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친구란 내가 만나는 사람이자,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마틴 게이포드(김민아 옮김 )가 쓴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하우스- 아를에서 보낸 60일>에는 고흐와 고갱의 미술적 경향보다는 미술사에 획을 그은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흐와 고갱의 아를의 시간에 대한 마틴 게이프트의 시선은 시선에 관한 시선인 셈이다. 글 속에 고갱이 고흐를 회상하는 장면이 모두 노란색으로 묘사된다. 옮겨본다.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 고갱의 회고 (52-54쪽)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해가 뜰 때까지 카페 드 라 가르에 있었다. 날이 밝자 그는 노란색 벽과 녹색의 목조로 된 라마르틴 2번지로 갔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문을 열였다. 이 사건은 빈센트의 삶에 있어 가장 고무적이고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여섯 달 전쯤 '옐로하우스'를 임대하면서 그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그 집에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함께 살 동료를 간절히 원했다. 가장 이상적인 동료로 고갱이 가장 먼저 후보에 올랐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빈센트는 자신의 집에 대해 설명하면서 '혹시 고갱이 남쪽으로 올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고갱이 아를로 떠난 것을 안 이후로 빈센트는 고갱이 아를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속이 탔다. 고갱이 브르타뉴에 비해 아를이 별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북쪽 지방과는 달리 이곳의 풍경이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빈센트와 함께 머무는 대신 화를 내거나 조롱하며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빈센트의 긴장과 걱정이 극에 달했을 무렵 고갱이 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진정 그가 왔던 것이다.
고갱이 도착하기 전, 빈센트는 서로의 초상화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39-40쪽)
고갱 자화상 [레미제라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강하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고귀함과 부드러움을 감춘 장 발장과 같은 도둑의 얼굴. 발정기에 있는 동물들이 그렇듯 열정의 피가 얼굴을 감싸고 있으며, 눈은 풀무의 불처럼 빨갛다. 이는 우리 같은 화가들의 정신을 채우고 있는 용암과도 같은 영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 고갱의 편지 (42쪽)
고흐 [폴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 하버드 포그 미술관
빈센트의 자화상은 더욱 해석하기 어려웠다. 그 자화상에서 빈센트는 녹색 배경에 머리와 어깨만 그렸는데, 머리와 턱수염을 유난히 짧게 자른 모습이었다. 그가 그린 자화상 중에서 이 그림이 가장 기묘했다. 고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영원한 부처를 모시는 단순한 승려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빈센트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고요하고도 정숙한 명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려내려 했다. 그는 절대자의 가르침 아래 살아가는 영적인 집단에 속해 있었다. (42-45쪽)
고흐 [해바라기] 런던 내셔널 갤러리
1888년 10월 23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들은 많지만 고갱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사건은 빈센트의 그림들이었다. 당시 고갱만큼 빈센트의 놀라운 업적을 이해할 만한 좋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고갱만큼 빈센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 업적에 동화되거나 저항했던 사람도 없었다. (50쪽)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 고갱의 회고 (52-54쪽)
빈센트 고흐의 방
낮동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반 고흐는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 두 눈은 아직도 피곤하지만 머리 속에 새로운 그림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림의 대략적인 스케치를 동봉한다. 늘 그렇듯 30호 캔버스에, 이번에는 내 침실을 그린 그림이다."1888년 10월 16일 아를에서 쓴 편지다. 그가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로 만들고자 했던 노란집은 마침내 준비를 끝냈다. 그의 방은 '네모지고 커다란 가구들' 을 갖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이었고, 고갱의 방은 '커다란 노란색 해바라기'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얼마 뒤 반 고흐는 친구 고갱의 도착을 기다리게 되었고, 자신이 그의 내면뿐 아니라 그림 양식에도 끌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갱은 '더 남성적이고 더 단순한 ... 표현 양식을 추구' 하며, '점묘법이나 선영(線影, hachure,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해 좁고 평행하게 그어진 선:역자)들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서로 조화를 이루는 단색들만 사용' 한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을 그리면서 유독 색채의 구성에만 집착했다. 창백한 보랏빛의 벽, '신선한 버터처럼 노란' 의자들, 진홍색 담요와 파란색 세숫대야. "그림자나 미묘한 음영은 무시하고, 일본 판화처럼 환하고 명암이 없는 색조로 채색할 것이다." 반 고흐는 이런 식으로 퐁타벤에서 행해지고 있던 조형적 탐색에 나름대로 반응했다. 붓으로 거칠게 칠해진 색은 강렬하고, 전체적으로 보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공간은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고, 소실점을 향해 좁아지는 마룻바닥의 선은 가구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풍부한 원근법적 표현은 그 방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 덕분에 '쇠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단순성' 에 필적하고 있다. "단순화함으로써 사물들에 더 많은 스타일을 부여하고 있는 ... 색채" 는 "전체적으로 휴식이나 수면의 ...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마음의 상태나 상상력' 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가의 본질적인 역할', 즉 "위로 하기 위해 혹은 마음에 더 큰 위안을 주는 그림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
고흐 [고흐의 의자] 런던 내셔널 갤러리
"최근에 그린 두 점의 습작이 가장 이상하다고 할 수 있어. 30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린 그림들인데, 하나는 빨간 타일 위에 노란 나무 의자를 그린거고, 다른 하나는 붉은 벽과 녹색 바닥에 놓인 고갱의 팔걸이의자를 그린 것으로 그 의자 위에는 두 권의 소설책과 초가 놓여 있어. 이 그림들은 얇은 캔버스에 두꺼운 임파스토로 그린 것이지."
그는 오랫동안 가구를 그리려 했다. 채소나 과일을 그리는 작업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서양 미술의 전통이었지만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를 그리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226쪽)
거의 한 달간의 조화로운 공동 생활이 끝나고 빈센트과 고갱 사이에 새로운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고갱은 이 곳에 게속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테오에게 보낸 빈센트의 마지막 편지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항상 고갱과 친구로 남아 게속 일을 하기를 원해. 그리고 만약 그가 열대 지방에 작업실을 만들게 된다면 참으로 좋을 거야. 하지만 아마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 거야."
두 개의 의자 그림에는 더 많은 감정들이 숨겨져 있다. 즉 옐로하우스를 꾸미려는 빈센트의 아이디어와 감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것이었던 짚으로 된 의자는 빈센트가 옐로하우스에서 추구했던 성직자 같은 검소함을 드러내는 소박한 물건이었다. 물론 거칠고 소박한 것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몽티셀리의 그림과 토기처럼 파리 사람들이 감상할 줄 몰라 잃어버렸던 '자연의 것'에 대한 좋은 예가 되었다. (227-229쪽)
고흐 [고갱의 의자]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반면 고갱의 의자를 그린 그림은 주로 약한 곡선과 붉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 더욱 부드럽고 신비롭다. 빈센트의 의자를 그린 그림에는 스튜디오 바닥의 붉은색 테라코타 타일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갱의 의자 그림에는 표면 전체가 벽에 걸린 가스등의 반짝이는 반사로 가득하다.
이 두 그림을 극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차이점들이 있는데, 두 그림은 빈센트와 고갱이 작업을 했던 빛의 두 가지 다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두 그림은 하늘이 맑아 해가 빛나는 아를의 낮과 가스등을 켰던 스튜디오의 밤을 각기 나타내고 있다. 햇빛 아래에서 작업을 하는 것과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으며, 이는 빈센트와 고갱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타나내고 있다.
두 그림이 보여주듯 두 빛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차가운 분위기를, 다른 하나는 따뜻한 분위기를 풍긴다. 빛이 반사되는 방법과 방향도 모두 다르다. 또한 이는 이 두 작가가 자신의 캔버스와 자신의 앞에 있는 풍경이나 사물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화가에게 있어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이 두 그림에서 빈센트는 옐로하우스에서 열띤 농쟁의 대상이었던 두 가지 작업 방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빈센트의 의자 위에는 파이프와 담배가 놓여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을 재작업했던 것은 1월 후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 그는 위안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싹이 난 양파 한 상자를 그렸는데, 이는 자신의 새로운 그림에서 자라나기를 바랬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갱의 의자 위에는 두 권의 소설책과 양초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위안과 영감을 상징했다. 불이 켜진 양초는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옐로하우스 위층에서 꼭 필요했으며, 책들은 영적이며 지적인 빛을 주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두 권의 책은 노란색 카버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 책들이 모두 폴로베르, 공쿠르 형제, 졸라와 도데 같은 현대 프랑스 작가의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 두 의자는 그림을 그리는 두 가지 상반된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즉흥적이며 실제를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상과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전자는 빈센트에게, 후자는 고갱에게 더 적합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두 작가는 이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옐로하우스에서 이 두가지 방법은 밤과 낮처럼 서로 상호보완적이었다. 스튜디오의 윗사람이었던 고갱에게 어울리도록 고갱의 의자가 더 편안했다. 모델들이 포즈를 취할 때 앉았던 의자도 고갱의 의자였다. 소박하고 단순한 직사각형의 의자는 빈센트의 것이었다. (229-232쪽)
- 마틴 게이포드 지음 ; 김민아 옮김 , <고흐, 고갱 그리고 옐로하우스- 아를에서 보낸 60일>, 인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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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노란 나무 의자에 고갱을 앉혀본다, 혹은 고갱의 의자에 고흐를 앉혀본다. 특히 고갱의 의자에 앉은 고흐를 상상하는 것은 낯설다. 또한 고흐의 의자에 앉아 있는 고갱도 낯설다. 그들 각자의 의자가 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같이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각자 뛰어난 두 사람, 같은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고,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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