는 ‘마을’, ‘미탸의 사랑’, 자전적 소설인 ‘아르세니예프의 생애’, ‘저주받은 날들’, ‘회상’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톨스토이와 체호프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존 골즈워디 1932년 수상   

 

옥스퍼드대학의 뉴칼리지와 해로 칼리지에서 수학한 후 1890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후 해양법 전문가가 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항해하다가 당시 상선의 항해사였던 작가 조지프 콘래드와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후 연대기적 소설 ‘포사이트가 이야기’와 다양한 희곡 작품을 썼는데, 그의 희곡은 대개 당대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05년 그는 사촌 A. J. 골즈워디의 이혼한 아내인 에이다 피어슨과 결혼했다. 1967년 그의 연작소설이 BBC에 의해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만들어져 영국에서 인기를 얻었고 미국과 여러 나라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에릭 액셀 칼펠트 1931년 수상   

 

그의 작품에는 고향의 농부들에 대한 강한 유대감이 드러나는데, 그가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스러져가는 지방문화를 위해서만 썼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6권의 시집으로 ‘광야와 사랑의 노래’, ‘프리돌린의 노래’, ‘프리돌린의 유쾌한 정원’, ‘플로라와 포모나’, ‘플로라와 벨로나’, 그리고 죽기 4년 전에 출판한 ‘가을의 호른’이 있다. 

  

   싱클레어 루이스 1930년 수상   

 

미국의 소설가·사회비평가. 미국의 자만심에 일격을 가하는 풍자소설을 써서 폭 넓은 인기를 얻었다. 1907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기자로 활동했으며 여러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메인 스트리트’를 계기로 문학적 명성을 얻었고, 1922년 속물적 미국인을 파헤친 ‘배빗’을 출간했다. 그 후 '배빗'이라는 이름은 행동 반경이 자기 마을에 국한된 낙천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중년의 사업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루이스는 말년을 거의 해외에서 보냈으며 1930년 이후 문학적 명성이 차츰 쇠퇴해갔다. 2번의 결혼은 모두 이혼으로 끝났고, 알코올 중독되는 등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토마스 만 1929년 수상    

 

1875년 북부 독일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4년 첫소설 「타락」을 『사회』지에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고 1901년 장편소설 『붓덴브로트 일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히틀러 정권 하의 독일을 거부하고 망명을 시작하여 미국에 정착했고 전후 미국사회에서 독일의 문화와 독일인의 입장을 변호했다. 토마스 만의 소설은 서유럽 문화의 불안정성과 붕괴의 위협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을 드러내는데, 그 문화의 정신적 업적에 대한 인정과 세심한 관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파국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고 실제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여 얻은 통찰력은 작품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그리드 운세트 1928년 수상   

 

중하류계층의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루는 등 여성의 운명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썼다. 3부작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는 독립심이 강한 여성이 매력적이지만 책임감 없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강하지만 겸손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24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였고 후기 소설에서는 그러한 영향이 엿보인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미국에 머물면서 전쟁으로 지친 고국과 망명정부에 관해 강연하고 글을 쓰면서 지냈다. 

 

    앙리 베르그송 1927년 수상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부유한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과정철학이라 부르는 철학사조를 최초로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며, 학문적·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한 문체의 대가였다. 1891년에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사촌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다. 1896년 그의 책 중 가장 어렵고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 '물질과 기억: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소론'을 출판했다. 베르그송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창조적 진화'는 생물학이 그의 사상에 끼친 영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과정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1915년 이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불멸의 40' 회원이 되었다. 

 

    그라치아 델레다 1926년 수상   

 

유혹과 죄악이 소박한 인간들에게 미치는 비극적 영향을 다룬 작품을 주로 썼다. ‘이혼 후’, 동생의 신부와 사랑에 빠진 전과자의 이야기를 다룬 ‘엘리아스 포르톨루’, 사생아 때문에 자살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체네레’, 아들을 신부로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지만 신부가 된 아들이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절망하는 어머니의 비극을 그린 ‘어머니’ 등 델레다는 거의 50여 편에 이르는 소설에서 인간의 정욕과 죄악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조지 버나드 쇼 1925년 수상     

 

아일랜드의 극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고급 희극을 통해 종교적 자각을 탐구했고 사회와 사회악의 결탁을 파헤쳤다. 쇼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피그말리온'으로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잔 다르크의 삶을 그린 '성녀 조앤'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으로 이어졌다. 도덕적 열정과 지적 갈등 및 논쟁이 담겨 있는 극을 발전시켰으며, 풍속희극을 재생시키고, 상징적 소극과 이단적인 극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그의 시대 이래로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형성했다. 

 

    라디슬로 레이몬트 1924년 수상   

 

젊은시절에 가게 점원, 수도원의 평수사, 철도공무원 등을 전전했다. 급속도로 확장되어가는 공업도시 우지를 배경으로 직물공장 소유주들의 생활과 심리를 묘사한 '약속의 땅'을 비롯, '만남', '희극 여배우' 등 자연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주로 썼다. 소설 '농민' 1 4계절 동안의 농민생활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에게 노벨 문학상(1924)을 안겨주었다. 그의 후기 작품은 유심론 운동에 대한 견해를 나타낸 '밤피르' 18세기말 폴란드의 정치·사회 생활을 해석한 '1794'이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923년 수상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 활동했다. 1889년 열정적이고 화려한 여인 모드 곤을 만나 사랑하였는데, 그는 이를 두고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1891년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고,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더블린에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그런 활동은 절정에 다다랐으나, 자긍심이 강했던 예이츠는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다.19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저서로 『오이진의 방랑』 (1889), 『시집』 (1895), 『일곱 개의 숲속에서』 (1904) 등이 있다. 1920년대에는 아일랜드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쟈싱토 베나벤테 1922년 수상   

 

스페인의 극작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기초를 둔 가장 유명한 작품인 '타산적인 이해', '사악한 선행자들', 스페인과 남·북 아메리카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근친상간의 주제를 다룬 지방 비극인 '정열의 꽃', 자신이 아끼는 작품 '주인 마님' 150편이 넘는 많은 작품을 썼다. 스페인 내란 기간에는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에 살았으며 한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1941 '믿을 수 없는 자들'로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아나톨 프랑스 1921년 수상   

 

서적상의 아들로서 그는 일생을 책과 더불어 보냈다. 초기시들은 고전주의 전통의 고답파적 부흥에 영향을 받았으며 관념적 회의주의기 초기 소설들에 나타나 있다. 1877년 마리 발레리 게랭 드 소빌과 결혼하고 1893년 이혼했으며 1888년에 두 번째 부인 아르망 드 카야베를 만났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여 창녀가 성녀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타이스', 피렌체를 무대로 한 당대의 연애소설 '붉은 백합'을 썼다. 풍자적이고 회의적이며 세련된 비평으로 당대 프랑스의 이상적인 문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넛 피너센 함순 1920년 수상   

 

노르웨이의 소설가·극작가·시인. 농부 출신으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로포텐 섬에서 보냈고 구두공의 도제, 임시 노동자, 농장 일꾼 등을 전전했다. 그의 첫번째 출판물은 소설 '굶주림'으로, 노르웨이의 한 굶주린 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신선한 관점과 자극적·서정적인 문체는 유럽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지의 성장'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을 표현했다. 니체나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은 맹렬한 개인주의적 메시지는 끝까지 현대 서양 문명에 대한 반감을 유지했고, 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반역자로 수감되었지만 나이 때문에 감형되었다. 

  

   칼 슈피텔러 1919년 수상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8년간 가정교사로 있다가 귀국 후 신화적 서사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썼다. 그후 몇 년 동안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신문·잡지에 기고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시기에 폭넓은 문학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2번째 작품, '올림푸스의 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첫 작품을 수정하는 데 몰두하여, 초판보다 더 짜임새있는 구성을 보여주면서 '올림푸스의 봄'처럼 운을 맞춘 2행연구 형태로 된 '고통을 견디는 프로메테우스'를 발표했다. 

 

    칼 오돌프 기엘레루프 1917년 수상   

 

덴마크의 시인·소설가. 목사의 아들로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다윈주의와, 비평가 게오르크 브란데스의 새로운 급진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게르만의 도제'에서는 독일 이상주의 철학과 낭만주의를 거쳐 신중하게 종교를 찾아 되돌아가는 길을 보여주었다. 당대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부르주아지의 편협함을 희화시키려고 한 작가로, 1917년 같은 시기에 활동한 덴마크의 작가 헨리크 폰토피단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헨릭 폰토피단 1917년 수상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작품 전반에 걸쳐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는데, 말년의 작품에는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의 소설은 장편·단편을 망라해 작가 자신이 속했던 국가와 시대에 대해 포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881년 첫 단편집 'Stkkede Vinger'를 출판한 이후, 1900년까지 코펜하겐의 여러 신문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거나 자신의 작품을 쓰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객관적이고 초연한 서사체로 덴마크인들의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 면모를 다각도로 담아냈다. 

 

    베르너 폰 헤이덴스탐 1916년 수상   

 

스웨덴의 시인·산문작가. 스웨덴의 자연주의 운동에 반발하여 환상, 아름다움, 국민적 주제 등을 다루는 문학의 부흥을 주장했다. 첫번째 시집 '성지순례와 방황의 세월'은 여러 남쪽 나라의 우화와 상당 부분의 동양 철학이 수록된 작품으로, 스웨덴 대중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수필 '르네상스'에서 처음으로 스웨덴의 단명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운동에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새로운 스웨덴 문학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2권의 시집을 냈다. 

 

    로망 롤랑 1915년 수상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중 하나이다. 그의 삶과 글은 당대의 사회와 정치 및 정신세계에 일어난 주요사건들, 즉 프랑스 군부의 반유대주의를 폭로한 드레퓌스 사건, 평화주의, 공산주의, 파시즘에 대한 투쟁, 세계평화 추구 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04~12년까지 잡지에 '장 크리스토프'를 발표했고,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14년 스위스로 가서, 1937년 프랑스로 귀국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베토벤의 생애', '미켈란젤로의 생애', '톨스토이의 생애' 등 천재들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영웅에 대한 그의 숭배와 열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래빈드라나트 타고르 1913년 수상    

 

인도의 시인·사상가·교육자.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고,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았다. 1913 '기탄잘리'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게르하트 하우프트만 1912년 수상    

 

독일의 극작가·시인·소설가. 호텔의 소유주의 아들로 태어나, 조각, 과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독일 자연주의를 정립했으나 후기 희곡에서는 자연주의 원칙들을 포기하고 신비적 종교성 및 신화적 상징주의를 보여주았다. 하우프트만의 극작활동에서 마지막 단계는 '아트리덴 4부작'에서 정점을 이루는데, 4부작은 비극적 그리스 신화를 통해 하우프트만 시대의 잔인성에 대한 공포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회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 1911년 수상    

 

벨기에의 상징파 시인, 극작가. 그의 작품 중 파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상징주의극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드뷔시의 섬세한 음악(1902)에 실려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밖에도 역사극 ‘모나 바나’를 비롯해 많은 희곡을 썼다. 또한 뛰어난 산문작가로서 철학적 염세주의와 자연계에 대한 관심을 뚜렷하게 드러낸 그의 저서들은 1930년경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폴 요한 루디빅 하이제 1910년 수상   

 

전통주의자들의 모임인 뮌헨 학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리스어·로마어를 공부했고, 연구보조금을 받아 1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후, 시인 에마누엘 가이벨과 더불어 뮌헨 작가단의 대표가 되어 전통적 예술 가치관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낭만주의적 문체를 개발했다. ‘라라비아타’ 등의 단편소설을 써서 성공을 거두었고, 자코모 레오파르디 등 이탈리아 시인의 작품을 번역했다. 

 

    셀마 라게를뢰프 1909년 수상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스웨덴 작가. 설화나 영웅담에 기초한 소설을 주로 썼다. 1885년에 란스크로나에서 교사로 일했고,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인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를 썼다. 서정적 문체에 비장감이 넘치는 이 소설은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시칠리아에 관한 사회주의적 소설인 ‘반() 그리스도의 기적’과 ‘지주(地主) 이야기’를 출간했다. 이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한해 겨울을 보내던(1899~1900) 중 영감을 얻은 ‘예루살렘’으로 스웨덴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 1908년 수상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1874년 예나대학교의 철학교수로 1920년까지 재직했다. 오이켄은 철학의 초점을 인간의 실제경험에 맞추고, 정신생활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실천적 노력에는 특히 의지와 직관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데, 그는 영혼 덕분에 인간이 모든 다른 자연세계와 구별되고 영혼은 결코 자연과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개인과 사회’, ‘사회주의와 그 생활형태’에 잘 나타나 있다. 

 

    루드야드 키플링 1907년 수상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 인도와 미얀마의 영국 군인들을 다룬 이야기·시·동화 등으로 유명하다. 6세 때부터 영국 사우스시의 한 가정에 양자로 맡겨져 5년 동안 생활했는데, 그때의 공포는 ‘음매 음매, 검은 양’이라는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다. 1882년 인도로 돌아가 7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어린시절부터 관심과 애정을 느꼈던 인도 본국인들의 다양한 삶을 관찰했다. 1887~89년에 된 단편집 6권을 펴내면서, 당대 최고의 산문작가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후 ‘킴’, ‘정글북’ 등을 출판했다. 키플링은 제국주의를 신봉한 작가로, 백인이 미개한 세계의 야만적인 원주민들에게 유럽 문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사상은 당대의 자유주의적인 사고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점점 고립되었다. 영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인 메리트 훈장을 2차례나 거절했으며, 1895년 계관시인 지위가 주어질 경우 거절할 뜻을 비추었다고 전해진다. 

  

   지오수에 카르두치 1906년 수상   

 

이탈리아의 시인. 공화당원인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피사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60년에 볼로냐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문학교수가 되어 40여 년간 강의했다. 1890년에 종신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국민시인으로 존경 받았다. 그의 시인으로서 힘과 공화당원으로서의 능력,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적대감은 ‘악마찬가’와 ‘단장격과 장단격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0년대의 ‘새로운 서정시’, ‘야만스러운 송시’에는 어린시절의 추억들, 외아들을 잃은 슬픔, 고대문명에 대한 이교도적 행복 등을 소재로 한 카르두치의 최고 작품이 실려 있다. 

 

    헨릭 시엔키에비츠 1905년 수상    

 

폴란드의 소설가.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문학·역사·철학을 공부했으나 1871년 중퇴했다. 1869년부터 실증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비평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1872년 첫 장편소설인 ‘헛되이’를, 1875년 첫 단편소설인 ‘늙은 하인’을 발표했다. ‘가제타 폴스카’의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을 여행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폴란드에 돌아온 뒤 많은 단편소설을 출판해 성공을 거두었다. 1882~87년 일간지 ‘수오보’의 공동편집자로 일했고 1883년부터 3부작 역사소설을 ‘수오보’지에 실었다. 1900년에는 작가생활 30주년 기념으로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키엘체 근처 오블레고레크의 조그만 땅을 받아 1914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차 세계대전중 폴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폴란드의 전쟁희생자들을 위해 구제활동을 폈다. 

 

    프레데릭 미스트랄 1904년 수상   

 

19세기 프로방스 어문학의 부흥을 주도했고, 1904년 문학과 언어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로방스 지방의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고, 1851년에 엑상프로방스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다. 일찍부터 프로방스 지방의 생활과 언어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 1854년에 프로방스어와 관습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인 '펠리브리주'를 창설했고, 나중에는 범위를 남부 프랑스 즉 '오크어의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 미스트랄은 '오크어'를 문학으로 되살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2권으로 된 오크어 학술사전 ‘펠리브리주의 보석’을 20년의 세월 끝에 완성했고, 아를에 프로방스 민속박물관을 세운 그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호세 에체가라이 이 에이자기레 1904년 수상   

 

스페인의 수학자·정치가·극작가. 초기에 수학교수로 일했고, 1874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스페인 은행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 작품은 거의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나 헨리크 입센과 그밖의 극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후기에는 명제극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허구성, 상황의 비진실성, 제어되지 않은 과시적 문체 등으로 인해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스페인 연극계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칼 손잡이’, ‘죽음의 한복판에서’, ‘미치광이 신’ 등이 있다. 

 

    비욘스제른 비외른손 1903년 수상   

 

헨리크 입센, 알렉산더 헬란, 요나스 리와 더불어 19세기 노르웨이 문학의 '4대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가 쓴 시 ‘예, 우리는 이 땅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는 노르웨이 국가이기도 하다. 초기부터 명확하게 교훈적인 의도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노르웨이의 역사와 업적에 대해 국민적 자부심을 자극하고 이상을 제시하려 애썼다. 만년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세계 평화와 국가간의 화해를 위해 일했다. 그의 희곡은 유럽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테오도어 몸젠 1902년 수상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때의 공부가 장래 연구방향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평생에 걸쳐 ‘로마사’, ‘로마 헌법’, ‘로마 형법’을 완성한 뒤 세상을 떠났다. 

 

    셜리 프뤼돔 1901년 수상   

 

프랑스의 시인.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미학적 기준과 균형을 회복하고자 했던 고답파 운동의 지도자. 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했지만 눈병 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65년에는 불행했던 연애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하고 음울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후 개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출한 시를 단념하고, 고답파의 보다 더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 운문에서 철학적 개념을 표현한 것을 시에 적용했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의’와 ‘행복’인데, ‘행복’은 사랑과 지혜를 찾아 헤매는 파우스트의 탐험을 다루고 있다. 1881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01년 제1회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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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타 윤경재 원문보기 글쓴이 : 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