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셨나요?… 꼭대기에 있다는 것만 알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채(城砦)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탈환해야 한다고 늘 당신은 그러셨잖아요.”
스코틀랜드 태생인 A J 크로닌(1896〜1981)의 자전적 소설 ‘성채(1937)는 의과대학을 막 졸업한 신참내기 의사 앤드루 맨슨은 다른 곳보다 돈을 많이 주는 남 웨일즈의 벽촌으로 와 처음으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흐뭇하다. 오래된 관습이라고 옳은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성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과감하게 추진한다.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하수도의 배관을 폭파하기에 이른다. 그 업무를 맡고 있는 당국이 하수도의 배관을 고쳐줄 생각을 하지도 않는데다 절차와 시간을 따지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병에 걸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다정함과 의사로서의 뛰어난 실력은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학교 교사이자 평생의 반려자가 될 크리스틴 발로우를 만난다. 그리고 시니컬하지만 뛰어난 판단력과 실력을 가진 외과의사 데니또한 그곳에서 사귀게 된다. 그는 그곳을 떠나 에버라로라는 곳으로 옮겨가 의사생활을 계속한다. 전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의학계의 부조리한 모습과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그의 정의심을 불태우게 하고, 거침없는 그의 행동은 결국 그를 실직자로 만든다. 자신이 속한 위원회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뛰쳐나온 것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자 그는 이제 돈에 대해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 그전의 의사생활은 돈이 없어도 가난하고 소외된 병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았지만 지금의 그는 가정의 가장이 되어 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는 상류층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뛰어난 실력으로 그들의 병을 치료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돈이 맨슨을 변화시킨다. 돈 때문에 자신이 욕하던 약을 투여하는가 하면, 아프지도 않은 사람에게 돈 때문에 주사를 놔주기도 한다. 돈이 없는 환자는 돈을 가져와야지만 상대하기도 한다. 주변의 아는 의사끼리 환자를 마음대로 농락해서 요금을 분배하기까지 한다.
그의 부인인 크리스틴은 그러한 맨슨의 변화를 보며 예전의 알콩달콩하던 행복을 되찾고자 노력하지만 이미 맨슨은 돈의 유혹과 상류층의 휘황찬란한 늪에 빠져버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제도속에 순응하는 한 탐욕적인 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인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허영심은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예전의 '순수하고 이성적인'모습으로 돌아간다. 의료사고가 난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외과의사 아이보리는 의료사고를 내 사람을 죽이지만, 의사라는 권위로 그의 죽음을 무마시킨다. 그 사건으로 인해 맨슨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다시금 예전의 정열과 인간미를 되찾는다.
A J 크로닌(1896〜1981)의 자전적 소설 <성채>(1937)은 그의 다른 작품인 <천국의 열쇠>와 함께 초심찾기의 지침서로 읽을 수 있겠다. "오늘 네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성경의 한 귀절이 생각난다. 그분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순수한 무목적의 길을 가려던 바로 그 초심이 아닌가? 맨슨에게 초심을 일깨우는 존재는 사랑하는 아내다. 맨슨이 처음 의사의 길을 갈 때의 그 초심처럼, 관계의 초심, 일의 초심, 생의 초심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화두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면서 나는 나에게 주문한다, 초심을 잃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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