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찰스 C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을 읽기 전에

나뭇잎숨결 2008. 11. 20. 06:46

 

 

찰스 C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새물결>을 읽기전에

 




"과학이 더 이상 순수한 지적 추구가 아니라는 점 - 과학이 순수하게 지적으로 추구된 적이 있었다는 말은 신화일 뿐이다 - 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과학의 영향을 교육, 경제, 정치, 외교, 전쟁 등에 기여한 면에서만 한정시켜 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과학의 역할은 전문적인 관심사와 공적인 관심사의 교차점 위에서, 또는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의 교차점 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과학 지식의 골간이 정치나 사회 구조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과학이 얼마간 정치적·사회적 산물로서의 모습을 띠는 것은 과학의 본성에 본질적인 측면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측면이다. "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과학기술상의 발견과 발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첨단', '새로운' 이라는 말에 오히려 무감각할지도 모르고, 우리의 일상을 굉장히 과학적으로 조직하고 있다는 걸 당연시 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자신의 하루를 조용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과학적으로 살아가지 않음은 금방 알 수 있다. 아침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고 호흡을 가다듬는가 하면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을 기피하면서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기피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런 비과학적 태도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는 불가해한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객관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되는 주관의 영역인지는 딱 부러지게 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승인해야 할 최소한의 객관은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없다면 사회의 기본과 학문의 토대 자체가 없어진다. 그러한 객관성의 영역으로 들 수 있는 건 우선 법의 영역이다. 개인의 행위는 개인의 의지에 기인하며,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이 법의 바탕에 놓여 있다. 만약 어떤 살인자가 법정에 나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인을 했으니 오로지 내 책임만은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어떨까? 그 힘을 붙잡아 벌을 줘야 할까? '부모가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해도, 그리고 그것이 거의 틀림없어 보여도 부모를 잡아들일 수는 없다. 심정적 동조가 법집행의 객관성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


 우리의 일상이 오로지 과학적인 것으로만 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과학적인 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망가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초월적인 힘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과학의 몫이었다. <<객관성의 칼날>>은 근대 이후의 과학이 이러한 일을 어떻게 해왔고,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상세하게 다룬 역사책이다.


 저자 길리스피가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는 아주 간명하다. "과학이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무지, 미신, 독단, 약탈에 맞서는 유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물론 난해한 용어로 포장된 과학 이론이 살륙의 도구로 전락한 사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발달된 과학기술이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주범 중의 하나임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을 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지은이의 말처럼 우리는 "비록 지식이 위험하다 할지라도 무지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과학에 수반된 악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의 후퇴나 퇴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과학을 보다 잘 이끌어 가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기반을 두고 저자는 근대 이후의 과학의 역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시행착오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책의 시작은 근대 과학의 새벽을 연 갈릴레오 갈릴레이이고 현대의 물리학에 대한 설명이 끝을 맺는다. 각각의 학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학설을 형성해 낸 과학자들의 성향, 연구 태도, 시대 상황 등을 적절히 조화시켜 서술해 나가고 있다. 이 서술이 책 제목처럼 철저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판단은 흠이 아니라 저자를 탁월한 '역사가'이게 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고 특정한 관점에 근거한 사실의 재구축이다.
 과학은 대상 세계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성을 정립하고자 하는 이성적 시도이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과학도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어떤 학자는 '과학자의 논문은 샤만의 주술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객관성 부인은 생물학의 영역에서 강하게 주장되는 경향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이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론과 창조론이 서로 대립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창조론은 종교적 영역에서 제시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고 진화론은 생물'과학'에서 제시된 이론이다. 창조론은 검증의 가능성도 반증의 가능성도 없으며,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결단만을 요구할 뿐이지만 진화론은 언제든지 반박 가능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둘이 대립된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진화론을 과학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진화가 덜 된 인종이 있고, 더 된 인종이 있다고 하여 인종차별을 일삼는 이들은 아직도 세상에 많다. 이런 태도는 결국 근거없는 환상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는 일종의 신비주의, 형이상학, 낭만주의적 해석이고,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우리가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다. 우리의 恣意와는 무관한 어떤 것이 있어야만 사회시스템이 유지되고, 인물의 잘남이 아닌 구조의 튼튼함이 사회의 건전함을 지켜주는 힘이라는 것 -- 이것이 바로 사회적 객관성에 대한 자각이라면, 이는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 길리스피의 다음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햄릿>, 모나리자, B 단조 미사곡 등은 셰익스피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바흐가 없었더라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과학은 이와 다른데, 가장 위대한 과학조차도 그러하다. 뉴턴이 조산아로 태어났을 때 주위에서 예측했던 것처럼 곧 죽었다 할지라도, 행성들은 여전히 거리에 제곱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운동할 것이다... 하나의 과학이 만들어질 때에는 그것의 창조자의 낙인을 받게 되지만, 최초의 정식화에 포함된 개인적인 요소는 일단 이것이 그 창조자를 떠난 뒤에는 일상적인 과학 활동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과학의 개인적 속성은 매우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과학적 관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심인 것이다. 과학적 발견을 검증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그것이 과학이 되려면 말이다.
 

 

----------------------------------------------------------------------------------------------------------------------------------------------------------------------------------------


 

갈릴레이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서양 과학의 흐름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과학적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칼날’이라고 번역된 ‘에지(edge)’라는 단어는 칼날의 의미 외에 ‘경계’ ‘가장자리’라는 뜻도 지니는데 저자는 아마도 이 모든 의미를 함께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갈릴레이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한 이래 서양 과학의 발전 과정 전체를 ‘객관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세계가 설명, 이해되고 그 경계가 규정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문학과 역학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책은 하비의 피 순환이론, 베이컨과 실험과학, 데카르트와 기계적 철학, 뉴턴에 의한 종합, 계몽사조와 과학, 라부아지에의 연소이론과 근대화학, 자연사, 진화이론, 열역학, 전자기학, 상대성이론을 다루면서 이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자, 사상가가 등장하고 수많은 과학 텍스트가 분석된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서양 과학의 역사상 수많은 과학자와 그들 저서의 내용 및 핵심 구절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 책은 학부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이 얻어지는 과정을 갈릴레이가 남긴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에서부터, 저자는 직접 텍스트의 분석을 바탕으로 갈릴레이의 사고과정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정이 천재적 영리함과 성공만이 아니라 오해와 좌절, 실패가 포함되는 긴 우회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결국은 운동에 대한 이해가 갈릴레이 같은 사람이 빼어든 ‘객관성의 칼날’을 통해 근대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객관성이 승리하는 단순하고 논리적인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갈릴레이 개인의 상황이나 당시 과학자와 그들이 살던 사회의 여러 여건이 결합되어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었음을 보인 것이다.

 

그 이후의 장에서도 근대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했던 변화가 진행된 실제 과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길리스피의 논의가 이어진다. 당연히 직접 그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가 남긴 텍스트가 분석되는데 그들이 단순히 책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 근대과학의 핵심적 이론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그 주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사상적 배경이 설명된다. 서양 근대과학의 역사상 중요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일까에 대한,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가 어떤 개인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사색이 개진되고, 독자는 저자와 함께 그 같은 사색을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딱딱한 과학 텍스트에 담긴 과학자의 생각의 흐름과 그것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니는 의미를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조망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근대과학 역사상의 중요한 변화가 그 어느 하나도 단순한 요인에 의해 한 가지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영식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

 

 

 

 

 

 

 

 

 

 

찰스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 - 권희정

 

 


지난해 인간 배아 복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세계는 매우 떠들썩했다. 이 경험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겨나는 윤리 문제와 사회적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바꾸어 놓았으나, 동시에 여러 가지 과제를 남겨 놓기도 했다. 생명 윤리 같은 철학적 논제나 핵 발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과학이 풀기에는 버거운 문제다.

미국의 과학사를 연 찰스 길리스피(Charles Coulston Gillispie, 1918~ )는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화학을, 하버드 대학교에서 19세기 영국의 과학 사상을 공부한 과학자이자 역사학자다. 그는 1947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머물며 과학사 과정을 개설해 이곳을 과학사 연구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1960년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로 발표된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은 갈릴레오(G. Galileo, 1564~1642)를 시작으로, 뉴턴(I. Newton, 1642~1727), 라부아지에(A. Lavoisier, 1743~1794), 다윈(C. R. Darwin, 1809~1882),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 등 대표적인 근대 과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근대 과학사를 요약하거나 훑는 데 목적을 둔 것은 아니다. 그는 갈릴레오에서 태동한 근대 과학의 발전 과정 전체를 ‘객관성’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자연 세계를 설명하고 그 경계가 규정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실증주의에 근거한 ‘분석적 과학 철학’(자연 과학의 이론과 그 이론 속에 등장하는 용어를 분석함으로써 과학 이론을 분명하게 하려는 철학적 활동)이 유행하고 있었다. 분석적 과학 철학은 엄밀한 과학성을 수립하기 위해서 과학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 언어와 논리의 구조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언어나 논리에 숨어있는 가치의 문제들을 배제하고 과학적 사실에 적합한 언어와 논리의 형식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모든 자연현상과 우리의 경험을 수학적 공식과 같은 논리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논리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들은 비과학적 문제로 배제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형식적인 논리 구조에 치중한 분석적 과학 철학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었고, 과학적 지식을 형성하는 사회와 역사의 역할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이에 따라 과학을 사회 제도나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는 외적인 접근 방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에 담긴 이론적 객관성보다는 과학적 지식이 지닌 정치적인 함의(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속으로 담고 있는 의미)나 과학자 집단의 정치적 의도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여, 과학사는 어디까지나 과학의 사상과 개념의 내적 구조만을 다뤄야 한다(내적인 접근 방식)는 비판적 견해도 이어졌다.

이 책은 이러한 논쟁에 대한 답변으로 저술된 것이다. 길리스피는 진리만을 탐구하는 분석적 과학 철학의 형식주의와, 과학의 정치·사회적 배경만을 강조하는 사회 구성주의의 양극단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객관성’이란 기준점을 제시했다. 과학자의 주관성을 강조하면서도 과학이 독립적 이론임을 잊지 않았으며, 과학이 독립된 분야임을 인정하면서도 전체 지성사의 한 부분임을 강조했다.

길리스피가 뉴턴과 계몽주의(16세기 말에서 18세기 후반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구시대의 묵은 사상을 타파하려던 혁신적 사상 운동)를 연결하여 분석하는 부분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길리스피스는 뉴턴이 자연현상을 양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계량과학으로서의 물리학과, 수량의 언어로서의 수학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수립해 근대 과학을 종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뉴턴이 과학적 성과가 근대 사회의 사상적 추동력이었던 계몽주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추적했다.

뉴턴이 자연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화, 질서, 그 질서에 적합한 사물과 세계다. 그는 객관적 사실로 우주 법칙을 발견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현상을 신의 의지로 이해했던 중세적 자연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을 통해서 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자연현상 원리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과제가 된 것이다. 이를 사회와 역사에 적용하면 사회나 역사도 신의 의지에 따라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므로, 신을 숭배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역사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계몽 사상가들은 뉴턴의 원리를 무기로 삼아 이성에 근거한 조화롭고 합리적인 자연상을 마음속에 그리며 사회와 문화를 개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서구 전체가신의 섭리로 운영되는 중세사회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운영되는 근대사회로 이행할 수 있었다.

자연이 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대상으로 규정되자, 자연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인간도 자연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신의 영역에서 해방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이성(정신)을 다시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합리주의자들은 뉴턴의 자연관을 이어받아 경험주의적인 심리학을 통하여 합리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통일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다시 엄밀한 과학성을 추구하는 실증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과 자유와 같은 문제를 기계적인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은 전자계산기처럼 계산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합리주의자들이 자연현상을 사진처럼 찍어서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강조했다면,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인간의 의지대로 구성해가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 실증주의를 거치면서 과학은 주관성을 배제하는 객관적 학문의 세계가 되었다. 과학에서는 합리주의자들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밀려난 낭만주의는 주관적 내면세계를 강조하는 예술에서 꽃을 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인간을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로 보았던 낭만주의의 주장은 이후 생물학 연구에 큰 자극이 되었다라고 길리스피는 평가한다.

길리스피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❶이 단순한 자연의 법칙의 발견이 아니라, 동시대와 그 이후 학문의 발전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기여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처럼 과학사는 과학자 개인의 위대한 발견이 전체 사회와 지식에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정보화 혁명을 거치면서 산업과 사회, 과학과 산업, 과학과 기술의 결합이 중요해진 만큼 그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황우석 교수 팀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각광을 받자, 과학과 기술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은 소위 ‘젓가락 기술’은 과학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기술공학이 강조되는 오늘날에는 순수 과학만을 과학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학적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입장에 따라 다양하다. 결국 이 문제는 전문적인 과학사가나 과학철학자들을 계속 괴롭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과학은 전문가인 과학자들에게 신중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대원칙이 중요할 뿐 아니라, 대중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우리가 과학사를 이해하려 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자들의 영웅담을 듣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과학자들의 독창적인 발견이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과 정보화 시대의 올바른 과학 기술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봄직하다.

--------- 자료를 나누신 분들께 감사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과 연결하여 읽으면 좋을 듯 합니다.